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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지의 power culture interview 밴드 들국화
노래여 잠에서 깨라!
-한국의 비틀즈 들국화, 제자리로 오다.
명명하는 것에는 그순간부터 의미가 깃든다. 들국화, 거친 들에 핀 생명력 강한 꽃, 졌다 다시 피고 또 져도 다시 살아나는 그 꽃처럼 들국화가 자기 자리로 왔다.
1980년대, 그 암울하고 답답하던 시대에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들국화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처럼 다가왔다. 그 문만 열고 나가면 환한 빛이 들어올 것처럼 사람들을 설레게 한 들국화의 출연은 1960년대 영국에서 비틀즈가 나온 것처럼 우리를 놀라게 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음악이 있었어?’
이전에 한국적 락그룹인 신중현 밴드가 있었지만 영국이나 미국식 락에 매료되어 있던 그 시대 젊은 층에게는 락음악은 일단 가요보다는 팝송이 우위였다. 그런 그들에게 들국화는 우리에게도 진정한 락이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들국화 이후로 사람들은 가요가 일반적인 사랑타령의 노래가 아님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 그러나 나의 과거를 사랑할 수 있다면 / 내가 추억의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 행진 행진 행진 하는거야 / 행진 행진 행진 하는거야
나의 미래는 항상 밝을 수는 없겠지 / 나의 미래는 때로는 힘이 들겠지 / 그러나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 /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거야 / 행진 행진 행진 하는거야 / 행진 행진 행진 하는거야 / 난 노래 할꺼야 매일 그대와 / 아침이 밝아올 때 까지
전인권이 만든 <행진>과 최성원이 만든 <그것만이 내 세상>은 달라도 완전히 달랐다.
세상을 너무도 모른다고 나보고 그대는 얘기하지 /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봐 / 혼자 이렇게 먼 길을 떠나나봐 / 하지만 후횐없지 울면 웃던 모든꿈 / 그것만이 내 세상 / 하지만 후횐 없어 찾아 헤맨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 / 그것만이 내 세상 /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나또한 너에게 얘기하지 /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 그래 아마 난 세상을 모르나봐 / 혼자 그렇게 그 길에 남았나봐 / 하지만 후횐 없지 울면 웃던 모든꿈 / 그것만이 내 세상 / 하지만 후횐 없어 가꿔왔던 모든 꿈 / 그것만이 내 세상 / 그것만이 내 세상
그들은 그 시대를 음악으로 버텼다. 작곡가이자 베이스를 맡고 있는 최성원의 말처럼 “특별히 저항한다거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곡을 만들거나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냥 바른 생각을 말하고 싶었어요. 이상한 세상에서는 올바른 이야기가 저항이 되고 거부로 보여지더군요.”
그들이 함께 음악을 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비틀즈가 공식적으로 함께 활동한 세월이 팔년 정도였던 것처럼 들국화도 그와 비슷했고 정식 음반이 나온 건 라이브음반을 합해 단 세 장이었다. 1962년 비틀즈가 지금의 대중들에게도 신선한 것처럼 1985년 1집을 발표한 들국화의 음악은 날 것, 그대로였다. 뻔하지 않은 음악 때로는 낯설지만 새로운 메시지를 던져서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 음악이었다.
보컬 전인권과 베이스 최성원은 그당시 부단히도 싸웠다고 했다. 점심 식사 메뉴를 뭘 먹을까로 시작해 늦은 밤 포장마차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정리할 때까지 그들은 하루에 삼십번도 넘게 다퉜다. 끊임없이 존재를 확인하고 끊임없이 서로를 섞어가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그들에게 철학을 만들어가도록 했다.
그들은 모두 자기 색깔이 정확했다. 전인권은 하드락처럼 다이나믹한 음악을 하고 싶어했고 주찬권은 정통의 클레식 락, 최성원은 미성을 가져서인지 부드러운 발라드락이나 팝을 하고 싶어했다. 도성(道成)한 사람들의 정점이 하나인 것처럼 그들은 달랐지만 음악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순간은 같았다.
하지만 천재들은 같이 가기 쉽지 않다. 그들은 일 년만 서로 떨어져서 각자 음악을 하고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23년이 흘렀다. 비틀즈가 그런 것처럼 존레논 같았던 보컬 전인권은 자유의 극치를 맛보기 위하여 거칠 것 없이 자신을 실험했고 절망했다. 그는 구원을 찾아 헤메는 시대의 부랑아였다.
폴 메카트니와 같은 최성원은 이미 자신의 감성과 대중의 감성을 알았고 그안에서 실험하고 싶어 했다. 댄스음악이 주류인 판에 다른 식의 코드를 내놓은 이적과 김진표의 ‘패닉’의 음반을 제작하는 등 비주류를 주류로 만들어 시대를 이끌었다. 그는 들국화의 맏형이었다.
