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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촌 황희(1363~ 1452, 90세): 본관 장수,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며 세종에게 가장 신임 받았던
재상으로 인품이 원만하고 생활이 청렴한 명신이다.
“鷄卵有骨(계란유골)”의 故事成語 유래가 나올 정도로 조선조 청백리의 표상으로 불렸던 명재상으로
오늘날까지 우리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상이 간략한 황희정승의 프로필이다.
실록 속까지도 나름 곱게 포장시켰지만 그래도 황정승의 실체는 청백리와는 거리가 조금은 먼
그저 그렇고 그런 ‘윤리관’을 지닌 평범한 관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사가들의 중론이다.
그래도 그의 명성만은 딥따 높은 것은 도덕적으로는 깨끗하지 못하였어도 그의 정치적 능력이
부도덕성을 가리고도 남을 만큼 뛰어났기 때문이었는데, 거기에 한 술 더 보태어 역사 승리자들의
과대포장해서 남겨진 기록들이 우리의 인식마저 그렇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각설하고, 이 분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국왕과 중신, 재야 유학자들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기술이
탁월하였고, 진짜 청백리 재상이지만 주도적이거나 분명한 의사 개진이 없고, 신중에 신중하지만
결단력이 부족한 타입의 명콤비 좌의정 맹사성과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것 역시 황희정승이 얻은
다른 하나의 행운이었다. 이제 좀 더 인간 황희의 실체에 근접해 보자.
:: 방촌 황희선생의 영당이다. 말년에 휴식하시던 반구정 아래 자리잡고 있다. (파주 자유로 변)
황정승은 강릉도호부사 황군서의 차남으로 노비출신의 첩을 생모로 해서 태어난 서얼출신이다.
음서(= 애비 덕에 무시험 채용)로 처음 관직에 나왔고, 후에 1384년 22세에 문과 사마시에 급제한다.
첫 부인 최씨는 딸 하나를 두고 24세에 죽었고, 26세에 두 번째 부인 공조전서 양진의 딸과 재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 72현과 함께 은거하지만, 제일 어리다는 이유(?)로 이름을
방촌(尨村: 삽살개 ‘尨’)으로 개명 ‘그래!! 나는 개자식이다.’ 그리고 태조 3년 조선의 관리가 된다.
태조 때 성균관학관, 사헌부감찰, 경기도도사를 거쳤고 정종 때는 병조정랑, 이조정랑을 지내고
승정원 지신사가 되었다. 태종에 이르러 6조판서와 한성부판사 등 요직을 두루 섭렵하며 승승장구
하였는데, 1418년 충녕대군(= 세종)으로 세자를 교체하는 것에 적극 반대하다가 서인으로 전락되고
경기 교하로 유배, 다시 남원으로 이배되며 5년여 간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1422(세종 4년)에 이르러 상왕(= 태종)의 천거로 복직하면서 오히려 더없는 세종의 총신이 되어
좌참찬, 우의정, 좌의정에 까지 이른다. 1427년 사위 서달의 살인사건을 비롯하여, 1430년 투옥된
태석균의 감형을 사헌부에 부탁하여 탄핵 받고 파직되는 등 크고 작은 비리에 연루되어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지만, 세종의 황희에 대한 무한한 옹호와 용서로 무마되었고, 오히려 복직 후에는
영의정에 올라 1449(세종 31년)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재임하였다.
그러나 황희의 세 아들 모두 어느 누구도 과거에 급제한 아들이 없다. 모두가 음서출신이다.
:: 파주 금승리에 사당, 신도비와 함께 있다. 조선초기 분묘라 사각형이다.
