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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비담심론 제5권
6. 현성품(賢聖品)[1], 수행과 염처
이미 여러 번뇌에 대해서 설명하였으니,
[수행]
지금부터 수행에 관해서 설명하겠다.
처음은 시업(始業)이라 부르고
다음은 이습행(已習行)이다.
사유이도(思惟已度)는
세 번째 종류임을 알아야 한다.
세 종류의 수행이란 이른바 시업(始業)과 이습행(已習行)과 사유이도(思惟已度)이다.
시업(始業)1)이란 부정(不淨)을 일으키는 것이니, 일찍이 얻지 못했던 경계의 의해사유분(意解思惟分)이다.
이습행이란 받아들인 자상염처(自相念處)를 전환하는 것으로 일찍이 얻지 못했던 결정분(決定分)의 선근(善根)이다.
그 이상 경지는 사유이도에 속함을 알아야 하니, 그 이상은 일승도(一乘道)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부정관(不淨觀)에도 역시 세 종류의 수행이 있다. 즉 발가락에서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가죽과 피와 살을 제거해 의해사유(意解思惟)하는 것을 시업(始業)이라 부른다.
이 부서진 뼈에서 부작상(不作想)을 일으키고 대지(大地)에 두루 차게 한다. 또한 부서진 뼈를 관하고 부작상을 하되 그 부숴진 뼈가 전전하고 서로 대해서 대풍이 불고 이윽고 사라져 눈덩이가 되니, 이것을 이것을 이습행(已習行)2)이라 부른다.
대략 부숴진 뼈를 관한 뒤 도로 자기 몸에 이르게 되면 그 소연에 대해서 청정하고 적멸하여 오직 한 빛깔만을 관하니, 이것을 사유이도(思惟已度)3)라 부른다.
이와 같이 하여 대략 경계를 [관함]에 선근(善根)이 점차로 증가함을 알아야 한다. 일체의 나머지 방편에 의한 선근도 또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미 수행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니,
[그 밖의 일]
지금부터 그 밖의 일에 대해 설명하겠다.
만약 이 번뇌의 두려움에서
멀리 여의려면 모든 현성들의
여실한 정견(正見)이 구족된
방편을 잘 들어야 한다.
‘만약’이라 한 것은 혹은 근본 종자 혹은 방편 혹은 분별하는 일을 말한 것이다.
‘이[此]’라고 한 것은 차례로 번뇌를 설명하는 것이다.
‘번뇌’라 한 것은 맹렬한 고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일체의 유루(有漏)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다만 번뇌의 허물이 독이 섞인 밥과 같으므로 번뇌에서 벗어남을 설한 것이다. 번뇌가 여러 공포의 근본이라는 것은 그것이 종종의 업과 종종의 생(生)이 일으킴을 말한다.
‘멀리 여읜다’는 것은 수멸(數滅)의 멸함이다.
‘현성’이란 정정취(正定聚)4)이다. 즉 일곱 경지의 사람 및 진실한 범부를 말한 것이다.
‘여실한 정견의 구족’이라 한 것은 진실한 도에 머무는 것을 말한 것이다.
‘방편을 잘 들어야 한다’라고 한 것은 그들의 방편의 도를 마땅히 한 마음으로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방편이란 모든 선법(善法)의 방편으로, 해탈로 향하는 행이다. 보시 등을 일으키는 것만이 오직 길인 것은 아니다. 세 가지 고통에 핍박당하는 세간은 깨달을 수 없기에 그들에게 선정을 닦게 하고자 한 것이다.
[몸 관찰]
처음에는 자기 몸의 한 부분에
마음을 묶어두어 안정시키고
식족(識足)을 묶고자 하면
지혜의 원한이 다하게 되리.
‘처음[始]’이라고 한 것은 먼저라는 뜻이다.
‘자기 몸의 한 부분’이라 한 것은 자기 몸의 한 곳이다. 예를 들면 눈썹 사이나 코끝 및 발가락 등을 말한다.
‘묶어둔다’고 한 것은 대상 가운데 안주해 서서 흩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어느 곳에 안주하여 서 있는가?
이것은 자기 마음의 정력(定力) 때문에 일어나는 지혜가 그것이다.
【문】왜 그런가?
【답】식족(識足)을 묶고자 해서다.
마음이란 떠돌아다니면서 한 곳에 머물지 않는 까닭에 한 인연 속에 묶어 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 마음이 되기 때문에 진실을 알아 어지러워지지 않는 것이다.
【문】무엇 때문에 한 대상 가운데 묶어 두는가?
