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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98권
3. 인증장[14]
[화상들의 법]
우두(牛頭) 아래의 불굴(佛窟)화상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한 문수(文殊)가 말한 것이 10방 문수가 일시에 말한 것이요, 한 부처님의 열반이 모든 부처님들께서 다 함께 하는 열반이라고 함을 믿지 않는다면 무슨 까닭인가?
물질[色]의 근본을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었다.
‘물질의 성품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이것이 근본인 것인가?’
대답했다.
‘이것은 관(觀)에 머무르는 말이요 현상[事]에 즉하여 근본을 본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현상에 즉하여 본다면 그대의 나고 늙고 병드는 몸과 무명ㆍ탐냄ㆍ성냄 등의 이것이 물질의 근본일 뿐이니, 현상 밖에는 본체[理]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물질의 근본을 알면 곧 온 10방의 물질과 같으므로 하나의 설명이 온갖 설명이요 한 열반이 온갖 열반이라고 하나니, 물질 자체에는 성품이 없되 성품이 포함되지 아니함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또 이르되,
“비록 범부와 같기는 하나 범부가 아니요 범부가 되지도 못하고 범부를 부술 수도 없나니, 따로 뛰어난 것이 있어서 마음 밖에 있다고 한다면 곧 악마의 그물에 떨어진다.
내 이제 스스로 몸과 마음이 실상이요 부처가 된다고 관찰하는 것이 곧 10방 부처님들과 행이 같고 증득이 같은 것이라고 본다.
물었다.
‘부처님 몸은 샘이 없는 계율과 선정으로 5음(陰)을 쪼여 닦으므로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감히 의심하지 않지만,
대품경(大品經)에서,
≺중생은 착하지 못한 5음의 몸이지만, 역시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되지도 않는다≻고 함과 같은 것은,
심히 사람들을 놀라고 의심되게 합니다.’
대답했다.
‘만일 중생의 5음 바깥을 향해 따로 모든 부처님들의 해탈이 있다고 한다면 옳지 못하다.
중생이 자기 성품을 분명히 알기만 하면 본래부터 한 법도 얻을 만한 것이 없거늘, 누가 속박하고 누가 해탈하겠으며 어찌하여 다시 속박과 해탈의 다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물었다.
‘경에서 이르되,
≺중생과 부처는 평등하다≻고 했으므로,
속박이나 해탈이 없겠거늘 어찌하여 6도(道) 중생들은 헤매면서 해탈하지 못합니까?’
대답했다.
‘중생은 물질과 마음이 청정함을 모르고 망상을 하고 뒤바뀌는지라 해탈하지 못한다.
만일 사람과 법이 항상 ≺공≻한 줄 알면 그 중에서 실로 속박과 해탈이란 없다.’
물었다.
‘무슨 관(觀)을 지으면서 참회를 해야 마지막 죽을 적에 업(業)에 끌림을 면하겠습니까?’
대답했다.
‘그대는 모름지기 부처님의 행한 바와 말씀한 것이 내가 오늘에 행하는 바와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음을 깊이 믿어야 한다.
성불을 해서도 오히려 열반의 모양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중간되는 죄와 복의 허망한 업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진실로 바른 앎 바른 소견이요 진실한 수행이며 진실한 참회이니,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데서 이 관을 잃지만 않으면 마지막 죽을 때에도 바른 기억을 잃지 않으리라’”고 했다.
불굴(佛窟) 아래의 운거(雲居)화상이 심경불이편(心境不二篇)에서 이르되,
“세간ㆍ출세간은 모두 자기의 한 생각인 허망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나니, 한 생각이 겨우 일어나기만 하면 온갖 형상이 나누어지고 한 생각이 생기므로 문득 마음과 경계를 이룬다.
만일 마음과 경계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생각이 있어서 볼 수 있게 되겠는가?
볼 바[所見]의 생각이 있는지라 또 능히 보는[能見] 마음이 있게 된다.
장차 생각 그대로가 경계요 보는 것 그대로가 마음임을 알면, 볼 바의 생각은 색온(色蘊)이 되고 능히 보는 마음은 4온(蘊)이 된다.
