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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바수밀보살소집론 제9권
11. 견건도(見揵度)
만일 모든 법이 그 법의 인연이라면 때로는 그 법이 그 법의 인연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가?
어떤 이는 “마치 그 법이 아직 생기지 않은 것과 같나니, 그 때에는 그 법은 인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일(事)의 인연 때문에 인(因)과 그와 다른 인연은 인연이 아니기도 하다”고 말했다.
또 반드시 온갖 모든 행(行)은 저마다 스스로의 인(因)과 스스로의 과(果)가 있으며, 그 밖의 다른 과보(果報)를 얻게 되면 영원히 다시는 생기지 않는다. 가령 그러해야 된다면 계(界)에는 어긋남이 있고 가장 길한 법이 있다.
아라한이 아라한에서 물러났다가 도로 다시 아라한의 과(果)를 얻으면 모든 근(根)과 역(力)도 각(覺)과 도(道)의 뜻[意]을 얻으면서 당연히 본래 얻은 것을 얻는다고 말해야 하는가, 본래 얻지 못한 것을 얻는다고 말해야 하는가?
어떤 이는 “만일 등해탈(等解脫)을 얻으면 본래 얻은 것을 얻는다고 말해야 하지만 만일 무애해탈(無礙解脫)을 얻으면 본래 얻지 못한 것을 얻는다”고 말해야 한다.
또 아라한에게는 여섯 가지의 근(根)이 있고 더함과 덜함이 있다. 모든 아라한은 그 뜻을 분별하면서 그는 이것에 대하여 상응할 때에 그는 본래 다른 데서 도의 자취를 얻지 않으며, 더함이 있게 사유하고 더함이 있게 끊는 것이니, 더함이 있게 사유하면 당연히 본래 얻은 것을 얻는다고 말해야 하며, 이것을 도가 있고[有道] 사유에서 끊는다[思惟斷]고 하거니와 자라고 더한[長益] 것이 있으면 당연히 본래 얻지 못한 것을 얻는다“고 말해야 한다.
만일 아라한을 아라한이라 생각하면서 보시하는 것과 가령 아라한이 아닌데도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시한다면 어느 것이 최고로 얻는 복이많은가?
어떤 이는 “만일 아라한이 아라한이라 생각하면서 보시하면 그것은 최고로 얻는 복이 많다”고 했다. 왜냐 하면 농사에서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은 대개 좋은 밭이 있기 때문이다.
[문] 마음과 뜻[心意]의 행(行)이 같고 생각[念]에서 일으킨 바와 같거늘 어떻게 복을 받는 것이 가장 많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좋은 밭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 것이 많다면 모든 이가 한 분의 아라한에게 보시하여 모조리 평등한 복을 얻게 되리니, 이 때문에 이 일은 옳지 못하다.
어떤 이는 “두 가지는 다 같이 복을 받는 것이 평등하다. 왜냐 하면, 첫 째는 좋은 밭 때문이요, 둘째는 마음을 말미암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문] 만일 좋은 밭에다 마음으로 더함이 있는 이라면 마음을 말미암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인데 어떻게 평등한 복을 얻겠는가?
또 만일 아라한이 아닌데도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지으면서 보시한 이라면 그는 최고로 복을 얻는 것이 많다. 왜냐 하면, 그는 아라한의 공덕을 마음을 가장 미묘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문] 만일 니건자(尼揵子) 외도(外道)나 이학(異學)이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시하면 그도 최고로 많은 복을 얻게 되는가?
[답] 그는 아라한의 공덕을 알지 못한다.
만일 다시 그가 이 아라한에게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지으면서 보시한다면 이와 같은 것도 최고로 얻는 복이 많다. 그는 이런 힘이 없지만 아라한의 공덕에 반연한다. 만일 아라한의 공덕을 알게 된다면 그는 외도나 이학의 니건자에게는 보시하지 않는다.
또 요점을 취하여 말한다면, 마치 썩고 불에 탄 기둥과 같은 것에도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지으면서 보시한다면 그 역시 큰 공덕을 얻는다.
