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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9권
15. 초품 중 ‘시방의 보살들이 모여 오심’을 풀이함 ①
【經】 이때에 동쪽으로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를 지나 그 세계의 가장 끝에 세계가 있으니, 다보(多寶)라 한다.
부처님의 명호를 보적(寶積)이라 하는데, 지금 현존하시면서 보살마하살들을 위해 반야바라밀을 말씀하고 계신다.
【論】
【문】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의 세계는 한량도 없고 끝도 없다” 하셨거늘,
어찌하여 그 세계는 가장 끝에 있다고 하시는가?
가장 끝에 있다면 이는 끝이 있는 축에 속하는 것이 된다.
만일 세계가 끝이 있다면 중생이 다해야 하리라.
그것은 왜냐하면 한량없는 부처님 가운데 각각의 부처님이 모두 한량없는 아승기 중생을 제도하여 무여열반에 들게 하시는데, 만일 새로이 생기는 중생이 없으면 묵은 이들은 응당 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답】 부처님 경전에서 비록 세계가 한량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나 이는 방편의 말씀이요 실제의 가르침이 아니다.
마치 실제에는 영혼[神]이 없지만 방편으로 말하는 까닭에 영혼이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곧 열네 가지 질문이 되니, 세계의 끝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함은 모두 삿된 소견이 된다.
만일 끝이 없다면 부처님에게는 일체지가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혜로써 두루 알아서 다 알지 못하는 물건이 없는 것을 일체지라 하는데,
만약에 세계가 끝이 없다면 다 알지 못하는 바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세계가 끝이 있다 하면 앞에서 말한 허물과 같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삿된 소견이다.
왜냐하면 끝없음에 의하여 끝있음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이 다보세계는 일체 세계의 끝이 아니라 석가모니부처님께 인연 있는 중생으로서 제도할 만한 이의 가장 끝에 있다는 뜻이다.
비유하건대 어느 나라의 마지막 끝에 있다는 것이 한 염부제의 가장 끝에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님과 같다.
만약에 끝이 없다면 부처님은 일체지자가 될 수 없으니, 위에서 부처님을 풀이하는 가운데 대답한 것과 같다.
때문에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부처님의 지혜가 한량이 없다고 함은 마치 함(函)이 크므로 뚜껑도 큰 것과 같다.
【문】 세계의 이름을 다보(多寶)라 했는데, 보배에는 재물 보배와 법보배의 두 가지가 있다.
어떤 보배가 많아서 다보세계라 하는가?
【답】 두 가지가 모두 있다.
또한 많은 보살들이 법성 등의 모든 보배여기서 말한 보배는 큰 보살들이 지니는 것이니, 그로써 보배관을 삼으며 보배관 속에는 모두가 부처님들이 보인다.
또한 모든 법의 성품을 밝게 깨닫는다.를 비춤이 많은 까닭에 다보라 한다.
여기의 부처님을 보적이라 하는데, 무루의 무루의 근(根)ㆍ력(力)ㆍ각지[覺]ㆍ정도[道]23) 등의 법보가 모인 까닭에 보적이라 한다.
【문】 만약에 그렇다면 일체의 부처님을 모두 보적이라 해야 하거늘 어찌하여 그 부처님만을 보적이라 하는가?
【답】 일체의 부처님을 다 보적이라 해야 되겠지만 그 부처님만을 이 보배로써 명호를 삼았을 뿐이다.
마치 미륵(彌勒)24)을 자씨(慈氏)라고 부르는 것과 같으니, 부처님들은 모두 자비가 있으시지만 오직 미륵만 자비[慈]로 명호를 삼은 것이다.
또한 보화(寶華)부처님이 탄생하실 때 몸 전체에서 갖가지 꽃빛 광명이 있었기 때문에 보화태자라 이름하였고,
연등불(然燈佛)25)[단주에 말하되 연등불의 옛 이름은 정광불(定光佛)이라 한다.]이 탄생하실 때에도 몸 전체가 등불 같았으므로 연등태자라 하였으며, 부처님이 되신 뒤에도 연등이라 부른 것과 같다.
보적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당연히 처음 탄생하실 때 많은 보물이 생겨났거나 땅에서 솟았거나 혹은 하늘에서 비 오듯 내려와 갖가지 보배가 쌓였기 때문에 보적이라 불렀던 것이다.
