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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에서 아버지의 강의는 꽤 인기가 있었던 듯 타과(他科)학생들이 아버지의 강의를 듣고 정치과로 많이 전과(轉科)를 하였다. 부산대 관사에 살던,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집 바로 뒤 아버지 강의실로 가서 창 밑에 앉아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통때는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으신데 강의 때 만은 아버지아닌 다른 사람처럼 굉장히 열정적인 큰 목소리라 온 운동장이 울리고 학생들의 호응도도 어린 내가 감지하기에도 대단했다는 걸 알수 있었다. 나는 그런 강의 분위기가 신기하여 구경하러 몰래 그 창가 아래에 가 앉아 있기를 좋아 하였다.
그런데 나는 평생 열살 정도의 어린 아이였던 내가 왜 그 창 아래 열심히 가 앉아 있었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실상 발음을 잘 알아 들을 수도 없었고 알아 들었다 한들 무슨 뜻인지 이해 할 수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래도 어느 특정 요일에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 책가방만 던져 두고 뛰어 가면 틀림없이 아버지의 강의가 진행되고 있었고 나는 그 창 아래 한 동안 앉아 있었다. 어쩐 일인지 그 시간엔 학교 운동장 전체에 개미새끼 한마리 얼씬거리지 않아 나는 한번도 누구에게 들키지 않았고 강의가 끝나기 전에 일어나 집에 와버려 아무도 내가 거기 있었던 걸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아버지가 집에 오셔도 나는 일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니 이제 여기서 생전 처음 실토하는 바이다. (이글을 통해 처음으로 밝히는 대목들이 실상 많다)
만일 내가 아버지께 그런 말을 했다면 아버지는 필시 그 다음 강의 도중 나오셔서 창 아래 있는 내 손을 잡고 강의실로 들어가서 학생들에게 소개하셨을 것이다. 왜 거기 앉아있냐 묻는다면 평생 몰랐던 답을 그 때 할 수도 없었을 거니와 그런 엄청난 부끄러움을 감당할 만한 용기가 전혀 없던 나는 그것으로 그 창 아래 가는 것은 마지막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얼마 전에 시베리아 타이거 숲속의 아나스타시아가 하는 말을 읽고 나는 확연히 깨달았다. 교육은 감정과 느낌을 통해 모든 정보를 전하게 된다는 것. 느낌이란 엄청난 양의 압축된 정보이니까. 그 느낌이 강할 수록 그 안에는 더 많은 세상의, 우주의 지식이 들어았다는 것. 그 순간 스승과 학생들 간에 일어나는 일순의 선명한 느낌속에 그 대단한 정보들이 스승에게서 그들에게 흐르게 된다..
스승이 말하는 적은 양의 지식을 초월하여 학생들은 스승의 정신과 정보의 물결을 짧은 시간 속에 스캔한다. 그것이 교육이다. 아니 이 정도의 강의를 할 수 없는 선생들은 세상의 의무를 파기하는 커다란 죄악을 짓는 것이라고 본다. 스승은 학생들의 눈 높이에서 쉽고 재미있게, 그리하여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의미가 잘 전달될 수 있게 최선을 다 해야하는 것을 보통 교수들은 자신의 어깨 높이에서 권위적으로 어깨에 힘을 주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여 학생들을 주눅들게 한다. 젊은이들 앞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귀중한 강의의 시간을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장(場)으로 허비시켜선 안된다.
이것은 나의 대학시절 교양과목 강의들을 떠 올려보며 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철학개론' 같은 좋은 과목에 아무리 귀를 기울여봐도 너무도 어려운 단어들이라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학생들은 모두 그 강의를 끔찍스러워 하였다. 교수 자신이야 그 단어의 뜻을 알고 쓰겠지만 그 뜻을 전혀 모르는 우리는 외국말을 듣는 듯 하였다. 친절하게 단어들의 뜻부터 정의하고나서 가르쳐야 할 것을. 나는 그래서 한동안 철학책이라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그로부터 20년도 더 흐른 후에야 조금 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철학이란 꽤 흥미있는 분야라는 것을 알았다.
