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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만물이 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그를 위하여 창조되어 그와 함께 섬
(골 1:16-17)
“16 만물이 그 안에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성탄절을 맞아 가만히 생각해보니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의 평화로다.” 언제 이 말씀이 실현되는가? 옛날에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다. 예수님이 우리 생명이 되시고 우리 삶이 된 사람은 이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진 그런 삶을 산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이 또 오시고 오시는, 현재적으로 오시는 이런 축복 가운데 있다. 오늘은 골로새서 일곱 번째 말씀이다.
인생의 지혜는 자기 몫을 확실하게 아는 것이다. 자기의 본분, 자기가 받은 기업을 확실하게 아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무엇이 위임되었는지를 확실하게 아는 것이 지혜다. 인생의 몫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표현이다. 즉 하나님을 대리하는 그리스도가 인생의 몫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몫이다. 이제 이 몫이 우리의 몫이 되었다. 인생의 위치를 회복한 사람은 바로 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업이고, 우리의 본분이고, 우리의 위임이고, 우리의 몫이 된 것이다. 이것을 인격이라 한다. 이 인격이 없으면 육체적 목숨은 살아,있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죽었다는 것은 소용이 없다, 쓸모가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인격의 축이 없으면 실 끊어진 연과 같다. 연이 하늘 높이 오르다가 실이 뚝 끊어지면 멀리 올라가다가 결국 추락하고 만다. 인생이 그렇다. 뭔가 잘 되는 것 같은데 갑자기 추락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연의 끈이 끊어져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끈이 무엇인가? 우리의 기업이신 그리스도이다. 끈에 달려 있다는 것은 답답한 일이다. 그렇지만 연이 끈에 달려 있어야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여 결국은 주인이 감으면 제 자리에 돌아온다. 연은 자기 뜻대로 날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끈이 자기를 딱 잡고 있다. 그런데 아담은 이 끈이 싫은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이 끈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이 기업이신 그리스도가 바로 보이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 형상이시고, 모든 창조의 으뜸이다. 이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했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오늘은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선다.”는 말씀으로 함께 나누겠다. 첫째로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다. 만유는 모두 한 인격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는 그리스도가 있었다. 그리스도가 표현된 것이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여섯째 날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표현된 것이 바로 만유다. 그래서 만유를 다시 모으면 그리스도가 된다.
우리도 사람 안에 무엇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나왔다. 여기에 책상, 의자, 전등, TV가 있는데, 이것이 다 어디 안에 있었는가? 원래는 사람 안에 있었다. 백화점에 가면 많은 물건들이 있다. 왜 그렇게 수많은 물건들이 있는가? 그것은 사람 안에 그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필요가 있으니까 물건으로 나온 것이다. 내가 90년대에 미국 갔을 때 홈키퍼라는 백화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거기는 온갖 공구를 다 파는 곳이다. 지금은 우리나라에 다 들어왔지만, 그런 데 취미가 있어서 그런지 그 당시만 해도 전기톱이라든가 각종 공구들이 참 신기했다.
모든 것은 다 사람의 필요다. 사람 안에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좋은 기계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나도 집을 한 번 지어 봤는데, 집을 짓기 전에 부엌, 거실, 안방, 베란다는 어떻게 만들어야겠다고 미리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을 설계사에게 이야기를 하고, 설계사는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 의견을 조율한다. 그렇게 해서 집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변경이 있다. 나는 별로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니까 대충 했지만 정말 까다로운 사람은 여러 번 번복한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에 꼭 맞는 집을 짓고 싶기 때문이다.
원래 집은 어디 안에 있었는가? 마음 안에 있었다. 마음 안에 있었던 것이 밖의 집이 되는 것이다. 창조를 보면 빛이 있고, 궁창이 있고, 식물이 나오고, 동물이 나오고, 마지막에 사람까지 만들어지는데, 여섯째 날에 사람이 창조되었는데, 첫째 날부터 있던 것들이 전부 다 사람 안에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은 그 사람이 곧 빛이고 궁창이다. 그 사람 안에 식물도 있고 동물도 있고 다 들어 있다. 이것이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고 진짜다.
