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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하]
4. 유다 왕들의 역사에 대한 보충
(1) 르호보암~여호사밧까지
[대하10:1-20:37]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저로 왕을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왕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이 일을 듣고 애굽에서부터 돌아오매 무리가 보내어 저를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르호보암이 대답하되 삼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하매 백성이 가니라 르호보암왕이 그 부친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하여 가로되 너희는 어떻게 교도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뇨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 만일 이 백성을 후대하여 기쁘게하고 선한 말을 하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왕이 노인의 교도하는 것을 버리고 그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과 의논하여 가로되 너희는 어떻게 교도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뇨 백성이 내게 말하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메운 멍에를 가볍게 하라 하였느니라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고하여 가로되 이 백성들이 왕께 고하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시기를 나의 새끼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찌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하리라 하소서 삼일만에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이 르호보암에게 나아왔으니 이는 왕이 명하여 이르기를 삼일만에 내게로 다시 오라 하였음이라 왕이 포학한 말로 대답할쌔 노인의 교도를 버리고 소년의 가르침을 좇아 저희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더할찌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하리라 하니라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난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고한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더라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너희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온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르호보암이 그 왕이 되었더라 르호보암왕이 역군의 감독 하도람을 보내었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저를 돌로 쳐 죽인지라 르호보암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와 베냐민 족속을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 팔만이라 이스라엘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솔로몬의 아들 유다 왕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의 이스라엘 무리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와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저희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돌아가고 여로보암을 치러 가지 아니하였더라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거하여 유다 땅에 방비하는 성읍들을 건축하였으니 곧 베들레헴과 에담과 드고아와 벧술과 소고와 아둘람과 가드와 마레사와 십과 아도라임과 라기스와 아세가와 소라와 아얄론과 헤브론이니 다 유다와 베냐민 땅에 있어 견고한 성읍이라 르호보암이 이 모든 성읍을 더욱 견고케 하고 장관을 그 가운데 두고 양식과 기름과 포도주를 저축하고 각 성읍에 방패와 창을 두어 심히 강하게 하니라 유다와 베냐민이 르호보암에게 속하였더라 온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 모든 지방에서부터 르호보암에게 돌아오되 레위 사람이 그 향리와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과 그 아들들이 저희를 폐하여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수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스스로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이 레위 사람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그러므로 삼년 동안 유다 나라를 도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리가 삼년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음이더라 르호보암이 다윗의 아들 여리못의 딸 마할랏으로 아내를 삼았으니 마할랏은 이새의 아들 엘리압의 딸 아비하일의 소생이라 그가 아들들 곧 여우스와 스마랴와 사함을 낳았으며 그 후에 압살롬의 딸 마아가에게 장가 들었더니 저가 아비야와 앗대와 시사와 슬로밋을 낳았더라 르호보암이 아내 십 팔과 첩 육십을 취하여 아들 이십 팔과 딸 육십을 낳았으나 압살롬의 딸 마아가를 모든 처첩보다 더 사랑하여 마아가의 아들 아비야를 세워 장자를 삼아 형제 중에 머리가 되게 하였으니 이는 저로 왕이 되게 하고자 함이라 르호보암이 지혜롭게 행하여 그 모든 아들을 유다와 베냐민의 온 땅 모든 견고한 성읍에 흩어 살게 하고 양식을 후히 주고 아내를 많이 구하여 주었더라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저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르호보암왕 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니 저에게 병거가 일천 이백승이요 마병이 육만이며 애굽에서 좇아나온 무리 곧 훕과 숩과 구스 사람이 불가승수라 시삭이 유다의 견고한 성읍을 취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니 때에 유다 방백들이 시삭을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였는지라 선지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방백들에게 나아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붙였노라 하셨다 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가로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매 여호와께서 저희의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 여호와의 말씀이 스마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저희가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대강 구원하여 나의 노를 시삭의 손으로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저희가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열국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하셨더라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몰수히 빼앗고 솔로몬의 만든 금방패도 빼앗은지라 르호보암왕이 그 대신에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궁문을 지키는 시위대 장관들의 손에 맡기매 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마다 시위하는 자가 그 방패를 들고 갔다가 시위소로 도로 가져갔더라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고 유다에 선한 일도 있으므로 여호와께서 노를 돌이키사 다 멸하지 아니하셨더라 르호보암왕이 예루살렘에서 스스로 강하게 하여 치리하니라 르호보암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사십 일세라 예루살렘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여 그 이름을 두신 성에서 십 칠년을 치리하니라 르호보암의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여인이더라 르호보암이 마음을 오로지하여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함으로 악을 행하였더라 르호보암의 시종 행적은 선지자 스마야와 선견자 잇도의 족보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 르호보암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비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로보암왕 제 십팔년에 아비야가 유다 왕이 되고 예루살렘에서 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미가야라 기브아 사람 우리엘의 딸이더라 아비야가 여로보암으로 더불어 싸울쌔 아비야는 택한바 싸움에 용맹한 군사 사십만으로 싸움을 예비하였고 여로보암은 택한바 큰 용사 팔십만으로 대진한지라 아비야가 에브라임산 중 스마라임산 위에 서서 가로되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무리들아 다 들으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것이 아니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신복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일어나 그 주를 배반하고 난봉과 비류가 모여 좇으므로 스스로 강하게 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대적하나 그 때에 르호보암이 어리고 마음이 연약하여 능히 막지 못하였었느니라 이제 너희가 또 다윗 자손의 손으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려 하는도다 너희는 큰 무리요 또 여로보암이 너희를 위하여 신으로 만든 금송아지가 너희와 함께 있도다 너희가 아론 자손 된 여호와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쫓아내고 이방 백성의 풍속을 좇아 제사장을 삼지 아니하였느냐 무론 누구든지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일곱을 끌고 와서 장립을 받고자하는 자마다 허무한 신의 제사장이 될 수 있도다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그를 우리가 배반치 아니하였고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있으니 아론의 자손이요 또 레위 사람이 수종을 들어 조석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또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또 금 등대가 있어 그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나 너희는 그를 배반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하여 경고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치 못하리라 여로보암이 유다의 뒤를 둘러 복병하였으므로 그 앞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있고 그 뒤에는 복병이 있는지라 유다 사람이 돌이켜 보고 자기 앞 뒤의 적병을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제사장은 나팔을 부니라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르매 유다 사람의 소리 지를 때에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유다 앞에서 도망하는지라 하나님이 그 손에 붙이신고로 아비야와 그 백성이 크게 도륙하니 이스라엘의 택한 병정이 죽임을 입고 엎드러진 자가 오십만이었더라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항복하고 유다 자손이 이기었으니 이는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 아비야가 여로보암을 쫓아가서 그 성읍들을 빼앗았으니 곧 벧엘과 그 동네와 여사나와 그 동네와 에브론과 그 동네라 아비야 때에 여로보암이 다시 강성하지 못하고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고 아비야는 점점 강성하며 아내 열 넷을 취하여 아들 스물 둘과 딸 열 여섯을 낳았더라 아비야의 남은 사적과 그 행위와 그 말은 선지자 잇도의 주석 책에 기록되니라 아비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 시대에 그 땅이 