【문】 오직 석가모니부처님 한 분만 계시고 시방의 부처님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한량없는 위력과 한량없는 신통이 있어 모든 중생을 제도하시니, 다른 부처님은 조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난이 일심으로 생각했다.
‘과거의 부처님들과 보화ㆍ연등 등은 모두가 좋은 세상에 태어나셔서 수명도 지극히 장구하여 능히 중생들을 제도하셨다.
지금의 석가모니부처님은 악세에 태어나셔서 수명이 짧으시니 제자들을 다 제도하지 못하실 것이다.’
이와 같이 의심을 일으켰는데,
그때 부처님께서 아난의 마음을 아시고는 곧 해가 돋는 때인지라 일출삼매(日出三昧)에 드셨다.
그때 부처님의 모든 모공에서 온갖 광명이 나오는 것이 마치 해에서 광명이 나오듯 했다.
그 광명은 염부제 안을 두루 비추었다. 그곳이 빛으로 가득 차자 다시 사천하를 비추었으며, 사천하를 비추어 가득 채우자 다시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었으며,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어 가득 채우자 다시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를 비추었다.
그때 세존께서 배꼽으로부터 여러 가지 보배를 내셨으니,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푸른 유리 빛의 줄기에
천 잎 황금빛이라
금강으로 꽃받침을 삼고
호박(琥珀)으로 꽃술을 삼았네.
부드러운 줄기는 거칠게 굽지 않았고
그 높이는 백척이 넘으며
짓푸른 유리빛 줄기가
부처님의 배꼽에서 솟았네.
그 잎은 넓고도 길어서
흰빛이 묘한 빛 사이사이에 있으며
한량없는 보배로 장엄한
꽃송이마다 천 잎이 겹쳤네.
묘한 꽃의 빛이 이러하니
부처님의 배꼽에서 솟아
이 네 가지 꽃밭침 위에
보배 좌석이 해같이 빛나네.
좌석마다 부처님이 계셔서
황금산 네 봉우리 같으시니
빛남이 모두가 동일하네.
네 개의 부처님 배꼽으로부터 솟아나
각각 묘하고 보배로운 꽃이 솟고
꽃위에는 모두가 보배 좌석 있으며
자리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그 부처님의 배꼽을 통해
거듭해서 보배 꽃이 나오고
꽃마다 모두 자리가 있으니
자리마다 모두 부처님이 계시네.
이렇게 거듭거듭 변화하여
정거천(淨居天)에 이르니
멀고 가까움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비유로써 설명하리.
크고 모난 돌이 있으니
크기가 태산이라.
그것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던지니
걸림 없이 곧장 떨어지기를
18,383년이네.
이와 같은 세월을 헤아려
이윽고 땅에 떨어지니
이 두 세계 가운데에
변화한 부처님이 가득하시네.
그 광명 크게 성하고 밝아
불과 해와 달에 비유하리라.
어떤 부처님은 몸에서 물을 내고
어떤 부처님은 불을 내시며
경행하시거나
혹은 잠자코 앉았거나
걸식을 행해
중생의 복이 되어 주시며
혹은 경법을 말씀하시고
혹은 광명을 놓으시네.
혹은 3악취(惡趣)26)에 드시고
춥고 어둡고 뜨거운 지옥에 드시어
온화한 기운으로 찬 얼음 녹이시고
광명으로 어둔 지옥 비추시며
뜨거운 곳에는 서늘한 바람 베풀고
일에 따라 그 고통 구제하시니
근심 없음으로 안심을 주시고
법락으로써 모두를 건지시네.
이와 같이 갖가지 방편으로 잠깐 사이에 능히 시방의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시고, 중생을 제도하신 뒤에는 다시 본래의 자리로 들어가 부처님의 배꼽 가운데 머물렀다.
그때 세존께서 일출삼매로부터 나오셔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너는 이 삼매의 신통력을 보았느냐?”
“예, 보았습니다.”
아난은 대답하고는 이어서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 하루 동안만 세상에 머무르시더라도 제도하신 제자가 허공에 가득하거늘 하물며 80여 년 동안이나 세상에 머무시는 일이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한 부처님의 공덕과 신력은 한량이 없다고 하며, 현재에 시방세계를 교화하시되 딴 부처님이 없으시다 한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는 전륜성왕이 될 수 없고, 제석천왕ㆍ마왕ㆍ범천왕도 될 수 없고 부처도 될 수 없으며, 전륜왕은 한 곳에서 함께 다스리지 않는다” 하셨는데,
10력(力)을 갖춘 세존도 그와 같아서 한 세상에 두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처의 말씀은 허망하지 않고, 세상에는 두 부처님이 없다.
