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륵보살소문경론 제6권
3.3. 버림의 마음을 성취함(1)
버림의 마음[捨心]을 성취한다 함이다.
[문] 무슨 이치 때문에, 계율 지님을 말한 뒤에 버림의 마음을 성취하는 것을 말하는가?
[답] 남의 이익을 짓는 힘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한 것인가?
보살은 계율을 지니고 계율을 지님에 의하여 좋은 갈래[善道]에 나게 되지만 비록 버림의 마음을 성취한다 하더라도 두루 갖춘 자량이 없다면 남의 이익을 지을 수도 없을뿐더러 모든 그 밖의 온갖 공덕을 성취할 수도 없다.
왜 그러한가?
남의 이익을 위하고 세간을 껴잡으면서 그 보살은 다른 이를 이롭게 할 때에, 재물을 여의고 버려야 하는데 성취할 수가 없다.
이런 이치 때문에, 남을 이롭게 하는 이익에 의하여 계율 지님을 말하고 그 다음에 버림의 마음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또 다시 뜻이 있다.
계율을 지님과 버림의 마음은 갈마들며 서로가 함께 의지하고 서로서로 이익이 된다.
저 계율을 지님으로써 버림의 마음을 더하게 할 수 있고 버림의 마음 역시 계율 지님을 이롭게 할 수 있다.
이런 이치 때문에, 계율을 지닌 뒤에 버림의 마음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또, 계율 지님을 여의기 때문에 나쁜 갈래 안에 나면 버림의 마음은 과보를 받을 수 없나니, 저 서로 응하는 과보가 곧 두루 갖추어져서 앞에 나타날 수가 없다.
그러나 계율을 지닌 사람은 좋은 갈래 안에 나므로 버림의 마음이 곧 과보를 받을 수 있나니, 서로 응하는 과보가 완전히 갖추어져서 앞에 나타난다.
이런 이치 때문에 계율을 지님은 버림에 이익이 될 수 있고, 버림의 마음 또한 계율 지님을 이익되게 할 수 있다.
계율을 지닌 사람은 좋은 갈래의 처소에 나지만 자량이 없기 때문에 곧 가난하여 괴로움을 받는다면 비록 좋은 갈래에 났다 하더라도 곧 나쁜 갈래라 하겠으며, 버림의 마음을 성취하여 선한 길에 나면 자신의 이익과 다른 이의 이익되는 원인을 짓나니, 그러므로 보시는 계율 지님을 이익되게 할 수 있다.
또, 수행하는 차례의 이치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보살은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수행하게 되는 이치 때문이다.
이와 같이 차례로 스스로가 말의 공덕을 살피고 견주려 하여 먼저 계율 지님에 머무르고, 다음에 해치려 하지 않는 마음에 의하여 크게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남을 위하여 이익되는 법 보시[法施]와 자량의 보시[資生施]를 짓나니, 만일 저 중생이 교화할 수 있으면 껴잡는 것과 같다.
또, 보시 등의 법으로 계율을 장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보살마하살은 보시 등의 법으로 지니는 계율을 장엄하기 때문에, 갖가지의 훌륭한 과보를 성취할 수 있다.
마치, 여래께서『사가라용왕소문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용왕아, 보살마하살은 살생을 여의기 때문에 보시를 일으키면 곧 큰 부자를 이룩하게 되어 밑천이 파괴될 수 없을뿐더러 오랜 수명을 얻으며 보살의 행을 행하여 모든 세간의 괴롭고 나쁜 일을 넘어서나니, 이와 같은 것들이니라.