십년을 평안하니라 아사가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사람을 명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이하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얻으니라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해 싸움이 없은지라 저가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니라 아사가 일찌기 유다 사람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이 땅이 아직 우리 앞에 있나니 우리가 이 성읍들을 건축하고 그 주위에 성곽과 망대와 문과 빗장을 만들자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느니라 하고 이에 저희가 성읍을 형통하게 건축 하였더라 아사의 군대는 유다 중에서 큰 방패와 창을 잡는 자가 삼십만이요 베냐민 중에서 작은 방패를 잡으며 활을 당기는 자가 이십 팔만이라 다 큰 용사더라 구스 사람 세라가 저희를 치려하여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승을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아사가 마주 나아가서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진 치고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아사와 그 좇는 자가 구스 사람을 쫓아 그랄까지 이르매 이에 구스 사람이 엎드러지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 앞에서와 그 군대 앞에서 패망하였음이라 노략한 물건이 심히 많았더라 여호와께서 그랄 사면 모든 성읍 백성을 두렵게 하시니 무리가 그 모든 성읍을 치고 그 가운데 있는 많은 물건을 노략하고 또 짐승 지키는 천막을 치고 양과 약대를 많이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하나님의 신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찌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지가 이제 오래였으나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매 저가 그들의 만난바가 되셨나니 그 때에 열국에 거한 모든 백성이 크게 요란하여 사람의 출입이 평안치 못하며 이 나라가 저 나라와 서로 치고 이 성읍이 저 성읍과 또한 그러하여 피차 상한바 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이 모든 고난으로 요란케 하셨음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제하고 또 에브라임 산지에서 빼앗은 성읍들에서 제하고 또 여호와의 낭실 앞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또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를 모으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가운데서 나와서 저희 중에 우거하는 자를 모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음이더라 아사왕 십 오년 삼월에 저희가 예루살렘에 모이고 그 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소 칠백과 양 칠천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아사왕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 저가 또 그 부친의 구별한 물건과 자기의 구별한 물건 곧 은과 금과 기명들을 하나님의 전에 드렸더니 이 때부터 아사왕 삼십 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 아사왕 삼십 륙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취하여 다메섹에 거한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내며 가로되 내 부친과 당신의 부친 사이에와 같이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하자 내가 당신에게 은금을 보내노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저로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벤하닷이 아사왕의 말을 듣고 그 군대 장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두어 성읍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마임과 납달리의 모든 국고성을 쳤더니 바아사가 듣고 라마 건축하는 일을 파하여 그 공역을 그친지라 아사왕이 온 유다 무리를 거느리고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수운하여다가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몇 백성을 학대하였더라 아사의 시종 행적은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 구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아사가 위에 있은지 사십 일년에 죽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자기를 위하여 파 두었던 묘실에 무리가 장사하되 그 시체를 법대로 만든 각양 향재료를 가득히 채운 상에 두고 또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더라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어 스스로 강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방비하되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에 군대를 주둔하고 또 유다 땅과 그 아비 아사의 취한바 에브라임 성읍들에 영문을 두었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하셨으니 이는 저가 그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 부친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좇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나라를 그 손에서 견고하게 하시매 유다 무리가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렸으므로 저가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더라 저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도를 행하여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하였더라 저가 위에 있은지 삼년에 그 방백 벤하일과 오바댜와 스가랴와 느다넬과 미가야를 보내어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가르치게 하고 또 저희와 함께 레위 사람 스마야와 느다냐와 스바댜와 아사헬과 스미라못과 여호나단과 아도니야와 도비야와 도바도니야등 레위 사람을 보내고 또 저희와 함께 제사장 엘리사마와 여호람을 보내었더니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성읍으로 순행하며 인민을 가르쳤더라 여호와께서 유다 사면 열국에 두려움을 주사 여호사밧과 싸우지 못하게 하시매 블레셋 중에서는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리며 은으로 공을 바쳤고 아라비아 사람도 짐승떼 곧 수양 칠천 칠백과 수염소 칠천 칠백을 드렸더라 여호사밧이 점점 강대하여 유다에 견고한 채와 국고성을 건축하고 유다 각 성에 역사를 많이 하고 또 예루살렘에 크게 용맹한 군사를 두었으니 군사의 수효가 그 족속대로 이러하니라 유다에 속한 천부장 중에는 아드나가 으뜸이 되어 큰 용사 삼십만을 거느렸고 그 다음은 장관 여호하난이니 이십 팔만을 거느렸고 그 다음은 시그리의 아들 아마시야니 저는 자기를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자라 큰 용사 이십만을 거느렸고 베냐민에 속한 자 중에 큰 용사 엘리아다는 활과 방패를 잡은 자 이십만을 거느렸고 그 다음은 여호사밧이라 싸움을 예비한 자 십 팔만을 거느렸으니 이는 다 왕을 섬기는 자요 이 외에 또 온 유다 견고한 성에 왕이 군사를 두었더라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고 아합으로 더불어 연혼하였더라 두어해 후에 저가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아합에게 나아갔더니 아합이 저와 종자를 위하여 우양을 많이 잡고 함께 가서 길르앗 라못 치기를 권하더라 이스라엘 왕 아합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시겠느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니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청컨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이스라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인을 모으고 저희에게 이르되 우리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저희가 가로되 올라 가소서 하나님이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이스라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로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서 각기 보좌에 앉았고 모든 선지자가 그 앞에서 예언을 하는데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하더라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일러 가로되 선지자들의 말이 여출일구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중 한 사람처럼 길하게 하소서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하고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저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 가로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저희가 왕의 손에 붙인바 되리이다 왕이 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것만 말하라고 내가 몇번이나 너로 맹세케 하여야 하겠느냐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길한 것을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것만 예언하겠다고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 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미가야가 가로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 날에 보리라 이스라엘 왕이 가로되 미가야를 잡아 부윤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로 먹이라 하라 미가야가 가로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될찐대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또 가로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찌어다 하니라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 왕이 변장하고 둘이 군중으로 들어가니라 아람 왕이 그 병거 장관들에게 이미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병거의 장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이켜 저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저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저희를 감동시키사 저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병거의 장관들이 저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보고 쫓기를 그치고 돌이켰더라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이켜 나로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이 날의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왕이 병거에서 스스로 부지하며 저녁때까지 아람 사람을 막다가 해가 질 즈음에 죽었더라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 궁으로 들어가니라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가로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이하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 하였더라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거하더니 나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순행하며 저희를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 