우선 장남 황치신(1397~ 1484, 88세)은 음서로 나와서 태종 때 사헌부감찰, 세종 때 동부승지와
호조판서까지 올랐고 단종 때에는 성절사로 중국을 다녀온 후 충청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461년 세조 때 남의 노비를 빼앗아 파직되었다가 1466년 다시 중추부동지사로 복관되었고
1479년(성종 10) 판중추부사까지 지낸 후 퇴임하였다. 사후에 우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처음에 부친의 폭 넓은 후광으로, 1452년(문종 2) 부친상 이후에는 역시 부친과 같은 탁월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며 인정받아 승승장구하였던 것이다.
다음 차남 황보신(1401~ 1456, 56세): 역시 음서로 출사하여 사헌부감찰, 호조정랑, 호군, 종친부
전첨을 역임하였다. 1441년(세종 23) 이복동생 황중생과 얽힌 사건에 직접 연루된 것을 계기로 벼슬
에서 완전히 물러나 상주 모동 수봉리에 은거하면서 수신제가와 후진교육에 힘쓰다 거기서 죽었다.
1457년(세조 2) 좌익원종공신 3등으로 한성소윤에 추증되었다.
삼남 황수신(1407~ 1467, 61세): 1423년(세종 5) 사마시 낙방 후 1431년 세종의 배려로 음서로
종묘서부승이 된 뒤 감찰, 지평, 장령 등을 거치면서 1447년(세종 29) 조선 건국 후 최초로 과거
급제를 거치지 않은 자가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지금으로 얘기하면 고시를 패스하지 않은 채
대통령 비서실장직 내지는 정부 대변인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친분관계의 임원준을 부정발탁한 것이 적발되어 고신을 박탈당하였다.
문종이 즉위하면서 복직되어 한성부윤, 형조참판, 병조참판을 역임하였고, 1452년 부친상 때
사직했다가 단종이 즉위하면서 복귀하여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윤, 경상관찰사로 나가있으면서
수양대군을 지지하여 1455년(세조 1)에 계유정난 좌익공신 3등관이 되어 좌참찬, 우찬성, 좌찬성까지
올랐다. 1462년 보국숭록대부 때 아산의 다전지를 무단으로 점거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세조의
무한한 용서로 유임되고 이후에 1464년 우의정을 거쳐 1467년 드디어 무급제 최초로 3공의 정상인
영의정에 올랐으나 1개월 후 사망하였다.
풍모가 뛰어나고 인품이 중후하면서 원만하여 세조 때 민심수습과 치적에 공헌이 있었다.
그래도 역사는 사실대로 기록한다. 조선 최초의 부자정승이라고. 그것도 영의정으로다... ^^-.
:: 장남 황치신 묘역( 덕양 지축 덕수촌), 신도비각 뒤로 증손 황윤길의 묘소도 있다.
:: 3남 황수신 묘소 건너편에 황희정승의 묘가 있다. 우측이 황정승, 좌측이 황수신이다.
♦ 황정승 집안의 사건, 사고록.
(1)1427년(세종 9) 6월 사위 서달(형조판서 서선의 아들)이 제일 먼저 등장한다.
서달이 장인과 애비 빽을 믿고 안하무인 지방아전 표운평을 때려서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황희는 평생의 파트너 맹사성에 협조를 부탁하여 그들의 힘으로 형조까지 나서서 문서를 조작하여
서달을 석방시켰다. 탄원으로 세종의 재조사가 떨어지자 사건조작이 들통 나면서 두 정승 모두
파직되고, 사건 관련자 모두 처벌을 받게 되었다. 다만 세종의 황정승에 대한 못 말리는 애정으로
1주일 후 두 정승은 다시 복직되었다.
(2)1427년(세종 9), 장남 황치신이 정4품직 호군시절, 조선의 대형 섹스스캔들 유감동(兪甘同)
사건에 연루되어, 律 대로라면 杖 80에 귀양이지만 아비 덕에 파직으로 일단락 지었다.
