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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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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글 Ⅱ. 수용의 3가지 이론적 역사 1. 구닝의 수용이론 2. 한센의 수용이론 |
3. 코리간의 수용이론 Ⅲ. 위치의 양식 IV. 상영의 양식 V. 새로운 수용의 양식 |
I. 들어가는 말
1994년에 폭력과 폭력적인 사람들을 생생하게 묘사한 두 편의 영화가 개봉되었다. 한편은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가 감독한 <펄프 픽션Plup Fiction>이고, 다른 한 편은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감독의 <올리버 스톤의 킬러Nature Born Killers>이다. 이 두 편의 영화는 다루고 있는 주제적 유사성을 넘어서 감성적 유사성이 존재한다. 두 영화 모두는 관객에게 일상에서 지속적이며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폭력의 분출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두 영화는 꽤 차이가 있다. <펄프 픽션>은 두 명의 주요 캐릭터 사이에 긴 대화를 가진 나선형의 이야기이며 고전 할리우드 양식의 엄호를 받는다. 그런데 내러티브 영화인 <올리버 스톤의 킬러>는 영화로 영화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영화적 한계를 초월하는 전략을 끊임없이 사용하고 있다. 비록 다양한 이유에서 <펄프 픽션>이 <올리버 스톤의 킬러>보다 더 많은 찬사와 상을 받았지만, 비평가들은 일반적으로 두 영화 사이의 형식적이고 양식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있다. 더욱이 두 영화는 내러티브 영화 관행과는 상당히 다른 기묘한 요소를 가진 좋은 예가 되고 있으며 그것이 잘못 수용되고 있다. 왜 그렇게 되어야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명백하게 보이지만, 이 두 영화로 동시대에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영화 수용의 역사에 관한 글을 쓰는데 문제점으로 고려하기를 원한다.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무엇을 경험하는가? 그리고 이 경험의 의미는 무엇인가? 비록 영화 산업적 사회적 기관과 영화적 형식과 양식에 관한 질문은 그들의 흥미에 포함되겠지만, 학자는 수용에 관한 질문을 사회학, 문화, 미학 이론에 모두 동일하게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지난 20년 간 학자들은 영화를 보러 가는 행위에 관한 다양한 이론을 제공해 오고 있다. 이 이론들은 영화 수용에 관한 연구의 장을 여는 것을 유발시킬 뿐 만 아니라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지금은 쓰여진 역사를 형을 바꿀 때이다. 이들의 이론을 기반으로 하는 몇몇 개념적 한계를 넘어서 영화 수용의 좀 더 복잡한 설명서를 창조할 시기인 것이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3명의 주요 저자에 의해 구조화된 이론의 이항 대립은 역사적 기간에 의해 분석되어질 수 없다. 이항 대립은 영화 역사를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펄프 픽션>, <올리버 스톤의 킬러>가 같은 시기에 존재하는 것은 명백한 대립과 그들을 자극시키는 경험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없으며, 지난 100년을 통해 존재해왔으며, 다음 세기에도 잘 지속이 될 것이다. 더욱이 이들 두 반대 진영은 지금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한계 되어지고 있다.
II. 수용의 3가지 이론적 역사
이 연구의 논의를 위해 영화 연구에 영향을 미친 추론적 연구를 세 가지 수용의 추론적 역사로 보고자 한다. 그들은 톰 구닝(Tom Gunning)과 미리암 한센(Miriam Hansen)과 티모시 코리간(Timothy Corrigan)이다. 이 세 저자는 미국 영화 전체 역사를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론을 제공하고 있다.
