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오니즘과 인티파타 운동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도전과 아랍인의 응전
이을상(동아대 강사․ 철학박사)
1. 시오니즘의 승리: 이스라엘의 건국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북쪽으로 80 km 떨어진 항구도시 하이파에서는 조촐한 의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말쑥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한 영국 신사가 휘하부대의 한 분견대로부터 경례를 받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팔레스타인 주재 마지막 영국 고등판무관 엘런 커닝엄 경이었다. 지중해 앞 바다에는 순양함 한 척이 떠 있고, 부대를 사열한 후 그는 모터보트를 타고 순양함에 올랐다. 이로써 31년 간에 걸친 팔레스타인의 영국통치는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같은 날 팔레스타인의 65만 유대인들은 라디오 주위에 모여 앉아 라디오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마침내 정각 오후 4시가 되자, 유대인들의 오랜 지도자 다비드 벤 구리온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다. 전장에서 평생을 보낸 그는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원고를 읽었다. “유대민족의 민족적, 역사적 권리와 국제연합의 … 결의에 의해 우리는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수립했으며, 그 나라를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을 선포한다”
1917년 12월 예루살렘에 입성한 영국군은 터키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탈취하고,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의 건설을 구체화시켰다. 즉 영국 외무부장관 아서 벨푸어가 유대계 영국인 과학자 차임 와이즈만에게 했던 약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뒷날 '벨푸어선언'으로 구체화된 이 약속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영국정부는 유대민족의 민족적 본거지를 … 설립하는 것을 호의적으로 고려할 것이나 … 팔레스타인에 있는 기존 비(非)유대계 공동체의 시민권과 신앙권을 손상시킬 수 있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영국이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즉 1차 세계대전 중에 와이즈먼은 몇 가지 중대한 과학적 발명을 하여 영국의 전쟁노력에 공헌했고, 밸푸어 선언은 이런 와이즈먼의 공헌에 대한 대가였다. 물론 여기에는 전쟁 중에 경제적 영향력이 컸던 유대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려 했던 런던 당국의 희망도 한몫을 했다. 이렇게 서로의 이익이 맞아떨어지면서 시오니스트들은 꿈에 그리던 그들의 열광적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마침내 1922년에는 국제연맹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잠정적 권리를 인정하고, 밸푸어선언의 원칙들의 실행을 위임했다. 이에 영국은 아랍국가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중동지역을 분할 통치할 것을 비밀리에 합의했다. 즉 영국은 이집트에 대한 관할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이라크, 요르단 동쪽의 팔레스타인 지역, 아라비아 반도의 남부와 동부 해안지역을 장악했고,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점령했다.
1922년 무렵에는 약 8만 5천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성서시대 이후 팔레스타인에 계속 살아온 유대인의 후손이었으며, 일부는 19세기 말 동유럽에서 일어났던 반유대 난동을 피해 이주해 온 난민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독일에서 새로 들어선 나치정부의 반유대인 정책에 자극되어 독일에 거주하던 수십만 유대인들이 1933년에서 1939년 사이에 유럽을 탈출하여 상당수가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문제가 생겼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아랍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던 연합국 측은 아랍의 추장들을 달래기 위한 명분으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유입을 제한했다. 즉 당시 팔레스타인을 관할하던 영국 정부는 급기야 향후 5년 간 이민자 수를 7만 5천으로 제한한다는 백서를 발표했다.
그 시기에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나치점령 하에서 투옥되었으며, 그 중에서 600만은 히틀러의 집단수용소 내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유럽의 유대인들은 필사적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일부는 영국군에 입대하는가 하면, 또 일부는 조그만 선박을 이용하여 팔레스타인에 밀입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유대인의 불법이민을 저지하기로 결정한 영국당국은 팔레스타인 연안에 강력한 해상 순찰망을 조직하여 밀입국자들을 강제로 출항지로 돌려보내거나 중앙아프리카의 영국령으로 보냈다.
이러한 영국군의 몰인정한 처사에 격분한 팔레스타인 거주 유대인들은 마침내 군대를 조직하여 영국군에 대항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유대대행기구(Jewish Agency)의 군사조직인 유대국민군(Haganah)이 있었다. 그 대표적 군사지도자가 벤구리온과 골다 메이어 같은 사람들이다. 이 두 사람은 후에 이스라엘의 총리를 역임한 철저한 시오니스트들로 무기를 나라 안으로 밀반입하는 한편, 영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계여론을 환기시키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분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석유자원이 풍부한 중동에 대한 소련 침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계속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유입을 제한했다. 이에 대항하여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무기를 잡았다. 그들의 목표는 영국군과 군 시설물이었다. 1946년과 1947년 사이에 지하 테러조직의 대원들이 10만 영국 주둔군을 대상으로 기습 및 폭탄공격을 자행했다.
그러자 1947년 영국은 마침내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회부했다. 1947년 11월 29일 수 주일에 걸친 열띤 토론 끝에 유엔총회는 33대 13(기권10)으로 팔레스타인을 두 개의 독립국으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의 요지는 110만 아랍인들의 국가와 65만 유대인들의 국가를 따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승리의 순간이었지만, 아랍인들에게는 불법 무도한 행위이고, 오랫동안 그들의 땅으로 생각해 온 지역을 강탈당한 것이었으며, 피로 보복해야 할 모욕이었다. 아랍인들은 즉각 반격을 가했다.