【답】지혜의 원한이 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혜의 원한이란 마치 원수와 인연을 끊듯이 모든 번뇌를 마땅히 끊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비록 남의 몸을 관찰할지라도 마치 죽은 시체를 비추어 보듯 한다”고 경에 이른 것은 먼 인연으로써 이 가까운 인연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제도(濟度)하는 법문을 따라 순응하기 때문이다.
[부정관, 안반념, 계방편관]
백골(白骨)의 몸을 관찰하는 것은 세 가지 제도하는 법문을 따르게 되지만, 죽은 시체를 관찰함은 오직 한 가지 부정관(不淨觀)으로 제도하는 법문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세 가지 제도하는 법문이란 부정관5)과 안반념(安般念)6)과 계방편관(界方便觀)을 말한 것이다.
그 탐욕스런 마음은 부정관으로 제도하고
거칠고 미세한 사유[覺觀]는 안반념으로써 제도하고
편견에 의한 행[見行]은 계방편관으로써 제도하니,
스승이 전수한 그대로 따라 수행하는 것이다.
부정관과 안반념에 관해서는 계경품(契經品)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게 될 것이다.
[계방편관]
계방편관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이것은 어리석은 범부가 부정사유(不正思惟)를 가지고 지혜의 눈이 가리워지고 가로막혀서 진실한 연기(緣起)의 법을 보지 못하고 숙업ㆍ번뇌종의 무량한 법은 5음(陰)을 적취하고 적취상(積聚想)을 일으킨다.
그는 어리석고 미혹한 까닭에 연기로 지어지는 일 가운데서 그것을 ‘내가 지은 일이다’라고 헤아리는 등 여러 가지 잘못된 견해에 얽매이게 된다.
혹은 때때로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하게 되면 바른 법을 들을 수 있게 되어 정사유를 일으킬 수 있게 되며, 능히 자신의 계방편(界方便)에서 자기 몸의 온갖 자성ㆍ온갖 업ㆍ온갖 모습을 비추어 보게 된다.
즉 지(地) 등의 육계(六界)7)에서 지계(地界)는 수계(水界)에 젖게 됨으로 서로 떨어지지 않고,
수계는 지계에 유지되기에 흘러가서 흩어지지 않게 된다.
또한 화계(火界)는 만물을 성숙시키는 까닭에 허물어지지 않으며,
풍계(風界)는 움직이고 흔들리는 까닭에 만물을 불어나게 하고 늘릴 수 있다.
공계(空界)는 비어있기 때문에 음식 등이 들어가고 나올 수 있으며,
식계(識界)는 합쳐지는 것인 까닭에 만들고 바가 있게 된다.
또한 이 몸은 발끝에서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관하다.
이 색을 관찰하기를 마치 쌓인 모래가 바람에 날려 나부끼는 것과 같이 하며, 무색법에서 앞뒤로 상속하는 이분(異分)을 관찰한다.
이와 같이 관한다면 공해탈(空解脫)의 법문의 종자를 얻게 되고 저 생사가 싫어져서 그곳에서 떠나 욕계가 즐겁지 않게 된 사람은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의 씨앗을 얻게 된다.
생사의 윤회에 대해 즐거워 하지 않게 되면 바로 열반으로 향하게 되어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의 씨앗을 얻게 된다.
만약 여기에서 부작상(不作想)을 얻어 깨달은 뒤에 일체의 유위(有爲)는 모두 흩어지고 허물어짐을 보게 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계방편(界方便)의 성취라고 부른다.
【문】이와 같이 비추어 본 다음에는 또 어떻게 하는가?
【답】
이 방편관은 몸에 대하여
진실한 모습을 결정하니
모든 느낌과 자기 마음과
법에서도 이와 같이 비추어 본다.
그에 대해 닦는 자가 부정관(不淨觀)ㆍ안반념(安般念)ㆍ계방편관(界方便觀)의 하나하나에 이미 머물렀다면,
[4념처]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의 각각에 진실을 보게 되는데, 진실이란 전도(顚倒)되지 않은 것을 뜻한다.
모습[相]이라 한 것은 두 종류가 있으니, 즉 독자적인 모습[自相]과 공통적인 모습[共相]이 그것이다.
색상(色相)이란 몸의 자상이니, 곧 4대종(大種)8) 및 소조(所造)9)이다.
수각상(隨覺相)은 곧 느낌의 자상[受自相]이며, 식상(識相)은 곧 마음의 자상이다.