한 법이 있어 만나기 어려우니, 이는 곧 불세존이니라.
무량억겁 동안에 때에 맞추어 한 번씩 계실 뿐이다.
91겁 가운데 세 겁에 부처님이 계셨다.
현겁(賢劫)27) 이전의 91겁 첫 무렵에 부처님이 계셨으니 이름이 비바시(鞞婆尸)[진나라 말로는 종종견(種種見)이다.]28)였고,
제 31겁 동안에 두 부처님이 계셨으니 시기(尸棄)29)[진나라 말로는 불(火)이다.]와 비서바부(鞞恕婆附)[진나라 말로는 일체승(一切勝)이다.]이시다.
이 현겁 동안에 네 부처님이 나타나셨으니, 첫 번째는 가라구손타(迦羅鳩餐陀)30)라 하고, 두 번째는 가나가모니(迦那伽牟尼)31)라 하고, 세 번째는 가섭(迦葉)32)이라 하고, 네 번째는 석가모니(釋迦牟尼)라 한다.
이 분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겁은 모두가 공하여 부처님이 없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만일 시방의 부처님이 계신다면 어찌하여 다른 겁에는 부처님이 전혀 없으시어 매우 애석한 일이라 하셨겠는가?
【답】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비록 한량없는 신통력이 있으셔서 부처님을 시방에 가득히 변화해 내어 설법하고 광명을 놓아 중생을 제도하시나 다 제도하지는 않으신다.
왜냐하면 끝이 있다는 허물에 떨어지기 때문이며 미래의 부처님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은 다함이 없나니, 그러기에 다시 다른 부처님이 계셔야 된다.
또한 그대가 말하기를,
“부처님의 말씀에 여자는 다섯 가지가 되지 못하고, 두 전륜왕이 한꺼번에 나타나지 못하는 것같이 부처님도 같은 시간 한 세간에 두 분이 계시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대는 이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의 경전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알기 쉬운 이치와 깊디깊어서 알기 어려운 이치이다.
부처님께서도 열반에 들고자 하실 때에 비구들에게 말씀하시되,
“오늘부터는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며, 이치[義]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며, 지혜에 의지하고 알음알이에 의지하지 말며, 요의(了義)에 의지하고, 불료의에 의지하지 말라” 하신 적이 있다.
법이라 했는데 법에는 12부(部)가 있으니 이 법을 따를지언정 사람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이치에 의지한다 함은 이치에는 좋고 나쁨과 죄와 복과 허와 실을 다툴 수 없거늘 말로써 이치를 얻게 한 것뿐일지언정 이치는 말이 아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서 미혹한 사람에게 보여주는데,
미혹한 사람이 손가락만 보고 달을 보지 못하거든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면서 그대로 하여금 알게 했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못하는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경우도 그와 같아서 말은 이치의 손가락일지언정 말이 곧 이치는 아니다.
그러므로 말에 의지하지 말라 했다.
지혜에 의지한다 함은 지혜는 능히 선과 악을 분별하거니와 알음알이는 항상 쾌락만을 구하여 바른 길에 들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알음알이에 의지하지 말라 했다.
요의에 의지한다 함은 모든 지혜로운 사람 가운데는 부처님이 으뜸이고, 모든 경서 가운데는 불법이 으뜸이고, 모든 중생들 가운데는 비구들이 으뜸이고, 보시를 하면 부귀를 얻고, 계행을 지키면 하늘에 태어난다고 가르치는 것은 요의경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법사에게 다섯 가지 이익이 있으니,
첫째는 큰 부자가 되고,
둘째는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셋째는 단정하고,
넷째는 명예를 얻고,
다섯째는 나중에 열반을 얻는다”고 하면,
이것은 불료의이다.
어찌하여 불료의가 되는가?
곧 보시를 행하면 큰 부자가 된다는 말은 분명하여 알 수 있지만, 설법을 해도 재물을 보시하는 이가 없을 경우에도 부자가 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는 이유는 설법하는 법사가 갖가지 방법으로 보시를 찬탄하여 남의 간탐심을 깨뜨리고 스스로의 간탐심도 깨뜨리나니, 이런 까닭에 부자가 된다.
그러므로 불료의가 된다.
이는 많은 경전에서 방편의 말이요 실다운 이치가 아니다.
