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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견율비바사 제6권[2]
법사가 말하였다.
“만약 구절의 뜻이 알기 어려우면 내가 이제 말할 것입니다.”
‘그때 어느 한 비구가 있었다’ 하는 이 구절의 뜻은 알기가 쉽다.
‘음식으로 원숭이를 꾀어냈다’ 함은 이때 큰 숲 속에서 많은 비구들이 자비스런 마음을 행하였다. 자비로웠기 때문에 많은 축생들이 두려워함이 없이 노루ㆍ사슴ㆍ원숭이ㆍ공작ㆍ물총새ㆍ기러기ㆍ꿩 등 여러 짐승들이 선방(禪房) 앞에서 거닐며 즐겁게 놀았다.
그때 한 비구가 있었다.
원숭이 때에 한 암 원숭이가 있었는데 모양이 살찌고 건강하여 사랑할 만하였다. 이 비구는 음식으로써 꾀어 함께 부정한 법을 행하였다. 이것이 비구가 부정한 법을 행하였다 함이다.
‘다니다가 방사를 살펴본다’ 함은 비구(比丘)들이 다른 나라로부터 와서 세존께 문안하고 그리하여 여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비구들은 이른 아침에 아건다식(阿犍多食)을 얻어먹고는,
‘우리들은 비구들의 방사를 가서 살피리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율본에서 ‘가서 방사를 살피려고 비구들의 처소에 가서 닿았다’고 하였다.
이 원숭이는 먼저 한 비구와 부정한 행을 하였으므로 원숭이는 비구들이 오는 것을 보고,
‘비구들은 다 먼저 비구와 다름이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곧 비구들에게 이르러 음욕스런 마음으로 몸짓을 하면서 앞서 함께 음행했던 비구와 같이 다름없이 하여 곧 음부를 비구들에게 향하여 그 음탕한 모습으로 꼬리를 들고 나타내 보이며 기다렸다.
혹은 그 비구들 모두가 음탕한 뜻이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가 하여 스스로 그 음탕스런 모습을 지어 비구들에게 보였으므로 비구들은 원숭이가 음탕한 일을 하고 싶어함을 알고 비구들은 말하였다.
“우리들은 안 보인 데 있으면서 밥을 빌러 간 도인이 돌아옴을 엿보다가 그의 하는 일을 보리라.”
‘틀림없이 그 장로이리라’에서 틀림없다 함은 사실일 것이요. 헛되지 않음이다.
강도가 일일이 그 장물을 거두어 감히 숨기거나 가리지 못하는 것처럼 실제로 장로는 그와 같이 행한 것이 아니겠느냐.
여인의 음부나 축생의 암컷의 음부는 다르지 않으니, 부처님께서 계율을 정하심도 모두 이 일 때문이시다.
‘사람의 여인으로 본다’ 함은 보거나 붙잡거나 만지거나 하는 일이 부정한 행이면 축생의 암컷도 그와 같으니, 온갖 하는 일이 다 나쁜 법이다.
‘너희 장로야, 이런 방편으로 짓거나 내지 축생과 함께 하면 바라이 죄를 얻으며 함께 살지 못하느니라’고 하였다.
만약 축생의 암컷과 함께 부정한 행을 지어도 바라이 죄를 이룬다고 한다.
법사가 말하였다.
“붙들어 정하여 굳건하게 한 것입니다.
계율에 두 가지 법이 있으니,
첫째는 세간의 자연죄(自然罪)요,
둘째는 성인의 말씀을 어기어 죄를 얻음입니다.
만약 마음에 나쁜 법을 숭앙하면 세간의 자연죄의 법이요,
나머지는 여래께서 계율로 정하신 죄입니다.
세간 법에 붙따라 제정하심은 번뇌를 끊음으로써 견고하게 하심이니, 오직 꿈속에서만은 제외하며, 꿈속에서는 범함이 아닙니다.
제정하시는 가운데 무성죄(無性罪)를 붙따라 정하셨으니, 여기 저기 다니면서 먹음[展轉食]과 따로 모여 먹음[別衆食]은 무성죄로서 붙따라 정함이니, 이와 같은 세간법을 범하지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래께서 비구들을 위하여 붙따라 정한 계율을 마치겠습니다.”
<원숭이 품이 끝났다.>
이제 딴 법이 일어났으니 다 발사자(拔闍子)로 인하여 일어났다.
