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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년(신축) 목종 4년(송 함평 4년, 거란 통화 19년)
11월, 왕이 중원부(中原府, 충주)에 행차하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사면령을 내림. 행차가 지난 주ㆍ현의 1년간 전조(田租)를 감면하고, 관원들의 품계를 1급씩 올려줌.
시중(侍中) 한언공의 본관인 장단을 단주(湍州)로 승격시킴.
1002년(임인) 목종 5년(송 함평 5년, 거란 통화 20년)
3월, 박원휘 등 9명과 명경 19명 과거 급제. (고려사에는 8월)
4월, 태묘에 제사를 지내고 선왕(先王)ㆍ선후(先后)의 휘호를 더 올리고 사면령을 내림.
5월, 육위 군영(六衛軍營)을 만들고 소속 군인들의 요역을 면제함.
6월, 탐라산(제주 한라산)에서 화산 활동 일어남.
7월, 화폐 사용 후 금지시킨 추포(麤布)의 사용을 허용함.
1003년(계묘) 목종 6년(송 함평 6년, 거란 통화 21년)
1월, 3경(개경,서경,동경)과 10도에 학문을 장려하는 교서를 내림.
2월, 중앙의 5품 이상 관리들에게 봉사(封事)를 올리게 함.
덕주(德州)ㆍ가주(嘉州)ㆍ위화(威化)ㆍ광화(光化) 등 네 곳의 성을 수리함.
천추태후(千秋太后) 황보씨(皇甫氏)가 김치양(金致陽)과 통정하여 아들을 낳고 그를 왕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 : 현종)을 핍박해 승려가 되게 함.
1004년(갑진) 목종 7년(송 경덕 원년, 거란 통화 22년)
3월, 과거법을 개정함.
4월, 황주량 등 15명과 명경 4명 급제.
6월, 문하시중(門下侍中) 한언공(韓彦恭)이 죽음.
11월, 왕이 호경(鎬京 서경, 지금의 평양)에 행차하여 제사를 올리고 사면령을 내림.
1005년(을사) 목종 8년(송 경덕 2년, 거란 통화 23년)
1월, 동여진(東女眞)이 등주(登州 함남 안변)에 쳐들어와서 주ㆍ진과 촌락 30여 곳을 불사름.
3월, 지방제도 개편. 12절도(節度)·4도호(都護)·동서북계(東西北界)의 방어진사(防禦鎭使)·현령(縣令)·진장(鎭將)만 두고, 그 나머지 관찰사(觀察使)·도단련(都團練)·단련(團練)·자사(刺史)를 모두 폐지함.
4월, 최충(崔冲) 등 7명과 명경 3명 급제.
송나라 온주(溫州)의 문사 주저(周佇)가 와서 의탁하자, 예빈시주부(禮賓寺注簿)로 임명함.
1006년(병오) 목종 9년(송 경덕 3년, 거란 통화 24년)
2월, 흉년으로 바치지 못한 백성들의 조세를 감면해 줌.
4월, 문관 6품 이상에게 인재를 1명씩 추천하게 함.
6월, 벼락이 천성전(天成殿 연경궁에 있던 전각)에 떨어짐. 크게 사면령을 내리며, 효자, 순손(順孫) 등에게 은상(恩賞)을 줌. 문무관의 품계를 올려주고 금년 세포(稅布)의 반을 감면하며, 갑진년(1004) 이전의 밀린 조세를 아울러 덜어 줌.
등주(登州 함남 안변)와 귀성(龜城 평북 귀성)과 용진진(龍津鎭 함남 정평)에 성을 쌓음.
법주사 당간 지주 건립.(1866년 대원군이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할 때 사찰의 금속물을 징발하면서 당간이 사라짐)
1007년(정미) 목종 10년(송 경덕 4년ㆍ거란 통화 25년)
2월, 거란에서 야율연귀를 보내 왕을 수의 보방 추성 봉성공신(守義保邦推誠奉聖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 同三司) 수 상서령 겸 정사령 상주국(守尙書令兼政事令上柱國) 식읍 칠천호(食邑七千戶)로 올려 책봉함.
진관사(眞觀寺 개성에 있음) 구층탑을 세움.
6월, 조원(趙元) 등 6명과 명경 3명 급제.
7월, 어사대(御史臺)에서 경주(慶州) 사람 융대(融大)가 신라 원성왕(元聖王)의 원손(遠孫)이라 속이고 양민 5백여 명을 저의 노비라 하면서 궁인(宮人) 김씨(金氏)와 평장사 한인경(韓藺卿)ㆍ이부시랑(吏部侍郞) 김낙(金諾)에게 선물로 보내어 후원(後援)으로 삼은 사실을 보고함. 한인경을 양주(楊州)로 귀양보내고, 김낙은 바다 안의 섬으로 귀양보내고, 김씨는 구리 1백 근을 벌금으로 내게 함.
10월, 왕이 호경(鎬京)에 행차하여 재계하여 제사를 올리고, 유죄(流罪)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고, 1년간의 전조(田租)를 덜어 주고, 행차가 지난 연로의 주ㆍ현은 그 반으로 줄이고, 국내의 신기(神祇)에게 훈호(勳號)를 더함.
흥화진(興化鎭 평북 의주)ㆍ익령(翼嶺 강원 양양))ㆍ울진현(蔚珍縣 경북 울진)에 성을 쌓음.
이해에 호경(서경)에 지진이 일어남.
탐라(耽羅)에서 화산활동으로 새로운 산이 생겨났음을 보고함.
1008년(무신) 목종 11년(송 대중상부(大中祥符) 원년ㆍ거란 통화 26년)
3월, 손원선(孫元仙) 등 9명과 명경 2명 급제.
10월, 왕이 호경에 행차함.
