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 사유와 과학적 정신의 기원들(La Pensée grecque et les origins de l'esprit scientifique, 1923),
Léon Robin, La renaissance du Livre, 증보판 1932 (초 1923), P. 486.
- 레옹 로방(Léon Robin, 1866-1947) 고대 철학사가. 프랑스에서 플라톤 연구의 스승으로 간주되었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서, 이데아들과 수들에 대한 플라톤 이론(La Théorie platonicienne des Idées et des nombres d'après Aristote, 1908), 그리스 사유: 과학적 정신의 기원들(La Pensée grecque et les Origines de l'esprit scientifique, 1923)(앙리 베르의 서문), 플라톤(Platon, 1935), 헬레나 사유, 기원에서 에피쿠로스까지(La Pensée hellénique, des origines à Épicure, 1942).
**
그리스 사유와 과학적 정신의 기원들(La Pensée grecque et les origins de l'esprit scientifique, 1923)
서문(Avant-propos) vii-xxi
- 앙리 베르(Henri Berr, 1863-1954) 프랑스 철학자. 1881년 ENS 입학, 역사종합지(Revue de Synthèse historique, 1900) 창간, 출판사(La renaissance du Livre) 편집인이기도 하다. 그의 부인의 남동생은 에밀 뒤르껭의 딸과 결혼했다. [“베르”라는 이름은 러시아 유태인 가계, 즉 베르그송 가계의 조상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 뒤르껭은 알자스계 유대인이다.]
입문(Introduction) 1-19
제1권 기원들(Les origines) 21-40
제2권 과학과 철학(Science et Philosophie) 41-154
제3권 인간 문화(La culture humaine) 155-374
제4권 우주 속에서 인간: 현자의 이상(L'homme dans l'Univers: L'idéal du Sage)
제5권 그리스 사유의 몰락(Le déclin de la pensée grecque)
* 지중해 동쪽 큰 양푼의 지도: 첨부(sans page).
* 참고문헌 457-472
* 인덱스 473-483
* 차례 484-486. (47SMF)
**로방(Léon Robin, 1866-1947)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을 상당히 유효한 것으로 보는데 비해, 벩송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자기 입장에서 이미 정리된 방식으로 전하는 것이기에 수용 경우에 주의하라고 경계 표현을 했다. 로방의 학풍이 아리스토텔레스 전공자인 브륑슈비그(Jacques Brunschwig, 1929-2010)와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 (47TKG)
박홍규는 플라톤의 저술의 시대 순을 열거하는 대목에서 로방(Robin)을 인용하고 있다. (희랍철학 논고, 「서양고중세 철학사 개관」, 239쪽) (47TKH)
# 소크라테스에 관한 내용 ***
그리스 사유와 과학적 정신의 기원들(La Pensée grecque et les origins de l'esprit scientifique, 1923),
제3권 인간적인 문화(La culture humaine) 155-374
제2장 소크라테스(Socrate) 178-193
제3장 소크라테스 정신의 전파(Le rayonnement de l'esprit socratique) 194-209.
제2장 소크라테스(Socrate) 178-193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전469-399)의 활동영향은 소피스트들의 활동과 경쟁으로 행사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소피스트의 성공은 이미 대단했다. 소크라테스의 활동은, 지적이고 도덕적인 동일한 필요들에 응답하면서 동일한 사회적 환경에서 행사되었다. 그의 절차들은 적어도 외적으로는 소피스트들의 것과 아주 비슷하여,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 Ἀριστοφάνης, 전450-386)에게, 그리고 틀림없이 동시대의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인격에서 있어서만큼 소피스트 정신과 같이 그렇게 보였을 수 있었다. 플라톤 그 자신은 소피스트를 정의하고자 애쓸 때, 소피스트의 존재와 진실한 철학자의 존재 사이에 유사한 분위기를 주목했었다(소피스트, 230 d 이하). 결국에는 소크라테스학파들 중에 메가라학파가 있는데, 이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소피즘의 가장 아름다운 전형들 중의 몇 사람을 제공한다.
불행하게도 만일 소피스트학파(la Sophistique)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보잘 것 없다면, 소크라테스에 대해 갖는 우리의 인식도 훨씬 더 보잘 것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그리스 사상의 가장 위대한 인물의 모습이다. 그로부터 직접적으로 또는 매개자들에 의해서 장차 모든 철학적 사조들이 유래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거의 전설의 인물이다. 그의 인격성, 그의 행위들, 그의 견해들에 관해서, 우리는 직접적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풍부한 수집 증언들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증언들은 그 인물의 중요성에 대해 매우 높은 수준의 생각을 우리에게 전해주는데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 증언들은 상당히 모순되고 또는 그것들 사이에 일치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심지어 왜 그의 동향인들이 그에게 그들 자신들 가운데서 행한 그의 행동에 대해 삶을 지불하라고 했는지 매우 잘 알지 못한다. 결국, 분명하게 구별되고 심지어는 가끔 적대적인 여러 소크라테스학파들이 있다는 것은 그의 철학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하기 위한 모든 시도에 대한 어려운 점들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소크라테스 자신의 문원들에 따라서 개인적 견해를 형성하게 하는데도 우리의 희망이 닫혀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많은 불확실한 환경에서 분명히 확인된 사실이라 하더라도,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 달리 아무 것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며, 말(la parole)에 의해서 연관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역사적 비평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한 사상가에 관해서 정확하게 제기된다. 이 사상가가 그 시대가 지워버렸던 철학에 대해 그리고 각인된 의식에 대해 표시했다는 점이다.
증언들 사이에서, 그 중에서는 소크라테스를 축소하려고 시도하는 것들이 있다. 사람들은 아리스톡세노스(Aristoxène de Tarente, Ἀριστόξενος, 기원전330년경 활동)의 증언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알았던 그의 아버지 스핀타르(Spinthare)와 연관되어, 아버지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말했던 것을 모든 잘못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이 확실한데, 게다가 사람들은 어떤 동기 때문인지를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젊은 시절에 소크라테스가 나쁜 주체였다는 것을 인정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 다음 증언을 믿겠는가? 신중함과 존엄함등 갖추어야 할 교양도 없고, 공공연하게 상스럽고 폭력적이고 욕망적이며, 특히 중혼자로서, 그 성인이 된 인간(소)이 정념에 알맞는 찬탄할 것들만을 자극하려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아리스토파네스 증언이 인정한 그의 초기 계획을, 즉 그처럼 불쾌한 계획의 상황을 아테네에서 실현하려 할 수 있었는가.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들(les Nuées, Νεφέλαι, 423), 그리고 부수적으로 새들(les Oiseaux, Ὄρνιθες, 414)과 개구리들(les Grenouilles, Βάτραχοι 405)에서, 실망이자 모호하며 시시한 인간 대신에, 우리는 능력있는 인물을, 즉 한 철학자의 구체적이고 매우 생생한 개성을 만난다. 그 철학자의 명성과 인기는 상당했다. 그 초상화의 짓궂은 장난기가 정치적 동기들로 진행한 것은 거의 중요하지 않을 지라도, 그것은 아리스토파네스에서는 통찰능력(clairvoyance 예견)이 없는데 대한 유감이라는 증거이다. 흥미 있는 점은 이것들을 그들의 조잡한 풍자로부터 분간하면서, 특징들을 주목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은 47살의 성숙기에서 소크라테스의 특징을 보았던 것이며, 일상적 활동의 증인이었던 한 공인으로서 그 특징을 재현했다. 그 공인은 한 스승이었고, 한 학파(une école) 즉 명상소(un pensoir, Φροντιστήριον)을 가졌으며, 그리고 그의 방향을 아래서 공부하고 공동생활의 규칙을 따르는 제자들을 가졌다. 교육에 인정받기 위해서는 분담금을 지불해야 했다. 학파의 훈육은 금욕적이었다. 제자들은 창백한 안색을 지녔고, 순수 영혼들이며 이미 반죽음(demi morts)상태였다. 씻지도 않고, 누더기를 걸치고, 맨발인 그들은 입에 넣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학교의 입학은 예비적 입문식을 요구했다. 거기서 기하학, 자연학, 천문학, 기상학, 지리학, 지구의 심연들, 생명 존재들을 공부했다. 공기는 사물의 원리이며 사유의 원리였다. 에테르의 소용돌이(le tourbillon d'éther)로부터 자연적으로 모든 현상들의 결과들이 나왔다. 소크라테스는 무신론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도시의 신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학교가 불타고, 그의 죽음과 그의 학생들의 죽음은 불경건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연학자 일 뿐만 아니라 또한 수사학의 스승이었다. 언어(le Langage)는 그의 신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관념들(이데아들)을 발명하는 방법을, 즉 안티로지(l'antilogie)를 가르쳤다. 아름다운 스타일과 법률적이고 정치적으로 유창한 교수이지만, 트집잡는 스승이었다. 그에게서 사람들은 약한(faible) 담론, 즉 불의를 강한(fort) 담론, 즉 정의로 승리하는 것을 배웠다. 임의적인 협약인 법률에 대해 자연의 권리를 대립시켰다. 결국 그의 강의들은 문법, 운율학(la métrique), 리듬학(la rythmique)으로 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디오게네스(Diogène d'Apollonie, Διογένης)의 학설에 편드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그 소크라테스는 절충주의 자연학자들의 문벌(famille)에 속하며, 이 자연학자들 자신들은 변론술(la Sophistique)에 속했다. 그 이외 것에 관해서, 다른 소피스트들과 마찬가지로 한 소피스트로서, 예를 들어 프로티코스(Prodicos de Céos, Πρόδικος, 전 470/460경-399이후)가 있고,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아리스토파네스는 변론술에 비추어서 플라톤의 불평들과 거의 같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이런 공격들에 반대하여, 플라톤은 아리스토파네스가 심판관들 앞에서 자신의 스승에게 발설했던 것을 변호하면서[변호하는 작품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 책임감의 가장 무거운 부분을 아리스토파네스에 근거하여 보고(報告)하는, 직접적이고 정확한 항의를 내세웠다(소크라테스의 논변, 18a-20e). 왜 심포지온: 향연에서 그는 이들을 화해시킬려고 상상했는가? 여기에 문제가 있는데, 이 문제를 근거로 가설들을 만드는 것은 쉬운 것이지만,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인격성을 에 관심을 표하는 않은 것이 문제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를 그의 장년기에 알았던 반면에, 플라톤은 늙은 시기에 그를 알았던 것을 관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즉 구름들(423)의 시기가 지난 거의 15년 후이다. 