조달(調達)이 발사자의 무리를 얻어서 화합한 상가를 깨뜨림과 같은 것이 발사자의 일어남이다.
또 부처님 열반하신 후 1백 세에 법이 아니고 비니가 아니고 불교가 아님을 지은 것은 다 발사자의 일어남이다.
율본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부처님은 이미 계율을 정하여 마치셨다.
발사자는 멋대로 먹고 멋대로 잠을 자며 욕심을 낸다. 또 계율을 버리지 않고 음욕법을 행함으로서 뒤에는 권속들이 무너진다.
‘무너짐[壞敗]’이라 함은 각기 흩어져 달아나고, 왕의 벌을 받으며, 혹은 사망하고 이별하기도 하니, 이것을 권속들이 무너진다고 한다.
‘혹은 병고가 핍박한다’에서 병이라 함은 신체가 파리하고 상(傷)하며 파리하고 상함으로써 큰 고통이 생긴 것이다.
‘대덕 아난이여, 우리들은 여래를 훼방함이 아닙니다’ 함은 여래의 죄를 말하지 않으며, 법을 비방하지 않으며, 뭇 상가를 헐뜯지 않고, 우리들 스스로 몸에 복과 덕(德)이 없고 위엄 있는 풍채가 없음을 헐뜯는다는 것이다.
‘이제 바른 법을 닦아 지닌다’ 함은 서른여덟 가지의 관법(灌法)이다.
‘우리들의 무리는 차례로 보리의 법을 자세히 살핀다’ 함은 아라한의 도이다.
‘지혜의 인[慧因]을 닦아 모은다’ 함은 보다 자라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머무른다’ 함은 속인의 사는 곳을 버리고 청정한 곳에 머무르면서 달리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아난이 ‘장하도다’라고 대답하였으니 그때 아난은 다른 이의 마음을 모르고 오직 큰 서원의 말을 하는 것만을 듣고, 만약 그와 같을 수 있다면 아주 크게 장하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은 ‘장하도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럴 수가 없다’는 이 말씀은 딱 자르는 말씀이니, 만약 결과에 응하면 곧 그럴 수가 있으리라고 말씀했을 것이나 결과가 없으므로 그럴 수가 없으니, 그러므로 부처님은 아난에게 ‘그럴 수가 없다’고 대답하셨다.
여래는 이미 발사자 등이 인연이 없음을 살피셨다. 만약 부처님께서 발사자 등에게 구족계를 주셨다면 이들은 이미 바라이 죄를 얻어 함께 살지 못하므로 율본에서 ‘그럴 수가 없다. 만약 오더라도 구족계를 주지 말라’고 하였다.
만약 뭇 상가가 구족계를 주면 청정한 법이 아니므로 사문이 되지 못하고 사미(沙彌) 자리에서 머무른다. 만약 사미 자리에 머물러 바른 법을 존중하면 닦는 바를 얻으리라.
부처님은 이들을 가엾이 여김으로써 구족계를 주지 않기도 하시고 구족계를 주시기도 하신다. 왜냐하면 계율을 깨뜨리지 않기 때문이니 청정한 법에서 공경하고 존중하면 이 인연이 있으니 머지않아 도를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혹시 출가하여도 구족계를 주기도 하고 구족계를 주지 않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 법을 이미 갖추시어 여래는 계율을 정하시려고 비구들에게 ‘너는 이와 같이 계율을 말하라. 만약 비구가 응(應)하면 함께 살지 못한다’고 하셨다.
법사가 말하였다.
“이 율본은 이미 자세하니, 나는 이제 분별하여 말하겠습니다.”
‘만약’이라 함은 통틀어 이름함이요, 한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계율의 구절 가운데서 계율본 가운데서 문난(問難)하는 가운데서 만약 알려고 하면 네 가지의 비니가 있으니, 마땅히 아십시오.”
여러 대덕으로서 신통이 있는 이면 추려내어 남에게 알게 하라.
[네 가지의 버니]
그때 대중들이 모이는 때였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합니까?”
“첫째는 근본[本]이요, 둘째는 근본을 따름[隨本]이요, 셋째는 법사의 말[法師語]이요, 넷째는 스스로의 뜻[自意]입니다.”
“무엇을 근본이라고 합니까?”
“일체의 율장이니, 이를 근본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근본을 따름이라고 합니까?”
