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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5권
12. 술구품 ②[1]
[유식을 구함]
[釋] 이미 염오와 청정함을 구함에 대해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유식(唯識)을 구함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능취(能取)와 소취(所取),
이 둘은 오직 마음의 빛이니
탐욕의 빛과 믿음의 빛은
두 빛인 듯하며 두 가지 법이 아니다.
[釋] ‘능취와 소취, 이 둘은 오직 마음의 빛’이라고 함은 유식을 구하는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능취와 소취, 이 두 가지는 오직 마음의 빛이다.
‘탐욕의 빛과 믿음의 빛은 두 빛인 듯하며 두 가지 법이 아니다’고 함은 이와 같은 탐욕 등 번뇌의 빛과 믿음 등 착한 법의 빛이니, 이와 같은 두 빛이 또한 염오와 청정의 두 가지 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빛을 떠나서 따로 탐욕과 믿음 등의 염오와 청정의 법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두 빛인 듯하면서 둘의 모양이 없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가지가지 마음의 빛이 일어나서
이와 같은 가지가지 모양이지만
빛의 체는 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 법이 진실함을 얻지 못한다.
[釋] ‘가지가지 마음의 빛이 일어나서 이와 같은 가지가지 모양’이라고 함은 가지가지 마음의 빛, 이것이 곧 가지가지 일의 모습이다.
혹은 다른 때에 일어나고 혹은 같은 때에 일어나니,
다른 때에 일어난다고 함은 이른바 탐욕의 빛이요, 성냄의 빛 등이고,
같은 때에 일어난다고 함은 이른바 믿음의 빛이요, 정진의 빛 등이다.
‘빛의 체는 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 법이 진실함을 얻지 못한다’고 함은 이와 같은 염오의 자리에 있는 마음의 수와 청정한 자리에 있는 마음의 수는 오직 빛의 모양만 있고 빛의 체는 없다.
그러기에 세존께서는 그것이 진실한 법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여러 모양을 구함]
이미 유식을 구함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여러 모양을 구함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소상(所相)과 능상(能相)과
이와 같은 모양의 차별은
중생들을 섭리(攝利)하기 위하여
모든 부처님께서 열어 보이셨다.
[釋] 모양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소상(所相)이요, 또 하나는 능상(能相)이다.
이 게송은 통틀어 든 것이요,
그 밖의 다른 게송은 따로따로 해석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함께 함과 마음과 견(見)과
자리[位]와 부전(不轉)이네
간략히 말하면 소상(所相)의 다섯 가지이나
자세히 말하면 한량없다.
[釋] ‘함께 함과 마음과 견과 위와 부전’이라 함은 곧 소상(所相)의 다섯 가지이니,
첫째는 색의 법이요, 둘째는 심(心)의 법이요, 셋째는 심수(心數)의 법이요, 넷째는 불상응법이요, 다섯째는 무위(無爲)의 법이다.
함께 한다고 함은 이른바 색의 법이요,
마음이라 함은 식(識)의 법이요,
견(見)이라 함은 심수(心數)의 법이요,
자리라 함은 불상응법이요,
부전(不轉)이라 함은 허공 등의 무위의 법이다.
‘간략히 말하면 소상의 다섯 가지이나 자세히 말하면 한량없다’고 함은 식이 항상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모양을 일으킨다.
이 소상의 다섯 가지는 세존께서 간략히 말씀하신 것이거니와 만일 자세히 말하면 한량없는 차별이 있다.
[능상의 여러 모양]
이미 소상의 여러 모양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능상(能相)의 여러 모양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의언(意言)과 습광(習光)과
이름과 뜻이 서로 빛을 일으키지만
참다운 분별이 아니기에
이를 분별의 모양이라 한다.
[釋] 능상에는 간략히 말해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분별하는 모양과
남을 의지하는 모양과
진실한 모양이다.
이 게송은 분별하는 모양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 모양에 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각 분별(有覺分別)의 모양이요,
둘째는 무각 분별(無覺分別)의 모양이요,
셋째는 상인 분별(相因分別)의 모양이다.
‘의언(意言)’이라 함은 이른바 의상(義想)이니 의는 곧 상의 경계이고 상은 곧 의식작용[心數]이다.
이 상으로 말미암아 의에서 능히 이와 같고 이와 같게 의언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유각 분별의 모양이다.
‘습광(習光)’이라 함은 습은 이른바 의언의 종자이고, 광은 이른바 그 종자로부터 바로 일으키는 의광(義光)이다.