법념처에는 온갖 법에 온갖 각기 다른 모습이 있다. 곧 따라 아는 것[隨知]은 상의 자상[想相]이며 여기서 짓는 것은 사의 자상[思相]이니, 이처럼 비유되는 것이다.
공상(共相)은 뒤에 곧 설명하게 될 것이다.
【문】이 염처(念處)라 하는 것은 가령 큰 바탕 위에 건립된 측면에서 말할 경우, 마땅히 염처는 ‘하나’뿐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고, 유루와 무루를 분별한다면 두 가지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또 바탕이 약하고 중간 정도이며 상등(上等)이라고 따로 나누어 말할 경우 세 가지로 설명되어야 하니, 곧 이것을 유루ㆍ무루로 나누어 구별할 경우 여섯 가지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또 신념처 등을 유루ㆍ무루로 나누어 구별할 경우 여덟 가지로 설명되어야 하며 아홉 단계의 근기10)로 나누어 구별할 경우 아홉 가지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신념처(身念處)등을 내(內)ㆍ외(外)ㆍ내외(內外)로 나누어 구별할 경우 열두 가지 염처로 설명되어야 한다.
또 아홉 단계의 근기를 다시 유루와 무루로 나누어 구별할 경우 열여덟 가지 염처로 설명되어야 한다.
또 신념처 등을 약하거나 중간ㆍ상등의 근기와 유무ㆍ무루로 나누어 구별할 경우 스물네 가지로 설명되어야 하며,
신념처등을 내ㆍ외ㆍ내외 혹은 염리(厭離) 혹은 불락(不樂) 혹은 관찰의 측면 등으로 나누어 구별할 경우 서른여섯 가지로 설명되어야 한다.
또한 신념처등을 아홉 단계의 근기와 유루ㆍ무루로 나누어 구별할 경우 일흔 두 가지로 설명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염처마다 구별하면 마땅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염처로 설명되어야 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4념처만을 말하는가?11)
【답】네 가지 뒤바뀐 생각ㆍ네 가지 식(食)ㆍ네 가지 식주(識住) 및 네 가지 음[四陰]은 네 가지 수행으로 대치되기 때문에 네 종류의 따라 닦는 법을 말하게 된 것이다.
즉 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상의 전도를 대치하기 때문에 신념처(身念處)를 설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고통을 즐겁다고 생각하는 상의 전도를 대치하기 때문에 수념처(受念處)를 설하게 되는 것이다.
무상(無常)한 것을 항상하다고 생각하는 상의 전도를 대치하기 때문에 심념처(心念處)를 설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상의 전도를 대치하기 때문에 법념처(法念處)를 설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머지 다른 종류의 뒤바뀐 생각도 그 응하는 바에 따라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문】이 염처는 어떻게 하면 원만해지는가?
【답】두 인연으로 원만해진다. 즉 경계를 허물고 선근이 증장(增長)하는 것을 말한다.
경계를 허문다는 것은 극미와 찰나로써 경계를 허문다는 그 뜻을 따른 것이다.
선근을 증장한다는 것은 즉 약한 선근(善根)에 의지하여 가운데가 되고 가운데에 의지하여 위로 증장되는 것으로, 이를 이름하여 원만해진다고 한다.
【문】왜 먼저 신념처를 말하고 법념처에 이르기까지를 나중에 말하는가?
【답】일어나는 순서에 따랐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세 가지 수순을 말씀하셨다.
즉 일어남의 수순과 설명의 수순과 무간등(無間等)의 수순이 그것이다.
일어남의 수순이란, 이른바 염처 및 선(禪)과 무색(無色)을 수행자는 먼저 신념처(身念處)를 일으키고 뒤에 법념처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세존께서는 먼저 신념처를 설하시고 범념처에 이르기까지를 뒤에 설한 것이다. 선정과 무색정도 또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설명의 수순이란, 순서를 따른다는 것은 사정단(四正斷)ㆍ사여의족(四如意足)ㆍ오근(五根)ㆍ오력(五力)ㆍ칠각지(七覺支)ㆍ팔정도(八正道)의 지승(枝乘)은 한 찰나간에 일어나는 정진으로 사정단을 갖추지만,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미 생긴 악하고 좋지 못한 법을 방편으로 끊게 하고 나아가 이미 생긴 선법은 방편으로 머물게 한다’고 이처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단은 짓는 것이기 때문에 사정단이라 말하니, 이것은 자성(自性)이 아닌 까닭이다.
무간등의 수순이란, 진제(眞諦)를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먼저 고(苦)의 무간등에 들어간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먼저 고제를 말하는 것이니, 자세히 설명하면 이와 같은 내용인 것이다.