“네 가지 큰 것[四大處]을 근본을 따름이라 합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나는 부정하다고 하되 제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부정함에 붙따라 들어가고 청정함에는 들지 않으면 이것을 부정이라 한다’라고 하셨고,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나는 부정하다고 하되 제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청정함에 붙따라 들면 이것을 청정이라 한다’라고 하셨으며,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내가 청정하다고 허락은 한다. 그러나 이는 부정함에 붙따라 들어가고 청정함에 들지 않으면 이는 너희들에게 있어서 부정이다’라고 하셨고,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내가 청정하다고 허락은 한다. 그러나 이는 청정함에 붙따라 들면 너희들에게 있어서 청정이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네 가지 큰 것입니다.”
“무엇을 법사의 말이라고 합니까?”
“모인 대중이 5백 아라한일 때에 부처님은 먼저 근본을 말씀하시고, 5백 아라한은 널리 분별하여 유통하니, 이것을 법사의 말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스스로의 뜻이라고 합니까?”
“근본을 제외하고 근본을 따름을 제외하고 법사의 말을 제외하고 뜻으로써 제도하며, 방편을 써서 제도하며, 수다라로써 자세히 말하며, 아비달마로써 자세히 말하며, 비니로써 자세히 말하며, 법사의 말로써 하면 이것을 스스로의 뜻이라고 합니다.”
또 물었다.
“그 이치는 무엇입니까?”
“곧 지녀서 행하지 마십시오. 먼저 근본을 자세히 살피고 나서 다음에 구절의 뜻을 살피며, 낱낱이 분별하여 서로 헤아린 뒤에 법사의 말을 자세히 살피십시오.
만약 문구와 같으면 지니고, 만약 살펴서 같지 않으면 지니지 말 것이니, 이것을 스스로의 뜻이라고 합니다.
스스로의 뜻에 따른 이가 법사의 말이 굳고 강하면 법사의 말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근본을 따르는 문구가 같으면 지녀야 하고, 만약 문구가 같지 않으면 지니지 마십시오.
법사의 말을 따르되 근본을 따름이 굳고 강하면 근본을 따름이 문구 이치가 같음을 살펴서 지니어야 하고 만약 같지 않으면 지니지 말 것입니다.
근본을 따름에 쫓되 근본이 모두 굳고 강하면 움직이거나 흔들릴 수 없으니, 뭇 상가의 갈마와 같고 또한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심과 같아서 다름이 없습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만약 근본을 따름을 살펴서 스스로 환히 알 수 없으면 수다라의 근본 이치와 주석을 살펴야 하니, 모두 같으면 지니십시오.”
법사가 말하였다.
“두 비구가 서로 힐문하되,
첫째 비구는 청정이라 하고,
둘째 비구는 부정이라고 하면 다시 근본과 근본을 따름을 살펴보십시오.
만약 근본과 근본을 따름에서 청정이라 하면 좋지만 부정이라 하면 지니지 마십시오.
만약 첫째 비구는 근본을 살펴보아 이미 청정하고 또 문구의 이치와 증명이 많은데,
둘째 비구는 문구의 이치가 적으면 첫째 비구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법사가 말하였다.
“만약 두 비구의 문구의 이치가 모두 같으면 반복하여 헤아리고 이치의 근본을 상의하여 지니거나 지니지 말 것이니, 이것이 네 가지의 비니를 배우는 사람입니다.
[율사의 세 가지 법]
만약 율사면 세 가지 법이 있는 연후에 성취합니다.”
물었다.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첫째는 근본을 외우고 통달하며 구절의 이치를 가리어 익히며 문자를 잊지 않는 것이 첫째의 법이요,
둘째는 율본 가운데서 굳게 지니어 잡스럽지 않음이요,
셋째는 스승으로부터 차례로 받아 지니어 잊지 않게 함입니다.”
물었다.
“무엇을 근본이라고 합니까?”
대답하였다.
“일체의 비니장을 근본이라고 합니다.”
‘외우고 통달한다’ 함은 혹 어떤 사람이 차례로 구절을 묻지 아니하여도 생각할 필요 없이 묻는 대로 대답하는 것이다.
‘구절의 이치를 가리어 익힌다’ 함은 율본의 구절 이치를 잘 분별할 수 있고 뜻과 주석에 다 아는 것이다.
‘굳게 지니어 잡스럽지 않다’ 함에서 부끄럼의 뜻이 있는 것을 굳게 지님이라 하니, 혹시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 비록 많이 듣고 뜻을 알며 공경하며 존중하고 공양을 하더라고 법률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이는 법 가운데 가시나무이다.