그러나 보다 오래된 제자들에서 즉 문벌을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에서, 플라톤 자신의의 이종사촌인 과두정치가(l'oligarque) 크리티아스(Critias, Κριτίας, 전460/450경-전404/3), 외삼촌인 카르미데스(Charmide, Χαρμίδης, 기원전 5세기경), 자기 형제들인 아디만테스(Adimante)와 글라우콘(Glaucon Γλαύκων) 등에게서, 플라톤은 자기 스승의 삶에 대해 교육을 받았을 수 있었다. 스승의 사후에 계속해서 스승의 정보를 더욱 풍부하게 가질 수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은 플라톤의 탐문들이 반영된 것을 향연과 테아이테토스 도입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째거나, 사람들은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의 전기와 특성을 끌어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안티오키드(Antiochide) 종족에 속하며, 이 종족은 알로페케(Alopèce, Ἀλωπεκή, Alōpekē, “Renard") 데모스[여우 골]에 살았다. 그의 아버지 소프로니코스(Sophronisque Σωφρονίσκος)는 아마도 조각가이며, 훌륭한 선조로부터 나왔을 것이며, 위대한 정치가 아리스테이데스(Aristide le Juste, Ἀριστείδης, 전530년경-467)의 아들인 뤼시마코스(Lysimaque, Λυσίμαχος)와 오랜 친구였다. 그의 어머니 파이나레테(Phénarète, Φαιναρέτη)는 능숙한 조산원이었다. 그는 전통교육을 받은 후에, 교육을 받아야겠다는 강한 욕망으로 보다 더 진도를 나가기 위해 수학들과 자연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자연학자들의 학설들의 연구에서, 사람들 사이에 많이 논쟁되었던 파이돈(96a-99d)에 따르면, 그는 그 학자들의 다양한 가지치기를 보았다. 이 시대의 절충주의는 폐기되었던 체계들을 복귀시키면서 사실상 이다양한 학설들을 강조하는데 기여했다. 아낙사고라스(Anaxagore, Ἀναξαγόρας, 전500-428)의 체계는 그를 만족시키는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정신의 이론은 처음으로 그에게 그의 의심들을 끝내는 수단을 암시했다. 비판적 반성과 어떤 암시, 그러고 나서 독창적인 내적인 명상(une meditaion interieure 내적 성찰)이 이어졌다. 결국 그는 본질들 또는 지적 형식들에 의해 생성(le devenir)의 설명을 잉태해 냈다. 만일 사람들이 이에 대해 파르메니데스(127c, 130b,e, 135d)를 믿는다면, 소크라테스는 아직 젊었을 때, 이 혁명이 그의 사유 속에 일어났다. 플라톤의 증언에서 보면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했던 것과 반대로 자연학을 물리학자로서 결코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로 그는 철학적 활동성의 초기 선언들을 자신의 발견물을 퍼뜨리는 데 헌신했다.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한 스승으로서 권위를 획득했는데, 그때 그의 열정은 자기 단골들(ses familiers, 가 家) 중의 하나인 카이레폰(Chéréphon, Χαιρεφῶν, ?- 전400경)이 델포이 신전의 여사제 퓌티아(Pythie, Πυθία)에게 질문하게 했다. 그는 보다 현명한 어떤 자인가? 신의 응답은 부정이었다[더 현명한 자는 없다]. 그때부터 소크라테스는 그 자신에 의해 이 응답의 이유를 찾아야할 “임무”(mission)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아폴론에 봉사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자신에게서 어떤 종류의 지혜도 보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지혜롭다는 자들에게 그것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examiner). 곧 이어 그는 자신의 무지를 속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학적이지 못함”(inscience)을 고려하기 때문에,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이와 동일한 비판적 반성을, 즉 검토 없이 인정된 견해들로부터 정신들을 해방시키는 비판적 반성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개혁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알라(se connaître soi-même), 이것은 자기 영혼을 돌보기(avoir soin de son âme)라고 그가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교육은 어떠한 독단론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 교육은 대화에 의한 공동 탐구(recherche en commun)의 방법에 근거한다.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를 향한 그의 행동보다 더 정열적인 매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젊은이를 향한 방식을, 다른 교육의 징후(l'empreinte)가 아직은 새롭다는 점에서, 징후에서 자기 자신의 미래와 더불어 도시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진한 것이다. 그는 그 영혼들을 풍부하게하는 사랑으로 자기 방법의 진수를 분명하게 만들었는가? 그는 사랑이 그가 알았던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는가? 적어도 그가 젊은이를 사랑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들로부터 사랑받고자 원했다는 것은 아주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엄격히 말하면 그는 학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는 격투장들(les palestres)을 방문하지 않을 때, 리케이온(Lycée, Λύκειον)의 체육장은 그가 선호하는 한 장소이다. 그가 대담자에게 탐구 작업에 동참하도록, 대화를 위하여 동기 부여하기를 좋아하여 지칠 줄 모르고 질문하는 것, 그것은 긴 담론을 전개하도록 하고, 또한 시인들의 시들을 주석을 달면서 읽기를 실행하게 한다. 그러나 그가 스승이지도 않지만 스승이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단골들(ses familiers, 구성원들)이 모이는 서클을 가졌다. 이 단골들은 꾸준하게 그의 가까이에서 살아가지 않았을 지라도 이들은 적어도 그의 인격 또는 그의 원리들에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스스로들 선언했다. 이 자들 중의 대부분은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날에 참석했다. 아테네인들 이외에도, 이들 가운데는 외국인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기 도시에서 일상적으로 거주하면서도 소크라테스와 대화하기 위하여 아테네 가끔 오는 자들이다. 몇몇은 특히 크리톤(Criton, Κρίτων, 기원전 5세기경)과 같은 이는 자기의 관심들 때문에 열렬하게 지지했다. 다른 이들 중에 아폴로도로스(Apollodore, Ἀπολλόδωρος)는 그의 태도를 과장하여 모방하는 환상적 신봉자들에 속했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이들은, 그를 따라다녀서, 자신들의 교육과 자신들의 글쓰기가 소크라테스를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에우클레이데스(Euclide de Mégare, Εὐκλείδης, 기원전 450경-전366경), 안티스테네스(Antisthène, Ἀντισθένης, 기원전 444-365)(79살) 아리스티포스(Aristippe de Cyrène, Ἀρίστιππος, 전435경-356) 파이돈(Phédon d'Élis, Φαίδων, 전5세기)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전427-347), 아이스키네스(Eschine, Αἰσχίνης, 5세기경) 등, 이들은 “임무”(mission 전파)로부터 결과되어 나타난 교육적인 사도 임무이외에도, 소위 말하는 학설적 방향정립의 영속성을 증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정녕 “학자연”(scolatique)하지 않아서, 다른 철학적 서클들에 명맥하게 연계되어 있는 사람들도 동시에 소크라테스 서클의 일원이었다. 이들로는 엘레아학파의 일원인 에우클레이데스, 퓌타고라스학파 학자들로서 테베 출신들인 심미아스(Simmias, Σιμμίας), 케베스(Cebes, Κέβης), 페돈데스(Phédondès) 등과 필리우스 출신인 에케크라테스(Échécrate, Ἐχεκράτης), 또한 소피스트 출신들, 그리고 안티스테네스(Antisthène, Ἀντισθένης, 전444-365) 또는 아리스티포스(Aristippe de Cyrène, Ἀρίστιππος 전435경-356) 같은 이들도 있다. 만일 사람들이 이 독창적 특성을 다른 사실들에, 즉 소크라테스학파들 모두가 실천의 질서에서도 사색의 질서에서도 동일한 각도에서 자신들의 스승의 사유를 대표하지 못했다는 사실들에 접근해 본다면,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확고한 핵심 주위에서 [그의] 학설의 윤곽들이 가소성으로(너울로서) 남아있고, 또한 다른 학설들의 그 행동에도 적합할 수 있다는 것을 이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서클은 청강자들이 다른 강의도 듣는 것으로 개방되어 있었다. 이 들은 청년들이거나 소피스트들의 고객들인데, 그 청년들이 너무나 자기들의 사무들에 바쁘고 또는 자기들의 쾌락에 전념하여 진리 탐구를 위해 이것들을 희생할 수 없는 자들이며, 소피스트들의 고객들은 따라야 할 자신들의 규칙을 찾고 있어서 소크라테스 주변에서 토론을 잘 이끄는 것과 정교한 관념으로 분석을 미세하게 잘하는 것을 찾는 자들이다. 조금 전에 문제가 되었던 플라톤의 친척들과 알키비아데스(Alcibiade, Ἀλκιβιάδης, 전450-404)와 크세노폰(Xénophon, Ξενοφῶν, 전440경-전355경)도 또한 마찬가지로 토론과 분석을 찾는 경우이다. 향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플라톤이 알키비아데의 입을 빌어 내놓은 담론은 바로 이러한 것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들이 소크라테스와 연관해서 자발적인 존경과 찬미와 같은 것이 있다는 것과 동시에 그의 영향에서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완고한 고집같은 것도 있다. 이런 애호가들은 제자들이 아니다.
이리하여 신에 봉사하며 자신의 작업이 신을 기다리며 신을 요청하는 그 도시들 결코 떠나지 않았던 소크라테스는 대중적이고 무상적인 자신의 교육적 임무(mission)를 완수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시민의 의무들에 이방인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완전무장한 보병(un hoplite)로서 군대에 봉사했으며, 이것은 어떤 운수를 가정했다. 그는 [펠로포네소스 전쟁(La guerre du Péloponnèse 431-404)의 26번 전투들 중에] 포티다이아전투(Potidée, Ποτίδαια, 431-430)와 암피폴리스 전투(Amphipolis, Ἀμφίπολις, 422)의 원정에도 그리고 처참한 사태가 벌어진 델리온 전투(Délion, Δήλιον, 424)에도 참여했다. 그는 그 전투들에서 냉정함, 결단, 용맹(une bravoure), 일반병의 역경[불안정]과 비참함에 무관심함을 증명했다. [아테네 사건들에서 한편으로] 500인 상원의 자리에 제비뽑기에 불려나가서, 그는 최고위원에 일원이 되었다. 그 임기에 위원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민중의회[국회]는 아르기누사이 해전(La bataille navale des Arginuses Ἀργινούσ(σ)αι, 전406)에서 지휘했던 장군들의 사형을 요구했다. 소크라테스만이 인민의 분노에 맞서서, 기원전 406년에 이 불법적인 제안을 투표에 붙이는 것을 거절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보다 나중에 자신의 생명에 위험헤 처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과두정치가들(과두제)[참주들]에 맞섰다. 과두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지난 민주정에서 장군들을 사형시킨 것에 대해] 복수를 위하여 그를 탄약수(un pourvoyeur, 선봉자)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그는 이를 거절하고 맞섰다].