2. 아랍인의 반격
팔레스타인의 분할을 예고하는 유엔결의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예루살렘의 아랍인들은 인근의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공격․살육했고,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인근 국가에서 규합한 아랍 게릴라들은 유대인 정착촌을 포위하고, 교통통신망을 단절시켜 버렸다. 1947년 12월에 이르러 팔레스타인은 사실상 내전상태에 들어갔지만, 서서히 철수하던 영국군은 이에 개입하기를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운명은 말 그대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대부분 소총만으로 무장한 유대인들은 정착촌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아랍인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분할결의안 통과에서 국가 선언에 이르는 약 6개월 간 유대인들은 단 한치의 땅도 내주지 않고 굳건히 버티었다. 그들은 유대대행기구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행동을 취했는데, 이 기구는 영국군이 떠나고 국가의 통치권이 수립될 때까지 유대인들의 공식기구였다. 이런 유대인들을 지켜준 것은 단결과 조직, 이 두 가지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랍인들에게는 이 두 가지가 없었다. 팔레스타인과 인접해 있던 아랍 제국은 시오니즘을 혐오한다는 데에는 뜻을 같이 했으나, 강력한 지도자가 없었다.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치밀한 전략을 수립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단결되지 못한 아랍에 대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즉각 공세를 취했다. 1948년 봄에 유대국민군은 유엔이 제안한 유대국가 내의 모든 주요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들이 점령한 도시들 가운데는 항구도시 하이파와 아랍인 도시 욥바, 시리아 국경 부근의 사파드, 예루살렘 신도시가 포함되어 있다. 예루살렘 신도시는 인접한 보다 작은 구도시와 함께 유엔이 국제지역으로 지정한 곳이었다.
그러자니 유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기와 무기를 사들일 돈이었다.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유대대행기구(Jewish Agency)는 1948년 초 골다 메이어를 미국으로 파견했다. 불과 한 달 동안 회오리바람처럼 미 전역을 순회하며, 메이어는 유대계 미국인들로부터 5000만 달러를 모금했다. 그리고 유럽 6개국의 잉여 장비 보관 창고에서 무기―기관총, 소총, 바주카포, B-17 폭격기, 그리고 아이러니칼하게도 나치 십자문양을 다윗의 별로 덮은 몇 대의 독일제 메서슈미트 전투기들―를 구입했다.
한편 그 순간에 아랍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을 침공하기 위한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아랍의 작전계획은 단순한 것이었다. 남부로부터 강력한 이집트 육군 2개 여단 1만 병력이 네게브를 석권한 다음 1개 여단은 텔아비브를 향하고, 다른 1개 여단은 예루살렘으로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동쪽에서는 트랜스요르단의 아랍군단의 약 1만 병력이 요르단 강을 건너 유엔이 아랍국가의 일부로 규정한 팔레스타인 중부지역을 재빨리 점령한 다음, 예루살렘의 구도시를 장악하고 신도시를 포위한다는 것이었다. 북쪽으로는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의 군대가 갈릴리를 분쇄 돌파하고, 하이파로 밀고 들어간 다음, 해안평원을 따라 텔아비브로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이들과 맞선 이스라엘군은 지하군대에서 끌어 모은 남녀 혼성군과 야전군, 지역방위군 등 약 6만 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숫자상으로는 이스라엘군이 아랍군을 능가했지만, 장비 면에서는 비교가 안되었다. 1948년 5월 14일 현재 이스라엘군은 통틀어 겨우 1만 정의 소총과 소총 1정당 50발의 탄환, 낡은 대포 4문, 그리고 3600정의 기관단총 밖에 없었다.
이런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이스라엘은 결사적으로 방어에 임했다. 각 정착촌을 요새화하며, 마지막 한 자루의 총에 한 발의 총탄이 남아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각오였다. 한편으로 이스라엘인들은 아랍의 진격을 감속시키고, 무기가 공급되고 신병들이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훈련을 마칠 때까지 시간을 벌려고 했다. 이런 전략에 아랍군이 말려들고 만 것이다.
예를 들어 5 월 14~15일 양일간에 걸친 밤중에 어둠을 틈타 이집트 침공군이 국경을 넘어 네게브 사막으로 진격했다. 대규모의 병력이 니림이라는 작은 유대인 정착촌 외곽에 집결했다. 실제로 그 마을에는 무기라고는 17정의 소총, 경기관총 1정과 기관단총 4정 뿐이었다. 가시 철조망으로 에워싸인 이 마을에 이집트군은 맹렬한 포격을 개시했다. 뒤이어 4대의 전차, 여러 대의 장갑차와 자주포의 지원 하에 수백 명의 보병이 공격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착민은 보병들이 사거리 안에 들어 올 때까지 사격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집트군이 철조망에 접근했을 때 그들은 맹렬하게 사격을 퍼부었다. 별다른 저항이 없으리라 예상했던 농촌 출신의 이집트 병사들은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집트 장교들은 수 차례에 걸쳐 사병들을 재집결시키고 돌격대를 편성하여, 이스라엘 진지를 공격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이집트 군은 니림을 우회하여 해안 도로를 따라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남부 및 북부 전선에서도 니림 전투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오직 동부 전선에서만 아랍군은 인상적인 전과를 올렸다. 최고의 훈련, 우수한 장비와 엄한 규율을 갖춘 트랜스요르단의 아랍군은 신속하게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가 5월 19일 신도시를 포위했고, 5월 28일에는 구도시를 점령했다. 당시 이스라엘이 국가의 수도로 삼을 생각이었던 예루살렘 신도시에는 약 1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랍군의 포탄이 신도시에 쏟아지고, 보급선이 차단되자, 이스라엘 군의 돌격대가 해안도로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랍군 진지에 기습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스라엘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격퇴 당하고 말았다.