'교육학개론' 같은 과목도 마찬가지였는데 내가 실지로 나중에 교직생활을 하며 생각해 보아도 그 강의에서 도움되는 말은 하나도 기억할 수 없었다. 차라리 '학생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가르쳐라' 또는 '음지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는 불쌍한 학생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여라' 라는 말 한마디라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서양의 그 많은 유명한 교육학자들의 이름만 외워서 어쩌자는 것인가. 교수님은 한번도 우리 조선의 교육사상가들인 권근(權近), 이황(李滉), 이이(李珥) 라든가 교육가이면서 독립운동가인 안창호(安昌浩)선생을 언급하는 것을 들은 일이 없다. 시간과 공간과 사상이 다른 서양 교육학자들 보다 우리 선조들의 홍익 인간 사상을 언급했다면 얼마나 우리에게 유익했을 것인가. 그랬다면 안그래도 학교서나 가정에서나 넘치는 사랑과 관심을 받고있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선생들이 총애할 것인가.
대학까지의 교육은 학문이란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오묘한 세계인가를 잠시 '맛배기'라도 보여주어 흥미를 유발해 주면서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식이어야 한다. 그렇게되면 졸업 후 학생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알아서 평생 그 재미를 찾아 공부하게 될 것이고 그게 안된다면 학생들은 졸업을 하고 성인으로 살아가며 평생 학문을 재미없고 어렵다는 잠재의식으로 배움을 멀리하게 된다. 학생들에게 상업적으로 적은 지식만을 팔 듯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려운 말로 지껄이다가 시간이 되면 나가버리는 수 많은 권위적인 교수들을 보라. 교수들에게 가장 기초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은 학생들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이 있다면 학생들에 대한 배려와 방법론이 저절로 형성될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 내 안의 무의식으로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을 느낌으로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수강료 한 푼 안내고 글자 그대로 도강(盜講)으로. 그 때 아버지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그 느낌 플러스 실지 강의 지식까지 알아 들을 수 있었으니 참으로 행운아 들이었다고 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 때 아버지의 강의에 끌렸던 또 다른 이유는 학생들에게 대한 강렬한 애정과 그리고 열정이 아버지 목소리에 배어 있었던 것 때문 아니었나 생각된다.
어느 다른 날엔 집에 들어 오시더니 "오늘은 강의가 한참 진행 중인데 한 여학생이 유난히 잘 차려입고서는 헐레벌떡 뛰어 들어 오길레 강의하다 말고 아버지가 '모두 가운데로 주목!' 했더니 학생들이 보고 막 웃고 그 여학생은 얼굴이 발게져서 서둘러 자리를 찾아 앉더라. 내가 좀 미안스럽기도 해서 끝나고 나올 때 짐짓 그 여학생들 틈에 묻혀 나왔더니 한 여학생이, '이 친구는 오늘 미아이(선)를 보고 교수님 강의에 참석하려고 서둘러 달려온 거에요'라며 원망스러운 듯 얘기하더라" 하셔서 내가 "아버지가 좀 너무하셨네요, 그 여학생이 얼마나 무안했겠어요."라 하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내가 항상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좋으셨던지 어린 내게 참 많은 얘기를 해 주셨다. 어떤 날은, "아버지는 어려운 중에도 항상 금반지 한 돈짜리는 꼭 장만해 끼고 다녔지. 어느 날 산속을 걸어가다 순사에게 붙잡혔는데 금반지를 빼 주어 무사했고, 그런 식으로 금반지 때문에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거든. 그 때 잡혔다면 아버지는 죽을 목숨이었는데." "아 참 다행이다, 그 순사는 일본순사였나요?" "아니, 조선사람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항상 일본순사보다 조선순사들이 더 열성적으로 독립투사들을 잡으려 혈안이었어" 늘 쫒겨 다니시던 아버지는 그래서 평생 될 수 있으면 사진을 안 남기려 애쓰셨다.