【문】왜 수행자는 먼저 신념처를 일으키고 나아가 법념처를 일으키는가?
【답】거칠기 때문이다. 5음(陰) 가운데 어느 것이 거친 음인가 하면, 4대종(大種) 및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먼저 관하는 것이다.
수(受)는 비록 색음(色陰)처럼 거칠지는 않더라도 그 행이 거칠기 때문에 그 다음에 말하게 되는 것이다. 색음(色陰) 다음으로 수음(受陰)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즉 손과 발의 아픈 느낌은 곧 색음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비록 상음(想陰)과 행음(行陰)은 거칠고 식음(識陰)은 거칠지 않지만 열반과 더불어 합쳐져서 법념처(法念處)를 시설하게 되는 까닭에 그 식음이 가장 미세한 것이다. 때문에 먼저 심념처(心念處)를 관하고 뒤에 법념처를 관하는 것이다.
비록 모든 염처가 법이기는 해도 이것이 건립되는 것은 법에 있어서 상(想)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법념처만을 설명하고, 나머지는 설하지 않는다.
계품(界品) 가운데서 설명한 것처럼 법입(法入)도 이 가운데서는 역시 그런 위치에 있다[상만(想滿)이란 소리에 있어서는 상(想)이지만 뜻에 있어서는 그 이름이 만(滿)인 것이다].
[염처의 세 종류(1)]
【문】몇 종류의 염처(念處)가 있는가?
【답】
세 종류로 염처를 말한다.
자성(自性)과 공통적인 것
또한 설하고 이름하여 연(緣)을 삼나니
문(聞) 등의 지혜 또한 그렇다.
‘세 종류로 염처를 말한다.
자성과 공통적인 것, 또한 설하고 이름하여 연을 삼는다’라고 한 것은, 세 종류의 염처를 말한 것이다.
즉 자성념처ㆍ공념처ㆍ연념처 등이 그것이다.
자성념처란 뒤바뀌지 않은 지혜를 말한다. 왜냐 하면, 순신관(順身觀)을 설함과 같으니, 신관이란 곧 지혜이며 염을 짓는 것이다.
수연(授緣)을 잊어버리는 일 없이 대상을 억념하기 때문에, 자성의 허물을 제거하게 되기 때문에 염처(念處)라고 말하는 것이다.
공념처(共念處)란 바른 지혜와 일과(一果)의 법12)을 말한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비구여, 선법이 모이고 쌓인 것은 곧 4념처(念處)다”라고 하신 이것이 정설(正說)이다.
연념처(緣念處)란 일체법을 말한다. 즉
“비구여, 모든 법은 4념처로 설한다”라고 설한 바와 같으니, 이것이 정설이다.
거두어들이고 받아들이는 상태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또한 대략적인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공념처는 번뇌를 끊으나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자성념처란 비록 대략적인 경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갖추어진 조건이 부족하기 때문에 수구(受具)를 포섭하는 도가 번뇌를 끊게 된다. 한편 연념처(緣念處)는 중구(衆具)를 포섭하기는 해도 그 경계가 두루 흩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간략한 경계의 도(道)가 번뇌를 끊게 된다.
【문】오직 이 염처만이 세 종류인가? 아니면 나머지 다른 것도 또한 그런가?
[염처의 세 종류(2)]
【답】듣는 지혜 등도 역시 그렇다. 즉 다른 것에도 세 종류가 있으니,
듣는 지혜[聞慧]와, 생각하는 지혜[思慧]와, 닦는 지혜[修慧] 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서 듣는 지혜는 항상 표현되는 것[名處]에서 일어난다. 즉 스승으로부터 경ㆍ율ㆍ아비담(阿毘曇)을 듣고 얻는 지혜이다.
생각하는 지혜라 하는 것은 혹 생각하는 것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혹 생각을 떠나서 일어나기도 한다.
닦는 지혜는 오로지 표현을 벗어나서 일어난다.
비유하면 세 사람이 수영을 배울 때, 한 사람은 수영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반쯤 배운 사람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다 배운 사람이라고 할 경우,
처음 수영을 배우는 사람은 물기슭 가까운 곳에서 수영해야 하고
절반 가량 배운 사람은 기슭에 가까운 곳이나 혹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영하기도 하고
다 배운 사람은 물기슭에서 떨어진 곳에서 수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곧,
처음 수영을 배우는 사람은 듣는 지혜에 비유되고,
두 번째 사람은 생각하는 지혜에 비유되며
세 번째 사람은 닦는 지혜에 비유되는 것이다.