마침내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군은 하나의 우회로, 즉 아랍군단의 야포망을 돌아가는 약 5 km의 도로를 개설하기로 결정했다. 계속되는 포격 속에서 염소조차 건너가기 어려운 지형에서 도로건설 작업에 나선 이스라엘 노무자들은 굶주림 속에서 예루살렘이 항복하기 전에 도로를 완성하려고 시간과 숨가쁜 경주를 벌이고 있었다. 아랍군 장교들은 그 도로가 절대로 완성되지 못하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에, 포격 이외의 작업을 방해하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8년 6월 11일 아침, 이스라엘의 첫 번째 수송차량대열이 우렁찬 굉음을 울리며 새 도로를 따라 시내로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24일간의 포위망이 뚫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은 구출되었다.
바로 그 날 예루살렘은 구원되었고, 전투도 멎었다. 유엔에서 격렬한 토론이 있은 후, 아랍 국가들은 스웨덴의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이 중재한 1개월 휴전안에 동의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른바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에서 실패한 아랍인들은 그때부터 내분에 휘말렸다. 아랍 각국은 서로 실패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면서 아랍의 분열을 획책했다. 그 이후 3차례나 더 중동전쟁이 일어나지만, 아랍군은 이렇다할 전과 없이 철수하고 말았다. 그러다 이집트가 돌연 이스라엘과 화해함으로써 중동문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처음에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민족국가인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던 아랍인들이 이제는 차츰 예루살렘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아랍인들이나 유대인 모두에게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3. 예루살렘의 역사성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3대 유일신 종교의 성지이며, 아랍인과 유대인 두 민족 모두가 이곳에 특별한 종교적․민족적 정서를 가지고 있다.
현 샤론 총리를 비롯한 이스라엘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통일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영원히 유대민족의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예루살렘(히브리어 Yerushalaym)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약 3000년 전 다윗 왕이 여부스 족에게서 예루살렘을 빼앗아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고(삼하 5: 6-10), 여호와의 언약궤를 이곳으로 옮겨온(삼하 6: 1-23) 이후부터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 산(창 22: 1-14; 대하 3: 1)에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한 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문화, 사회 등 모든 분야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이후 유대인에게 “예루살렘” 또는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인 “시온”은 신앙적․정서적으로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특히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시(詩) 137편에서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1절). …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5절).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 지로다(6절)"라고 노래했다. 또한 이사야는 52장에서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 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1절) …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보좌에 앉을 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2절). …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 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다(9절)"고 선포한다. 미가 선지자 역시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라"(미 4: 2)고 선포했다.
A. 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은 지난 2천년동안 나라 없이 이곳 저곳을 유리 방랑하게 되었지만, 예루살렘은 늘 이스라엘 민족의 가슴속에 그리고 기도 속에 살아있었다. 늘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면서 "내년에는 예루살렘에" 가게 해달라고 간구하여 왔다. 이스라엘 땅과 함께 예루살렘은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에 큰 추진력을 제공했던 시오니즘의 기초가 되었다.
예루살렘(아랍어 Al-Quds)은 무슬림에게도 중요하다. 예루살렘이 이들에게 메디나, 메카에 이어 세 번째로 중요한 성지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시작된 처음 16개월은 무슬림 역시 유대인들처럼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었으나 무함마드의 예언에 의해 메카로 바뀌었다(꾸란 2장: 142-150).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성지가 된 것은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와 얽힌 전승에서 기원한다.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 의하면 무함마드의 “밤의 여행”(Al-Isra' w Al Mi'raj)과 관련이 있다. 즉,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전능하신 분(알라)께서 그의 선지자(무함마드)를 밤중에 거룩한 사원(메카)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사원(예루살렘)으로 데려갔다"(Qur'an, Sura 17:1)라는 구절이다. 이 “가장 먼 곳에 위치한” 곳을 나타내는 구절이 아랍어로 '엘-악사'라는 단어인데, 이슬람에서는 이 장소를 예루살렘으로 해석한다. 또한 무함마드의 어록집이라고 할 수 있는 하디스(Hadith)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천사 가브리엘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에 폐허가 된 솔로몬 성전으로 가서 여러 선지자들(아담, 모세, 아브라함, 이삭, 이스마엘, 그리고 예수 등)과 함께 기도하였다는 내용이 전해져 온다.
바로 이러한 전승과 관련 있는 장소인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압델 말리크(Abd al-Malik, 685-705)와 그의 후계자인 알-왈리드(Al-Waleed)에 의해 황금돔 사원(691)과 엘-악사 사원(Al-Aqsa Mosque, 709-715)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 두 사원의 건축으로 그 이전까지는 추상적으로 꾸란에서 다루어지던 무함마드의 여행이 구체성을 띠게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성지로 역사화 된 것이다. 오늘날 무슬림은 무함마드가 밤에 메카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였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4. 예루살렘과 중동평화
예루살렘 문제는 이스라엘의 건국 당시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민족 간의 중요 쟁점으로 등장했으며 국제적으로 거론된 사항이다. 유엔은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안을 승인하면서 “예루살렘은 특별한 국제적 정부(International Regime)하의 분할체(Corpus Separatum)를 창립하여 국제연합이 관리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유엔은 “예루살렘이 팔레스타인 땅에 창립될 유대 국가와 아랍국가 양국에 함께 소속”되도록 하였다. 이스라엘 측은 유엔의 이 안을 받아들였으나 팔레스타인 측은 거부하고, 결국 1948년 5월에는 이스라엘과 아랍국가간에 제1차 중동전이 발발한다. 이 전쟁에서 요르단은 예루살렘의 구시가지(Old City)를 포함하는 동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1950년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함께 동 예루살렘을 요르단 영토로 병합시켜 버렸다.
