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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6권
8. 수론[2]
8.5. 문수품(問受品)
[문] 경전 중에서
“이 사람이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에는 ‘나는 사실대로 이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 함을 안다”고 하셨다.
사실로 어떠한 느낌을 아는 것인가?
과거나 미래의 느낌은 느끼게 될 수 없고 현재의 느낌은 스스로 알 수 없으리라.
[답] 그 경전의 뜻은 사람들의 느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이 없다.
또 즐거움 등의 느낌은 와서 몸 안에 있으며 뜻으로써 반연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잘못이 없다.
또 즐거움 거리 안에서는 즐거움 등을 말하여 세간(世間)이라 한다.
또한 원인 중에서 결과를 말함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사람은 먼저 즐거운 느낌을 느낀 다음에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에 사실대로 안다고 한다.
[문] 느끼는 이 때문에 느낀다고 하는가?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느낀다고 하는가?
만일 느끼는 이 때문에 느낌이라 한다면 느낌은 즐거움과는 서로 다른데도 경전 중에서는
“즐거운 느낌이요 괴로운 느낌이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아니한 느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만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느낌이라 한다면 느낄 이가 누구이기에 느낌 때문에 느낌이라 말하는가?
[답] 반연의 안에서 즐거움을 말함은 마치 불의 괴로움과 불의 즐거움과 같다.
그러므로 반연을 깨달아 알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낀다 한다.
또 중생이 이 느낌을 느끼기 때문에 느낄 수 있음을 느낌이라 한다.
[문] 중생을 느낌이라 하지 않는다. 경전 중에서도 “느낌은 느끼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답] 이름과 뜻은 그와 같으나 모양이 있으면 지음이 있고, 붙인 이름 안에는 모양이 있다.
이 괴로움과 즐거움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아니한 것이 몸 안에 있으면 마음이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느낌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문] 경전 중에서는 모든 느낌 안의 순수관(順受觀)을 설명하였다.
수행하는 이는 어떻게 괴로움과 즐거움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아니한 모양을 내는 것인가?
이 사람은 그 때에 모두가 괴로운 모양을 내지 아니한가?
[답] 이 사람은 아직도 모두가 다 괴로운 것임을 얻지 못한지라 다만 세 가지 느낌만을 기억할 뿐이다.
[문] 만일 의식으로써 염처를 닦으면 어떻게 몸의 즐거움을 말하는가?
[답] 온갖 느낌 안에서 이렇게 생각을 잡아 매야 하리니, “이 몸의 즐거움이 바로 마음의 즐거움이다”라고.
또 염처(念處)를 닦을 때에 몸에서 즐거운 생각을 내면 이 속에서 생각을 잡아 맸기 때문에 몸의 즐거움이라 한다.
[문] 만일 온갖 느낌이 모두 다 마음의 법이라면 무엇 때문에 몸의 느낌을 말하는가?
[답] 외도를 위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외도는 “모든 느낌은 신(神)에 의지한다”고 하기 때문이니
부처님은 “모든 느낌은 몸과 마음에 의지한다”고 말씀한다.
[문] 어느 것이 몸의 느낌인가?
[답] 다섯 가지 감관으로 인하여 생기는 느낌은 몸의 느낌이라 하고
여섯 번의 감관에 의지하여 생기는 느낌은 마음의 느낌이라 한다.
[문] 이 느낌을 어떻게 더럽다 하고 어떻게 깨끗하다 하는가?
[답] 모든 번뇌를 더럽다 하므로 이 번뇌에게 부림을 받는 느낌을 더럽다 하고 번뇌에게 부림받지 않는 느낌을 깨끗하다 한다.
[문] 어떻게 괴로운 느낌을 깨끗하다 하는가?
[답] 번뇌를 끊은 사람의 괴로운 느낌은 그것을 깨끗하다 하고,
또는 번뇌와 서로 반대되는 괴로운 느낌을 깨끗하다 한다.
[문] 이미 더러움과 깨끗함은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다시 탐심을 의미함과 벗어남이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가?
탐냄은 곧 번뇌이고 벗어남은 곧 깨끗한 것이다.
[답] 먼저는 통틀어 더러움을 말하였고, 이제는 따로따로 탐욕이 더러움의 원인이 됨을 설명한다.
경전 중의 말씀과 같다.
“더러움의 기쁨[雄喜]이 있고, 깨끗함의 기쁨[淨喜]이 있고 깨끗함 중의 깨끗함의 기쁨이 있다”고 하셨다.
더러움의 기쁨이라 함은 다섯 가지의 욕심으로 인하여 기쁨을 내는 것이요,
깨끗함의 기쁨이라 함은 초선천의 기쁨을 말하며,
깨끗함 중의 깨끗함의 기쁨이라 함은 2선천의 기쁨을 말한다.
만일 느낌이 열반만을 위한다면 그것은 벗어남에 의지함[依出]이라 한다. 그러므로 다시 설명하는 것이다.
[문] 다섯 가지 감관 중에서 무엇 때문에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을 각각 두 가지씩으로 나누면서 평등[捨]의 느낌은 나누지 않는가?
