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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추석 연휴였지만 일찍부터 야구장에 나와 훈련을 하는 박용택을 만났다. 4게임 차로 선두자리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잠실 라이벌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가 있는 날이라 양 팀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야구선수한테 추석이라고 뭐 별거 있나요. 야구 해야죠.” 이날 경기를 제외하면 LG는 단 9경기(21일 기준)만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순위 유지가 중요한 시즌 막바지다. 하지만 최근 LG가 영 신통치 않다. 9월 팀 득점 순위는 최하위에 머물러있고, 박용택을 비롯한 선수들의 방망이가 식어버린 느낌이다. 우승을 위해선 체력 관리가 가장 중요한데, 그 부분이 가장 밀리고 있지 않느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솔직히 말하면 패넌트레이스가 거의 끝나가는 시즌 말에는 여러 가지로 지쳐있고, 잔부상도 따르는 등 몸 상태가 좋지는 않아요. 하지만 선수들 모두가 컨디션이 좋네, 나쁘네 하는 투정은 부리지 않아요. 이제 정말 중요한 건 순위 싸움이니까, 경기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거든요.” 그의 대답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진지함이 느껴졌다. 박용택은 입단 첫해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경험했다. 기적 같은 연승에 힘입어 진출한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이뤄 낸 값진 결과였다. 그해의 LG 트윈스는 정말 무서웠고, 신인이었던 박용택은 더 무서웠다. 아마 야구천재란 말을 그 시절에 썼더라면, 박용택을 두고 말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웃음) 김성근 감독님께서 저를 3번타자라는 중심 타순에 기용해주시면서 좀 더 주목을 받았던 것 같아요.” 과연 그럴까? 박용택은 반짝하는 신인이 아니었다. 프로 데뷔 첫 경기에서 안타를 치고 타점을 올렸다. 그다음 경기에선 권용관과 백투백 홈런을 때려내며 이틀 동안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했다. 그의 호쾌한 플레이를 칭찬하며 팬들은 ‘쿨가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프런트가 일을 정말 잘한 거죠. 마케팅의 승리예요. (웃음) 물론 제가 입단 첫해에 김성근 감독님을 만나서 생각한 것 이상으로 프로야구가 얼마나 혹독한지 많이 느끼고, 배웠고, 그렇게 야구를 했어요. 그렇다고 한들, 입단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인이 잘해봤자 얼마나 잘했겠어요. 그런 선수에게 팬들의 공모로 애칭을 지어준다는 게 정말 큰 영광이었죠. 그만큼 구단에서 저를 많이 신경 써준 거고 팬 분들로부터 정말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느꼈던 해였어요.” 그의 대답엔 겸손이 묻어있다. 김성근 감독은 엄하기로도 유명하지만, 남 앞에서 칭찬을 하지 않는 걸로도 유명하다. 그런 김 감독이 마무리캠프, 스프링캠프 때 양준혁, 김재현, 이병규를 불러놓고 ‘쟤(박용택) 잘 친다. 치는 것 좀 봐라’라고 말하며 신인이었던 박용택의 사기를 한껏 올려주기도 했다. “말은 그러셨는데 정작 시범 경기 때에는 한 번을 안 불러주시더라고요. 개막전도 마찬가지였고요. 시범 경기 한 달, 개막 9연전이 끝나고 나서야 1군에 합류할 수 있었어요.” 그의 말대로, 한껏 들떠있던 박용택은 2군 구장이 있는 구리에서 묵묵히 한 달을 보냈다. 캠프에도 합류하지 않았던 동료들이 부름을 받고 잠실에 갈 때에도 그에게 기회는 오지 않았다. “2군에서도 캠프 때랑 다를 게 없이 타격감이 좋았어요. 근데 계속 부름이 없으니까 ‘내가 뭘 잘못했나?’하는 생각마저 들더라고요. 이 악물고 독을 품고 했어요. ‘그래 내가 뭐 때문에 찍혔는진 모르겠지만, LG에서 천년만년 감독할 거 아닐 테니 나중에 다른 감독이 오면 날 무조건 기용할 수 있게 완벽한 선수가 되자’라고 다짐하면서 훈련했어요. 시즌 끝나고 알았는데 김성근 감독님은 제가 너무 들뜨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셨던 거라고 하더라고요. 잠시라도 그런 마음을 먹었던 것이 죄송스럽죠.” |