1. 구닝의 수용 이론
구닝은 견인의 영화와 내러티브 영화 사이에 차이를 도입하고 있다.(표1을 보라) 견인의 영화는 내러티브 영화가 스토리 텔링을 강조하는 반면 일련의 흐트러진 때로는 반영된 시각의 제시를 강조한다. 스펙터클 영화와 내러티브 구조주의가 기호학적인 구별에 기초해서 구닝의 이원론적 체계는 반대의 스펙터클적인 면에서 쇼크 혹은 경악의 요구를 첨가한다. 더욱이 그는 이 대조의 일련에서 관객효과를 강조할 수 있었다. 게다가 최근 그는 현대성의 경험에 이 영화를 연결짓고 있다. 견인 영화에 대한 결과는 환영에 흡수되어 존재하는 경험, 내러티브 영화에 반대되는 관객의 비평적 관여에서 발생하는 영화적 경험이다. 구닝은 일반대중과 부르주아가 수용하는 양식을 균등화한다. 구닝이 쓴 역사는 견인으로 충만한 영화가 모더니티로 영화에 도입된 초기에 우세했다. 최근까지 고전 할리우드 내러티브 영화에 함몰된 그러나 산발적으로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 뮤지컬 같은 몇몇 장르와 최근 액션-모험 영화에 산발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견인의 영화 |
내러티브 영화 |
우세기 | |
1906 이전, 지속됨: 아방가르드 모더니스트 관행 몇몇 장르(예를 들어 뮤지컬) 최근 스펙터클 영화(예를 들어 스필버그-루카스-코폴라) |
1906이후 우세한 영화 |
관객 지위 | |
시각의 전시에 의한 카메라와 동일시 시각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만족시키다 관객에게 직접적 지위 |
이야기를 말함으로서 카메라와 동일시 해결을 요구하는 수수께기에 놓기 관객 배려 없음 |
정신분석학적 지위 | |
전시자 |
관음자 |
형식적 양식적 특징 | |
프레임되는 도구의 현존/부재 |
보다 큰 패턴에 세워진 도장치 |
관객의 수용/효과 양식 | |
직면 경악 관객이 조우하기, 비평적으로 |
환영으로 흡수 드라마 쫓기 “정적이고,“ 수동적인 관찰자 |
사상적인 범주화 | |
대중적 |
중산계급 |
2. 한센의 이론
한센의 고찰은 많은 점에서 구닝을 따른다[표2]. 비록 한센이 논의의 부분들을 약간 바꾸었지만 그녀는 초기 모던 영화의 이데올로기 강화에 대한 회의론을 좀 더 지적한다. 그녀는 “한때 모더니스트 브리콜로지와 이데올로기적 신기루”를 불러들인다. 한센은 이러한 견해를 가지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영화 그 자체의 광범위한 상호텍스트적 범위를 통해 더 중요하게는 관객의 실제적 참여를 통해 “이상적 대중”의 구성을 초대한다. 극장 내에 존재하는 소란과 다양한 장르와 생생한 사건들은 하나의 내러티브적으로 완비된 장편 영화의 “관음적인” 오랜 관찰의 밀폐된 경험 보다 경쟁하는 관객들의 다양성을 제공한다. 이들 초기 현대 영화의 긍정적인 기여는 여성관객을 위해 남성 스타의 에로틱한 전시와 미학에서 일회성 욕망을 촉진한다는 문제에 의해 대등하게 되었다.
비록 거닝과 한센의 작업간에 많은 유사성이 존재하지만, 한센은 초기 현대 영화가 여성관객을 위해 더 가능성을 가진 잠재적 대중적 활동 범위라고 더 열렬히 논쟁함으로서 거닝에서 벗어난다. 비록 이들 가능성 중의 하나가 소비자 문화에 사회화되기 위한 것이다. 한센은 또한 거닝보다 극장의 동요는 고전 영화의 조용하고 동종의 지켜보기에 의해 규제되어질 때, 동시적 사운드의 시대까지 존재하는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더 많은 현상으로서 초기 현대영화를 다룬다. 최근에 한센은 또한 그녀의 논의는 몇몇 최근 영화를 통합시키는 데까지 확장시킴으로써 코리간의 작업을 언급한다. 거닝과 코리간과 같이, 그녀는 초기 현대 영화의 잠재된 대중 영역은 포스터 모던 영화로 불리는 것으로 둘러싸인 경험 내에서 재등장하고 있다.