용왕아, 열 가지 선한 업의 길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보시는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장엄하여 큰 이익을 성취하며,
계율을 지님은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장엄하여 온갖 부처님 법의 서원을 성취하며,
인욕은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장엄하여 서른두 가지 몸매와 여든 가지의 잘 생긴 모습과 미묘한 음성을 성취하며,
정진은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장엄하여 부처님 법을 성취하고 온갖 악마와 원수와 적을 항복시키며,
생각함[思惟]은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장엄하여 듣고서 얻는 지혜[聞慧]와 생각하여 얻는 지혜[思慧]와 닦아서 얻는 지혜[修慧]를 성취하여 견고하고 깨끗하게 하며,
반야는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장엄하여 모든 삿된 소견 여읨을 성취하며,
인자한 마음[慈心]은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장엄하여 일체 중생을 해치지 않는 마음을 성취하며,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장엄하여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는 마음을 성취하며,
기쁨의 마음[喜心]은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장엄하여 부처님 법을 수행하여 겁내지 않는 마음을 성취하며,
버림의 마음[捨心]은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장엄하여 사랑하는 마음[愛心]과 미워하는 마음 멀리 여읨을 성취하며,
네 가지 거두어 줌[四攝]은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장엄하여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마음을 성취한다.
[버림의 뜻]
[문] 버림[捨]이란 뜻은 무엇인가?
[답] 다섯 가지 쌓임과 자량을 탐내고 집착하는 것을 다스리고 인자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며, 저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는 행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인과 등의 법에 집착하지 않고 수행에 머무르고 지니나니, 버림이라고 한다.
[문] 버림이 성취하는 이치를 말하여야 하리라.
어떻게 보살은 버림이 성취되는가?
[답] 보살은 스스로가 즐거움을 취득하는 행을 멀리 여의나니, 버림이 성취된다고 한다.
이 뜻은 무엇인가?
또 외도의 사람은 스스로가 즐거움을 취득하려고 보시를 행하고 그 외도의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버리므로, 비록 널리 보시를 행한다 하더라도 애욕 경계의 마음에 얽매었기 때문에 과보가 적고 얇다.
또, 성문과 벽지불승의 사람은 비록 세간의 즐거움의 과보는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에선 마침내 열반을 구하므로, 중생 이롭게 하는 것을 버리고 다만 열반의 즐거움만을 취한다.
그러므로 보시 따위인 업 길의 공덕이 비록 적게나마 다른 이를 위하기는 하나 필경에는 자신을 위하며, 마침내 생각을 오로지 하여 자신의 이로운 과보를 성취한다.
또 보살마하살은 일체 세간을 넘어서고, 대사(大士)로서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견고한 큰 힘의 마음을 일으키며, 크게 가엾이 여김과 부드러움을 일으켜 베푸는 것이 가장 훌륭하므로 필경에는 성취한다.
[버림을 성취하는 여섯 가지 원인]
또 버림을 성취한다 함은 여섯 가지의 원인이 있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 자신의 즐거움을 버림이며,
둘째 중생이 없다 함을, 자세히 살핌이며,
셋째 한량없는 부처님 법을 구함이며,
넷째 한량없는 세상을 껴잡아서 머무름이며,
다섯째 한량없는 갖가지 선한 뿌리를 닦고 모음이며,
여섯째 3보를 끊지 않음으로써 한량없는 과보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로서 버림이 성취되었다는 이치인 줄 알아야 한다.
또, 남의 이익을 위한 한결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세간의 중생들은 대부분 제 몸을 위하므로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함을 버리고 자기 즐거움을 구하기 위하고 현재에 받을 과보를 위하고 미래의 과보를 위하여 다른 이에게 물건을 보시한다.
만약 보살마하살들이라면 다른 이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전일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중생들은 가난하여 재산과 반야 등의 법이 없는 것으로 보며, 이런 이치 때문에 인과에 집착하지 않고 법 보시와 재물의 보시에 의하여 현재의 세상과 미래의 세상에 중생들에게 크게 이익되는 일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버림이 성취된다.
또 다시, 버림이 따르게 되는 이치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보시 등의 일은 중생을 따르고 껴잡는 행이기 때문에 곧 일체 중생을 껴잡아서 크게 이익되는 일을 지을 수 있다.
비록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외도와 성문과 벽지불 등은 일체 중생 이롭게 할 것을 버리고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성취하지만 보살마하살은 크게 사랑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 의하여 즐거이 다른 중생 이롭게 하는 행을 일으키므로 보살의 구하는 것이 이와 같이 성취된다.
