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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제6권
18. 권지품(權智品)
“또 최승아, 보살마하살은 다시 제10 권지(權智)의 정혜삼매(定慧三昧)를 사유하고 수행할 것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보살은 제10 권지의 정혜 삼매를 수행해야 하는가?
[무량정의 삼매]
이에 최승아, 보살마하살에겐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무량정의(無量定意)이니라.
보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면,
한량없는 몸의 행[身行]을 관하여 알고,
한량없는 입의 행[口行]을 관하여 알며,
한량없는 뜻의 행[意行]을 관하여 알고,
한량없는 부처님 세계를 관하여 알고 가서는 장엄하며,
한량없는 중생을 지혜로써 가서 항복받는 것을 관하여 알며,
한량없는 교화받을 중생의 지혜 업이 성취됨을 관하여 알며,
한량없는 큰 광명을 놓을 것을 관하여 알고 아직 제도되지 못한 이를 접(接)하며,
한량없는 대인(大人)의 거룩한 몸매의 광명을 놓되 비추지 않는 바가 없음을 관하여 알며,
한량없는 바른 법륜을 굴리되,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과 악마며, 또는 마천(魔天)ㆍ범왕ㆍ제석ㆍ사천왕으로서는 굴릴 수 없고 혼자만이 능히 굴릴 수 있음을 관하여 알며,
한량없는 보살들이 모든 부처님 세계에 노닐되 모든 중생들의 길잡이[導師]가 되어 줌을 관하여 아느니라.
비록 부처님의 힘을 얻었으나 그 힘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몸과 뜻을 놓아버렸으나 놓아버린 바가 없는 것과 같으며,
부처님의 지혜를 획득했으나 그 지혜에 의지하지 않고,
부처님의 일으킴으로써 그들을 일으키며,
부처님의 신족을 지니면서 한량없는 경계를 제도하고,
부처님의 청정함으로써 온갖 행을 청정하게 하며,
부처님의 행하는 바로써 그 행이 초월하고,
부처님의 헤아리는 바로써 모든 헤아릴 바를 뛰어나며,
부처님의 분신의 정[奮迅定]으로써 겁약하지 않고,
부처님의 청정함을 얻음으로써 불사(佛事)를 행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고 나면,
두루 일체지를 관하고 일체지를 관함으로써 다시 일체지의 업(業)을 관하며,
이미 지혜 업을 관하고서 곧 능히 닦아 익히고,
지혜를 능히 닦음으로써 곧 지혜의 가르침을 받으며,
이미 지혜의 가르침을 받고는 미묘한 지혜[妙智]를 사유하고,
이미 미묘한 지혜를 사유하고는 곧 지혜의 연(緣)을 구하며,
이미 지혜의 연을 일으키고는 곧 해탈하는 지혜를 얻고,
해탈을 얻음으로써 곧 해탈을 남김 없이 얻으며,
남김 없이 얻음으로써 곧 법과 율에 상응하느니라.
위없는 바른 요목[正要]은 보살행을 자라게 하고 보살의 업을 이루며,
보살의 뜻에 나아가고 보살로서의 고통을 참으며,
보살의 악(惡)에서 물러나고 보살의 창고[藏]에 들어가며,
보살의 광명을 붙잡고 보살의 어두움을 없애며,
보살의 지위에 머물러 보살의 몸매[相]를 나타내며,
보살의 귀머거리됨을 던져버리고 보살의 음성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니라.
보살은 이것을 듣고도 동요하지 않으며 다시 두려움을 품지도 않고 또한 물러나지도 않으며,
마음으로 싫증을 내지도 않고 이익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버리거나 여의지도 않고 또한 의심이 있지도 않으며,
또한 중간에 끊지도 않고 또한 보살의 듣고 보는[聞見] 데에도 의지하지 않느니라.
그렇게 되는 까닭은 보살마하살은 모든 중생에 있으면서 무리에 따라 들어가기 때문이니,
법칙(法則)을 관찰하여 큰 서원의 마음을 이루고 그 중생들에게 모범이 되어 주며,
대승의 법에 나아가 부처님의 강해(江海)에 들어가고 곧장 나아갈 데에 이르러 흔적을 잃지 않느니라.