그 습관은 연세가 드신 후에도 남아있어 정 여럿이 단체사진을 찍게 되면 일부러 얼굴을 외면하여 지금 남아있는 한두개 사진을 보면 거의 옆을 보고 계신 이유이다. 지금 희귀하게 남아있는 그 명함판 사진도 보면 습관적으로 눈을 가늘게 떠서 얼굴이 확실하게 보이지 않게 하시려는 의도가 분명히 보인다. 어쨋든 그 사진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정식 명함판 사진을 하나도 못 보았을 것이다. 그 외 몇 개 남아있는 사진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필시 아버지 본인의 뜻 보다는 주위사람들의 반 강제적인 호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사진과 함께 자신의 생년월일도 늘 베일에 쌓여두고 계셨다. 자신은 1910년 생이라고 대충 해 두셨지만 실은 1902년 생임을 나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생신도 부산대학 사택에 살던 어느 날 저녁식사 후 모두 모여 가족 중 누군가 곧 닥쳐 올 생일에 대해 얘기 하던 중 동생 우기(雨紀)가 “아버지 생일은 언제에요?” 라 하자 아버지는 “글쎄, 너희가 아버지 생일을 정해 주렴” 하셨다. 우리는 왠지 신이 나서 한참 떠들다가 우리 가족들 생월이 1, 2, 4월 그리고 9, 12월에 들어있으니 겹치지 않은 달들 중 중간의 6월이 좋겠다는 의견에 일치했다. 그럼 날은 언제가 좋겠냐하자 아버지가 “외우기 좋게 그냥 6월 6일이 좋겠다” 하시어 그렇게 만장일치로 낙착을 보았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아버지 생신을 정했다고 좋아했지만 실상 진짜 생신은 아버지 자신만 알고 가신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생년월일이 무슨 그렇게 큰 의미가 있겠는가.
아버지의 성함도 원래는 ‘이 구(李 龜)’ 의 외자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요즘 식으로 주민등록증상 모든 기록들을 의도적으로 왜곡해 두셨던 것이다. 남의 나라도 아닌 내 나라에서 본인의 기록을 가리고 사셔야 했던 가슴아픈 사연이다. 성함은 외자라 금방 기억에 남을가봐 집안 항렬인 쇠북 종(鐘) 돌림에 그래도 그 중 무난하고 인상에 덜 남을 율(律)자를 택하신것 같다. 필명을 이일구(李一九)로 지으신것은 평생 존경하시던 백범 김구(金九)선생의 함자에서 따온 것으로 시작(一)과 끝(九)의 모든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셨지만 내 짐작이지만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을 그 원래 이름도 살리고 싶으셨던 것 아닌가 한다.
아버지는 평소 이름짓기를 참 즐겨하셔서 부산대 사택에서 동래 과수원 집으로 이사하자마자 집 이름을 수일원(秀一苑)으로 근사하게 지으시더니 얼마 후 농장 높은 터에 방 두개의 작은 집을 하나 짓고 난 다음 또 천하에 제일 간다는 천하정(天下停)으로 지어 놓으셨다. 우리 형제들 이름은 물론이고 집에 기르는 개들까지 한참이나 생각하신 후 마로(Maro 에스페란트어로 바다 라는 뜻)와 스텔로(Stelo 별이란 뜻)라고 지으셨다. 에스페란토어는 이탈리아어처럼 끝에 o 가 오면 남성명사이고 a 로 끝나면 여성명사이니 우리개들은 모두 숫캐였다는 뜻이다. 고양이들까지 에스페란트어로 '카뇨'등으로 지어 놓으셨는데 그 뜻까진 지금 생각이 안난다.
동물들이야 그렇다 하지만 우리 형제들 이름은 하나같이 이상하다고 학교 다닐 때 놀림들을 많이 받았다. 어린 동생들이 아버지에게 다른애들 이름처럼 좋게 지어 달라고 항의를 하면 아버지는 정색을 하시고 '네 이름이 이러이러하게 얼마나 훌륭한 뜻인데 그러느냐'시며 일장 연설을 하시는 통에 기가 죽어 아무도 더 말씀을 못 드렸다.
우리 집안은 아버지 세대가 쇠북 鍾자, 그다음 우리가 비雨자로 돌림자가 끝에 온다. 예를 들어 주위에 많은 李時雨, 이明雨, 이권우, 이*雨, 등등이 모두 우리 항렬이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雨자가 끝에 오게 되면 雨가 명사가 되어 뜻이 별로 안 좋다시면서, 예를 들어 내 이름은 본시 李人雨가 되야하는데 그러면 '사람의 비' 라는 뜻으로 비가 명사가 되버린다, 가운데 넣으면 雨人으로 인류에 단비를 내린다는 동사가 되어 뜻이 좋아진다 는 이론이셨다. 속으로 아버지는 왜 뜻만 생각하지 소리나는 음향효과는 전혀 생각안해 주시나 원망스럽고 다른 애들 이름이 부럽기 짝이 없었다.