가. 이스라엘의 동 예루살렘 합병과 유대화 정책
1967년 6일 전쟁이 끝난 며칠 후 다윗 벤구리온 전 총리는 한 신문과의 회견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 처리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집트와 평화협정이 조인된다면,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할 것이다. 시리아의 골란고원도 마찬가지며, 요단강 서안 지구에는 유엔 관할 하에 자치국가가 건설될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유엔에서 어떻게 결정하든 우리의 주권 하에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3천년 동안 이스라엘의 수도였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남을 것이다.” 현 총리인 아리엘 샤론 역시 동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이다. 이스라엘 국민 대부분은 예루살렘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이러한 견해에 공감한다. 예루살렘에 대한 특별한 이해와 정서를 가진 이스라엘은 1967년 6일 전쟁을 통해 요르단 치하에 있던 동 예루살렘을 점령하였고, 입법조치와 내무장관 훈령으로 이를 이스라엘 영토에 합병시켜 버렸다.
그리고 1980년 7월 30일에는 "기본법: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이 국회에서 통과된다. 4개조로 구성된 이 법은 하나로 온전히 통일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이며(1조), 대통령, 크네세트(국회), 행정부, 대법원이 상주하는 곳으로서(2조), 모든 종교적 성지가 보호되고, 이 성지에 대한 종교인들의 정서와 신앙이 존중되며, 자유로운 접근과 종교활동이 보장된다(3조)고 규정하고 있다. 이 법안은 찬성 69, 반대 15, 기권 3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러한 동 예루살렘의 합병과 입법조치에 만족하지 않고, 이 합병한 점령지역에 주택을 건설하고 유대인을 이주시켜 인적․물리적인 유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은 병합된 점령지역 1/3 가량의 땅을 팔레스타인 지주로부터 몰수하여 3만 5천 동의 주택을 새로 지어, 이곳에 15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이주시켰으나, 팔레스타인 주민에게는 이 새 주택을 한 동도 배정하지 않았다고 일부 땅 주인들은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주택들이 길로, 라못, 피스갓 지브, 네베 야콥 등에 대규모로 지어졌고, 마알레 아두밈 등 위성도시가 예루살렘 주위에 건설되었다. 일부 민족주의적인 우파 유대인들은 구 예루살렘 성내 회교 지구와 실로암 연못, 다윗성 부근에 있는 팔레스타인 인구 밀집지역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사례도 있다. 1997년 9월에는 예루살렘 성전 바로 동쪽, 감람산 기슭 팔레스타인 주거 지역 한 복판에 이스라엘 극우파 주민 세 가족이 밤중에 침투하여 한 건물을 점령해서 큰 충격을 준 바 있다.
이러한 신규 주택촌 건설과 함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살고 있는 기존 주택에 대해서는 개축과 신축을 금지함으로서 이들이 자연히 이곳을 떠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인적, 물리적 공세에 힘입어 이스라엘은 동 예루살렘에서 인구수에서 팔레스타인 인구와 비슷하게 되었다. 1999년 전체 동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인구가 208,300명인데 반해, 유대인 인구는 180,000명으로 불어난 것이다. (예루살렘 전체 인구 645,700명 중 유대인은 437,400명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렇게 주택건설과 유대인 이주로 동 예루살렘의 이스라엘화를 추진하는 한편, 이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서 거론하는 것을 금기시 해왔다.
그러나 1993년 9월의 팔레스타인 자치원칙 선언 이후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그 동안 금기시되었던 이 동 예루살렘 문제가 마침내 자치원칙 선언서에 포함되었다. 그러자 두 민족 간의 화해정책(팔레스타인 자치)의 진전과 함께 수세에 몰린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인 우파 정당들은 예루살렘 기본법 개정을 막기 위해 개정 의결 정족수를 늘리는 입법을 추진하고 있고, 이스라엘 정부는 지난 94년 12월 26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예루살렘에서 국가 차원의 정치, 외교 활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크네세트에서 통과시키는 등 동 예루살렘에 대한 기득권 유지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나.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동 예루살렘 정책
그 동안 동 예루살렘 지역내의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과 유대인 이주정책으로 위기감이 팽배하던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93년 9월 워싱턴에서의 자치원칙선언 서명이후, 동 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만들기 위한 활동이 활성화되고 있다. 예루살렘 문제의 의제 포함에 성공하고 자치 협상 과정에서 이 문제 거론에 대한 금기가 점차 깨져감에 따라 이 동 예루살렘에서 국가적인 활동을 기정 사실화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동 예루살렘에 위치한 오리엔트 하우스에서는 공공연하게 외국 사절단과 외교관을 만나 국가차원의 정치, 외교활동을 해 왔고, 이 지역을 치외법권 지역화하여 자체 경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 경찰은 요원을 예루살렘에 상주시켜, 치안에 관련된 민원업무와 범죄 수사까지 벌이는 등 실제적인 자치 경찰 업무를 보고 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정부청사의 성격을 띤 주택부와 통계부를 동 예루살렘에 개설했으며, 일부 자치정부 각료가 오리엔트 하우스에서 자치정부의 업무를 보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비록 좌절되기는 했지만 동 예루살렘 개발 프로젝트를 서방지원 국가회의에 제출하여 지원금의 요청을 시도했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주관 하에 동 예루살렘에서 전 세계의 팔레스타인 경제인을 불러 국제 학술회의를 계획하는 등 동 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기정사실화하려는 공세를 파상적으로 펼치고 있다.
다. 인접 아랍제국의 예루살렘 회교 성지에 대한 권리주장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민족 사이의 동 예루살렘에 대한 다툼과 더불어 요르단,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등 다른 회교 아랍 국가들도 역시 동 예루살렘의 회교 성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어 양상이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난 94년 7월 25일 워싱턴 선언에서 예루살렘의 회교성지(주로 성전산에 있는 회교사원)에 대한 요르단의 지위를 보장한다고 천명하였다. 이어 체결된 94년 10월의 평화협정에서는 이를 명문화하였다(제9조). 요르단과 이스라엘 사이의 이러한 이권 거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당황케 하였다. 특히 동 예루살렘 담당 무프티(모슬렘 성직자)를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각각 자신들의 무프티를 임명하는 기현상도 일어났다.