예수님이 자신을 무엇이라 하셨는가? "나는 빛이다.”라고 하셨다. 우리도 정상적인 사람이면 우리 안에 다 있다. 그런데 이 만물이 다 있는데, 거기에 사람이 없다면 만물은 아무 소용이 없다. 흉가나 빈집을 보라. 그 안에 다 있는데 사람이 빠지면 그것은 전부 죽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들어가면 모든 물건들이 전부 다 살아난다. 그래서 만물의 생명은 사람이고, 사람의 생명은 그리스도이다. 사람도 그리스도가 없으면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자기에게 유익하겠는가?”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은 육체적 목숨이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야 목숨이 가치가 있다. 돈이 왜 중요한가? 돈으로 돈보다 더 가치 있는 것과 바꿀 수 있기 때문에 돈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 인생의 목숨은 인격, 즉 그리스도와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떡으로만 사는 것은 동물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다. 우리가 동물과 사람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격은 하나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해야 정확한 표현이 된다. 만물은 물질적인 것, 정신적인 것, 영적인 모든 것을 말하는데, 이 모든 것은 인격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심지어 권세들이나 천사들이나 보좌들이나 이 모든 것은 천사를 말하는데, 이 모든 것은 인격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들어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것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상적인 위치로 회복되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전부 다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통일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격이라는 줄이 끊어져 버리니까, 다른 모든 것이 다 중요해지고 말았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게 돼버렸다. 이 말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이 사람은 향방 없이 달리는 사람이다. 열심히는 하는데 ‘왜 합니까?’ 물으면 향방이 없다. “배부르지 못할 것으로 은을 달아준다.”는 말이 있는데, 자기 인생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과 바꾼다는 것이다.
하루 24시간 가운데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있는가? 옛날의 나를 생각해 보면,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바쁘게 고민하고 생각하고 땀 흘리렸던 것이 생각난다. 그래서 우리는 인격을 다시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의 본분, 인생의 몫,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위임, 이것을 우리는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두 번째로 "만물은 그를 통하여 창조되었다.” 즉 만물은 그리스도라는 도구를 통하여 창조되었다고 말씀하였다.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은 마음에서 나왔다. 말의 근원은 마음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내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마음은 말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말을 할 수 없으면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잘 모른다. 이것은 실재와 형상이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실재이고, 말은 실재의 형상이다. 마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손을 통해 글을 쓴다. 여기서 마음과 손과 글을 보면 손은 마음의 형상이다. 글씨는 손의 형상이다. 형상과 실재, 또 형상과 실재, 전부 다 이런 원리로 되어 있다. 근원이 있고 표현이 있다. 이것은 만물은 아버지와 아들의 원리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뿌리는 근원이고 나무는 뿌리의 표현이다. 또 나무는 근원이고 가지는 표현이다. 또 가지는 근원이고 잎은 표현이다. 전부 다 이런 원리로 진행되고 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근원을 모른다. 근원은 숨어 있는데, 내 마음도 숨어 있어서 여러분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말은 여러분에게 나타나 있다. 형상을 봐야 근원을 안다는 말이다. 만물은 말씀으로 지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만물을 창조할 수가 없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고 말씀이 있었다. 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느니라."고 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여기서 아버지는 근원이시고, 말씀으로 표현된 아들은 나타난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작품을 봐야, 그 작가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말씀은 아버지가 나타난 것이다. 나타나신 아버지이다. 내가 물건을 집으려고 하는데, 이 집으려고 하는 것은 손이 아니고 마음이 집으려고 하는 것이다. 내 손은 내 마음의 아들이다. 우리가 손에게 내 마음을 위임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위임한 것이다. 이것이 인격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생명의 아들이다. 모든 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지어졌고, 아들로 표현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들어진 것, 온전한 인격을 통하여 만들어진 것은 좋은 것이다. 아름다운 인격을 통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름다운 것이 된다. 집이 잘 정돈되어 있고 깨끗하면,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집에 가면 정돈이 안 되어 있고 지저분하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그 인격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마음이 만물을 통하여 표현된 것을 보시고 난 다음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것은 스스로 만족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잘 지었구나!' 하고 하나님께서는 만족하셨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스스로 그렇게 나타내기를 원하시는데,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나타내길 원하신다. 우리의 교회생활은 간증하는 생활이다. 간증은 인격의 표현이다. 그 간증을 들으면 우리는 그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빚으셨는지를 알 수가 있다. 우리는 그 간증을 들으면 그의 진실을 알 수 있다. 내 속에 아름다운 것이 있는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교회는 아름다운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쟁탈전을 한다.
