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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선계경 제6권
1.18.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1) 부끄러움
어떤 것을 일러 보살마하살의 부끄러움[慙愧]이라 하는가?
참괴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성(性)이고, 둘째는 인연이다.
성(性)이란 보살마하살이 자신이 지은 법이 아님을 스스로 알고 나쁜 과보[惡報]를 두려워하여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며,
인연이란 보살이 자신이 지은 악에 대하여 남들이 알까 저어해서 부끄러운 마음을 내는 것이다.
성참괴(性慙愧)는 보살성(菩薩性)처럼 인연으로 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보살이 닦는 참괴는 팔정도(八正道)의 인연처럼 인연을 좇아 얻는다.
참괴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짓지 않아야 하는데도 지어서 생기는 부끄러움이고,
둘째는 지어야 하는데도 짓지 않아서 생기는 부끄러움이며,
셋째는 마음에 저절로 의심이 생겨서 일어나는 부끄러움이고,
넷째는 덮어서 감춘 죄에 대해 남들이 알까봐 두려워서 생기는 부끄러움이다.
2) 보리살다
어떤 것을 일러 보리살타(菩提薩)라 하는가?
살타란 용맹하고 건장하여 두려움 없음에 대한 이름이다.
보살의 성(性)에는 건장한 힘이 있으며, 그 성이 건장하기 때문에 능히 번뇌를 조복하여 그 마음을 따르지 않고, 모든 고통과 온갖 공포를 능히 참는다.
비록 공포가 있더라도 보살이 가진 선법(善法)의 장엄을 흔들어 움직이지 못한다.
이것을 성(性)의 용맹하고 건장한 힘이라 하며, 이 때문에 보리살타라 한다.
보살의 성의 용맹하고 건장한 힘에 다섯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온갖 생사의 고통이고,
둘째는 중생이 갖가지 악업을 행하는 것이며,
셋째는 한량없는 세간에 중생을 이익되게 하면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 것이고,
넷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보살의 금계를 굳건히 지키는 것이며,
다섯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깊은 법을 들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다섯 가지 인연이 있어서 모든 중생을 위하여 크게 고절(苦切: 殘害, 呵夷)을 받아도 마음에 근심이나 고뇌함이 없다.
그 첫째는 크게 용맹하고 건장한 힘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근심이 없음을 닦아 쌓아가기 때문이며,
셋째는 선방편(善方便)으로 부지런하고 씩씩하게 정진(精進)하기 때문이고,
넷째는 지혜의 힘이 튼튼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전념하여 비심(悲心)을 닦기 때문이다.
3) 세간의 서적을 이해한다는 것
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세간의 서적을 이해한다고 하는가?
보살이 세간의 방술(方術)을 잘 알고, 글자를 알고 문장을 알고 말을 알고 그 뜻을 알면 입과 마음이 화합하여 전념해서 받아 지닌다.
이것을 보살이 법을 알고 이치를 안다고 한다.
법을 알고 이치를 알기 때문에 능히 남을 위하여 설하고,
그 설하는 인연으로 해서 법의 지혜[法智]와 이치의 지혜[義智]가 불어난다.
이것을 듣는 지혜[聞慧]라 하며 생각하는 지혜[思慧]라 한다.
이러한 듣는 지혜와 생각하는 지혜의 인연으로 보리법(菩提法)을 도와서 이를 불어나게 한다.
4) 세간을 안다는 것
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세간을 안다고 하는가?
세간에 두 가지 있으니
첫째는 중생세간이고, 둘째는 기세간(器世間)이다.
보살마하살은 중생의 세간을 관찰한다.
그래서 경에서 말하였다.
“세간의 고행(苦行)은 생사에서 받는 것이다. 따라서 생사를 모르면 해탈할 수 없다.”
여래는 중생의 세간을 잘 안다.
그래서 경에서 말하였다.