어찌 되었든 김성근 감독의 방법은 통했다. 박용택은 1군 합류 후 승승장구하며 그 해 112경기에 출전하여 108안타 9홈런 20도루 2할 8푼 8리의 타율로 신인 타자 전체1위의 기록을 일궈냈다. 프로 입단 첫해 이 정도의 실력을 보여주는 선수라면 그의 아마추어 시절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휘문고 시절의 박용택은 2학년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배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는 등 일찍이 야구천재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하지만 그는 프로가 아닌 고려대로의 진학을 택했다. “그 시절에는 야구 좀 한다 하면 대부분 대학교에 갔어요. 제 다음 학번인 99학번 후배들부터 조금씩 대학이 아닌 프로에 가는 선수가 생겼고요. 학교 1년 후배인 넥센 히어로즈의 (이)택근이랑도 가끔 얘기하는데 둘 다 대답은 같아요.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고려대를 갈 거라고요.” 고등학교 2학년 때 2번의 홈런을 쳐본 것 외에는 3년 내내 홈런 기록이 없던 그가 고려대에서 4번타자를 맡았다. 발 빠르고 어깨 좋은 외야수를 1번이 아닌 4번에 배치하면서 박용택의 야구 스타일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졸업을 앞둔 2001년 가을, 그는 추계리그 MVP로 선정되며 4번 타자로서 인정받게 된다. “아마 고교 졸업하고 바로 프로에 갔으면 이용규나 이종욱 선수 같은 전형적인 톱 타자의 모습을 갖췄을 것 같아요. 저도 그 선수들과 야구 스타일이 비슷했거든요. 그런데 대학 와서 많이 달라졌어요. 프로에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배웠다고 해야 할까? 왜 군대 갔다 오면 사람이 바뀐다고 하잖아요. 저는 군대는 안갔다 왔지만 거기서 배울 것들을 대학 생활 4년 동안 배운것 같아요. 야구도 그렇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많이 배웠거든요.” 과거를 회상하던 박용택이 폭탄 발언(?)을 내뱉었다. 자신은 야구와 궁합이 맞지 않는다고 말이다. “운동능력은 타고난 것 같아요. 근데 축구나 농구처럼 그 순간 몸을 써가면서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건 자신 있는데 야구는 타석에서도 수비에서도 정적으로 생각을 가질 시간이 있잖아요. 그럼 저는 생각에 깊이 빠지게 돼요. 타석에서 잘 쳤을 때를 돌아보면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서 친 경우가 대부분이고, 수 싸움하고 뭔가 생각을 하고 들어선 타석에선 안 좋은 결과가 나올 때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프로 입단하고 매년 5%씩 생각을 줄여나가고 있어요. 지금까지 한50%는 줄인 것 같아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마추어 시절 그의 지도자들은 항상 ‘생각을 좀 줄여라’라는 조언을 했다. 몇 경기 슬럼프가 오면 새벽에 사라졌다가 빡빡이가 되어 나타나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전 축구선수했으면 야구보다 잘했을 것 같아요. (웃음)” 물론 한 시즌을 치르다 보면 페이스가 떨어질 때도 있고, 타자에겐 그런 사이클이 있다는 걸 너무 잘 알지만, 오히려 박용택은 자신에게 더 혹독한 채찍질을 한다. 더 많이 훈련하고, 더많은 생각을 한다. 다만 옛날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런 박용택의 곁엔 가족이 있다는 것이다. “제가 생각이 너무 깊어지면 아내가 옆에서 한마디씩 해줘요. 평소에 일부러 야구 얘기 잘 안 하는데가끔 그렇게 말해주는 게 큰 도움이 되죠.” |
‘축구를 이거보다 더 잘했으면 과연 어떤 선수가 됐을까?’싶을 정도로 박용택의 프로 첫해는 성공적이었다. 현대 유니콘스를 꺾고 진출한 플레이오프에선 KIA 타이거즈를 상대로 1경기 2홈런을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최다루타 타이 기록을 세웠다. 당연히 MVP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박용택은 거만해지지 않았다. “어휴, 그때 감독님이 어떤 분이신데 제가 거만해지겠습니까.” 웃으며 말했지만, 그는 정말 성실했다. 이광환 감독이 부임한 이듬해, 2천만 원이었던 연봉이 5천만 원으로 급등했지만 그는 달라진 게 없었다. 항상 가장 먼저 출근을 하고 가장 늦게 야구장을 나섰다.“밖에서 바라보는 LG가 자유분방하고 무섭지 않은 줄 알지만 알고 보면 팀 내 규율이나 지켜야 할 것들이 가장 많은 팀이에요. 다른 팀 선수랑 얘기를 해보면 정말 많이 느끼죠. LG에 오는 선수들이 그런 얘기를 했고, 다른 팀에 가는 선수들도 그런 얘길 해요. 오히려 주위 시선이 LG는 너무 자유분방하고 선수들이 논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내부적으로 더 심했던 것 같아요. 그 덕에 신인이었던 제가 야구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요.”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자랑하던 박용택, 무서울 게 없었던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온다. 입단 전부터 어깨 부상의 조짐이 있던 그는 훈련과 특유의 정신력으로 보살왕 타이틀을 차지할 만큼 어깨를 강화했다. 하지만 결국 2005년 스프링캠프에서 그의 어깨는 삐걱대고 만다. 