이 두 경쟁적 정치적 정당에 비추어서 동등하게 독자적인 위상을 지킨 것이 그에게는 숙명적이 될 수 있었을 뿐이다. 민주정치가들이 권력을 다시 잡았을 때,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30인 참주시절에 무엇이었는지를 잊고서, 단지 참주들 중의 몇몇과 연결된 그의 관계 그리고 민주정에 대한 그의 비판들만을, 즉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 제비뽑기에 근거한 선거 체계에 대한 반대만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여러 정치적 동기들은 소크라테스에게 향한 재판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시인 멜레토스(Mélétos, Μέλητος)가 소크라테스를 향한 불평에는 [상인이며] 정치가가인 아뉘토스(Anytos, Ἄνυτος)와 수사학자 뤼콘(Lycon, Λύκον)이 연서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공개적으로 고발했던 것, 그것은 젊은이를 타락시킨다는 것과 도시의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성들(les nouvelles dinvinités)을 그 자리에 도입하면서 경건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선언적으로 드러난 첫째 기소이유는 비판적 교육에 대한 젊은이의 행동에 연관되어 있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반전통적 특성을 매우 잘 부각시킬 것이다. 둘째 기소이유는 사람들이 플라톤이 이에 대해 말한 것을 믿는다면, 특히 소크라테스가 이 선언을 한 것을 표적으로 삼았다. 즉 그는 자신 속에 신성을, 즉 다이몬(un démon, δαίμων) 지니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의 목소리는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것으로, 그것은 어떤 예언적인 기호(signe divinatoire)에 의해서 그 자신이 잘못행해지게 되는 것으로부터 그를 항상 우회하게 했던 목소리이다. 이 영감들은 항상 부정적이었으며, 게다가 도덕성이 어떠한 편을 들지 않고 있는 여러 현실화 행동들(des actes)에 적용될 수 있는데, [그 예들로서] 델리온 전투에서 퇴각하는 동안에 따라가지 않은 길, 결코 건너지 않았던 작은 시냇물, 등이다. 그가 이 내적 계시[폭로]의 특권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속할 수 있는 지를 생각했는가? 적어도 스스로에게 이 자격을 부여하면서, 소크라테스는 화를 잘내는(ombrageux) 민주정치가들을 불안하게 하는데도, 그리고 우리들 각각이 각자의 다이몬의 도움으로 각자 영혼의 안녕을 만드는 기술자이라는 생각(사상)에서 그 스스로 확신하는데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충분히 그렇게 실행했다]. 예를 들어 불의로 오염된 것으로부터 자기 영혼을 구출하기 위하여, 그는 도시의 법률들의 이름으로 선고되었던 형벌을 피해서 도망가는 것을 크리톤에게 거절했다. 그에게 하나의 몽상(un songe)이 자신의 다음 죽음을 예견하게 했는데, 그가 온신(le Dieu)의 질서들에서 빠져나가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소크라테스가 연약한 다수들에게 혐의 있음을 인정했고, 심판관들을 신경질 나게 했는지를 안다. 심판관들의 판단은 첫째 선고를 조롱(une dérision)하는 것같이 보였던 그의 태도 때문이었으며, 그 결과로 많은 투표수가 사형으로 선언되었다. 이 마지막 날의 놀라운 이야기는 파이돈편에서 [참석한 사람들의] 모든 기억들에 나타난다. 사람들이 여기서 이에 대해 유보할 것, 그것은 플라톤이 그 철학자의 부인인 크산티페(Xanthippe, Ξανθίππη)를 간단하게 묘사한 단지 그 초상화이다. 여기서 그녀는 그 현자의 인내로서 참을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런 증거들 중의 하나로 표상되었다. 플라톤의 크산티페는 자기 남편의 죽음에 대해 위안 받을 수 없은 한 여인이었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에 의해 그녀를 데려가게 했다면, 그것은 올라오는 고통을 짜증나기 않게 하기 위해서였고, 자기 자신의 평온함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른 한편으로 파이돈편에서 죽어가는 그 소크라테스는 초인이 아니며, 이러한 것은 나중에 퀴니코스학파의 현자로서 나타날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식들을 아들들을 다시 보기를 원했고 또는 자기 친척들과 대화했다. 그는 자기와 연결된 자연적 애착물들을 거부하지 않았다. 바로 그러한 애착 정도에서 그것들은 보다 고상한 의무들과 양립가능하였다. 플라톤이 말하기를 그 당시 그는 살아온 나이가 일흔 살이었다. 그해는 기원전 399년 아마도 2월 또는 3월 이며 5월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은, 플라톤의 그 소크라테스는 외적 형식과 진실한 자연(la nature 본성)의 깊이(심층) 사이에서 어떤 대립의 주제에 관해서 구축된 상징적 관념화 작업의 표시들을 지녔다. 이 대립은 플라톤이 자주 말한 낯섬(l'étrangeté, ἀτοπία, 이방)을, 즉 소크라테스가 자신에 접근하는 자들에게 주었던 황당한 인상을 설명해 준다. 바깥에서(Au dehors), 그는 일상적 인간의 모든 현실적 행동을 완수했으며, 그리고 다이모니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황홀경들(des extases)에 빠지는 강도있는 내적 삶을 살았는데, 그러한 것은 그 당시에 주변 환경 조건들과 자연(본성)의 요구들과는 낯선 것이었다(심포지온, 174d, 175a, 220c,d.). 그는 가난하게 살았다. 비록 그가 가난하지 않았다 하더라고 조잡한 외투(un manteau, τρίβων)를 걸치고서, 우아하고 부유한 사교계에 출입했다. 그의 검소함(la sobriété)은 이전에는 전혀 듣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게다가 그는 뻔뻔스런 음주가도 아니었다. 그의 담론은 세속적이고 하찮은 비교들로 가득 찬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감동적인 유창함으로 점점 올라가게 되면, 그는 가슴들을 움직이는 어떤 인물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있었다. 보다 정숙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더 많은 사랑들과 더 많은 강압들을 갖는 어떤 인격도 아니었다. 그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공언했으며, 학문을 지녔다고 공언하는 자들에게 그들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고백하게 강요했다. 바다의 전기가오리 같은 그러한 짓으로, 그는 그 자신이 만났던 자들을 마비되게 했으면 동시에 이들에게 진리(메논, 80a)를 각성하게 했다. 평평한 앞면 얼굴, 들창코, 두툼한 입술, 머리에 붙은 것 같으면서 옆으로 쳐다보는 황소 같은 눈, 이것은 세일레노스(Silène, Σειληνός)의 것과 닮았으며, 그러나 그것은 상자의 덮개일 뿐이다. 그 속에(au dedans) 가장 순수하고 가장 빛나는 아름다움이 충만해 있다. 모든 특징적 표시들 가운데서 그는 아마도 실재성에 응답하는 어떤 특징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특징들이 그 인물에게 보다 정력적인 표현을 부여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에는 이러한 집합들에서 소크라테스의 초상화는 플라톤이 철학자, 영혼, 사랑 등에 대해 만들었던 개념화 작업을 번역한 것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매개적인 존재들로서 철학자, 영혼, 사랑 등에서는 지성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의 대립이 특히 조화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관념론이 배제된 크세노폰의 증언은, 그의 회고록, 향연, 소크라테스의 논변, 경제 등에서, 사람들이 자주 말했듯이, 역사적으로 보다 진실한가? 아마도 그 소크라테스는 그가 우리에게 보다 인간적으로 부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간성은 매우 평범하고 단조로워서, 그의 영향의 심도, 그의 열정의 과도함과 그가 자극했던 적대성의 과함 등은 그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이외에도, 사실들에 대한 역사가로서 증인의 조심스러운 주석 작업들이긴 커녕, 회고록은 분명하게 소설적 구성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 작품의 작가에 대한 인격성, 취향들, 추억들이 강하게 강조되었다. 즉 [크세노폰은] 뒤틀린 신앙심을 가진 자이며 쩨쩨한 공리주의자로서, 그 쓰여진 글 속에서만 전개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소위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주장들로 부풀려져 있으며, 결국 그는 전원의 대농장 소유자이며, 말들과 개들의 애호가이다. 이것과 짝을 이루는 퀴로스의 교육(Cyropédie, Κύρου Παιδείας)이 있다. 그는 또한 저 속[회고록]에서 진실한 소크라테스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속에서는 진실한 퀴로스(Cyrus le Jeune, Κῦρος, 전424- 전401)를 찾는 몽상가(chimérique)일 것이다. 게다가 크세노폰은 이 젊은 퀴로스의 원정에 가담하기 위하여 소크라테스 재판 2년 전에 아테네를 떠났다. 그는 일만병사들(Les Dix-Mille)의 퇴폐 이후에 아테네로 되돌아가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는 기원전 369년까지 30년간 추방이란 법령 선고에 의해 아테네로부터 분명하게 멀어졌던 것이다. 그는 기원전 387년까지는 스파르타 또는 아시아에서 여전히 살고 있었고,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 2세(Agésilas II, Ἀγησίλαος, 전444-360)의 원정에 참여했다. 따라서 이 모든 점에 비추어보아, 그의 추억들조절하는 것과 자기 정보들을 활용하는 것에는 플라톤 약간 모자라는 상태에 있었고, 소위말해서 소크라테스 서클의 활동하지 못했던 만큼이나 더욱 불충분하였다. 결국 소크라테스를 알키비아데스의 나쁜 정령으로 만들었던 수사학자이며 전 388년경에 활동한 폴뤼크라테스(Polycrate, Πολυκράτης, 전4세기경)의 고발들에서 암시를 강조하지 않더라도 또한 이 후자의 두 책에서 훨씬 더 나중에 구성된 것으로 지적한 것에 관해 강조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회고록에서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들로부터 또한 아마도 안티스테네스의 것들로부터 가져온 편집의 표시들을 인정해야만 했을 것 같다. 이러한 것 덕분에, 결국 크세노폰은 그 인물에 관해서 약간의 철학을 덧칠하여 장식하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일대기의 정보에서 조차, 크세노파네스의 증언은 플라톤의 것보다 못하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자주 그에게 동의했던 특권적인 신임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은, 누군가가 그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했던 것이고 할지라도, 핵심적인 중요성과는 반대이다. 틀림없이 그 증언은 무매개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소크라테스가 죽은 지 이미 32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제자가 증인들을 탐문하고 글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비판적 호기심을 만족할 만한 수단들을 현장에서 찾을 수 있기에는 시간의 경과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에 비추어서, 명시적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소크라테스에 대해 자주 말했던 것, 그것은 그것과 다른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이와는 아주 반대로, 그는 소크라테스적 이야기들(une composition socratique, λόγος σωκρατικός)이 드라마적인 작품, 즉 철학적 풍자희극(un mime philosophique) 이라는 것을 아주 알았다. 여기서 허구가 실재성과 뒤섞여 있다. 게다가 그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 또는 플라톤 자신과 진실한 소크라테스를 구별하는데 가장 조심스럽게 적용했다. 그가 보기에, 진실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연구를 자연에 향해서가 아니라 도덕적 사정들을 향하여 옮기게 했고, 그리고 도덕적 사정들의 주제에서 첫째 주제를 그는 끈기있게 방법을 가지고 보편적으로 정의하고자(définir universallement) 애썼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추론의 출발점인 그리고 과학(학문)의 출발점인 한에서 본질(l'esssence, τό τί ἐστιν [the what it is])를 찾으려했을 것이다. 