“중생에게는 다섯 가지 혼탁함[濁]이 있으니,
첫째는 명탁(命濁)이고, 둘째는 중생탁(衆生濁)이며, 셋째는 번뇌탁(煩惱濁)이고, 넷째는 견탁(見濁)이며, 다섯째는 겁탁(劫濁)이다.
예를 들어 지금의 사람들은 그 수명을 백 년도 채우지 못하는데 이것을 명탁이라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의 중생들이 부모ㆍ스승ㆍ어른ㆍ화상ㆍ사문ㆍ바라문 등을 잘 봉양하지 못하고, 의리를 따라 행하지 않으며,
현재세와 미래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혜시(惠施)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복덕을 기꺼워하지 않으며,
재식(齋食)의 공양을 받으면서 금계를 지키어 정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것을 중생탁이라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의 중생들이 번뇌로 인해서 부모를 살해하고,
어머니의 자매와 그 밖에 다른 친속(親屬)에 대하여 강제로 비법(非法)을 행하며,
중생들과 악한 인연을 짓고, 활ㆍ화살ㆍ칼ㆍ몽둥이ㆍ창 같은 무기를 쌓아두고,
많은 중생들이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악담과 욕설을 하고 이치가 없는 말을 한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온갖 악함이 있어서 선하지 못한 번뇌가 일어날 때에
이것을 번뇌탁이라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의 중생들이 법이 아닌 것을 법으로 보고 법을 법이 아닌 것으로 보며,
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고 설하고 법을 법이 아니라고 설한다.
이와 같이 보고 설하기 때문에 바른 법[正法]을 파괴하고 삿된 법[邪法]을 늘린다.
그리하여 한량없는 중생들이 삿된 소견[邪見]을 닦는데
이것을 견탁(見濁)이라 한다.
악한 때의 악한 중생에게 세 가지의 내악겁(內惡劫)이 일어나니,
첫째는 기근내겁(飢饉內劫)이며, 둘째는 역병(疫病)내겁이며, 셋째는 도병(刀兵)내겁이다. 이것을 겁탁(劫濁)이라 한다.”
이것을 보살이 중생의 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살은 기세간을 알며, 기세간이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인연을 잘 안다.
그래서 경에서 설하였다.
“가전연(迦栴延)이여, 여래는 세간을 잘 알고, 세간의 인(因)을 알며,
세간의 멸(滅)을 알고, 세간의 도(道)를 알며,
세간의 맛을 알고, 세간의 괴로움을 알며, 세간의 해탈을 안다.
가전연이여, 육입(六入)과 오음(五陰)과 사대(四大) 등을 사람의 몸이라 한다.
세간을 따라 사람의 몸으로 모양을 짓는데 이것을 나[我]라 하고, 중생이라 하며, 수명(壽命)이라 하고, 사부(士夫)라 하며, 아무개라고 한다.
이러한 이름들은 그 성(性)에 진실함이 없다.
그런데도 번뇌 때문에 중생들은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안다’고 말한다.
보고 듣고 아는 것 또한 진실이 없다.
음식이니, 괴로움이니, 즐거움이니, 장수(長壽)니 단명(短命)이니 하는 이름들을 유포하는 것, 이것을 유포(流布)라 한다.
유포는 모양[相]이라 하며, 진실이라 하지 않는다.
여래가 중생세간과 기세간을 잘 알기 때문에 여래가 세간을 잘 안다고 한다.”
보살이 만일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복덕이 나은 자를 보면 응당 일어나서 받들어 맞이하여 예배하고 문신(問訊: 머리 숙여 합장하고 안부를 묻는 것)하며, 편안한 자리를 베풀어 드린다.
만일 나이나 복덕이 자기와 대등한 자를 보면 먼저 문신하고 겸손하게 낮추어 부드럽게 말하면서 손을 이끌어 함께 앉는다. 교만한 마음으로 내가 저들보다 나은 체하지 않는다.