또 유다 온 나라 견고한 성에 재판관을 세우되 성마다 있게 하고 재판관에게 이르되 너희는 행하는 바를 삼가하라 너희의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지라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 여호사밧이 또 예루살렘에서 레위 사람과 제사장과 이스라엘 족장 중에서 사람을 세워 여호와께 속한 일과 예루살렘 거민의 모든 송사를 재판하게 하고 히, 모든 송사를 재판하게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저희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충의와 성심으로 이 일을 행하라 무릇 어느 성읍에 거한 너희 형제가 혹 피를 흘림이나 혹 율법이나 계명이나 율례나 규례를 인하여 너희에게 와서 송사하거든 저희를 경계하여 여호와께 죄를 얻지 않게 하여 너희와 너희 형제에게 진노하심이 임하지 말게 하라 너희가 이렇게 행하면 죄가 없으리라 여호와께 속한 모든 일에는 대제사장 아마랴가 너희를 다스리고 왕에게 속한 모든 일은 유다 지파의 어른 이스마엘의 아들 스바댜가 다스리고 레위 사람들은 너희 앞에 관리가 되리라 너희는 힘써 행하라 여호와께서 선한 자와 함께 하실찌로다 하니라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이 몇 마온 사람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암몬 혹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고하여 가로되 큰 무리가 바다 저편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전 새 뜰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중 가운데 서서 가로되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거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으로 주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영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저희가 이 땅에 거하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건축하고 이르기를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전 앞과 주의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옛적에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산 사람을 침노하기를 주께서 용납하지 아니하시므로 이에 치우쳐 저희를 떠나고 멸하지 아니하였거늘 이제 저희가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저희가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 내고자 하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 저는 아삽 자손 맛다냐의 현손이요 여이엘의 증손이요 브나야의 손자요 스가랴의 아들이더라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왕이여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 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 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이에 백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찌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륙하였더라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뿐이요 하나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여호사밧과 그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취할쌔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는 고로 각기 취하는데 그 물건이 너무 많아 능히 가져갈 수 없을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취하고 제 사일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 송축송축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사람이 여호사밧을 선두로 즐거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그 적군을 이김을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무리가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합주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니라 이방 모든 나라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군을 치셨다 함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한고로 여호사밧의 나라가 태평하였으니 이는 그 하나님이 사방에서 저희에게 평강을 주셨음이더라 여호사밧이 유다 왕이 되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삼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 여호사밧이 그 부친 아사의 길로 행하여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마음을 정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이 외에 여호사밧의 시종 행적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의 글에 다 기록되었고 그 글은 이스라엘 열왕기에 올랐더라 유다 왕 여호사밧이 나중에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교제하였는데 아하시야는 심히 악을 행하는 자이었더라 두 왕이 서로 결합하고 배를 지어 다시스로 보내고자 하여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지었더니 마레사 사람 도다와후의 아들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을 향하여 예언하여 가로되 왕이 아하시야와 교제하는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지은 것을 파하시리라 하더니 이에 그 배가 파상하여 다시스로 가지 못하였더라”
1. 다른 역사에 대한 보충
오늘 성경 말씀은 역대하 10장 1절부터 20장 37절까지에 있는 말씀이다. 역대상하는 성경에 있는 다른 여러 책들에 없는 다른 역사에 대한 보충으로 기록되었다. 처음 역대상에서 본대로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에서는 사울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왕들과 또 유당왕들을 섞어서 말씀했는데, 역대기에서는 인류 역사 전체를 이야기하려고 하고, 인류 역사 중에서 유다 역사만을 연계시켜 놓은 것이다. 역대기는 유다 역사 중심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족보를 갖는 이유는 나를 알기 위함이다. 나의 근원을 알기 위함이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할 때는 예수의 계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아브라함의 계보가 아니다. 아브라함의 계보는 수없이 많다. 예수가 나온 계보 이외에 다른 수많은 계보가 있는데, 아브라함과 다윗의 조상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할 때는 예수의 계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수의 계보를 찾아 올라가보면 아브라함까지 온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에게 크게 말해도 이스마엘과 이삭 두 아들이 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스마엘에 대한 역사는 빠졌고 이삭의 역사만 나온다. 예수에게로 연결하기 위해서 이삭의 역사만 나온다.
지금 아랍 사람들은 이스마엘 후손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이삭은 모른다. 아브라함은 알지만 이삭 이후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성경 역사에 나온 이 역사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 추가한 것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유다왕들의 역사를 말하려고 역대기를 썼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다 역사에 대한 보충이다. 열왕기에서도 유다 역사가 있었는데 거기서 빠진 부분이라든지 보충해야 할 부분들이 쓰여있다. 그래서 북왕조 이스라엘은 제외되고 없다. 열왕기에서는 북왕조가 같이 있었는데 역대기에 오면 북왕조 이스라엘은 없어져 버린다.
2. 유다 왕들은 합당한 입장 위에 서 있었음
북왕조 이스라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이 어떤 경륜 안에서 제외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유다왕들도 악한 왕들이 많고 이스라엘 왕들도 물론 더 악한 왕들이 많은데, 왜 유다가 합당한 혈통을 갖게 되는가 하면, 그들이 합당한 입장에 서있었다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유다는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떠나서 도읍지를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정하신 곳이다. 선택하시고 정하신 곳을 떠나서 다른 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신명기 12장 1절에 보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가서 너희 번제와 희생과 십일조 거제와 서원제와 낙헌제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드리고~” 이렇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정해 놓은 곳에 가서 드려라는 말이 있다. 아무 곳에나 드린다는 말이 아니다. 또 왜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곳이 되었는가 하는 이유가 창세기 22장부터 나오는데,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하는 말이 나온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많지만 유다 자손이 나온 것은 이삭으로부터 나왔고, 이삭으로부터 나온 후손은 많지만 또 예수의 계보는 다르다.
왜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정하신 곳이 되었는가? 역사적인 근원을 찾아보면 이삭이 모리야 산에 드려졌던 바로 그 땅이다. 우리가 시온산이라고 말할 때가 있는데, 시온산은 모리야산의 한 봉우리라고 한다. 거기서 번제를 드리라고 했다. 이삭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러므로 신약으로 해석한다면, 그리스도가 있는 곳이 하나님이 정하시고 선택하신 곳이라는 것을 볼 수 있고, 거기를 떠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합당한 입장에 서 있었다. 역대하 3장에도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3:1) 여기서 여부스란 예루살렘의 이름이 원래 여부스이다. 그리고 다윗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돈을 주고 이 땅을 샀던 역사가 있다. 이런 역사적인 관계를 가지고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심지로 도읍지로 정해져 있었고, 예루살렘이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는 것은 단지 그냥 수도라는 의미만이 아니고 성전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 왕들은 처음부터 아예 하나님이 정하신 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벼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읍지를 여러번 옮겼다. 벧엘에 가기도 하고 세겜에 가기도 하고 여러번 옮겼던 일이 있다. 유다 왕들이 행위에 있어서 옳았다기 보다는 입장에서 옳았다, 예루살렘을 지키는 그 입장에서 옳았다는 것이다. 이 자리는 유일하고 합당한 입장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정하시고 세우신 곳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예루살렘은 새 예루살렘의 예표이다. 유다 왕들이 그 곳을 지키고 선 것이 옳은 입장이었듯이 오늘 교회의 옳은 입장은 무엇인가? 새 예루살렘을 위하여 서 있어야 한다. 교회의 목표가 천당이 된다든지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교회의 목표는 새 예루살렘에 있어야 된다. 새 예루살렘은 무엇인가? 유대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모리아산이고 시온산이었다면, 새 예루살렘은 무엇인가? 유대땅 예루살렘이 아니고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단체적인 인격의 성숙이 이루어진 사회이다.