어떠한 것이 수다원과를 얻지 못한 것이며, 설령 얻었으나 곧 잃게 되는 것인가?
어떤 이는 “수다원은 일곱 번을 왕래하는 신해탈(信解脫)이 있으며 그것은 견제(見諦)의 과(果)에 속하는 것이다. 수다원의 과를 얻지 못해도 만일 견제를 얻으면 그는 신해탈의 과에 속하는 것이므로 곧 수다원의 고를 버린다”고 말했다.
또 그 수다원은 일곱 번 왔다갔다하는 그 연(軟)의 수다원에 속하므로 모든 둔근(鈍根)은 중ㆍ상을 얻지 못하지만 수다원으로서 가가유(家家遊)와 같은 이면 2생(生) 또는 3생 동안 거기에 돌아다니면서 그 고의 근본[苦本]을 다하게 되므로 그 수다원이 하근(下根)에 속한 바라도 곧 그것에 이어서 벌써 중ㆍ상을 얻게 된다.
만일 수다원으로서 가가유(家家遊)이면 두 집을 왔다갔다하면서 그 고의 근원[苦原]을 다하게 되며, 그 하ㆍ중의 수다원과에 속한 바는 곧 버리게 된다. 무위(無爲)가 아님으로써 수다원과를 얻거나 또는 버리는 것이다.
만일 모든 법을 성취하면 그의 법 모양[法相]도 성취하는가? 가령 모든 법 모양을 성취하면 그의 법도 성취하는가?
[답] 만일 모든 법을 성취하면 저 법의 모양도 성취한다. 바깥의 뭇 모양은 성취하지 못해도 만일 모든 법의 제 모양[自相]을 성취하면 그 법을 성취한 것이다.
만일 모든 법을 성취하지 못하면 저 모든 법의 모양도 성취하지 못하는가? 혹은 법 모양을 성취하지 못해도 그 법을 성취하지 못한 것도 아니며, 바깥의 뭇 모양을 성취하지 못해도 그 법의 제 모양은 성취한다.
성취한다고 하는 그 뜻은 어떤 것인가? 제 모양과 상응하게 되면 이것을 바로 성취한다고 한다.
성취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 뜻은 어떤 것인가? 제 모양과 상응하지 않게 되면 이것을 바로 성취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 세존께서 “이것을 바로 이생을 산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와 같은 것을 “목숨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라고 설명하는가?
가령 그와 같이 설명한다면 그 두 가지는 동일한 뜻이나 분별한다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어찌하여 동일한 뜻인가?
[답] 만일 자기가 자신을 의거한다면 그것의 연(緣)이 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설명한다면 당연히 높은 이께 친근(親近)해야 한다.
이런 소견을 내면 “그것은 목숨이며 그것은 몸이다”라고 한다. 어찌하여 이런 소견을 내는가?
어떤 이는 “생신(生身)에 대해 곧 이런 소견을 내며, 더 나아가 근이 있는 몸[有根身]과 함께 상응하며, 지금도 역시 그러하여 그 가운데서 다시 목숨이 있고 다시 몸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중생의 근(根)과 중생의 상(相)을 관찰한 것이니, 중생이라 함은 중생의 감관[根]이요 중생의 성품[性]이며 중생의 종류[類]요, 중생의 종자[種]이다. 그 가운데서 곧 그 목숨과 그 몸이 있다고 하며, 여기서 설명한 바와 같아서 ‘여인의 몸[女身]은 힘이 있어서 그 중에서도 짧은 것은 있지 않고 큰 것만 있으며 몸이 갱락(更樂)의 고(苦)를 깨닫지 않으면 의근(意根)은 끊어진다’”고 말했다.
모든 낸 바의 소견은 목숨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고 한다. 어찌하여 이런 소견을 내는가?
