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과 자야, 그리고 길상사
청와대 뒷길....
왜 있잔아 ~ 삼청동에서 북악스카이웨이로 올라가는 길에서
삼청터널을 막 넘어가면
북악산 자락이 끝나는 성북동 기슭에 자리한 길상사
처음 가 보는 사람들은 자유 분방한 분위기와 규모에 놀라지....
이곳은 한 때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 대원각이 있었다.
군사문화의 서슬이 시퍼렇던 60 년대 말 삼청각 .청운각이 최고급 요정이였다
요정
술과 음기(淫氣)를 팔던 자리가 부처님을 섬기는 자리로 변한 것이 좀 의아하지만
그것도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이라면 인연이라고 한다.
불가에서 가장 성스럽게 치는 연꽃은
가장 더러운 진흙에서 피지 않던가 말이다
이 절은,
대원각 요정의 주인 이었던 김영한(불명 吉詳花)이 죽기 전
법정 스님에게 기증하여 절로 탈바꿈한 곳이다.
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사찰(寺刹)인 길상사
이 사찰의 이름은 그녀의 법명인 길상화(吉祥華)를 본 따서
길상사(吉祥寺)로 명명(命名)했던 것이다
-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길상사(吉祥寺)
김영한 (1915 -1999)
기명(技名)은 진향(眞香)이고 필명은 자야(子夜)이다
그녀는 시인 백석을 지독히 사랑했던 기녀이며
백석 또한 그녀를 위해서 많은 연애시를 썼다고 전 한다
백석이 북으로 떠난 후 38선 때문에 그와 생 이별한 그녀는
김영한은 백석을 잊기 위해 혼자서 대원각을 냈다는 소문이고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을 일군어 낸 여걸이였지만
백석이 죽도록 보고 싶으면 그녀는 줄 담배를 피워 댔다고 한다
그 담배 연기가 이 가련한 여인을 그냥 두겠는가,
기어이 폐암으로 몰아 넣었다.
죽음이 임박해 지자 김영한은 자신이 운영하던 요정은 절에
자신이 만지던 2억원의 현금은 백석 문학상 기금으로 내 놓는다
그리고 '내사랑 백석'(1995년 문학동네)
'내가슴속에 지워지지 않은이름'(창작과비평)을 출간했다
기자가 물었대
시주로 천억을 내 놓았는데 후회되지 않냐고
무슨 후회? 라고 반문했다나바
-그 사람이 언제 제일 생각나냐고?
그랫더니
-사랑하는 사람 생각 나는 데 어디 때가 있나!
그랬대요
기자가 다시 물었대요
-그 사람이 어디가 그리 좋으세요
-천억이 그 사람의 詩 한 줄 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쓸꺼야 라고
- 이생진 詩 '그사람을사랑한이유'(시인백석을사랑한 김영한)' 에서 -
삶이 무어냐고 묻고 싶거든 길상사를 찾아 가면
수목 우거진 언덕 한켠에
김영한의 비석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삶이란 ~
그저 그 언덕 위로 불어 오는 바람같은 것 이라고...
우리에 삶은
그저 스처가는 바람이라는 것 ~~~~~
그 김여사 자야는
길상사가 문을 연지 2년만인 1999년 83세에
훌훌 서방 정토 세계로 떠난 여인
백석을 위해 전생의 삶을 보낸 멋쟁이 여인이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앞 마당에 뿌려젔다
- 길상사 내의 김영한(법명 吉祥華) 기념비
김영한은 가난한 탓에 약한 신랑에게 몸 팔려간 15살에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에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는 불운을 맞는다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 그녀는 기생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미모의 기생이였다.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까지 떠나게 되지만
스승이 투옥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 함흥 감옥으로 찾아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대신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 갔다가
영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1936년 운명적으로 만난다
백석은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내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전 우리사이 이별은 없어요>
함흥에서는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김영한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가 김영한이 서울로 돌아가자
백석은 아예 그녀 때문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일보에 근무한다
그리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3년간의 동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이 못 마땅하게 생각했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켰으나 신혼 첫날 밤 부터 도망치기를
여러차례 하면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 갈등 하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만주로 도피 하자고 제의 한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함흥에 남아있기 간절히 바랬지만 백석은 혼자 떠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다고 김영한은 늘 후회하며 살았다고 전 한다
그 당시 백석의 심경을 나타샤를 인용해 노래한 詩가 대표적 연애시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라고 한다.
백석(본명 백기행 1912 -1995)은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0년 조선일보에 시를 투고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백석은
잘생긴 얼굴과 젠틀한 성품, 게다가 청산유수의 말 솜씨로
미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댄디보이(Dandy Boy)같았다.