새 예루살렘은 유대땅처럼 정해진 땅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새 예루살렘의 예표이므로 하나님이 택하시고 정하신 곳인데 그 택하시고 정하신 곳이 어디인가? 성경의 마지막 결론을 볼 때 그것은 새 예루살렘이다. 새 예루살렘이 마지막 결론이다. 새 예루살렘이라는 마지막 결론이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시고 정해놓으신 곳이다. 그곳을 향하여 있는 곳만이 교회의 바른 입장이라는 말이다. 교회가 여러 가지로 할 것이 많이 있다. 세울 목표도 많고, 교회들에 가보면 그 교회의 목표를 써 붙여 놓았다. 다 좋은 목표이지만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새 예루살렘이어야 된다. 새 예루살렘이 되기 위해 지금 있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한 길이 아닌 것은 교회의 길이 아니다. 좋은 일도 있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만 좋은 일과 이것은 다른 것이다. 내가 서울로 가는 길이 꼭 좋다는 그것만이 아니고 가령 서울로 가는 길과 춘천으로 가는 길이 다르듯이 길이 서로 다른 길이므로 교회의 바른 입장은 그리스도의 단체적인 인격이 성숙하는 것에 달려있다.
그런데 교회가 그리스도의 단체적인 인격으로 성숙해 가는 곳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면들이 있다. 학교처럼 1학년 학생 뽑아서 2학년 3학년으로 올라가면 단계적으로 공부를 해서 실력이 성숙해 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격의 성숙이므로 그렇게 1학년 2학년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받아서 여기서 자라나는데 밭에 씨를 뿌려 놓으면 어느 씨가 먼저 나올지도 모르고 어느 것이 열매를 더 많이 맺을지도 잘 모른다. 자기들끼리 막 자라다 보면 어떤 것은 더 먼저 자라고 어떤 것은 늦게 자란다. 그렇게 하면서 전체적인 밭이 되어 가을이 되면 익어져 간다. 대추나무를 보면 열매가 상당히 오랜 기간 열린다. 꽃이 피면서 열매가 열려가므로 처음 열린 대추와 마지막 열린 대추의 시간 차이가 굉장히 많고 크기도 차이가 굉장히 많다. 그런데 가을이 돌아오면 다 같이 익는다. 추수할 때는 순서대로 추수하는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추수를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고기 떼들이 떼를 지어 바다를 갈 때가 있다. 고기 떼들이 쫘악 가는 속에는 자는 놈도 있고 뒹구는 놈도 있다고 한다. 고기도 잠을 잔다고 한다. 맨 앞서서 가고 있다가 피곤하면 쉬는 것이다. 쉴 때는 어떻게 쉬는가? 자면서 물살이 흘러가는 데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다. 물살이 막 흐르므로 물살에 가만히 있으면 같이 따라 가는 것이다. 한참 가다보면 좀 처질 것이다. 처질 때 쯤 되면 피곤을 풀었으므로 깨어나서 또 앞으로 가고 하여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계속 가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가다가 좀 쉬기도 하고 쉬다가 가기도 하면서 전체가 한 흐름 속에서 간다. 그러므로 잘나니 못나니 할 일도 없고 잠자니 안자니 할 일도 없고 자는 사람도 이유가 있어서 자고 뛰는 사람도 이유가 있어 뛰기 때문에 우리는 전체가 어디로 가는지를 봐야 되지, 개개인 하나하나를 보고 이것은 이러면 안되는데 저것은 저러면 안되는데 하면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전체의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군대에서도 행군하면서 졸면서 간다고 한다. 다른 사람 가는 것에 졸면서 휩싸여서 간다는 것이다. 고기들은 물결이 가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간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그렇다.
오늘 교회의 바른 입장은 장로교 입장이 옳으냐, 천주교 입장이 옳으냐, 감리교 입장이 옳으냐, 이런 것이 옳은 것이 아니고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입장이 옳은 것이다. 새 예루살렘을 지향하는 것이 옳은 입장이다. 새 예루살렘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하늘에 만들어졌다든지 어디서 만들어져서 내려올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다. 참 유치한 이야기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너무 많은 정도가 어느 정도이냐 하면 거의 상당히 그렇게 생각한다.
새 예루살렘은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의 사회이다. 인격적인 사회이다. 어떤 인격인가? 그리스도의 인격이 단체화된 사회이다. 우리는 미래지향적인 어떤 사회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사회이다. 교회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잘 번역되었다고 생각한다. 사회라는 會자이다. 원래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소집한다, 불러드린다는 뜻이다. 물론 불러드려 모이는 것이만 그 모임은 어떤 회의를 위해 소집하는 그런 성질에 속한다. 옛날에 시골에 가면 동네 사람들을 모아 동네 회의를 할 때가 있다. 동네 일하는 사람이 북이나 징을 가지고 두드리고 다닌다. 온 동네 사람이 동사무소로 모여 회의를 하는데 이것이 에클레시아이다. 시민들을 모으는 것이 에클레시아이다. 우리말 교회로 번역한 것이 더 좋다. 사회라는 말이다. 한번 모았다가 가버리는 것이 아니고 회의를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이다. 인격적 사회이다.
사회 중에는 여러 가지 사회가 있다. 경제적 사회도 있고 군사적 사회도 있고 여러 가지 사회가 있다. 군대는 군사적 사회이다. 또 경제적 사회가 있다. 경제 단체들도 있다. 교회는 인격적인 사회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사회이다. 이것이 합당한 자리기이기 때문에 이 합당한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유대 왕들은 비록 그들이 이스라엘 왕들보다 더 나아서가 아니라 더 나은 것은 없었지만 입장 자체가 우선 옳은 입장에 있었다. 실력은 다음 문제이고 우선 입장이 바른 입장에 서 있어야 된다. 가는 길이 정확해야지 기차가 KTX냐 새마을호이냐 무궁화호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부산을 가려면 KTX 탈 수도 있고 새마을호를 탈 수도 있고 그것은 빠르고 느리고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만일에 서울에서 탈 때 호남선을 타버리면 부산을 못가므로 KTX를 타도 소용이 없고 새마을호를 타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입장이다. 우리가 새마을호를 탈 것이냐 KTX를 탈 것이냐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노선이 어디로 갈 것이냐가 중요하다.
우리 인류가 맨 처음에 아담으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구체적인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노선이 잘못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길이 두 길이었다. 이것을 먹느냐 안먹느냐는 두 길이었다. 이 두 길이 잘못 설정되었기 때문에 그 길로 가면 그것밖에 나올 수가 없다. 서울에서 대전까지는 같지만 대전에서부터는 서대전, 동대전으로 달라진다. 경부선으로 오다보면 김천도 있고 동대구도 있고 대구도 있다. 필연적으로 늦든지 빠르든지 그 길로 오게 되어있다. 그러나 호남선으로 가게 되면 김천이나 동대구는 없다. 아무리 빨리 가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선이다. 어떤 노선으로 가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물론 그 노선 속에서 좀 늦게 갈 수도 있다. 좀 잘못 갈 수도 있다. 그래도 노선에 있어야 된다. 요즘 KTX 타면 그런 것이 없지만 옛날에 비둘기호를 타면 별 사람이 다 있다. 난장판 벌리는 사람도 있고 고도리 치는 사람도 있고 소주병 들고 오는 사람도 있고 별 사람이 다 있다. 차장들도 말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밤차 타고 다녀보면 소주 한잔 먹고 취해서 술 한병 갖고 올라 온다. 올라오는데 무임승차다. 무임승차이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다. 뭐라 해 보았자 시끄럽기만 하므로 차장들도 모른 체하고 가버린다. 별 사람이 다 있지만 하여간 그 차를 탔으므로 같이 가는 것이다. 술에 취한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자기 내릴 역에 가면 내린다. 술이 아무리 취해도 정신은 제대로 있는 것이다. 괜히 취한 척 한 것이다.