(다음에 한 번 반드시 살펴볼 만한 역탐의 주제 ‘조선의 삭스 스캔들~’)
(3)1428년(세종 10) 1월, 직접 황정승이 납시었다. 사건인즉 첨절제사 박유가 청각(= 해초류)
두 말을 황희에게 뇌물로 주었다가 감찰관리에 뇌물행위가 걸렸다.
그러나, 뇌물을 주었던 박유는 파직되고, 받은 황정승에게는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하여간 원인제공자는 혼나야 마땅해, 받은 사람이야 주니까 할 수 없이~~~ 그래서 무죄!!!
(4)1428년(세종 10) 6월, 다시 황정승이다. 임진현의 驛吏 박용이 조연이란 자를 폭행하고는
임진현감에게 황희 이름을 팔아 무마시키려고, 妻를 통해 말 여러 필을 황정승에게 보냈다.
황정승님 보답으로 청탁성 편지를 한 통 넣어주었는데 사헌부에 꼬리를 밟혔다.
의금부를 오가는 수모는 겪었지만 역시 그것뿐이었다.
(5)1428년(세종 10) 6월, 이번에는 황정승의 부도덕성이 드러난 간통사건에 등장한다.
황정승의 절친인 박포는 왕자의 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태종의 형 방간을 꼬득여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지만 방원에게 패하여 유배를 갔다가 참형을 당하였다.
박포의 처는 죽산현에 홀로 살았는데, 젊은 종과 사통한 것을 우두머리 종이 알게 되었고, 이를
빌미로 협박하자 그를 죽여 우물에 버렸다. 시신이 발견되어 사건이 발각될 처지에 놓이자 이를
두려워하여 서울로 도망하여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서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그 때 황정승과 거시끼니한 요상스런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후일 박포 처는 사건이 무사히 종결
된 것을 보고 죽산현으로 돌아갔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관들의 혹독한 탄핵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황정승의 “아닙니다.”라는 변명
한 마디에 그를 끝까지 옹호하며 지켜주어 사건은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1428년(세종 10)은 참말로 황정승에게는 다사다망했던 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6)1429년(세종 11) 7월, 차남 황보신이 관청의 쌀을 빼돌리다 적발되어 호조정랑에서 파면되었다.
(7)1430년(세종 12) 11월, 다시 황정승이다. 제주 감목관 태석균이 말 천여 필을 죽게한 책임으로
처벌을 받게 되자 중신들에게 뇌물을 주었고, 황희 역시 받아 챙겨 넣었다.
황희가 형조에 감형 부탁한 것이 사헌부에 의해 탄로가 났고, 결국 고발당하여 탄핵을 받고
이번에는 일단 파직을 당했다.
(8)1431년(세종 13) 4월, 파직 중이던 황정승의 수뢰 사실이 하나 더 밝혀지게 되었다.
前내섬주부 박도가 교하현감 시절에 둔전을 상납하고 아들의 벼슬을 청탁한 것이 터졌다.
행수 벼슬을 주었다며 매관매직의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고위공직자 비리에 걸렸다.
그러나 그 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처벌도 없었고, 다만 황정승의 복귀가 조금 늦어졌을 뿐이었다.
황정승은 이듬해 9월 오히려 승진하여 영의정직을 제수받으며 궁으로 컴백한다.
(8)1434년(세종 16) 8월, 장남 황치신이 유감동사건 이후 복직하여 정3품 동부승지가 되었다.
나라에서 금하는 기생집에서 술 마시다 걸려서 다시 파직되었다. 이번에도 2년 후 종3품 첨지
중추원사로 다시 제수되어 벼슬길에 또 다시 오른다. 황정승의 능력은 정말~
(9)1436년(세종 18), 이번에는 친자식이 아니고 서자이다. 어쨌든 자식은 자식이다.
황정승은 일찍이(?) 궁 안의 내섬시(2품 이상 관리들의 음식과 술, 안주 등을 대접하는 관청)
여종을 첩으로 두어 자식을 낳았으니, 그가 서자 황중생이다. 이제는 서자까지 나선다....