닦는 지혜는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다. 영원히 명(名)을 여의기 때문이며 바르게 안정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두 종류는 그러한 의미가 없는가 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왜냐하면 닦는 지혜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닦는 지혜란 4념처(念處)를 갖추니,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서 법념처만이 번뇌를 끊게 되고 다른 염처는 그렇지 않다. 법념처는 총체적이기 때문이다.13)
다른 염처가 그렇지 못한 것은 일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념처를 일어나게 하는 까닭에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법념처에 두 종류가 있으니, 괴연(壞緣)과 불괴연(不壞緣)이 그것이다.
만약 지혜가 색음(色陰)을 연할 경우 이것은 신념처(身念處)에 속하고,
만약 수음(受陰)을 연할 경우 이것은 수념처(受念處)에 속한다.
또 만약 마음을 연할 경우 이것은 심념처(心念處)에 속하고,
만약 상음(想陰)ㆍ행음(行陰) 및 무위(無爲)를 연할 경우 이것은 불괴연의 법념처에 속한다.
[이 밖의 다른 염처]
이 밖의 다른 염처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법 가운데 들어가 총체적으로 관찰해 보면
법의 진실한 모습을 얻는다.
그것은 네 가지이니 무상(無常)과
공(空)과 무아(無我)와 비락(非樂)이다.
‘법 가운데 들어가 총체적으로 비추어 보면 법의 진실한 모습을 얻는다’라고 한 것은 수행자가 불괴연의 법념처에 들어가 하나하나의 염처를 닦아서 두루 일체법의 자상과 공상을 보고 나서 괴연의 법념처에 들어가게 됨을 말한다.
즉 색음(色陰)과 수음(受陰)을 연하는 염처, 색음ㆍ상음을 연하는 염처, 색음ㆍ행음을 연하는 염처, 색음ㆍ식음을 연하는 염처로, 이와 같이 셋ㆍ넷ㆍ다섯 가지 음(陰)을 연한다. 이 법념처(法念處)가 일체의 신ㆍ수ㆍ심ㆍ법의 염처를 이루게 된다.
이 한 가지를 깨닫는 것을 가지고 이 넷을 건넌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이 넷은 무상과 공과 무아와 비락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무상(無常) 등의 행으로써 일체의 유루법을 총체적으로 비추어 보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그것을 한 생각마다 소멸하는 까닭에 무상이며 상(常)등을 여의기 때문에 공(空)이며 자재롭지 않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며 실로 핍박하기 때문에 고(苦)인 것이다.
[난법(煖法)]
이로부터 난법(煖法)이라 부르며
법에 대한 깨달음에서 생긴다.
열여섯 가지 행이 등기(等起)하여
사성제(四聖諦)를 관찰하게 된다.
‘이로부터 난법이라고 부르며 법에 대한 깨달음에서 생긴다’라고 했는데,
수행자가 괴연의 법념처에서 차례로 선근을 낳는 것을 이름하여 난법이라 한 것이다.
【문】몇 가지 행이 있으며 어떤 경계에 속하는가?
【답】열여섯 행이 등기하고 사성제를 관찰한다.
그 난법은 고제(苦諦) 등의 열여섯 가지 행을 행하는 것이다. 즉 고성제의 사행(四行) 내지 도성제의 사행이 그것이다.
행의 뜻은 지품(智品)에서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그 난법이 생할 때 3제(諦)14)를 연하는 자는 법념처(法念處)를 현세에서 닦게 되고 미래에서 4념처를 닦게 된다. 한가지 행은 현재에서 닦고 네 가지 행은 미래에서 닦게 되니, 자분(自分)과 자분 아닌 것도 있다.
멸제를 연하는 법념처는 현재에서 닦으며, 그 닦음은 곧 미래의 일이 된다.
처음에는 5음(陰)을 벗어난 관득(觀得)이 아닌 음을 연하는 도(道)를 닦는다. 그 가운데 한 가지 행은 현재에서 닦고 네 가지 행은 미래에서 닦는다.
삼제를 연해 증진(增進)될 때는 4념처의 하나하나의 염처를 현재에서 닦고 네 가지는 미래에서 닦는다. 한 행은 현재에서 닦고 열여섯 가지 행은 미래에서 닦는다.
멸제(滅諦)를 연해 증진될 때는 법념처를 현재에서 닦게 되고 4념처는 미래에서 닦게 된다.
한 행은 현재에서 닦게 되고 열여섯 행은 미래에서 닦게 된다.