초기 현대와 후기 현대영화 |
고전영화 |
존재일 | |
생음악의 사용을 통해 포스트모던 영화 |
1930년대-1950년대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
관객의 지위 | |
사회적, 대중적 청중으로서의 직접적 지위 다양한 언어 “이상적 대중”에 호소 대중적 이벤트와 동일시하다 |
“비시각적, 개인적 소비자”로서 지위 보편적 언어 “고립되고, 소외된 개인”에게 호소 통합된 관객으로서 스크린에 진행되는 이벤트와 동일시하다 |
정신분석학적 지위 | |
전시자 |
훔쳐보기 |
형식적 양식적 특징 | |
표상적 유인 |
스토리의 전경적 분절 |
짧은 기간 그리고 끊임없는 감각적 자극 |
단일 이벤트 혹은 대상의 긴 관찰 |
많은 장르들 |
장르는 전경의 상대적 동질적 양식의 변형 |
자아로 둘러싼 세계의 결렬 |
열쇠구멍, 물신숭배적(페티쉬적) 거리 |
거대한 상호텍스트적 지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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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스타의 에로틱한 페르소나의 전시의 미학화 |
자아가 포함된 내러티브 |
관객의 수용/효과의 양식 | |
오락, 전환 현대성의 예시 공간적 지각을 변형 자이를 동원 |
응시, 집중 |
전시양식 | |
경쟁하는 스펙타클의 다양성 |
긴, 단일 특징 |
이데올로기적(관념적) 범주화 | |
보더빌로부터 속물문화의 비평 모더니티로 연결된 (“한때 모더니티스트는 브리콜라즈와 이데올로기적 신기루”) 잠재적 여성대중 범위 |
소비자 사회와 공모 가부장적 경제 구조적으로 웅성화(남성화)하다 |
[ 표 2 ] 한센의 이론
3. 코리간의 이론
세 번째 이론은 미국 영화 역사를 세 부분으로 나눈 코리간의 부분이다.[표3] 코리간은 “고전 이전 영화”(1985에서 약 1917), “고전과 근대 영화”(1917에서 현재까지, 그리고 1950년에서 현재까지), “포스터모던 영화”(1970년대에서 현재까지)의 범주를 만들었다. 다른 이론가들과 같이, 코리간은 관객 경험에 초점을 둔 그의 체계를 만들었다. “흘긋 보기”와 “응시” 간의 대립을 강조하면서, 고전 이론과 포스트모던 영화가 스크린에 산발적으로 주목하도록 한다. 반면에 고전과 모더니스트 영화는 응시의 영화다. 응시 영화는 내러티브 연속성, 종결, 중심 등장인물, 유연한 사실주의를 통해 고정된 주체성과 통일된 정체성을 창조한다. 관객을 위해 흘긋보기 영화는 행위의 일종인 반면, 응시 영화는 읽기와 해독의 영화이다.
한센과 같이 그러나 거닝과는 달리, 코리간은 고전 이전 영화는 거닝이 논의한 것처럼 지배적인 다른 어떤 관행으로 보기보다는 고전 영화의 출현으로 사라진 것으로 제기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거닝과 같이, 코리간은 몇몇 최근 영화는 고전 이전 시대의 그것과 유사하게 관객 효과의 재출현을 전시한다고 논의한다. 한센이 최근에 채택한 명제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들 이론에서 어느 것이 옳은가 혹은 다른 이론이 영화 역사에 더 나은 이론을 제공할지 시험할 수 있을까? 이것의 출발점은 이들 이론이 그들의 논의에서 나름대로 정한 중심 제안과 관련된 몇몇 실증적 증거를 다시 고려하는 하는 것이다. 제작 양식의 역사에 기초해서 주장하는 작가는 아무도 없다. 차라리 그들의 주장은 관객 태도의 변화하는 양식이나 상영 조건의 변화에 그들의 주장을 기초한다. 더욱이 그들은 어떻게 영화가 관객에게 위치 지워지는지 혹은 어떻게 관객이 그 영화를 경험하는가에 관한 교환이 연속적인 역사적 순간에서 다른 영화를 창조한다. 견인의 양식 혹은 상영
고전 이전 영화 |
고전 영화(CC)와 모더니스트 영화(MC) |
포스트모던 영화 |
존재기 | ||
1896- 약 1917 |
CC-1917년에서 현재 MC-1950년에서 현재 |
1970년대에서 현재 |
관객 위치 | ||
시각의 흩어짐 분산된 정체성 |
고정된 주체성 단일화된 정체성 |
흩어진 분산 |
형식적 양식적 특징 | ||
다양한 관객 |
내러티브의 연속성 |
해독하기 어려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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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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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등장인물 |
다수의 정체성의 극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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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력적인 리얼리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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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눈에 보이지 않는 내레이션 MC- 시각적 내레이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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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에 대한 수용/효과의 양식 | ||
규범적보다는 활동적인 관계 |
해석, 해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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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 흘긋보기 |
읽기 응시 |
행위 흘긋보기 |
산발적인 주목 |
지속되는 주목 |
산발적인 주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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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CC에 참여하는 동요되지 않는 관람 MC-CC에 반대되는 동요되지 않는 관람 |
“그들은 동시에 어디에도 없거나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이행에 미치지 않는” |
상영 양식 | ||
보는 것보다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
사회적 제의 |
“외출” |
[ 표 3 ] 코리간의 이론
의 양식은 수용의 상이한 역사적 양식을 생산한다. 견인의 양식과 상영 양식의 보다 광범위한 일련의 두 자료를 재시험하고, 이들 주장의 최초의 타당성을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인과적 명제 (위치 혹은 상영의 양식이 수용 양식을 야기한다)가 역사적 관객성을 이해하는데 더 적합한지 관해 질문하고자 한다.
