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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ea - 엘리트 글쓰기 논술 교실 원문보기 글쓴이: 김동석
자연과 우주에는 산천초목과 수 많은 별들이 있어 각각의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모든 존재들은 어떻게 그 존재성을 인정 받게 되는 것 일가? 이들이 눈에 띄고 손으로 만져 질 수 있기 때문에 '존재' 로 인정되는 반면에 시각이나 촉각으로 감지될 수 없는 것은 '존재' 라 할 수 없다고 한다면 맞는 말일가? 시각과 촉각은 인간의 5감중에 하나로서 이들이 '존재'를 가름하는 기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의적이고 인본위적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존재' 와 '비존재'를 구분 짓는 객관적인 기준은 과연 무엇일가? 이러한 경우 나는 '질량' 이야말로 '존재'와 '비존재'를 구분짓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라 하게 된다. '질량'이 있으면 '존재'가 되는 반면에 지닌 '질량'이 없으면 그것은 '존재'로서의 근거를 상실한 '비존재'일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의 절대 기준이 되는 '질량'이란 또한 무엇일가?
질량이란 무엇인가? 과학적으로나 생활용어로서 이미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을 것만 같은 '질량' 이지만 놀라웁게도 그 정의는 일관된 통일성을 보이지 못하고 갖가지로 기술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된다. 이제 그중 몇 가지를 옮겨 보기로 하자. "질량이란 무엇인가?" '질량이란 어떤 물체에 포함되어있는 물질의 양이다(동아 세계대 백과사전)' '질량이란 물체의 역학적 성질을 결정하는 물체 특유의 양이다(현대과학용어사전)' '물체의 관성의 크기를 나타내는 양이다(학원세계대백과사전)' 물체의 중력적,관성적 성격의 정도이다(물리학백과사전)' '운동량 보존의 법칙,질량과 에너지 보존법칙등과 같은 역학법칙들에서 물질이 각 법칙에 작용하는 역할을 수치적으로 나타낸 것이다(물리학사전)'. 이 외에도 다양한 정의들이 있지만 더 이상은 옮기지 않기로 하겠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질량' 의 정의가 통일되지 못하고 갖가지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가? 나는 그 이유에 대해 '질량'에 관한 본질 파악이 그 만큼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대과학이 눈앞에 '질량'을 잘 활용하고는 있지만 그 본질 파악에는 미비 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물리적인 현상이란 질량(질점)의 운동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현대과학은 '질량' 의 활용에만 급급 할뿐 '질량'의 본질적인 것에 관해서는 깊은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많은 사람들이'운동'의 주체로서 물체나 물질을 말하는 것 같은데 물체나 물질은 이를 수학적으로 나타낼 수 없다는 데에 유념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자연과 우주는 수학적으로 되어 있고 수학을 통해서 만이 보다 잘 기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수학으로 나타낼 수 있는 '운동'의 유일한 주체는 '질량'이고 '질량' 밖에는 없다. 우리는 때로 시간에 관해서는 '시간이란 무엇인가?' 란 질문을 던져보기도 하지만 '질량'에 관해서는 이러한 질문조차 던지려 하지 않는다. '질량'은 항시 가시적인 물체에 동반해서 가시적인 느낌을 주어왔기 때문에 '질량'에 관해서는 이미 다 파악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이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론에서 질량을 왜곡하지는 않았다. 그는 여기에서 아예 질량을 다루지 않음으로서 질량변환식과 같은 것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결정적인 결함으로서 특수상대론이 수수께끼를 양산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해 보시라 모든 물상은 질량.속도.시간.공간이 함께 동시에 다루어 지는 상황에서만 바른 물상을 예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론은 가장 중요한 질량(m)과 속도(v) 개념은 누락 시킨채 시간(t)과 공간(L)변환식 만을 다루었으니 처음부터 전반적인 물상을 결여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것들로부터 물리적인 결론을 얻고 져 했으니 수수께끼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질량과 속도(운동)는 자연계에 있어서 가장 선험적이고 본질적인 개념이요 존재인 반면에 시간과 공간은 이들에 의해 나타나는 후험적인 개념이요 후험적인 환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은 주연은 빠뜨리고 조연들의 역할 만으로 물리적인 결론을 맺고져 했으니 이상한 물리의 세계가 소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질량'에 관한한 아인슈타인의 두 번째 실수는 질량-에너지 등가식(E=mc²)을 유도한 다음에 맺은 그의 서술적인 결론이다. "그러므로 질량과 에너지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다만 같은 것에 대한 다른 표현일 뿐이다.물체의 질량은 일정한 것이 아니라 그 에너지 변화와 함께 변한다." 고 한 말 속에 들어 있다. 나는 아인슈타인의 이 말을 대할 때면 물리학의 대부 격인 그 조차도 질량과 에너지 개념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을 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에너지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질량과 속도로 이루어지는 운동에 관한 또 다른 정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운동량(P)이나 힘(F)에 관한 정의와 같이 에너지(E) 역시 운동에 관한 또 다른 차원의 정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량은 에너지의 구성요소로서 끝까지 남아야 할 지언정 그의 말과 같이 질량 자체가 변하여 에너지화 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질량이 변하여 에너지화 하였다면 에너지의 차원(dimension)인 [ML²/ T²] 중에서 질량 M이 없어진다는 것인데 이러한 에너지를 차원적으로 도저히 정의할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된다. 요컨데 에너지를 포함해서 어떠한 역학계를 불문하고 질량과 속도는 모든 역학계에 주역으로서 질량이 사라진다는 것은 역학계 자체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전제할 뿐이라 믿는다. 이렇게 볼 때에 아인슈타인은 '질량'을 다루었어야 할 특수 상대론 에서는 '질량'을 빠뜨린 반면에 다음 상황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질량을 다룸으로서 질량에 관한 한 두 번의 과오를 범했다고 생각된다.