인격 외에 다른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나도 초기에 교회생활을 하면서 ‘아! 나도 저 사람처럼 아름다운 간증을 할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더 가치가 없게 느껴졌다. 나는 나다. 손가락을 보면 엄지손가락도 있고 새끼손가락도 있다. 새끼손가락이 엄지손가락이 될 필요가 없다. 내가 누구처럼 되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누구처럼 되고 싶어서, 나에게 엄지손가락만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안 된다. 나는 나다. 나만큼 사는 것이 완전하게 사는 것이다.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리고, 감나무에서 감이 열리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런데 포도나무가 '나에게도 감이 열릴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복잡해진다. 그때부터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이것이 천사가 우리를 속인 것이다. ‘누구처럼 되어야겠다.’ 이것이 속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진실은 어디로 간 데 없고 뭔가를 억지로 만들어낸다. 세상은 코스모스, 다 만들어낸 것이다. 어떤 작가가 자기 생활은 엉망진창인데 작품을 보면 너무나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과 같다. 겉과 속이 다 다르다. 사람들이 작가도 그런 사람인 줄 알고, 그 작가를 직접 찾아가면 실망한다.
예전에 미투 사건이 있을 때 우리 나라에 유명한 노벨문학상 후보자가 있었다. 그런데 같은 문학인 가운데 한 여성 작가가 성추행을 당했던 일을 폭로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을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폭로되고 난 다음에 노벨문학상 후보라든지 화려했던 모든 업적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말았다. 세상은 다 그렇다. 진실이 아니다. 그런데 생명의 세계는 다 진실이다. 포도나무에서는 포도가 열리고, 감나무에서는 감이 열린다. 생명은 기술이 아니다. 간증하는 것은 기술이 아닌 것이다.
말을 잘하는 사람도 있고, 말이 좀 어눌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전혀 우리에게 문제가 안 된다. 자기만큼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 완전한 것이다. 그런데 완전해 보려고 흉내를 낸다. 그러면 자기에게 있는 것까지 쓸모없게 돼 버린다. 모든 것은 인격을 통하여 창조된다. 내 마음이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손이 글씨를 쓰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하실 수 없기 때문에 아들이 필요한 것이다.
왜 우리를 부르셨는가?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실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한 것이다. 창세기 1장 3절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 말은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까 빛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빛은 말씀으로 창조된 것이다. 우리 안에서도 그런 경험이 분명하게 있다. 우리 안에서 말씀이 들리면 어두운 사람이 밝아진다. 아! 그래서 말씀이 나를 창조했구나! 그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들은 그리스도, 곧 인격을 말한다.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어떠함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세상도 마찬가지다. 일본 문화는 일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한국 문화는 한국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추어탕도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 추어탕이 다 다르다. 왜 그런가? 사람이 강원도 사람이기 때문에 강원도 추어탕을 만드는 것이다. 가정도 그렇다. 가족 구성원의 어떠함이 가정을 만드는 것이다. 사회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환경이나 문화나 여건, 이런 것을 보고 불평한다. 사실은 불평할 것 하나도 없다.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환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누구 탓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누구 때문이 아니고, 전부 자기 때문이다.