어떤 이는 “몸과 심심의 것[心心者]을 차츰차츰 관(觀)하고 또한 그 심심의 법[心心法]을 차츰차츰 서로 관하면서 나라는 생각[我想]을 지어 목숨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는 이런 소견이 있게 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어떤 선자(禪者)들이 그 위의(威儀)를 관하면서 인연을 짓고 그 인연을 관하며 그는 곧 이런 뜻을 내면서 몸이 다르고 목숨이 다르다. 몸으로 하는 행(行)을 회전하는 때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몸은 파괴되지 않으면서 곧 목숨이 끝나는지라. 곧 생각하면서 ‘몸이 다르고 목숨이 다르구나’라고 한다. 몸은 아직 가기도 전에 곧 목숨은 끝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잠자는 동안에 꿈을 꾸되 몸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여기에 몸이 있는지라. 그는 곧 생각하기를 ‘목숨이 다르고 몸이 다르구나’라고 한다. 꿈속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삼매에서 스스로 전생 일[宿命]을 기억하면서 그 여러 곳에서 죽었고 이 세간에 와 났으며, 그것이 몸에 머무르는 것을 보고는 그 가운데서 곧 생각하기를 ‘몸이 다르고 목숨이 다르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철저하게 듣고 천안(天眼)으로써 중생의 무리를 관찰하면서 중생이 날 때와 중생이 죽을 때에는 몸이 중음(中陰)에 있으면서 속박되는 것을 보고 그는 곧 생각하기를 ‘이 목숨과 몸이 다 함께 노는구나’고 한다”라고 말했다.
또 몸의 중간에서 본래의 것을 기억하고 다시 교묘한 방편으로 회전하면서 그는 곧 ‘목숨이 다르고 몸이 다르구나’라고 생각한다. 또는 나중에 다른 사람이 “목숨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든 내는 바의 소견으로서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는데도 중생의 더러운 집착을 하는구나. 인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중생은 물들어 집착한다”고 한다. 어찌하여 이러한 소견을 내는가?
어떤 이는 “한적한 곳에 있으면서도 모든 때[垢]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궁중에 있을 제를 관하면서도 혹은 청정한 것을 보고는 곧 생각하되 ‘인(因)이 없는 데도 모든 더러운 집착을 일으키는구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두 가지의 힘 때문에 모든 더러운 집착을 내는 것이니 인의 힘[因力]과 경계의 힘[境界力]이다.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서 “인도 없고 연도 없음을 모르고 중생은 물들어 집착한다”고 하는 모든 소견을 얻게 되며, 또는 다른 사람의 설명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내는 바의 소견은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는데 중생은 청정하구나. 인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중생은 청정하다”라고 한다. 어찌하여 이러한 소견을 내는가?
어떤 이는 “여기서는 한적한 곳에 이르러서도 청정하지 않지만 깊은 궁중(宮中)에 있을 제는 혹은 청정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관하면서 그 안의 것에 대하여 곧 ‘인(因)이 없는데도 청정한 것이 있구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세 가지의 힘 때문에 청정한 것이니, 인의 힘과 경계의 힘과 방편의 힘이다. 그것과 상응할 때에 인의 힘과 경계의 힘으로 선한 법[善法]은 회전하면 청정함이 있어 생기는 것과 같다. 이것을 말미암은 까닭으로 인도 없고 연도 없음을 모르나 “중생은 청정하다”고 이런 소견을 얻는다. 또는 다른 이의 설명 때문이다.
모든 내는 바의 소견은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으며 중생은 지혜[智]도 없고 견문[見]도 없구나. 인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연이 있는 것도 아니며 중생은 지혜도 없고 견문도 없다”고 한다. 어찌하여 이러한 소견을 내는가?
어떤 이는 “그는 곧 은근함이 없는 이거늘 어떻게 지혜가 없고 견문이 없는 것을 일으키겠는가? 만일 다시 내는 이[生者]라면 이와 같이 지혜가 없는지라, 그 중에서 곧 ‘인도 없고 연도 없으며 중생은 지혜가 없고 견문도 없구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생사(生死)의 행(行)은 인연인데 방편의 행도 없고 또한 부지런히 구하지 않아서 지혜가 없고 견문이 없는 가운데 머무른다. 그 인(因)과 그 밖의 상응한 것을 사유하지 않아도 지혜가 없고 견문이 없는 것과 상응하게 되거니와 상응하지 않은 때에 지혜와 상응함이 있는 때에도 “인도 없고 연도 없으며 중생은 지혜도 없고 견문도 없다”고 하는 모든 소견을 얻으며, 또는 다른 이의 설명을 말미암는다.