이른바 일찍이 없었던 선근(善根)을 닦게 되고 자분(自分)의 행을 닦게 된다.
현재의 닦음은 여기서는 자분의 행과 자분이 아닌 행을 닦는 것이다.
난법은 지혜의 성품이며 따라 일어나는 법은 5음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
난(煖)은 성스런 지혜의 불을 일으키는 까닭이며,
난을 종자로 삼는 까닭에 난법이라고 말한 것이다.
[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제일법(世第一法)]
이 법이 증장하고 나면
정법(頂法)과 인법(忍法)을 일으키며
세제일법(世第一法)을 얻게 됨은
한 찰나에 의지한다.
‘이 법이 증장하고 나면 정법과 인법을 일으킨다’라고 했는데, 수행자의 바른 방편과 바른 억념이 증장하게 되면 그에 수순하는 선한 업과 모든 조건을 갖추게 된다. 그런 까닭에 난법(煖法)이 증장함을 얻어 그 다음으로 생기는 선근(善根)을 낳는 것을 이름하여 정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성제를 연해 열여섯 가지 행을 행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정법(頂法)이 사제를 연하고 또 멸제를 연해 증진될 때는 법념처(法念處)를 현재에서 닦게 되고 4념처는 미래에서 닦게 된다.
또한 한 가지 행은 현재에서 닦게 되고 열여섯 가지 행은 미래에서 닦게 된다.
또한 3제(諦)를 연해 증진될 때는 4념처의 하나하나를 현재에서 닦게 되고 미래에서 4념처를 닦게 된다.
또 한 가지 행은 현재의 세계에서 닦고 미래의 세계에서는 열여섯 가지 행을 모두 닦게 된다.
이 선근도 역시 지혜의 본질을 지닌 것으로 따라 일어나는 법은 5음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
‘정법(頂法)’이라 하는 것은 난법 위에 있는 까닭에 정(頂)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인법(忍法)보다는 못하기에 하(下)라고 표현한다.
혹은 때에 따라서 세존께서는 믿음[信]이라고도 말씀하셨으니, 예를 들면 바라연(波羅延)15)을 위하여 설법하신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혹은 지혜라고 말씀하셨으니, 예를 들면 나이 어린 비구들을 위하여 받은 일[受事]에 관한 설법을 하신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정법에서 물러서는 것을 정퇴(頂退) 또는 정타(頂墮)라 표현하는데 난법에도 응당 타락[墮]이 있으나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정타란 근심과 괴로움이 많기 때문이다.
세 곳에서 큰 근심과 괴로움이 일어나니, 마치 큰 보배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
즉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의 이욕(離欲)의 퇴와 욕계의 욕망을 여의는 퇴 및 정법(頂法)의 퇴가 그것이다. 퇴란 성취하지 못한 특성을 이름한다.
그 수행자는 이 바른 방편에서 정선근(頂善根)을 성취하고 증진시켜 진리에 순인(順忍)함을 낳고 사제를 연해 십육행을 행한다.
처음의 인(忍) 및 증진될 때는 법념처를 현재에서 닦고 미래에서는 4념처를 닦게 된다.
또 한 가지 행은 현재에서 닦고 미래에서는 열여섯 행을 모두 닦게 된다.
인(忍)이란 사성제에 대해서 감인욕락(堪忍欲樂)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난정(煖頂)도 역시 감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렇지 않다.
인법은 물러서지 않으며 악취와는 어긋나고 성인의 길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진리에 순인(順忍)하는 것으로 난법ㆍ정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는 것이다.
【문】인이 불어나고 자라나면 어떤 선근(善根)을 낳는가?
【답】세제일법을 얻는 것은 한 찰나에 의한다.
즉 증상(增上)된 인은 차례연이 낳는 범부가 얻는 가장 뛰어난 선근을 세간제일법이라 부른다.
이 역시 5음의 자성을 지닌 것으로 그 경지가 유루(有漏)의 세계에 속하는 까닭에 세간(世間)이라 표현한 것이다.
또한 난법 등 다른 법보다 뛰어난 까닭에 제일이라 표현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범부가 닦는 최상의 공덕이다. 왜냐하면 한 순간도 머물지 않기 때문이며, 도를 밝히는 과정[見道]과 비슷하기 때문이며, 난ㆍ정ㆍ인법과 상속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 지혜를 닦게 되면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비추어 보는 법념처가 일어나고, 차례로 결정된 세간행의 선근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거기에는 아홉 단계의 품계가 세워지니,
즉 약한 가운데에서 약하고[軟軟] 중간이고[軟中] 위[軟上]인 것을 난법(煖法)이라 부르며
중간 가운에에서 약하고[中軟]과 중간[中中]인 것을 정법(頂法)이라 부르고,
중간에서 위[中上]와 위에서 약함[上軟]과 위에서 중간[上中]인 것을 인법(忍法)이라 부르고,
위에서 위[上上]인 것을 세간제일법이라 부르는 것이다.
