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아비달마론 하권
4.2. 불상응행(3), 명근(命根)ㆍ중동분(衆同分)ㆍ생ㆍ주ㆍ노ㆍ무상
[명근]
선행된 업이 인기한 6처(處)의 상속을 끊임없이 이루어지게 하는 근거가 되며, 4생ㆍ5취의 설정근거가 되는 것을 명근(命根: jīvita indriya), 또는 목숨[壽: āyus]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비달마[對法]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일컬어 명근이라 하는가?
삼계의 목숨을 말한다. 즉 이 같은 실체가 있기에 능히 체온[煖]과 의식[識]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게송[伽他]에서 말한 바와 같다.
목숨과 체온과 의식,
이 세 가지 존재가 몸을 떠날 때,
그것이 떠난 몸은 나자빠지니,
마치 나무계와 같아 어떠한 생각[思覺]도 없는 것이다.
계경에서도 역시
‘지옥에 떨어질 업의 이숙을 받았으면 나락가(那落迦)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나아가 비상비비상처 역시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명근을 배제하고서는, 이 같은 근(根)의 성질에 포섭되고 삼계에 두루 존재하며, 생의 일기상속(一期相續)을 끊임없이 이루어지게 하는, 그리하여 4생ㆍ5취의 설정근거가 될 만한 또 다른 별도의 법이 존재하지 않으니, 그럴 경우 무색계에 태어난 자가 스스로 상지(上地)의 선 염오심을 일으키고, 혹은 하지(下地)의 무루심을 일으킬 때 무엇으로 화생(化生)ㆍ천취(天趣)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명근을 완전히 부정해 버릴 경우, 선ㆍ염오를 일으킬 때를 마땅히 죽음이라 해야 할 것이며, 무기를 일으킬 때를 응당 태어남이라고 해야 하는 커다란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중동분]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동일한 일을 하게 하고 동일한 목적을 욕구[樂欲]하게 하는 근거를 중동분(衆同分: sabhāgatā)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다시 무차별동분과 유차별동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무차별이란, 모든 유정은 모두 아애(我愛)를 가지고 있어 다 같이 먹는 일에 대한 욕구가 서로 유사함을 말하는데, 이 같은 평등함의 근거를 무차별 중동분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유정 각각의 신체 내에는 이것을 각기 개별적으로 하나씩 갖는다.
유차별이란, 모든 유정의 계(界)ㆍ지(地)ㆍ취(趣)ㆍ생(生)ㆍ종(種)ㆍ성(姓)ㆍ남녀 재가자[近事]와 출가자[比丘]ㆍ유학과 무학 등의 종류의 차별을 말하는데, 각각의 신체 내에 동일한 일과 동일한 목적을 욕구하게 하는 결정적 근거를 유차별 중동분이라 한다.
만약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성ㆍ비성(非聖) 등이나 세상의 언설은 뒤섞이어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생성과 이생동분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하면, 동일한 목적욕구 등의 근거를 피동분(彼同分)이라 이름하며, 능히 모든 의리(義利) 없음의 근거를 이생성이라 한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도 설명하기를,
“비구들은 마땅히 알라. 나는 말한다. 어리석은 범부가 이생(異生)에 대해 듣지 않으면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조금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업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인간으로 태어나면 인동분(人同分)을 획득하게 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생성에는 죽을 때나 태어날 때 동분에서와 같은 이 같은 성법의 사(捨)와 득(得)의 뜻이 있지 않기 때문에,
[원문에서는 ‘있기 때문에[有捨得意]’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양자의 차이는 없어지므로 아마도 무(無)자가 탈락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생성과 이생동분에는 다름이 있는 것이다.
[생(生)]
모든 법이 생겨날 때, 그것들로 하여금 각기 자신의 개별적인 공능(功能)을 획득하게 하는 어떤 내적 근거를 생상(生相: jāti lakṣaṇa)이라 이름한다.
법이 생기는 근거로는 모두 두 가지가 있는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그것이다.
내적인 것은 바로 생상을 말하며, 외적인 것은 6인(因) 혹은 4연(緣)의 존재를 말한다.
만약 이러한 생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위법은 마땅히 불생불멸하는 무위의 허공 등과 같아, 비록 외적인 근거를 갖추었다 할지라도 역시 생겨나지 않게 될 것이다.
혹은 유ㆍ무위의 차별이 없어지므로 허공 등도 또한 마땅히 생겨날 수 있어 유위의 존재가 되고 만다. 이것은 커다란 과실이며, 이에 따라 생상이 개별적으로 존재함을 아는 것이다.
