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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임 : 이 글은 님께서 대통령으로 계실 때 드렸던 공개적인 편지글입니다.
정선 아리랑학교를 세우신 진용선님께서 만들어 펴내는 "아라리문학"이라는 정기 간행물에 실릴 원고였지요.
기대와 설레임에서 아쉬움과 답답함만 남아
- 김대중 대통령님께 드리는 편지 -
돌이켜 보면 모든 이의 삶이 그렇듯 저의 삶도 평범한 것은 아니었읍니다.
"씨알의 소리"에서 시작하여 전교조를 거쳐 동녘신문에 이르기까지 사람 사는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애증이 분명하게 드러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정치적인 입장이었읍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바른 정치를 바라는 저의 희망이 자리잡고 있읍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게 되면서부터 지금까지 앞으로 이 일만은 바로 잡혔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줄곧 가지면서 살아 왔읍니다. 지금까지도 저의 가슴을 몹시 아프게 짓누르고 있는 몇 가지 역사적인 일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님께 가졌던 처음의 기대와 설레임은 이제 많이 가셨기 때문에 그 이상은 기대하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먼저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해체시킨 일입니다.
자신의 권력만을 굳건하게 다지려는 한 대통령의 욕심이 이 나라를 지금까지도 심한 병중에서 앓게 하고 있읍니다. 민족정기를 바로잡기는커녕 권력유지에만 눈이 어두웠던 그의 정치 행태는 자신이 목적했던 권력유지도 오래 이루지 못한 채 조국에서 내 쫓겨 숨을 거두는 불행으로 삶을 마감했읍니다. 정치적인 입장이 달랐던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도 그의 정치적 야욕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신탁통치를 건의한 사건으로 탄핵을 당하여 대통령직을 잃게 되었고 다시금 해방된 조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읍니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것은 권모술수에 능한 한 정치인의 야욕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백성들에게도 많은 문제가 있음을 보여 주는 일입니다.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의 삶은 존경과는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우리네 정치인들의 삶이었읍니다.
둘째로 유신독재정치로 수많은 귀중한 목숨이 억울하게 죽어갔던 일입니다.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고, 가족들은 지금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읍니다.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영구집권을 위한 각 가지 방편들이 동원되었읍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를 말아야 했고,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었던 시기는 오래도록 지속되었읍니다.
유신독재는 권력유지와 강화에 통일도 이용하는 대담함도 서슴치 않는 일그러진 정치행태를 양산시키고 말았읍니다. 그 결과 입으는 통일을 외치며 속으로는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시키는 무리들이 늘어만 갔읍니다.
세 번째로 광주민주항쟁으로 무수한 생명이 권력의 젯밥이 된 일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현대를 살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군대를 동원하여 부모요, 형제자매를 총칼로 유린하였읍니다. 동원한 사람이나 동원된 사람이나 정상적인 정신상태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무언가에 씌워도 단단히 씌운 것이 아니면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 백주에 자행되었읍니다. 그것도 도시의 한 복판에서. 이 비극은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황폐화 시켰읍니다.
수많은 죽음이 의문사로, 개인의 살인이 북한 간첩의 소행으로까지 뒤바뀌어 유신독재의 구태가 이어졌던 암흑의 시대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IMF구제금융사태를 초래하여 나라가 온통 경제적 혼란에 빠졌던 일입니다.
무능한 대통령을 둔 나라의 백성은 이처럼 고생해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그런 만큼 대통령을 잘 뽑아야 된다는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서슴치 않고 이렇게 변절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어 또 한번 백성들을 정치적으로 철들게 했던 사건을 연출하기도 했읍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몽롱한 정신은 지금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읍니다.
김대중 대통령님의 당선과 취임은 기대와 설레임에서 시작되었읍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몇 가지 일들이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초는 마련했다는 안도감에서 였읍니다.
먼저, 민족의 정기를 바로잡는 일은 제2건국 운동의 기치를 내 세울 때만해도 기대가 되었읍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허망한 것이 되고 말았읍니다. 개혁의 대상인 사람이 개혁의 주체로 끼어 드는 등 난맥상을 보이면서 제2건국 운동은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읍니다.