세번째로 만물은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를 위한다는 말은 '향한다'는 말이 될 수가 있고, '목적'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만물의 모든 목적은 아들에게 있다.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아들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창조의 순서를 보면 식물을 창조하시고 동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셨다. 식물은 동물을 위하여, 동물은 사람을 위하여,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된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은 미완성이다.' 그 말이 맞긴 맞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이 그리스도로 지어지기 전까지는 우리 인생은 미완성이다. 어떤 것을 해도 참 만족이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면 이것이 인생이구나! 하나님이 이렇게 살려고 나를 만드셨구나! 그것을 물어보지 않아도 안다. 결국 최종적인 목표는 인격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은 결국 마지막에는 하나의 인격을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생활을 하는 목표가 무엇인가? 참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일의 목표는 바로 한 인격이다. 그것을 목표로 우리는 가고 있는 것이다.
인격이 모든 것의 목표가 된다. 나는 이것을 알고 난 다음에, 인생에 어떤 일이 와도 그 일 때문에 내가 죽고 사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살다 보면 잘 되는 일도 있고, 못 되는 일도 있다. 그런데 잘 되어도 목표는 그리스도고, 못 되어도 그리스도다. 지금 생각하니 그 모든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해도 인격이 나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감나무가 아무리 좋아도 감이 열리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또 감이 열려도 감이 달지 아니하면 먹을 수가 없다.
과정을 거쳐서 우리는 점점 어떤 인격으로 가고 있다. 나는 우리 목사님을 처음 만나게 됐을 때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목표가 생겼다. 그 전에는 사람이 내 목표가 아니었다. 인격이 내 목표가 아니었다.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 등이 나의 목표였다. 그런데 한 사람을 만나고 난 다음에, 아! 사람의 목표는 인격이구나! 사람이 되는 것이구나! 저 사람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다.
나는 목사님을 만나기 전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다. 공부도 해야 되고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는데, 목표가 분명하게 생기고 난 다음에, 그런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누구하고 의논할 것도 아니고 그래서 아무하고도 의논하지 않고 인격이라는 그 목표를 위하여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 보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내 눈을 열어주셔서 사람이 내 인생에 목표가 되었는지!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성경의 목표는 인격에 있다.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로 그렇게 끝나고 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은 인격을 사모하고 기다린다는 것이다. 누가 인격을 사모하고 기다리는가? 좋은 물건을 경험하면 우리는 다른 물건을 갖고 싶다. 옷도 좋은 옷을 입었으면 다음에는 또 다른 옷을 입고 싶다.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를 경험하면 또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싶다. 자꾸 경험하고 싶다. 이게 신기한 것이다. 그래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 말은 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람, 그리스도를 지금 누리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성경 전체가 바로 이렇게 흐르고 있다. 전부 다 사람 이야기다. 아브라함을 왜 하나님이 부르셨는가? 전부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 인생 자체가 인격이라는 한 목표로 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인격이 남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돈을 벌어도, 연애를 해도, 큰집을 지어도 허무하다. 무엇을 해도 깊은 곳에 '아,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이 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닌데 뭐 다른 것이 있을거야.'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자기 인생에 경험이 되면 이상하게 여한이 없다. 다 이루었다! 그런 말을 하게 된다. 다 가졌다. '아무것도 안 가진 사람이 왜 저런 이야기를 하는가?'하고 생각한다. 진짜를 가졌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왜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았는가? 왜 이삭은 모리아 산으로 갔는가? 왜 야곱은 일생동안 하나님에 의하여 다루심을 받았는가? 왜 모세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가? 전부 다 그리스도 때문에 그렇다.