[주(住)]
능히 원인과는 다른 과(果)를 인기하여 잠시 머무르게 하는 근거를 주상(住相: sthiti)이라 이름한다.
이를테면 유위법이 잠시 머무를 때, 각기 세력을 가져 능히 선행된 원인과는 다른 결과를 인기하여 잠시 머무르게 하는데, 이러한 별도의 결과를 인기하는 세력의 내적 근거를 주상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주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유위법이 잠시 머무를 때 마땅히 다시는 선행된 원인과 다른 결과를 인기할 수 없을 것이니, 이에 따라 개별적인 주상이 실재함을 아는 것이다.
[노(老)]
노(老: jarā)란 결과를 인기하는 공능을 쇠퇴시켜, 다시는 원인과는 다른 결과를 인기할 수 없게 하는 것을 말한다.
즉 만약 유위법에 공능을 쇠퇴시키는 이 같은 이상(異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째서 원인과는 다른 결과를 인기하고 나서 다시 거듭하여 인기하지 않는 것인가?
결과를 인기하고 다시 인기하면 마땅히 무한소급[無窮]에 떨어지게 될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유위제법은 마땅히 찰나의 존재가 아니게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이상이 별도로 존재함을 아는 것이다.
[무상(無常)]
무상(無常: anitya)이란 이미 공능이 쇠퇴한 현재법으로 하여금 과거로 낙사(落射)하게 하는 근거를 말한다.
즉 멸상(滅相)이라고 하는 개별적인 법이 있어, 모든 유위법으로 하여금 현재로부터 과거세로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 같은 존재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법은 마땅히 소멸하지 않을 것이며, 혹은 허공 등도 역시 소멸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는 유위의 유위상(有爲相)으로, 이 네 가지 유위상을 갖는 것을 바로 유위라고 한다. 나아가 허공 등은 이 같은 네 가지 유위상을 갖지 않았으므로 유위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세 가지 유위의 유위상 가졌기 때문에 유위의 생기도 역시 알 수 있고, 다함[盡]과 주이(住異) 역시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유위상: 주(住)와 이(異)를 하나로 간주한 유위 3상.]
이는 즉 교화될 중생들에게 유위를 싫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길상(吉祥)과 흑이(黑耳)가 함께 나타나는 것처럼 주(住)와 이(異)의 두 가지 상이 함께 설명되어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길상(吉祥): 부의 여신이다.]
[흑이(黑耳): 빈곤의 여신이다.]
따라서 네 가지 유위상을 결정적으로 지니므로 소상(所相)이 바로 유위법의 본질이 아니다.
[소상(所相): 유위상을 지니는 본법(本法).]
만약 소상이 바로 유위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그 같은 소상의 본질과 능상(能相)은 동일한 것이 되어, 유위상 역시 마땅히 전전(展轉)하여 어떠한 차이도 없게 될 것이다.
[능상(能相): 즉 유위상을 말한다.]
만약 그럴 경우 모든 법이 소멸할 때 마땅히 생겨나게 될 것이고, 생겨날 때 마땅히 소멸하게 될 것이며, 혹은 완전히 생겨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유위본상(有爲本相)은 바로 유위이기 때문에 유위상을 갖는 소상의 본법처럼, 네 가지 수상(隨相: upalakṣaṇa), 즉 생생(生生) 내지 멸멸(滅滅)의 상을 가짐으로써 무한소급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네 가지 본상은 각기 8법에 대해 작용하며, 수상은 오로지 그 본상 1법에 대해서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떤 법이 생겨날 때, 법 자체와 더불어 9법이 함께 생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법 자체가 한 가지이며, 본상과 수상이 여덟 가지이다. 이를테면 본상 중의 생상은 그 자신을 제외한 다른 8법을 낳으며, 수상 중의 생상은 그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9법 가운데 오로지 본상의 생상만을 낳는다.
그리고 주ㆍ이ㆍ멸상 역시 마땅히 그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본상은 본법에 근거하고, 수상은 본상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 본법은 본상으로 말미암아 작용할 수 있으며, 본상은 수상으로 말미암아 작용할 수 있다.
여기서 작용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생겨날 것 등을 생겨나게 하고, 지속ㆍ변화ㆍ소멸하게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결과를 인기하는 공능을 말한다.
그러므로 유위법의 본질은 비록 항유(恒有)이나 작용은 영속적이지 않다. 즉 이러한 4상 등의 내적ㆍ외적 근거가 되는 힘에 의거할 때 비로소 작용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