만일 나이나 복덕이 자신보다 적은 자를 보면 먼저 부드러운 말로 복덕을 권면(勸勉)하고, 선법을 행하도록 교화하며, 마음으로 경멸하거나 소홀하게 여기지 않는다. 설사 잘못이 있더라도 결코 꼬집어 풍자하지 않으며, 필요한 물건들을 넉넉하게 베풀어 준다.
보살은 상ㆍ중ㆍ하의 모든 중생들에게 먼저 부드러운 말로 선법을 교화하고, 음식과 법으로 이들을 섭취(攝取: 濟度)한다.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과 선한 생각 등을 모두 중생에게 회향(廻向)한다.
그리고 언제나 이렇게 생각한다.
‘바라건대, 나는 모든 중생들과 악한 인연을 짓지 않고,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원망하는 생각을 짓지 않으며,
언제나 친절한 생각을 가져서 성을 내지 않으리라.
설사 성내는 자가 있어도 그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혹시 남들이 성내며 때린다고 하더라도 응당 법계(法界)를 보리라.
그리하여 신업ㆍ구업ㆍ의업을 항상 스스로 응중(凝重)하여 열네 가지 일인 이른바 여섯 가지 방편과 네 가지 악한 지식(知識)과 네 가지 선한 지식을 구족하리라.
선생경(善生經)에 설한 바와 같이 언제나 금세(今世)와 후세를 이익되게 하고, 능히 재물을 구하고, 얻으면 보호하여 삶의 경영을 풍요롭고 여유있고 넉넉하게 하며, 복덕을 지어서 탐욕하지 않고 인색하지 않으리라.
환술(幻術)을 지어내서 세상 사람을 속여 미혹시키지 않으며,
금계를 지켜 부끄러워하고, 기부(寄附)를 하는 자가 있으면 의혹을 품지 않고,
중생 보기를 진실을 바라보듯 하리라.
항상 선한 벗을 가까이 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열 가지 선(善)을 권면하리라.
보면 본다고 하고, 들으면 듣는다고 하고, 깨달으면 깨달았다 하고, 알면 안다고 하리라.’
이 때문에 보살을 세간을 안다[知世間]고 한다.
5) 보살이 배우는 사의(四依)
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배우는 사의(四依)라 하는가?
보살은 이치에 의지할 뿐 문자(文字)에 의지하지 않는다.
보살은 법을 들음에 있어 문자에 의지하여 듣지 않으며 오직 이치에 의해서만 듣는다.
보살마하살은 법에 의지할 뿐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
법과 법이 아닌 것을 알아서, 이런 법은 부처님이 설한 것이고, 이런 법은 장로(長老)가 설한 것이며, 이런 법은 여러 스님[衆僧]들이 설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만일 법이 아닐 경우 비록 부처님께서 설하는 것을 듣는다 해도 마음에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바른 법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도 아니고, 장로가 설한 것도 아니고, 여러 스님들이 설한 것도 아닐 경우,
비록 부처님이나 장로나 승려의 설이 아닐지라도 이것은 법상(法相)이므로 들으면 믿고 받아들인다.
보살마하살은 요의경(了義經: 大乘經典)에 의지하고 불요의경(不了義經: 小乘經典)에 의지하지 않는다.
요의(了義)에 의지한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고 이동할 수 없는 것이며,
요의경이란 의심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보살이 만일 요의경에서 의심이 생긴다면 움직일 수도 있고 이동할 수도 있게 된다.
보살은 지혜에 의지할 뿐 정식(情識)에 의거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지혜를 닦는 것을 정지(淨智)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보살은 깊고 깊은 이치를 이해하며, 비록 깊은 이치에 대해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헐뜯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이 사의(四依)를 성취하였다고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사의를 성취하면 능히 분명하게 세간의 도와 출세간의 도를 안다.
6) 네 가지 걸림이 없는 지혜
보살에게는 또한 네 가지의 도(道)가 있으니,
이 네 가지의 도로 모든 법계를 알아서 걸림이 없는 지혜[無礙智]를 얻는다.
네 가지의 도란 곧 네 가지의 걸림이 없는 지혜이다.