통주(通州 평북 선천)에 성을 쌓음.
1009년(기유) 목종 12년(송 대중상부 2년ㆍ거란 통화 27년)
1월, 후사 없이 병이 든 왕이 대량군(大良君) 순(詢)을 불러들여 후사로 삼게 하고 서북면 순검사(西北面巡檢使) 강조(康兆)를 서울로 불러들이자 천추태후가 절령(岊嶺)을 막아 강조가 오는 것을 막음.
2월, 강조가 대량군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7명을 죽이고, 그 무리와 태후의 친속 30여 명을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귀양보냄. 적성현(積城縣 경기 연천)에서 왕을 죽임. 중대성(中臺省)을 설치하여 강조를 중대사(中臺使)로, 이현운(李鉉雲)을 중대부사(中臺副使)로, 채충순(蔡忠順)을 직중대(直中臺)로, 윤여(尹餘)를 상서 우승 겸 직중대(尙書右丞兼直中臺)로 삼음. 사농경(司農卿) 왕일경(王日敬)을 거란에 보내어 새 왕의 즉위를 알림. [강조의 정변]
3월, (현종의) 조모(祖母)를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로 추존함. 유윤부(柳允孚)를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유방헌(柳邦憲)을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강조를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로, 진적(陳頔)을 형부상서 참지정사(刑部尙書參知政事)로, 유진(劉瑨)과 왕동영(王同穎)을 상서 좌우복야(尙書左右僕射)로, 최항(崔沆)과 김심언(金審言)을 좌우 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로, 채중순을 이부시랑 겸 좌간의대부(吏部侍郞兼左諫議大夫)로 삼음. 과선(戈船) 75척을 만들어 명구(溟口)에 정박시키고 동북의 해적을 막음.
4월, 이유항을 거란에 보내 거란 태후의 생일을 축하함.
황고(皇考 황제의 죽은 아버지) 욱(郁)을 효목대왕(孝穆大王)으로 추존하고, 묘호(廟號)는 안종(安宗)이라 하며, 비(妣) 황보씨(皇甫氏)는 효숙왕태후(孝肅王太后)로 추존함. 사면령을 내리고 흠조를 면제하고 요역을 가볍게 하고 공신에게 상을 내리고 문무관의 관질을 더해 줌.
5월, 성종의 딸 김씨를 왕후로 맞아들임. 도죄(徒罪) 이하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문무관에게 작(爵) 1급을 올려 주며, 임기가 찬 사람은 관질(官秩)을 더하고 경군(京軍)에게 베를 차등 있게 주며, 남도의 백성으로 동북방의 변진(邊鎭)에 옮겨 살고 있는 사람을 전리(田里)로 돌려보냄.
안창령(安昌齡) 등 7명과 명경 2명 급제.
6월, 동북계(東北界)에 누리(황충(蝗蟲:메뚜기 종류)가 듦.
7월, 직언을 구하고 상참(常參) 이상인 문관에게 각기 봉사(封事)를 올려 시정의 잘잘못을 남김없이 말하도록 함. 한림학사(翰林學士) 최항(崔沆)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하고 왕의 사부(師傅)로 삼음.
8월,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유방헌(柳邦憲)이 죽음.
9월, 늘 안개가 끼어 겨울까지 이르름.
10월, 위수여(韋壽餘)를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진적(陳頔)을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삼음.
1010년(경술) 현종 원년(송 대중상부 3년ㆍ거란 통화 28년)
윤2월, 성종 때 폐지된 연등회(燃燈會 정월 보름에 거행)를 부활시킴.
4월, 왕이 친히 태묘(太廟)에 제사지냄.
서숭(徐崧) 등 8명과 명경(明經) 3명에게 급제를 줌.
5월,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郞中) 하공진(河拱辰)과 화주방어낭중(和州防禦郞中) 유종(柳宗)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귀양보냄. 앞서 공진이 함부로 동여진(東女眞) 부락에 침입하였다가 패하자 유종이 이 소식을 듣고 조회를 오는 여진 사람 95명을 화주관(和州館)에서 죽임.
여진이 거란에 호소하니 거란주가 고려 침입의 뜻을 밝힘.
7월, 거란이 급사중(給事中) 양병(梁炳)과 대장군(大將軍) 야율윤(耶律允)을 보내와서 전왕(목종(穆宗))에 대한 일을 추궁함.
덕주(德州)에 성을 쌓음.
8월, 내사시랑(內史侍郞) 진적(陣頔)과 상서우승(尙書右丞) 윤여(尹餘)를 거란에 보냄.
승니(僧尼)가 술을 빚어 담그는 것을 금지함.
9월,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김연보(金延保)를 거란에 보내어 추계 문후(秋季問候)를 하고 좌사낭중(左司郞中) 왕좌섬(王佐暹)과 장작승(將作丞) 백일승(白日昇)을 거란의 동경(東京 요양(遼陽))에 보내어 우호를 닦음.
10월, 초하루 병오일에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강조(康兆)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이부시랑(吏部侍郞) 이현운(李鉉雲)과 병부시랑(兵部侍郞) 장연우(張延祐)를 부사(副使)로, 검교상서 우복야 상장군(檢校尙書右僕射上將軍) 안소광(安紹光)을 행영도병마사(行營都兵馬使)로, 어사중승(御史中丞) 노정(盧頲)을 부사(副使)로, 소부감(少府監) 최현민(崔賢敏)을 좌군병마사로, 형부시랑 이방(李昉)을 우군병마사로, 예빈경(禮賓卿) 박충숙(朴忠淑)을 중군병마사로, 형부상서 최사위(崔士威)를 통군사(統軍使)로 삼아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평북 선천군(宣川郡))에 주둔하여 거란에 대비하게 함.