모든 내는 바의 소견은 “인도 없고 연도 없으나 중생은 지견(智見)이 있구나. 인이 있는 것도 아니요 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중생은 지견이 있다”고 한다. 어찌하여 이러한 소견이 있는가?
어떤 이는 “은근한 이는 지견을 일으키지 않고, 조금 은근한 이는 혹은 지견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는 그 가운데서 곧 ‘그것에는 인(因)이 없으나 중생에게 지견이 있구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다섯 가지 일이 있어서 지견(智見)이 회전한다. 이름[名]이 섭수한 바요 뜻[義]에 섭수한 바며 간사와 거짓[姦僞]으로 그의 인(因)과 그 밖의 상응한 것을 알고 지견에 상응한 것과 상응하지 않은 것이니, 이 때[時]를 아는 것으로 “인도 없고 연도 없으면서 중생은 지견이 있다”고 하는 모든 소견을 얻는다. 또는 다른 이의 설명을 말미암는다.
모든 생긴 바의 소견에는 “힘[力]도 없고 정진(精進)도 없다”고 한다. 어찌하여 그러한 소견이 있는가?
어떤 이는 “혹은 사람의 모습으로 전업(田業)을 얻는 것이 있고 전업을 얻지 못한 것이 있으며, 혹은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조금의 전업이 있으며, 그 가운데서 과(果)가 없는 것을 보고는 ‘사람의 모습에는 힘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하는 모든 소견을 얻는다”고 말했다.
또 여러 가지 많이 상응한 것이 있어서 금세(今世)와 후세(後世)에 혹은 과보(果報)를 얻고 그것에서 혹은 일 때문에 과보를 얻지 못하므로 은근한 사람이 그 가운데서 과보를 얻지 못할 때에 “힘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하는 모든 소견을 얻는다. 또는 다른 이의 설명을 말미암는다.
다른 것으로 인한 것과 근본과 소연(所緣)과
수다원(須陀洹)을 성취하는
네 가지와 두 가지의
명(命)과 인(因)의 네 가지와 힘이다.
모든 생긴 바의 소견에는 “보시도 없고 받는 이도 없다”고 한다. 계경(契經)에서 어떻게 이러한 소견을 내는가?
[답] 선행과 악행으로 과(果)가 생기는 바와 또는 친근할 적에 그 중에서 과실을 알 수 없으므로 “선행도 악행도 없다”고 하는 모든 소견을 얻는다. 혹은 다른 이의 설명을 말미암기도 한다.
“금세도 없고 후세도 없으며 또한 중생의 종류도 없다”고 한다. 생이 있는 이[有生者]는 이와 같이 그러한 관(觀)이 있다.
“부모도 없다”고 한 것이니 일을 인하여 그런 것이 있으며, 세간에는 아라한과 도를 수행하는 사람이 없어 도(道)가 없다.
모든 생긴 바의 소견에는 “이 세간에서 목숨이 있어 살고 있는 것은 뒷세상에 다시는 죽지 않는다”고 한다. 어찌하여 이러한 소견을 내는가?
어떤 이는 “이것을 바로 사람은 나의 몸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그가 만일 목숨을 마치면 지(地)로 된 몸은 땅으로 돌아가고 수(水)는 물로 돌아가며 화(火)는 불로 돌아가고 풍(風)은 바람으로 돌아가고 모든 근(根)은 허공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세간의 음[世陰]을 건넜을 적에는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이 세간에서 목숨이 살고 있다’고 하는 모든 소견을 얻게 된다”고 말했다.
또 태(胎) 안에 있다가 또는 태 안에서 죽기도 하므로 그의 목숨을 관하여도 그것 역시 마지막과 처음[終始]을 보고 이 세상에 생명이 산다는 모든 견해를 얻으며, 다른 이의 생명을 말미암기도 한다.