캐치볼이 힘들 정도로 어깨가 좋지 않아져 지명타자로 출장하는 일이 잦아졌다. 얼마 전 김기태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용택이는 선수 생명을 걸고 홈 송구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감독님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신 말씀인 것 같아요. 물론 아쉬운 부분이고, 부족한 부분이지만 제 생각에는 그래요. 외야수 중에 홈 송구 능력으로 팀에 크게 기여하는 선수가 각 팀에 몇 명이나 될까요? 외야수 3명이 모두 강견이면 좋겠지만, 그 능력만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김기태 감독님의 시선이 그래요. 제가 지금까지 겪었던 감독님들은 모두 정신력, 야구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연습량을 항상 강조했었어요. 그런데 김 감독님은 그런 얘길 한 번도 안 하셨죠. 열심히 안 해서 못 한 게 아니란 걸 아시거든요. 김 감독님은 팀이나 선수의 문제점이 아닌 다른 긍정적인 부분들을 보고 그걸 믿고 키워주시는 거죠. 그게 지난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 이렇게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어깨 부상이라는 본인의 시련을 떠나서, 팀이 10년간 가을야구를 하지 못하며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최다 포스트시즌 탈락이라는 비운의 기록을 남겼다. 박용택은 팀에서 가장 사랑받는 선수인 만큼 가장 많은 비난과 원망도 들어야 했다. 물론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이 아닌 후배들을 격려하고 조언했다. “프로선수는 좋은 성적을 내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10년씩이나 포스트시즌에 못 갔으니 그에 대한 책임의 화살이 선수들에게 돌아오는 건 당연한 거고요. 칭찬보단 질타를 받는 일이 많았던 시간이었는데 선수들도 사람이고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그런 말들 다 듣고 보게 되죠. 근데 자칫 어린 선수들은 그런 것들로 인해서 흔들릴 수 있어요.그럴 때 선수들 모아놓고 밖에서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말고 야구장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플레이에 최선을 다 하고 열심히 하자고 다독였죠. 고참이 해야 하는 역할엔 그런 것도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평소 후배들을 잘 챙기기로도 유명한 박용택, 그는 자신의 후배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사실 지금의 LG를 이끄는 건 이병규-박용택-정성훈-이진영-봉중근 등 고참들이 대부분이다. 박용택에게 제2의 박용택으로 눈에 띄는 후배가 있느냐고 묻자, ‘제2의 박용택은 너무 약한 거 아니냐’고 너스레를 떨며 자신의 속마음에 대해 입을 열었다. “진짜 세대교체가 되려면 후배 중에 앞장서서 이끌 수 있는 선수가 나타나야 해요. 평소에 팀 분위기를 떠나 야구장에서 실력으로 팀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런 선수요. 그런 역할을 하기엔 지금 선수들은 아직 부족하고,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고참 선수들이 그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후배들한테 조언도 많이 하고, 그만큼 잔소리도 많이 해요. (웃음) 다들 빨리 성장해주길 바라는 선배 마음인 거죠.” |
물론 LG가 강팀이 된 것에는 젊은 선수들의 활약도 큰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홈런 타자는 아니지만, 팀의 오랜 갈증이었던 우타 거포형 타자 정의윤의 성장은 많은 팬에게 야구장을 찾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 팬들의 기대가 어쩌면 선수 본인에게는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박용택은 정의윤 그리고 팀의 부재한 거포형 타자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했다. “의윤이도 그렇고 아직 우리 팀엔 거포의 자질을 가진 선수가 없어요. 그건 MBC 청룡 시절부터 마찬가지고요. 홈런 빵빵 쳐주는 타자가 있으면 좋겠지만, 잠실야구장을 홈으로 쓰는 한국인 타자가 거포가 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요. 김동주 선수를 예로 들면 정말 좋은 국가대표 4번타자지만 1년에 홈런을 몇 개나 치는지 한번 보세요. 그런 걸 보면 답이 나오거든요. 단순히 수치상으로 다른 야구장보다 몇 미터 더 먼 정도가 아니에요. 직접 해보면 정말 절실히 느껴요. 잠실에서 절반 이상 경기를 하는 홈 팀 선수들은 구장에 맞게 치는 스타일도 달라져야 해요. 