이런 이치 때문에 버림이 성취된다고 한다.
또, 부처님의 보리를 취득함에 의하여 마음을 일으킨다는 이치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보살마하살은 일체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하여 스스로가 부처님 보리를 구하면서 버림의 마음을 일으킨다.
모든 중생이 나쁜 길에 떨어짐을 보고서
‘나는 현재와 미래 세상에서 모든 중생에게 괴로움의 일을 여의게 하리라’고 하나니,
그러므로 보살의 그 마음은 밤낮으로 더욱더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하므로 버림이 성취된다고 한다.
또, 갖가지의 과보를 껴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려 하여 갖가지로 보시하고, 현재의 세상과 미래의 세상에서 일체 중생을 껴잡으려 하여 여러 가지의 결과를 취득하나니, 그러므로 보살은 버림이 성취된다고 한다.
마치 무진의수다라에서의 말씀과 같나니,
“음식을 구하는 이에게는 음식을 베풀어 주며, 목숨을 위하고 즐거움을 위하고 변재를 위하고 물질[色]을 위하고 힘을 위하는 이런 이들에게는 모두 다 베풀어 줄지니라”고 하셨다.
또, 삿된 생활로써 살아가면서 자량 구하는 것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보살은 보시바라밀과 서로가 어긋나는 법인 자량을 탐내고 구하여 삿된 생활로써 살아가는 것 등은 모두 다 멀리 여읜다.
마치 무진의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보살마하살은 뒤바뀐 삿된 생활로써 자량 따위를 추구함이 없이 보시하느니라”고 하심과 같다.
[문] 깨끗함과 깨끗하지 아니한 버림을 말하여야 하리라.
어떤 것이 깨끗하며 어떤 것이 깨끗하지 않은가?
[답] 보살마하살이 자기 마음에 의하여 깨끗하면 보시가 깨끗하나니, 마치 여래 수다라에서의 말씀과 같이 네 가지의 깨끗한 보시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보시에 있어 보시하는 이로부터 깨끗하면 되고 이는 받는 이까지는 아니다. 이와 같은 것 등은 저 네 가지의 깨끗한 보시 중에서, 이른바
“보시하는 이가 깨끗하면 되고, 이는 받는 이까지는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를 보살마하살의 깨끗한 보시라고 한다.
또, 보시하는 이부터 받는 이까지 깨끗하면 역시 보살의 깨끗한 보시라고 한다.
왜 그러한가?
모든 보살은 남에게 물건을 보시하지만 과보를 구하지 않고 곧 일체 중생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보시의 과보를 구하는 이는 그 사람이 받는 이의 주변에서 깨끗하기를 구하지만, 보살은 과보를 떠났기 때문에 어느 때라도 자신의 마음이 깨끗하며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보시가 깨끗하다.
[보시의 아홉 가지]
또, 홀연(忽然)히 보시하는 따위는 멀리 여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여래의 수다라에서 아홉 가지의 보시가 있음을 말씀하셨다.
첫째 심음의 보시[植施]이며,
둘째 두려워서 하는 보시[畏懼施]이며,
셋째 은혜를 갚으면서 하는 보시[報恩施]이며,
넷째 은혜를 구하면서 하는 보시[求恩施]이며,
다섯째 부모에게 배워서 하는 보시[學父母施]이며,
여섯째 하늘에 나기 위하여 하는 보시[爲生天施]이며,
일곱째 이름을 위하여 하는 보시[爲名稱施]이며,
아홉째 권속의 법으로 하는 보시[眷屬法施]이니,
공덕을 수행하기 위해서이며, 으뜸가는 이치를 얻기 위하여 하는 보시이다.
심음의 보시라 함은 복밭에 심게 되어서 많은 과보를 구하기 때문이다.
또, 심음의 보시라 함은 권속을 가까이 한다는 것이니, 심음의 보시라고 한다.
두려워서 하는 보시라 함은 온갖 물건은 무상하고 파괴하는 것으로 보아서 차라리 보시하여야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갚으면서 하는 보시라 함은 은혜를 갚는 형상으로 보시하는 것이니,
‘그가 먼저 나에게 보시하였으니 나도 도로 보시하여야겠다’고 하면서 보시하는 것이다.