그러나 백석(白石)은 많은 여인들 중 자야(子夜)만을 사랑 하였으며
백석에 아름다운 시(詩)는 시인과 기생의 정염(情炎)을 넘어서
깊고 넓은 그리고 애틋한 사랑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만주에서 고향 함흥으로 돌아 왔지만
영한은 이미 서울로 떠나 버렸고 다시 영한을 찾아 서울로 가려 할 때는
38선이 그어져 그들의 사랑은 이승에서 잇지 만나지 못하게 된다
분단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서글픈 사랑으로 기록이 된다
그 후 백석이 북한체제에서 어떻게 살아 갔는지는 알려진바 없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월북한 탓에 그의 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교적인 영향을 받은 큰 시인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랑...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함일까.
그녀는 오로지 재산 모으는데 전념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돈을 모을수록 허전함은 더하고
모진 세월마져 백석에 대한 사랑은 사그라들게 하지는 못했다.
생전에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안았다고 한다.
자야는 백석이 진정으로 사랑햇던 단 하나의 여인이었고.
그녀 또한 백석에 대한 그 사랑을 평생 올 곧게 간직했던 여인이였다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의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나의 방문을 열고 나 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 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 가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내 나이 어언 일흔셋
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 이었다.
그와 헤어진 뒤의 텅 빈 세월을 살아 오면서 나는 차츰 말이 어눌해지고
내 가슴 속의 찰랑찰랑한 그리움들은
남이 아무리 쏟으려해도 결코 쏟기지 않던 요지부동의
물병과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은 지금껏 물병에선 수십 년 동안 고였던 서러움이
저절로 콸콸 쏟아져 나온다.
월간 창작과비평에서 출고 한
자야의 회고록 '백석, 내가슴속에지워지지않는이름' 의 전문에서
이제 두 사람은 모두 세상을 떠났으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그들의 사랑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리고 길상사 한 쪽에 기념비로 남아서
길상화(吉祥華)처럼
길(吉)하고 상서(祥瑞)로운 빛을 발하고 있을 것이다
사랑을 간직하는데는 詩쓰는 일 밖에 없다고
김영한은 말 했다고 전 한다
그녀는 국악계에도 공헌을 했으며 김진향으로 더 알려졌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뱁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오막살이집)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女 僧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 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山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이 詩는 기구한 삶을 살다 여승이 된
한 여인을 두고 쓴 것이나
왠지 김영한 과의 사랑을 예언적으로 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람으로 태어나 만고풍상을 껵으며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사람에게 지워지지 않은 이름으로
모든이에게 기억되는 사람으로 살아 간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삶이 빛나듯이
두사람에 사랑과 인생 그리고 문학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첫댓글 모르던 사랑에 이야기 맘에 와닫는 전률이 있네요. 세상에와서 찐한 사랑. 한평생을 연애하는맘으로 사랑한다면 세상에서 행복을 독차지한 행복이지요
각골에도 낭산같은 선배님이 계시다니! 참으로 저에게는 크나큰 축복이요 행운입니다. 게다가 카페지기 선배님이 아니었으면 알지도 만날 수도 낭산 선배님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한 채 흘러가버릴 인생여정이 되었을 텐데 .... 이렇게 사이버 각골이 현실에서 존재하니 오늘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낭산 선배님의 모든 글에서는 항상 깊은 사색과 역사의식 그리고 민족의식이 흥건히 배어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항상 선배님 계시기에 이 못난이도 자랑스럽고 이제는 마음 뿌듯하답니다. 선배님의 그 마음 사랑 정성 모두 모두를 이곳 사이버 각골에 쏟아주십시오! 모든 동문들과 후손들에게 각골사랑의 양식이 되게 해주세요!
낭산 선배님의 이 글이 아니었다면 길상사(대원각)의 순수한 사연을 알지도 못했지요! 그저 그런 고급 요정 정도로만 알고 지나칠 뻔 했습니다. 子夜님께서 생존해 계시는 동안인 1991년 경에 어머님 회갑연을 대원각에서 해드렸거든요! 그때 주인장이셨더 子夜님은 그냥 나이 많은 할머니로 뵌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 연유로 더욱 마음이 애련하네요! 꼭 다시 찾아가봐야 하겠습니다. 子夜의 영혼과 마음위에 설립된 吉祥寺! 역사의 중요성을 오늘도 실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가슴절이는글이면서도.......아름다운.사랑에.찬사을보내고싶내요..이리좋은글을.올려주신.선배님.감사합니다............
낭산 선배님 처음인사드립니다 .잘은몰르겠지만 이상하게도,한편에 흑백영화를 본것같은기분이드는건 왜일까요..글구 한가지 눈이안좋아서..긴글을 잘못보는데..잔잔한 .맘으로 두번읽었습니다..선배님 존경합니다..너무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