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가을호
제14회
시와경계
신인우수작품 공모
당선자 발표
제14회 신인 우수작품 공모 당선작을 아래와 같이 발표합니다. 본 잡지의 발전과 함께 관심 독자층이 많아짐으로써 신인우수작품 응모 수가 꾸준히 늘고 있는 가운데 김옥종을 당선자로 선정합니다.
《시와경계》는 신인우수작품 공모를 년 2회 시행해왔습니다. 그러나 응모작품이 심사위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중론일 때에는 당선작 없음으로 발표해 왔습니다. 봄호에 이어 가을호 당선을 발표할 수 있어 반가움이 큽니다.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일상의 삶을 변주한 소박한 주제 속에 생의 끊임없는 반추와 일상에의 정진을 담아내는 형식이 돋보입니다. 먼 길 돌아 늦게 도착한 만큼 등단작보다 더 나은 작품을 써가는 열정적인 시인이 되기를 바라며, 축하드립니다.
⬣ 당선자
김옥종 「늙은 호박 감자조림」,「민어의 노래」,「해넘이」,「눈」
전남 신안 출생. 한국인 최초 K1(이종격투기)선수 출신 요리사
e-mail: okjong8989@hanmail.net
⬣ 심사위원 편집위원 일동. 이태관(글)
당선작
늙은 호박 감자조림 외 3편
김 옥 종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고단한 저녁의 혈 자리를 풀어주는, 가을 끝자락의 햇볕을 모아 한철 시퍼런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절망의 밑동을 잘라내어 그 즙으로 조청을 만들고 끈적끈적한 세월 맛볼 수 있게 만드는 요리, 적어도, 그 계절의 움푹진 골짜기에서 흐르는 향기만이라도 담아서 덖어주고 쪄내고 네 삶 또한 감자처럼 포근히 익혀줄 것이니 때를 기다려 엉겨 붙어주시게나. 전분이 할 수 있는 가지런한 사명감에도 한 번씩 우쭐대고 싶은 날들도 있으니 늙은 호박과의 친분이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갈치인들 어떻고 고등어인들 나무라겠는가. 그저 호박과 어우러져 등짝 시린 이 세월의 무게만큼만 허리 깊숙이 지지고 있다 보면 뒤척이지 않아도 가슴 빨갛게 농익지 않겠나. 기다림의 끝은 이렇듯 촉촉한 가을비처럼 스며드는 맛이었음을 오래 잊고 살지 않겠나.
민어의 노래
고사리장마가 지나고 난 바닷길 깊게 팬 여울물 소리에 새우 떼들의 선잠을 깨우는 밴댕이와 알 품은 병어들의 놀이터가 돼버린 전장포 앞 바다에서는 서남쪽 흑산 해에서 진달래꽃 피기를 기다렸다가 뻘물 드는 사리때를 기다려 뿌우욱 뿌우욱 부레로 내는 속울음으로 내 고달픈 고향에 다다른 칠월이 갯내음을 아가미로 훑는다.
마늘 뽑고 양파 캐어 말리던 늦은 오후, 구 년은 자랐을 법한 일 미터 크기의 십 킬로짜리 수치를 토방에 눕히고 추렴하여 내온 병쓰메에 네 등살은 막장에 얹어 먹고 목살은 묵은지에 감아 먹고 늙은 오이짠지는 볼살에 얹어 먹고 고추 참기름 장에는 부레와 갯무래기 뱃살을 적셔 먹고 갈비뼈와 등지느러미 살은 잘게 조사서 가는 소금으로 엮어내는 뼈 다짐으로 먹어도 좋고 내장과 간은 데쳐서 젓새우 고추장에 볶아내고 쓸개는 많은 어혈로 어깨 처진 친구에게 내어주고 아래턱 위에 붙은 입술살은 두 점밖에 안 나오니 내가 먹어도 될 성싶은데 깊은 고랑 주름살에도 꼬리뼈 살을 긁적거리고 있노라면 봉굴수리잡 옆 대실 개복숭아는 제법 엉덩이가 빨갛다.
세월은 소리 내어 울지 않는 것, 민어 몇 마리 돌아왔다고 기다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새우 놀던 모래밭을 파헤쳐 집을 지을 때부터 플랑크톤이 없던 모래밭에 새끼를 품어내지 못한 오젓, 육젓이 밴댕이를 울리고 깡다리를 울리고 병어를 울리고 네 입맛 다실 갯지렁이도 없는 바다에 올라 칼끝에 노래하던 민어의 복숭앗빛 속살은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으리라.
해넘이
잎새 하나 달지 못한 겨울나무에도
눈꽃은 피고
봄을 품어야 겨울은 깊어진다
아랫목이 따뜻한들 네 살갗만 하겠는가
나무껍질 안으로 느껴지는 온기가 헐거운 몸으로 덥혀지고 있으니 기다릴밖에
더 야윈들 눈이 얹혀 쉬었다 갈 자리마저 없겠는가
한나절 쪽빛으로는 어림도 없을게다
초점 없는 네 돋보기로는 햇살 한 줌 건져내는 것도 수월치 않을게다
온기를 져버린 것이 어디 겨울뿐이겠는가.