왜냐하면 화합한 상가를 잘 깨뜨리고 상가도 잘 괴롭히기 때문이다.
부끄럼이 있는 이는 계율에 한결같이 부끄럼을 내어서 죽더라도 공양 때문에 바른 법을 깨뜨리지는 않는다.
부끄럼이 있는 이를 반연하여서 계율이 있는 것이다.
‘잡스럽지 않음’이라 함은 문구 가운데에 서로 뒤섞여 어지럽지 않음이니, 만약 어떤 사람이 물으면 차례로 대답하며, 가령 율본의 이치와 주석을 뒤바꿔도 대답하니,
비유컨대 사람이 가시덤불 속을 가매 지나가기 어려운 것과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이치로 물으면 곧 저 말로 대답하며,
만약 말 잘하는 이가 물으면 묻는 대로 대답하여 탈락함이 없음이,
마치 금 주발에 사자고(師子膏)를 담으면 새거나 없어짐이 없는 것과 같으므로 잡스럽지 않음이라 한다.
‘차례로 스승으로부터 받아 지니어 잊지 않는다’ 함은,
우파리는 여래로부터 받았으며,
타사구(陀寫俱)는 우파리로부터 받았으며,
수제나구(須提那俱)는 타사구로부터 받았으며,
실가바(悉伽婆)는 수제나구로부터 받았으며,
목건련의 아들 제수(帝須)는 실가바로부터 받았으며,
또 전타발(栴陀跋)로부터 받았다.
이와 같이 스승과 스승이 서로 이어받아 지금까지 이른 것이니,
만약 이러함을 알면 이것을 굳게 받아 지님이라고 한다.
만약 차례로 다 스승이 이름을 알 수 없으면 모름지기 한 둘의 이름자는 알아야 한다.
만약 잘 세 가지 법을 구족하는 이면 율사라고 한다.
[율사가 살펴야 할 여섯 가지 법]
만약 율사면 뭇 상가 모인 데서 여러 다툼의 일을 판단하되, 율사는 그 가운데서 먼저 여섯 가지 일을 살펴 편안하고 자세히 대답한다.
물었다.
“무엇이 여섯 가지입니까?”
대답하였다.
“첫째 곳을 살피고[觀處],
둘째 근본을 살피고,
셋째 문구를 살피고,
넷째 삼단(三段)을 살피고,
다섯째 중간죄(中間罪)를 살피고,
여섯째 무죄(無罪)를 살핍니다.”
“무엇을 곳을 살핀다고 합니까?”
“풀이거나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와야 하는데 ‘만약 몸을 가리지 않고 나체로 절에 들면 돌길라(突吉羅)를 얻는다’라고 이와 같이 죄상을 살피고 곧 율본으로 증명을 하고서 다툼의 법을 없애는 것을 곳을 살핀다고 합니다.”
<‘근본을 살피다’에 대해서이다.>
“무엇을 근본을 살핀다고 합니까?”
“만약 일부러 거짓말[故妄語]을 하면 바야제(波夜提)를 얻으니, 이와 같은 5편죄(篇罪)를 5편에서 낱낱이 죄의 성품을 살피고 곧 율본으로 증명을 하고서 다툼의 법을 없애는 것을 근본을 살핀다고 합니다.”
“무엇을 문구를 살핀다고 합니까?”
“몸이 아직 무너지지 않은 이면 투란차(偸蘭遮)를 얻으니, 이와 같은 7취죄(聚罪)의 상을 낱낱이 죄의 성품을 살피고 곧 율본으로 증명을 하고서 다툼의 법을 없애는 것을 각각 문구를 살핀다고 합니다.”
“무엇을 삼단이라고 합니까?”
“승가바시사(僧伽婆尸沙)에 삼단이 있고, 바야제에 삼단이 있습니다. 삼단에서 살피어 곧 율본으로 증명을 하고서 다툼의 법을 없애는 것입니다.”
“무엇을 중간죄를 살핀다고 합니까?”
“불을 피움은 돌길라 죄를 얻으니, 이와 같이 계율의 근본에서 중간죄를 살피고 율본으로 증명을 하고서 다툼의 법을 없애는 것을 중간죄를 살핀다고 합니다.”
“무엇을 무죄라고 합니까?”