모든 법계를 아는 것을 법이 걸림이 없는 지혜[法無礙智]라 하며,
모든 법의 성(性)이 걸림이 없는 지혜이며 전도가 없는 지혜[無顚倒智]임을 아는 것을 이치가 걸림이 없는 지혜[義無礙智]라 하며,
보살이 모든 법의 갖가지 이름을 아는 것을 말이 걸림이 없는 지혜[辭無礙智]라 하며,
보살이 만일 모든 법계의 모든 법의 이름과 모든 법의 이치가 다 설할 수가 없는 것임을 알 경우, 이를 요설(樂說)이 걸림이 없는 지혜[樂說無礙智]라 한다.
보살이 네 가지 걸림이 없는 지혜를 구족하면 음입계(陰入界)의 방편과 십이인연의 방편과 시처비처(是處非處)의 방편을 알며,
보살이 네 가지 걸림이 없는 지혜를 구족하면 보리의 도를 스스로 분명하게 알아서 남들을 위하여 분별해서 널리 설한다.
7) 보리를 장엄한다는 것
어떤 것을 하는가?
보리를 장엄함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공덕장엄이고, 둘째는 지혜장엄이다.
「자리이타품(自利利他品)」에서 설한 바와 같이 보살이 만일 초아승기겁(初阿僧祇劫)에서 이러한 두 가지의 장엄을 닦아 쌓으면 하(下)장엄이라 하고,
제2아승기겁에서 닦아 쌓으면 중(中)장엄이라 하며,
제3아승기겁에서 닦아 쌓으면 상(上)장엄이라 한다.
8) 37품을 닦는다는 것
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삼십칠품(三十七品)을 닦는다 하는가?
보살이 네 가지 걸림이 없는 지혜를 구족하여 방편지(方便智)를 얻는데 이 방편지로 해서 삼십칠품을 닦는다. 그렇지만 아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아 얻지 못하며, 역시 이승(二乘)이 닦는 도품(道品)을 안다.
이승을 아는 것을 초품(初品)에서 설한 것과 같다.
어떤 것을 보살이 닦는 삼십칠품을 안다 하는가?
보살은 몸을 보아서 신관(身觀)을 따른다.
이러한 관점을 가질 경우 신상(身相)에 집착하지 않고 공상(空相)을 짓지 않으며 또한 이 몸이 선언하여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
이것을 몸을 보는 첫째의 이치[觀身第一義]라 한다.
유포하기 때문에 이름을 설하여 몸이라 하는데, 몸 이외의 삼십칠품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
보살마하살이 이 몸을 볼 때에 고통[苦]을 짓지 아니하고, 모임[集]을 짓지 아니하며, 멸함[滅]을 짓지 아니하고, 멸인연의 길[滅因緣道]을 짓지 아니한다.
어째서인가? 법계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살이 만일 이와 같이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안다면 이것을 첫째 의미의 삼십칠품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9) 사마타와 비바사나
보살이 만일 각관(覺觀: 細思와 麤思)으로써 삼십칠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이것을 사마타(舍摩他: 止息)라 한다.
보살이 만일 법계의 진실은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면, 이것을 비바사나(毘婆舍那: 관찰)라 한다.
보살의 사마타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이치의 사마타[第一義舍摩他]이고,
둘째는 기(期)사마타이며,
셋째는 진실(眞實)사마타이고,
넷째는 번뇌의 원망과 증오(怨憎)를 여의는 사마타이다.
보살은 네 가지의 사마타를 구족하여 모든 법계를 알며, 이 네 가지의 사마타를 구족한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해서이다.
보살의 비바사나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네 가지의 사마타와 함께 하는 행(行)이고,
둘째는 멀리 전도(顚倒)를 여의는 것이며,
셋째는 한량없는 법계를 분별하는 것이고,
넷째는 법계가 걸림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보살이 이 네 가지의 비바사나를 닦는 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해서이다.
10) 선방편(善方便)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선방편(善方便)이라 하는가?