아브라함 일생에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그냥 이민 간 사람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있으니까 이 모든 과정들이 다 해석이 되고, 그리스도를 맺고 난 다음에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니까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우리는 끝이 없다.
나도 이 말씀을 준비하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대학교 2학년 때 74년도에 춘천 성시화를 하고 난 다음에, 같이 일했던 멤버들이 제주도 여행을 갔다. 거기서 같이 활동했던 여학생하고 정이 들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눈치를 채고 목표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완행열차를 타고 올라왔는데 한 좌석에 함께 앉게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뭔가 일이 시작되었는데, 나는 적극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는 못했지만, 계속 관계가 이어지지 않겠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군대에 갔다 오니까 친구가 그 사람을 뺏어갔다. 뺏은 게 아니라 그렇게 됐다. 그 여학생은 예쁘기도 하고 순진하고 내 눈에 반할만한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런 것이 잘 됐다면 지금 내가 우리교회에 함께 살겠는가?
그 부부는 지금 선교사가 되어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나도 그렇게 안됐겠는가? 나도 그런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저 사람과 같이 하면 정말 복음을 함께 전할 수 있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른 길로 나를 인도하셨다. 그러니까 열매가 열리고 나면, 아! 그래서 싹이 났구나! 그래서 잎이 피었구나! 그래서 꽃이 피었구나! 그래서 태풍이 불었구나! 그래서 비가 왔구나! 이 모든 것이 열매 안에서 해석이 된다. 벌들은 왜 날아 왔으며 나비들은 왜 날아 왔는지 그 모든 것이 다 이 열매 안에서 다 해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 안으로 가기만 하면, 모든 것은 다 나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도 나를 위하여 있는 것이고 긍정적인 것도 나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해석이 안될 것이 없다. 그러니까 옛날에 껄끄러웠던 관계가 다 해결된다. 풀지 못했던 매듭이 다 풀리는 것이다. 그때 왜 그 매듭 때문에 그렇게 끙끙거렸던가? 아! 그리스도 때문에 그랬구나! 내가 실수한 것, 내가 잘못한 것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해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나를 위하여 배열해 놓으셨구나!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배열해 놓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것을 간증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만물이 그와 함께 선다."고 했다. 옛날에 나는 내가 어디에 설지 몰라서 참 많이 방황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 앞에 가면 '아! 나도 공부를 잘해야지', 운동을 잘하는 사람 앞에 가면 '나도 운동을 잘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얼마나 왔다갔다했는지 모르겠다. 어떨 때는 배우가 되고 싶다가, 또 어떨 때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고, 또 어떨 때는 정치가가 되고 싶었다. 자라면서 계속 바뀌었다. 고 3때는 이과였는데 생각이 들어오니까 아무런 의논도 없이 그냥 문과로 선택해 버렸다. 그래서 철학과를 갔다. 주변의 반대가 있어도 내 생각을 바꿀 수 없었다.
졸업하고 난 다음에 얼마나 방황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어디에 설지 몰랐다. 어디로 갈지 몰랐기 때문에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방황을 했다. 마치 미운 오리새끼처럼 닭이 내 친구인지 따라가면 닭이 나를 쫒아냈다. 또 오리, 개, 돼지한테 가 봐도 내가 있을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것이 나의 방황이었다. 캄캄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세계를 발견했다. 그 세계를 발견하고 난 다음에 내가 여기에 있어야 될 사람이구나! 내가 여기에 살아야 될 사람이구나! 그렇게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다 내가 찾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에는 내가 찾아간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나를 이끄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끌리는 인생을 살았다. 그때 이후에 내 목표가 변경된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작심삼일이고 정말 결정 장애가 있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내가 결정한 것은 항상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결정하지 않은 것, 나를 이끄신 분이 이끄시는 것에는 내가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서기 위해 내가 부름을 받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서기 위하여 그렇게 지어졌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어진 것은 결국은 그리스도와 함께 서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다.