경에서 비록 말씀하시기를,
“세상에는 두 부처님이 함께 나타나시는 일이 없다” 하셨으나 모든 시방세계에 없다고 하지는 않으셨으며,
또한 “세상에는 두 전륜성왕이 없다”고는 하셨으나 모든 삼천대천세계에 없다고도 하지 않으셨다.
다만 사천하에 두 전륜성왕이 없다고만 하셨으니, 복 지은 것이 청정하기 때문에 한 세간에 왕이라고는 홀로 존재하면서 원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두 전륜성왕이 있으면 청정하다고 할 수 없나니, 부처님이 비록 질투는 없으나 그의 행업(行業)이 여러 세상에 청정한 까닭에 한 세계에 두 부처님이 나타나실 수 없다.
백억 수미산과 백억의 일월을 삼천대천세계라 하는데 이러한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한 부처님의 세계라 한다.
여기에 다시 다른 부처님이 없으시고 실로 석가모니부처님 한 분만이 계신다.
이 하나의 부처님 세계에서 항상 여러 부처님의 갖가지 법문과 갖가지 몸과 갖가지 인연과 갖가지 방편을 변화해 내어 중생을 제도하신다.
그러므로 많은 경에서,
“한때 한 세계에 두 부처님이 없다”고 할 뿐 시방에 부처님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대는 얘기하기를,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만나기 어려운 한 가지 일이 있으니, 이것은 바로 불세존이다’ 하셨다.
또한 말씀하시기를,
‘91 겁 동안에 세 겁에만 부처님이 있고 나머지 겁에는 모두 공하여 부처님이 없으니, 매우 가엾은 일이다’고 하셨다.
부처님은 이 무거운 죄 때문에 부처님을 뵐 인연을 심지 못한 이를 위하여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의 세상은 만나기 어려우니, 마치 우담바라나무의 꽃이 가끔 한 번씩 나타나는 것 같다’고 하셨다.
이런 죄인들은 3악도에 헤매거나 혹은 인간이나 하늘에 태어나되 부처님이 세간에 나타나셔도 그들은 뵙지 못한다”고 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사위성 안에 9억의 집이 있는데, 그 가운데 눈으로 부처님을 본 집이 3억이고, 귀로 부처님의 이름을 들은 집이 3억이며, 나머지 3억의 집은 부처님이 세상에 계시다는 것을 귀로는 들었으나 눈으로 본 일은 없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사위성에 25년 동안 계셨는데도 이들 중생들은 뵙거나 듣지 못하거늘 하물며 먼 곳이겠는가.
또한 부처님이 아난과 함께 사위성에 들어가 걸식을 하는데 이때 어떤 가난한 노모(老母)가 길가에 서 있었다.
이에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이 사람이 매우 가엾으니, 부처님께서 제도하여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은 인연이 없느니라.”
아난이 다시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 가까이 가시면 이 사람은 부처님의 상호와 광명을 보고는 환희하는 마음을 내어 인연을 짓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가까이 가시니, 그는 등을 돌며 외면했다. 부처님께서 사방으로 접근하시면 곧 다른 네 방향으로 모두 부처님께 등을 돌렸다. 얼굴을 쳐다보려 하면 위로 돌리고, 부처님께서 위로부터 다가오면 머리를 숙여 아래로 향하고, 부처님께서 땅으로부터 솟아 나오시면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등을 돌려 부처님을 보려 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다시 어떤 인연을 지으면 좋겠느냐?”
이런 사람들은 제도할 인연이 없어 부처님을 뵙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을 만나기 어려우니, 마치 우담바라나무의 꽃과 같다.
비유하건대 물과 비가 많아 곳곳에서 얻기 쉽더라도 아귀는 항상 목이 말라 마시지 못하는 것과 같노라” 하신 것이다.
그대가 말하기를,
“91겁 동안에 세 겁에만 부처님이 계신다”고 한 것은 한 부처님의 세계를 기준한 것이다.
따라서 나머지 모든 세계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곳의 겁은 공해서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시지 않으니 매우 가엾다” 한 것도 역시 이곳의 한 부처님의 세계를 이르는 말이요, 다른 모든 세계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방에 부처님이 계심을 알게 된다.
또한 성문의 법에도 시방의 부처님이 계시는데 그대 자신이 모를 뿐이다.
『잡아함경(雜阿含經)』33)에 이런 말이 있다.