노선이 중요하다. 천주교 노선이냐 장로교 노선이냐가 아니다. 내가 천주교 노선으로 갔으니 정통으로 왔다거나 나는 장로교 노선으로 왔으니 정통으로 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속아있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 정통의 길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의 단체적인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 헛일이다. 유대 왕들이 가졌던 것은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잘나고 못난 것도 아니고, 잘하고 못한 것이 아니라 노선을 그들은 잘 타고 있었다.
3. 유다왕들은 근본적인 경배를 지켰음(성전 예배)
그리고 유다왕들은 근본적인 경배를 지켰다. 성전 예배(경배)를 가졌다. 구약 시대에서 하나님 예배(경배)는 반드시 성전에서 이루어지도록 율법이 정하고 있다. 성전에서만 할 수 있게 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요즘 교회에서 예배드린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아무데서나 경배한다고 되어있지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 안에는 성전이외의 어느 곳에서도 제사를 드릴 수가 없다. 성전만이 유일하게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곳이다. 이것이 근본적인 경배이다. 이 경배 이외에는 허락된 경배가 전혀 없다. 왜 그런가? 성전은 하나님이 정하시고 설계하신 그 분의 유일한 거처이다. 모세를 통해서 이러이렇게 지으라고 설계를 해주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지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는 유일한 경배의 중심지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경배의 중심지를 떠났다. 예루살렘을 떠나고 나니까 성전이 없다. 성전이 없으므로 사방에 산당을 세웠다. 벧엘에도 단을 하나 쌓고 단에도 쌓고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자기들 생각대로 했다. 백성들에게 이 왕은 여기에 단을 만들어 놓고 경배하라고 했고, 저 왕은 저기에 단을 만들어 놓고 경배하라고 했다. 경배의 근본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 성전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언약궤가 있다. 이 언약궤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가? 돌비가 들었다. 돌비에는 10계명이 들었고 10계명은 무엇인가? 하나님 말씀의 중심이다. 구약시대에는 이것을 하나님의 임재로 간주했다. 돌에 새겨진 말씀이 있는 그곳을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간주했다. 왜 그곳을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간주했는가? 그 이유는 성육신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장에 있는 말씀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구약에 있는 대로 말하면 새겨진 말씀이고, 신약으로 말하면 육신이 된 말씀이다. 구약으로 말하면 돌비에 새겨졌고, 신약으로 말하면 심비에 새겨졌다는 말이다. 인격 안에 새겨졌다. 같은 내용이 어떤 내용이 하나님의 성품을 대변하는 표현하는 어떤 내용이 구약에는 돌비에 새겨졌고, 신약에는 예수라는 한 인격 안에 새겨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곳을 지금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이다. 성전을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모형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집 자체 전부가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된 것을 건물로 표시해 놓은 것이 성전이다. 한 예를 들면 벽은 조각목에 금을 입혀 전체 벽을 만들었다. 조각목은 인성을 상징하고, 금은 신성을 상징하므로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건물 전체가 그런 목표를 가지고 그런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을 오늘 신약에 와서 보니 바로 성육신의 예표였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된, 생명 안에서 하나된 그 예표로서 이런 건물이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조명하게 된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다 몰랐다. 지금 보니 그리스도의 예표로 알게 된 것이다.
유다왕들이 성전을 지켰고, 성전에서 경배를 했다는 것은 오늘 교회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원칙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말씀이다. 구약에 여러 가지 율법의 많은 조항들이 있다. 신명기나 레위기나 전부 많은 율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많은 율법들의 핵은 10계명이다. 헌법이나 마찬가지이다. 모든 법은 10계명으로부터 연유되어 나간 것이다. 이것은 계명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마음이다. 법이라는 것은 그 사회의 마음이다. 대한민국의 법은 대한민국 사람의 마음이다. 10계명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돌에 새겨졌다. 그러나 마음이 돌에 새겨진 것이므로 돌에 새겨진 것은 온전할 수가 없다. 마음은 마음에 새겨져야 한다. 꿀은 꿀 속에 보관되어야 된다는 원리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은 생명 안에만 보존된다는 원리와 마찬가지이다.
생명 아닌 것을 우리 몸속에 보존해서도 안되고, 생명을 생명 아닌 것에 보존할 수도 없다. 우리가 잘못돼서 핀을 꽂아 놓는다든지 쇠를 박아 놓는 경우가 있다. 내 생명이 아니므로 이질적인 물질이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오래되면 아프고 하는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생명도 생명 안에 보관되어야지 내 손가락은 내 생명 안에 보존되어 있어야지 하나를 떼어서 다른 곳에 보존할 수가 없다. 떨어지자마자 죽어버린다. 내 몸에 붙어있다는 말은 내 몸에 보존된다는 말이다.
하나님도 하나님 마음이 보존되려면 하나님의 마음이 보존될 수 있는 인격 안에만 보존될 수 있지 돌에 보존할 수는 없다. 그래서 결국 돌비에 새겨진 것이 심비에 새겨진 것으로 바꾸어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유일한 말씀이어야 된다. 이 말은 성경에 대해 잘못하면 큰 오해를 갖게 되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표현한 말을 표현한 마음을 문자화시켜 놓은 것이다. 이것은 돌비와 같은 것이다. 돌에 새겨놓은 것이나 종이에 써놓은 것이나 같은 원리이다. 그러면 왜 돌비가 영원하지 못하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로 넘어와야 되는가 하는 문제와 성경에 써있는 이 문자가 왜 이것으로써 온전하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와 같다. 성경에 써있는 것이 틀리다는 말이 아니고, 이것이 살아 있으려면 산 것이 되려면 산 사람 속에 새겨져야 된다. 이것은 외운다는 말이 아니고 이 마음이 이 성경을 쓴 성경의 영이 성경의 마음이 사람 속에 보존되어야지 성경이라는 책속에 보존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성경이라는 책이 유일한 중심이서는 안되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유일한 말씀이어야 된다. 이것이 잘못하면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에 기독교는 오랜 역사를 지나오면서 성경을 중심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것은 잘못하면 오해도 되고 잘못하면 변하기도 하므로 종이에 써놓은 것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정확하다는 결론에 오게 되었다. 이것은 다시 불행하게도 돌비로 돌아온 것과 똑같다. 어떤 사람이 메주로 간장을 담그다보니 담글 때마다 장이 잘못되어 제대로 안되는 것이다. 간장을 담궈도 안되므로 화학간장 만들어 먹자하여 미국사람들이 말하는 chemical 간장과 똑같은 화학간장을 만들어 먹었다. 아무리 안되더라도 계속해서 아미노산 간장이 나오도록, 발효간장이 나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해보아도 자꾸 안되니 도저히 안되겠다 만들 수가 없다고 결론을 짓고 chemical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다시 성경주의로 돌아간 원인이다. 성경을 잘못 썼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성경은 정확한 기록이지만, 정확한 말씀이지만 이것이 살아있으려면 살아있는 인격 속에 있어야 살아있는 것이지 종이 속에서는 살아있을 수가 없다.