“즐거움을 받지 않고, 도둑질하려는 마음이 없고, 죽이려는 마음이 없고, 거짓말의 뜻이 없고, 내려는 마음이 없고, 일부러 짓지 아니하고 모르고 함이니, 이와 같이 낱낱이 무죄의 상을 살피고 율본으로 증명을 하고서 다툼의 법을 없앱니다.
만약 비구가 네 가지 비니 법을 알고, 또 세 가지 법을 잘하고 여섯 가지 일을 살피면 이미 다툼 없애는 법을 이룩한 것입니다.
만약 비구가 없애는 법을 모두 함께 등지지 않으면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심과 다름이 없습니다.
만약 비구가 계율을 범하면 곧 율사에게 가서 스스로 의심한 것을 묻되, ‘이 일은 어떻게 합니까?’ 합니다.
율사는 먼저 잘 살피어 만약 죄가 있으면 ‘죄가 있다’고 대답하고 죄가 없으면 ‘죄가 없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참회해야 할 이면 ‘참회하라’고 하며, 아부가나(阿浮呵那)를 주어야 할 이면 ‘준다’고 하며, 만약 주지 않으면 ‘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바라이 죄상을 보면 ‘너는 바라이를 얻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처음의 바라이로서 음욕과 헛된 거짓말은 그 형상이 나타나기 쉽지만 살생과 투도의 두 가지 계율은 그 형상이 알기 어려우므로 자세한 것으로 인하여 얻고 자세함을 따라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심하는 사람을 향하여 ‘너는 바라이 죄를 얻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만약 스승이 있는 이면 ‘너는 지금 너의 스승에게 가서 물어라’고 하고 보냅니다.
이에 율사에게 가서 ‘이 죄는 어떠합니까?’라고 묻습니다.
만약 이 율사가 그 죄상을 살피어 다스릴 수 있으면 이 비구는 율사의 말을 얻고 돌아가서 율사에게 알리되, ‘다스릴 수 있습니다’고 하십시오.
율사는 ‘좋도다’고 하고, 말대로 할 것입니다.
만약 스승이 없는 이면 같이 배우는 이에게 묻게 하고 같이 배우는 이가 ‘다스릴 수 있다’고 대답하면 돌아가서 율사에게 알리고, 율사는 ‘좋도다’하고 대답합니다.
만약 같이 배우는 이가 없으면 제자에게 묻게 하고 제자 또한 ‘다스릴 수 있다’고 대답하면 돌아가서 율사에게 알리고, 율사(律師)는 ‘좋도다’하고, 말대로 합니다.
혹시 제자로서 죄 있는 형상을 보았다 하여도 ‘당신은 바라이 죄를 얻었습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법사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심을 만나기 어렵고, 출가도 하기 어렵고, 구족계 받기도 심히 어렵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을 치고 율사는 곧 방사를 깨끗이 쓸고 뿌리어 의심하는 비구를 해가 다하도록 앉게 한다.
앉히고는 서른 가지 선정법을 주어 그가 스스로 자세히 살피도록 한다.
만약 계율에 병폐가 없으면 자세히 살피는 이에게 선정법이 나타나고 위의가 정연하며 마음은 곧 정(定)에 든다.
앉아서 정의 가운데 있으면 하루가 지나더라도 깨닫거나 알지 못하니, 어두워져 율사가 그 곳에 이르러 ‘장로여, 마음이 어떠합니까?’고 하면 ‘대덕이시여, 저의 마음에는 오직 정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율사는 또 ‘장로여, 출가는 사람으로서 심히 하기 어렵습니다. 사문의 법에 부디 게으르지 말고 다 닦고 배워야 합니다’라고 한다.
만약 계율을 깨뜨린 이면 선정의 마음에 들어도 안정되지 못하고 가시덤불에 앉은 것과 같다. 왜냐하면 허물을 뉘우치는 불에 타는 바가 되며 또한 달군 돌 위에 앉음과 같아서 안정함을 얻지 못하고 다시 일어나 떠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율사가 그 곳에 이르러 ‘장로여, 마음이 어떠합니까, 안정이 됩니까?’고 하면 ‘안정되지 못합니다’고 하리라.
율사는 ‘사람이 세간에서 죄의 행위를 하면 덮거나 감출 수 없습니다.
처음 지을 때에는 몸을 보호하는 선신(善神)이 먼저 살펴보고 알며, 또 사문 바라문도 대강 남의 마음을 아는 것이니, 그대는 마땅한 대로 편안히 머무를 곳을 찾으시오’라고 한다.
<네 가지 비니와 율사의 세 가지 법 품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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