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구상에 굶주리는 어린이 한명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랑의 어머니 GCF 방숙자 명예이사장님 영전에
양정자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원장
본 상담원의 해외 자문위원이시고, 글로벌어린이재단(Global Children’s Foundation, GCF) 명예이사장님이신 방숙자 선생님이 2월 1일 90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시어 우리 곁을 떠나시었습니다.
방숙자 이사장님은 평생을 여성운동, 인권운동, 통일운동, 생명운동, 민주화운동을 펼치신 활동가인 동시에 화해의 사도로서 약자를 위해 봉사하는 일에는 법률구조사업을 하는 저희와 같은 길을 가는 동지셨으며 저를 비롯한 수많은 후학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스승이셨습니다. 이사장님은 ‘정의를 실천하고 약자의 편에 서서, 특히 힘없는 어린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본인의 삶 전체를 통해 보여주시고 가르침을 주신 분으로, 항상 마음속에 깊은 존경과 사랑 그리고 정신적인 지주로 모신 큰 어른이셨습니다. 그렇게 크신 분이 곁에 생존해 계시고 본 상담원의 해외 자문위원이시라는 사실만으로도 제게는 언제나 큰 힘과 용기, 의지가 되었습니다.
방숙자 이사장님과의 첫 만남은 1979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상담간사로 미국 감리교의 지원을 받아 미국과 캐나다의 법과대학, 법률구조기관, 가정상담소, 형무소, 소년형무소, 법원 등의 시찰 중 워싱턴D.C.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당시 방 이사장님은 故 이태영 박사님의 제자로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후원하기 위해 1974년 결성된 워싱턴D.C. 회원지부를 결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시고 총무를 맡고 계셨습니다. 이 박사님께서 감리교회에 ‘여비 지원만 해주면 미국에 있는 우리 후원지부 회원들이 시찰할 관계기관과의 약속, 통역, 숙식 등을 지원할 것이다’ 하셔서, 공항 픽업부터 시작해 워싱턴에서의 모든 책임을 방 이사장님이 맡아주셨습니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남의 집에서 잠을 잔 적도, 신세진 적도 없던 필자는 일주일 동안 방 선생님 댁에 머물며 모든 도움을 받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받기만 하는 저도 그렇게 힘이 드는데 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쳤음에도 ‘미국의 법률구조기관을 시찰하고 한국에 돌아가 고국의 번민하는 여성들을 위해 좀 더 나은 서비스를 하는데 기여할 사람’이라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으로 “시간이 돈”이라는 미국에서 일주일 동안 온전히 모든 시간을 내어 도와주시고, 떠날 땐 여행가방도 제대로 싸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곤 친언니처럼 야무지게 꾸려주셨습니다. 그 당시 얼마나 힘드셨을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염치없고,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이사장님의 큰 뜻과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이사장님의 100분의 1이라도 닮은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이라 다짐합니다.
1983년 미국 L.A.지부 창설을 위해 필자가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 거의 매일이다시피 전화로 조언과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L.A.지부 개설 후 1년 동안 머물며 지부의 정착을 돕고 귀국하기 일주일 전 워싱턴D.C.지부 개설을 위한 세미나에 필자가 연사로 초청받아 갔을 때도 방 이사장님의 자택에 머물며 많은 사랑과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1996년 워싱턴D.C.지부 창립 11주년 기념식에 Keynote Speaker(기조연설자)로 초청받아 방문했을 때에는 워싱턴D.C.에서 행사가 끝나자 직접 운전하시어 뉴저지의 자택으로 필자를 데리고 가셔서 열흘 간 머물도록 해주시고 힐링하는 시간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이후로도 방 이사장님은 42년 동안 한결같은 사랑으로 필자가 어떠한 어려움에 직면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법률구조사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사랑과 용기를 주시고, 때로는 어머니, 때로는 멘토, 때로는 후원자의 역할을 해주시었습니다.
방 이사장님은 1931년 8월 4일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여중‧고를 졸업한 후 서울시립간호학교를 수료하고, 1956년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법정대) 졸업 후 국립의료원 간호대학에서 사감 겸 간호학과 교수로 근무하다가, 한국보다 훨씬 간호학이 발달한 곳에서 좀 더 진보된 공부를 하고자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간호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 가톨릭대학의 간호학과 교수로 제자 양성을 하시다 1969년 텍사스 달라스파크 메모리얼 병원에 취업 오퍼를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셨습니다. 1972년 워싱턴으로 직장을 옮긴 후, 1974년 8월 한국가정법률상담소 후원회 지부를 결성해 회비를 모아 조국의 여성인권기관인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후원하고, 1976년 워싱턴D.C. 가톨릭대학에서 간호학 및 교육학 박사과정을 밟으셨습니다. 1985년 5월, 스승이신 고 이태영 박사와 뜻을 함께해 워싱턴D.C.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지부를 창설하고 초대 소장으로 취임해 수많은 이민 교포 가정을 도왔습니다. 이사장님은 그들을 돕기 시작한 것이 사회봉사의 첫발을 딛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1998년 한국은 IMF로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고, 가장이 직장을 잃게 되니 학교마다 결식아동이 생겨났습니다. 그 해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민주화운동을 함께하던 방 이사장님은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초대를 받아 만났고, 한국에 굶는 어린아이들 돕기 운동을 미국의 한인어머니들에게 호소하자는데 뜻을 함께하였습니다. 이때 탄생된 재단이 오늘날 GCF의 전신인 “미주나라사랑어머니회”입니다.