능히 이와 같고 이와 같게 의언을 이해하게 되지 않으니,
이를 무각 분별의 모양이라 한다.
‘이름과 뜻이 서로 빛을 일으킨다’고 함은 이른바 이름을 의지하여 뜻을 일으키고 뜻을 의지하여 빛이 일어남을 말한 것이다.
명광(名光)의 경계는 참이 아닌데도 오직 이것을 세간에서 분별하는 것이니,
이른바 이름이든지 뜻이든지 이것이 상인(相因) 분별의 모양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의 모양은 이것이 다 참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를 분별하는 모양이라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소취와 능취의
두 모양에 각기 세 빛이 있지만
참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를 의타(依他)의 모양이라 말한다.
[釋] 이 게송은 의타의 모양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 모양 중에 스스로 소취의 모양과 능취의 모양이 있다.
소취의 모양에는 세 가지의 빛이 있으니, 이른바 글귀의 빛[句光]과 뜻의 빛[義光]과 몸의 빛[身光]이다.
능취의 모양에는 세 가지의 빛이 있으니, 이른바 뜻의 빛[意光]과 받음의 빛[受光]과 분별의 빛[分別光]이다.
뜻이라 함은 이른바 모든 경우에 염오된 식(識)이요, 받음[受]이라 함은 이른바 다섯 가지 식의 몸이요, 분별이라 함은 이른바 의식이다.
소취의 모양의 세 가지 빛과 능취의 모양의 세 가지 빛인 이와 같은 여러 빛은 이것이 다 참다운 분별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를 의타의 모양이라고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무체(無體)와 체는 차이가 없어서
적정(寂靜)이 아니면서 적정이다.
분별이 없기 때문에
이를 진실한 모양이라 말한다.
[釋] 이 게송은 진실의 모양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진실이라 함은 여(如)이다.
이 모양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기의 모양이요,
둘째는 염오됨과 청정한 모양이요,
셋째는 분별이 없는 모양이다.
‘무체와 체는 차이가 없다’고 함은 곧 진실한 자기의 모양이다.
무체라 함은 모든 법이 다만 분별이기 때문이요, 체라 함은 무체로서 체를 삼기 때문이다.
‘차이가 없다’고 함은 체와 무체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적정이 아니면서 적정’이라 함은 곧 진실의 염오됨과 청정한 모양이다.
‘적정하지 않다’고 함은 객진(客塵)의 번뇌로 말미암기 때문이요,
‘적정하다’고 함은 자기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분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함은 곧 진실의 분별이 없는 모양이니 분별하여 경계로 나아가지 않아서 희론(戱論)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세 가지의 능상(能相)을 말하였으니,
다시 게송으로 말하겠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섯 가지 학(學)의 경계는
바른 법과 바른 억념(憶念)과
마음의 경계와 유(有)와 비유(非有)이니
제5를 전의(轉依)라고 말한다.
[釋] 저 능상(能相)에는 다시 다섯 가지 학의 경계가 있으니,
첫째는 능지(能持)요, 둘째는 소지(所持)요, 셋째는 경상(鏡像)이요, 넷째는 명오(明悟)요, 다섯째는 전의(轉依)이다.
능지(能持)라 함은, 이른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른 법이니 이 법으로 말미암아 능연(能緣)을 가지기 때문이다.
소지(所持)라 함은, 곧 바른 억념(憶念)이니 바른 법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상(鏡像)이라 함은, 이른바 마음의 경계이니 정(定)을 얻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법계에 마음을 편히 함은, 먼저 말한 것과 같아서 다 보는 것이니 이를 정의 마음은 거울이 되고 법계는 형상이 된다고 한다.
명오(明悟)라 함은 출세간의 지혜이다.
유(有)를 실답게 유로 보고 유가 아님은 실답게 비유(非有)로 본다.
유는 법무아(法無我)를 이름이요,
비유는 이른바 능취와 소취이다. 여기서는 다 밝게 보기 때문이다.
전의라 함은 게송으로 말한다.
성인의 성품이 평등을 증득하니
해탈의 일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뛰어난 것에 다섯 가지의 뜻이 있어
덜하지도 않고 또한 더하지도 않다.
[釋] ‘성인의 성품이 평등을 증득하니 해탈의 일이 또한 마찬가지’라 함에서
성인의 성품은 이른바 무루계이고,
평등을 증득한다고 함은 여러 성인들이 한가지로 얻었기 때문이다.