모세에게 친히 명해서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친히 손가락으로 쓰신 것이라고 표현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친히 손가락으로 쓰신 것이라고 했다. 돌비에 새긴 그것도 영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살아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보관했는가. 금 상자 속에 넣어 정말 아무도 볼 수 없게 완전하게 거룩하게, 매년 피를 뿌려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통해 보존했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온전하고 거룩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했지만 역시 돌은 돌이다. 결국 이 돌비는 성육신하신 인격으로 바꾸어지지 않으면 안되게끔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을 아무리 온전하게 보존한다 하더라도 구약시대 사람들이 돌비를 보존한 것만큼 보존할 수 있는가? 그렇게 보존할 수가 없다. 결국 이것은 성육신하신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한 인격으로 바꾸어지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유일한 말씀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곧 말씀이다. 이것이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곳은 성육신한 곳에 살아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말씀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 종이에 쓰여있는 성경을 전하려면 누구나 전할 수가 있다. 누구나 연구해서 이대로 전하면 되고 더 정확하게 전하려면 한자도 틀림없이 그대로 읽으면 된다. 아주 정통 중에 정통을 하려면 한자도 틀림없이 읽으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 아니다.
살아있어야 하므로 비록 간장을 담그다가 실패를 할지라도 역시 다시 간장을 담아야 한다. 담그다 보면 진짜 간장이 나오지 않겠는가. 우리 조상들이 오랜 세월을 해왔다. 대구지방 같으면 정월 장을 담궈야 된다는 전통이 내려왔다. 어느 지방이나 정월 장을 담그면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지방에 가면 3월 장을 담궈야 된다. 이것은 오랜 경험을 통해서 2월에 담아보아도 잘 안되고 3월에 담아보아도 안되고 12월에 담아보아도 잘 안되므로 가장 좋은 때가 1월이라는 것을 대구 사람들은 알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계속 하다보면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할 것이다. 가짜 성육신도 나오고 이상한 것도 나올 것이다. 사이비 성육신도 나오겠지만 계속 해야만 나오지 그렇다고 금방 화학 공장으로 가버리면 안된다. 그러면 영원히 희망이 없는 것이다.
유다 왕들은 근본적인 경배를 지켰다. 성전 경배를 지켰다는 것이다. 북왕조 이스라엘과 다른 점이 바로 그런 점이었다.
4.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및 마음에 여호와를 구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유다)으로 돌아옴
그렇게 한 결과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및 마음에 여호와를 구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북왕조에 살던 사람들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께 봉사한 사람들이다. 북왕조에 있으니 성전이 없다. 성전이 없어 돌아왔는데 돌아올 때 마음에 여호와를 구하는 사람들이 같이 따라왔다. 그래서 모두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유다로 돌아온 셈이다.
우리가 합당한 입장과 근본적인 경배를 갖고 있다면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돌아오게 되어있다. 우리가 지금 전도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 비해 그렇게 못하고 있다. 그래도 사람들이 왜 오는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오는 것 같다. 합당한 입장과 근본적인 경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어있다. 북왕조 이스라엘에 있어보았자 성전이 없다. 성전이 없으므로 하나님 경배가 될 수 없고 산당에 가서 될 수밖에 없다. 그런 곳에 가서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기 때문에 정말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합당한 입장과 그 절대적 말씀, 근본적인 경배라는 말은 결국 절대적인 말씀이다. 돌비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이었다. 그곳으로 돌아왔다는 말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 절대적인 말씀, 성육신하신 말씀이 있음으로 인하여 정말로 하나님을 추구한 사람은 그곳으로 돌아온다. 결국은 다 돌아오게 되어있다. 시간이 흐르면 다 돌아온다. 정말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돌아온다.
역대하 11장에 보면,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오로지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이 레위인들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 열조의 하나님께 제사하고자 한지라”(대하11:13~14) 했다. 합당한 입장과 절대적인 말씀 안에 있으면 결국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곳, 정하신 곳! 이곳은 이삭이 드려진 곳이다. 그러면 어디가 하나님이 정하신 곳인가? 구약성경에서는 모리야산, 시온산이 지금 예루살렘이 되었다. 바로 이삭을 드렸던 자리라고 추정되는 그 자리에 바로 성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정하신 곳은 어디인가? 다시 우리가 모리야산으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어느 교파인가? 어떤 교단인가? 어디가 하나님이 정하시고 선택하신 곳인가? 다 제각기 생각할 것이다. 여기 분명한 통제의 원칙이 있는 것은 이삭이 드려진 곳이다. 이삭이 번제물로 드려진 곳이다.
그러면 오늘날 이삭이 드려진 곳은 어디인가? 바로 십자가이다. 모리야산은 골고다의 예표이다. 그가 단위에 올려졌던 것은 십자가를 의미한다. 오늘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정하신 곳은 어디인가? 바로 십자가이다. 그 안으로 모두 와야 된다는 말이다. 1차적으로 이 노선을 지켜야 하나님께로 가지 이 노선이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다른 길로 가버리고 만다. 이것이 합당한 입장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고 보존된 곳은 어디인가? 구약시대에는 법궤이고 법궤 안에는 돌비이다. 돌비에 새겨진 말씀이 오늘 어디에 새겨졌는가? 성경에 새겨졌는가, 아니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 새겨졌는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사람이 참 많은데 너무나 엉터리가 되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겠지만 성경으로 돌아간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잘못하면 돌비로 돌아가자는 말이 되어버린다. 그럼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뒤로 돌아가야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앞으로 가야되는데 뒤로 돌아가고 있으면 뭐가 되겠는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이것이 하나님 말씀이 새겨진 곳이다. 우리가 성육신 안으로 들어오려면 이삭이 드려진 곳인 십자가 안으로 와야 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따라 산다든지 말씀을 추구한다든지 성경을 따라 산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여러 가지 말과 여러 가지 방법을 가지고 열심히 훈련들을 하고 있다. 물론 다 좋은 일이지만 그것은 십자가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안으로 오지 않는 한은 하나님과 사람은 만날 수가 없다. 자기가 영을 추구하여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것은 신비주의가 되는 것이다.