시간이 급박할 때에는 봉사도 후원도 계속해오고 있는 사람이 그 ‘뜻’에 즉각 동참한다고 방숙자, 유분자, 손목자,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워싱턴D.C. 지부 이사진이 “미주나라사랑어머니회” 창단멤버가 되어, 총회장은 방숙자, 서부회장은 유분자, 사무총장은 손목자 이사가 맡아 전국 기구로 키우게 되었고, 2만 달러를 모금하여 이를 전달받을 한국의 단체를 만들어 달라 요청하여 우리나라에 “사랑의 친구들”이라는 단체가 설립되었습니다. 현재 “사랑의 친구들”의 모태는 “미주나라사랑어머니회”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국이 IMF를 극복하면서 “미주나라사랑어머니회”는 더 크고 원대한 앞날을 위해 발전적 해체를 결정하고 현재의 이름, “글로벌어린이재단(Global Children’s Foundation)”으로 개편되어 수혜대상을 한국의 어린이에서 전 세계의 어린이로 넓혔습니다. 1998년에 시작되어 올해로 23년째인 글로벌어린이재단은 명실 공히 세계를 무대로 하는 큰 거목으로 자라 현재까지 전 세계 23곳에 지부와 6천여 명의 회원을 두고, 모금액만도 450만 달러가 넘었으며 전 세계 어린이 52만 명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창설자이신 고 이태영 박사께서는 본인에겐 ‘육의 딸’과 ‘뜻의 딸’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방숙자 명예이사장님은 비록 당신 슬하에 ‘육의 딸’, ‘육의 아들’은 없지만 ‘뜻의 아들’과 ‘뜻의 딸’들이 전 세계 23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반평생을 어린이를 위해 사신 이사장님은 전 세계의 많은 어린이들을 자녀로 품에 품으셨습니다. 굶주리는 어린이가 없는 세상을 그리도 바라시고 이를 위해 혼신을 힘을 다하신 당신의 ‘뜻’을 지금 이 시간도 ‘뜻의 자녀들’이 이어받아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방숙자 이사장님은 인생의 1분, 1초도 낭비되는 것을 경계하며 조국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일에 예지와 성실 그리고 정열을 쏟아온 분입니다. 개척정신으로 시작해서 자리가 잡히면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곧 후진들에게 그 일을 물려주고, 또 다른 봉사와 인류복지를 위한 사업을 구상하고 시작하는 개척자 정신을 가진 특별한 분입니다.
방 이사장님이 돌아가실 때 남기신 돈이 4만 불이라 합니다. 법적 형식을 갖춘 유언서를 남기지 않으시어 관계하신 단체들에서 의견이 분분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방 이사장님은 미국에 함께 건너가 때로는 친자매처럼, 때로는 뜻을 함께하는 동지로 지내며 미국가정법률상담소 지부와 GCF 창설 멤버로 항상 뜻을 함께한 유분자 회장님과 생전에 전화통화를 하시며 혹시 본인이 소천 후 남긴 돈이 있다면 한국의 “사랑의 친구들”에 보내 ‘고국의 어려운 여성독거노인’들이 밥 한 끼라도 따뜻하게 먹을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고 하셨다 합니다.
방숙자 이사장님의 ‘뜻의 자녀’들은 이사장님의 고귀한 ‘뜻’을 받들고, 더 나아가 남기신 돈에 얼마씩이라도 더 보태어 그것이 모태가 되어 세계의 굶주리는 “여성 독거노인들”을 돕는 단체가 새로이 창설되기를 기원합니다.
방 이사장님을 잃은 깊은 슬픔을 딛고 선생님이 평생에 걸쳐 실천한 “정의의 실천, 약자를 위한 사랑과 봉사의 삶”, “여성운동, 인권운동, 통일운동, 생명운동, 민주화운동”의 길을 따라가고자 노력하겠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웃으며 격려해 주시겠지요? 방숙자 이사장님의 영전에 뜨거운 감사와 깊은 존경의 인사를 올립니다.
방 선생님! 사랑합니다. 뵙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