이 학문은 보편적 정의(la définition universelle)에 그리고 귀납적 담론들(les discours inductifs, ἐπακτικοὶ λόγοι 귀납적 논리들)에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의 장점을 정당하게 보고할 수 있을 두 가지 사항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정의들을 가지고 분리된 사물들(des choses séparées)로 만들지 않았는데 비해, 플라톤은 이것들을 이데아들(les Idées)이란 이름 아래다가 감각적 사물들을 따로(à part) 놓았다. 둘째 학설은 첫째 학설로부터 나온다. 개념들의 논리적 탐구의 수단에 의해서, 달리 말하면 소위 소크라테스적 사변의 수단을 통해서, 이데아들의 철학이 무대 위에 도입되었다(a été introduite sur la scène)는 것이다. 만일 이 학설이 생산되었다면,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그에서 자극을 주었기(a donné la branle, [충격])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학설의 용어들로 다른 학설들을 소개하는 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향이 있을 수 있을 지라도, 그래도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학설들에서 그렇게 했던 대로 소크라테스에 속하는 플라톤을 다시 읽으면서 이 두 철학자들을 서로 서로 분명하게 구별해냈으며, 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고유한 철학은 특히 도덕적이라 할지라도 탐구의 일반적 방식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말하자면, 한 부류의 증언들, 즉 사람들리 플라톤과 크세노파네스 이 둘과 다른 소크라테스학파들로부터 끄집어 낼 증언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증언들은 결정적인 사실들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소크라테스교육의 정신 자체에 관한 것이다. 그 이외에도 이 증언들은 특별히 미묘한 해석을 요구한다. 따라서 이 증언들에게는 깊이 몰두한 판명한 연구가 있어야 만 한다. 또한 차후에 대치되는 것을 보기 위하여 이제 정보의 다른 출전들로부터 소크라테스의 초기 이미지를 구해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먼저, 시대에 무관한 일종의 천재는 없다. 그 천재는 언제나 자기 시대의 한 인간이며, 시대의 문화를 수용했던 인간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증언은 자연학에 관한한 저 위에서 플라톤의 증언과 일치하며, 이 전승을 거부할 어떠한 이유도 없는데, 이 전승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아르켈라오스(Archélaos de Milet, Ἀρχέλαος, 전5세기경)의 제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것은 그가 자연학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초기 소피스트들의 변증법에서 그리고 그들의 방법들에서 영향을 받았다. 플라톤은 프로디코스(Prodicos de Céos, Πρόδικος, 전 470/460경-399이후)를 소크라테스의 스승들 중의 하나로 만들었는데, 아마도 이것은 전적으로 아이러니한 의미에서는 아닐 것이다. 프로디코스는 모든 소피스트들 주에서 아테네 삶에 가장 잘 어울렸던 자이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가능한다. 의심할바 없지 않지만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들(전423)이 전하는 정신에 보면,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수사학에 대한 교육 했었다. 그의 본질의 탐구와 분석은 특히 방법에 관한한, 소피스트들이 교육했던 방법과는 구별되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아마도, 30인 참주들이 소크라테스에게 근거들의 기술(l'art des raisons)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시켰을 것이라는 것은 한 사람 이상이나 소크라테스 가까이에 탐구하러 왔다는 것이고, 또 크세노폰의 주장이 암시했던 그 무엇(회상록, I, 2, 31이하)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그가 살았던 환경 속에 그를 다시 위치시키면, 소크라테스는, 파르메니데스편에서 그렇게 바랐던 만큼이나 일찍이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은 나이에 독창적인 위치에서 처신하였다. 그가 아낙사고라스의 학설을 거부했다는 것, 그것은 그 학설이 다른 자연학적 학설들과 닮았다는 점에서 이다. 그러나 그 학설은 그것의 성질주의(son qualitivisme)에 의해서 또한 온정신(l'Esprit)의 이론에 의해서 그를 만족시켰다. 그 학설은 사물들 속에 지성적인 그 무엇이, 즉 사물들의 보편적 존재의 근거 또는 사물들의 본질, 자연적인 완전함, 사물들 각각이 향하는 그 무엇의 목적 또는 선함이 있다는 것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플라톤이 아낙사고라스의 철학을 향한 명상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영향을 지적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소크라테스가 다른 학설들을 알지 못했다고 믿기는 어려우며, 테바이(Thèbes, Θῆϐαι)와 플리우스(Phlionte, Φλιούς)의 피타고라스 서클과 관계 또는 메가라의 엘레아 서클과의 관계는 그의 사유가 동일한 방향으로 기울지 않았다고 믿기도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 정의라는 소크라테스적 탐구의 선구자들 가운데 이 피타고라스 학자들에 덧붙여서 데모크리토스(Démocrite d’Abdère, Δημόκριτος전460경-370)도 포함한다. 사정이 어째든 간에, 소크라테스는 자연의 모든 인식조건을 이런 탐구로 행하면서, 자연학의 정신, 다시 말하면 철학의 정신을 완전히 바꾸었다.
자연학을 논리적 분석으로서, 그리고 개념들의 구축으로서 생각하는 소크라테스는 형식적 방법의 우선권, 지성의 일반적 학문의 우선성을 주장했다. 일단 한 번 더 나아가, 소피스트학문(la Sophistique 논증술)에 매우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이 논증술을 가지고 그는 스스로를 제론의 변증법에 결합시켰다. 소피스트들의 자가당착(l'antilogie, 대조법)과 소크라테스적 검토(l'examen)는 반박(la réfutation) 방법의 다양함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상대방을 모순 속에서 당황하게 하는 것, 그 상대방을 이처럼 그의 첫 명제를 반명제로 던지는 것, 새로운 모순들에 의하여 이 반명제도 그자체로 유지할 수 없다고 인정하도록 그를 이끌기 위하여, 결국 그를 완전히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로타고라스편에서 볼수 있듯이 한편의 절차와 다른 편의 절차가 서로 닮을 수 있을 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유사점은 외적일 뿐이다. 여기서 또한 혁명이 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이 행했던 것과는 아주 다르게 형식적 방법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소피스트들에게 그 방법의 초기 생각을 빌려왔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먼저, 소피스트들의 방법은 박학다식이다. 전통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이 방법은 전통에 대해 전통을 대립시킨다. 형식적일지라도 그 방법은 백과사전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기억술의 방법 덕분이지만 싸구려이다. 의미론적, 문법적, 또는 수사학적인 이 방법은 항상 말뿐이며 반성은 결코 없다. 소크라테스의 방법은 무엇보다도 이와 반대되는 것이다. “지식 부족”(inscience)이란 주장 자체가 박식을 단죄 한다. 결국 그 의식(le conscience)은 전통적 모든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소크라테스에 대항하는 안티스테네스의 중요한 불평은 이것이다. 둘째로 소피스트의 형식주의가 외적 상황들과 더불어 변하는 내용을 받아들이는 데 반해, 소크라테스의 방법은 그 방법이 아주 형식적이라 할지라도, 의식의 내용 그자체로서 영구적인 내용을 지닌다. 그의 방법은 의식으로 향한 영속적인 회귀이다. 즉 너 자신을 알라(connais-toi toi-même). 이런 차이가 다른 차이를 끌어낸다. 소피스트의 방법은 자가당착(l'antilogie, 대조법)의 훈련에 의해 우연적인 상황들에 개인적인 적응을 제안하는 것인데 반해, 소크라테스는 개인적 의식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모든 개인적인 것과 모든 우연적인 것을 쓸어내는 것이다. 그는 거기서부터 보편적인 것과 영구적인 것을 추려내었다. 그것은 같은 것(homologie), 즉 정신들의 일치, 간단히 말하면 지성적인 것이 이루어지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옛 자연학에 관하여 자기 성찰에 의해 정의된 대상이며, 즉 사물들의 본질 또는 사물들의 선(善)이다. 스스로를 인식하기 위하여 자기에 관해 반성하는 것, 그것은 사실상 자기 속에서 인간의 본질 또는 인간의 선(善)을 발견하기 위하여 노력을 행하는 것이다. - 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것처럼 어떻게 방법의 필연적 대상이 도덕적이 사정들에 제한되게 되는가 보자. 그러나 즉자적으로 이 대상은 바로 본질, 즉 이 뭣꼬(le τί ἐστι)이다. 이렇게 말하고서, 소크라테스적 방법의 세부사항을 더욱 강조한다는 것은 잉여일 뿐이다. 공통[일반]의 탐구, 대화, 사랑 등은 사람들이 보았던 대로 이 방법의 조건들이다. 검토의 절차와 개별적인 경험들로부터 보편적[일반적] 개념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귀납법의 절차에 그것들과 다른 절차들을 보태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검토하는 주제의 정확한 규정작업, 즉 귀납법이 출발하는 가설(l'hypothésis)[토대(le fondement, ὑπόθεσις)]의 정확한 규정작업이다. 그러고 나서 반어법(l'ironie)[εἰρωνεία]에 의해서인데, 이것은 우리가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치미 떼는(la dissimulation, εἰρωνεία) 빈정거리는 형식이며, 이 형식은 무지를 가장하여 질문을 던지는데 있으며, 총체적인 “지식 부족”(inscience)의 단순한 적용이며, 아마도 결국에는 산파술(la maïeutique)[μαιευτικὴ], 즉 영혼의 출산인데, 이 용어가 테아이테토스편에서 플라톤의 발명품이라 하더라도, 한 상징(un symbole)인데, 이 상징의 원리는 그에게 어머니 파이나레테(Phénarète, Φαιναρέτη)의 직업에서 제공된 것이다.
만일 인간들의 선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사람들은 주지주의자의 공리주의와 소크라테스의 행복주의가 그것에 있다는 것을 본다. 이어서 한 인간이 자기가 선하다는 그 선을 인식하는 그 인간이 정념의 제국 하에서 자기의 선과 반대되는 것을 원할 수 있는가? 그 정념에 사로잡힌 자, 악을 빠진 자는 자기의 선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들이며 이 인간들은 그들 자신속에 인간의 본질을 분간해내지 못하는 자들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의사[의지]로서 나쁜 자는 없다(nul n'est mechant de son plein gré). 역으로, 덕성들(탁월함들)이 학문들[지혜]이다(les vertue sont des sciences), 안다는 것은 행하는 것이다. 이 도덕적 논리주의는 실천적 결과들이다. 만인 도덕적 반성의 목적(objet)이 본질적 인간을 분간해 내는 것이라면, 적어도 감각적이고 우연적인 주변의 모든 것을 분리하여, 하부적인[종속적인] 도식에서 놓는 것이며, 보다 높은 어떤 목적(la fin)이 그것[본질적 인간]을 요구하자마자 그것[주변의 모든 것]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로부터 금욕주의가 나온다. 그것은 퓌타고라스 학파의 금욕주의를 상기시키며, 또한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파네스의 초상화와 플라톤의 초상화에서 소개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후자에게서는 주목할만한 복잡한 형식을 덧 씌워놓았다. 그런데 본질적 인간이란, 그것은 온현자(le Sage), 인류의 이상(理想), 소크라테스 학파들 이어간 아리스토텔레스후기 학파들이 자들 실현화의 본성과 조건들을 제안하게 될 그 인류의 이상(l'idéal d'humanité)이다.