성육신은 어디에서 왔는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왔으므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려면 하나님도 십자가로 와야 사람을 만날 수가 있고, 사람도 십자가로 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사람도 죽어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도 죽어야 사람을 만난다. 둘 다 살아서는 만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살아있으면 계속 진노하실 것이다. 그 진노가 꺼지려면 하나님이 죽어야 된다. 하나님이 죽으러 오신 곳이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죽으신 분이시기도 하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분이시기도 하다. 이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게 된다. 옛날에는 용접을 한다든가 납땜질을 했는데 함석을 붙여 땜질을 하여 두레박도 만들고 바께스도 만들고 했는데 마지막 땜질을 할 때 황산을 함석에 바르면 지글지글 끓는다. 어릴 때는 왜 그렇게 하는지를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함석은 아연 도금이 되어 있다. 녹이 안슬도록 막이 입혀져 있다. 이 막이 입혀져 있는 것끼리는 서로가 붙을 수가 없다. 그래서 황산을 가지고 이 막을 녹여내야 하는 것이다. 끓는 동안에 아연 도금한 것이 다 녹아버린다. 그래서 본래의 쇠가 나오는 것이다. 거기에 납땜질을 하는 것이다. 둘 다 같이 죽어야지 한쪽만 녹아도 납이 안붙는다.
하나님과 사람이 한 자리에 만나는 것이 십자가이다. 성육신은 내가 추구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성령을 따라 산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한 자리에서 만나진 자리이다. 이 자리로 하나님의 사람들, 그 분을 경배할 사람들이 모였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만이 올바른 길이기 때문에 이 길로 올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곳은 이삭이 드려진 곳이고, 이삭이 드려진 곳은 오늘의 십자가이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이 새겨지고 보존된 곳은 성육신이다. 성육신은 어디에서 왔는가? 십자가를 통해서 왔다.
5. 변화된 삶이 추가되어야 함
유대 왕들은 합당한 입장과 절대적인(근본적인) 경배의 입장을 가졌기 때문에 정통성을 유지했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정통에서 벗어나 이단이 돼버린 셈이다. 이방인과 똑같이 돼버렸다. 예루살렘도 없고 성전도 없으므로 이방인과 똑같은 것이다.
그러면, 이것만으로 되는가?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될 것이 있는데 변화된 삶이 추가되어야 된다. 합당한 입장도 있어야 되고, 근본적인 경배도 있어야 되지만 이것이 근본적인 노선이고 정통의 길은 되었다. 정통의 길이라 하여 그것이 영원한 것이 될 수 있는가? 그렇지는 못하고 변화된 삶이 추가되어야 한다. 우리는 유대역사를 보면서 왕들의 일상적인 삶이 그들 왕조의 성패를 가름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왕들이 얼마나 율법에 성실했느냐, 왕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경건했느냐에 따라서 그 나라는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변화된 인격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합당한 입장과 근본적 경배에 선다 하더라도 합당한 삶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합당한 삶! 왜 이것이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면, 마치 이런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주 좋은 벤츠 엔진이 있다 하자. 좋은 엔진이 있다는 말은 합당한 입장과 근본적인 경배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엔진이라 하더라도 그냥 놔두고 돌아가는 법은 없다. 기름을 넣어야 돌아가게 된다. 기름도 그 기계에 맞는 좋은 기름이 들어가야지 휘발유 엔진에 경유를 넣는다든지 더군다나 벙커시유를 넣는다든지 하면 그 기계가 고장이 나 버릴 것이다.
변화된 사람이 필요한 이유는 좋은 기계가 있다면 거기에는 기름이 필요하다. 우리 인체도 뼈대가 완전하고 세포가 제대로 다 되어있다. 그러면 사람이 살아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여기에는 알지못할 생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어디가 생명인지를 모른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모든 세포가 다 살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죽으면 모든 세포가 다 죽어버린다. 손가락은 안잘랐는데 왜 손가락도 죽는가. 다 죽어버린다. 생명의 비밀이다. 구조는 완전한데 어떤 생명 하나가 끊어져 버리면 다 끊어져버린다.
마찬가지로 합당한 입장과 근본적인 경배가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합당한 인격이 없으면 움직여지지 않는다.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좋지않은 기름이 들어가면 시커먼 연기가 나온다. 그것을 우리는 유대 왕들의 역사에서 보게 된다. 그들은 분명하게 옳은 입장과 근본적인 경배를 가졌지만 그들의 행실이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량했기 때문에 결국 그 나라는 망하게 되었다.
우리가 만일 합당한 삶을 합당한 입장과 합당한(근본적) 경배 위에 추구한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 로마서 5장 17절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이런 말이 나온다.
그러면 합당한 삶의 근본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합당한 인격이 추가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원칙이다. 로마서 6장 5절에 보면, “그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의 살으심에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어떤 사람들은 부활이 중요하다고 하고, 영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다 중요하다. 그런데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죽으심에서 연합해야 살으심에서 연합한 것이지 죽으심의 연합함이 없이 살으심만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의 살으심에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사람들은 부활을 생각하고 있고, 죽으면 부활하느냐 안하느냐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지 죽으심에 연합하지 않았는데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겠는가. 그 부활은 애굽 사람들의 부활이다. 사람은 영생불사한다. 육신은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사상은 애굽 사람들의 사상이고, 희랍인의 사상이다.
이 사상이 오늘 기독교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영혼은 죽지 아니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성경에도 여러 가지 근거가 있을 수 있다. 악한 자의 부활도 있고 선한 자의 부활도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려면 그분의 죽으심에 참여해야 내가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부활을 혹시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애굽인의 부활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 부활을 믿고 피라밋을 만들었다. 몇 천년 동안 놓아두고 부활을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늘도 그런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
“그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의 살으심에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예수님의 부활은 애굽인의 부활이 아니다. 영원불멸에 의해서 부활한 부활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왕노릇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산 것을 의미한 것이지 결코 애굽인의 영원불멸의 사상 때문에 영원불멸에 의해 부활한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영원불멸의 신앙을 갖고 있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어야지 영원불멸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 아주 예민하지만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좋은 땅을 누리는 문제. 좋은 땅이라는 말은 가나안 땅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약속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좋은 땅... 얼마나 그들은 그리워했겠는가.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우리 조상들에게 그 좋은 땅을 약속했는데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하더라 등 오만 말이 다 있었을 것이다. 배고픈 사람이 먹는 것을 생각하면 오만 상상이 다 나온다고 한다. 40일 금식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배가 고프기 시작하면 오만 음식이 다 생각난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배가 고프니까 옛날 시골에서 먹던 보리개떡까지도 전부 생각이 난다고 한다. 400동안 종살이 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기 조상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한 땅은 어떤 땅일까 하는 상상을 했을 때 얼마나 많은 상상을 했겠으며 얼마나 좋은 기대를 했겠는가. 그래서 좋은 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좋은 땅에 들어와서 그 땅을 결국 누리지 못하고 뺏겼다. 왜 뺏겼는가? 그것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합당한 입장도 있고 근본적인 경배도 있었지만 그러나 추가된 것이 없었다. 합당한 삶이 없었다. 삶은 인격인데 인격이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가 좋은 땅을 누리는 것은, 오늘날은 교회생활을 누리는 것, 천년왕국을 누리는 것, 새 예루살렘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의 교회는 내일의 천년왕국이고, 내일의 천년왕국은 또 다음날의 새 예루살렘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시간적인 문제가 전혀 아니다. 이것은 정도의 문제이고 성질의 문제이기 때문에 감이 처음 열렸을 때와 중간에 컸을 때와 마지막 익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감이 처음에 열려 상당히 많은 감이 떨어져 버린다. 그 중 안떨어진 것이 남아서 상당히 크게 된다. 이 정도 됐으면 안떨어지는 정도의 때가 나온다. 그것이 천년왕국이다. 그리고 빨갛게 익어 홍시가 될 때가 새 예루살렘이다.