가령 음(陰)의 무상등을 관하는 선근을 난법이라 부르며
삼보(三寶)의 공덕을 관하는 것을 정법이라 부르고
성제(聖諦)를 관하는 것을 인법(忍法)이라 부르며
고제를 관하고 다음 차례로 성스런 도[聖道]가 있으면 세간제일법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 난법을 얻은 다음에는 혹은 물러서서 버리거나 혹은 목숨이 끝나서 버리거나 혹은 경계의 경지[界地]를 건너 버리게 된다. 또한 무간업을 일으키고 선근을 끊고 악취(惡趣) 가운데 태어나도 이러한 복에 연하는 까닭에 반드시 열반을 얻는 것이다.16)
정법(頂法)의 물러남도 역시 이와 같으니, 다만 선근을 끊는 것은 제외한다.
인법의 경우는 물러서지 않으나 목숨이 끝나서 버리는 경우와 경계의 경지를 건너 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간업을 짓지 않으며 선근도 끊지 않고 악취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인법은 큰 힘이 있기 때문이니,
마치 사자왕을 뭇짐승들이 멀리 피하듯이 인법의 힘도 마치 이와 같은 것이다.
일체의 악한 마음이 비수멸(非數滅)인 것 역시 대왕이 머무는 곳에서는 인천(人天)의 악한 행동과 마음이 모두 유연해지는 것과도 같다.
【문】세간제일법은 어떤 연이 있으며 몇 가지 행이 있는가?
【답】
아래[下]의 고(苦)에는 네 가지 행이 있고
포섭을 말한다면, 여섯 경지를 의한다.
인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
나머지는 혹은 일곱 경지에 의지한다.
‘아래의 고에는 네 가지 행이 있다’라고 했는데, 욕계의 고를 아래[下]라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세간제일법의 소연(所緣)이다.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의 행이 전변하는 곳으로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 도를 밝히는 과정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두 종류의 수행이 있으니, 즉 애행(愛行)과 견행(見行)이다.
애행에 두 종류가 있으니, 아만행(我慢行)과 해태증행(懈怠增行)이다.
견행(見行)에도 역시 두 종류가 있으니, 아(我) 및 아소(我所)에 계착하는 것이 그것이다.
아만(我慢)이 있는 자는 무상행(無常行)의 세간제일법을 닦아야 하고 게으른 마음이 더해진 자는 고(苦)의 행을 닦아야 한다. 아행(我行)에 계착하는 자는 비아(非我)의 행을 닦아야 하고 아소(我所)에 계착하는 자는 공(空)의 행을 닦아야 한다.
【문】이러한 것은 몇 가지 경지에 포섭되는가?
【답】이른바 포섭은 여섯 경지에 의지하니, 미래선(未來禪)과 중간선(中間禪)과 근본 4선(根本四禪)이 그것이다.
욕계는 아니니, 정(定)이 없기 때문이다.
무색계도 아니니 도를 밝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문】나머지 다른 결정분(決定分)의 선근(善根)은 몇 가지 경지에 포섭되는가?
【답】인법도 역시 그와 같다. 즉 인법이 여섯 가지 경지에 포섭되니, 그것은 세간제일법의 경우와 같다.
‘나머지는 혹 경우에 따라 일곱 경지에 의지한다’라고 한 것은 난법ㆍ정법의 경우도 역시 여섯 경지에 속한다는 것이다.
구사(瞿沙) 존자는 욕계의 경계에도 역시 이러한 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문】이미 결정분이 차례로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하였는데 그렇다면 성인의 도가 차례로 일어나는 과정은 또 어떠한가?
【답】
세간제일법 다음에는
고법인(苦法忍)이 일어나고
인(忍) 다음에 지(智)가 생겨서
함께 하고(下苦)를 관찰한다.
‘세간제일법 다음에는 고법인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세간제일법 다음 차례로 고법인이 생겨서 욕계의 견고(見苦)의 단계에서 끊는 열 가지 번뇌를 대치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최초로 일어나는 무루무애도(無漏無礙‘道)인 것이다.
또한 세간제일법 다음으로는 악한 업을 짓지도 않고 향하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게 되며 삿된 업과 삿된 취(趣)와 삿된 견해를 버리게 된다.