계축일에 거란이 급사중(給事中) 고정(高正)과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 한기(韓杞)를 보내와서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알림. 참지정사 이예균(李禮鈞)과 우복야 왕동영(王同穎)을 거란에 보내어 화친을 청함.
11월, 기거랑(起居郞) 강주재(姜周載)를 거란에 보내어 동지를 하례함.
거란주가 장군 소응(蕭凝)을 보내와서 친정(親征)함을 알림.
팔관회를 부활시키고 왕이 위봉루(威鳳樓)에 거둥하여 풍악을 관람함. 성종 때 폐지하였다가 이 때 정당문학 최항(崔沆)의 건의로 부활시킴.
신묘일, 거란주가 친히 보병과 기병 40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興化鎭 평북 의주군)을 포위하니, 순검사(巡檢使) 형부낭중 양규(楊規)가 진사(鎭使) 호부낭중 정성(鄭成)ㆍ부사(副使) 장작주부(將作注簿) 이수화(李守和)ㆍ판관(判官) 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와 함께 농성하여 굳게 지킴.
임진일, 최사위 등이 군사를 나누어 귀주(龜州 평북 귀성군(龜城郡)) 북쪽 뉴돈(恧頓)ㆍ탕정(湯井)ㆍ서성(曙星)의 세 길로 나가서 거란과 싸우다가 패전함.
거란주가 홍화진에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유함. 그 글에, “전왕 송(誦 목종(穆宗))이 우리 조정에 복종하여 섬긴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역신 강조가 임금을 시해하고 어린 임금을 세웠으므로 친히 정병을 거느리고 이미 국경에 다다랐으니, 너희들이 강조를 사로잡아 어가 앞에 보내면 곧 군사를 돌이킬 것이다." 라고 함. 계사일에 또 칙서를 화살에 매어 성문에 쏨.
갑오일, 거란주가 비단옷과 은그릇 등의 물품을 진장(鎭將)에게 차등 있게 내려주며 다시 항복을 권함.
정유일, 거란주가 포위를 풀고 군사를 동산(銅山) 아래로 옮김.
기해일, 강조가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 여러 번 거란 군사와 싸우다 이현운(李鉉雲),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이(盧顗)ㆍ양경(楊景)ㆍ이성좌(李成佐) 등과 함께 잡히고 노정(盧頲),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죽임을 당함. 이 때 우리 군사 3만여 급을 추격하여 베고 내버려진 군량과 무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음.
거란주가 강조에게 신하되기를 권했으나 거부하고 좌우기군장군(左右奇軍將軍) 김훈(金訓)ㆍ김계부(金繼夫)ㆍ이원(李元)ㆍ신녕한(申寧漢)이 완항령(緩項嶺)에서 군사를 매복하고 있다가 거란 군사의 추격을 막음.
거란이 강조의 서신을 거짓 꾸며 흥화진으로 보내 항복하기를 권유하나 양규(楊規)가 거부함.
(항복한) 노진(盧戩)과 그의 합문사(閤門使) 마수(馬壽)를 시켜 통주의 항복을 권유하니 중랑장(中郞將) 최질(崔質)과 홍숙(洪淑)이 노진과 마수를 체포하고 방어사(防禦使) 이원귀(李元龜)ㆍ부사(副使) 최탁(崔卓)ㆍ대장군(大將軍) 채온겸(蔡溫謙)ㆍ판관(判官) 시거운(柴巨雲)과 더불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며 민심을 수습함.
12월, 경술일에 거란 군사가 곽주(郭州 평북 정주의 곽산)에 침입하니 방어사 호부원외랑 조성유(趙成裕)는 도망치고 우습유 승리인(乘里仁), 대장군 대회덕(大懷德), 신녕한(申寧漢), 공부낭중 이용지(李用之), 예부낭중 간영언(簡英彦)은 모두 죽고 성이 함락됨.
임자일, 거란 군사가 청수강(淸水江 청천강)에 이르니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府使) 공부시랑 박섬(朴暹)이 성을 버리고 도망감.
강조가 패한 후 화주(和州 함남 영흥)를 지키고 있던 중랑장 지채문(智蔡文)의 군사를 옮겨 서경을 구원하게 하니, 채문이 즉시 군용사(軍容使) 시어사(侍御史) 최창(崔昌)과 더불어 나아가 강덕진(剛德鎭 평남 함천군)에 주둔함.
계축일, 거란 군사가 서경에 이르러 중흥사(中興寺)의 탑을 불태움.
갑인일, 숙주(肅州 평남 평원군)가 무너짐. (항복한) 노이(盧顗)가 향도(鄕導)가 되어 거란 사람 유경(劉經)과 더불어 서경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부유수(副留守) 원종석(元宗奭)은 부하 관속 최위(崔緯)ㆍ함질(咸質)ㆍ양택(楊澤)ㆍ문안(文晏) 등과 항복하려고 함.
채문 등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서경에 와서 고궁의 남쪽 행랑에 주둔함. 최창이 원종석에게 노이 등을 구류하고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떠보았으나 종석이 따르지 않음.
최창이 은밀히 채문과 모의하여 군사를 성 북쪽에 보내어 노이 등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습격하여 죽이고 표문을 빼앗아 불태움. 성안의 인심이 일치하지 않아 채문이 나가서 성 남쪽에 주둔하다가 동북계도순검사 탁사정(卓思政) 거느리고 온 군사와 합쳐 다시 성에 들어감.
삼군(三軍)이 패전하고 주ㆍ군이 함락되자 왕이 표문을 올려 조회하기를 청하니, 거란주가 허락하고 거란 군사가 우리나라에서 포로를 사로잡거나 노략질함을 금지하고, 마보우(馬保佑)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왕팔(王八)을 부유수(副留守)로 삼고는 을름(乙凜)을 보내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보우 등을 호송하게 함.