황중생 역시 음서(蔭敍)로 동궁전의 소친시(小親侍: 궁중 사환)로 넣은 것은 동궁이 왕으로
즉위하면 측근을 챙길 것을 사전에 계산한 두뇌회전의 귀재의 작품이었지만, 이 모자란 황중생
엉뚱하게 내탕고(: 왕실금고)에서 20량짜리 황금잔과 세종의 동생 광평대군의 금띠를 욕심내
훔쳐내었는데, 확인하는 이도 없어서인지 별 탈없이 유야무야 넘어갔다.
4년이 지난 1436년(세종 18) 10월, 이번에는 동궁의 이엄(耳掩: 방한귀마개)을 훔쳤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걸렸다. 즉각 의금부 추국이 시작되었고, 걍~ 매 앞에 장사있습니까? 추국 중에 4년 전 사건까지 몽땅 술술 털어놓을 수밖에, 더 큰 문제는 황중생이 훔쳐간 장물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다시 발생되는데... 황중생이 독식한 것이 아니니까 물귀신 작전을 쓸 수밖에.
(10)1440년(세종 22) 12월, 황중생이는 추국에서 20량의 금잔이 9량이 부족하여 계속해서 추국을
당하게 되자 황정승 차남인 이복형 황보신에게 주었다고 자백한다.
대질심문하니까 다 나온다. 아니 붙잡아서 몇 대 패면 더 나온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없던 것도
맹길어서 나온다. 사실인즉 황보신이 의금부지사 시절 자신의 애첩 ‘윤이’에게 주기 위해서
말 한 필과 베 2필을 훔쳐서 황금 9량과 함께 모두 첩 윤이에게 준 사실까지 실토하였다.
의금부 조사 결과 압수한 장물에서 금비녀, 비단 4필 등을 모든 것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의금부 보고서에는 “1440년(세종 22) 12월20일: 황보신이 도용한 잡물은 장물로 계산해 33관으로,
청하옵건대 律에 依해 杖 1백 대, 流 3천리에 자자(刺字)하게 하고, 그 첩 윤인은 추문에서
처첩고부율(妻妾告夫律)을 의거 杖 1백에 도(徒) 3년에 처하게 하소서” 요래 보고서가 올라갔다.
결국 황보신은 杖 1백도 얻어맞고, 얼굴에 ‘도(盜:도적놈)’라 먹물로 문신뜨는 刺字刑은 면하고,
流 3천리는 속(贖: 보석금)으로 바치게 하였다. 첩 윤이는 杖 1백도 얻어맞고(※간음이 아니었으니
엉덩이는 안 깠겠다. ^^-) 함길도 경원의 관비로 삼으면서 이 사건이 종결되었다.
이 사건 이후 차남은 벼슬길에서 아주 안녕하고, 아픈 엉덩이를 이끌고 경상도 상주로 내려가
반성의 수신제가하면서 지냈다. 문종 때 혼란기에 다른 형제들과 같이 똑똑하게도 기운 센
수양대군 측근에 잘 붙었는데... 으쩌까나~ 부활의 날이 오기 전에 죽었으니 All The End다.
(11)1441년(세종 23): 황정승 집안 사건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집안의 대들보 장남 황치신이다.
년 전에 아우 황보신이 파직되면서 연봉으로 받은 과전을 국가에 반납하는 과정에서 돈 되는
좋은 땅은 자기가 갖고, 대신 본인소유의 거친 땅을 반납했는데... 고 짓거리가 걸려버렸다.
“역시나 흐르는 핏줄은 윗물과 아랫물이다.” (속담 두 개를 잘 섞으면 이런 속담이 나온다.)
당시 호조참판이던 황보신 역시 파직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잘난 두 아드님의 아비가 누구인고??