해탈의 일이 또한 한가지라 함은, 모든 부처님의 성스러운 성품이 성문ㆍ연각들과 평등하니, 그것은 해탈이 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뛰어난 것에는 다섯 가지의 뜻이 있어서 덜하지도 않고 또한 더하지도 않다’고 함은 비록 또한 성인의 성품이 평등하다 하나 모든 부처님만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이다.
여기에 다섯 가지의 뜻이 있으니,
첫째는 청정한 것이 뛰어난 것이다. 그것은 누(漏)와 습(習)이 함께 다 없어졌기 때문이요,
둘째는 보변(普遍)인 것이 뛰어난 것이다. 그것은 찰토(刹土)가 통하여 청정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몸이 뛰어난 것이다. 그것은 법신으로 말미암기 때문이요,
넷째는 수용이 뛰어난 것이다. 그것은 법륜(法輪)을 굴리면서 수용하는 것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업이 뛰어난 것이다. 그것은 도솔천 등에 머물면서 모든 교화의 일을 나타내어 중생들을 이익되게 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덜하지도 않다’고 함은 이른바 염오된 부분이 감할 때이다.
‘더하지도 않다’고 함은 이른바 청정한 부분이 더할 때이다.
이 다섯 가지는 학지(學地)의 아는 모양이 해탈의 소상의 법과 세 가지의 능상의 법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해탈을 구함]
이미 소상과 능상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해탈을 구함에 대해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이와 같이 종자가 전(轉)하고
글귀와 뜻과 몸과 빛이 전하니
이를 무루계라고 일러서
3승(乘)이 한가지로 의지한다.
[釋] 이와 같이 ‘종자가 전한다’고 함은 아리야의 식이 전하기 때문이다.
‘글귀와 뜻과 몸과 빛이 전한다’고 함은 이른바 그 나머지의 식이 전하기 때문이다.
‘이를 무루계라 이른다’고 함은 해탈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3승이 한가지로 의지한다’고 함은 성문과 연각과 더불어 부처님께서 이를 한가지로 의지하시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의(意)와 수(受)와 분별의 전은
네 가지의 자재를 얻으니
순서대로 분별이 없음과
찰토(刹土)와 지(智)와 업(業)이다.
[釋] ‘의와 수와 분별의 전은 네 가지의 자재를 얻는다’고 함은 만일 의와 수와 분별의 이와 같은 세 빛이 전하면 곧 네 가지의 자재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문] 어떤 것들을 네 가지라 합니까?
[답] 순서대로 분별이 없음과 찰토와 지(智)와 업이다.
첫째는 분별이 없는 자재함을 얻음이요,
둘째는 찰토의 자재함을 얻음이요,
셋째는 지의 자재함을 얻음이요,
넷째는 업의 자재함을 얻음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뒤의 3지(地)에
네 가지의 자재가 있다고 말하니
부동지(不動地)에 둘이 있고
나머지의 지에 각각 하나씩이다.
[釋] ‘마땅히 알아야 한다. 뒤의 3지(地)에 네 가지의 자재가 있다고 말한다’고 함에서 3지는 이른바 부동지(不動地)와 선혜지(善慧地)와 법운지(法運地)이다. 그 지에서 네 가지의 자재가 성취된다.
‘부동지에 둘이 있고 나머지의 지에 각각 하나씩’이라 함에서
부동지에는
첫째 분별이 없는 자재가 있고,
둘째 찰토(刹土)의 자재가 있다.
그것은 공용(功用)이 없고 분별이 없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요,
찰토가 청정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선혜지에는 지혜가 자재함이 있으니, 네 가지 변재의 선교(善巧)가 뛰어난 것을 얻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법운지에는 업의 자재함이 있다. 그것은 모든 통하는 업이 장애가 없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3유(有)와 두 가지 무아(無我)는
참다운 유식에 깨달아 들어가지만
또한 유식의 빛이 없으니
벗어남을 얻어야 해탈이라 이른다.
[釋] 다시 별해탈문(別解脫門)이 있으니
‘3유(有)와 두 가지의 무아는 참다운 유식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함은 두 가지의 무아를 앎으로 말미암아 방편을 삼기 때문이다.
보살은 3유(有) 가운데 인(人)과 법(法)이 다 체가 있지 않음을 분별한다. 그러기에 무아라고 이른다.
이와 같이 알고서는 또한 한결같이 무체일 뿐만 아니라 모든 법이 진실하여 오직 식임을 취한다.