요르단은 물론 동 예루살렘이 팔레스타인의 수도임을 인정하지만, 점령지역 곳곳에서 서로 이해가 충돌하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언론, 금융, 회교성지 분야에서 충돌하고 있고, 동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국가성격의 활동에도 요르단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요르단 측에서는 예루살렘의 회교성지에 대한 권리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요르단의 이러한 권리 선언에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등 인접 아랍제국이 반발하면서 공동전선을 펴서 이를 제지하려는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5. 팔레스타인의 아랍민족주의: ‘서안/가자 국가의 건설
67년 전쟁에서 동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서안/가자지구가 이스라엘의 점령 아래 들어가자, 팔레스타인은 국제정치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고, 그 해 채택된 UN 안보리결의 242호에 나타난 것처럼 “팔레스타인 문제”는 단순한 난민문제로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팔레스타인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명은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존재해 왔으나, 1948년에 소멸하여 지금은 팔레스타인의 존재만이 남아 있다(다얀 국방장관, 1973). 지중해와 동방의 아랍 사막 사이에는 유대국가와 요르단국가밖에 존재하지 않고, 여기에 새로 또 하나의 아랍국가를 만들 여지는 없다. 팔레스타인인은 요르단 안에 나라를 가지면 좋을 것이다(골다 메이어 수상).
67년 전쟁 후의 이스라엘은 “전쟁 이전으로 원상 회복, 팔레스타인국가 수립, 동 예루살렘 지위 변경을 거부하는 원칙”을 국시로 정했다. 이에 대해 아랍 각지의 이산 팔레스타인인은 그들의 고향의 해방을 아랍 제국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민족투쟁을 통해 완전하게 해방하여 고향으로 귀환할 민족적인 권리를 되찾겠다는 원칙적인 입장을 제시했다.
팔레스타인 게릴라 최대 조직인 파다하를 지지기반으로 팔레스타인 건국 운동의 조직화에 성공한 사람은 팔레스타인 해방과 조국에의 귀화를 목적으로 결성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 알 아라파트이다. 그는 이슬람교도로서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후 17세 때 팔레스타인 전쟁에 참가했고, 전쟁을 피해 가족과 함께 가자로 피난한 뒤에는 카이로에 이주하는 등 고향을 상실한 디아스포라 팔레스타인인의 유랑생활을 철저히 경험했다. PLO는 아랍 주변에 흩어졌던 팔레스타인 난민을 결집, 그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팔레스타인 게릴라로 키워, 파다하 등 각 게릴라 조직이 주도하는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의 조직화에 성공했다.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전 지역 해방, 이스라엘 파괴를 목표로 대 이스라엘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으나, 1970년대 중반이 되자, “해방된” 팔레스타인 영토에 팔레스타인의 독립국가를 수립한다는 현실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는데, 이 새로운 아라파트 노선은 1974년의 제7회 아랍국 수뇌회의에서 PLO가 팔레스타인인 유일의 정통 대표로 인정됨과 동시에, 장래 서안 가자가 해방될 경우, 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요르단이 아니라 PLO가 행사하도록 인정받았다. 이것은 이스라엘 국가 인근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만들어 두 개의 국가가 공존한다는 생각을 팔레스타인인과 아랍 세계가 처음으로 용인한 것이다.
이에 따라 아라파트는 이스라엘 국가를 전복하여 팔레스타인의 전 영토 해방을 겨냥한 무장투쟁 노선에서 전환하여 팔레스타인 영토의 23%에 상당하는 서안/가자에 한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부분 해방, 미니 국가 건설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아라파트의 2국 공존 구상이 PLO의 기본방침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1987년 12월 서안/가자에서 발발한 팔레스타인 주민에 의한 반이스라엘 점령 저항운동의 성과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가. 팔레스타인 국가-인티파타의 유래
팔레스타인의 민중봉기는 1987년 12월, 가자지구의 난민캠프에 사는 4명의 청년이 이스라엘의 군용 트럭에 깔려 죽은 사건을 계기로 확대되어 순식간에 이스라엘 점령하의 요르단강 서안/가자 지구에 주둔한 이스라엘군에 저항하는 “인티파타” 운동으로 발전한다. 이 민중운동은 국제사회에 장기점령 지배의 가혹한 실태를 호소하여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독립을 희구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 인티파타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준 영향은 큰 것이었다. 1년 후인 1988년 11월 PLO는 팔레스타인인의 국회에 해당하는 제19회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PNC)를 개최, 팔레스타인 전 국토의 해방을 겨냥한 종래의 운동 목표를 크게 전환시켜, 팔레스타인 가운데 77%를 점하는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를 처음을 받아들이고, 이 “유대국가” 바로 옆에 나머지 23%를 차지하는 서안/가자 지구를 영토로 하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출현을 목적으로 하는 “2국가 공존방식”의 실현에 착수했다. 인티파타에 편승해 자신을 얻은 팔레스타인은 서안/가자 주민에 뿌리내린 현실적인 국가 만들기에 착수, 동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안을 제시했는데, 이에 대한 세계적인 지지와 승인이 이어졌다. 그 중에서도 미국은 대 팔레스타인 정책의 전환을 이뤄 다음 그 동안 “테러조직”으로 낙인찍혀 평화 교섭의 대상으로 볼 수 없었던 PLO와 역사적인 대화를 개시했다.