사는 것이 의리여야만 한다면 기꺼이 견디어보마, 하지만
네 가려운 것도 긁어줄 수 없다면 태워버리는 것이 더 위안일 것임을
내가 그토록 건져 올리고 싶은 바다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조경지대 포말 속에서 은신하고 있던 네 생활을 가까스로 낚아 올려놓으면
은빛 생채기에서 흘러내려 번지는 노을이 뜨겁다
눈
그래 용서하마
쉼표 없이 허우적대며 걸어온 길
느낌표 하나 없이 접는다고
겨울만이 아쉬운 건 아니다
뒤뜰에 자리보전하고 누운
고수 잎에 비가 내리던 날
내 저무는 사랑의 뒤꿈치에는
서리가 내렸다
잊어야 할 만큼은 아니어도
씻겨내러 갈 만큼의 빗줄기여야
가슴은 젖어있을 터,
파놓은 이랑으로 흐르는 세월을 담아 두진 못하겠지만
여태 가물었으니 한 시절은 녹녹지 않아도 견뎌낼 듯싶다
지금 내리는 눈은 소멸해가는 것들의 눈물이다
그리운 것들을 누르고 눌러서 화석으로 만들고
굳힌 한 세월 곶감 빼먹듯 하나하나 해동시켜
어느 곳의 멍이 더 깊은지 헤아려볼
시간을 조금 벌어보자
아주 어린 시절
매질에 맨발로 달아나던 그 신작로에도
눈꽃은 피어 있었고
오일장에 가신 울엄니 떨군 해를 등지고 대실 잔등 너머 핼쑥해진 붕어빵을 사 오실 때도, 가출했다 돌아오던 그 날, 오십 원어치는 항상 허기졌던
읍내 피래네 어묵집 앞 도로에도
녹아서는 안 되는 기억 몇 개쯤은 포근히 내렸다
결별한 사랑을 기다리다 맞은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의 첫눈과
몇 해를 헤매다 맞았던
보성강에 내리던 눈발도 기억한다
지금 내리는 눈은 길 떠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위로의 술이다
지치고 고달픈 것들에 대한 해장국이다
강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갯내 나는 따순 사람과 만날 것이니
서둘러 얼려둘 생각 말고
벌어놓은 시간은 아무데나 조금씩
청설모처럼 묻어두자
당선 소감
김옥종
늘 그 날이 그날 같은,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이었습니다. 시간에 치이고 생활에 쫓기고 가파른 절벽 위에 한 발로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로운 일상들과 그렇게 지쳐가고 쓰러지기를 여러 번 겪다 보니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나아갈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직업이 요리사다 보니 요리에 대한 생각이 많습니다. 요리사는 기술적인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음식을 대하는 태도 또한 중요합니다. 화를 내고 흥분한 상태에서 만든 요리를 과연 좋은 요리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짜증이 난 상태에서 만든 요리에는 독이 배어들고 사랑과 정성으로 만든 요리에는 약이 스며들지 않겠습니까. 요리사는 또 어떤 면에서는 무술가가 되어야 합니다. 긴장감 속에서 자신을 통제하고 냉정하게 전체를 들여다보며 배치하고 조화를 끌어내야만 합니다. 맛이란 드러내지 않는 방어적인 것 못지않게 도발적공격적인 것도 가미되어야 합니다. 거기에다 완급조절의 풍미까지 얹어진다면 그 요리는 가히 진품이라 할 수 있겠지요. 요리하듯이 시를 쓰고 싶습니다. 칼과 도마로 써온 시편들입니다. 입맛에 맞으실지. 사람들의 몸보다는 영혼을 살찌게 할 시를 쓰고 싶습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한데도 뽑아주신 것은 더 잘 쓰라는 격려로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제14회《시와경계》신인우수작품 심사평
제14회 신인 우수작품 공모는 우선 지원자의 연령층이 다양했다. 24세 대학 재학생에서부터 65세 정년퇴임한 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를 이루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해외에서의 응모도 전년에 비해 늘었다. 문학 불모의 시대라고 하는 세태에 빗대어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시를 쓰는가를 상기해 볼 만한 일이라고 본다. 이번 공모를 통해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응모자의 작품들 중 나로부터 출발한 삶의 시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활달한 상상력으로 삶에 천착한 다양한 세상을 담아내지 못하고 일상의 감성들만 변주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시인의 안목이란 우선적으로 대상과 조우하기 위한 통찰력과 관조성이라 하겠다.
논의 끝에 신인 우수작품 공모 당선작은 김옥종 시인의「늙은 호박 감자조림」,「민어의 노래」,「해넘이」,「눈」을 선정했다. 우선 삶의 형식이 시의 정서로 거듭나고 있고 삶과 시가 하나이며 시정신이 일관된다는 점을 높이 샀다. 등단작「늙은 호박 감자조림」은 음식 레시피에 시인의 정서를 변주한 작품으로 혼곤한 삶의 풍경을 넉넉하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생선에 호박이나 감자를 넣고 조리는 과정 사이사이에 화자의 넉넉잖은 삶의 소회를 변주해 내는 솜씨가 뛰어나다.
「민어의 노래」는 언제가 민어 철이며 민어를 어떻게 먹어야 맛있는지에 대한 민어요리 안내를 기본으로 관조하는 화자의 의식세계와 중첩시키는 매력이 돋보인다. ‘세월은 소리 내어 울지 않는 것, 민어 몇 마리 돌아왔다고 기다림이 끝난 것은 아니다’ 같은 대목이나 ‘네 입맛 다실 갯지렁이도 없는 바다에 올라 칼끝에 노래하던 민어’에서와 같이 가파른 삶의 일부를 언급함으로써 민어 요리에 담긴 시인만의 시각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해넘이」,「눈」등에서도 시인만의 짙은 서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등 앞으로 시를 삶처럼 일관되게 쓰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가고도 남았다. 다만, 시는 긴장이다. 다소 산문적인 문장에 긴장을 지니는 것을 유념하기를 바라며 좋은 시를 쓰는 좋은 시인이 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편집위원 일동, 이태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