또 세존께서 “여섯 가지의 생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여섯 가지의 생이 있는가?
어떤 이는 “계경(契經)에서 일컫은 바와 같으며, 흑생(黑生)의 사람은 흑법(黑法)에서 생긴다”고 말했다.
또 이학(異學)에서도 여섯 가지의 생이 있다고 한다. 흑생(黑生)과 청생(靑生)과 황생(黃生)과 백생(白生)과 적생(赤生)과 미묘한 백생[微妙白生]이다. 그 흑생에서는 돼지를 잡고 고기와 사슴을 잡으며 매[鴈]를 날려 보내고 소를 죽이며, 그리고 그 밖의 악행을 한다.
청생이란 니건자(尼揵子)의 도(道)를 배운 이들이요, 황생이란 집에 살고 있으면서 범지(梵志)의 법을 받든 이들이며, 적생이란 사문 석자(沙門釋子)와 모든 범행(梵行)을 닦는 이들이다. 백생이라 함은 벌거숭이[倮形]의 도를 배운 이들이며, 미묘한 백생이라 함은 난타(難陀)ㆍ바차(婆磋)ㆍ흘리사승흘률구(訖梨舍僧訖栗姤)ㆍ구사로미가리자(瞿舍盧味迦梨子) 등이다.
모든 생긴 바의 소견에는 “실로 이 7대신(大身)이 있으니, 짓지도 않고 짓지도 말아야 하며, 교화하지도 않고 교화하지도 말아야 하며, 적은 무더기가 떨어져서 심히 깊게 머무른다”고 한다. 어찌하여 이러한 소견을 내는가?
어떤 이는 “4대의 성품과 고락(苦樂)의 성품은 차츰차츰 회전하는데 뛰어남이 있음을 관하지 않나니, 그것은 식(識에 의지한 목숨의 모양[命相]이라 하면서 ‘이 7신(身)은 짓지도 않고 짓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모든 소견을 얻는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4대와 고락이 있으며 4대는 생김[生]으로써 관하면서 그 때에 ‘7신(身)은 짓지도 않고 짓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이와 같은 모든 소견을 얻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또 마음은 빛깔[色]로 보는 바를 선택하여 그 안에서 스스로 깨달음[自覺]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7신(身)은 짓지도 않고 짓지도 말아야 한다”고 하는 이와 같은 모든 소견을 얻는 것이니, 혹은 다시 때로는 다른 이의 설명을 말미암기도 한다.
모든 생긴 바의 소견에는 “바람[風]이 없다”고 한다. 어찌하여 이러한 소견을 내는가?
어떤 이는 “바람은 목숨이라는 생각[命想]이 있어서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시 “항상 있다는 생각[常想]과 파괴된다는 생각이 있어서이니, 그것에 의거하여 ‘바람이 없다’고 하는 모든 소견을 얻게 된다”고 말했다. 또는 다른 이의 설명을 말미암기도 한다.
어떻게 “이것은 부귀(富貴)로 조작하는 바가 아니다”라고 함을 알 수 있는가?
어떤 이는 “가령 스스로 부(富)해야 한다면 그는 곧 부해진다. 온갖 모든 사물은 다 같이 회전이 있으며 계속하여 생겨 끊어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부귀는 그것의 인(因)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만일 부(富)가 인이라면 온갖 모든 사물은 곧 서로 유사해진다. 앞의 이 인(因)과는 차츰차츰 묘한 사물이 되리니, 이 때문에 부귀는 인이다”라고 말했다.
또 만일 부 이것이 인이라면 안으로는 물건에 대한 일이 없고 쌓여 모이지도 않으며 중간에서의 일이 되지도 않고 쌓여 모이지도 않으면서 물건이 있지도 않게 된다. 이 때문에 부(富)는 인이 아니다.
어떻게 “이것이 인이 아님을 아는가?”