을묘일, 거란주가 또 한기(韓杞)를 시켜 기병 2백 명을 거느리고 서경 성 북문에 이르러 항복을 권하니 탁사정이 채문과 모의하여 휘하의 정인(鄭仁) 등을 시켜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기습하여 한기 등 백여 명을 쳐서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로잡음. 사정이 채문을 선봉으로 삼아 나가서 을름과 싸우게 하니 을름과 보우가 패하여 달아나고 성안 인심이 안정됨.
거란주가 다시 을름을 보내어 공격하니 채문이 병진일에 사정ㆍ중 법언(法言)과 함께 군사 9천 명을 거느리고 임원역(林原驛 평남 대동군)에서 적군을 맞아 쳐서 머리 3천여 급(級)을 베고 법언은 전사함.
그 이튿날 채문이 다시 나가서 싸우니 거란 군사가 패하여 달아나고 이를 본 성 안의 장수와 군사들이 앞다투어 나가 추격하여 마탄(馬灘)에 이르자, 거란이 군사를 되돌려 쳐부수고 마침내는 성을 포위하였으며 거란주는 성 서쪽 절에 머무름.
사정은 두려워지자 장군 대도수(大道秀)를 속여 말하기를, “그대는 동문으로 나는 서문으로 나와 앞뒤에서 공격하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드디어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도망감. 도수는 대동문(大東門)을 나와 비로소 속은 줄 알고 마침내 관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거란에게 항복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무너지고 성 안에서는 흉흉해짐.
기미일, 통군녹사 조원(趙元)과 애수진장(隘守鎭將) 강민첨(姜民瞻), 낭장(郞將) 홍협(洪叶)ㆍ방휴(方休) 등이 신사(神祠)에 빌고 여럿이 조원을 추대하여 병마사로 삼고,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킴.
경신일에 양규(楊規)가 흥화진(興化鎭)에서 군사 7백여 명을 거느리고 통주에 이르러 군사 1천 명을 수합하여, 신유일에 곽주에 들어가서 거란의 주둔 군사를 쳐서 모두 베어 죽이고 성 안의 남녀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김.
이날 거란주가 서경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포위를 풀고 동쪽으로 감.
계해일, 서경의 신사(神祠)에서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니 거란의 군사와 말이 모두 넘어짐.
귀양보냈던 하공진(河拱辰)과 유종(柳宗)의 관작을 회복시킴.
신미일, 지채문(智蔡文)이 서울로 도망하여 임신일에 서경에서 패전한 사실을 아룀. 여러 신하들이 항복하기를 의논하는데 강감찬만은 왕에게 남쪽으로 가기를 권함. 이 날 밤에 왕이 후비(后妃)와 이부시랑 채충순(蔡忠順) 등과 금군(禁軍) 50여 명과 함께 서울을 나감.
계유일, 적성현(積城縣 경기 연천) 단조역(丹棗驛)에 이르니 무졸(武卒) 견영(堅英)이 역인(驛人)과 함께 활시위를 당겨 행궁을 범하려 하므로 채문이 물리침. 왕이 창화현(昌化縣 경기 양주)에 이르러 하공진의 기습한다는 거짓 소식에 김응인(金應仁)과 시랑 이정충(李正忠), 낭장 국근(國近) 등이 모두 도망가고 밤에 적이 또 이르자 시종하는 신하ㆍ환관ㆍ궁녀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고, 현덕(玄德)ㆍ대명(大明) 두 왕후와 시녀 두 사람ㆍ승지 양협(良叶)ㆍ충필(忠弼) 등만이 왕을 모시었고 채문이 그때 그때의 시기(時機)에 따라 변고에 대처하며 적을 막아내다
새벽에 북문으로 탈출하여 도봉사(道峯寺)로 들어감.
채문이 행재(行在)로 달려온 하공진과 유종(柳宗)을 데려오니 왕이 공진과 유종(柳宗)을 불러 위로함.
갑술일, 왕이 양주(楊州)에 머무르며 하공진의 화친 건의를 받아들여 공진과 고영기(高英起)에게 표문을 주어 거란의 진영으로 보내니 거란이 군사를 물림.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국보 280호) 제작됨.
1011년(신해) 현종 2년(송 대중상부 4년ㆍ거란 통화 29년)
정월 초하루 을해일, 거란주가 서울에 들어와서 태묘와 궁궐ㆍ민가에 불을 질러 모두 불태움.
이 날 왕은 광주(廣州)에 머무르며 채문에게 잃어버린 두 왕후를 찾게 함.
정축일(3일), 하공진ㆍ고영기가 거란의 진영에 이르러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하니 거란주가 이를 받아들이고 공진 등을 붙잡아 둠
무인일, 왕이 광주를 출발하여 비뇌역(鼻腦驛)에서 머무름.
기묘일(5일), 유종의 건의에 따라 양성(陽城 경기 안성)으로 행차함.
사산현(蛇山縣)을 지나 천안부(天安府 충남 천안)에 이르니 유종과 응인 등이 도망을 감.
신사일(7일), 왕이 공주(公州)에 머무니 절도사 김은부(金殷傅)가 예를 갖춰 영접함.
여양현(礪陽縣(전북 익산의 여산)에 머물렀을 때 장수와 군사들이 배반할 마음을 두자 채문의 건의에 따라 현안지(玄安之) 등 16명을 중윤(中尹)으로 임명함.
임오일, 삼례역(參禮驛 전북 전주 삼례)에 이르러 전주절도사 조용겸(趙容謙)이 야인의 옷차림으로 임금의 행차를 맞이하자 전주에 머물지 말 것을 청하는 박섬(朴暹)의 건의에 따라 장곡역(長谷驛)으로 옮겨 유숙함.