요약하면, 사람들은 데카르트적 혁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소크라테스의 혁명을 합법적으로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도 다른 한편으로도 연속성이 부서지지 않았고, 급진적 단절도 자발적 창조도 없으며, [단지] 조건들에 반대하는 맹렬한 개인적 반동이 있었다. 그 조건들의 한 가운데에서 지적인 토대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유의 현존하는 형식들에 대해 인격적인 개조(l'appropriation 자기 것으로 만들기, 전유)가 이루어졌다. 소크라테스는 옛 자연학과 논증술 그 자체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소피스트적 방법을 이용했다. 이렇게 이해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업은 근본적인 쇄신(le renouvellement radical)이며, 사유의 한 새로운 세계를 연 창조이다. (47TKI)
제3장 소크라테스 정신의 전파(Le rayonnement de l'esprit socratique) 194-209
소크라테스 안에서 새로운 삶의 표본을, 그리고 그 외에도 철학적 반성의 새로운 방향을 발견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친구인 아이스키네스(Eschine, Αἰσχίνης, 5세기경)를 제외하고 모두가 스승이 살아있을 때 또는 스승의 사후에, 이들이 이미 지도하고 있었던 학교에서나 새로운 학교에서, 소크라테스의 영감으로부터 요구되었던 삶의 규칙과 학설을 가르쳤다. 예외 없이 이들 모두는 자유롭게 소크라테스적 구성물들(compositions socratiques)을 썼는데, 여기서 그들은 그들의 스승의 입에다가 그의 사상에 대한 그들의 개인적 해석을 보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낯선[이상한] 위계질서가 확립되었다. 그 위계 질서에서 플라톤이 선두이고 다른 모든 이들은 작은 소크라테스학파들이다. 이것이 공정한가? 그 학교의 장소, 그 학교가 가르칠 준비가 된 다양한 교육들, 물질적 재원들, 정치적 상황들은, 그 창설자자의 개인적 가치를 젖혀두더라도, 그의 행운의 요소들이다. 게다가 플라톤과 다른 제자들 사이에는 역사가들의 판단에서 공동적인 척도가 없다. 전자는 전집을 남겼는데 비해, 후자들은 매우 드물고 빈약한 단편들로, 추측들의 흔적들로 남아 있거나, 그리고 편파적인 동시대의 증언이 있는데 그것들의 증명확인이 항상 불확실한 경우가 있고, 또 다른 증언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계승자들에 의해서만 나타나고 있다. 역사가의 판단을 위한 공통적 척도는 없다. 특히 이 필연성을 주목하자. 즉 이들 경향성의 조잡한 생각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이들 계승자들에서 그 생각의 굴절을 따르고, 결과적으로 [기원전] 3세기 중간에까지 심지어는 그 너머까지, 그리고 이들의 학파들이 보다 강력한 학파에 의해 흡수되는 시기까지 이 연구의 역사적 틀을 확장할 필요성이 있다. 결국 사람들은 순환논증에 빠지지 않고서는 이 인간들을 더 이상 중간-소크라테스학파들(demi-Socratiques)라고 부를 수 없다. 소크라테스 사상의 진리는 질문 중에 있는 것이고, 사람들은 플라톤만이 순수하고 전체적인 소크라테스주의를 대표한다고 선가정할 수 있으리라.
1. 엘리스 학파와 에레트리 학파 Ecole d'Elis et d'Erétrie, 195 [Phédon et Ménédème]
엘리스의 파이돈(Phédon d'Élis, Φαίδων)은 아마도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아주 젊은이는 아닌 것 같다. 소크라테스 서클의 해체 이후에, 그는 자기 조국으로 돌아가서, 자기 주변에 몇몇 제자들을 모았다. 스승의 학설에 대한 그의 해석은 추측적일 수 있으며 더 이상은 아닐 것이다. 에우클레이데스와 메가라학파들에 가까웠던 티몬(Timon de Phlionte, Τίμων, 전320경–전230경)에 따르면 그리고 에레트리 학파의 계보에 따르면, 그의 학문적 친근성은 이 후자(에레트리 학파)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증된다. 에레트리의 메네데모스(Ménédème d'Érétrie, Μενέδημος, 전350경–전277경)는 전3세기 삼십년 경에 죽었는데, 그와 그의 친구 아스클레피아데스(Asclépiade, Ἀσκληπιάδης, 전350경–전270경)는 사실상 메가라의 스틸폰(Stilpon, Στίλπων, 전360경-전280이후)의 제자이었다가, 그리고 이어서 엘리에서 파이돈의 계승자가 되었다. 메네데모스에게서, 두렵게하는 변증법, 즉 극단적으로 논리적 미묘함은 도덕적 문화 소양의 수단들이 되었던 것 같다. 적어도 그의 성격상 독립적인 고상함과 그의 삶의 존엄성은 당대에 개인적 큰 권위를 그에 부여하면서, 퀴니코스학파와 같은 돌연한 난폭성이 없는 그를 큰현자(le Sage)로서 탁월한 모범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는 소크라테스의 한 이미지로 되기로 스스로 작정 했던 것 같다. 그는 그 모범으로 그리고 그 말투로만 행하기를 바랐으며, 그의 교육에서 위엄 있는 장치도 갖추지 않았다. 듣고자 원하는 청강자, 그가 원하는 시간에. (47TKJ)
2. 메가라 학파 L‘école de Mégare 196
메가라 학파의 우두머리인 에우클레이데스(Euclide de Mégare, Εὐκλείδης, 전450경-전366경)의 학설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는 초기에 엘레아주의의 원리들에 집착했다는데, 그러한 것은 의심스럽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입었다는 것도 또한 의심스럽지 않다. 이 점에 관하여, 테아이테토스편 시작부분에 나오는 플라톤의 증언은 모호하지 않다. 다른 한편 만일 에우클레이데스가 소크라테스 그룹에 속하지 않았더라도, 스승의 죽음 이후에 도시를 떠났던 아테네 제자들이 그에게 가서 은신하려고 했을 것인가? 적어도 이 사실은 그가 학교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사람들이 그가 말한 것으로 여기는 온선(le Bien)은 하나이며, 덕성도 하나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들을 다른 이름들로 지칭하는데, 때로는 신중(prudence, φρόνησις)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사유(pensée, νοῦς)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신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다른 유사한 이름들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온선은 유일하며 비변질(immuable)이다. 이것 밖에는 실재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유일한 본질, 즉 온선의 본질만 있단 말인가? 그러면 에우클레이데스는 순수한 엘레아학자이며, 사람들이 적어도 그러한 그를 일반적으로 메가라학자들 중의 하나라고 말하듯이, 그에게 있어서 온존재(l'Etre)가 온선일 것이라고, 즉 도덕적 질서의 실재성일 것이라고 하는 점에서만은 오직 소크라테스에 속한다. 그러나 학파의 차후의 학설들을 고려해 본다면, 유일한 온선은 각 본질의 존재이며, 이와 같이 이것은 그자체로 하나이고 비변질이고 독립적이며, 비존재라는 방식으로 완전히 “다른” 것(l'‘autre’)을 배제하며, 결국에는 사유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을 뿐이다. 온선의 단위(l‘unite, 통일성)는 본질들의 다수성(la pluralité)와 양립할 수 없듯이, 온존재의 단위는 원자들의 다수성들과 양립할 수 없다. 엘레아의 온존재에 대한 유물론적 주조작업(monnayage)으로써 원자론에게[실천적 원자론에게], 논리적 원자론은 반명제를 그리고 짝퉁을 만들어갈 것이다. 이것은, 최근의 비평가들이 이에 대해 무엇을 말했을지라도, 엘레아적인 소크라테스학파들의 분할하는(쪼개는) 변증법에 반대로 일 것이다. 엘레아적 소크라테스학자들은 유물론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이데아들의 친구들(ces amis des Idées)이며, [그리고] 플라톤은 친애가 허용하는 신중함(des ménagements)을 이용하면서 소피스트(246b, 248a: 참조 252a)편에서 온타자(l'Autre)와 온비존재(le Non-être)의 실재성과 더불어 판단 속에서 본질들의 관계의 합법성을 옹호했다. 또 그것은 파르메니데스편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들에 대항하는 파르메니데스의 반대들에, 다시 말하면 에우클레이데스의 반대들에 대꾸일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에우클레이데스는 표본들 위에 근거하는 소크라테스의 귀납적 변증법을 거부했다. 그것은 반대자의 [삼단논법 등의] 전건들이 아니며, 그것은 공격을 필요로 하는 결론들이다. 따라서 그는 불합리로 귀착하는 길(에 의해 제논(Zénon Ζήνων, 전480[490]-420경)의 방식으로 틀림없이 논증했다. 사람들은 제논의 방식을 특히 그의 둘째 계승자이며, 아리스토텔레스에 맹렬한 반대자인 에우불리데스(Eubulide, Εὑϐουλίδης, 4세기경)에게, 그리고 스토아학파의 제논(Zenon, Ζήνων, 전335-264)의 반대자인 알렉시노스(Alexinos, Ἀλεξῖνος, 전339-265)에게 연관 지을지라도, 에우클레이데스는 그의 학당에서 난처한 인기(상황)를 만회하는 데 이 변증법을 아마도 실행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가라 학자들의 소위 말하는 궤변론들(les sophismes)[역설론]은 그것들의 주제의 두 부분들이 서로 불합리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웃음거리 방식들 이었을 것이다. 이들 중에서 몇몇, 너울쓴 자(le voilé), 거짓말쟁이(le menteur), 엘렉트라(l'Electre)[Ἠλέκτρα], 뿔 달린자(le cornu) 등은 견본들이며, 이들은 상식적 인식이 거짓 보편성 속에서 분명한 개념들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분명하게 구별된 개념들이란 다시 말하면 각각이 그것들의 개별성을 갖는 본질들, 그것의 각각이 애매함이 없는 본질들을 말한다. 만일 예를 들어 너가 진실로 거짓말을 한다면, 너는 진실을 말하면서도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 [이것은 거짓말쟁이 역설, 에피메니데스 역설이다], 다른 몇몇 중에서 전형적인 것은 더미(le tas, sõros)이며, 이것은 공통(상식) 인식이 임의적으로 용어들 사이에서, 많다와 적다와 같이, 구별하는 것을 반대로 제시하는데 있다. 이 구별할 수 없음은 생성의 연속성 속에서 이 양자에게 자리를 주려고 하자마자 그것과 반대로 나타난다. 이것은 둘 사이에 개입할 수 있는 매개적인 무한한 수 때문이다. 당신들이 말하기를 밀 한 알은 밀의 한 더미의 반대이며, 두 알과 세 알도 더미를 이루지 못한다. 따라서 더미는 언제 시작하는가? 선택된 수가 어떤 것이든 간에, 더미가 시작하는데 곡식알 하나 만을 덧 보태기하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 [몇째 다음에 한알 보태면 더미가 되는가?] 보태기 대신에, 반대 추론을 하면서 빼기를 대체해 보라. 그러면 그것은 대머리(le chauve) 파라독스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스토아학파의 독단에 반대하는 논쟁에서 네오 아카데미학자들에게 많이 사용되었던 논증의 본질적 형식이다. 이 논증에서 인용된 첫째 예가 연쇄추리(sorite)의 이름을 받을 만하다.