[답] 가령 인이 아닌 것으로 짓는다면 쌓이고 모이면서 당연히 온갖 물건이 있고 계속하여 생기며 끊어지지 않아야 하거니와 그 인의 속박으로 계속하여 다시는 생기지 않는다고 관한다.
다시 “만일 인이 없이 물건이 회전한다면 온갖 모든 물건은 모두가 서로 유사해져야 한다. 원인에 더함[增]이 있으면 곧 결과에도 더함이 있으므로 이 과(果)는 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만일 물건이 인(因)이 없이 회전하면 중간에 나아감이 있거나 쌓여 모이지 않는다. 중간에 일이 쌓여 모이지 않는 것이 아니므로 그 가운데서 인이 있으면서 물건이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은 목숨도 아니고 그것은 몸도 아님을 아는가?
[답] 몸에서 몇몇 종류의 제 모양은 파괴되지만 파괴됨이 없는 모양이라야 목숨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 목숨도 아니고 몸도 아님을 안다.
어떤 이는 “몸은 인연에 속박되어 차츰차츰 생기지만 목숨은 차츰차츰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므로 그 가운데서 그것은 목숨도 아니고 몸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또 몸으로 짓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하고 또는 다른 것이 하게 되지만 이와 같이 하면서 목숨을 사랑하지는 못하는 것이므로 그 가운데서 목숨도 아니요 몸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어떻게 다른 목숨도 다른 몸도 아님을 아는가?
[답] 그와 다른 목숨이나 몸을 얻을 수도 없고, 또한 얻을 수 없는 때에는 역시 말로도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 가운데서 다른 목숨이나 다른 몸이 아님을 안다.
다시 “몸의 뜻[義]은 달라 헤아릴 수 없고 자연(自然)이어서 하는 바가 없으며 그러면서도 헤아릴 수 없이 사랑하게 되므로 그 가운데서 다른 목숨이나 몸이 아님을 안다. 뜻[義]으로 짓는 바의 나의 일은 가면서 점차로 전전하는 것이 있지만 목숨은 점차로 전전하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가운데서 다른 목숨이나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또 세존께서 “그가 지은 것은 그 스스로가 얻고 무기(無記)이어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다른 이가 지은 것은 다른 이 스스로가 얻고 이것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뜻은 어떤 것인가?
어떤 이는 “그가 지은 것은 그 스스로가 얻는다고 하는 것은 유상(有常)에 순종하는 것이요, 다른 이가 지은 것은 다른 이 스스로가 얻는다고 하는 것은 단멸(斷滅)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물은 여래의 처중(處中)의 설법에서 구한다 해도 그 중에서는 대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그가 지은 것은 그 스스로가 얻는다고 하는 이것은 무기(無記)요, 가장 첫째가는 이치[最第一義]라야 모든 행을 깨달아 알며, 다른 이가 지은 것은 다른 이 스스로가 얻는다고 하는 것은 무기요, 등제(等諦)를 얻으므로 이 때문에 현행(現行)은 파괴할 수 없으며 말미암은 것이 아니면서도 행보(行報)를 받는다”고 말했다.
또 그가 지은 것은 그 스스로 얻고 자기 자신이 지어서 자기 자신이 얻는다. 세존께서 공(空)을 말씀하시면서 그 안의 것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며, 다른 이가 지은 것은 다른 이가 보(報)를 받는다. 부(富)하여 지은 바를 다른 이가 받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도 세존께서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이 때문에 대답하지 않으셨다.
어떻게 다른 행의 일로 지은 바라는 것을 아는가?
어떤 이는 “가령 행(行)이 있어 일[事]을 지었다면 그 일의 온갖 것은 행에 행이니 두 가지는 다 같이 짓는 바의 행이어서 계속하여 생긴다. 이 때문에 일은 행을 짓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시 “가령 일로 행을 지었다면 온갖 행은 곧 묘한 것이 아니며 하나의 일 가운데서 차츰차츰 행은 미묘한 것이니, 그 가운데서 일로 행을 지은 것이 아님을 안다”고 말했다.