“비유하건대 큰 비가 쏟아 내릴 때 물방울은 간격이 없어 그 수를 알 수 없듯이, 모든 세계 역시 그와 같다.
내가 동쪽의 한량없는 세계를 보건대, 이루어지는 곳[成]도 있고 머무는 곳[住]도 있고 무너지는 곳[壞]도 있어서 그 수효가 매우 많아 분별한 수가 없으니, 이와 마찬가지로 시방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그러하느니라.
이 시방세계 안의 한량없는 중생에게는,
몸의 고통이 세 가지가 있으니 늙음ㆍ병듦ㆍ죽음이요,
마음의 고통이 세 가지가 있으니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요,
뒷세상의 고통이 세 가지가 있으니, 지옥ㆍ아귀ㆍ축생이다.
일체 세계에는 모두 세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하등ㆍ중등ㆍ상등이다.
하등의 사람은 이 세상의 쾌락에 집착되고,
중등의 사람은 뒷세상의 쾌락을 구하며,
상등의 사람은 도를 구하고 자비한 마음으로 중생을 가엾이 여긴다.
이 같은 인연이 있거늘 어찌 과보가 없겠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늙음ㆍ병듦ㆍ죽음이 없다면 부처가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 사람은 늙음ㆍ병듦ㆍ죽음으로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보고 마음속에 서원을 세우되,
“내가 부처가 되어 구제하여서 그들의 마음의 병을 고쳐 주고, 뒷세상의 괴로움도 없애 주리라” 한다.
이렇게 시방세계에는 모두 부처님이 나오실 인연이 있거늘 어찌하여 여기에만 부처님이 계시고 딴 곳에는 부처님이 없다고 말하는가?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무에 불이 없고 습한 땅에 물이 없다” 하면 믿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의 몸에 늙음ㆍ병듦ㆍ죽음의 고통이 있고 마음에는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병이 있나니,
부처님께서 이 세 가지 괴로움을 끊고 3승(乘)을 얻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나오신 것이다.
일체의 세계에 모두 이러한 괴로움이 있거늘 어찌하여 부처님이 아니 계시겠는가.
또한 “맹인들이 한량없이 많거늘 오직 한 사람의 의사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마땅히 시방의 부처님이 계시는 것이다.
『장아함(長阿含)』 가운데 어떤 경에서 말하기를,
“북방을 지키는 어떤 귀신왕이 백천만이나 되는 귀신들과 함께 한밤중[後夜]에 부처님께 왔다.
그들은 머리와 얼굴을 부처님 발에 대어 예를 올리고는 한쪽에 서서 청정한 광명을 놓아 기원정사를 두루 비추어 전체를 환하게 밝히고 합장한 채 부처님을 찬탄하며 이러한 두 게송을 읊었다.
크게 정진하시는 사람이시여,
제가 이제 귀명(歸命)합니다.
부처님은 두 발 가진 무리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지혜의 눈을 가지신 분이시여
능히 보고 아시나니
하늘의 신들조차
그 지혜를 알지 못합니다.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부처님들께
제가 이제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이처럼 제가 부처님께 귀명함은
3세의 세존[尊]을 공경함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게송 가운데 시방의 부처님이 계신데, 귀신의 왕이 3세의 부처님께 머리 숙인 뒤에 특별히 석가모니부처님께 귀명한 것이다.
만일 시방에 현재의 부처님이 계시지 않다면 의당 석가모니부처님에게만 귀명했을 것이요,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부처님들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방세계의 부처님이 계신 줄 아는 것이다.
또한 과거 세상에도 한량없는 부처님이 계셨고, 미래 세상에도 한량없는 부처님이 계시리라. 그러므로 현재에도 한량없는 부처님이 계셔야 하는 것이다.
또한 가령 부처님께서 성문의 법 가운데에서,
“시방에 무수하고 무량한 부처님이 계시다”고 말씀하셨다면,
중생들은 당연히 생각하기를,
‘부처님은 만나기 쉽다’고 할 것이다.
또한 애써서 해탈을 구하지 않은 채,
“이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면 저 부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고 하며,
이처럼 게으름을 피우고 해탈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사슴이 화살을 맞기 전에는 두려움을 모르다가 화살을 맞은 뒤에야 사냥터[圍]를 뛰쳐나가는 것과 같으니,
사람들도 그와 같아서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이 있거늘,
오직 한 부처님만 계시어 만나기가 매우 어렵다고 들으면 문득 두려움을 내어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빨리 괴로움을 면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성문의 법 가운데에서 시방의 부처님이 계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며, 또한 없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다.