이날 저녁 용겸이 전운사(轉運使) 이재(李載)ㆍ순검사(巡檢使) 최집(崔檝)ㆍ전중소감(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과 더불어 소리를 지르며 닥쳤으나 채문이 사람을 시켜 문을 닫고 굳게 지킴.
을유일(11일), 거란 군사가 물러감.
정해일(13일), 왕이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羅州)에 들어감.
경인일(16일), 밤에 통사사인(通事舍人) 송균언(宋均彦)과 별장(別將) 정열(丁悅)이 거란의 전봉(前鋒)인 원수(元帥) 부마(駙馬)의 서신과 하공진의 주장(奏狀)을 가지고 옴. 왕이 공진의 주장을 보고 거란 군사가 벌써 물러간 것을 알고 기뻐하며 균언을 도병마녹사로, 정열을 친종낭장(親從郞將)으로 삼음. 거란 문자로 쓴 거란 부마의 서신은 해독하는 사람이 없어 뜻을 알지 못함.
신묘일(17일), 귀주 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叔興)이 중랑장(中郞將) 보량(保良)과 함께 거란 군사를 쳐서 머리 1만여 급을 벰.
임진일, 양규(楊規)가 거란 군사를 무로대(無老代 평북의 주ㆍ군)에서 습격하여 머리 2천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남녀 3천여명을 빼앗음.
계사일(19일), 양규가 이수(梨樹)에서 싸워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머리 2천 5백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남녀 1천여명을 빼앗음.
을미일(21일), 왕이 행차를 돌려서 복룡현(伏龍縣)에서 머무름.
병신일, 양규가 여리참(餘里站)에서 싸워 머리 1천여 급을 베고 사로잡혀 있던 남녀 1천여 명을 빼앗음. 이날 세 번 싸워서 모두 이김.
경자일(26일) 왕이 전주에 머물러 7일을 지냄.
임인일(28일), 양규가 다시 거란 군사의 전봉을 애전(艾田)에서 맞받아 쳐서 머리 1천여 급을 벰. 조금 후 거란주의 대군이 불시에 이르자, 양규와 김숙흥이 종일토록 힘껏 싸우다 군사가 모두 죽고 화살이 다하여 전사함.
양규는 후원도 없는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한 달만에 모두 일곱 번 싸워 거란 군사를 매우 많이 죽이고 사로잡혀 있던 사람 3만여 명을 빼앗았고, 낙타ㆍ말ㆍ무기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얻음.
계묘일(29일), 거란이 압록강을 건너 군사를 이끌고 물러가는데, 진사(鎭使) 정성(鄭成)이 이를 추격하여 대파함. 항복했던 여러 성이 모두 수복함.
중대성(中臺省)을 폐지하고 다시 중추원을 설치함.
채충순(蔡忠順)을 비서감(祕書監)으로, 박섬(朴暹)을 사재경(司宰卿)으로, 주저(周佇)를 예부시랑 중추원직학사(禮部侍郞中樞院直學士)로 삼음.
2월 정미일, 왕이 전주를 출발하여 무신일에 공주에 머물러 6일을 지냈는데 절도사 김은부(金殷傅)가 맏딸을 시켜 어의(御衣)를 지어 바침. 그를 맞아들이니 곧 원성왕후(元成王后)임.
양규에게 공부상서를, 김숙흥에게 장군(將軍)을 증직함.
중랑장 지채문(智蔡文)의 호종한 공을 치하하여 그에게 전지 30결을 내려줌.
정사일, 왕이 청주(淸州)에 머무름.
연등회를 행궁에서 거행함. 이후부터 2월 보름에 연등회를 거행하게 됨.
경신일, 왕이 청주를 출발하여 정묘일에 서울로 돌아와 수창궁(壽昌宮)에 거처함.
3월, 유진(劉瑨)을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조지린(趙之遴)ㆍ최사위(崔士威)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삼음.
4월, 탁사정(卓思政)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삼음.
종묘에 비오기를 빌고 시사(市肆)를 옮기며, 짐승의 도살을 금하고 우산[繖]과 부채[扇]를 쓰지 않으며, 원통한 옥사를 심리하고 궁핍한 백성을 구휼함.
유사에 명하여 양규(楊規)의 아내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 곡식을 주고 아들 대춘(帶春)을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함.
노정(盧頲)에게 예빈경(禮賓卿)을 증직함.
대장군 채온겸(蔡溫謙)ㆍ신영한(申寧漢), 낭장 원태(元泰), 별장 최원(崔元), 습유(拾遺) 승리인(乘里仁), 태사승(太史丞) 유인택(柳仁澤)이 전사하였으므로, 그들의 집에 쌀과 베로 차등 있게 부의(賻儀)를 줌.
유사에 명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전사한 해골을 거두어 장사지내고 제사를 지내게 함.
송악(松岳)에 비오기를 빌었더니 큰 비가 옴.
공부 낭중 왕첨(王瞻)을 거란에 보내어 군사를 돌이킨 데 대해 사례함.
영빈관(迎賓館)과 회선관(會仙館)을 설치하여 여러 나라 사신을 접대함.
5월, 동북 여진(東北女眞)의 추장(酋長) 저을두(鉏乙豆)가 그 무리 70명을 거느리고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그들에게 의복과 은으로 만든 기명을 내려줌.
평양의 목멱(木覓)ㆍ교연(橋淵)ㆍ도지암(道知巖)ㆍ동명왕(東明王) 등의 신에게 훈호를 올림.
7월, 최사위(崔士威)를 서북면 행영도통사로, 장연우(張延祐)ㆍ채충순(蔡忠順)을 함께 중추사(中樞使)로 삼음.