[세 가지 큰 서원의 갖가지]
보살마하살은 언제나 세 가지 크고 넓은 서원을 사유해야 하나니,
큰 서원의 마음을 지녀서 중생을 인도하고 이 언덕에서 저 언덕까지 이르게 하느니라.
무엇을 세 가지의 크고 넓은 서원이라 하는가?
첫째는 증상(增上)의 큰 서원이요,
둘째는 증중(增中)의 큰 서원이며,
셋째는 증하(增下)의 큰 서원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보살에게는 다시 세 가지의 큰 서원이 있느니라.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는가?
이른바 첫째는 중상(中上)이요,
둘째는 중중(中中)이며,
셋째는 중하(中下)라 이름하나니,
이것이 바로 세 가지 큰 서원이니라.
또 보살에게 다시 세 가지 큰 서원이 있느니라.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는가?
이른바 첫째는 하상(下上)이요,
둘째는 하중(下中)이며,
셋째는 하하(下下)라 이름하나니,
이것이 바로 세 가지 큰 서원이니라.
[제10 권지의 정혜삼매의 공덕]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로서 이 제10 권지(權智)의 정혜삼매를 얻은 이는,
이에 이 제일 증상(增上)의 크고 넓은 서원의 마음을 능히 체득하여 중생을 길러 부양하고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며,
권도[權]를 지니어 지혜를 행하고 애욕의 속박을 여의며,
잘 배워서 보살의 한 모양[一相]에 깊이 들어가고,
모든 모양은 또한 모양이 없음을 이해하며,
보살의 허깨비 법을 환히 잘 알고,
중생이 뜻을 세워서 견고한 데에 있게 하며,
베푸는 마음[施心]을 뜻에 매어 두되 다 중생을 위하느니라.
미래와 과거와 현재의 모든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께서는 큰 자비를 행하여 두루 온갖 것을 덮어 주시되,
그 지혜가 없는 이면 그를 위하여 지혜의 광명을 나타내고,
눈이 멀고 없는 이면 그를 위하여 눈이 되어 주시며,
구호할 이가 없는 이면 그를 위하여 덮어 주시고 보호하시나니,
모든 부처님의 법을 충족시키면서 바라는 바가 있는 중생으로 하여금 법이라는 생각을 제거하게 하느니라.
그렇게 하는 까닭은 마치 장자(長者)가 금ㆍ은의 진기한 보배와 자거ㆍ마노ㆍ진주ㆍ호박 등 천억의 재물을 쌓아 둔 창고 안에 여의명월보주(如意明月寶珠)가 더 있게 되면, 이르거나 놓아 둔 데마다 번쩍거리지 않음이 없고 색상(色像)이 제일인 것과 같나니, 그 구슬의 성분 자체가 밝은 것이기 때문이니라.
보살도 그와 같아서,
마음의 여의주[心意珠]를 얻어서 지혜의 문을 내고,
지혜의 광명으로써 두루 비추는 바 있으며,
통달하여 왕래하되 걸리는 것이 없고,
이 정의(定意)에 드는 데도 역시 장애가 없느니라.
마치 저 명주(明珠)의 광명이 비추는 바는 스스로 지능(志能)과 본성(本性)을 나타냄이 스스로 그러한지라, 제어하고 부리어 그렇지 않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나니,
왜냐하면 체성(體性)이 자연(自然)인지라 그렇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그러한 것도 또한 그렇지 않고, 그렇지 않은 것도 또한 그렇지 않으며,
중생의 그러한 것도 보지 않고, 중생의 그렇지 않은 것도 보지 않느니라.
[그러한 데서도 벗어나고, 또한 그렇지 않은 데서도 벗어나다]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중생은 역시 그러한 데서도 벗어나고, 또한 그렇지 않은 데서도 벗어나느니라.
어떻게 중생은 또한 그러한 데서도 벗어나고, 또한 그렇지 않은 데서도 벗어난다 하는가?
말한 바 중생이 그러한 데서 벗어난다고 함은,
5도(道)의 과한(科限)에는 유전(流轉)이 끊이지 않아서,
한 몸[一身], 백 몸 혹은 천만의 몸이 되기도 하고,
한 겁(劫), 백 겁 혹은 천만 겁 동안 몸을 버리고,
몸을 받되 4대를 성취하여 5음을 기르고 자라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중생은 그러한 데서 벗어난다고 하느니라.