그당시엔 출석부에 모두 한자로 이름이 기재돼 있어 학년 첫 시간에 출석부를 땐 반드시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러놓고 '느그 엄마가 비오는 날 니를 나으셨나' 라든지 '느그 아버지가 시인이냐, 철학자냐' 등으로 놀려 부끄러움을 잘 타던 나는 늘 얼굴이 발게져 고개를 푹 숙이던 기억이 난다.
동래(東萊)여고 1학년때는 어떤 선생님이 人자를 여덟八자로 잘못 읽어 이우팔로 부르는 바람에 아이들이 와 웃고 그다음부터 자주 이우팔로 불리워 놀림받던 괴로운 기억도 있다.
우눌(雨訥)은 선생들이 제대로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이우납으로 부른다던지, '어이 이기 무슨자고?' '무슨 이름이 이렇노'라는 예의없는 선생도 있었다 한다. 단 한 사람 한문선생만은 제대로 불러 주었다고한다.
그 당시엔 여자애들 이름이 대부분 子나 順, 淑, 姬로 끝나 국민하교 다닐 때 철없던 우기(雨紀)는 '아버지, 나도 내 친구들 정자나 순자같이 子로 끝나는 이름으로 지어주세요, 애들이 놀려요'라 하자 우기는 어렸을 때 밖에 나가 놀길 좋아하여 바람쟁이라고 아버지가 농담으로 '오냐, 그럼 오늘부터 풍자(風子)라고 하자'라 하여 그후 아버지는 집에서 우기를 풍자라고 자주 부르시었다.
우사(雨史)는 아버지가 나중에 출옥하여 집에 계실 때 부산대 건축과 친구들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 "우사 있습니까?" 라 하면 아버지는 "우사의 이름 뜻은 역사에 비를 내린다는 이러이러한 훌륭한 것인데 '우'자를 자네처럼 짧고 높게 발음하면 뜻에 어긋나니 길고 낮게 발음해야 합당하다" 며 일장 연설을 하시곤 하였다. 어르신이 말씀하시는데 끊을 수도 없어 필경 벌을 서고 있었을 터인데 그리고는 한참 연설하신 후에 "그런데 우사는 지금 집에 없네" 라 하셨다는 말을 듣고 나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자신이 지은 자식들 이름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끝에 우주(雨州)도 같은 불평이었는데 막내로 귀엽다고 머리를 두갈래로 옆으로 짜매서 귀여운 옥토끼같다고 '옥토'로 우리에게 내내 불리워 이제 그애도 중년이 다 되어 다시 '우주'로 불러주려니 오히려 이상하다.
대학 때는 그래도 좀 용기가 생겨 교수들이 출석 부를 때 한마디 씩 하시면 내가 뜻도 설명해 드리고 하였다. 2학년 때 지휘법 시간에 그당시 서울시향 지휘자시던 김만복(金萬福)교수가 '와, 우인이 니 이름 멋지네, 내캉 바꾸자!' 라 하여 '안됩니다! 저는 이만복해도 되지만 교수님이 김우인이라 하시면 기무인이라 발음되어 좋은 雨人이란 이름이 무인이 되어 베려버리거든요. 조우인이나 최우인이라면 모르겠지만요' 라 했더니 '아이고 그럿네, 김우인이라하면 이름베리것네'라 하며 다시는 이름 바꾸잔 얘기를 꺼내지 않으시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여자들도 이순자 김영자 같은 평범한 이름보다는 개성적인 이름을 좋아하여 요즘와선 내 이름이 마치 호(號)처럼 멋있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실지로 송지영(宋志英 1916~1988 민족일보사건으로 사형선고에서 무기로 감형. 1회 글 사진 중 아버지와 조용수 사이에 서 계시던 분) 씨의 호(號)도 우인(雨人) 이셨다.