권력의 정통성을 이어 받고 있는 정부의 수반으로서 반민특위의 해체라는 과거의 잘못을 분명히 밝히고 다시는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선언적인 의지라도 보여야 했읍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범 김구선생을 목숨을 앗아갔던 장본인인 안두희가 살아 있었읍니다. 그 실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에도 대통령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흘러간 역사라 해서 그냥 덮어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시시비비를 분명히 밝혀 역사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어리석음에서 우리는 반드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유신독재로 인하여 수많은 진실이 왜곡되고, 귀중한 목숨이 억울하게 죽어갔던 일을 바로 잡는 데는 다소 아쉬운 점은 있지만 그런 대로 잘 하고 있읍니다.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를 두어 활동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한 예입니다. 이 단체가 보다 활발하고 확실하게 역할을 해 낼 수 있도록 여러 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박정희 기념관을 세우는 일에 명예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나라 돈을 지원하기보다는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단체를 지원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요? 왜 이따위 질문을 하는지 저 자신도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을 박해하던 자를 용서하여 뭇 사람들의 칭송을 얻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 나라를 바르게 세우는 데는 옳은 방법은 아닌 듯 합니다.
셋째로 광주항쟁으로 무수한 생명이 권력의 젯밥이 된 일을 바로 잡는 데는 적극적이였읍니다. 아쉬운 점은 왜 다른 일보다 더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는가에 있읍니다. 지역주의를 이겨내겠다는 의지의 천명이 퇴색된 점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통일을 권력유지 차원에서 다루어 백성을 괴롭혔던 실상 또한 밝히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넷째로 IMF를 초래하여 나라가 온통 경제적 혼란에 빠졌지만 동분서주하여 경제위기에서 나라를 건진 것은 두고두고 칭송할만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경제적인 침체에서 나라경제를 살리려는 모습도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읍니다.
끝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남북 화해를 이끌어 낸 것은 충격적인 기쁨을 안겨 주었읍니다. 북한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는 계기를 마련한 점도 높이 사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지고 보면 못한 일보다 잘한 일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뭔가 시원한 것이 없읍니다. 나라 전체가 일체감을 갖기는커녕 매번 야당에 이끌려 허둥대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읍니다.
의연하고 당당하게 지도력을 발휘하는 처음의 모습은 점점 없어지고 말았읍니다.
안타까운 일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나라와 백성의 영광을 구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영광을 구하는 일에 신경을 쓰는 모습이 눈에 띄어 고개를 갸웃둥하게 만듭니다.
이게 아니라는 말들이 퍼지고 있읍니다.
먼저 인권상, 노벨평화상을 받으면서 거기에 대처하는 모습에서 많은 아쉬움을 느꼈읍니다.
넓게는 세계 인류의 평화를 위한 것이겠지만 남북화해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주어진 평화상이라면 혼자서 받기 보다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함께 받겠다고 했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그렇다면 남북 갈등의 시대를 뒤로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실질적으로 정착시키는 확고한 계기를 마련했을 것입니다. 물론 세계는 새로운 눈으로 한반도를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주변 강대국의 이해에 덜 휘둘리는 계기도 마련되었을 것입니다. 남북 당사자가 자신의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평화적으로 풀려는 의지를 만천하에 밝히는 절호의 기회가 였다고 생각했읍니다. 그리고 아쉬움은 또 있읍니다. 재야 활동, 선거운동을 하면서 그렇게 즐겨 입던 우리옷을 취임 이후에는 별로 입으시지 않으셨읍니다. 특히 세계의 모든 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진 노벨 평화상을 받을 때 우리의 옷인 두루마기를 걸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인권상을 받을 때나 해외 순방할 때 가끔씩이라도 입으셨다면 민족의 자긍심을 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결과는 그렇지 않았읍니다. 그렇다면 님께서 걸쳤던 두루마기는 당시 재야의 표를 구걸하기 위한 한낱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던 의도된 행동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읍니다.