경에 이르되,
‘5온 이것이 세간이요 한 생각이 5온을 갖춘다’고 했나니,
하나하나의 온 가운데는 다 5온을 갖추었기 때문에 하나는 여럿을 장애하지 않고 여럿은 하나를 장애하지 않게 된다. 그런 까닭에, 마음과 경계는 서로가 통하여 서로서로 손님도 되고 주인도 된다.
경에 이르되, ‘경계와 지혜가 서로서로 엇갈리며 겹치고 겹쳐서 그지없다’고 한 이것이 곧 한 티끌이 법계의 낱낱의 법을 포함하여 모두 두루하다는 것이다.
자기의 한 생각의 동요는 곧 항하 모래만큼 많은 세계가 일시에 진동한다는 것으로 보고,
자기의 한 생각이 항상 안정함은 곧 6도 중생이 모두 항상 안정하다는 것으로 보라.
만일 진실로 한 생각의 체성을 알면 곧 항하 모래만큼 많은 세계가 일시에 진동한다는 것으로 보고,
자기의 한 생각이 항상 안정함은 곧 6도 중생이 모두 항상 안정하다는 것으로 보라.
만일 진실로 한 생각의 체성을 알면 곧 항하 모래만큼 많은 세계가 항상 자기 마음에서 나타나리니,
한 생각이 헷갈린 탓으로 곧 경계와 지혜는 호(胡)나라와 월(越)나라다”고 했다.
대주(大珠)화상이 이르되,
“심성은 형상이 없으나 그것이 곧 미묘한 법신(法身)이요, 심성의 본체는 ≺공≻하나 그것이 곧 허공의 그지없는 몸이며, 장엄함을 보이고 행하는 그것이 곧 공덕의 법신이니,
이 법신은 바로 만가지 변화의 근본이요 처소에 따라 이름 붙여지며 지혜의 작용이 그지없으므로 이것이 무진장(無盡藏)이다.
물었다.
‘어느 것이 법신입니까?’
대답했다.
‘마음은 항하 모래같은 온갖 법을 내기 때문에 법 집의 몸[法家之身]이라고 한다.
경에서 이르되,
≺한 생각인 마음 티끌 안에서, 항하 모래같은 게송을 연출한다≻고 했나니, 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한다.’
‘진실한 법과 허환한 법에는 저마다 종성(種姓)이 있습니까?’
‘불법에는 종성이 없고 물건에 응하면서 나타난다. 만일 마음이 진실하면 모두가 진실하지만, 한 법이라도 진실하지 않음이 있으면 진실함의 이치는 원만하지 아니하다.
만일 마음이 허환하면 모두가 허환하지만, 한 법이라도 허환하지 않음이 있으면 허환한 법에는 안정함이 있다.
만일 마음이 ≺공≻하면 모두가 ≺공≻하지만, 한 법이라도 ≺공≻하지 않음이 있으면 ≺공≻의 이치는 원만하지가 않다.
미혹되었을 적에는 사람이 법을 따르지만, 깨치고 나면 법이 사람을 따른다. 삼라만상은 ≺공≻에 이르러서 끝나고 백 개 시내의 흐름은 바다에 이르러서 끝나며 온갖 성현은 부처에 이르러서 끝나고 십이부경(十二部經)과 오부비니(五部毘尼)와 사위타론(四圍陁論)은 마음에 이르러서 끝나는 것이다.
마음 이것은 총지(摠持)의 합친 집이요 만법의 근원이며 또한 이것은 큰 지혜 광이요 머무름이 없는 열반이다. 백천 가지의 이름은 다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고 했다.
먼저의 동산(洞山)화상의 심단결(心丹訣)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에게 약이 있으니 그 이름은 심단(心丹)이다
번뇌화로 속에서 해를 두고 불리었다
그의 변하지 않는 태(胎) 안의 빛깔을 아느냐
빛나는 광명이 대천(大千)에 두루하다.
법 눈이 열리면 털끝만큼 보이나
범부ㆍ성인을 찰나에 변화시킨다
진짜 가짜 알아야 공용(功用)을 이루리니
언제나 단련(鍛鍊)하며 보라.
형상이 없어 모나거나 둥글지 않나니
말 속엔 물건 없되 물건 속에서 말한다
마음 있어 작용하면 참된 작용 어기나
뜻이 없이 선(禪)에 두면 선 아님이 없다.