천하의 황정승님이신데... 황정승님 일련의 모든 사건의 원인제공자인 서얼 황중생이너무 괘씸했는지 책임을 황중생에게 돌려 ‘황’씨 성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이후로 그는 에미의 성을 따서 ‘조중생’이 되었고, 장남과 차남의 직첩은 세종 승하하고 새롭게
문종이 즉위하자 국왕에게 직접 청하여 아들들의 직첩을 돌려받았다. 역쉬~~
(12)1452년 황정승이 90세로 타계한 이후로도 아드님들의 축재의 악습은 계속되었다.
장남은 세조 때 남의 노비를 빼앗다가 파직되기도 하였고, 아산에 개간한 나라 토지를 추진한 공을
내세워 대부분 자신 명의의 농장으로 만들었다가 탄핵을 받기도 하였지만, 물려받은 탁월한
유전자적 능력으로 세조, 예종을 거쳐 성종 10년까지 벼슬에 있다가 88세로 타계하였다.
삼남 역시 1462년 보국숭록대부 때 역시 충청도 아산의 농지를 무단으로 점거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세조의 묵인과 비호로 그대로 유임되었다. 황정승과 형보다는 장수하지 못하였지만, 당시로서는
환갑을 지냈으니 가히 장수집안이라 할 만하다.
황정승님댁 본향이 ‘장수(長水)’라서 명줄도 길어서 ‘장수(長壽)’하셨나??
:: 황정승이 말년에 '갈매기를 벗삼아 즐기는 곳' 이라며 반구정(伴鷗亭)이라 지었다. 한명회의 강남
압구정(狎鷗亭) 역시 갈매기를 벗 삼아 지내겠다는데... 한명회에겐 뭐라하고, 황정승은 냅두고. 메야!!
- 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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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알려진 바와는 달리 구린내나는 일 많이 했죠....견공자제분이라 점잖게 불러보죠..
반구정나루터나리와 산행 후 반구정 어구이 먹고..훈장님 안내 따라 반구정 정자에 올라 닥터님이랑 스트레칭도 하고..황희정승 이야기도 들었는데..
이러다..알고나면 스런 역사 속 인물들이 많아지겠어요.
고양시에 있는 수많은 묘소 훈장님 안내로 많이 둘러보았어요.
알려진 바 보다 존경할 만하고..훌륭한 인물도 반면 많이 있겠죠
잘 보고 갑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그뭣이냐 늘어진감나무사건의 송사도 해결해주고 그러지않았나유?
어렴풋이 생각나는데 다른분얘긴가?
암튼 서얼출신으론 최고로 출세한분이지 싶네요~
잘읽었습니다!!담은 뭘까요?ㅎ기대만땅!!^^♥
사실을 알고 나면 실망을 넘어 배신감이,,,,,,,,
네 학무님~~ 제대로 읽으시려면 학무님같이 바쁘신분은
아마 전화 몇통 받으시는것은 아니신지요. ^&^
저도 새로운 사실에 깜짝 놀랍니다~~ 역사에 흥미많은 저에게는 넘 좋은 정보입니다~~ 열공할께요^^
이런 간장 고치장 된장 ㅋㅋ
씨도둑은 정말 몬혀유 ㅎㅎ
이러다 넘 많이 알모 난초가 식초되겄네유
수고허셨십니당 ㅎㅎ
은근 흥미 진진..
역사공부 사부작 되네요~~
아아~~~~오늘은 시간상 감탄만하고 갑니다.
썬캔디님~~! 내린천 꼭 같아가요.
질문이 있는데요 음서 출신이 뭐죠 ? 제가 너무 지식이 짧아서.
고관대작 자식들 과거 거치지않고 특채 하는것이지요.
MB시절 외교관자제, 국회의원 자식들 특채가 많아서
문제가 많았던적 있는데요. 그와 유사한것 입니다.
역쉬 하나또하나님이십니당...
황희 정승의 '불편한 진실' 잘 읽고 갑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