님께서 취임하시면서 말씀하셨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균형적인 발전은 바르게 방향을 잡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취임 후 내내 야당에 휘둘린 점은 크게 반성할 대목입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넘어지는 야당만을 탓할 것이 못됩니다. 바른 방법으로 상대방의 양심을 대고 정치를 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어떻게든 설득하고 극복하여야 했었읍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도 끌려 다니고만 있읍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님의 지도력이 크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또한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 일과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는 일에 기초만이라도 제대로 놓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읍니다. 그리고 사람을 쓰는 일에도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 없읍니다. 지역편중 인사라는 딱지를 떼어내지는 못하였읍니다. 한때 군사독재 정권에 목을 매었던 사람들을 아무 꺼리김없이 등용하여 개혁작업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개혁은 용두사미가 된 점도 놓쳐서는 안될 일입니다.
지금까지 벌여왔던 남북이 하나될 수 있는 일에 좀더 폭넓고 적극적으로 접근하여야 할 것입니다. 약간의 경제적인 원조나 관광 댓가의 지불만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는 말할 수 없읍니다. 남북이 공통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닥아올 미래는 문화와 정보의 시대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남북화해와 통일에 접목시켜야 할 것입니다. 문화는 삶의 다른 이름입니다. 아리랑은 한 맺힌 삶의 좌절이 아니라 한을 삭여 풀어내면서 자연스레 생긴 소리(가사)문화입니다. 작은 데서부터 큰 곳에 이르기까지 사람 사는 곳, 그곳이 어디든 아리랑은 녹아 있읍니다. 한겨레 한 핏줄인 남북이 헤어져 한을 안고 살고 있는 지금, 또다른 의미에서의 통일아리랑은 계속해서 불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안으로도 밖으로도 우리가 우리임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이 아리랑입니다. 어쩌면 통일 이후의 국호나 국가도 이 아리랑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중요한 아리랑인데도 불구하고 힘겨운 작업은 대부분 개인들이 짊어지고, 헤쳐 나가고 있읍니다. 나라에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정녕 민족을 하나로 묶는 아리랑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또하나 민족을 하나로 묶는 것이 있읍니다.
바로 단군입니다.
하루빨리 신화의 차원에서 벗어나 우리의 뿌리를 찾는 일에,
단군의 실체를 알리고 교육해 내는 일에 매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역사를 없이 여기는 민족이 어찌 번영을 바란단 말입니까?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보다 근본적인 일에 기초를 놓는 작업으로 임기를 마무리하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퇴임하면서 박수를 받는 첫 대통령이기를 희망했듯이 그 희망이 꼭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대와 설레임에서 아쉬움과 바램만이 남은 지금, 아리랑 가락에 아쉬움과 바램을 실어 보냅니다.
* 덧붙임2
1)씨알의 소리
함석헌 선생이 발행한 월간 잡지로 이승만, 박정희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곧고 바른 소리를 질러댔던 잡지로 폐간의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도 있다. 암흑의 시대에 밝은 빛을 발하여 지성인들의 양심을 일깨워 주었다.
2)전교조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의 준말.
60년 4. 19이후 결성된 교원노조가 군사 구테타에 의해 1,500여명의 교사들이 구속, 해직된 이후 80년대 초반까지 20년간 교사운동, 교육운동은 기나긴 암흑기를 맞는다. 이 시기 교육은 정권 이데올로기의 홍보수단이었으며, 교사들은 충실한 전달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그후 87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결성, 당시부터 교사 대중 조직의 궁극적인 형태로써 논의 되어왔으며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 되기 시작한 것이 88년 7월이다. 그해 11월, 전국 2만 명의 교사들이 참가하는 해방 이후 최대 교사 집회로 기록된 민주교육법쟁취 전국교사결의대회가 개최되었다.
89년 1월 제5차 중앙위원회에서 노조결성이 의결되었고, 3월 14일 교직원노조건설특별위원회 발족식을 갖고 5월 14일 교원노조 건설을 위한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발기인 대회 및 준비위원회 결성대회가 있었으며 26일 건국대에서 교원노조 결성보고대회로 전교조가 탄생되었다. 전교조 창립선언문에는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에 대한 의지가 담겨 있다.