만일 시방세계에 부처님이 계시거늘 그대가 ‘없다’고 한다면 한량없는 죄를 지을 것이요,
시방세계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늘 내가 ‘계시다’고 말한다면 한량없는 부처님의 생각[佛想]을 일으키고 공경의 복을 받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착한 마음의 인연은 복덕의 힘이 크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자심삼매(慈心三昧)로 관찰해 일체 중생이 모두 즐거움을 받음을 보면, 비록 실제의 이익은 없으나 자비한 관찰 때문에 이 사람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는 것과 같다.
시방의 부처님을 생각함도 이와 같아서 실제로 시방에 부처님이 계시는데 없다고 말한다면 시방의 부처님을 파괴한 한량없는 과보를 받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참된 일을 깨뜨렸기 때문이니라.
육안(肉眼)을 가진 사람이 모두 다 알지는 못하나 다만 마음으로 믿어 ‘계시다’라고 말한다면 그 복이 한량이 없다.
하지만 실로 계시는데도 없다고 한다면 그 죄가 매우 무겁다.
사람들 스스로가 생각하여 있다고 믿어야 할 것이거늘 하물며 부처님께서 스스로 마하연 가운데서,
“실로 시방의 부처님이 계시니, 어찌 믿지 않겠는가”라고 말씀하심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문】 시방에 한량없는 부처님과 보살들이 계시다면 지금 이 중생들은 3악도에 빠진 이가 많거늘 어찌하여 오시지 않는가?
【답】 중생들의 죄가 무거운 까닭에 비록 부처님과 보살들이 오신다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또한 법신의 부처님은 항상 광명을 놓으시고 항상 법을 설하시지만, 죄 때문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비유하건대 해가 떴어도 눈이 먼 이는 보지 못하고, 우레가 천지에 진동하여도 귀가 먹은 이는 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법신은 항상 광명을 놓고 항상 법을 설하건만 중생들의 한량없는 겁의 죄가 두텁고 무겁다면 보거나 듣지 못하는 것이다.
밝은 거울과 맑은 물에 얼굴을 비추면 곧 보이고, 때가 가리거나 맑지 못하면 보이지 않듯이,
중생들의 마음이 청정하면 곧 부처님을 뵙게 되고, 마음이 맑지 못하면 부처님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제 실제로 시방의 부처님과 보살들이 와서 중생을 제도하시지만 보이지 않을 뿐이다.
또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염부제(閻浮提)에서 태어나 가비라국(迦毘羅國)34)에 계실 때 동천축35)의 여섯 큰 성에 자주 왕래하셨으나,
때로는 남천축36)의 억이(億耳)37)거사의 집으로 날아가셔서 공양을 받으시기도 하였고,
때로는 잠시 북천축38)의 월지국(月氏國)에도 가셔서 아바라(阿波羅)용왕을 항복시키시고,
또한 월지국(月氏國)의 서쪽에 이르셔서는 나찰녀(女羅刹)를 굴복시켰다.
부처님은 그곳의 석굴에서 하루를 묵으셨는데 지금도 부처님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어떤 사람이 안에 들어가 그것을 보려 했으나 보이지 않고 굴[孔]에서 나오니 멀리 광명상(光明相)이 보였다.
부처님은 어느 때는 잠시 날아서 계빈(罽賓)39)의 예발타(隷跋陀) 선인이 있는 산으로 가셨다.
허공에 머무시면서 그 선인에게 항복받으셨는데, 선인이 말하기를,
“나는 여기에 살기를 좋아하오니, 부처님께서 저에게 부처님의 머리칼과 손톱을 주시면 탑을 세워 공양하리다” 하였다.
탑은 지금도 남아 있다.[이 산 밑에 이월사(離越寺)가 있는데 이월은 예발타(隷跋陀)라고 해야 한다.]
사람들은 부처님과 같은 나라에 태어나고서도 두루 뵙지 못하거늘 하물며 다른 곳에 태어난 경우이겠는가.
그러므로 시방의 부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미륵보살은 큰 자비심을 가지고 천궁에 계시면서도 이곳에 오시지 않나니, 오시지 않는다 하여 미륵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미륵은 가까이 계시면서도 오시지 않건만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시방의 부처님은 멀리 계시거늘 어찌 괴이하게 여기리오.