III. 위치 양식
이 논의는 다시 <펄프 픽션>과 <올리버 스톤의 킬러>로 돌아온다. 이 두 영화는 거닝, 한센, 코리간에 의해 구축된 대비의 동시대적 실례이다. <펄프 픽션>은 평균이상으로 훌륭한 내러티브/고전 영화이다. 이 영화는 보는 이에게 빈센트와 줄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뒤얽힌 수수께끼를 뒤쫓는 카메라와 동일시하도록 요구한다. 기대된 폭력의 관음증은 우리를 내러티브 드라마로 흡수시킨다. 한센 식으로 우리는 단일 사건이나 대상의 장황한 씬들을 지켜본다. 빅맥과 스프라이트 같은 소비재 상품에 대한 상호텍스트적 언급의 예로 영화는 기본적으로 제한된 상호텍스트적 범위에 있다. 즉 독립적인 내러티브이며, 우리는 영화의 의미를 창조하거나 논쟁하기 위해 넓은 범위의 외부적 언급이 필요 없다. 이 영화는 영화에 지속적인 태도로 응시함으로서 참여하는 일관된 관객이 해독하게 된다.
그러나 <올리버 스톤의 킬러>는 반대이다. 비록 이것은 명백한 내러티브이지만, 카메라가 가진 동일성은 우리의 장르와 스타일에서 꽤 다른 대중적 시각적 제재의 다양성을 보도록 허용하는 명백한 견인의 영화이며 포스터모던 영화이다. 뉴스 프로그램, 대중음악, 텔레비전 시트콤, 웨스턴, 범죄 영화, 더 많은 것이 동시에 칼라와 흑백으로 필름과 텔레비전으로 그리고 환영적 텍스트의 어떤 감각을 차단하는 캔티드 앵글 위에서 혼합되어져 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은 단일 쇼트 내에서 이들 상이한 텍스트를 프레임화 할 뿐만 아니라 1990년대 킬러 미키와 멜로리와 영화관의 관객과 다른 1950년대 TV 시청자가 이들 사건을 목격할 때 엄청난 충격을 받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커트에 지적 몽타주를 사용한다. 이것은 상영자 텍스트이다. 그것의 분열과 외부로의 분산에서 텍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그나 그녀의 대중문화와 모던 매체에 대한 지식에 의존하도록 관객을 직면하게 하고 충격을 주는 텍스트이다. 사람들은 여기서 저기까지 흘긋 보는 것에서 엿볼 수 있다. 공간과 시간의 교묘한 처리는 모더니티에 확실히 연결되어질 수 있는 영화이며, 그것의 대중적 문화 언급은 중산계급, 지성주의의 한 가닥의 경향이 있다. 과객은 한번에 어느 곳이나 모두 장소에 있기 때문에 약속을 넘어선다.
<펄프 픽션>은 우리에게 그것의 소용돌이 주위로 우리를 선회시키면서 내러티브로 빠뜨리는 반면, <올리버 스톤의 킬러>는 우리가 새로이 고려해야하는 대중 세계내의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우리를 영화로 빠지게 한다. <펄프 픽션>은 관객과 얽히게 하고 스토리나 플롯이 역할하며 결코 동질적 응집적 내러티브 세계에 직면하지 않는다. <올리버 스톤의 킬러>의 한계는 모든 대중문화가 멀티미디어 대학을 위해 유용한 이미지의 가상세계인 것이다.