어떻게 중생은 그렇지 않은 데서 벗어난다 하는가?
이에 중생의 체성은 본래부터 공(空)하나 공에는 또한 식(識)이 없고 다시 식이라는 생각[識想]도 없거니와 그때 저 사방에서 4개의 바람[風]이 일어나나니,
첫째 지기(地氣)의 바람이 불어서 공(空)에 이르게 되고,
둘째 수기(水氣)의 바람이 불어서 공에 이르게 되며,
셋째 화기(火氣)의 바람이 불어서 공에 이르게 되고,
넷째 풍기(風氣)이니 곧 공의 바람[空風]이 바로 그것이니라.
여기에 정신[神]이 합치고 식(識)이 걸리어 홀연히 서로 만나면, 다섯 가지 법이 서로 섞이고 모여 이에 형체를 이루는 것이니,
하늘을 만나면 하늘이 되고 사람을 만나면, 사람이 되어 그 형체의 물든 바에 따라 그 몸을 이루게 되느니라.
가령 지기는 있어도 수ㆍ화ㆍ풍이 없으면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고,
가령 수기가 있어도 지ㆍ화ㆍ풍이 없으면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며,
가령 화기가 있어도 지ㆍ수ㆍ풍이 없으면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고,
가령 풍기가 있어도 지ㆍ수ㆍ화가 없으면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며,
가령 신식(神識)이 공(空)에 의지하여 스스로 다스림이 있어도 지ㆍ수ㆍ화ㆍ풍이 없으면 역시 이루어지지 못하느니라.
보살은 마땅히 신식은 공의 성품[空性]이로되, 법계에 섭취된 줄 관해야 하느니라.
식과 4대의 다섯 가지 법이 있어 상응하면 5음의 몸을 이루지만, 민첩하고 빠르게 공계(空界)에 나아가며,
식은 스스로 차고 거칠고 껄끄럽고 굳고 딱딱한 것을 깨닫는 것이므로 곧 공을 여읠 줄 알며,
뜻을 오로지하여 사유하되 마음에 공(空)하다는 생각을 기억하여 고요하고 함[爲]이 없으면,
곧 스스로 허공 중에서는 이 세상에 와서 무위(無爲)에 들거나 무여열반계[無餘泥洹界]에서 멸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느니라.
만일 그 신식이 느리고 무디고 영리하지 못하여 어둡고 흐리멍텅하여 공을 여읜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이를테면 자기 몸은 곧 허공이라고 여기면서 그 형상으로 인하여 대상을 받아들여 생하는 문[生門]에 나아가야 하나니,
선(善)을 만나면 곧 선하게 되거니와, 악(惡)을 만나면 곧 악하게 되느니라.
선을 만난 중생은 선ㆍ악이 있음을 믿으며,
금세(今世)와 후세(後世)와 존귀한 이ㆍ비천한 이ㆍ어른과 어린아이를 알고 세간의 괴로운 것을 싫어하게 되어 선을 익히며,
게으르지 않고 오래오래 하면 그제야 도(道)를 얻느니라.
악을 만난 신식은 영원히 선을 여의고 악을 행하기를 마음에 달게 여기며,
생사에 유전하여 지옥의 고통을 겪고 식신은 고뇌를 받되 잠시도 멈춰 쉬는 일이 없나니,
그제야 스스로 깨닫고 본래 행한 일이 금률(禁律)에 맞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며,
점차로 스스로 고치고 책망하여 악을 버리고 선으로 나아가며,
처음 발심해서부터 여러 겁수를 지나면서 공을 쌓고 덕을 포개어 온갖 행이 갖추어지면 비로소 도(道)를 이루게 되나니,
이것을 바로 중생이 역시 그렇지 않은 데서 벗어난다고 하느니라.
[그러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보살마하살은 언제나 사유하되, 한 마음으로 그러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관찰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보살은 그러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관찰하는가?