선방편에 열두 가지가 있으니
내육종(內六種)과 외육종(外六種)이다.
① 내6종
내육종이란 보살이 항상 일체 중생에 대하여 대비심(大悲心)을 일으켜서, 진실로 모든 행(行)을 분명히 알고, 언제나 기꺼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계념(繫念)하는 것이다.
기꺼이 중생을 위하여 생사를 윤회하고, 진실로 번뇌와 번뇌를 깨뜨리지 못함을 알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여 열심히 닦아 정진한다.
이것을 내방편(內方便)이라 한다.
② 외6종
외육종이란 적은 보시로도 한량이 없는 복덕을 받게 하고,
공덕이 있는 자를 증장시키며,
불법을 파괴하는 자에게 믿음이 생기게 하고, 이미 믿는 자는 이를 증장시키며,
아직 잘 성숙하지 못한 자는 잘 성숙되게 하고, 잘 성숙된 자는 해탈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외방편(外方便)이라 한다.
어떤 것을 일러 적게 베풀고도 한량이 없는 복덕을 얻는다 하는가?
만일 어떤 중생이, 보살이 설하는 법을 듣고 한 움큼의 밥을 굶주린 개에게 주었을 때 베푼 것이 적고 복전(福田) 또한 박하지만 능히 보살의 도에 회향하기 때문에 얻는 바의 복의 과보는 한량없다.
공덕이 있는 자를 증장한다는 것은 만일 어떤 중생이 먼저 팔관재계(八關齋戒)를 받을 경우 보살이 다시 그를 위하여 분별하여 해설해서 무상의 보리에 회향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중생이 깊이 잘못된 소견에 집착하여 한 달을 먹지 않는데 낮에는 끊고 밤에는 먹고 한다면,
보살은 즉시 그를 위하여 바른 법[正法]을 강설해서 그 잘못된 마음을 깨뜨리고 팔계(八戒)의 재법(齋法)을 받아 지키게 한다.
보살은 잘 재계하지 못하는 고통을 깨뜨리고 선법을 받아 지니게[受持] 하며 재계하도록 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해탈을 추구하면서도 그 방편을 모르면
보살은 그를 위해 중도(中道)의 참된 이치를 설하여 양 극단의 생각[二邊]으로부터 떠나게 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천신(天身)을 얻으려고 깊은 물과 뜨거운 불에 뛰어들고자 하면
보살은 그를 위하여 이러한 현실의 고통을 깨뜨려 주고,
지계(持戒)를 설해서 현세에는 즐거움을 받고 후세에는 하늘의 몸[天身]을 받도록 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적정(寂靜)함을 위해 사비타전(四毘陀典: 바라문의 네 가지 베다 경전)을 읽어 외우고 해설하고 하면
보살은 즉시 십이부경(十二部經)을 가르쳐서 그 뜻을 분별하여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보살은 세간에 있는 가장 좋은 꽃과 향으로 삼보(三寶)에게 공양하고, 또한 중생에게도 공양하게 한다.
스스로 시방의 한량이 없는 모든 부처를 향하여 발원 공양하고, 또한 중생에게도 시방의 부처를 향하여 발원 공양하게 한다.
그리고 보살은 언제나 염불(念佛)과 염천(念天)을 닦으며, 역시 중생에게도 육념(六念)을 닦게 한다.
그리고 보살은 몸과 입으로 지은 선업(善業)이 많든 적든 간에 모두 중생에게 베풀고, 역시 이러한 법으로 중생을 교화한다.
그리고 보살은 언제나 이렇게 발원한다.
“모든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들은 모두 나의 몸에 모아서 다른 사람들이 이를 받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는 역시 이 법으로 중생들에게 행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보살이 만일 과거와 현재세에 허물이 있을 경우, 시방의 모든 부처에 회향하여 참회하고, 또한 이 법으로써 중생들이 행하도록 가르친다.