왜 지금 이 두 영화인가? 이는 역사적 예외의 몇몇 종류인가? 거닝, 한센, 코리간 모두 형식적이고 경험적 유사성은 견인/초기 모던/고전 이전 영화와 포스트모던 영화의 사이에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은 초기와 후기 사이에 내러티브/고전 영화는 급격하게 그 위치를 감추거나 소멸된 것으로 제시한다. 거닝은 뮤지컬과 같은 일부 내러티브 장르는 그 위치를 나타낸 것으로 제시함으로서 이를 부연 설명한다. 여기에 마르크스 형제Marx Brother의 <오리 스프Duck Soup> 혹은 <편협Intolerance>의 드라마적 콜라주 같은 영화의 코미디의 일부 유형을 첨가하길 원한다. 그러나 적어도 고전기에 등장했던 유사한 형태가 100년 후에 매우 강력하게 재등장한다는 것은 다양한 역사적 시기로 관객의 위치 양식이 생산된다는 이론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IV. 상영의 양식
상영의 양식이라는 일련의 다른 자료에 연구의 주제로 옮기면 한센은 관객의 수용과 감동의 양식이 영향을 미침으로서 영화관람의 조건에 대단히 주의를 기울인다. 특히 그녀는 경쟁적인 제재의 다양성을 제시하는 보더빌vaudeville 형식은 “한때 모더니스트의 브리콜리지와 이데올로기적 신기루”였다. 비록 위치의 양식이 이미 고전 내러티브 영화로 전이되었지만 기계적으로 동시 사운드가 도래할 때까지 진짜 뮤지컬에 의해 향상되어온 사건의 일반적 생동감이 대중 범위의 감각에 유지되고 있다.
그러면 여기에 1915년에 출판된 《영화의 예술 The Art of the Moving Picture》이라는 책에서 바첼 린드세이(Vachel Lindsay)가 제공한 설명의 시작으로 미국에서 영화를 보러가고 싶은 어떤 역사를 고려하고자 한다. 린드세이는 중산계급의 인민당원이자 진보적 시인이였으며 영화에서 한센이 또한 특권을 준 같은 잠재적 대중 범위를 보았다. 린드세이는 영화 상영에 대한 접근을 “집회 극장”으로 논의한다.
나는 전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억제시키고 ...크리스토퍼 모리Christopher Morley와...관객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고무되길 제안한다. 나는 이(주제)를 증명하기를 시도해 왔다. 오케스트라가 멈춤으로서 쇼는 영광을 향해 나아가는 반면, 우리 전에 영화에 의해 그것이 설명되어짐으로서 이 책 내의 주요 관점에 대해 얘기했다. 일어나는 거의 모든 것은 내 생각의 행복한 도해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 두 명의 여점원이 있다. 그녀는 매번 또는 종종 그녀의 분명한 동의를 가지고 여주인공과의 키스를 강요하는 조연급 배우와 지독한 사랑에 빠졌다. 매번 우리는 그 여점원이 우리를 노려볼 때 즉시 우리가 그들의 시간과 돈을 빼앗고 있는 것에 대해 얘기했다. 결국 그들 중 한 명은 복도로 다른 한 명을 끄집어내고, 우리 모두는 듣는다. “자, 테레사 우리가 만일 페스트를 얘기하는 저 두 사람이 우리 뒤로 이것을 유기 하려고 하면 가야한다.” 그 불쌍한 소녀의 목소리는 떨린다. 그녀는 울면서 우리가 사과를 하고 꽃을 바치기도 전에 사라졌다.
이 이야기는 두 집단이 각각의 계급에서 잘못된 행동을 하기 때문에 매우 흥미가 있다. 부르주아 계급 남성은 영화에 조용하게 경청하는 반응을 옹호하는 것으로 지지되어진다. 즉 그것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노동 집단 여성은 꽤 응시하는 양식에서 기여하는 관객이 되기 위해 지지되어지지 않았다. 만일 적어도 초기에 영화보기의 예는 일반적 원칙에 무효가 되지 않는 관객의 조직에 반대된다.
그러나 적어도 미국에서 보기는 영화 관람은 전체적 사건이 극적으로 동시사운드의 도래 후에 변화하지 않은 것으로 주장할 수 있으며 간략하게 중요한 관점을 조사하길 원한다. 후기 동시 사운드 시대 동안 영화관은 영화(이 상영 형식이 10대 후반과 보더빌과 다른 19세기 오락으로부터 파생되어 표준화되었다) 전에 도입 제재의 다양성을 제공한다. 텔레비전이 보다 많은 수의 단편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할 때까지 이 다양한 형식은 1950년대까지 점차 없어지지 않았다.