하지만 인류에게 단비를 내린다는 뜻은 꼭 비가 아니라 배고픈이에겐 밥을 주고 외로운 사람에겐 관심과 사랑을 준다는 식으로 필요한 것을 베푼다는 뜻인데 과연 내가 그런 훌륭한 이름의 사명을 실천하고 있는지 심히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홍수질 때 비나 더 보태며 살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아버지가 가평에 숯공장 사장이셨다는 것이 나는 늘 신기하였다. 어떻게 공장 일을 운영했는가가 흥미로워 이것저것 해 본 질문에 아버지는 여러가지 설명을 해 주셨다. "그 공장건물로 들어가려면 입구에 나무로 된 갑판같은 곳을 지나가야 하는데 그곳을 밟으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커서 아버지가 그 공장을 인수하기 전에 전 사장은 소리 안나게 살금살금 걸어가 갑자기 문을 열어젖혀 직공들이 일을 열심히 하나 안하나 점검을 했다거든. 그런데 아버지는 그냥 걸어가니까 소리가 크게 나기 때문에 직공들이 사장이 오는 것을 미리 알고 그러기 때문에 양심상 평소에 게으름을 부릴 수 없고 더 열심히 일하게 된다 하더군." 그러니까 모든 것이 인간적으로 사람들을 믿고 맡기는 식으로 경영했고 그 방식은 늘 통하여 그렇게 맡겨 놓으시고 서울로 어디로 일을 보러도 다니셨다 했다.
또 언젠가는 그 후 내게 늘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는 말씀인데, 일제 때 유치장에 구금되면 17일간(또는 27일간이었나? 그 열흘이란 얼마나 끔찍한 차이인가) 매일 매일 고문을 당하며 취조를 받는데 그 17일간에 항복안하면 다른 곳으로 송치되고 그 17일 마지막날 경찰서장이 유치장으로 찾아와 경례를 붙인다 하였다. 너무도 악랄한 취조라 좀처럼 그런 일이 없는데 그 경찰서가 서고 두번째 경찰서장이 아버지를 찾아와 경례를 붙였다 했다. 그 악랄한 일본놈들이 자신보다 약한자에겐 무자비해도 강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에겐 고개를 숙이는 민족성 때문이라 하셨다. 나는 너무도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어떻게 그렇게 견뎌 내셨어요?" 했더니 "동지의 있는 곳을 대라며 너무도 심하게 고문하여 아버지는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지, 그런데 그 순간 네 할아버지 환영이 뚜렷하게 나타나서 '이놈! 정신 차려라!' 하며 호통을 치시겠지. 그래서 다시 정신을 차려 버틸수 있었다" 라 하셨다. 그리고 '내 조국이 망해가는 위기인데 어찌 내 일신의 고통이 문제가 되겠는가 하는 정신으로 버티었다' 라 하시던 말씀은 수많은 친일파들이 새겨들어야 할 가슴 아픈 말씀이시다.
아버지는 집에 오시면 늘 몸이 아프다고 앓으셔서 나는 그후 국민학교 때부터 하루에 한시간씩 시간을 내어 아버지를 안마해 드리기로 하였다. 특별히 시험 전날이 아니면 내 자신에게 한 그 약속을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 한 고등학교 때까지 꼭 지켰다. 한 시간이나 아버지 다리나 팔 등 허리를 두드리거나 주물러 드리고 하다보면 팔이 아팠지만 아버지가 그 경찰서에서 당하신 고통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어 참았다. 팔이 아프거나 좀 지루하다가도 아버지가 "아 시원하다~!' 하는 한마디만 해 주시면 왜 그렇게 기쁘던지 신이 나서 아프던 팔도 싹 낫던 생각이 난다.
내가 어렸을 땐 머리를 자르러 여자애들도 모두 '리발소'에 갔다. 아저씨들은 의자 팔걸이에 나무판을 걸쳐놓고 거기 올라가 앉으라 해 놓고 머리를 잘라 주었는데, 가만히 보니 어른들은 머리를 자르거나 면도를 해준 후에 등을 두드려주는 것이 소리도 엄청 커서 참 시원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나도 아버지 등을 그렇게 손바닥을 오목하게 하여 아무리 두드려 보아도 그런 소리가 안나 속상했다. 또 손안마도 배우려고 유심히 보았는데 손가락을 하나씩 잡고 빙빙 돌리다가 끝을 잡고 탁 빼내면 손톱에서 딱하고 신기한 소리가 나서 여러번 해 봐도 소리가 안나더니 자꾸 해보니까 나중엔 소리가 나서 참 기뻤다.