옛 사람들 중에서 변증법의 왕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젊은 동시대인으로 유명한 디오도로스(Diodore Cronos, Διόδωρος Χρόνος, ?-전296경)인데 그는 크로노스(Cronos)라는 수수께끼 같은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에우불리데스의 제자이며 그의 스승인 퀴레네 출신 아폴로니오스(Apollonios de Cyrène, Ἀπολλώνιος, 기원전 4세기경)에 의해 붙여졌다. 디오도로스의 모든 논증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여러 번 표적이 되었으며, 그 논증들의 깊이는 아마도 그에 앞서서 그 학파에 속한 것이었고, 그리고 그 논증들은 경험적 인식의 불가지성을 증명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저러한 운동들은 없으며, 단지 운동체의 위치들에 의해 표시된 운동의 한계(경계)들 만이 있다. 생성은 없으며, 단지 현실적 상태들 만이 있다. 가능한 것은 없으며, 단지 이미 실현된 것 만이, 또는 필연적으로 그렇게 있어야하는 것 만이 있다. 그 유명한 승자(triomphateur, ὁ κυριεύων) 논증은 가능한 것의 공통개념이 어떤 불합리성으로 이끌어지는 지를 제시했다. 각 본질은 자기 본성의 필연성 속에 모든 자신의 미래를 가두고 있고, 이 미래는 실재로는 단지 자신의 영원한 현재일 뿐이다. 이 미래는 우연도 아니며, 외적 조건들에 복종도 아니다. 왜냐하면, 능독적 조건과 수동적 조건은 동일한 필연성의 두 측면일 뿐이다. 디오도로스의 제자인 필론(Philon de Mégare, Φίλων 기원전 4세기 후반)은 이 학설을 완화시켰다. 그러나 디오도로스의 완고한 필연론(le nécessitarisme)에서는 아마도(peut-être)도 없고, 만일(si)도 없다. 그것은 수확하는 자(le Moissonneur) 논증이 말했던 것이다. 즉 당신이 수확하거나 또는 수확하지 않거나 숙명(fata)이다. 무엇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자 또는 후자 일 수 없다. 게으름뱅이 논증(L'argument paresseux, ἀργος λόγος)은, 그의 재난이 나중에 매우 거대해 질 것이라면, 이미 완전히 거기에 있다. 간단히 말하면, 실재적인 것은 모순율의 논리적 필연성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경험적 개별성은 그의 비결정적인 능력과 그의 발전과 함께 있어서 다수의 본질들에게 자리를 내준다. 그 본질들의 각각은 충만하고 닫혀진 우주이다. 이 우주는 모든 영원성으로부터 각각이 존재해야 할 그 모든 것이다.
메가라 학자들의 이 본질들은 플라톤주의의 이데아들과 같은 류적인 것들이 아니다. 이것은 적지 아니 유명한 다른 변증론자로부터 벗어난 유명론이 이해했던 것이다. 다른 변증론자란 메가라학파의 스틸폰(Stilpon, Στίλπων, 전360경-전280이후)을 말하며, 그의 제자로서 메네데모스,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제논, 회의주의자 티몬 등이 있다. 스틸폰에게 있어서, 공통명사들이 없으며, 본질로부터 나눌수 없는 각각의 직관은 어떤 파생적인 기호(signe dénominatif)로 가장(假裝)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본질로부터 나온 논리적 각 계기는 본질과 더불어 독립적이라면, 현자의 자유, 즉 현자의 동요없음, 현자의 무감동 등은 보장된다. 현자의 본질 밖에 모든 것은 순수 비존재이며, 이것은 어째거나 본질에 작용을 미칠 수 없다. (47TLE)
3. 퀴니코스 학파 L'école cynique 199
스틸폰에게서 도덕적 목적들을 위하여 논리적 사색의 이용은 퀴니코스학자들에서 마찬가지의 특성을 지닌다. 퀴니코스학자들이 메가라학자들과 닮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자주 그렇게 말한 것보다 더 많다. 반대로 이 새로운 학파가 더 분명하게 선언한 것, 논증술(la Sophistique)을 소크라테스주의의 정신에 적용한 것이다. 이 학파의 창시자인 안테스테네스(Antisthène, Ἀντισθένης, 전444-365)는 한 아테네인과 트라키아의 여자 노예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며, 아마도 플라톤보다는 약간 더 나이가 많았고, 이런 이유로 그는 소피스트들의 환경에 속했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소크라테스의 서클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고르기아스의 제자였기도 하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에, 그는 퀴노사르게스(le Cynosarge, Κυνόσαργες)(le chien agile)의 광장의 한 체육관에서 학교를 열었다. 이로부터 개들(Chiens)[κύων], 또는 귀니코스(Cyniques)(Κυνικοί)라는 이름이 나왔다. 이 이름에서 학파의 분파자들은, 기원의 장소를 상기하게 하면서, 항상 짖는 듯한 그들의 심술궂은 도덕적 경계심을, 그리고, 어느 면에서는 그들의 삶의 동일한 부류를 상징했다. 또한 안티스테네스의 매우 풍부한 문학적 생산물도 나왔다. 시인들에게서 빌려온 주제들에 관해 소피스트들의 방법에 따른 담론들, 고대인들 모두가 매우 감탄했던 소크라테스적인 대화들, 거의 아무 것도 보존되지 않았지만 진본인 것으로 이의제기할 수 없은 생산물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언과 증언을 젖혀두고라도, 초기 퀴니코스학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귀납법에 근거하고 있다. 플라톤의 몇 구절의 해석에서, 사람들은 안티스테네스를 암시하는 것을 그리고 암시들을 통한 경쟁에 대한 표시들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크세노폰에 대해서 말하자면, 사람들이 크세노폰으로부터 그의 영향을 재발견하기를 시도했는데, 이런 이유로 크세노폰은 그를 향연의 인물들 중의 하나로 만들어 놓았다.
안티스테네스의 계승자는 디오게네스(Diogène de Sinope, Διογένης, 전413경–전327경)인데, 그는 그의 괴팍한 성격과 그의 순진한 말들 때문에 유명하다. 그리고 크라테스(Cratès de Thèbes, Κράτης, 전365-전285)가 있는데, 스틸폰과 메네데모스와 동시대인이기도 하고, 퀴니코스학자의 삶을 변호했던 패러디 시들을 쓴 작가인 제논의 스승들 중의 한사람이다. 이 크라테스는 자기 부인인 히파르키아(Hipparchia, Ἱππαρχία)와 처남인 메트로클레스(Métroclès Μητροκλῆς)와 더불어 이 학파의 선전의 특징적 표본이었다. 이 학파는 새로운 가입자들 만들려고 애썼고, 그 전향은 재산에 대해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대해 거부를 표시한다. 게다가 퀴니코스학파의 삶의 엄격성은, 사람들이 디오도로스(Diodore d'Aspendos Διόδωρος, 전380년경 활동)에서 그렇게 보았듯이, 쉽게 피타고라스학파의 규칙에 화해되었다. 기원전 3세기에 이 학파는 매우 번성하였고, 자신의 소피스트의 방향을 점점 더 비난하였다. 비온(Bion de Borysthène, Βίων, 전325경–전250경), 그의 영향이 매우 컷 던 메니포스(Ménippe Μένιππος, 전300경-전260경), 파피루스 때문에 알려지게 된 케르키다스(Cercidas de Mégalopolis, Κερκιδᾰς, 전3세기경), 텔레스(Télès, Τέλης, 전235경 활동) 등은 여러 도시들을 떠돌아 다녔다. 그들은 짧은 외투(un manteau, τρίβων)를 걸치고, 걸승의 지팡이을 짚고, 바랑을 메고 다녔다. 그들은 도시에서 지식의 형식으로도 민중의 언어로도 담론들을 펼쳤다. 그 담론들은 결정적으로 새로운 종류를 고착시켰으며, 그것의 성공은 [나중에] 제국시대에 주장될 것이다. 대화적인 한담 즉 디아트리베(διατριβή)는 허구에 기초하여 청강자들이 언제든지 개입을 하는 방식이다. 말하자면 색체가 매우 풍부한 담론은 교훈적인(édifiante, χρεὶαι) 짧은 역사이야기로, 대비적이고 변호적인 것으로 가득하며, 행동에서 도덕적이며 동시에 철학적 주제들의 분명한 세속화로 가득 차 있다. 비평적인 과시욕은 도덕적 설교가 되었다. 젤러(Eduard Zeller 1814-1908)처럼 사람들이 판단하여 말할 수 있다면, 퀴니코스학자들은 “고대의 프란체스코 걸승들”(les capucins)이며, 이들은 동시에 논증술의 개별적인 특화를 실현하였다. 퀴니코스주의의 소피스트적 스타일은 우리에게 한 인물의 매우 다양한 작업 속에서 드러난다. 그 인물은 피타고라스주의 부흥의 약간 후에, 기원후 1세기 말 경에, 퀴니코스 전통을 다시 이어가는 데, 프루사(Pruse, Προύσα) 출신의 수사학자, 즉 황금 입(Chrysostome, Χρυσόστομος, fr. Bouche d'or)이라는 별명을 지닌 디온(Dion de Pruse, Δίων, 30-116)이다. 만일 그 시대들의 퀴니코스 학자들의 - 즉 세네카의 친구인 데메트리오스(Démétrios le Cynique, Δημήτριος, 1세기경), 오이노마오스(Oenomaüs, Οἱνόμαος, 2세기경), 데모낙스(Démonax, Δημώναξ, 70–170경), 페레그리누스(Pérégrinus, Περεγρῖνος, 약95경–165) 등의 - 인격성과 사상들이 루키아노스(Lucien, Λουκιανός, 120경-180경)의 생생한 지성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면, 그것이 교양있는 공중인이 그들에게 일치할 정도로 주의의 지표가 아니었는가?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설교들과 그들의 약간 약장수 같은 금욕주의는 세기 초에 크리스트교 사상과 생활에 영향이 없지 않았다. 황제 율리아누스(Flavius Claudius Julianus, 331ou332-363)도 자기 시대의 퀴니코스학자들에 반대하여 글을 썼다.