또 가령 행으로 일을 지었다면 중간에 쌓인 무더기의 행이 있을 것이니, 중간에 행이 쌓인 무더기로 회전하지 않았으므로 그 가운데서 일로 행을 지은 것이 아님을 안다.
어떻게 “다른 곳에서 마침[終]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가?
어떤 이는 “마음[心]이 부드럽게 된 마음으로 회전함을 보고 그 가운데서 곧 마칠 때의 마음[終心]이 부드럽게 된 마음으로 회전함을 본다. 이와 같이 하며 그 가운데서 다른 곳에서 마쳤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뒤에 “본래부터 생긴 근과 소의의 근[所依根]은 곧 광대한 근[曠大]이라는 뜻[意]의 인(因)이 있는데, 그것이 만일 어머니의 태 안에 있을 제는 중간에 본래의 근의 뜻[根意]이 되지 않는다고 관한다면 그것도 역시 중간에 본래의 근이 되지 않는 것이니 이 때문에 전생에 그는 이곳에서 저곳에 이르러 다른 곳에서 마쳤다 함을 안다”고 말했다.
또 중간의 마음에서는 마음이 하는 일이 있지 않고 마음이 색(色)을 볼 적에 그 색에 의지하여 그 마음이 있으며 때 낀 모양으로 마음을 삼아 색을 보면서 회전한다. 그 가운데서 다른 곳이 있다는 것을 보고 모든 물건이 걸을 때마다 생기는 것이 있음을 안다.
무엇 때문에 본래의 때[本時]에 생기지 않는가?
어떤 이는 “일이 충족되지 않아서이다”라고 말했다.
[문] 혹은 두 가지 일은 없는가?
[답] 때[時]가 있지 않으면 과실(果實)이 있게 되는 것도 없다.
[문] 혹시 두 가지 때는 있지 않는가?
[답] 때가 있지 않으면 현재의 인(因)도 없다.
[문] 이것도 나를 의심하게 한다. 무엇 때문에 생기지 않는가?
어떤 이는 “모든 물건이 본래의 때에 생긴다면 그것은 현재의 인(因)이다”라고 말했다.
또 미래의 인에 있으면 마치 인이 없는 것과 같으며, 또는 그것은 본래의 때에 생기지 않는다.
또 모든 물건이 본래 생긴 것은 지금 인(因)을 다하면서 생기는데, 그러나 본래 다하지 않았다면[不盡] 본래의 때의 과(果)는 생기지 않는다. 그 가운데서는 곧 당연히 있어야 하지만 하물며 다시 행(行)이 본래의 때에 다하지 않은 것이겠는가? 당연히 “중간에 일[事]을 다한 것이 아닌 까닭을 논하는 설명이다”라고 관해야 한다.
이와 같이 어떤 이는 “물건은 파괴됨이 있지만 그러나 다하지는 않는다”고 말하였다. 어떻게 물건이 다하는데 파괴되지 않은 것을 아는가?
어떤 이는 “가령 물건이 파괴된다면 거기에는 역시 오는 것이 있다. 마치 아들이 어머니의 태 안에 있다가 일시에 오는 것과 같고 또는 걸을 때마다 아는 것과 같다. 그 가운데서 물건이 다함이 있으나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만일 물건이 파괴되면 그것 또한 당연히 와야 하는 것이니, 아들이 어머니의 태 안에 있을 적에 형상은 현재 단절되었으면서도 언제나 회전한다. 그 가운데서 물건은 다함이 있으나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또 이것은 그 일과 상응한 모양을 볼 적에 사유하여 생기니 이 때문에 물건을 쌓아 모은다. 다하는 것과 파괴되는 것은 방편이며, 진에(瞋恚)는 더함이 있으며, 머무름을 얻을 수 있다. 그 가운데서 물건은 다함이 있으나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또는 여기에서 생(生)이 있는 것과
부귀(富貴)와 또한 인(因)이 없는 것이며
목숨과 짓는 것과 다른 곳에서 마치는 것과
물건이 다하는 것과 파괴된 것이다.
견건도 제11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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