또한 시방의 부처님이 오시지 않는 것은 중생들의 죄의 때가 무겁고 부처님을 뵈올 공덕을 심지 않았기 때문에 오시지 않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은 일체 중생들의 선근(善根)이 익어지고 번뇌[結使]가 얇아진 것을 보고서야 오셔서 제도하시니, 이런 게송이 있다.
부처님들은 먼저 관찰하시어
어떤 방편으로도 제도치 못할 이와
제도하기 어려운 이와 교화하기 쉬운 이와
더딘 이와 빠른 이를 다 아신다.
혹은 광명과 혹은 신통[神足]과
갖가지 인연으로 중생을 건지시고
거역하려 해도 가엾이 여겨 제도해 주시고
혹은 거역하는 자라도 막지 않으시네.
억센 이는 거친 말로 교화하시고
유연한 이는 부드러운 말로 제도하시니
비록 그 마음은 자비롭고 평등하나
때에 맞춰 지혜로써 방편을 쓰시네.
이런 까닭에 시방의 부처님이 비록 오시지는 않으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의 지혜의 힘과 방편과 신통은 사리불 등 큰 아라한과 미륵 등의 큰 보살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범부이겠는가.
또한 부처님이나 큰 보살들은 가끔 두려움과 급한 어려움 속에 있는 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생각한다면 때로는 와서 구제해 주신다.
대월지(大月氏)의 서쪽에 부처님의 육계를 모신 나라가 있었는데, 어느 불교가 유행하던 지역에 나풍병(癩風病)에 걸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변길(遍吉)40) 보살상 곁에 와서는 일심으로 귀의하고 변길보살의 공덕을 염했다.
“부디 이 병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이때 변길보살의 상이 오른손의 보배 옥돌[寶磲] 광명으로 그의 몸을 어루만져 주니, 곧 병이 제거되어 나았다.
또한 어떤 나라에 숲에서 수행하는[阿蘭若] 비구가 있었는데 마하연을 많이 독송하니, 그 나라의 왕이 항상 머리를 풀어 그 위를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이때 다른 비구가 왕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마하라(摩訶羅)41)로서 경전을 많이 읽지도 못했는데 어째서 크게 공양하기를 이렇듯 하십니까?”
왕이 대답했다.
“내가 어느 날 밤중에 이 비구를 뵙고자 그가 거처하는 곳에 갔습니다.
이 비구가 굴속에서 『법화경』을 읽고 있는데, 어는 금빛 광명이 나는 사람이 흰 코끼리를 타고 합장한 채 공양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차츰 가까이 가니 이내 사라지기에 내가 묻되,
‘대덕이여, 내가 왔기 때문에 금빛 나는 사람이 사라진 것이 아닐까요?’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비구가 대답하기를,
‘그는 변길보살입니다. 변길보살 스스로가 말하기를 누구라도 『법화경』을 읽으면 내가 횐 코끼리를 타고 와서 가르치고 인도하리라고 하셨는데 제가 『법화경』을 읽은 까닭에 변길[변길은 『법화경』에서는 보현이라 한다.]보살이 스스로 오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또한 어떤 나라의 한 비구가 『아미타경(彌陀佛經)』42)과 『마하반야바라밀경』을 독송하였는데,
죽을 때에 임하여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아미타불께서 그의 대중을 거느리고 오시는구나” 하더니,
즉시 몸을 움직여 자신의 주처로 돌아가서는 잠깐 사이에 운명했다.
죽은 뒤에 제자들이 땔감을 쌓아 태웠는데 이튿날 잿 속을 보니 타지 않은 혀가 있었다.
그는 『아미타경』을 독송한 까닭에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았고, 『반야바라밀경』을 독송한 까닭에 혀가 타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이승의 일로서 경전에 말씀하시듯이 부처님과 보살들이 찾아오시는 일은 매우 많다. 이 같은 일은 처처에 있다.
사람들이 죄의 결박이 얇고 일심으로 부처님을 염하며 믿음이 맑아 의심치 않으면 반드시 부처님을 뵙게 되니, 끝내 허망치 않다.
이러한 여러 인연으로 실로 시방에 부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
【經】 그 세계에 보살이 있었으니, 보명(普明)이라 한다.
【論】
【문】 보살이란 뜻[義]은 「찬보살품(讚菩薩品)」에서 이미 설명했거니와 어찌하여 보명이라 하는가?