이제 여기에서 초기 퀴니코스학파로 다시 되돌아가기 위하여, 안티스테네스의 논리의 학설이 각 사물의 고유한 본질에 대한 탐구였던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은 보편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안티스테네스가 플라톤의 개념작업에 대한 적대성은 그의 작품 사톤(Sathon, Σάθων)에서 조롱했던 것으로 유명하게 남아있다. 이 책의 제목이 말장난(un calembour)이다. 이 책에서 ‘나는 바로 한 마리 말을 보고 있지’ 말의 성질(마성, 馬性, Caballéité)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 있어서는 메가라학파에서처럼 분할 불가능한 실재성, 따라서 개체적인 실재성, 즉 본질은 고유명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의 특이한(singulier, 단일한)이름에 의해 표현된다. 또한 모든 교육의 시초는 이름들의 연구이다. 이 엄격하고 따라서 과도한 유명론의 귀결로부터, 정의란 일반적 정의의 일상적 의미에서 너무 빨라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투(un bredouillement)일 뿐이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말(un radotage 허튼 소리)일 뿐이다.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모든 것, 그것은 한 사물의 이미지를 다른 사물의 이미지와 비교하면서, 그 사물의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물론, 본질을 파악하는 분할할 수 없는 직관은 경험적 직관일 수 없다. 그 경험적 직관은 반대로 편리를 위하여 사물 속에 부분들을 구별하는 단순 견해(une simple opinion)[doxa]이다. 이것은 시노페의 디오게네스 제자인 모니메(Monime de Syracuse, 전4-3세기)의 헛된 연기(une vaine fumée)이다. 이로부터 속성부여(l'attribution)과 판단은 불가능하다, 이것들이 본질 속에 놓여 있을 것으로 여기는 한에서. 예를 들어 인간(homme)이란 주어는 흰(blanc) 속성과 같이 완전히 구별된 본질이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이고 흰은 흰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존재를 표현하면서, 용어(la notion)는 또한 절대적인 진실한 것이다. 사람들이 본질을 이름 부르기에 그친다면, 가능한 모순도 가능한 오류도 없다는 귀결에 이른다. 그것이 소위 말해서 관계의 체계 속에서 진실인 것을 표현하는 한에서, 관계의 이런 근본적 부정은 곧 바로 지식에 비추어서 보면 가장 충분한 경멸로 이끈다. 사람들은 살기위해 필요로 하는 것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이해한다. 본질에 대한 논리적 고찰을 지식의 부정에 사용하는 그런 실용주의가, 그리고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적 엘레아주의를 통하여 소크라테스를 반영하는 그런 실용주의가, 마치 개념 철학의 괴물과 같은 왜곡으로써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런 역설적 논리학은 도덕적 토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본질의 불가분성과 불변질성으로부터, 완전히 소유될 수 있다는 덕성(탁월함)의 단위와 현자는 결코 벌 줄 수 없다는 무훼손성[무오류성]이 연역된다. 이 논리학은 우리의 보다 안전한 성채인 지성 속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리고 만일 이 논리학이 배워질 수 있다면, 그것은 토론의 충고(une protreptique, 장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실천에 의해서 이다. 그 충고란 플라톤의 것과 같은 효과성없는 변증법적 장려(une exhortation)을 의미한다면, 실천은 우리에게 선의 직관적 통찰(la vision)을 부여한다. 인간의 선, 그것은 이 때문에 인간의 본질에 고유한 것이며, 악은 인간에게 낯선 것이다. 자, 현자들(les Sages)의 행복의 비밀과 현자들의 독립의 비밀이 이것이며, 또한 정신나간 자들(les Insensés)의 비참함의 비밀이며, 그들의 예속의 본질이 이것이다. 전자들만이 그들에게 속해 있는 것과 속해 있지 않는 것을 보았다. 자기 자신과 더불어 사회 속에서 산다는 것 또는 자기와 더불어 자기 자신을 산다는 것, 이것이 철학이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 VI, 6). 덕성의 선함과 악성의 잘못이외에 그 나머지 전체로서 존경, 좋은 명성, 부, 삶 또는 그 반대인 것들은 독사(견해)에 기만당한 정신나간 자들의 눈에만 구별된다. 사실상 이 나머지 모든 것은 무차별적(indifférent)이며, 헛된 연기(une vaine fumée), 현자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은(ἀτυπία) 헛된 전형(τύπος)이다. 최악의 광기, 그것은 감각적 쾌락과 특히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다. 사랑의 치료제, 그것은 금식(le jeûne)와 시간(le temps, 세월)이며, 그러고 나서, 그것들도 충분하지 못하다면, 스스로 목을 조으는 끈이 치료제이다. 안티스테네스가 말하기를 만일 내가 아프로디테를 만난다면, 나는 그녀를 내손으로 질식시킬 것이다. 진실한 환희는 노력(l'effort, πόνος)과 연습(l'exercice, ἄσκησις), 즉 신체적이고 도덕적인 훈련(un traînement)에 있다. 이 훈련에 의해 있으며, 사람들은 정념의 예속과 외적 상황들로부터 해방된다. 또한 퀴니코스학자들은 헤라클레스(Héraclès, Ἡρακλῆς)를 후원자로 삼는다. 그들의 삶은 이 원리들의 적용이다. 그들이 금욕주의(l'ascétisme)에 의해 실현하고자 하는 것, 그것은 본연(자연)의 인간, 다시 말하면 진실한 인간이다. 이것은 또한 디오게네스가 도처에서 찾아다닌 그 인간이다. 또한 그들은 자연(la nature)와 협약(la convention)의 구별을 잘 하였을 것이다. 갖고, 도시, 정치적 권리들, 이 모든 것은 인위적일 뿐이다. 현자는 세계 시민, 즉 코스모폴리테스(κοσμοπολίτης)이다. 마찬가지로 신들은 법칙의 생산물들이다. 반면에서 자연에 따라서 신성(la divinité)은 유일하다. 신화에서 사람들은 도덕적 상징들을 찾을 뿐이다. (47TMC)
제4절 퀴레네 학파 L'école de Cyrène 204
이 마지막 그룹이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비추어서 의존성이 있다는 것은 어렵고도 또한 흥미있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 학파 창설자인 퀴레네의 아리스티포스(Aristippe, Ἀρίστιππος, 전435경-356)는 소크라테스 서클에 가담하기 이전에 직업적인 소피스트를 실행했던 것 같다. 그가 참여했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의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파이돈의 대담자가 놀랐던 것은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날에 불참했다는 자들 중의 한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참은 플라톤 자신의 불참과 마찬가지일 것 같다. 따라서 사람들이 아리스티포스의 도덕론과 연관하여 이 사건에 이어서 상상되었던 불쾌한 설명들을 유지해야할 필요가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시실리의 두 참주들에게 그의 아첨들에 대해 이야기 했던 것은 아마도 그의 태도를 플라톤과 대비하여 놓기로 작정한 터무니없는 이야기(fable, 우화)일 뿐이다. 그녀의 딸 아레테(Arété, Ἀρετή)는 그의 학파의 방향으로 계승했고, 어머니의 교육을 받은자(le Matrodidacte)라는 별명을 지닌, 이 딸의 아들인, 즉 그의 외손자인, 소(小)아리스티포스(Aristippe le Jeune)는 전승에서 전해진 외할아버지의 쾌락 학설을 가르친 첫째 학자일 것이다. 그런데 분명하게도 이 전승을 선호하기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러한 학설을 더 선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독소스(Eudoxe, Εὔδοξος, 전406경-전355경)를 표적으로 삼았고, 늙은 아리스티포스를 지명하지도 않았다. 차후에 학파의 역사는 모호하지 않다. 이 학파는 여러 가지로 갈라진다. [우선] 헤게시아스(Hégésias, dit Peisithanatos, Ἡγησίας, 전 290년경-?)이다. 그에게는 삶의 잘못들에 관한 그의 설교전도가 죽음의 충고자(un Conseiller de mort), 즉 페이시타나토스(πεισιθάνατος)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리고 안니케리스(Anniceris, Ἀννίκερις, 전 300년경 활동)이며, 그는 노(老)아리스티포스의 제자인 안티파트로스(Antipater, Ἀντίπατρος, 전4세기경)라 불리는 퀴레네 학파 철학자에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반면에 테오도로스(Théodore de Cyrène, Θεόδωρος, s.d.)가 있으며, 그는 무신론자이며, 소(小)아리스티포스의 계승자이다. 사실상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가 테오도로스 학자들, 헤게시아스 학자들, 안니케리스 학자들이라고 말했다. 민주 혁명에 의해 퀴레네에서 추방당한, 테오도로스는 자기 조국으로 되돌아가기까지 계속해서 마케도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Ptolémée Ier Sôter, Πτολεμαῖος, 전368/366경-전283) 궁전에 살았으며, 아테네에서는 데메트리오스(Démétrios de Phalère, Δημήτριος, 전360경-전282)와 가깝게 지냈다. 이 세 철학자들은 4세기 말에서 다음 세기 초까지 활동했다.