자동차 부품 공장은 여러 개다. 엔진만 만드는 공장, 브레이크만 만드는 공장, 타이어만 만드는 공장 등 여러 공장이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언제 제자리를 찾게 되는가? 조립 공장에 가면 아! 내가 여기 있기 위하여 내가 만들어졌구나! 하고 알게 된다. 완성된 차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다. 완성차!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어진 것이다. 완성차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각 부품 공장이 세워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품이 조립되기 위하여, 함께 서기 위하여, 우리가 지어진 것이다. 거기서 비로소 자기의 설 자리를 알게 된 것이다. 확실하다. 바퀴는 바퀴가 설 곳이 있고, 핸들은 핸들이 설 곳이 있고, 다 설 자리가 확실하다. 그런데 그 설 자리가 확실하지 않으면 헷갈리는 것이다. 내가 바퀴에 서야 되는지, 핸들에 서야 되는지, 브레이크에 서야 되는지 헷갈리게 된다. 자기가 어떻게 해야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갈 바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오면 내 자리가 확고해지는 것이다. 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서기 위하여 지어졌구나! 하고 알게 된다. 앉고 설 자리가 확실한 사람은 된 사람이다. 세상에서도 앉고 설 자리를 확실히 모르는 사람은 욕을 먹는다. 나는 내가 설 자리를 확실히 알고 난 다음에 세상에 기웃거리지 않았다. 세상 아무데도 내가 있을 곳이 없다. 내가 있을 곳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 이 우주 안에 내가 설 자리가 어디인가?
제자들은 3년 반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그런데 자기가 설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셨는데 제자들은 그때부터 방황하기 시작했다. 많이 어두웠고 근심했다. 왜 그랬는가? 설 자리를 알지 못했다. 물 위를 걸어가는 예수와 함께 설 수 없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그 예수와 함께 설 수도 없다. 어디에 설 줄을 몰랐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어느 날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올 수 없는 그 자리가 바로 자기 자리인 줄을 알게 되었다 아! 예수님이 이 자리에서 나를 부르셨구나! 그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이 자리를 알기 전까지 확실하게 내 설 자리를 몰랐다. 그 후 제자들은 자기 자신으로 예수를 살려내는 증인이 되었다. 아! 이것이 내 길이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살려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 하는 이 운명으로 나를 지으시고, 나를 부르셨구나! 우리가 원래 무엇을 만들 때, 원래 그 용도가 결정돼 있다. 마이크는 만들 때 이미 마이크 용도가 결정돼 있다. 이 자리를 떠나면 방황이다. 우리는 그 자리를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방황할 수 있다.
그런데 저 자리가 바로 내 자리구나! 저기가 내가 서야 할 곳이구나! 이것을 알면 그때부터 방황이 끝난다.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올 수 없는 그 자리가 나의 설 자리다. 그 자리에 서면 그 자리는 나와 딱 맞다. 볼트와 너트가 있는데, 어느 하나가 커도 안 되고, 작아도 안 된다. 딱 맞아야 한다. 그것처럼 나와 딱 맞는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그 전에는 좋은 자리, 위대한 자리, 편안한 자리, 내 인생이 안식하는 자리가 내 자리인 줄 알았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이왕이면 좋은 게 내 자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그 자리는 좋은 자리도 나쁜 자리도 아니다. 위대한 자리도 비참한 자리도 아니다. 그런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바로 내 자리다. 정해진 자리다. 내 인생이 어디에 있는가?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올 수 없는 그 예수 안에 내가 있다. 그 자리는 사람뿐만 아니고 만물이 함께 서는 자리다. 사실 만물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 뛰어내릴 수 없는 자리에 있다. 마이크는 자기 자리에 있다. 꼼짝할 수 없다. 어떤 것이라도 제자리를 벗어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사람만 자기 자리를 스스로 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아무리 택해봐도 자기 자리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방황이다. 그런데 나는 내 자리를 찾았다. 저 자리가 내 자리구나! 