1960년대 상미초등학교 다닐때 학교 뒷편쪽으로 닥나무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개발로 인하여 모두 사라졌을수도...
1958년도 개교한 사실도 오늘에서야 알게되어었네요.
"미천면지"에 나오는 글입니다.
자연의 섭리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런 인간의 삶이라고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생활의 주기가 반드시 자연의 이치와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다. 특히 날씨가 그렇다.
인간이 비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 하늘이 반드시 비를 내려주는 것은 아니며,
필요한 시간과 장소에 반드시 태양이 뜨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하늘에 기대어 오로지 날씨에 기대어 농사를 지으며 삶을 영위했던 선조들의 삶은 얼마나 긴 기다림었을까.
미천면 상미리 산골짜기에 자리잡은 기전마을도 산간마을이 대부분 그렇듯 농토의 대부분이 천수답이다.
저수지나 강으로부터 물을 끌어대거나 지하수를 이용할 수 있는 시설 없이,
벼농사에 필요한 물을 빗물에만 의존하는 천수답 말이다.
그래서 논농사 보다는 밭농사가 발달했고, 그런 이유로 마을은 ‘텃밭골’로 불리었다.
지금은 마을 안팎이 밤나무로 빼곡하지만, 70년대엔 닥나무가 많이 자랐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닥나무 껍질을 벗겨 삶아 튼실한 문종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닥종이’였다.
당시 닥종이는 기전마을의 특산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70년대 이후 외국산 폴프제지의 수입이 급격히 늘면서 기전의 재래식 종이는 설자리를 잃었고,
결국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뒤 주민들은 미천면 일대에 조성되던 밤나무단지사업에 따라 닥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그 자리에 다시 밤나무를 심었다.
닥종이를 특산물로 내놓을 만큼 관련 기술이 뛰어났던 지역에,
지금은 단 한 그루의 닥나무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 안타깝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원래는 60호가 넘던 마을이 이제는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어귀에 세워져 있는 효열비와 기적비는 나름의 위풍당당함을 지니고 있다.
이 비석들은 마을에서 대성을 이루고 있던 함양 오씨 가문에서 세운 것으로,
특히 1989년에 세운 충훈부도사 함양 오공응복 기적비는 성균관 전례위원장 강정희가 비문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오응복은 조선 개화기때의 사람으로 약관의 나이에 무과에 합격해 선략장군 충무위 부사용에 임명된 뒤
무예연마와 병법연구를 하다가 고종 24년에 봉직랑 충훈부도사로 배명돼 활동했다.
그 뒤 고향인 기전마을로 낙향해 교화에 힘쓰다가 융희 3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의미를 지닌 비석이라 해도 주민들이 떠나가는 마을이고 보니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958년에 개교한 상미국민학교가 80년대말 취학아동이 급격하게 줄자 상미분교로 격하되었다가
지난 1998년 폐교가 된 것만 보아도, 마을이 점점 쇠락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도서출판 사람과 나무 - http://www.man-tree.co.kr/bbs/board.php?bo_table=02_4&wr_id=13
기전(基田) : 1974년 1월 1일 상미리에서 분동되었다.
터밭골 : 기전동, 하미리 대곡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너삼들 : 아랫담 서쪽에 있는 들이다.
가시골 : 기전에서 월암리 및 어옥리로 가는 고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