김상현, 박병호 선수가 우리 팀에 있을 때랑 KIA, 넥센가서 홈런 친 개수 비교해보면 차이가 크게 날 거예요. (김)현수도 좀 더 작은 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팀에서 데뷔를 했으면 홈런왕 여러 번 했을 거고요. (웃음) 결국 우리 팀에는 거포보다는 잠실야구장이라는 구장과 잘 맞는 타자가 나오는 게 더 중요하죠.” 지난 10년간 풀지 못한 가을야구에 대한 답이 나왔다. 그래서인지 중계방송을 통해 들리는, 그리고 현장에서 들리는 박용택의 응원가 데시벨이 정말 높다. 박용택의 응원가는 야구팬들 사이에선 전 구단을 통틀어 최고로 손꼽히는 신이 나는 응원가 중에 하나다. “제가 들어도 정말 괜찮더라고요. 하하하. 근데 이게 타석에서는 전혀 안 들려요. 안 믿을 수도 있지만 몇 만 명이나 되는 팬 분들이 박용택이라고 외쳐주시는데 그게 타석에선 안 들립니다. 안타치고 나갈 때나 주자로 누상에 있을 때에 팬들 목소리가 들리죠. 그래도 힘이 많이 돼요. 일단 응원가가 좋잖아요.”가을야구에 대한 그의 소감도 들어보았다. “한 팀에서 10년 동안 가을야구 못해본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저에겐 정말 특별하죠. 남은 시즌 끝까지 여태껏 잘해왔던 것처럼 만족할 수 있는 성적으로 시즌 마칠 수 있게 힘 내보려고요. 사랑하는 제 가족, 딸 솔비가 야구장에 와서 마치 축제같은 가을야구를 함께 즐겼으면 좋겠어요.” 초등학교 때 LG의 우승을 지켜봤던 박용택, 그는 항상 트윈스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싶었다고 말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마침내 그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뤘다. 첫해부터 주전으로 뛰었고 매년 팀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12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는 잔부상을 제외하곤 단한 순간도 자신의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다. “가끔 막연하게 이런 생각을 해요. 내가 은퇴할 때쯤 2천 경기, 2천안타, 1천 타점, 1천 득점, 200홈런, 400도루 그리고 통산 타율 3할을 기록한 선수로 남고 싶다고요. 근데 이런 숫자들보다 더 중요한 건 그때까지 한 팀의 유니폼을 입고 뛰었던 선수로 남고 싶은 거예요. 저에게 트윈스요? 집이고 가족이죠.” |
• • 박용택에겐 한때 유광 점퍼 업체의 마케팅 직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유광 점퍼가 주는 의미는 특별하다. 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박용택 역시 그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유광 점퍼를 입고 흔쾌히 촬영에 응했다. 촬영 중 ‘박용택에게 유광 점퍼란?’이란 질문을 받은 그는 머쓱하게 유광 점퍼를 한번 만지며 ‘한 번을 지키지 못했던 팬들과의 약속’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에디터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올해는 그 약속 지키겠죠?” LG는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 짓는 매직넘버에 2승을 남겨두고 있다. 하지만 팬들은 이것만으로도 기쁠 것이다. 9월 20일에 포스트시즌 탈락 매직넘버가 아닌 확정 매직넘버를 세는 일이 그들에겐 참으로 오랜만이니 말이다. |
시즌 초반 감독의 부재와 새로운 양상문 감독의 영입이라는 혼란 속에서 LG는 올 시즌의 기대를 져버리는 분위기였다. 여름을 지나면서 점차 양상문감독 체재의 LG 트윈스는 빠르게 안정이 되어갔고 조금씩 승률을 높이며 가을 야구의 진출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게다가 역전승과 끝내기의 신바람을 타며 4강행을 결정짓는 가장 유리한 고지에 올라섰고, 그 중심에 LG 박용택이 있었다. 10월 LG가 6승2패의 호 성적을 거두는 동안 박용택의 활약은 돋보였다. 인천 아시안게임 이후 LG의 첫 경기였던 10월 3일 잠실 넥센전에서 박용택은 7회말 만루 홈런을 터뜨려 11:5 대승을 이끌었다. 10월 6일 잠실 NC전에서는 0:0으로 팽팽히 맞선 9회말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우중간 2루타로 포문을 열었고, 동점 상황으로 전개되는 경기 후반에는 장타에 의해 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박용택의 결정적인 장타가 터진 것이다. 1사 후 이진영의 끝내기 우중간 안타로 박용택이 홈을 밟아 LG의 1:0 승리로 경기가 종결되었다. 이날 박용택은 4타수 3안타로 맹타를 휘둘렀고 가장 눈부신 가을을 보내고 있다. |
첫댓글 노장들의 활약이 대단한거 같습니다. 작년에 비해 투수진도 월등히 안정적으로 변했구요 올해 가을야구 재미지게 흘러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