교회와 천년왕국과 새 예루살렘은 시간과도 관계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간 문제 보다도 성숙에 달려있다. 천년왕국은 교회보다도 더 성숙한 단계이고, 새 예루살렘은 천년왕국보다 더 성숙한 단계이다. 이것을 누리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함에 달려 있다. 똑같은 교회생활인데 내가 더 축복을 누리고 덜 축복을 누리고 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정도에 달려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변화된 삶은 기계의 기름과 마찬가지이다. 인체의 생명과 마찬가지이다. 뭔가 하나가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 있는데도 하나가 없으면 안된다. 그 하나만 들어가면 문제가 다 해결된다. 오늘 전등을 켰다. 전등은 전등이라는 것이 만들어질 때 합당한 입장도 됐고 근본적인 경배도 되어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기도 들어와 있고 전등도 만들어져 있고 불이 켜질 수 있는 모든 요건을 갖고 있다. 하지만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불이 켜지지 않는다. 전선이 있다 해서 불이 켜지는 것이 아니다. 전선도 있고 등도 있지만 전기가 들어와야 불이 켜진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모든 축복은 첫째는 우선 불이 들어오려면 전선도 있어야 되고 전등이 있어야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도 없으면 안된다. 북왕조 이스라엘은 그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아예 전선도 없고 전등도 없는 상태로 가벼렸기 때문에 예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역대기에서 이스라엘이 제외되었는가? 바로 그래서 제외된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에서 제외된 것이다. 유다는 왜 제외되지 않았는가? 전선도 있고 등도 있기 때문에 제외되지 않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전기가 안들어왔다. 그래서 불이 켜지지 않고 말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아하~ 이 전기가 들어와야 되는구나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전기가 들어오기만 하면 빛이 밝아지고, 빛이 밝아지면 모든 것이 보인다. 빛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발생이다. 우리가 늘 빛을 보고 있지만 빛이 항상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도 마찬가지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발생할 때는 있고, 안발생할 때는 없는 것이다. 지금 불이 들어왔다는 것은 지금 전기가 들어왔기 때문에 빛이 발생했다. 우리는 빛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빛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빛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발생하는 것이므로 꺼져 버리면 없어져 버린다. 천국도 마찬가지이다.
변화된 삶! 이것이 추가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것이 추가되어야 한다. 나라도 법률을 잘 만들어야 되고 헌법도 좋아야 되고 법이 좋아야 되고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법을 만들어 놓아도 법을 운행하는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법의 효능이 달라져 버린다. 민주주의는 그 국민의 민도에 달려있다는 말이 나온 이유가 그것이다. 해방이후 우리나라는 천하에도 없는 헌법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미국 헌법을 거의 카피하다시피 했다. 완벽한 것을 보고 만들면 얼마든지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그때 당시 우리가 민주주의 시민으로서의 성숙이 없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안되었다. 법도 좋아야 되지만 그것을 운행하는 인격이 있어야 된다. 그래야만 그 좋은 법이 운행되어 좋은 사회가 되는 것과 똑같다.
오늘날 어느 회사이든지 직장이든지 국가이든지 다 똑같다. 구조는 다 완벽하다 할지라도 사람이 어떤 사람이느냐에 따라서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돈 1000만원을 가지면 누구나 돈을 벌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은 1억을 만들 수가 있고 어떤 사람은 까먹어서 10만원이 안될 수도 있다. 돈이 없어지는 것을 보면 이상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1억을 가지고 산다고 해보자. 한달에 최소한 200만원씩을 쓴다하더라도 이자까지 합하면 5년은 쓸 것이다. 그런데 1억을 가지고 사업을 하면 두달도 못가서 다 없어질 수가 있다. 차라리 그런 사람에게는 200만원씩 월급을 주는 것이 낫다. 그러면 5년 동안은 살 수 있다. 그런데 1억을 맡겨버리면 두달도 못가서 없어져버린다. 두달도 못가서 없어졌다는 말은 한달에 5000만원씩을 썼다는 말이다. 한달에 어떻게 5000만원을 썼을까 생각하면 이해가 안가는데 실제로 사업을 하면 그렇다. 그러므로 사람에 달려있다.
돈 1000만원을 가지면 반드시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1000만원을 가지면 돈을 벌 사람도 있고 돈을 까먹을 사람도 있다. 그리고 1000만원이 없었더라면 빚쟁이는 안됐을텐데 빚쟁이까지 된 사람도 있다. 옛날에 증권에서 깡통구좌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깡통구좌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들어보니 참 재미있다. 내가 100만원을 가지고 있으면 100만원어치 주식을 살 수 있는데 그것만 사서 잃어버리면 100만원만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100만원이 있으면 주식을 200만원어치를 주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100만원을 빚지게 된다. 깡통구좌라는 것은 잃게 되면 오히려 빚쟁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돈이 없었더라면 빚쟁이가 안됐을 것인데 돈이 있었기 때문에 빚쟁이가 된 것이다. 돈이 있으면 돈을 번다는 것이 아니고, 돈이 있으면 버는 사람도 있고 돈이 있으면 빚쟁이 되는 사람도 있다. 즉 사람에 달려있다.
좋은 땅을 누리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좋은 교회 안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합당한 인격이 추가되지 않으면, 합당한 삶이 추가되지 않으면 안된다. 대구교회 왔으므로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하고 마음 놓고 살아버리면 잘못하면 깡통구좌 될 수도 있다. 안온 것만 못할 수도 있다. 대구교회만 오면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오면 잘될 확률이 더 많다는 것이다. 대구교회 왔는데 왜 안돼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더 불행하냐, 왜 더 괴롭냐 하는 사람은 깡통구좌 된 사람들이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변화된 삶이 추가되어야 된다. 아~ 우리의 어떤 일상적인 생활이 추가되어야 하는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변화된 삶이 추가되어야 된다. 차를 엄청나게 좋은 차를 샀더라도 내가 운전할 때 조심하지 않고 들이박으면 사람 치어서 죽는 것과 똑같다. 싼 차로 박으나 비싼 차로 박으나 똑같다. 운전 잘못했는데 비싼 차라고 사람 안다치는 차는 없다. 좋은 차를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운전도 조심해야 된다는 것이다. 좋은 차 볼보 샀으므로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좋은 차를 샀으면 더욱더 조심해서 더욱더 운전에 주의를 해야 된다는 것이 변화된 삶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이유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이스라엘처럼 먼 길로 가지 않게 하시고 빗나간 길로 가지 않게 하시고 합당하고도 근본적인 길로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이 지정하시고 선택하시고 당신이 계신 곳, 당신의 임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에서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섬길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합당한 삶이 필요하고 합당한 삶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왕들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생활 안에서 이 사실을 우리가 명심하게 되기를 원하고 합당한 삶을 항상 추구해야 된다는 것을 우리가 늘 기억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