그러한 것은 세간의 법이요 그렇지 않은 것은 바로 도이며,
그러한 것은 바로 누(累)요 그렇지 않은 것은 집착이 없는 것이며,
그러한 것은 바로 있는[有] 것이요 그렇지 않은 것은 바로 공(空)이며,
그러한 것은 식이 있는[有識] 것이요 그렇지 않은 것은 이미 여읜 것이며,
그러한 것은 이름[名]이 있고 남[生]이 있고 늙음[老]이 있고 병듦[病]이 있고 죽음이 있는 것이요
그렇지 않은 것은 남이 없고[無生] 일어나고 소멸함이 없는 법이며, 또한 유전하여 5도에 내닫지 않는 것이니라.
보살은 생각해야 하느니라.
그러한 것의 유의 법[有法]을 버리고 그렇지 않은 행을 닦으면 온갖 지혜 광명이 걸리는 바가 없으며,
멸하는 자기의 법을 버리고 저절로 일어나지 않고 또한 멸하는 것도 보지 않으며,
시방의 모든 세계를 청정하게 하되 아직 제도되지 못한 이를 제도하며,
비록 친근한 이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친근한 것을 보지도 않고,
사람들을 위하여 수고하면서도 괴로움이 있다고 헤아리지 아니하며,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우두머리가 되고,
법 바다[法海]로 끌어들이되 산란이 없는 정(定)을 구하며,
한량없는 값진 보배를 캐서 이르게 하고,
5분법성(分法性)과 공ㆍ무상ㆍ무원과 선정ㆍ해탈ㆍ상호ㆍ신족으로써 보배를 삼아 마음이 당황하지도 않고 또한 두려워하지도 않느니라.
[무위정 삼매]
다시 삼매가 있나니, 이름은 무위정(無爲定)이니라.
보살마하살로서 이 삼매에 머무는 이는 환히 빛나는 정수(正受)로써 중생의 자취를 청정하게 하고,
싫증을 내지 않으면서 모든 중생들에게 법성의 공(空)을 연설하며,
공을 아는 중생이라야 때에 깨칠수 있나니,
마음을 돌리어 도(道)에 나아가되 마침내 물러나지 않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최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허공 끝의 그렇지 않은 중생들이 처한 세계]
“내가 오늘 이 법계의 자재정의(自在定意)에 머물러,
천안(天眼)으로써 위의 허공 끝의 그렇지 않은 중생들이 처한 세계를 관찰하니,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에 억백천의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이 처음 막 형상을 받아 생하는 문[生門]으로 나아가려 하느니라.
그때에 시방의 수없는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 세존은 모두 화신(化身)으로서 허공계에 머물러,
그들을 위하여 4기(氣)와 신식(神識)에 관한 허무(虛無)한 법을 연설하시되,
공(空)에 나아가면서 다시 공을 여의고 여읨을 짓는 식(識) 또한 그러하나니,
아공(我空)에서 아유(我有)를 헤아리되 영원히 그로써 공을 여의게 하느니라.
만일 그들이 공에 의지하여 식의 형상을 받고 공관(空觀)을 사유한다면,
곧 공계(空界)에서 식의 형질을 버리고 남음이 없는[無餘] 경계에 들어 멸도를 취하는 것이므로,
이 세간으로 와서 5음의 형상을 받거나 하여 모든 고뇌를 겪지 않느니라.
여래는 권지(權智)로 형상 없는 식(識)을 제도하시며,
허공계에 덕화(德化)를 나타내시되 혹은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국토를 나타내시기도 하고,
혹은 때로는 서 계시면서 현성의 잠잠함[賢聖黙然]을 나타내시기도 하며,
혹은 때로는 거닐며 다니고 읊고 외고 함에 게으르지 않나니,
식이 비록 보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다만 모든 부처님 세존은 위의와 예절은 처음부터 그만두시지 않느니라.