나. 중동평화의 시대
그러나 인티파타 운동이 장기화함에 따라 이스라엘이 지배하는 경제 구조로부터 탈피할 수 없는 주민 사이에는 이 운동에 대한 피로감이 쌓여 눈에 띠게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특히 1990~1991년의 걸프전은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 왔다. 쿠웨이트를 침략하여 병합한 이라크를 지지한 PLO은 사우디아라비아 등 걸프만 산유국에 돈벌이간 팔레스타인인이 대거 추방됨에 따라 재정이 파탄 나는 등 조직의 존망 위기에까지 내몰리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을 위협하는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PLO는 1991년부터 1992년에 걸쳐 이스라엘과의 전격적인 평화담판을 벌인 결과 1993년 9월 유대국가의 생존권 승인과 그 대가로 서안/가자에 5년간의 잠정자치를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잠정해결을 위한 오슬로합의(“팔레스타인 잠정 자치정부의 설치에 관한 원칙선언”)를 수락했다. 1994년 5월부터 5년 간에 걸친 잠정자치가 시작되었고 아라파트가 같은 해 7월에 가자로 귀환하면서 이스라엘의 요구에 부응해 인티파타의 종결을 선언, 팔레스타인 분쟁은 오슬로합의에 근거하여 본격적인 중동평화의 시대를 맞는다.
결국 인티파타는 이스라엘 지배구조를 해체한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불완전 연소로 끝났다. 서안/가자 주민의 노동력은 이스라엘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에 완전히 편입되어 있으며, 이 의존관계 점령 지배가 계속되는 한 변할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 앞에서 이스라엘에 생사여탈권을 장악 당하고 있는 주민이 항복한 꼴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 서안/가자의 점령이 종결되어야 비로소 이스라엘 지배로부터 민족해방과 진정한 독립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팔레스타인 사회에 심어준 것은 틀림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군에 투석하는 젊은이들의 항의 행동은 점령 종결을 앞당긴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다. 인티파타의 재점화-팔레스타인 독립전쟁
서안/가자 잠정자치가 시작되자 “중동평화”도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를 확대하는 교섭으로 초점이 옮겨져, 난산 끝에 1995년 카이로협정, 1998년 와이리버합의 등을 거쳐, 자치의 영역은 유대인 입식지를 서안의 40%인 가자지구로 제한했다. 즉 5년 간의 자치라는 잠정해결로 팔레스타인측이 받아들인 토지는 서안 전체의 40%(2,280km2), 가자지구(363km2)가 되었다.
이는 팔레스타인 전역(26,300km2)의 9.6%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머지 90.4%는 이스라엘 측에 남겨져 있다. 문제는 팔레스타인 측이 최종해결에서 서안/가자 국가의 영토라고 상정하는 23%를 정말로 획득할 수 있는지 여부다.
1999년 5월에 5년 간의 잠정자치 종료 기한을 맞았으나, 자치교섭의 난항으로 최종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고, 2000년 9월까지 연장된 잠정자치 시한을 눈앞에 두고 7월에 미국의 캠프 데이비드에서 바라크 수상과 아라파트 의장, 클린턴 대통령이 토의를 했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국가는 비무장화하고, 영역은 가자지구에 더하여 서안 전체의 90%를 넘지 않으며, 150개 소, 15만 명을 헤아리는 유대인 입식자들은 재편되어 입식지 블럭을 형성하여 이스라엘 주권 아래 두는 등 “팔레스타인 국가”의 주권을 대폭 제한하는 안이 제안되었다. 또 신생국가의 수도로 상정된 동예루살렘은 유대교 이외에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성지로서 팔레스타인측 한 곳에만 양보할 수 없다는 것도 확인되었을 뿐 아니라 4~5백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도 어렵게 보였다. 그러나 결국 이 회담도 아라파트 의장이 팔레스타인 분쟁의 최종 해결을 위해 피할 수 없는 두 개의 원칙(이슬람교도의 성지를 포함한 동예루살렘의 주권확보와 난민의 귀환과 보상을 정한 1948년의 UN 총회 결의 194호 이행)을 고집함으로써 15일간에 걸친 교섭은 결국 결렬됐다.
이에 따라 9월 28일 평화협상 반대파인 아리엘 샤론 전 국방장관이 평화교섭에서 바라크 수상의 양보 움직임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동예루살렘의 이슬람교 성지에 무장 호위병을 거느리고 들어가는 해프닝을 벌였다. 이를 도발행위로 본 팔레스타인 민중이 이에 강력히 반발하여 일제히 봉기했다. 서안/가자 지역 주민과 팔레스타인에 사는 난민과 이스라엘에 사는 아랍인도 이에 합세하여 팔레스타인의 반란은 아랍과 이슬람 세계로 파급되어 3개월 뒤에도 수습되지 않고, 잠정자치 개시와 동시에 종식이 선언된 미완성의 인티파타가 다시금 발발하여 오슬로합의 이전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놓았다.
이 새로운 인티파타는 오슬로합의에 근거한 자치통치를 내용으로 한 잠정해결을 뛰어넘어 서안/가자의 독립을 요구하는 팔레스타인 민중이 분쟁의 최종 해결로 향해 새롭게 개시한 투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1987~1994년의 최초의 인티파타를 지도한 지도자들은 1988년에 서안/가자 자구를 영역으로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건설의도를 선언했으나, 이번의 새로운 인티파타는 영토에의 주권을 실제로 행사하기 위해 민중이 일제히 봉기를 일으킨 “팔레스타인 독립전쟁”으로 자리매김된다.
6. 샤론의 등장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미래
샤론은 이스라엘의 전쟁영웅이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선포 직후 발발한 제1차 중동전쟁에 처음으로 참여한 이래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에서 공수부대를 지휘하며 전쟁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바 있다. 1982년 시리아와의 소위 “2일 전쟁”에서는 국방부장관으로 당시 베긴 수상의 명령을 위반하고 레바논의 수도인 베이루트까지 진격을 감행한 바 있다.