퀴레네학자들은 퀴니코스학자들처럼 사색적인 순수 지식을 경멸했다. 이 지식은 더낫다와 더 못하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공업적 직업들에 비해 못한 지식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기를 아리스티포스는 이렇게 생각하는 소피스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때문에, “가치들”의 인식에 대해 추상 속에서 사색하는 인식 또는 소위 실재적인 것에 도달하는 인식의 대립은 프로타고라스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보다 더 이상 부합하는 것은 없다. 논리학과 자연학은 윤리학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가치를 지닌다. 윤리학은, 마치 신들과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또는 두려워하지 않거나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를 우리에게 가려쳐 준다. 또 윤리학은 우리의 감화들(nos affections)과 행위들(nos actions)의 연구를 통해서, 말하자면 우리의 인상들과 반작용들을 통해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회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게 한다. 에피쿠로스에서 재발견되는 이 생각들은 단지 후기 퀴레네주의에 만 속하는 것일까? 기원전 4세기말 그 시대에, 에피쿠로스는 아테네에서 교육하기를 시작했다. 모든 인과관계의 상태를 보더라도, [아리스티포가 먼저인지 에피쿠로스가 먼저인지] 우선성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이런 생각들과 관련하여 프로타고라스와 데모크리토스 또는 그들의 제자들의 영향 아래, 퀴레네학자들이 쾌락과 고통이라는 내적 감정보다 진실한 것은 없다고 가르친 것은 여전했다. 이것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이며, 간단히 말해,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나타난 사정들이며, 사정들이 있는 대로의 것은 아니다. 우리는 포위된 도시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밖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내가 지각하는 무엇을 나는 생성한다(devenir). 나는 꿀의 부드러움을 생성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밖에서(hors de moi) 그 부드러움 자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사물의 외적 실재성에 관한 모든 판단은 필연적으로 이의제기 할 수 있으나, 반면에 현상(le phénomène), 즉 주관적 겉모습은 이의제기할 수 없다. 더군다나, 우리는 심지어 그 겉모습이 이러저러한 외적 원인에 의존하는지를 아는가? 개인적이고 우연적인 우리 감화들의 기체(le substratum)만이 공통이름[일반명사]이며, 이 이름에 의해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감화들을 지칭한다. 이 감각적 유명론은 메가라학파와 퀴니코스학파와는 매우 다르다. 적어도 이 주관주의적 이론의 토대는 초기와 중기 퀴레네학설에 속하는 것 같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이것은 아마도 퀴레네 학설에 속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학설이 운동에게 어떤 중요한 위치를 만들어주었는지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편에서 매우 논쟁거리가 된 단편들에 연관시키려 했을 것이고, 이것은 그 대화편의 보다 높은 문제의식이었으며, 프로타고라스 그 자신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도덕론이 서있는 것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이다. 이 때문에 개인적 주관적 인상은 우리의 목적 가치의 기준이며, 우리 행위의 규칙의 기준이다. 그런데 이런 감화(cette affection, πάθος 정념, 감정)가 운동이다. 그 운동이 부드러우면, 인상은 마음에 들고(agréable), 이 운동이 거칠거나 맹렬하면, 마음에 들지 않고, 이것이 너무 미약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낀다. 따라서 운동은 테아이테토스편의 진술처럼, 현상의 이면이며, 그것의 감각은 내부이다. 적어도 최고선은 이 쾌락 안에서만 거주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쾌락은 다른 모든 가치들 가각의 척도이다. 따라서 쾌락으로부터 나에게 제공되지 않는 것은 선도 악도 아니며 그것은 무차별적(indifférente) 사물이다. 이 무차별적 사물을 고려하여, 나는 잠 속에 또는 죽음 속에처럼 있다. 이러한 귀결로서 쾌락의 대상, 예를 들어 재산(富, 부) 또는 값 비싼 것은 쾌락의 외적인 기회일 뿐이고, 그 자체로서는 무차별적인 사물이다. 합의(la convention)와 편견이 대상들 사이에서 구별들을 하는 것이고, 대상들에게 한계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 한계들 중의 어느 것도 자연에 의해 인정된 것은 아니다. 아리스티포스가 말하기를 재산이라는 것은 구두와 닮지 않아서, 그것을 사용할 수 없는 경우는 그것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모든 것은 그 만큼 선하고 또 사람들이 그것을 오랫동안 그리고 널리 향유하는 만큼이나 그것을 향유하기 때문에 행해진다. 거짓된 치욕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무권위적인 개인주의의 특별나게 자유로운 표현들이었다. 이 표현들은 뻔뻔스런 과감함으로 자기 명성을 얻은 테오도로스에게 가치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 쾌락은 일반적인 어떤 것일 수 있다. 즉 쾌락은 개인적인 것이고, 사람들이 그것을 체험하는 한 순간에 제한되어 있다. 어제의 쾌락, 아제의 쾌락은 실제적인 것이 전혀 아니다. 즉 더 이상 있지 않거나 아직 있지 않은 운동이다. 그 현재(이제)에 집중하는 현자는, 향유가 올 때 그리고 오는 대로 그 향유를 얻는다. 바로 여기에, 항상 자기의 능력 안에 있는 무엇이 있다. 향유의 객관적인 조건들에 관하여, 이 조건들은 자기(운동) 밖에 있으며, 자기(운동)와 연관 없이 있다. 이것들을 고려해본 이 독립성은 운동의 자유를 만든다. 아리스티포스는 말하기를, 나는 아름다운 라이스(Laïs de Corinthe, Λαίς, 전5세기경)와 관계들에 대하여 소유하고 있으나, 나는 소유되지 않는다고 한다. 무엇에 정열적으로 잘 빠져드는가? 사람들은 이렇게 부드러운 운동을 격렬한 운동으로 따라서 고통스런 운동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다. 현자는 항상 상활들의 높이에서 있으면서, 이 상황들을 지배하기를 힘쓰며, 이 상황들에 지배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는 누더기 옷으로도 [추기경의] 적갈색 옷 만큼이나 안락했다. 그는 가끔 권력있는 자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했다고 할지라도 그는 또한 사람들이 테오도로스로부터 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처럼, 어떤 기회에서는 권력자들에 용감하게 맞섰다. 밖에서 보거나, 사회적 편견들 또는 상상적 구별들에 관련해서 보면, 그의 품행은 추문 또는 모순일 수 있었다. 내부적으로 그는 항상 자기와 동일하고 자연과 일치를 이루었다. 간단히 말하면, 허세를 부리는 그의 쾌락주의(son hédonisme)는 가끔은 다른 원칙들과 함께 퀴니코스의 금욕주의에 매우 가깝다.
뿐만 아니라, 이 정도에 속지 않아야만 한다. 퀴레네의 쾌락주의가 가르친 것, 그것은 본능에 자기만족적인 복종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사유(la pensée)였으며, 그 사유는 그 학파가 보기에는 향유(la jouissance)를 정당화하고, 대상 또는 외적 조건들로부터 그 향유를 해방시킨다. 게다가, 테오도로스에게 있어서 쾌락은, 반성된 지성에 의해 정의된 현자의 평화로운 환희(la joie)에 비추어서, 무차별적 사물일 뿐이다. 이 사물에 몰지각한 자들은 집착하고 있다. 만일 헤게시아스(Hégésias, Ἡγησίας)가 비관주의자라면, 그것은 단지 모든 고통을 제외한 쾌락을 실현할 수 있는 계산이란 것이 그에게는 성공할 수 없는 것으로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일관성 없는 절충주의자인 안니케리스(Anniceris, Ἀννίκερις)는 반대로 대립각들을 무디게 하여 파라독스들을 약화시켰다. 이리하여 이 길이 새로운 토대 위에 퀴레네학설에서 에피쿠로스의 재건에로 길을 열었다.
퀴니코스 학자처럼 세계 시민을 주장하는 퀴레네 학자는 또한 퀴니코스처럼 자유 사상가였다. 테오도로스의 별명은, 게다가 전통적으로 무신론의 명단에 오른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도, 민중종교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 즉 신적인 것[점치는 예견]의 부정 그 이상의 것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아마도 그것은, 사람들이 퀴레네학설을 유명한 에우에메로스(Évhémère, Εὐήμερος, 전316년경- ? 3세기초 활동)에 결부시키는 것은 신중한 검토 없는 것이다. 에우에메로스의 성스런 이야기(Histoire sacrée)를 에니우스(Quintus Ennius, 전239-전169)가 변역했고 그 단편들이 남아있다. 그 책은 신을 믿지 않는 불신자[무시론자]들의 애독서였으며, 나중에는 이교학설에 대한 크리스트교의 반대자들의 지침서였다.
변론술[소피스트학문]에 아주 가까운 많은 참조들을 고려해보면, 이미 보았듯이 문제가 되었던 이 철학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변론술과는 이질적인 경향을 표시했다. 이 철학자들은 개인으로서 우월하기를 원했다. 개인을 모든 우연의 그 위에다 두고, 개인을 진실로 해방하고자 했다. 더욱이 그 당시까지 합리주의로 기울어지는 그리스 정신에 균형을 이루고자 했던 동방(l'Orient)의 영향은 트라키아의 노예의 아들인 안티스테네스의 사유에서 그리고 아프리카 그리스인인 아리스티포스의 사유에서 노골적으로 주장되었다. 회의주의자들, 스토아학자들, 에피쿠로소 학자들의 선구자들은 이미 헬레니즘의 학자들이었다. 만일 사람들이 이들이 스승의 인격성을 부여한 것 같은 이미지를 플라톤이 스승에 대해 남긴 이미지와 비교하면, 사람들은 그 이미지들이 그의 인격을 모순되게 말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한 인물의 유일한 측면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그 인물의 어리둥절할 정도의 복잡성은 서로 균형을 이루는 대조들로 되어 있다. 이 대조들은 다른 측면들을 희생시키면서도 이 측면들 중의 하나를 키웠다. 메가라학자들은 논쟁에서 미묘한 측면을, 퀴니코스학자들은 금욕적인 엄격함을, 퀴레네학자들은 욕구에 따라 서로 분리시킬 줄 아는 쾌락들의 자유로운 참여를, 크게 부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목적을 주목하였다. 즉 인간이라는 것, 또는 전적으로 하나이라는 것은 자기에게만 의존한다. 그런데 이런 실천적 목적은, 반대 현상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앞으로 보게될 것이지만, 또한 플라톤의 목적이기도 하다.
(24:12 47TMH)
**fr.Wiki, Destin (stoïcisme): L’argument paresseux (54QMJ)
숙명의 보편성은 행동하는 인간에게 불가능성을 포함하지 않는가? 그 보편성은 이때부터 게으름으로 그리고 비도덕성으로 이끄는가? 게으름으로, 그러한 것은 유명한 ‘게으른 논증’의 의미이다. 키케로는 운명론(Traité du destin) 8장에서 이렇게 요약한다.
“만일 너의 운명이 이런 질병으로부터 낫는 것이라면, 의사를 불렀거나 안 불렀거나 너는 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너의 운명이 질병으로부터 낫지 않는다면, 너는 의사를 불렀거나 안 불렀거나 낫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너의 운명은 둘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의사를 부르지 않은 것이 유익하다.”
이와 동일한 논증을 라이프니츠는 변신론(Essais de théodicée, 1710)속에서 다루었는데 파툼 마후메타눔(fatum mahumetanum)이라 불렀고 후대는 게으름뱅이 궤변(Sophisme du Paresseux)이라 한다. [여기에 기독교인의 마호멧에 대한 무지의 표현이 들어 있다.]
[어쩌면, 키케로든 라이프니츠든, 그리스 소크라테스 - 퀴니코스 - 스토아로 이어지는 숙명이이라는 맥락을 잘라버리고, 로마시대 스토아 학파의 운명(숙명)을 대하게 되면 논증이 필요없을 것이다. 숙명이니깐, - 벩송의 "자유문제의 진화" 스토아편 강의를 참조할 것 (54QM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