더욱이 1930년대와 1940년대 동안 많은 라이브 이벤트는 여전히 극장에서 이루어진다. 대공황의 시작과 빙고와 현상퀴즈 프로는 저녁시간 이벤트의 일부였다. 전쟁시기에는 본드 드라이브가 일상적이었다. 극장이 가족 엔터테인먼트로 선보인 후에 많은 어린이들이 비해독적 환경에 현재는 확실히 기여하지 못했다.
마치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고전 내러티브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조용하도록 길들여지는 것으로 가정된 것처럼, 그것이 항상 순종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스튜디오 기록에 따르며, 오손 웰즈(Orson Welles)의 <위대한 앰버슨가 The Magnificent Ambersos>가 캘리포니아 포모나에서 최초로 상영되었을 때, “관객은 잘못된 장소에서 웃고, 스크린 뒤로 이야기하고, 그들의 사전 비평 카드 내에 그것의 ‘예술성’을 비난하면서 그 영화를 몹시 싫어했다. 사실상 상영자가 때때로 그 이후 상영관에서 대화와 같은 것을 조장하는 경우이다. 어떻게 1920년대에서 1960년대의 개척영화가 상영되었는가에 대한 연구는 이벤트를 설명하기 위해 영화를 방해하는 강연자로부터 교육용 책자를 나눠주는 간호원에 이르기까지 홀에서 발생하는 많은 활동을 지적한다. 심지어 각 주 연합의 대텍사스 극장 체인의 예를 보면 더 명확하다. 그들 상영자들은 특정 영화를 시끄럽게 지껄이는 관객의 참여를 조장함으로서 ”진부한 멜로드라마(corny)"로 이전보다 더 최악의 영화로 조정한다.
1950년대 텔레비전이 영화 극장에 대비해서 더 이완된 사회환경을 제공함으로서 드라이브인 극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대중적 공간과 사회적 환영으로서 번창했다. 비록 린다 윌리엄스(Linda Williams)는 <사이코> 고전 내러티브 영화를 즐기는데 통제의 일부를 잃어버리고 쾌락(을 추구하는) 관객이 창조되길 원했다. 훈련되어진 관객에게 <사이코>의 경험은 단지 보다 커진 묵인된 난폭성의 일부이며 텔레비전과 경쟁하던 극장 상영에 의해 조장되어졌다. 분명치 않은 것은 고전 내러티브 영화의 상영 조건이 균일하게 관음적 영화, 환영에의 몰입, 정적이고 수동적 관객이라는 것이다. 물론 모든 동시대적 영화인 견인의 영화 혹은 포스트모던적 경험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액션 모험 영화 같이 포스트모던 영화로 불리는 일부는 놀랄 만큼 그들의 상호텍스트적 수용 범위의 다양성을 억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V. 새로운 수용의 양식
그 질문은 앙드레 바쟁(Andre Bazin)에서 기인한다. 그의 가장 유명한 글 중 하나인 “영화 언어의 진화론(The Evolution of the Language of Cinema)"에서 그는 기계적으로 동시 사운드의 도래에 의해 영화 역사를 나누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한다. 더욱이 그는 영화 역사를 이해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이미지에 신뢰를 둔 감독과 리얼리티에 신뢰를 둔 감독간의 차이를 기술하는 것으로 쓰고 있다. 바쟁은 1940년대 초기에 스타일과 주제 문제의 관계에 대한 복잡하고 논리적인 분석을 만들기 위해 나아간다. 영화 역사에 대한 잘못된 선긋기가 기술적 변화가 아니라는 기본적 견해는 타당하다.
역사(그리고 모든 같은 장소)의 모든 시기는 영화 위치의 여러 양식과 상영의 여러 양식과 수용의 여러 양식을 증명한다. 더욱이 어떤 개인 관람자는 수용의 이들 다양한 양식 내에서 영화 관람 같은 경험에 종사한다. 그의 위치를 명확히 하고 불가능한 주장을 피하기 위해 거닝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동시대 문화의 조건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가지기 위한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거닝은 또한 모든 관객이 포스트모던 관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 연구에서 어떤 관객도 항상 어떤 종류로 고착된 것은 아니라고 추가하고 싶다. 여기서 제시하는 것은 양 대립과 고정된 역사적 기간에 의해 이들 영화를 분리하는 시도를 피하는 영화 관람의 좀더 새롭고 복잡한 역사이다.