11) 4무량심
그리고 보살은 스스로 능히 네 가지의 무량심(無量心)을 닦으며,
역시 중생에게도 이 네 가지 무량심을 행하도록 한다.
공덕이 있는 자에게는 이를 증장하게 하며,
불법을 깨뜨리는 자에게는 믿음이 생기게 하고, 이미 믿는 자는 이를 증장시키며,
잘 성숙하지 못한 자는 잘 성숙하게 하고, 이미 성숙한 자는 해탈을 얻게 한다.
[여섯 가지 수행]
보살마하살은 이 네 가지의 법을 위해 여섯 가지를 닦는다.
그 첫째는 남을 따르는 것이고,
둘째는 장애가 없는 것이고,
셋째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마음이 서로 닮은 것이고,
다섯째는 은혜를 갚는 것이고,
여섯째는 청정함이다.
① 남을 따른다[隨他]는 것
남을 따른다[隨他]는 것은 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할 경우, 먼저 부드러운 말로 저들의 마음을 따라 말하고, 몸과 입과 뜻에 따라 능력에 맞게 혜시(惠施)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들로 하여금 공경하여 환희의 마음과 낙법(樂法)의 마음이 생기도록 한 뒤에 강설한다.
중생들의 상ㆍ중ㆍ하의 근기에 따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법을 설하되, 시절에 따라 설하고, 차례에 따라 설하며, 전도되지 않게 설하고, 이익이 되도록 설하며 연민을 가지고 설한다.
만일 신통력으로 응감하여 교화하여 구제하는 것이 필요하면 신족(神足)을 보여준다.
간략한 것을 능히 자세히 설하고 자세한 것을 능히 간략히 설하며, 의심의 그물을 깨뜨리고 억념(憶念)을 베풀어 주며, 널리 분별하여 선정에 들고 나오게 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깊고 깊은 공(空)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즉시 이를 열어 보여서 분별해서 풀어 강설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방등(方等: 廣大하고 平等함)한 대승(大乘)의 경전을 비방하면 즉시 법을 설하여 이를 조복시킨다.
예를 들어 어떤 중생이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여래가 설한 것을 보면, 아무런 법도 없고 아무런 사물도 없다고 했다.
모든 법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마치 허공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고, 뜨거운 불꽃과 같고, 건달바성(乾達婆城: 신기루)과 같고, 물속에 비친 달 같고, 소리의 메아리와 같다고 했다.”
이처럼 법성(法性)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에 비방을 하게 된다.
불경이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잘못된 견해에서 나온 말이다.
보살마하살은 선교(善巧: 능란함)한 방편으로 차츰차츰 이들을 위해 수다라(修多羅: 經典)의 뜻을 열어 보이되, 뜻에 따라서 말한다.
“모든 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법은 설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무법(無法)이라고 하며,
그 설할 수가 없다는 것은 그 근본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물(無物)이라 한다.
만약 애초에 설할 수 없는 것이 없고, 그 설할 수 없는 것의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생겨남[生]이 있고 멸함[滅]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생겨남이 없고 멸함도 없다고 설하신 것이다.
만일 생겨남이 없고 멸함이 없으면 허공(虛空)이라 한다.
마치 허공중에 한량없는 색(色)이 있고 한량없는 업(業)이 있는 것과 같아서, 모든 색이나 업이 이른바 가고 머물고, 굽히고 펴고, 구부리고 우러르고 하는 장애가 없다.
만일 이처럼 모든 색이나 모든 업이 없는 것을 허공이라 한다면 이런 허공은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허공에는 모든 색과 업이 있으므로 이를 선설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면, 허공의 성을 선설할 수가 없다는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저 허공이 설할 수가 없는 것이라면 모든 색이나 모든 업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보살마하살이 성지(聖智)를 얻었기 때문에 법계는 말로써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때 보살은 잘못된 모양[邪相]을 깨뜨리고, 모든 법은 있는 것이며 모든 법은 설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보살이 처음에 이와 같은 성지(聖智)로써 중생을 교화하면, 중생이 얻어 듣고는 법성(法性)이 마치 허공처럼 선설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이 때문에 여래는 모든 법이 허공과 같아서 마치 허깨비[幻]처럼 성상(性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설하는 것이다.