3)동녘신문
글쓴이인 전순표가 1991년 창간하여 4년간 발행했던 주간 신문.
강릉에서 발행하여 아래로 삼척까지 정론을 펼쳤던 주간 신문으로 중앙 일간지인 한겨레와 그 성격을 같이 하고 있었다.
4)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협력하면서 악질적으로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사람을 조사, 처벌하기 위하여 1948년제헌국회내에 두었던 특별위원회. 1948년 9월 22일 제정되어 공소시효를 공포일로부터 2년이 되는 1950년 9월 22일까지로 하였다. 그러나 이 법률은 제정당시부터 친일분자을의 견제를 받았는데 특히 일제강점기에 관직에 있던 사람을 중용하였던 이승만대통령이 이 법률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반민특위의 활동이 시작되자 일제강점기에 헌병, 경찰로 친일행위를 한 경력이 있는 경찰간부를 조사하자 경찰이 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에 쳐들어와 직원을 연행하고 서류를 탈취한는 등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친일분자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던 일부 의원들이 이른바 국회푸락치사건으로 구속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후 법률이 개정되어 공소시효가 1948년 8월로 앞당겨지고, 1949년 9월 다시 법률이 개정되어 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를 해체하고 그 기능은 대법원과 대검찰청에 의하여 수행하게 되었다. 결국 반민특위는 참다운 활동을 하지 못한 채 나머지 임무를 검찰에 넘기어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 일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유신독재정치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권력을 독점하고, 장기집권하려는 의도에서 비밀리에 유신헌법을 제정, 공포하여 국회를 해산하는 등 독재 정치로 치닫기 시작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선거인단이 생겨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로 박정희는 계속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1979년 10월 청와대 안가에서 오른팔 격인 김재규 안기부장의 총탄에 맞아 죽기까지 절대권력을 행사해 왔다.
6)광주민주항쟁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민주화를 바라는 광주시민들의 뜨거웠던 싸움. 박정희의 죽음으로 80년의 봄으로 얘기되는 민주화의 싹이 트기 시작하였으나 우유부단했던 최규화 정권으로 인하여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고조되었으며 이 틈새를 전두환 정권이 밀고 들어 왔던 것이다. 최규화 정권을 무력화시킨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갔으며 정권을 장악하여 철권통치를 행하였다.
7)IMF구제금융사태
김영삼 정권 말기,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딸라가 바닥이 나 국가부도위기를 맞은 상태.
긴급히 국제금융통화위원회(IMF)에 따라를 빌려 급한 불을 끌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대기업은 물론 은행이 쓸어지는 등 나라의 경제가 엉망이 되었다. 금 모으기운동은 국가위기 극복에 힘을 보태려는 국민들의 열망에서 시작되었으며 크게 성공하여 IMF시대를 이겨내는 밑거름이 되었다.
8)제2건국운동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8·15경축사에서 분단 50년, 냉전 50년, 건국 50년을 맞이한 시점에서 나라의 근본틀을 국민이 함께 다시 세우기 위한 출발과 다짐의 의미를 담아 ‘제2의 건국’을 주창하면서 이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완성을 위한 총체적 국정개혁이자 국민운동이라고 정의했다. 이후 제2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가 만들어져 본격적인 국민운동에 들어갔으나 개혁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개혁의 주체로 행사하는 등 난맥상을 보여 흐지부지되고 만 상태에 이르렀다.
9)안두희
백범 김구선생 살해 범인.