얼마전 내가 너무 힘이 없고 몸이 약하여 한 초능력자에게 몸을 보이며 치료를 받다가 지나가는 말로 아버지 얘기를 하였더니 그 분 말씀이 내가 그 때 성장할 때 내 손을 통해 많은 기(氣)를 아버지에게 뺏겼고 그 영향이 내게 평생 갔다 했다. 옛날 돈 많은 부호영감들이 어린소녀를 사서 옆에 두고 기를 뺏아 회춘하려한 것도 다 일리있던 얘기라 하여,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아버지에게 그런 좋은 기를 드릴수 있었다니 참 다행이라 싶었다.
그 후 아버지는 5.16을 겪으며 구속후 거친 취조를 받으시고 교도소에서 수년간 고생을 하셨는데 그 때 내가 드린 기가 조금이라도 버티실 힘이 되셨기를 빌 뿐이다. 그러나 기라는건 상호적이라 서로 오갈수 있을진데 내가 아버지께 그런식의 기를 드렸다면 나야말로 아버지의 그 독특한 정신적 기를 받았을 것 아닌가, 아니 받았기를 빈다. 특별히 건강한 몸도 아니시면서 그토록 잔혹한 고문을 견뎌낼수 있었던 정신력은 바로 그 강한 기가 있었던 까닭 아니셨겠는가.
그 분은 염력이 높은 분이라 호기심으로 내가 한 번 나의 아버지가 지금 편히 계신가 하고 물어보았다. 한참동안 눈을 감고 관(觀)을 해 보더니 아주 편히 잘 계신다 하였다. 그래서 호기심이 더 발동하여 물어 보았더니 박정희와 이승만은 아주 불편하게 고통을 받고 있고 김구선생님은 편하시다 하여, 아 제발 그것이 사실이기를 하며 빌었다. 그러니까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천당과 지옥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친 김에 나와 아버지는 전생에 어떤 인연이었는가를 물어 보았더니 나는 전생에 남자였는데 아버지는 내가 극진히 모시던 스승이었다 했다. 안 보았으니 어찌 알랴마는 어쩐지 말이 된다 싶었다.
그러다 상상을 해 보니 우리가 수일원 아저씨들이라 부르며 따랐던 아버지 제자분들, 사상 아저씨(김상찬), 월내 아저씨(배다지), 김해 아저씨(조현종), 하동 아저씨(하상연) 같은 분들도 혹시 나중에 아버지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정말 인연이 있고 후생(後生)이 있다면 그 아저씨들은 반드시 아버지와 가족관계같이 가깝고 좋은 인연으로 태어날 것 같다. 아니 이미 전생에서부터 그런 인연이었을지도 모른다.
하기는 많은 사람이 그 사람에게 좋은 감정으로 좋은 기를 보내면 편안할 것이고 원한의 나쁜 감정을 보내면 불편한 것이 산사람이나 죽은 영혼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나는 그동안 남원의 화엄사(華嚴寺)나 포천의 정맥선원(正脈禪院)에 가면 고승(高僧)들에게 부탁하여 아버지의 천도를 부탁했으니 그 또한 나보다 훨씬 높은 염력이 아버지께 갔으리라 믿는다. 게다가 우눌(雨訥)의 처 김희자(金希子)올케가 그동안 절에 다니며 지극정성 시아버님을 위해 천도를 빌었으니 그 모두 허사는 아니었으리라.
55년에는 한 법대 여학생인 최옥수(崔玉秀)가 아버지 강의를 듣다가 정치과로 옮겨왔고 하루는 우리 집에도 방문하였다. 말씀끝에 고향이나 가족관계를 물으셨는데 동생이 부산여고에 입학했다고 대답하여 아버지는 '우리애도 이번에 부산여고에 들어갔으니 서로 친구가 되면 좋겠다'라 하셨다. 그리고 그 몇일 후에 그 동생인 최송자(崔松子)는 정말 언니 친구가 되어 우리집에 자주 놀러오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내가 최옥수언니와 최송자언니, 그리고 그 남동생인 최무수(崔武秀)를 모두 알게 된 계기이다. 내가 대학 1학년에 입학하였을 때 최무수는 정치과 2학년으로 그 때 나는 그를 최송자언니 집에서 처음 만났다.
그렇게 하여 62년 봄 문리대 정원의 마로니에 나무 아래 벤치에서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마로니에아래는 항상 아름답고 가슴 설레이게 하는 낭만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나무아래 앉아 얘기를 나누는 우리는 그렇게 낭만적일수만은 없어 날이 갈수록 간극이 벌어져 가고 있었다.