그런 다음 재개념화된 것은 위에서 논의된 일부 변형에 무엇이 일어났는가? 이 접근이 탈선적인 자료를 얼마나 잘 다룰 것인가? 첫 번째, 위치의 양식으로서 다른 각각 종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으로서 분명해진다. 비록 나는 확실한 장르를 선호하려고 하는 의향이 있어도, 나의 기호는 꽤 절충적이다. 비록 내가 이데올로기적 이유 (플롯이 전진하는 도구로 폭력에 의지하는 영화)로 <펄프 픽션>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어도 나는 첫 번째 영화보기에서 완전히 몰입된 관객이었다. 사실상 더 많이 그래서 내가 결국 그 영화를 비평하기 위해 뒤로 물러서기 어려웠다. <올리버 스톤의 킬러>는 나에게 그것이 제시되는 순수한 뻔뻔함 때문에 영화보기에서 대단한 순간 중의 하나였다. 그 순간이 결코 산망하며, 비평적 관람자와 다른 무엇이 아니었다.
영화의 역사는 위치의 다양한 양식의 역사이다. 순간적으로 세 이론가에 의해 구축된 두 가지를 받아들인다면 일부 장르를 흘긋보기/견인 양식과는 다른 차라리 응시/내러티브 양식으로 되어진다고 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예를 들어 “응시” 장르는 탐정, 로맨스, 멜로 드라마, 스릴러, 그리고 갱스터 영화이다. “흘긋보기” 장르는 액션 모험영화, 많은 코미디, 반영적 SF, 웨스턴이다. 호러 영화와 뮤지컬은 그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의존해서 이들 각 집단에 존재한다. 사실상 재혼의 코미디는 응시 영화일 것이다. 반면 슬립스틱이나 개그 코미디는 흘긋보기 영화로 간주된다. 이들 장르가 영화 초창기로부터 존재되어질수록 그들은 관객이 욕망하는 것을 즐기기 위해 모두 가지고 있다.
수용에 영향을 미친 위치의 양식과 연결되는 것은 상영의 양식이다. 1942년 극장에서 하룻밤에 영화 관람은 산만하고 반영적 출발로 움직였을 것이다. 뉴스릴, 단편영화, 동화로 대단히 상호텍스트적 만화영화를 지켜보는 동안 특히 만일 이들이 워너 Warner Bros.의 것일 때 멜로 드라마와 흡수된 경험으로 앉아있다. 극장 위치가 확실한 유형의 특정 장르와 연계된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만일 드라이브인 극장이 힐긋보기 환경으로 구축된다면 흘긋보기 장르와 근본적인 연계는 이해된다.
상영과 수용의 이들 영화적 양식의 어느 정도의 변주는 “높은,” “낮은” 취향의 견해와 연계되어있다. 이는 가치있는 역사적 연구가 될 것이다. 이 부분은 미래의 연구를 위한 제언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특정 계급, 젠더, 성적 지향, 혹은 민족/인종적 범주내에서 개인은 사회적으로 일부 학자가 그들에게 할당한 수용 양식의 범주에 완전히 고착되기 위해 구성되어진다.
그러나 “응시” 대 “흘긋보기”(내러티브 대 견인)의 두 대립은 수용 양식을 기술하는데 진짜 핸디캡이다. 모더니티의 논의에서 그 세기로 돌아가 조나단 크래리(Jonathan Crary)는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일상세계에서 증가하는 자극은 주목을 위한 관심을 창출한다. 왜 하나의 학문 분야는 그렇게 많은 대항적인 시각을 가지고 집중되는가? 현대자본주의는 “새로운 한계와 발단에 주목과 산만을 강제함으로써 주장해 도고 있다... 그런 다음에 관리되고 규제된 지각 작용의 새로운 방법으로 만응한다.” 란돌프 스타른 (Randolph Starn)은 시각적 주목 양식을 세 가지 범주로 논의한다. 보기와 아는 것의 고려가 특히 분리될 수 없는 시각적 교환에 이미지 호소에 의해 시작되는 (1)“흘긋보기 (grance)”(p. 210), 그러나 이것은 짧은 교환이다. (2)“신중한 시각(measure view)”은 보는 이에 의해 통달되고 보는 이의 눈에 균형 잡힌 한정된 세계의 이미지로 돌아서는 시각적 훈련에 부과된다(p. 220). (3) "꼼꼼히 보기(scane)" 패턴이 지각되고 구별되어지고 디자인의 모양과 함께 조각되는 보기의 철저한 방식이다(p. 222). 스탈른의 개요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만일 위치 양식이 관객의 주목과 집중의 논쟁과 관련된다면 수용의 이분법의 좀 더 풍부한 기술은 자료를 강조하는 두 진영에 의해 작동되었을 때 보다 더 잘 발전될 것이다.