은혜를 구하면서 하는 보시라 함은 뒷날에 은혜 갚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배워서 하는 보시라 함은 과거의 수행에 집착하여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킨다.
‘나의 부모는 힘써 나아가 언제나 보시를 행하셨으니, 나도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하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하늘에 나기 위하여 하는 보시라 함은 하늘 가운데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를 구하기 때문이다.
이름을 위하여 하는 보시라 함은 사방의 사문과 바라문 등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하는 보시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보시는 지혜로운 이에게 꾸지람을 받나니, 깨끗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성문과 벽지불승의 사람은 세간의 즐거움을 여의고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보시는 역시 깨끗하지 않다.
또, 보살마하살은 자신의 즐거움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모든 부처님의 보리심만을 구하면서 보시하므로 모든 보시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깨끗하나니, 이를 보살의 보시로서 깨끗하다고 한다.
또, 사실대로 함이 있는 행의 바탕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범부는 허망하게 쓸모없는 이론과 나라는 고집[我相]에 집착하여 마음이 뒤바뀌었기 때문에, 오직 다섯 가지 욕심의 즐거운 경계만을 구하며 지혜 눈[慧眼]을 여의고 애욕 등의 번뇌인 여러 때에 물들어져 있으므로 버림이 깨끗하지 않다.
보살마하살은 사실대로 함이 있는 행의 바탕은 허망하여 실답지 않다고 알며 보나니, 그러므로 나[我]라는 소견 등의 고집을 멀리 여의고 다섯 가지의 두려움을 멀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팎에 보시할 만한 물건이 없으므로 버릴 수 없는 이는 남의 이익을 구하는 데에 얽매어 있고 자신의 즐거움을 구하는 것 따위의 더러운 때의 법을 멀리 여읠 수 있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버림이 깨끗하다고 한다.
또, 공관(空觀)으로써 일어나는 것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보살은 공관 등의 관(觀)으로써 보시 등의 법을 자세히 살피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버림이 깨끗하다고 한다.
마치, 무진의수다라에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공관을 자세히 살핌으로써 일으키는 보시를 자세히 살피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보시는 다할 수 없느니라”고 하신, 이와 같은 것 등이다.
[보시의 종류]
[문] 보시의 차별되는 모습을 말해야 하리라.
[답] 간략히 말한다면, 곧 한 가지의 보시가 있다. 탐내지 않는 마음과 서로 응하는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이다.
또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받는 이를 봄이며,
둘째는 받는 이를 보지 않음이다.
받는 이를 보지 않는다 함은, 마치 물건을 불 속이거나 항하(恒河) 가운데에 놓아주는 것과 같다.
또 보시하는 이를 본다 함은 베풂이 있고 보시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물듦[染]과 물들지 아니함[不染]이다.
물듦이라 함은 집안의 법으로 남은 음식이나 음탕한 여인에게 장엄구를 보시하는 것이니, 이것을 물듦의 보시라 한다.
물들지 아니한 보시라 함은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보시하는 것이니, 이것을 물들지 아니한 보시라고 한다.
또 두 가지의 보시가 있나니,
법 보시와 자량의 보시이다.
법보시라 함은 공양하고 공경하는 따위의 마음을 여의고 법 중에서 법으로써 사랑하는 마음[愛]과 뒤바뀐 마음을 멀리 여의게 한다는 생각으로 수다라 등을 말하는 것이니, 이를 법보시라고 한다.
또 세 가지의 보시가 있는데,
곧 이 두 가지에 두려움 없음의 보시[無畏施]를 더한다.
두려움 없음의 보시라 함은 이와 같은 말을 하나니,
“그대는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또 두려움 없음의 보시라 함은 중생들이 갖가지로 두려워함을 보고서 두려움 없음을 베풀어 준다.
이 뜻은 무엇인가?