"어제 데모는 정치과 학생들이 주도했더군요" 라며 일부러 '정치과'라는 단어를 강조해 본다. 같은 정치과인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뜻을 그는 대번에 알아차린다. "아 네.. 나도 참석은 했어요. 주동은 아니었지만 어깨동무는 해야 했으니까요..우리 과 친구들(김중태 등)이 주동이 되었는데 영웅이 되고 싶은 친구들은 항상 있지요"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헤쳐나가려는 젊은 의기를 영웅심이라구요?" 이쯤해서 우리의 대화는 끊긴다.
앞만 보고 앉아있던 그는 "나는 정치과에 들어온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어요. 나는 본래 농대(農大)로 가서 앞으로 농촌에서 과수원을 일구며 사는것이 꿈이었는데 두 누님들이 정치과에 안 들어가면 등록금을 대 주지 않겠다고 위협하며 압력을 넣는 바람에.."
대화는 끊기고 어색한 침묵속에 앉아 있다가 우리는 일어선다. 그 후에도 마주치면 같이 학림(鶴林)다방에도 가고 벤치에 앉아 얘기도 나누고 하여 겉으로는 꽤 친한 사이같아도 속으로는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다독으로 철학과 문학방면에 매우 박학한 것 같았다. 어느날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變身)에 대한 상징의 의미를 오랫동안 얘기하고 또 어느 날엔 시지프스의 신화(神話)의 의미에 대해 얘기를 하여 꽤 들을만 하고 재미 있기도 하였다.
어느날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쓰신 '현순간정치문제소사전(現瞬間政治門題小事專)이란 작은 책을 주며 한번 읽어보라 하였다. 나는 속으로 이제 그 책을 읽어보면 많이 배우고 깨달은 바가 있겠지 하며 기대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 만났을 때 그는 아버지가 강조하시는 민족주의는 좋으나 왜 혁명이란 피의 투쟁을 강조하는가, 왜 정치 용어들을 구태여 '인민'을 '민인'으로 '평화'를 '화통'으로 '통일'을 '일통'으로 앞뒤를 바꾸어 쓰는가 하는 평을 쏟아 내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민족주의를 외치면서 사실은 진짜 사상은 감추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말까지 하였다. 나는 갑자기 열이 올라 "그건 단순히 독특해 보이려고 말장난으로 용어를 바꾸어 쓰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쓰고 있는 용어부터 올바르게 정리해야 한다고 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늘 쓰고 있는 '통일'이란 단어도 실은 남북 모두 자신은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상대를 정복만 하려는 '일통'을 주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진정한 '통일'이란 용어부터 정립해 놓고 그렇게 전진해 나가야 해요" 라고 쏟아 놓고 있으면서도 아 이 사람은 절대로 변할 사람이 아니구나 싶어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한참 슬픈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 보더니 "이렇게 청순하고 연약해보이는 우인씨 가슴에 어떻게 그렇게 딱딱한 아버지의 사상이 가득 들어차 있을수 있는지 놀라울 뿐입니다. 그 속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남아있지 않군요. 아버지의 사상을 모태신앙처럼 그렇게 무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 우리는 일어섰고 그렇게 헤어졌다.
그 얼마후 그는 군에 들어갔다. 그 당시 대학생들을 군에 보내려고 빵빵군번이라고 00의 군번으로 시작하는 학병시스템이 생겼는데 군 생활을 남들보다 6개월이나 단축할수 있다는 잇점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자원했고 그렇게 군에 간 학생들은 6개월의 몇배에 해당되는 보상을 해야했다. 대학에 가는 숫자가 미미하던 시절, 조금이라도 상관이 되면 '대학생 한번 때려보자'하며 빳다질을 해 대었으며 '대학생이면 다냐, 빨리 제대하니까 그만큼 두배로 고생을 해 봐라' 하였다. 그는 엄청나게 많이 맞아 허리까지 조금 다치어 제대하였다.
그는 특히 다른 대학생들 보다 흔하지 않은 '서울대학생 한번 때려보자'하여 더 맞았다는데 일제시대동안 군에 있던 우리나라 군인들이 다시 한국군대의 헤게모니를 잡게 된 상황에서 일제의 잔인한 악습은 고스란히 전래되어 왔던 것이다. 그 때 유명한 '최일병사건'은 여자친구의 편지를 잘 돌려주지않고 공개하며 놀려대는 상관에게 참다못해 소총으로 난사를 하여 그 상관을 즉사시킨 '총기난동사건'으로 신문에서 연일 떠들고 있었다.