성인도 역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설한 것이다.
허깨비[幻]가 만일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무슨 인연으로 해서 어떤 때는 볼 수 있고 어떤 때는 볼 수 없으며
만일 실제로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사람들이 갖가지 모양을 보는가?
실제로 없는 법은 당연히 모양을 보일 수 없다.
모든 법계도 역시 이와 같다.
모든 범부(凡夫)들은 이름과 모양[名相]이 있다고 말한다.
이름과 모양이 있으니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제일의성(第一義性)은 설명할 수 없으므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법계는 허깨비처럼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은 모든 법계에 대하여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늘리지도 않고 줄이지도 않는다.
진실일 경우 그 진실을 알아서 역시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보살이 방편을 잘 따른다고 한다.
②③ 걸림이 없다는 것, 흔들림이 없다는 것
걸림이 없다[無障]는 것은 이런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찾아와 걸구하는 사람을 보면 이렇게 말한다.
“선남자(善男子)여, 네가 만일 지금 삼보ㆍ부모ㆍ스승ㆍ장로ㆍ사문(沙門)ㆍ바라문에게 공양한다면, 네가 필요로 하는 물건인 의복ㆍ음식ㆍ침상ㆍ와구(臥具)ㆍ병약(病藥)과, 꽃ㆍ향ㆍ영락ㆍ번개(幡蓋)ㆍ기악(伎樂)과, 전택(田宅)ㆍ옥사(屋舍)ㆍ일꾼[僕使]ㆍ탈 것 등 생활에 쓰이는 모든 물건들을 너에게 주겠다.”
만이 중생들이 두려워하고 근심하면 보살은 이렇게 말해 준다.
“네가 만일 지금 삼보에서 바라문에 이르기까지 이들에게 공양한다면 나는 마땅히 너에게 의복ㆍ음식 등 필요한 것들과 생활에 쓰이는 모든 도구들을 주겠으며, 또한 네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일도 구해 주겠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병들었으면 또한 이렇게 말해 준다.
“네가 만일 지금 삼보에서 바라문에 이르기까지 이들에게 공양한다면 나는 마땅히 너를 위하여 훌륭한 의원(醫院)을 구해서 병을 진찰하여 좋은 약을 쓰게 하고, 의복ㆍ음식과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주어서 너의 병이 낫게 하겠다.”
이러한 중생들이 만일 보살의 말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보살은 당연히 갖가지 방편을 써서 반드시 뜻대로 되도록 하여 주고,
만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보살은 이때에 사심(捨心: 중생에 대하여 愛ㆍ憎ㆍ親ㆍ怨이 없는 평등한 마음)을 닦는다.
만일 믿고 받아들이는데도 보살이 이들을 위해 뜻에 맞게 하여 주지 않으면 죄를 얻는다.
보살은 먼저 교화하여 삼보ㆍ부모ㆍ스승ㆍ장자에 공양하고 계(戒)를 지니어 정진하게 하며, 그들을 조복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도록 한다.
만일 먼저는 말을 받아들이다가 뒤에 가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그를 연민하기 때문에 그 눈 앞에서 호통치고 꾸짖으나 실은 나쁜 마음에서 하는 것이 아니며,
물건을 베풀어 주지 않고 심부름을 시키지 않는다 해도 밉고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조복(調伏)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걸림이 없다[無障]고 하며, 흔들림이 없다[不動]고 한다.
④ 마음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
마음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보살이 만일 자재한 몸을 얻어서 왕ㆍ대신(大臣) 등 권속(眷屬)이 많을 경우,
먼저 이렇게 외친다.