남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서 현재의 세상과 미래의 세상에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부여하면서
입으로 말하기를
“그대는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는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그대를 위하여 이와 같고 이와 같은 방편을 지으며 무슨 방편으로써도 그대에게 필경에는 두려움 없는 처소를 부여하리라”고 하는 것이니,
두려움 없음의 보시라 한다.
저 두려움이라 함은 마치 가난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과 같으니,
이 두려움이라 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두려움이 없음을 주어서 다스리는 법이기 때문이다.
또 네 가지 보시가 있나니,
곧 먼저의 세 가지에 다시 큰 보시[大施]가 있다.
큰 보시라 함은 다섯 가지 계율을 받아 지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여래께서 말씀하신 큰 보시이다. 한량없는 중생을 껴잡을 수 있기 때문이며, 한량없는 중생(衆生)의 즐거움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량과 음식으로써 보시하는 이는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할 수가 없지만 다섯 가지의 계율을 받아 지니는 것은 이익을 지을 수 있다.
몸이 다하도록 다섯 가지 계율을 받아 지니게 되면 찰나마다 갖가지 공덕이 더욱 자라나며, 그 근본의 마음에 의지하기 때문에 모든 공덕의 무더기와 목숨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고 머무른다.
또 네 가지 보시가 있는데,
이 네 가지 보시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깨끗하지 못함이며,
둘째는 깨끗한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것 가운데는 두 가지의 차별이 있다.
첫째가 두려움의 보시[怖畏施]이며,
둘째가 은혜 갚기를 구하는 보시[求報恩施]이다.
어떠한 이치 때문에 깨끗하지 못함이라고 하는가?
마치 세간의 밭에 가시나무와 나쁜 풀 따위가 덮여 있기 때문에 깨끗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아서 두려움을 주거나 은혜 갚기를 구하기 때문에 깨끗하지 못한 보시라고 한다.
깨끗한 것 중에서도 두 가지의 차별이 있는데,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 공경하고 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시함이며,
둘째 공경하고 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를 제외하고 다시 맨 위의 훌륭한 보시가 있나니,
다음 게송으로 말한 것과 같다.
아래로는 자량이 있기를 구하고
맨 아래로는 두려움의 보시이며
지혜로운 이는 공경하고 존중하면서 보시하고
더 지혜로운 이는 자비로써 보시한다.
다시 네 가지 보시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 자기 이익의 보시이고 남의 이익이 아니며,
둘째 남의 이익의 보시이고, 자기 이익이 아니며,
셋째 다 같이 이익이 있는 보시이며,
넷째 다 같이 이익이 없는 보시이다.
자기 이익의 보시이고 남의 이익이 아니라 함은
범부와 성인으로서 번뇌를 눌러서 여의고 혹은 번뇌를 눌러서 여의지 않은 이가, 때로는 모든 부처님ㆍ여래에게 베풀어 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불상과 탑에 베풀어 드리기도 하는 것이니,
이를 자기 이익의 보시이고, 남의 이익이 아니라고 한다.
남의 이익이고 자기 이익이 아니라 함은
아라한과 아나함 등은 현재의 과위를 제외하고 중생들에게 보시하는 것이니,
이를 남의 이익이고 자기 이익이 아니라고 한다.
다 같이 이익이 있는 보시라 함은
번뇌를 눌러 여읜 범부거나 혹은 아직 번뇌를 눌러 여의지 못한 범부에게 보시하는 것이니,
이를 다 같이 이익이 있는 보시라고 한다.
다 같이 이익이 없는 보시라 함은
현재의 과위를 제외한 아라한과 아나함 등이 탑에 보시하는 것이니,
이를 다 같이 이익이 없는 보시라고 한다.
또 다시 간략하게 말하자면,
모든 보살마하살에게는 네 가지 보시가 있어서 모두가 온갖 선한 뿌리를 껴잡을 수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 평등한 마음의 보시이며,
둘째 다스림의 보시이며,
셋째 큰 보리에 회향함의 보시이며,
넷째 적멸에 의한 보시이다.
이와 같이 하는 모든 보살마하살은 보시[檀]바라밀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보시하는 줄 알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