형부의 주청에 따라 낭중(郞中) 백행린(白行隣)의 관직을 삭탈함.
서경에서 전사한 승려 법언(法言)에게 수좌(首座)를 증직함.
8월, 형부의 주청에 따라 조용겸(趙容謙)ㆍ유승건(柳僧虔)ㆍ이재(李載)ㆍ최즙(崔檝)ㆍ최성의(崔成義)ㆍ임탁(林卓)의 관직을 박탈하고 귀양보냄.
문인위(文仁渭)를 우복야(右僕射)로, 장연우(張延祐)를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로 삼음.
강조의 당을 논죄하여 탁사정(卓思政)ㆍ박승(朴昇)ㆍ최창(崔昌)ㆍ위종정(魏從政)ㆍ강은(康隱)을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귀양보냄.
호부시랑(戶部侍郞) 최원신(崔元信)을 거란에 보냄.
관인전(寬仁殿 수창궁의 전각) 문에 거둥하여 늙은이ㆍ고아와 홀아비ㆍ병이 위독한 자들에게 술과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물품을 차등 있게 줌.
참지정사(參知政事) 최사위(崔士威)를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삼음.
송악성(松岳城)을 보수함.
서경에 황성(皇城)을 쌓음.
동여진이 백여 척의 배로 경주에 침입함.
청하(淸河 경북 영일)ㆍ흥해(興海(경북 영일))ㆍ영일(迎日 경북 영일)ㆍ울주(蔚州 울산)ㆍ장기(長鬐 경북 영일)에 성을 쌓음.
9월, 참지정사(參知政事) 조지린(趙之遴)이 죽음.
탐라(耽羅)에서 주ㆍ군의 예(例)에 따라 주기(朱記)를 내려주도록 청하니, 이를 허락함.
10월, 유방(庾方)을 참지정사 서경유수 겸 서북면 행영도병마사(參知政事西京留守兼西北面行營都兵馬使)로 삼음.
도관 낭중(都官郞中) 김숭의(金崇義)를 거란에 보내어 동지(冬至)를 하례함.
궁궐을 수선하고 건축함.
11월, 형부 시랑(刑部侍郞) 김은부(金殷傅)를 거란에 보내어 생신을 하례함.
12월, 문인위(文仁渭)를 참지정사로 삼음.
이해에 예부 시랑(禮部侍郞) 주기(周起)가 아뢰어 비로소 진사(進士)의 시험에 성명을 봉하는 법[糊名法]을 정함.
하공진(河拱辰)이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며 거란의 회유를 따르지 않자 거란에서 죽임.
1012년(임자) 현종 3년(송 대중상부 5년ㆍ거란 개태(開泰) 원년)
정월, 중의 의복이 사치하고 참람하여 속인(俗人)과 다르지 않으니 유사에 명하여 그 의복 격식을 정하게 하라는 교서를 내림.
동경유수(東京留守)를 폐지하고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를 둠. 12주(州)의 절도사를 폐지하고 5도호(都護)와 75도에 안무사(安撫使)를 둠.
궁올산(弓兀山)에 성을 쌓음.
2월, 전란을 겪은 서북의 주ㆍ진에 양식과 종자를 내려주라는 교서를 내림.
여진의 추장(酋長) 마시저(麻尸底)가 삼십성(三十姓) 부락의 자제를 거느리고 말을 바침.
상식태관(尙食大官 임금의 음식을 맡은 벼슬)에게 명하여 상선(常膳)을 줄이게 함.
위수여(韋壽餘)를 문하시중으로, 유진(劉瑨)을 문하시랑으로, 최사위(崔士威)를 내사시랑 평장사로, 최항(崔沆)을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로, 박충숙(朴忠淑)을 상서좌복야로, 채충순(蔡忠順)을 예부상서로 삼음.
3월, 경오일에 경주에서 지진이 일어남.
송 나라 사람 왕복(王福) 등 7명이 와서 의탁함.
태조의 서손인 태자첨사(太子詹事) 정(禎)이 죽음.
사람들의 습속이 본업(本業 농업)을 버리고 말업(末業 상업)에 힘쓴다 하여 여러 도의 금기(錦綺) 등 여러 직물을 파는 갑방(甲坊)의 장수(匠手)들을 줄여서 농업에 종사하게 하라는 교서를 내림.
4월, 능견선(綾絹扇)을 팔거나 사는 것을 금함.
문하시중 위수여(韋壽餘)이 죽음.
거란이 왕에게 친히 와서 조회하라고 함.
5월, 동여진이 청하현(淸河縣)ㆍ영일현(迎日縣)ㆍ장기현(長鬐縣)에 침입하자, 도부서(都府署)의 문연(文演)ㆍ강민첨(姜民瞻)ㆍ이인택(李仁澤)ㆍ조자기(曹子奇)를 보내 막음.
경주의 조유궁(朝遊宮)을 헐고 그 재목으로 황룡사의 탑을 수리함.
원능(元陵 경기 개풍군에 있는 효숙태후(孝肅太后)의 능)을 배알함.
지난해 물난리와 가뭄을 겪은 서경에 창고 곡식을 내어 진휼하게 함.
6월, 용진진(龍津鎭)의 3백 40여 호가 불에 탐.
이때 거처하는 궁정이 땅이 낮고 좁으므로 상참관(常參官)들에게 5일에 한 번 알현케 함.
송 나라 사람 섭거전(葉居腆)ㆍ임덕(林德)ㆍ왕호(王皓)가 와서 의탁함.
동북면 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 강감찬(姜邯贊)과 서로 틈이 생겨 논소(論訴)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감찰어사(監察御史) 이인택(李仁澤)을 면직함.
가뭄이 드니, 유사에 명하여 원통한 옥사를 심리하여 경한 죄는 방면하고 산천에 제사지내도록 함.