위치의 양식과 상영의 양식에 의해 생산된 주목의 논쟁은 단지 수용 양식에서 영향으로 설명되는 것의 일부일 뿐이다. 또한 수용은 분명히 주의력의 생리적, 심리적 혹은 사회적 요인으로부터 파생되지 않는 감정적 인식적 행동과 활동을 포함한다. 한센은 최근에 대중 범위에서 수용의 범위를 시험하는 것은 수용 양식을 시험하는데 이론적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의 한센의 이론은 외부적 자극의 기초 위에 서술한 이분법의 경향이 있다(보기의 조건, 영화에 의해 제시된 상호텍스트적 범위).
이 연구에서는 영화를 해독하는 수용 양식에 관해 역사적 유물론자적 접근으로 논의해오고 있다. 그런 접근은 해독의 사건과 관련해서 관객의 인식적 감정적 행동을 고려한다. 역사적 유물론자적 접근은 위치와 상영 양식을 인정한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동일시와 영화에서 관객에 의해 야기되는 해독 전략과 전술을 성립한다. 이러한 전략과 전술은 역사적으로 특정한 역사적 환경에 의해 구성되어진다. 때로 역사적 환경은 수용에 대해 그들 자신의 관습화된 양식을 생산하는 팬과 같이 해독적 집단 혹은 문화 집단을 만들어낸다.
역사적 유물론자의 접근은 일부 문화 연구 학분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선호된,” “협상된,” “대항적” 해독 전략의 세 부분을 가능하게 한다. 그 보다 더 특정 세부 사항에서의 과정과 현상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관객이 플롯을 해독하는지, 좋아하는 스타를 지켜보는지, 박진성이 중요한지 혹은 박진성으로 생각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의상이나 시각적 전시가 레즈비언이나 게이 하위텍스트에 실마리를 제공하는지, 어떻게 민족성과 인종이 극장 내에서 “대항적” 응시 혹은 “요청-반응” 행동을 생산하는지에 관해 고려해 왔다.
관객을 연구하면 할수록 학문적으로 요구는 것은 현실적 혹은 전유된 영화 관람 행동의 무엇과 비교해서 그들이 작동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더 비꼬인다. 예를 들어 이론적 엔터테인먼트의 역사가는 지금 수용 양식의 다양성이 모든 계급에서 대중 문화와 엘리트 문화에 참여하고 이들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영화 연구에서 두 이론은 한때 정립을 시도했다. 이것이 수용의 확실한 양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데올로기적 함축성을 가진다. 단지 나는 우리가 이 문제를 아직 해결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거닝, 한센, 코리간의 최초의 이론을 사용한다. 그러나 비록 이들 양식의 어떤 부분은 특수한 상황에 지배되고 있지만, 항상 도시에 일어나는 다양한 일련의 위치 양식과 상영 양식, 수용 양식으로서 미국 영화 역사를 새로운 형태로 만든다 (다시 말해 영화의 위치, 상여의 조건, 지켜보는 존재 프로그램의 부분들, 관객의 개인적 해독 행동). 위치, 상영, 수용의 양식이 적어도 백년 조금 더 되는 시간에 의해 영화를 앞서게 했다고 믿기 때문에 또한 영화의 미래와 새로운 컴퓨터 매체와 인터넷이 자극과 활동의 다양성의 연장선상일 것으로 과감히 말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감소된 범위 내에서 영화관람 범위에 다양성을 밀어 넣는 시도로 궁극적으로 불만족스러운 두 대립보다는 영화의 역사적 감성적, 인식적 인식론과 미학이다. 영화 관람의 경험에 대한 이론에서의 이러한 교체는 저들의 경험의 사회학적, 미학적,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가진 용어가 마침내 도래할 수 있는 더 나은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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