[허공이 덮은 그지없는 세계]
보살은 마땅히 허공이 덮은 그지없는 세계를 관하되,
허공은,
‘나는 지금 저 많은 세계 국토를 덮어 주고 있다’라는 생각도 없고,
허공은 역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지극히 공로가 있다’라고도 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허공이 덮는 본래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법은 변하거나 바뀌지 않고 저절로 언제나 머물러 있고,
법은 움직이거나 옮아가지 않고 또 약간의 것도 있지 않으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다시는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나니,
그렇게 되는 까닭은 허공의 법계는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허공의 신식 세 가지]
보살은 다시 허공의 신식[虛空神識]을 사유해야 하나니, 그 식에는 세 가지 모양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 나아가는[趣] 것이요,
둘째 뉘우치는[悔] 것이며,
셋째는 또한 나아가지도 않고 또한 뉘우치지도 않는[亦不趣亦不悔] 것이니라.
어떤 것이 허공의 신식의 첫째의 나아가는 것인가?
이른바 첫째의 나아가는 것이라 함은,
생하는 문[生門]을 향해 나아가 음(陰)의 종자를 길러 자라게 하여 종류에 따라 신식에 물들어 곧 그 형상을 받는 것이니,
보살은 알아야 한다.
허공의 신식은 또한 그 중간에 머무름[中止]이 없어서, 신식이 4기(氣)와 합쳐서 와서는 그 중간에 머무르고,
중간에 머물러서 형상을 받되 혹은 반 달[半月]을 경과하기도 하고, 혹은 한 달을 다 채우기도 하며, 혹은 삼ㆍ사ㆍ오ㆍ육ㆍ칠ㆍ팔ㆍ구ㆍ십ㆍ십일ㆍ십이 월(月)을 경과하되,
곧 허공에서 중간에 머물러 있다가 5도(道)로 나아가기도 하느니라.
5도 중에 머물러 있을 때는 곧 앞에 나타나 있게 되고,
5도 중에 들어가서 머무른 뒤에는 혹은 일ㆍ이ㆍ삼ㆍ사 월에서부터 십이월까지 이르게 되며,
하늘의 변화[天化]로 중간에 머물러 있을 때는 또한 일(日)ㆍ월(月)ㆍ연세(年歲)의 기한은 없고,
지옥ㆍ아귀ㆍ축생도 역시 중간에 머물러 있되 저마다 동일하지 않아서 허공의 식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도 담연(澹然)하여 형상도 없고 볼 수도 없나니,
아유안(阿維顔)에 이른 이나 모든 부처님 세존만이 볼 수 있을 뿐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허공 중에 머물러 있다가 생하는 문으로 향해 나아가는 것이니라.
어떤 것을 허공의 신식의 식에는 둘째의 뉘우침이 있는 것이라 하는가?
이른바 둘째의 뉘우친다 함은,
4기(氣)와 합침으로써 식이 그 가운데 처할 때에 그 형상 받은 것을 뉘우치고 마음으로 공(空)하다는 생각을 하며,
박연(泊然)히 하는 일 없이 생각이나 집착을 헤아리지 않느니라.
또 모든 부처님 세존은 화불(化佛)의 성품으로써 가르침에 머무르면 즉시 깨치게 되며, 무여열반계에서 반열반하느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모든 부처님 세존은 삼세 가운데서 중생을 가르치시고 경계하여 저 무위의 언덕에 이를 수 있게 하시는 것이 헤아릴 수 없고,
한 중생을 위하여도 세상마다 돌아다니시되 애쓰고 고생하며 수없는 방편으로 교화하시어 제도될 수 있게 하나니,
비록 고뇌에 처하게 된다 하더라도 수고롭게 여기지 않고 또한 다시 고달파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없느니라.
여래가 세간에 출현할 때는 모든 부처님의 몸으로 변화하느니라.
허공계의 신식(神識) 가운데 머물러 지극히 미묘하고 위없는 도의 가르침을 연설하기 위하여 그 가운데 부모에 머물러 신식이 깨치며,
교화하는 법언(法言)을 받으면 곧 그 곳에서 무여열반계에 들어가 반열반하는 것도 헤아릴 수 없고,
시방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제도할 중생보다 더 많아서 비유할 수조차도 없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로서 이 법계의 정의자재삼매에 머무른 이가 곧 방편을 가지고 지혜를 행하되, 한량없는 법을 수행하여 보살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셋째의 허공의 신식이 또한 나아가는 데도 있지 않고 또한 뉘우침도 있지 않은 것인가?