형부시랑 전공지(田拱之)를 거란에 보내어 하계 문후(夏季問候)를 하고 또 왕이 병으로 친히 조회할 수 없다고 알리니, 거란주가 노하여 흥화(興化)ㆍ통주(通州)ㆍ용주(龍州)ㆍ철주(鐵州)ㆍ곽주(郭州)ㆍ귀주(龜州) 등 여섯 성을 빼앗으라고 명함.
8월, 초하루 병신일에 일식이 있음.
일본국(日本國)의 반다(潘多) 등 35명이 와서 의탁함.
탐라에서 큰 배 두 척을 바침.
경주에 성을 쌓음.
9월,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 문유령(文儒領)을 거란의 내원성(來遠城)에 보냄.
10월, 송의 초(楚) 사람 육세녕(陸世寧)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침.
윤10월, 여진의 모일라(毛逸羅)와 저을두(鉏乙豆)가 부락의 삼십 성(三十姓)을 거느리고 화주에 나아와서 맹약 맺기를 원하므로 허락함.
공부상서 장영(張瑩)과 예부시랑 유징필(劉徵弼)을 거란에 보냄.
민종(愍宗)을 성 동쪽에 이장(移葬)한 뒤 의릉(義陵)이라 하고, 시호를 선양(宣讓)으로 고쳤으며 묘호(廟號)는 목종(穆宗)이라 함. 예전에 목종이 시해당했을 때 올린 시호와 묘호는 모두 강조(康兆)가 지어 정한 것이었는데 이때에 와서 이를 고침.
김은부(金殷傅)가 거란에서 돌아옴.
거란의 사신 태위(太尉) 한빈(韓邠)이 옴.
12월, 정축일에 경주에 지진이 일어남.
거란의 사신 인진사(引進使) 이연홍(李延弘)이 옴.
서경 목멱사(木覓祠) 신상을 만듦.
장주(長州 함남 정평)와 금양(金壤 강원 회양)에 성을 쌓음.
1013년(계축) 현종 4년(송 대중상부 6년ㆍ거란 개태 2년)
정월, 예빈소경(禮賓少卿) 장계(張洎)를 거란에 보냄.
송의 민(閩) 사람 대익(戴翼)이 와서 의탁하니 유림랑 수궁령(儒林郞守宮令)을 임명하고 의물(衣物)과 전장을 내려줌.
2월, 임오일에 경주에 지진이 일어남.
중추원사(中樞院使) 채충순(蔡忠順)을 거란에 보냄.
3월, 소나무와 잣나무의 벌채를 금함.
신축일에 금주(金州 김해)에 지진이 일어남.
거란의 사신 좌감문위대장군(左監門衛大將軍) 야율행평(耶律行平)이 와서 흥화(興化) 등 여섯 성을 달라고 요구함.
4월, 참지정사(參知政事) 장영(張瑩)을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삼음.
5월, 거란의 사신이 와서 개태(開泰)로 개원(改元)하였음을 알림.
여진이 거란 군사를 인도해 와서 압록강을 건너려 하니 대장군 김승위(金承渭) 등이 물리침.
경장태자(敬章太子)의 딸을 맞아들여 비(妃)로 삼음. 경장은 대종(戴宗 성종의 아버지)의 셋째 아들.
6월, 김작빈(金作賓)을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차함(借銜)하여 거란에 보내어 개원한 데 대해 하례함.
7월, 거란의 사신 야율행평이 다시 와서 여섯 성을 달라고 요구함.
8월, 의릉(義陵 목종의 능)에 배알하고 사면령을 내림.
9월, 임유간(林維幹) 등 8명과 명경 1명에게 급제를 줌.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최항(崔沆)을 감수국사(監修國史)로, 예부상서 김심언(金審言)을 수국사로, 예부시랑 주저(周佇)와 내사사인(內史舍人) 윤징고(尹徵古)ㆍ시어사(侍御史) 황주량(黃周亮)ㆍ우습유(右拾遺) 최충(崔冲)을 모두 수찬관(修撰官)으로 삼음.
12월, 초하루 무오일에 일식이 있음.
1014년(갑인) 현종 5년(송 대중상부 7년ㆍ거란 개태 3년)
정월, 임자일에 혜성이 오차에 나타남.
궁궐이 완성됨.
2월, 경신일에 혜성이 대릉(大陵)에 들어감.
철리국(鐵利國) 추장(酋長) 나사(那沙)가 여진의 만두(萬豆)를 시켜서 말과 초서(貂鼠)ㆍ청서(靑鼠)의 모피를 바침.
백성 중에 나이가 70 이상으로 관작이 없는 자에게 모두 정위(正位) 계급을 주라고 명함.
4월, 백성들에게 비수(匕首) 차는 것을 금함.
왕이 친히 재방(齋坊)에 체제(禘祭)를 지내고 존시(尊諡)를 더 올림. 당시에 태묘가 완성되지 못하여 매양 시제가 되면 각기 본능(本陵)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었는데, 이제 재방을 수리하여 임시로 신주를 모시고 비로소 목종을 부묘하고 유죄(流罪) 이하에게 사면령을 내림.
유진(劉瑨)을 검교태사수 문하시중(檢校太師守門下侍中)으로, 최사위(崔士威)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김심언(金審言)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삼음.
우현부(禹玄符) 등 11명에게 급제를 줌.
5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전공지(田拱之)가 죽음.
6월, 삼사(三司)에서 추포(麤布)의 가격을 낮추도록 하니 받아들임.
진적(陳頔)ㆍ이예균(李禮均)을 승진시켜 문하시랑 평장사로, 왕동영(王同穎)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윤여(尹餘)를 사재경(司宰卿)으로, 왕좌섬(王佐暹)을 장작소감(將作少監)으로 삼음.