당시 육군 헌병 중위로 경교장에서 집무 중이던 백범 김구선생을 찾아가 권총을 발사하여 백범 김구선생을 살해하였다.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으나 나중에 풀려나 중령까지 진급하였고, 제대후 군납업에 종사하여 권력의 비호를 받는 것으로 강한 추측을 낳기도 했다. 몇 차례 사실대로의 증언(국회)을 유도했지만 끝까지 전모를 밝히지 않은 채 백범 김구선생 살해범으로 일생을 쫒기면서 숨어 살다 결국 백범을 존경하는 곽태영, 권중희님에 쫓기다 박기정님에 의하여 몸둥로 맞아 죽는 처참한 운명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10)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지금까지 수많은 의문사가 권력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강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 서서 역사의 진실을 바로 잡는 차원에서 이 위원회가 만들어졌으며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1)단군
흔히들 고조선의 시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우리민족의 역사에 대하여 무지, 무식한 것인가를 반증하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단군은 왕이나 대통령처럼 한 나라의 임금(요새 말로 최고 통치자)를 가리켰던 직책의 이름이다. 즉 단군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처음으로 연 고조선(단군조선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됨)의 임금들에게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따라서 단군에 대한 바른 이해는 단순히 단군에 대한 바른 이해의 정도를 넘어 우리의 역사, 특히 우리의 고대사에 대한 바른 이해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단군(임금)으로 불려진 임금은 한 사람이 아니고 마흔 일곱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지금도 매년 하늘이 처음 열린 날인 개천절에 태백산에서는 천제라고 하는 하늘의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여기서 하늘은 하늘이신 환인, 환웅, 단군님께 올리는 제사를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 민족이 처음 나라를 세운, 하늘을 연 날을 기념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선계를 다스리는 환인의 뜻에 따라 인간 환웅으로 세상에 내려가 곰(웅녀=웅족의 무리 중에서 빼어난 따님)과 결혼하여 단군을 얻었으며 이후 단군이 배달민족의 시조가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곰을 숭배하는데 "고맙습니다."의 어원도 "곰" 같습니다."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하늘, 땅, 사람이 하나라는 우리 민족의 사상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하겠다.
여기서 잠시 단군정신선양회에서 펴낸(1986년 2월 28일 발행) "국조 단군"에 관한 기록의 일부분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되어 옮긴다.
- 단군 한배검(檀君王儉)은 배달나라의 맨 첫째 대(初代) 임금이요, 단군은 단군국(檀君國) 곧 「배달나라의 임금(檀君)」으로서 배달나라의 모든 임금들을 통틀어 가르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배달나라의 맨 첫째 대 임금은 한 분인데, 그분을 「단군 한배검」이라 부른다. 단군 한배검을 비롯해서 이 여러 단군들이 다스리던 시대를 일반으로 단군(배달)시대라, 또 나라를 단군 조선(檀君 朝鮮)이라, 한배 검 조선(王儉 朝鮮) 혹은 옛 조선이라 하는데 이 시대가 1,048년(서기 앞 2333년∼앞 1286년)동안이다. (중략) 제1대 단군 한배검, 제2대 단군 부루, 제3대 단군 가륵, 제4대 단군 오사구, 제5대 단군 구을, 제6대 단군 달문, 제7대 단군 한속, 제8대 단군 서한, 제9대 단군 아술, 제10대 단군 노을, 제11대 단군 도해, 제12대 단군 아한, 제13대 단군 홀달, 제14대 단군 고불, 제15대 단군 벌음, 제16대 단군 위나, 제17대 단군 여을, 제18대 단군 동엄, 제19대 단군 종년, 제20대 단군 고홀, 제21대 단군 소대, 제22대 단군 색불루, 제23대 단군 아홀, 제24대 단군 연나, 제25대 단군 솔나, 제26대 단군 추로, 제27대 단군 두밀, 제28대 단군 해모, 제29대 단군 마휴, 제30대 단군 나휴, 제31대 단군 등을, 제32대 단군 추밀, 제33대 단군 감물, 제34대 단군 오루문, 제35대 단군 사벌, 제36대 단군 매륵, 제37대 단군 마물, 제38대 단군 다물, 제39대 단군 두홀, 제40대 단군 달음, 제41대 단군 음차, 제42대 단군 을간지, 제43대 단군 물리, 제44대 단군 구물, 제45대 단군 여루, 제46대 단군 보을, 제47대 단군 고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