하나님이 바로 저 사람을 창조했구나! 형상의 자리가 내 자리구나!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를 더 알기를 원하는 것이다. 더 보기를 원하고, 그 말씀을 더 듣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이다. 이 사람이 있어야 모든 만물이 그 사람에게 통일된다. 그런데 만물은 참된데 사람이 이탈되어 버렸기 때문에, 사람과 만물이 맞지 않게 되었다. 만물이 탄식한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들의 원래 자리는 어디인가? 꼼짝없이 못 박혀 있는 그 자리이다. 그 중심에 사람이 있는데, 중심에 있는 사람이 못 박혀 있지 않으니까 하늘도 땅도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올 수 없는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정확한 사람이다. 그 사람의 제자리에 오게 되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함께 서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를 심히 왜곡시켜 놓았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올 수 있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내려오지 않았다고 왜곡시켰다. 그 예수가 사람인지 신인지 확실하지 않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면 사람인데, 뛰어내릴 수 있는데 뛰어내려오지 않은 것은 사람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예수는 신이 되고 말았고, 경배와 찬양의 대상이 되었다. 기독교에서 왜곡시켜 놓은 예수 안에는 우리가 설 자리가 없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예수의 자리가 분명하지 않으면 우리가 설 자리가 없다. 예수님에게 우리와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와 거리가 있게 된다. 그런데 십자가에 매달려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은 그 예수와 내 운명이 전혀 다르지 않다.
운명이 하나이어야만 함께 설 수 있고 함께 살 수 있다. 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그를 위하여 지어진 모든 만물은 바로 이 자리에서 통일되고, 이 자리에 함께 서는 것이다. 기독교는 왜 그렇게 예수를 왜곡시켜 놓았는가? 당국자들끼리 해 먹으려고 그렇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종교를 보면 종교는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성직자 그룹과 평신도 그룹이 있다. 옛날에는 성경도 평신도들은 읽을 수 없었다. 성직자 그룹을 하나님, 예수님과 더 가깝다고 생각했고, 평신도 그룹은 그들을 통해서 신에게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신교는 거기에서 나왔지만, 실제로 개신교도 이런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과 거리가 생기도록 만들어 놓았다. '주의 종'이라는 말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못 박힌 그 예수는 우리와 하나도 정체가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완전히 드러났다. 완전히 공개되니까 얼마나 시시했으면 다 떠나가 버리고 말았는가. 다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은 그 예수 안에 우리와 다른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이라고 표현한다. 어린양과 함께 못 있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린양은 우리에게 전혀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들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였다. '나 있는 곳'이 어디인가? 옛날에 나는 이 말을 잘 몰라서 하늘 보좌를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보나까 예수님이 있는 곳은 십자가밖에 없다.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올 수 없는 그 자리가 예수님이 있는 곳이다. 우리는 그 자리가 부끄러웠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갈 수 없었다.
지금 와서 보니까 그 자리는 부끄러운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이다. 그 자리가 지성소이다. 지성소는 제단에 흘린 피를 가지고 가는 곳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는 그 자리밖에 없다. 이것은 실제적인 우리의 경험이다. 그 안에서 내 자신이 발견되면, 그 자리 안에는 하나님도 있고 예수님도 있고 아브라함도 있고 다 있다. 그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안다면, 그 자리가 내 본분이고 기업이라는 것을 안다면, 세상에서 방황할 필요가 없다.