링고스타 격인 드러머 주찬권은 음악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작곡하고 연주하고 그렇게 그냥 자신은 살았다고 했다. 그는 들국화 멤버 중에서도 쉬지 않고 앨범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지난해에도 6집 <지금 여기>를 발표하는 성실성을 보인다. 그는 생활음악인이다. 늘 연주하는 곳에 있고 음악 하는 이들 곁에 있다.
그들은 달랐지만 같았다. 어떤 상태나 환경에 있든 음악 하는 사람들이었다. 음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23년 만에 그들은 다시 함께 음악을 하기로 했다. 비틀즈보다 들국화가 더 대단한 건 이것이다. 그들은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났다는 건 지난 시간동안 그들이 헤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로 신곡을 만들어 오는 4월 콘서트를 하기 위하여 연습하는 자리를 찾아갔다. 과장하지 않고 말하건데, 음악인으로의 세월은 그들을 비켜가 있었다. 청년 셋이 반주를 해주는 친구들과 어울려 한없이 음악을 조율하고 재편성하고 새롭게 만들고 있었다.
“이 곡에서는 인트로(도입)를 넣어야 해. 인트로 만들어 보자.” 최성원이 말하면
“이 곡의 리듬은 여기서는 좀 강하게 끊어줘야 하지 않을까? 걷고 또 걷고, 그거 찬권아 끝을 살려보면 어떨까?” 전인원이 말하고
“이건 리듬을 A에서 B로 갔다가 다시 A, B, B, 그리고 A로 들어가면 돼.”라고 주찬권이 말한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자.”
그들의 이견은 없다. 그 옛날에도 그들은 상대의 음악적 색깔을 존중했다. 함께 할 때면 최대한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세상을 보는 눈은 같았지만 세상을 대하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연륜의 힘까지 더해져 깊이를 서로 알고 있다. 사십년 가까이 친구로 지내면서 속속들이 어쩌면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것보다 상대를 더 알고 있는지 모른다.
지독하게 가난해서 세상에 미련이 없었던 순간에 바위 위에 핀 한송이 야생화의 생명력에 다시 산을 내려온 주찬권, 돈은 없었지만 돈을 쫒아 음악을 하지 않은 그는 음악을 하는 순간,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운 드러머이다. 주찬권은 들국화가 영원히 함께 하는 길을 가고 싶어 했다. 가장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고 말수도 많지 않지만 드럼을 치는 그의 모습은 열정적이다. 게다가 드럼이 상대화 되지 않고 그가 다 아울러서 안고 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연륜 덕인지 그의 품성 덕인지 구별이 가지는 않는다. 그는 여전히 수줍다. 주장이 강하지 않은 그가 들국화를 다시 하자고 했단다.
내가 아는 성직자 한 분은 성직자가 된 이유는 자유 때문이라고 했다. 진정한 자유를 얻고 싶어서였다고, 얻었느냐는 내 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전인권은 자유롭고 싶어 했다. 그 한 방편이 대마초였다. 대마초를 피우므로 세상에서 한없이 내몰린 그는 자신을 방치하기도 했다. 필리핀 태국 등 국경으로 혼자 거칠게 길을 떠난 적도 있었다. 그에게 자유는 철저한 외로움을 동반했다. 자유의 극점에서 전인권이라는 자기 자신은 없었다. 그게 자유라는 것도 알았다. 세상에 속하는 한 세상에서의 자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기꺼이 그는 요양원으로 갔다. 그를 진짜 자유롭게 한 것은 사랑이었다. 활동을 하지 않는 들국화를 끝까지 놓지 않고 버텨주는 팬들과 ‘내가 전인권 좋아하잖아.’ 라는 아내 정혜영의 말이 그를 움직였다. 요양원에 들어간 이후 늦게 낳은 아들은 거의 매일 전화를 했다. 처음엔 전화도 받지 않고 버티기로 했다. 눈물겨운 시간을 견디면서 그는 속으로 중얼중얼 최성원이 만든 ‘그것만이 내 세상’을 읊조렸다.
‘세상을 너무도 모른다고 나보고 그대는 얘기하지 조금은 걱정된 눈빛으로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고개를 떨구며 그 노래를 입으로 부르면 쓸쓸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죽을 때 후지게 죽고 싶지 않았어요. 게다가 나는 세상에서 받은 게 많아요. 다 갚고 가야지요.” 그래서 그는 주찬권이 들국화를 다시 하자고 했을 때 그래, 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최성원은 그들과 좀 달랐다. 작사 작곡도 하고 음악 제작도 하고 자신의 노랫말처럼 ‘제주도의 푸른밤’으로 가서 재미있게 지내고 있었던 그는 좀 더 놀고 싶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제주도를 가자고 했지만 따라나서지 않아 그는 혼자 제주도에 이년 째 머물고 있었다. 농담처럼 혼자 홀아비 생활을 하고 싶었는데 바람이 이루어졌단다.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를 달리면서 혼자 놀기도 하고 라이브 카페에 가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그는 처음으로 자기 인생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 주찬권과 전인권이 찾아와 들국화를 다시 하자고 했다. “인권이가 제주도에 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옛날보다 더 소리가 좋아졌다는 생각을 했어요. 굵고 다이나믹한 소리에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더해졌다고 할까?” 그는 다시 노래를 할 수 있는 전인권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세 사람은 음악에 대한 서로의 생각이 같았다. 그들이 처음 음악을 시작하던 80년대와 마찬가지로 무언가 노래는 많고 세상은 시끌벅적한데 진짜가 없는 것 같아, 라고 느꼈던 것처럼 세계시장까지 넘보며 외형적으로는 커져 가는데 메시지가 없었다.