7월, 중추사(中樞使) 강감찬(姜邯贊)이 사직단(社稷壇)을 수축하고 예사(禮司)가 의주(儀注 예식 행사의 순서)를 의정(議定)하게 하도록 청하니 그 말을 따름.
8월, 내사사인(內史舍人) 윤징고(尹徵古)를 송에 보내어, 금선(金線)으로 짜서 만든 용봉안복(龍鳳鞍幞)과 수놓은 용복안복 각 2 벌과 좋은 말 22필을 바치고 이어 옛날과 같이 귀부하기를 청하니, 송 나라 황제가 등주(登州)에 명하여 해안에 관사를 설치하여 대접하라고 함.
평장사 김심언(金審言)을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삼음.
9월, 거란이 장군 이송무(李松茂)를 보내어 또 흥화 등 여섯 성을 달라고 요구함.
10월, 거란이 국구(國舅) 상온(詳穩 관명(官名)) 소적열(蕭敵烈)을 보내와 통주와 흥화진을 침략하니 장군 정신용(鄭神勇)과 별장 주연(周演)이 쳐서 패퇴시키고 머리 7백여 급을 베었는데 강물에 빠져죽은 자도 매우 많았음.
11월, 계미일에 상장군 김훈(金訓)ㆍ최질(崔質) 등이 여러 위(衛)의 군사를 거느리고 난을 일으키니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일직(日直) 황보유의(皇甫兪義)를 귀양보냄.
을유일, 김훈 등이, 무관 상참관(常參官) 이상은 모두 문관을 겸하게 하도록 청하고 또 어사대(御史臺)를 폐지하고 금오대(金吾臺)를 설치하며 또 삼사(三司)를 폐지하고 도정서(都正署)를 설치하도록 청하니 그 말을 따름.
북산(北山) 여러 절의 중이 군사를 일으켜서 오고 있다는 유언비어로 서울이 크게 놀람.
12월, 사면령을 내리고 이해 조세의 반을 줄이고, 태조 때 공신의 후손을 녹용하였으며, 도성과 향리에 차등을 두어 은혜를 베품.
1015년(을묘) 현종 6년(송 대중상부 8년ㆍ거란 개태 4년)
정월, 거란이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를 끼고서 동서로 성을 쌓으므로 장수를 보내어 쳐부시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함.
계묘일에 거란 군사가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니 장군 고적여(高積餘)와 조익(趙弋) 등이 물리침.
갑진일에 거란이 또 통주를 침략함.
3월, 왕이 서경에 행차함. 여러 신하들을 장락궁(長樂宮)에 모아 잔치를 베풀고 김훈(金訓)ㆍ최질(崔質)ㆍ이협(李恊)ㆍ최가정(崔可貞)ㆍ석방현(石邦賢)ㆍ이섬(李暹)ㆍ김정열(金貞悅)ㆍ효암(孝嵓)ㆍ임맹(林猛)ㆍ최귀(崔龜) 등 19명을 목벰.
거란이 용주(龍州 평북 용천)에 침입함.
여진이 배 20척을 거느리고 구두포(狗頭浦)에 침입하니 명도도부서(溟道都部署)가 이를 물리침.
4월, 거란의 사신인 장군 야율행평(耶律行平)이 와서 여섯 성을 달라고 요구하니 억류하고 보내지 않음.
왕이 서경에서 돌아옴.
5월, 김은부(金殷傅)를 지중추사(知中樞事)로 삼음
6월, 초하루 기유일에 일식이 생김.
윤6월, 사수현(泗水縣 경남 사천(泗川))을 사주(泗州)로 승격시킴.
송의 천주(泉州) 사람 구양징(歐陽徵)이 와서 의탁하니 얼마 뒤에 우습유(右拾遺)에 임명함.
7월, 금오대를 폐지하고 사헌대(司憲臺)를 설치하니, 무관들이 청하여 설치하였던 것은 모두 폐지함.
도병마사(都兵馬使)에서 장군 정신용(鄭神勇)ㆍ임영함(林英含)과 군사 1만 2천 5백여 명이 모두 변경에서 세운 공로가 있으니 계급을 올려서 상줄 것을 청하니 받아들임.
8월, 내사령(內史令) 유윤부(柳允孚)가 죽음.
9월, 갑인일에 거란의 사신 감문장군(監門將軍) 이송무(李松茂)가 와서 여섯 성을 달라고 요구함.
기미일, 거란이 와서 통주와 흥화진을 공격하니, 대장군 정신용(鄭神勇), 별장 주연(周演), 산원(散員) 임억(任憶), 교위(校尉) 양춘(楊春), 태의승(太醫丞) 손간(孫簡), 태사승(太史丞) 강승영(康承穎) 등이 군사를 이끌고 거란군사의 뒤로 나와 쳐서 머리 7백여 급을 베었는데 신용 등 6명은 전사함.
정묘일, 거란이 영주성(寧州城 평남 안주(安州))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가니 대장군 고적여(高積餘), 장군 소충현(蘇忠玄)ㆍ고연적(高延迪), 산원(散員) 김사(金巳), 별장 광삼(光參) 등이 추격하다가 전사함. 거란 군사가 병마판관 왕좌(王佐)와 녹사(錄事) 노현좌(盧玄佐)를 사로잡아 감.
11월, 호부상서(戶部尙書) 장연우(張延祐)가 죽음.
이해에 거란이 선화진(宣化鎭 평북 의주(義州))ㆍ정원진(定遠鎭 평북 의주) 두 진을 빼앗아 이 곳에 성을 쌓음.
민관시랑(民官侍郞) 곽원(郭元)을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이어 거란이 해마다 와서 침략함을 알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