소멸도 없고 생김도 없되
삼라만상의 모두가 부린다
고을 토지 막론하고 가져오기만 하라
이 화로 속에 들면 옳지 않음이 없다.
한 뜻도 없는 것이 나의 뜻이요
한 지혜도 없는 것이 나의 지혜며
한 맛도 없는 것이 온통 다 기이하다.
빛깔은 안 바뀌나 알기가 어렵고
다시 한 물건도 없는 데서 나타나나니
한 물건으로 다른 것을 억누르지 말라
체성이 진공(眞空)에 계합되면 단련할 것 아니다.
먼저의 조산(曹山)화상이 이르되,
“부처와 마음은 담장ㆍ벽ㆍ기와ㆍ조약돌 그것이다는 것은, 또한 성품 자리라 부르기도 하고 또한 본체의 온전한 공[體全功]이라 일컫기도 하며 또한 무정(無情)이 설법을 이해한다고 하기도 한다.
만일 있음[有]을 알아 이 속에서 언변(言辯)이 없는 곳을 얻으면 10방의 국토와 산하 대지와 돌ㆍ벽ㆍ기와ㆍ조약돌ㆍ허공과 허공 아닌 것과 유정ㆍ무정ㆍ풀ㆍ나무며 우거진 숲이 통틀어 하나의 몸이 되리니, 수기를 얻었다[得記]고 부르고 또한 한 글자 법문[一字法門]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총지 법문(摠持法門)이라 하기도 한다.
또한 한 티끌 한 생각[一塵念]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같은 길[同轍]이라 부르기도 한다.
만일 이 성품 자리가 있음을 모르면, 모든 부처님의 천 가지 깨우침도 얻을 수 없고 만 가지 비유도 이룩되지 아니한다.
천 성인 만 성인이 모두 이 속에서 나왔음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10방의 박가범(薄伽梵)의 하나의 길인 열반의 문이다’”고 했다.
영변(靈辯)화상이 이르되,
“무릇 한 마음은 불가사의하다. 미묘한 이치는 일정한 모양이 없고 그때그때 응하면서 작용하므로 일정하다고 고집할 수가 없다.
경에서 이르되,
‘모든 현인ㆍ성인은 모두가 함이 없는 법[無爲法]이면서 차별이 있고 차별이 있으므로써 처소 따라 이름이 붙여지나니, 마지막에는 자기의 마음을 여의지 아니한다’고 했다.
이 마음은 온갖 것을 파괴할 수도 있고 온갖 것을 이룩할 수도 있다. 때문에,
‘온갖 법 이것은 모두 불법이다’고 했고,
마음이 하늘을 만들고 마음이 사람을 만들고 마음이 귀신ㆍ짐승ㆍ지옥 등을 만드는 것이니, 모두가 마음으로 하는 바다. 좋거나 나쁜 것도 모두가 마음으로 말미암고 반드시 생겨야 하는 것도 역시 할 수가 있고 반드시 생기지 않아야 하는 것도 역시 할 수 있으므로, 이것이 바로 걸림이 없다는 이치이다.
지금의 온갖 하는 일인 가고 서고 앉고 눕고 하는 것도 이것은 마음의 모양일 뿐이니,
마음 모양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참 모습[實相]이라고 하며,
본체는 변동이 없으므로 역시 여래(如來)라고 하다.
여(如)란 변하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없는 것 가운데서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가운데서 없는 것을 나타내므로, 역시 신변(神變)이라 하기도 하고 신통(神通)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모두가 한 마음의 작용이며, 처소 따라 차별되지만 이치가 많다.
하나 가운데서 한량없음을 알고 한량없음 가운데서 하나를 아나니, 그 서로서로가 나고 일어남을 분명히 알면 장차 두려움 없음을 이루리라.
또 동방에서는 바른 선정에 들었다가 서방에서는 선정으로부터 나온다. 만일 마음 밖에는 법이 없고 온갖 것이 마음일 뿐임을 환히 알면, 곧 하나의 법도 뜻에 마땅할 것이 없고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른 것도 없어지리니, 곧 생사에 두렵지 아니해서 온갖 곳이 모두 해탈이 된다. 때문에 ‘장차 두려움 없음을 이루리라’고 한다.