인천에서 열린 지산락페스티벌에 2012년 참여하면서 젊은이들의 눈빛에서도 그들은 그걸 읽었다고 했다.
‘우리 속고 있었구나.’
음악은 기술의 발전이나 장비 혹은 댄스 실력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음악은 한 가지 감성만 자극하면 안돼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감성을 다 끌어내야 해요. 자연스럽지만 감동과 공감이 오는 것,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진짜 음악이지요.”
한마디로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걸 다시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곡 발표를 서두르지 않다가 새로운 작업을 진행 중이다.
‘노래여, 잠에서 깨라!’
다섯 곡 정도 새로운 곡을 만들고 있다. 이번에는 예전과 많이 다르다. 전에는 각각 작사 작곡을 하고 노래를 내놓았다면 이번에는 모두 다 공동 협력 작업이다.
전인권은 슬쩍 무서운 곡도 만들 거라고 한다. 사람들의 심장을 서늘하게 하는 곡이라는데 이들은 또 무슨 즐거운 반란을 들고 나오려는 걸까? <4분의 5박자> 따끈한 신곡부터 아직 제목이 확실하지 않지만 <걷고 또 걷고> 라는 곡에서 인생의 깊이를 보이는 가사까지 그들의 청년처럼 살아있는 음악들이 4월 4일부터 14일까지 420석 규모의 합정동 메세나폴리스에 있는 인터파크 극장에서 곧 세상으로 나온다고 한다.
최성원의 말처럼 단순하게 비트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음악적 감수성을 사람들로 하여금 얼마나 일깨우게 하느냐에 초점을 두고 작업을 하는 중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은 메시지가 살아있는 음악이고 싶어요. 그게 들국화스러운 거니까요.”라는 주찬권, 조용한 그가 드럼 앞에서는 돌변하는 것처럼 무대 위에서는 또 그 옛날 살아있는 날 것이 툭 나와서 사람들에게 ‘아 진짜가 있구나’, 라고 알려줄 것 같은 예감은 단순한 예감이 아니라 실제가 되어 있다.
마포의 한 연습실, 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맨 전인권과 여전히 신사다운 최성원과 미소년의 웃음을 지닌 주찬권, 그리고 4월 공연을 위해 모여준 음악감독과 키보드를 맡고 있는 박환, 세컨키보드에 이환, 기타에 정현철, 임상일, 한국에서 음악활동을 하는 일본 친구 하찌가 새롭게 합류해서 노래도 잠에서 깨고 우리도 잠에서 깨라고 전차처럼 멀리 기적소리를 울리며 크게 다가오고 있다.
연습실 밖에서는 오노요꼬의 감성과 신시아의 모성을 지니고 오래도록 곁을 지키고 있는 전인권의 아내 정혜영이, 들국화를 너무 사랑하는 들국화컴퍼니의 대표 박권일과 윤일주실장이 그리고 들국화의 음악이 끊어지지 않도록 가까이에서 응원하는 팬들이, 그들에게 헌정음반을 받치며 존경하는 후배들이, 더 넓게는 음악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음악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들국화는 싸이가 한국의 음악을 세계에 말했듯이 그들도 자신들의 음악을 세계에 보여주겠다고 한다. 들으면 기절해 버리는 음악을 만들 거라며 소년처럼 말하는 이들, 그 말이 결코 빈소리가 아님을 가서 보고 들으며 다시 제자리로 와줘서 고맙다고 정말 참 고맙다고 고백을 한다.
글 사진 신희지
자료사진제공 팬카페 들국화
차와문화 2013년 3-4월호 중에서
* 20일 오후 5시 들국화의 영원한 드러머 주찬권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조금전 페북으로 보고 놀란 마음에 올립니다. 조만간 새로 음반 내신다고 들어서 올해 가기 전에 공연보러 가야지 날만 잡고 있었는데...
주찬권님과 누구보다 가까웠던 시문학반의 콩이맘 이윤정님 마음이 누구보다 아프시겠네요.
이시대의 음악인 한분이 떠난 것을 개인적으로 더욱 더 애도하며...
마감만 아니면 당장 올라가고픈 마음입니다.
서울에서 좀 전에 내려왔는데 아쉽네요.
* 위 사진의 저작권은 신희지와 차와문화에 있으며 도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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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그들의 자유와 융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결과물들이 진정 시대의 불꽃이었지요 .
여전히 그렇군요.
신쌤 글도 재미있고 흡인력이 있었어요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모두들 가고 또 가네요.
혹시 신샘과의 만남이 마지막 인터뷰가 아니었을까 생각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