왜 방황하는가? 그 자리가 내 자리로 안보이기 때문에 방황하는 것이다. 다른 데에 내 자리가 있을 줄로 생각하니까 우리는 앞에 앉아 있어도 그 말씀이 안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부인하든지 시인하든지 내 자리는 바로 거기밖에 없다. 만약 자기 아버지가 청소부라는 것을 아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청소부의 아들이 되지만, 설령 부끄러워한다고 해도 그 아들은 다른 사람의 아들이 되는 게 아니다. 그냥 청소부의 아들이다. 자기가 삼성 그룹 이병철의 아들을 부러워한다고 해서 이병철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면 인생을 포기하는 것이다. 인생이 아닌 것이다. 나의 기업을 완전히 쓰레기통에 집어넣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4장 1절에 보면,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 쓴 것이 있도다"라고 했다. 십사만사천은 어린양이다. 그 이마에 '어린양' '하나님'이라고 써 놨겠는가. 그 말이 아니고 어린양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어린양의 자리에 있으면 거기서 아버지가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그 자리 안에 있으면,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나타나는 자리이고, 그 자리가 바로 생명강물이 흐르는 자리이다. 이것이 사탄에게는 안 보인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이면 그 자리는 축복이 넘치는 자리, 은혜가 넘치는 자리이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어린양 안에 서게 된다. 이 자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올 수 없는 인생의 자리이다. 우리를 거기에 서게 하려고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 자리가 인생의 축이다. 축이 있어야 모든 게 돌아간다. 축이 빠져 버리면 모든 부품들은 다 흩어지고 만다. 우리는 당당하게 거기에 설 사람으로 알아야 한다. 주께서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이 어딘지 알아야 한다. 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그를 위하여 창조된 모든 것은 그와 함께 서게 된다. 우리가 만약에 그와 함께 서지 아니하면 실패작이다. 십자가를 벗어나버리면 인생이 갈 데가 없다. 그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바로 천사의 종이 돼버리고 만다.
어린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동시에 써 있는데, 이것이 완성된 이름이다. 우리의 이름은 어린양과 하나님의 이름이 동시에 써 있는 그 이름이다. 이것이 바로 형상이다. 형상이 없으면 하나님이 표현될 수 없고 하나님이 나타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를 원래 형상으로 지으셨다. 형상이 어디에 있는가?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올 수 없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만물은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어지고, 마침내 함께 거기서 서기 위한 것이다.
만물은 사실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기 때문에, 만물은 자기가 무슨 형상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게 되면, 그 자리에 만물이 다 함께 서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바로 설 때에 만물도 바로 서게 된다. 소켓과 플러그가 만날 때 불이 들어오는 것이다. 만물이 있긴 있는데 그동안 불이 안 들어온 것이다. 사람은 소켓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람이 제자리에 있으면 소켓과 플러그가 딱 맞게 되어 만물에 불이 들어오는 것이다.
예수가 나타날 때 보니까, 그 안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이 다 있다.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왜 만유를 만드셨는가? 만유 안에서 함께 서기 위해서다. 그리스도를 만유 안에 포함시켜서 함께 서기 위하여 만유를 만드셨다. 어느 날 우리는 만유와 함께 서는 자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만유'라는 것은 굉장히 광범위한 개념인데, 그랗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우리 삶에서 내가 사람이 되면 모든 환경이 그를 돕는 환경이 되는 것이다. 모든 환경이 왜 있는가를 우리가 해석할 수 있고 이름을 지어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값없이 와서 생명수를 받으라 하더라" 이것이 지으신 자와 지음을 받은 자가 하나가 되는 자리다. 성령과 신부! 모든 만유는 여성이다. 우리가 참 여성의 자리, 하나님의 참 배필의 자리로 가게 되면, 모든 만유도 우리와 함께 서게 되어, 하나님과 만유가 하나 되는 그런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위하여 우리가 지어지고, 마침내는 그와 함께 서게 될 것이다.
이 자리가 참 신기한 자리이다. 이 자리는 세상에서 감춰진 비밀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는 그 자리를 당신의 지성소로 삼고 계신다는 사실을 누가 알겠는가! 그를 맛 본 자 이외에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 자리, 하나님과 연합하는 이 자리를 알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그 자리 안에서 살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