가령 마음 밖에는 온갖 경계의 법이 있다 해도 역시 갖가지 마음의 허망한 생각인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므로 제 성품도 없고 그 자체는 본래가 ≺공≻하여 마치 요술과 같고 허깨비와 같다”고 했다.
먼저의 운거(雲居)화상이 이르되,
“불법에 어떠한 여러 일이 있는가?
수행과 증득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마음 이것이 부처인 줄만 알 것이요 부처가 말[語] 모를 것은 근심하지 말라. 이러한 일을 얻고자 하면 모름지기 이러한 사람이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사람이라면 이 무엇을 근심할 것이냐?
만일 이러한 일이라 한다면 어렵지가 않다.
예로부터 선덕(先德)은 순박해서 진리에 맡기고 원래가 재주가 없으므로,
설령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고 물으면,
때로는 ‘단지요 벽돌이요 나무대기니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모두가 중요한가?
원래 다른 이는 근본인 발밑[脚下]이 충실해서 힘이 있는지라 이것이 곧 불가사의한 사람으로서 흙을 쥐어도 금이 될 것이나,
만일 이러한 일이 없다면 충분하게 설명해도 더부룩히 난 꽃과 많이 모여 있는 비단과 비슷해서 곧장,
‘나는 방광을 하고 땅을 움직인다’고 말한다 해도,
세간에 대해 허물이 없을 것이요 설명을 다하여도 멍청한 사람이라 온통 믿어 받지 않으리니,
원래가 자기의 발 밑이 텅 비었고 힘이 없어서이다”고 했다.
해석하여 보자.
운거화상은 물외(物外)의 종사(宗師)로서 이 땅에서는 일곱 번이나 태어나 선지식이 되었으며 도덕이 고매하고 지혜 바다가 깊었으며 큰 자비를 갖추었고 언제나 천의 대중들이 꽉 차 있었다.
대중들에게 말한 “다만 마음 이것이 부처인 줄만 알 것이요 부처가 말 모를 것을 근심하지는 말라”고 한 것은,
지금의 학인들이 한결같이 밖으로만 구하고 대승(大乘)의 말만을 배웠으므로 근본으로 돌아가 안에서 스스로가 마음을 관하여 천진(天眞)의 부처를 분명히 보지 못하고 있음을 깨우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이 마음의 부처를 분명히 안다면 곧 저절로의 지혜[自然智]와 스승 없는 지혜[無師智]가 앞에 나타나겠거늘, 어찌하여 번거롭게 밖에서 배울 것인가?
마치 “문으로부터 들어간 이는 보배가 아니다”고 한것과 같고,
또 이르되,
“하늘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 곧 빈궁하지만 땅으로부터 솟아나오면 도리어 부하고 귀하다”고 했다.
만일 마음 땅으로부터 솟아나온 지혜의 보배라면 어떻게 다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르되,
“그지없는 광”이라고 했다.
다만, 마음의 진실을 얻기만 하고 근본인 발빝이 진실해지기만 한다면,
저절로 나오는 말이 모두가 실상(實相)과 상응하게 되고 그 말끝에 사람의 생사를 구제하며 범부를 변화시켜 성인을 만들고,
조약돌을 잡으면 금이 되며 있다고 말해도 되고 없다고 말해도 되어서 구절마다 모두가 언교(言敎)를 이루겠지만,
만일 마음 속이 진실해지지 못했으면 원만한 믿음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공연히 헛되고 부황한 데에 맡겨 스스로가 속게될 뿐이다.
가령 변설이 종횡 자재해도 미친 지혜[狂慧]만 더 불리고 설령 설법을 하게 되어 하늘꽃이 내린다 해도 돌이 머리를 끄덕이리니, 일이 만일 진실하지 않다면 온통 요망한 허깨비가 되리라.
그런 까닭에, 지공(志公)이 운광(雲光) 법사가 법화경(法華經)을 강할 때 감응으로 하늘꽃이 내리는 것을 보고 이르되,
“이것은 교조(齩蚤)의 이치로다”고 했으니,
이야말로 선성(先聖)의 진실한 말씀이다.
실로 후학을 위한 본보기[龜鏡]이니, 뼈 속 깊이 새겨야 하고 큰 띠에 다 적어 두어야 하리라.
이제 두루 찾아서 드날렸으니, 깊이 뜻함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