“만일 나의 경계 안이나 집안의 사람으로서 삼보ㆍ부모ㆍ스승ㆍ장자ㆍ사문ㆍ바라문에 대하여 공양하지 않고, 계율을 훼손[毁戒]하고 게으른 자가 있으면 나는 당연히 그의 의복이나 음식을 끊어버리고, 때리고 욕하고 포박해서 감옥에 가두며, 죽이고 추방하겠다.
대신을 시켜 감찰해서 누가 계를 지키고 누가 계를 지키지 않는지 파악하겠으며,
누가 능히 부모와 삼보를 공양하고 누가 부모와 삼보를 공양하지 않는지 살펴보겠다.”
이렇게 할 때 중생들은 두렵기 때문에 모든 악으로부터 멀리 떠나고 선법(善法)을 닦아서 보리심과 같게 한다.
이것을 상사방편(相似方便)이라 한다.
⑤ 은혜를 갚는다[報恩]는 것
은혜를 갚는다[報恩]는 것은 이런 것이다.
보살이 만일 시주하는 사람으로부터 의복ㆍ음식ㆍ와구(臥具)ㆍ병약(病藥)ㆍ방사(房舍)를 받되, 많이도 받고 적게도 받으며,
혹시 두려운 일을 만날 경우 누군가 이를 구제하여 풀어주고,
혹시 병이 날 경우에 누군가 치료하여 주며,
혹은 법을 설하는 것을 듣고 의심을 깨뜨리기도 한다.
그러면 보살마하살은 은혜를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교화하여 선법을 행하도록 한다.
이것을 은혜를 갚는다[報恩]고 한다.
보살이 법을 설하면 중생이 듣고 나서 즉시 삼보ㆍ부모ㆍ스승ㆍ장자ㆍ사문ㆍ바라문 등에 공양하고 계를 지키며 정진한다.
이것을 은혜를 갚는다고 한다.
⑥ 적정
적정(寂靜)이란 이런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궁극적인 보리의 경지에 안주하여 적정한 보리의 도를 닦아서 도술천(兜術天: 미륵보살이 교화 설법하는 內院과 天衆의 환락장소인 外院으로 이루어짐)에 태어나, 오래지 않아서 염부제(閻浮提: 南贍浮洲)에 내려와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을 안다.
중생은 이를 듣고 모두들 서원(誓願)을 발한다.
“이처럼 보살이 성불(成佛)할 때 우리도 당연히 이런 불법에 출가하여 도를 배워야겠다.”
이때 보살은 염부제에 내려와 찰리(刹利: 인도 四姓 가운데 정치ㆍ경제적 지배계급) 바라문의 가문에 몸을 의탁하여 태어난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오욕(五欲)의 즐거움을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고행(苦行)을 수행하는데 고행을 하는 자에게는 공경함이 생긴다. 괴로운 마음[苦心]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고행을 닦고 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성문ㆍ연각의 보리의 마음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도를 이루고 나면 묵연(默然)히 안주[住]한다. 제석천왕(帝釋天王)과 범천왕(梵天王)이 찾아와 권청(勸請)하기 때문이다.
범천의 계청(啓請)은 중생으로 하여금 바른 법[正法]에 대하여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때 세존께서는 즉시 불안(佛眼)으로써 모든 중생들을 관찰한 다음에 법을 설하신다.
불안으로 관찰하는 것은 악명(惡名)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니
악명이란 이른바 중생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래께서는 다만 범천왕의 권청 때문에 그러신 것이지 연민함 때문이 아니다.”
만일 불안으로 중생을 관찰하여 법륜(法輪)을 굴릴 경우 중생들의 사악한 바퀴[邪惡輪]를 깨뜨린다.
법륜을 굴린 뒤에는 무리를 모아 놓고 계율을 마련한다. 중생으로 하여금 해탈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보살의 적정방편(寂靜方便)이라 한다.
중생으로 하여금 믿는 마음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며,
불법에 들지 않은 자로 하여금 불법에 들게 하기 위해서이며,
미숙(未熟)한 중생으로 하여금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이며,
이미 성숙한 중생으로 하여금 해탈하게 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