이른바 또한 나아가는 데도 있지 않고 또한 뉘우침도 있지 않다고 함은,
허공계의 법성에 식(識)이 그 가운데에 처하고, 그 가운데에 머물러 있는 형질은 마치 그림자와 같고 빛과도 같으며,
지극히 작고 지극히 가늘어서 공한 의식[空意識]이라 생각되나,
무위의 경계에도 이르지 못하고 물러나 인간의 존재[有]에도 미치지 못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또한 나아가는 데도 있지 않고 또한 뉘우침도 있지 않다고 하느니라.”
[열반계, 허공의 신식, 공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의 차별]
그때에 최승보살이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그와 같사옵니다. 세존께서 말씀한 바는 허공의 신식이 허공 가운데 머물러 있을 때 형질이 빛이나 그림자와 같은데,
그것은 아유안(阿維顔) 보살이나 모든 부처님 세존만이 볼 수 있을 뿐이라 하셨나이다.
만일 4기(氣)와 신식이 공 가운데 머물러 오고 감이 있게 한다면, 그 열반계와 제일의(第一義)는 역시 신식도 있어야 하고 또한 그 가운데 머물러 있겠습니다.
가령 신식도 있고 그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도 있다면, 그 열반계와 허공의 신식과 공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나이까?
가령 차별이 없다면 열반도 없고 열반이 없다면 곧 도과와 삼승의 법도 없으리니,
생사의 법계와 열반계는 곧 차이가 없으므로 열반이 바로 이것은 생사요 생사가 바로 열반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허공의 신식과 허공 가운데 머물러 있다고 하신 데는 갑절 의혹이 더합니다.”
그때에 세존께서 최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저 열반의 경계와 첫째가는 이치에는 역시 신식도 있고 또한 그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 있느니라.
열반과 신식과 그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은 허공의 신식과 그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과는 법의 성품이 저마다 다르나니,
열반의 신식은 박연(泊然)히 움직이지 않고 또한 옮아가거나 바뀌지도 않으며,
또한 생하는 문[生門]도 없고 향하여 나아간 데서도 다시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거나 근심 걱정하고 괴로워하는 것도 없으며,
식(識)이 영원히 소멸한다고 말하여도 또한 영원히 소멸하지도 않고,
식이 다시 생긴다고 말하여도 역시 다시는 생기지 않거니와,
그 가운데 머물러 있다[中止]는 것에서는 영원히 고요한 것을 그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으로 삼느니라.”
부처님께서 최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되 과거ㆍ미래ㆍ현재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여래ㆍ등정각께서는 열반을 취하지도 않고 또한 영원히 멸하지도 않나니,
만일 부처님 세존이 열반에 드신다 한다면 곧 바르게 깨달으신 이도 아니요 큰 서원을 갖춘 이도 아니니라.”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 세존은 명호가 있게 된 이후로부터 나는 아직도 열반에 드신 이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아무리 장차 오는 세상에 모든 부처님이 법계에 출현하신다 해도 돌아다니며 머물러 있으면서 남음이 있게 열반하겠거니와, 남음이 없는[無餘] 열반의 경계에는 들지 않을 것이니라.
최승아, 알아야 하느니라.
여래의 신식(神識)과 열반의 신식은 곧 차이가 없으나,
다만 열반의 신식만은 형상이 없고 그림자도 없고 또한 광명의 모양도 없으며, 움직이지 않아 옮아갈 수도 없느니라.
그러나 여래의 신식은 움직이는 것도 있고 옮아가는 것도 있나니,
그 신식과 이 신식은 하나이되 다르지 않고, 오직 움직임이 있는 것과 움직임이 없는 것에서만이 차이가 있을 뿐이니라.
보살은 마땅히 공(空)을 관하면 공에는 식(識)도 있고 머무르는[止] 것도 있으며,
유(有)에도 식이 있고 머무르는 것이 있다고 해야 하느니라.
만일 다시 유의 법[有法]이 열반 밖에 있다 한다면 식도 있고 머무르는 것도 있나니,
최승아, 이것이 바로 허공의 신식이요 허공 가운데 머무른 것이라 하겠거니와,
열반의 신식과 열반 가운데 머무른 것은 바로 이것을 각각 차별이 있다고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