‘또한 유식의 빛이 없으니 벗어남을 얻어야 해탈이라 이른다’고 함은 보살이 그러한 때에 유식에 안심하지만 식의 빛이 또한 없어야 곧 해탈을 얻는다.
어찌하여 그런가? 인(人)과 법(法)을 얻을 수가 없어서 얻는 것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능지(能持)와 소지(所持)의 무더기는
관하기 때문에 오직 이름만 있어서
이름을 관하여도 이름을 보지 못하니
이름 없는 것이 해탈을 얻는다.
[釋] 다시 별해탈문이 있으니
‘능지와 소지의 무더기’라 함에서
능지는 이른바 듣는 것의 법이요, 소지는 이른바 바로 억념하는 것이요,
무더기라 함은 이른바 복과 지혜가 가득 찬 것이다. 먼저 무더기의 힘으로 말미암아 가지는 것이 있다.
‘관하기 때문에 오직 이름만 있다’고 함은
다만 언설만 있고 뜻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오직 이름이라 함은 오직 식이기 때문이다.
또는 오직 이름이라 함은 색이 아닌 4음(陰)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관하여도 이름을 보지 못하니 이름 없는 것이 해탈을 얻는다’고 함은 또한 관하는 것의 이름을 관하니 다시 이름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뜻으로 말미암고 체가 없기 때문이다. 또는 식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는 색이 아닌 4음(陰)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아서 이름을 또한 얻을 수 없으니 얻을 수 있음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해탈이라 이른다.
게송으로 말한다.
나의 견해로 훈습된 마음은
모든 취(趣)에 유전한다.
안심하고 안에 머물러서
흐름을 돌리는 것을 해탈이라 말한다.
[釋] 다시 별해탈문이 있으니
‘나의 견해로 훈습된 마음은 모든 취(趣)에 유전한다’고 함은
두 가지의 아견(我見)이 자회(滋灰)함이 있기 때문에 훈습이라고 말한다.
훈습을 인으로 삼기 때문에 생사에 유전하는 것이다.
‘안심하고 안에 머물러서 흐름을 돌리는 것을 해탈이라 말한다’고 함은
만일 소연은 얻을 수 없음을 알아서 마음을 안으로 거두어서 흩어지지 않게 하면 저 흐름을 돌릴 수가 있으니 이를 해탈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의 체가 없음]
이미 해탈을 구함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자기의 체가 없음을 말하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자기가 없고 체가 없으며
체가 머물지 않음이니
만일 집착하는 바와 같이 체가 없기 때문에
법은 자기의 체가 없음을 이룬다.
[釋] ‘자기가 없고 체가 없으며 체가 머물지 않는다’고 함에서
자기가 없다고 함은 이른바 모든 법은 자연스러워서 연유(緣由)가 없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요,
스스로 일어나지 못한다고 함은 인연에 소속되기 때문이다.
체가 없다고 함은, 이른바 모든 법이 이미 멸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체가 머물지 않는다고 함은, 현재의 모든 법이 찰나찰나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의 자기 체가 없다는 것은, 일체의 유위(有爲)의 모양에 두루 가득하니 이 뜻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집착하는 바와 같이 체가 없기 때문에 법이 무의 자체를 이룬다’고 함은
집착하는 것과 같이 실제로는 자기의 체가 없다.
자기의 체가 없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범부들이 자기의 체에 상(常)과 낙(樂)과 아(我)와 정(淨)을 집착한다.
이와 같은 다른 분별의 모양이 또한 체가 없다.
그러기에 모든 법이 무의 자체를 이룬다.
게송으로 말한다.
자기의 체가 없기 때문에 이루어서
앞의 것이 뒤의 것에 의지가 되지만
생도 없고 또한 멸도 없으니
본래 고요한 성품이 열반이다.
[釋]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이루어서 앞의 것이 뒤의 것에 의지가 된다’고 함은
앞의 것이 무성(無性)이기 때문에 순서대로 뒤의 것의 무생(無生) 등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문] 이러한 도리가 무엇입니까?
[답] 생함도 없고 다시 멸함도 없어서 본래 고요한 성품이 열반이라 하였으니,
만일 무성(無性)이면 곧 무생(無生)이요,
만일 무생이면 곧 무멸(無滅)이요,
만일 무멸이면 곧 본래 적정(寂靜)한 것이요,
만일 본래 적정한 것이면 곧 자기의 성품이 열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앞의 것이 순서대로 뒤의 뒤의 것에 의지가 되는 것이 이러한 뜻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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