그는 서울 문리대생이었고 같은 성(姓)의 '최일병'이라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다. 왜냐하면 그가 불쌍하여 나도 가끔 그에게 위문편지를 보냈고 그는 나의 편지야말로 그의 지옥같은 군 생활을 지탱해준 큰 힘이 되었다 했다.
내가 3학년 때 그는 제대하여 3학년으로 들어와 다시 학업을 계속하였다. 학교에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더 도서관을 드나들며 학교공부가 아닌 언제나 하던 '자신만의 진짜 공부'에 열을 올려 문리대 앞의 그 쎄느강(문리대 담을 끼고 흐르는 폭3m 정도의 또랑천을 학생들은 그렇게 불렀다)가를 지나 귀가하던 그는 항상 두꺼운 책들을 들고 있었다. 64년 6.3데모로 대학가가 최루탄연기에 휩쌓여 있던 어느 날에도 나는 책들을 끼고 가는 그의 모습을 멀리서 볼수 있었고 그 모습은 내 마음속에서 그를 더 쓸쓸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먼 훗날 그로부터 5년이나 더 흐른 후 그는 나의 남편이 되었던 것이다. 운명이 그렇게 이미 짜여져 있었음을 미리 알았다면 우리는 좀 더 다정하게 서로에게 아픔을 주지않고 지낼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그 후 나는 그럼 내 결혼은 언니와 송자언니가 중매를 한것인가, 아니면 옥수언니에게 그의 동생과 내 언니가 친구가 되도록 매개하신 아버지가 중매를 한 셈인가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6.25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부산까지 피난가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아버지가 부산대에 계셨을 리도 없었으니 옥수언니를 만나시지도 못했을 것이므로 그렇다면 6.25를 일으킨 자들이 중매를 선 셈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6.25는 김일성이 남침으로 일어났으며 미국이 안 도와주었다면 한국은 사라졌을 테니 미국이 은인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일성이 쳐내려오도록 유도한 것은 누구인가? 2차대전후 스탈린과 루즈벨트 그리고 처칠은 삼상회담에서 미국은 일본을 (원자폭탄으로) 치고 한반도를 양분하여 쏘련과 미국이 반씩 차지하기로 하였는데 동족의 땅을 양분해 두면 하나로 합치고자 동족분쟁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예견할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러나 조약후 쏘련은 김일성에게 무기를 주며 남쪽을 치라 했고 이 사실을 안 미 정보부에선 에치슨 국방장관을 시켜 미국이 방위하던 선을 일본으로 전략상 일부러 후퇴시켜 남한을 비워둔것이 에치슨라인의 일본후퇴인 것이다. 이 사실은 미국에서 기밀문서가 공개되는 50년이 지나 미국 학자들도 인정하는 이야기로 에치슨라인 일본 후퇴때문에 6.25가 일어났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이야기이다.
93년 남매간첩 조작사건으로 4년을 복역하고 나와 군사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삼석(咸陽 생)은 평하기를,
"미국은 애초 예상과는 달리 2차대전이 2년이나 빨리 끝나자 산더미같이 쌓인 무기, 전쟁물자, 농산물들 때문에 공황으로 치달았다. 아사지경의 미국은 거대한 군수산업이 행정부를 괴롭히여 결국 워싱턴 당국은 한국전쟁을 유도해 38선 언저리에서 정전하고 국토재건에 미국의 잉여물자를 쏟아붓는 전략을 선택하였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미국정부의 전쟁계획이 파놓은 함정이듯, 한국전쟁도 미 군수산업의 전략적 함정에 빠진것이다. 50년 당시 미 GNP는 전세계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런 대국이 아무리 전후 공황이 와서 실업자들이 아우성 친다해도 이제 겨우 독립해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한국에서 무자비하고 처참한 전쟁판을 벌여서야 되겠는가!" 라 하였다.
그런 미국의 미끼에 김일성이 걸려든 것이고 바로 6.25사변이 되었으니 그를 유도한 루즈벨트나 스탈린 김일성이 내 결혼의 최초 중매인이 되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