위 식은 이미 잘 알려진 질량변환식으로서 그 물리적인 해석은 '질량 m₁인 질점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 자체질량은 커져간다'고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식은 아인슈타인이 유도한 식이 아니라 후일에 누군가에 의해 특수상대론을 원용해서 유도한 식이다. 이 식에 의할 때 작은 지구(m₁)이지만 빨리 달리기만 한 다면 자체 질량이 무한히 커져서 태양이라도 끌어 당길 수 있는 상황까지를 그려볼 수 있게 한다. 이것은 아무래도 상상의 나라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고 또 다른 수수께끼로 끌어들일 뿐이다. [관계론] 역시 위 식과 같은 꼴의 질량변환식을 유도한다. 그러나 그 유도과정은 전혀 다르고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물리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질점은 외력이 작용하는 상황에서만 운동이 시작되는데 이때에 이 질점이 지닌 질량은 외력에 대한 저항으로 작용케 된다. 이를 '관성저항'이라 하는데 질량변환식이 갖는 물리적인 의미란 외력에 대한 '관성저항'이 위 식과 같이 속도에 따라서 크게 작용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자체 질량의 증가와는 무관한 일로서 질점이 지닌 자체질량은 어느 경우에나 변하지 않고 일정한 채로 유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질량'이란 과연 무엇일가? '질량'과 관련해서 우선 떠 오르는 생각은 무게. 중량감 과 같은 느낌과 관련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무게나 중량은 지구상에서 중력에 의해 나타나는 효과로서 지구를 떠나 우주공간으로 나갔을 때는 전혀 느껴질 수 없을 것이다. 우주공간에서는 질점(질량)을 운동 또는 충돌시켜 봄으로서 만이 당시의 속도 관계로부터 질량을 산출하게 되고 이렇게 구한 질량을 '관성질량' 이라고 한다. 이는 지구를 벗어난 환경에서 '질량'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할 수 있지만 중력권 밖에 외계로 나가지 않는 한 이 또한 이론상의 방편에 그칠 뿐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질량에 관해서 물질이나 물체에 부수되는 관성적인 성격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질량이란 외형의 물질이나 물체 보다도 선험적인 존재. 선험적인 개념이란 것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하나의 가정상황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 가정상황이란 자연과 우주의 근본을 알아보기 위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을 한없이 잘게 부숴 보는 일이다. 인간의 지식이 알고 있는 한 모든 물질은 궁극적으로 전자.원자. 분자등 과 같은 극소입자로 되어 있고 이제 마지막 단계로서 이들 극소입자들 마져 입자로서의 구성력을 잃고 공간 속으로 사라지게 하였다면 이때에 각 입자들이 지녔던 질량은 어찌 되었을가? 비록 입자란 외형은 사라졌지만 이들이 지녔던 질량은 공간에 융해되어 편만한 질량으로 공간전반 속에 남게 될 것이다. 외형이란 하나도 없는 공간에 그래도 질량은 편만하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으로부터 우리는 '질량'은 외형을 띄는 물질이나 물체 보다도 선험적인 존재란 결론을 얻게 된다. 나는 앞에서 우주공간은 '자유공간'이 아니라 질량을 갖는 '질량공간'으로서 우주공간을 구성하는 최소단위 실체인 '참실'의 단위길이(미터) 질량은 m=0.737 263 735 1*10^-50 kg 으로서 우주공간 자체가 질량을 갖는 '또 하나의 존재 양식' 이란 말이 허구가 아님도 밝혔다. 그런데 이러한 시점에서도 '질량'을 정확하게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내가 새롭게 발견하는 '질량'이란 인력(중력)과 관성의 실체로서 외형의 물체나 물질 보다도 선헌적인 존재.선험적인 개념이다.인력과 관성은 질량의 크기에 비례하여 결정되며 인력은 정지 질량의, 관성은 운동질량의 개념에서 정의 된것이다. 그리고 모든 역학계란 질량의 운동계에 다름 아니다.
성경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본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신(the Spirit of God)이 그 위에 운행하시던 물이 먼저 있었다. 이 물은 앞으로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위해 쓰실 기본 소재로서 이 물이 오늘날의 H₂O 를 말하지 않는 것은 자명하다. 성경의 말씀은 비유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고 이러한 면에서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운행하시던 물이란 오늘날의 '질량'을 상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편만한 '질량'이란 마치 물과 같아서 그 안에 관성적인 성격을 내포하고는 있지만 움직임이 있기 까지는 그 성격이 들어 나지 않는다. 이제 질점 이란 마치 물이 얼어서 된 얼음 조각들과 같아서 각기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 움직이기 시작 함으로서 각각의 독립적인 관성계를 형성케 된다. '질량'은 우주창조 이전에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운행하시던 유일한 선험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은 이 한가지 소재만으로 자연과 우주의 만상을 이끌어 내신 지혜자요 전능자 이심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 신비로움을 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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