이러한 샤론의 등장은 중동전체를 긴장시키고 있다. 팔레스타인과의 평화공존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1999년 5월에 당선된 바라크와는 달리 강성주의자로 알려진 샤론의 등장은 악화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를 더욱 악화시켜 평화협정 체결의 가능성을 요원하게 할 것이라는 전망이 팽배하다. 2000년 9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유혈충돌 시발점이 된 것이 바로 샤론의 동예루살렘 내 이슬람 성지인 알 아크사 사원 방문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 같은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핵심쟁점은 동예루살렘 관할권 문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양도하는 영토의 범위와 시기 및 난민귀환 문제 등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1993년 오슬로 협정, 1998년 와이협정 등을 체결하여 양측의 평화협상에 진척을 보인 바 있으나 위의 3가지 핵심쟁점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동예루살렘 관할권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의 역사․종교적 이해가 얽힌 핵심쟁점이다. 문제가 되고 있는 동 예루살렘은 1967년 제3차 중동전 때 이스라엘에 의해 합병된 이후 관할권 문제를 두고 지속적인 다툼을 보여왔다. 국제사회에서도 동 지역을 이스라엘 영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동 예루살렘에는 이슬람의 “성역”(Noble Sanctuary)과 이스라엘의 “여호아성전”(Temple Mount)이 위치한다. 여호아성전은 기원전 957년 솔로몬왕에 의해 최초로 건립된 이래 기원전 515년 제2차 성전이 지어졌으나 로마에 의해 파괴되어 현재 제2성전의 서쪽 담, 일명 `통곡의 벽'만 존재한다. 여호아성전은 유태인 질곡의 역사와 함께 하였다. 성전을 짓고 여호아 하나님께 순종할 때 이스라엘인들은 번창하였으나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하고 죄를 범할 때 성전은 무너지고 이방 민족들에 의해 핍박을 받았다. 따라서 유태인은 성전을 그들의 번영과 연관시켜 생각하고 중요시한다. 여호아성전 인근에 위치한 이슬람성역은 알 아크사 사원과 바위돔(dome of the rock)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슬람 제3의 성지로 추앙받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동 예루살렘을 독립국가의 수도로 삼기를 원하는 반면, 이스라엘은 관할권 이양을 극히 꺼려왔다. 바라크 전 수상은 2000년 8월 팔레스타인과의 협상에서 여호아성전 지역을 제외한 동 예루살렘 일부분에 대한 통치권 이양을 제시한 바 있으나 아라파트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이후 11월 협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독립은 인정하나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새로운 협상안을 제시하였으나 역시 결렬되었다.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권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양도하는 영토의 범위 및 시기와 맞물려 있다. 팔레스타인은 1993년 오슬로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 1948년 이전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영토를 사실상 포기하였다.
이에 대한 대가로 팔레스타인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 자치구역을 확보하게 되었으나 1948년 UN결의에 의해 팔레스타인에 할당된 영토의 70%수준에 머무른다. 이후 1998년 10월에 체결한 와이협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1967년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을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이양해야 하나 예정대로 행하지 않고 오히려 유태인 정착촌을 늘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스라엘은 현재까지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의 80%를 점령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로부터 이양 받은 지역에 약 370만 명으로 추정되는 난민을 귀환시켜 독립국가 건설을 원한다. 상당한 인구를 가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요르단강 서안에 건설될 경우 이스라엘은 바로 턱 밑에 언제든지 대 이스라엘 항전을 선포할 수 있는 국가 단위의 테러단체를 두는 셈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난민귀환을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태도는 2000년 7월 동 예루살렘의 관할권 상당부분을 팔레스타인에게 양보하는 대신 팔레스타인 난민귀환을 포기하는 내용의 미국 중재안에 합의한 것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2000년 7월 미국의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린 핵심쟁점에 대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합의가 실패한 이후 9월 양측 순례자간의 사소한 충돌이 유혈충돌로 확대되어 연말까지 약 300명이 사망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일면 예견된 것이었다. 핵심쟁점에 대한 양측 이견이 팽배하고 약속한 영토의 이양이 계속 지연되는 상태에서 팔레스타인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오슬로 협정의 원론적 피해의식, 즉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영토를 포기하고 동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지 못하고 흩어져 있는 동족이 모이지 못한 상태에서 언제 이양이 완료될지도 모르는 이스라엘이 허가한 일부지역에서 살아야 한다는 팔레스타인의 피해의식이 노출된 것이다.
팔레스타인에 의한 인티파타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당황하게 되었다. 게릴라식 폭탄테러로 자국민이 희생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스라엘의 월등한 군사력도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국민들간에도 불만이 팽배해지고, 이것은 바라크 정권에 대한 불신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바라크가 2000년 7월 캠프데이비드 협상에서 동예루살렘 관할권을 대폭 양보한 것이 이스라엘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동시에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가 결국 이스라엘로부터 더 큰 양보를 받기 위한 전술적 차원에서 팔레스타인 지도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인식이 공유되었다. 샤론의 등장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즉 폭력에도 굴하지 않는 영웅, 때로는 그 폭력을 앞세우면서도 이스라엘의 이익을 보호하는 지도자가 요구된 것이다.