여기서 삿된 업이란 오무간(五無間) 지옥에 떨어질 업을 말하며 삿된 취란 악취를, 삿된 견해란 오견(五見)17)을 말한다.
또한 세간제일법의 부분은 고법인(苦法忍)과 다섯 종류를 결정한다. 곧, 경지가 정해지고 행이 정해지고 연이 정해지고 찰나가 정해지고 차례로 생기는 연이 정해진다.
경지가 정해진다고 하는 것은 만약 지금의 경지가 세간제일법의 경지라면 그것이 곧 고법인(苦法忍)의 경지가 되는 것을 말한다.
행이 정해진다고 하는 것은 만약 지금의 행이 세간제일법의 행이라면 그것이 곧 고법인의 행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연이 정해진다고 하는 것은 [세간제일법과 고법인은] 반드시 같은 연을 지니기 때문이다.
찰나가 정해진다고 하는 것은 만약 이 한 순간을 등질 경우 곧 이 한 순간에 생겨남을 말한다.
차례로 생기는 연이 정해진다고 하는 것은 세간제일법 다음에는 반드시 고법인이 생기는 것을 말한 것이다.
증상인(增上忍)의 몫으로는 세 종류가 정해지니, 찰나 및 차제로 인연이 정해지는 일을 제외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법인을 연한 후에 경지를 뛰어넘어 생을 여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욕계의 고 내지 색계ㆍ무색계의 고, 나아가 색계ㆍ무색계의 행에 대한 대치를 사유하게 되면 이것을 이름하여 하인(下忍)이라 한다.
그곳에서 다시 욕계의 고 내지는 욕계의 행에 대한 대치를 사유하고 색계ㆍ무색계의 행의 대치를 버리게 되면 이것을 중인(中忍)이라 한다.
그 하나하나의 진리[諦]를 관찰하고는 이를 버리고 되돌아와서 마침내 욕계의 고를 이어 가며 닦고 그런 다음 다시 이를 버리며, 또 다시 이어 가며 마침내 욕계의 고를 일 찰나에 사유하게 된다면 이것이 증상인(增上忍)에 해당된다.
그런 연후에야 세간제일법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인(忍) 다음에 지(智)가 생겨난다’고 한 것은 고법인(苦法忍) 다음에 고법지(苦法智)가 생겨남을 말한 것으로, 해탈도의 자성을 지닌다.
【문】이 인(忍)과 지(智)는 무엇을 연하게 되는가?
【답】함께하고(下苦)를 관찰한다. 하고란 욕계의 고(苦)를 말하니, 그 고를 함께 본다는 것이다.
색계ㆍ무색계에서의 고와
집ㆍ멸ㆍ도 또한 그렇다.
이 법의 무간등이 있으니
이것을 십육심(十六心)이라 한다.
‘색계ㆍ무색계에서의 고’라고 한 것은,
색계와 무색계의 고제(苦諦)도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고비인(苦比忍)18)은 무애도(無礙道)이며, 고비지(苦比智)는 해탈도이다.
‘집ㆍ멸ㆍ도 또한 그렇다’라고 한 것은 집제와 멸제와 도제도 역시 두 가지 인(忍)으로써 무애도를 이루고 두 가지 지(智)19)를 해탈도로 삼음을 말한 것이다.
‘이 법의 무간등이 있으니, 이를 십육심이라고 한다’고 한 것은
이 십육심이 이루어진 무렵을 법의 무견등(無見等)으로 삼음을 말한 것이다.
무간등(無間等)20)이란 곧 견(見)의 의미이다.
이 십오심이 이루어진 무렵은 견도(見道)21)에 속하나 최후의 한 마음은 수도(修道)22)의 단계에 속한다.
【문】무엇 때문에 3제(諦)의 인(忍) 및 지혜는 견도(見道)에 속하면서 도제(道諦)의 최후심은 수도에 속한다고 하는가?
【답】십육행도를 닦기 때문이다.
도제(道諦)의 비지(比智)와 상응하는 것은 십육행을 닦고 견도는 십육행을 닦지 않는다.
도제의 비지는 상속되기 때문에 과보로 얻는 도제에 속하니.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는 틀린 말이다. 가령 진지(盡智)가 성취되면 이것도 곧 이루어지니, 만약에 이것이 비분(非分)이라면 무학도(無學道) 역시 비분인 것과 같다.
간략하게 세 경지를 설명하자면, 밝히는 경지[見地]와 닦는 경지[修地]와 무학(無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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