【답】 그 광명이 항상 일체 세계를 비추기 때문에 보명이라 한다.
【經】 이 큰 광명을 보고 땅이 크게 진동함을 보며, 또한 부처님의 몸을 뵈옵고는 곧 보적불(寶積佛)께 가서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지금 무슨 인연으로 이 광명이 온 세상을 비추고 땅덩이가 크게 진동하며, 또한 불신(佛身)을 보게 되는지요?”
【論】 땅의 진동과 부처님 몸의 광명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문】 이 보명보살은 보살들 가운데서 가장 존귀하고 으뜸이어서 응당 스스로 그 인연을 알 것인데 어찌하여 부처님께 묻는가?
【답】 이 보명보살이 비록 거룩하지만 부처님들의 지혜와 신통력을 알지는 못한다. 비유하건대 달빛이 아무리 커도 해가 뜨면 사라지나니, 이런 까닭에 부처님께 물어야 한다.
또한 보살은 항상 부처님을 뵙고자 하여 싫증을 내지 않는다.
아무런 인연이 없어도 부처님을 뵙고자 하는데 하물며 큰 인연이 생긴 경우이겠는가.
또한 이 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비유하건대 송아지가 어미 소를 따르는 것과 같으니,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 된다.
또한 작은 왕들이 큰 왕을 알현[朝宗]하는 것과 같아서 의례히 그렇기 때문이다.
보살들도 이와 같아서 큰 이익을 얻는 까닭에 항상 부처님을 따르려 한다.
이 보살은 이런 일을 보고는 곧 마음으로,
‘이것은 틀림없이 큰일이니, 한량없고 셀 수 없는 세계를 모두 보게 된다’고 알아챘던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보살은 스스로 신통력이 있어 알았지만 이것 역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힘을 주시어 알게 하신 것이다. 다만 작은 보살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께 여쭌 것이다.
다른 작은 보살들은 아직 두려움을 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께 여쭐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하여 질문한 것이다.
이 보명보살이 질문을 일으킬 때 그 세계에 있는 작은 남자나 여자들과 함께했는데, 이로써 작은 보살은 부처님께 물어볼 수가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큰 코끼리가 큰 나무를 쪼개어 작은 코끼리들로 하여금 가지와 잎을 먹게 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묻기를,
“대덕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이런 큰 광명이 있고 땅이 크게 진동하며, 또한 불신(佛身)을 보게 됩니까?”라고 한 것이다.”
23)
37보리분법(菩提分法) 가운데 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정도(正道) 등을 말한다.
24)
범어로는 Maitreya.
25)
범어로는 Dīpaṃkara. 석가모니부처님에게 미래불의 수기를 주신 과거세의 부처님. 석가모니부처님 이전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스물네 분의 부처님 가운데 한 분.
26)
범어로는 durgati. 악도(惡道)라고도 한다. 악행의 결과로서 태어나게 되는 괴로움의 세계를 가리킨다.
27)
범어로는 bhadrkalpa. 현재의 대겁(大劫)으로 대겁은 성(成)·주(住)·괴(壞)·공(空)하는 한 시기를 말한다. 이 기간에 천 불(佛)이 나타난다고 한다. 현겁(現劫)이라고도 한다.
28)
범어로는 Vipaśyin.
29)
범어로는 Sikhi.
30)
범어로는 Karakucchanda.
31)
범어로는 Konakamuṇi.
32)
범어로는 Kāśyapa.
33)
범어로는 Saṃyuktāgama.
34)
범어로는 Kapilasastu. 석존의 탄생지이다.
35)
인도의 동쪽 지역을 말한다.
36)
인도의 남쪽 지역을 가리킨다.
37)
범어로는 Śroṇa-Koṭikoṭirna.
38)
인도의 북쪽 지역을 가리킨다.
39)
지금의 Kaśmīru를 말한다.
40)
범어로는 Samantābhadra.
41)
범어로는 Mahallaka. ‘무지한’ 혹은 ‘늙은’ 이라는 뜻으로, ‘무지한 자,’ ‘나이 든 자’를 가리킨다. Lamotte는 이 말을 ‘Mahārāja!’의 호격으로 간주한다. [Etienne Lamotte, Le Traite de la Grande Vertu de Sageśe de Nāgārjuna(Mahāprajñ āpāramitāśāstra), Louvain, Tome Ⅰ].
42)
범어로는 Amitābhabuddhasūtra.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