샤론의 강성성향으로 향후 중동평화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지배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머스, 지하드 등 이슬람 무장저항단체는 물론이고 시리아, 이란 등 주변 아랍국가에서도 샤론의 당선 비난성명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이러한 주변 반응에 호응이라도 하듯 샤론은 2월 총리당선 축하연에서 동예루살렘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로 남을 것이며 새 정부는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
그러나 샤론의 당선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평화협정에 부정적 영향만 주는 것은 아니다. 바라크와 비교해볼 때 샤론이 오히려 팔레스타인과 실질적인 공존을 도출할 가능성이 있다. 평화공존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당선된 바라크는 정권 정통성 확보를 위해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부담감으로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상에서 계속 양보해왔다. 즉 바라크는 채찍과 당근 중 당근만이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 파악한 아라파트는 계속해서 바라크를 압박하였고 인티파다를 통해서 더 큰 양보를 얻는 데 주력하였다.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정 체결보다도 이스라엘 안전과 이익보호가 우선이라는 명확한 메시지를 갖고있는 샤론에게는 더 이상 이러한 전술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즉 샤론은 불가피할 경우 무력충돌도 불사한다는 바라크가 갖지 못한 채찍 수단을 갖고 있다. 따라서 샤론과 새로운 평화협상은 명확한 한계 혹은 틀 안에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단기적으로 팔레스타인은 샤론의 의지를 시험해 볼 것이다. 즉 유혈충돌을 지속하고 그에 대한 샤론의 대응을 지켜볼 것이다. 그러나 평화협상 전제조건으로 팔레스타인측 폭력종식을 공약으로 내세운 샤론이 공약을 성실히 이행한다면, 팔레스타인으로서는 폭력적 방법을 포기 협상테이블에 다시 앉는 것 외에는 다른 큰 선택이 없어 보인다. 이 경우 양측은 핵심쟁점에 대한 이견으로 모든 것이 완전히 해결된 공식적인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는 어려우나 양측이 실질적으로 병존할 수 있는 선에서 타협을 도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샤론 정부의 한계점도 팔레스타인과 협상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샤론 정부가 좌파와 우파를 망라한 연합정부이고, 그가 속한 리쿠르당이 원내 제2당으로 소수정권이라는 점이 부담이다. 평화협상을 원하는 원내 제1당인 노동당의 주장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샤론이 강성주의자이기는 하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이 의미는 지금까지 진행된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을 모두 무시하고 원점에서 이스라엘의 이해와 권익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을 샤론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샤론도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협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변수는 팔레스타인이 무력을 포기하지 않고 기존의 테러전술을 한층 강화하고 이스라엘이 공세적으로 대응하는 등 지역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어 중동전쟁으로 발전 할 가능성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이러한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우선 이전의 중동전쟁 발생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매우 다르다. 이집트와 요르단이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였고 시리아도 알 아싸드(Hafez al-Assad) 대통령이 사망한 후 그 아들인 바샤(Bashar al-Assad)가 권력을 승계 하였으나 기반이 확고하지 못하다. 바샤가 내부의 권력다툼 문제를 상쇄하기 위해 외부로 시선을 돌려 전쟁을 벌일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1982년 5월 소위 “2일전쟁”에서 85대 이상의 전투기가 파괴되고 이스라엘 전투기는 단 한 대 만이 격추된 참담한 패배의 기억도 시리아로서는 큰 부담이 되고 있다. 당시 양극 체제 하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있는 미국의 유일 강대국 체제 하에서 전쟁을 시도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판단할 때 불가능해 보인다. 합리적 판단보다 종교^역사적 명분을 우선시 할 수 있는 이란과 이라크도 현재 전쟁을 수행하기는 역부족이다. 이란의 경우, 내부적으로 보수와 혁신의 갈등 심화로 국력을 결집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라크는 1990~91년 걸프전쟁과 UN의 경제제재, 1999년 미국과 영국 주도하의 UN군의 대규모 공습인 “사막의 여우” 작전 등으로 인해 국력이 크게 쇠퇴되어 전쟁수행 능력이 의심된다. 따라서 현 상황에서 팔레스타인의 무력항쟁이 도화선이 되어 이스라엘 대 아랍의 새로운 중동전쟁 발생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유일 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이 이스라엘의 사실상 후원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아랍권으로서는 큰 부담이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볼 때 완전한 중동평화가 성취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에 상호 만족할만한 합의가 애당초 존재치 않고 이스라엘과 주변국간 항구적인 평화공존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핵심쟁점에 대해 이스라엘이 최대한 양보할 수 있는 선은 바라크 총리때 제시되었으나 팔레스타인으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즉 동예루살렘 관할권 이양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도부 모두에게 정치생명을 건 일이다. 팔레스타인 난민귀환과 독립국가 선포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볼 때 국가안보의 최대 위협 요소가 될 수 있고 팔레스타인 입장에서는 모든 투쟁의 종착역이다. 그러므로 샤론의 등장이 단기적으로 양측 유혈충돌을 종식하고 묵시적 공존을 가능케 할 수는 있으나 평화협정 체결 가능성은 여전히 요원하다.
또한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은 3,000년 이상 지속된 역사․종교적 반목으로 상호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이란과 이라크는 이스라엘 제거를 사명으로 인식하고 대화와 타협을 거부한다.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이란의 경우도 1999년 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평화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전지역의 해방을 주장하면서 투쟁을 천명한 바 있다. 따라서 이들 국가는 사실상 이스라엘과 공존을 원치 않기 때문에 상황이 허락하면 대 이스라엘 무력공격 감행 의지를 항상 갖고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중동지역에만 국한된 분쟁이 아니다. 과거 아랍국가 분쟁 과정에서 석유를 무기로 활용함으로써 두 차례에 걸쳐 세계적인 석유위기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볼 때, 이 분쟁은 세계경제 장래에도 엄청난 영향을 파급시킬 잠재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사실상 보호국인 미국 외에도 이 지역에서 90%이상의 원유를 수입하는 일본과 미국을 견제하고 중동국가와 우호적 관계를 모색하는 중국과 러시아도 이 같은 분쟁에 연루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곳으로 해석되고 있는 성경의 “아마겟돈”은 중동지역일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인다.
※ 이 글은 최영철(정치학 박사,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석․박사과정 수료)의 논문, “중동평화와 예루살렘” 및 森戶幸次(日本 靜岡産業大學 교수)의 논문, “중동분쟁 100년”을 토대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