[답] 근심과 기쁨은 반드시 생각[想]의 분별로 내는 것이나 괴로움과 즐거움은 반드시 생각의 분별로 말미암지 아니한다.
평등의 느낌은 생각의 분별이 미세하므로 둘이 되지 아니한다.
[문] 제3선 중에서 의식(意識)의 느끼는 바는 무엇 때문에 즐거움이라 하고 기쁨이라 하지 아니한가?
[답] 이 즐거움은 깊고 두꺼워서 몸과 마음에 두루 차기 때문에 즐거움이 되나,
기쁨은 마음에만 두루 찰뿐 몸에는 두루 차지 못하기 때문에
3선 중에서 부처님은 기쁨을 구분하여 “몸으로 느끼는 즐거움”을 말씀하셨다.
[문] 이 세 가지 느낌 가운데서 어느 것이 능히 깊고 두터운 번뇌를 일으키는가?
[답] 어떤 논사는 말하기를 “즐거운 느낌이 능히 낸다”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먼저 이미 무너져 부셔지는[敗壞] 그러한 인연들 때문에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또 어떤 논사는 말하기를 “괴로운 느낌이 능히 낸다”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중생은 고통에 핍박되어 즐거움을 구하느라고 깊이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 여러 가지 즐거움으로 조그마한 고통쯤은 이겨 낼 수 있다.
마치 사람이 넉넉하게 다섯 가지 욕망을 받을 때에는 모기와 등에가 달려들면 괴로운 느낌은 내되
물질 등의 다섯 가지 욕락을 깨닫는 그것보다는 느끼지 아니함과 같으며
또 백의 아들을 둔 즐거움은 한 아들을 잃어버린 고통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또 생사(生死) 중에는 괴로운 느낌이 많고 즐거운 느낌은 그렇지 못하다.
무슨 까닭인가? 많은 중생들이 세 가지 나쁜 갈래에 떨어져 있고 천상과 인간에 나는 이는 적기 때문이다.
또 공력을 들일 필요없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고통이요, 공력을 들여서 즐거움을 구할지라도 얻어지거나 얻어지지 않음을 마치 밭가운데 잡초는 저절로 자라면서도 좋은 곡식은 그렇지 못함과 같다.
또 괴로운 느낌으로 인하여 무거운 죄업을 일으킨다.
무슨 까닭인가? 괴로운 느낌 중에는 진심을 일으키는 번뇌가 있기 때문이다.
경전의 말씀에
“진심을 내는 것이 무거운 죄니라”고 하셨다.
또 논사는 말하기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아니한 것이 능히 난다”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이 중에는 어리석은 번뇌가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은 모든 번뇌의 근본이다.
또 이 느낌은 세밀하여 이 안의 번뇌는 깨달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이 느낌은 바로 중생의 근본되는 성품이요 괴로움과 즐거움은 손님[客]이다.
또 이 느낌은 세 가지 세계에 두루 있되, 다른 두 가지는 그렇지 못하다.
또 이 느낌은 장수(長壽)하는 원인이니, 이 느낌을 탐내기 때문에 수명이 8만의 대겁(大劫)에 이르도록 오랫동안 괴로운 모양의 모든 쌓임을 받는다.
또 이 느낌은 열반과는 서로 엇갈린다.
무슨 까닭인가? 이 안에서는 고요히 사라진 모양과 열반의 모양을 일으키기 때문에 다시는 진실한 열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이 느낌은 거룩한 도[聖道]로써 뛰어날 수 있음은
마치 여윔의 성품(離性)으로 인하여 해탈을 얻는다는 말과 같아서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은 세간의 도[世間道]로써도 뛰어날 수 있다.
또 이 느낌은 생사의 끝을 다하고 생사의 상속을 끊을 때에 끊어진다. 그러므로 깊고 두터운 번뇌를 일으킨다.
8.6. 오수근품(五受根品)
[문] 즐거움의 감관은 어느 곳에 있으며 내지 평등의 감관은 어느 곳에 있는가?
[답] 괴로움과 즐거움은 몸에 있고 얻게 되는 것도 몸을 따르며 이에 4선에까지 이른다.
나머지 세 가지는 마음에 있고 얻게 되는 것도 마음을 따르며 이에 유정천에까지 이른다.
[문] 경전 중의 말씀과 같다면
근심의 감관은 초선 중에서 없어지고
기쁨의 감관은 3선 중에서 없어지고
즐거움의 감관은 4선 중에서 없어지고
평등의 감관은 생각 끊는 선정[滅盡定] 중에서 없어진다.
그러므로 그대의 말은 옳지 못하다.
[답] 만일 그대가 이 경전을 믿는다면
괴로움의 감관은 응당 초선에 있어야 하는데도 그대의 법 중에 초선에는 실로 괴로운 감관이 없다.
그러므로 이 경을 믿지 아니해야 된다.
[문]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에서는 착한 법을 깊이 닦으므로 근심과 괴로움은 없어야 한다.
[답] 세 가지 세계가 모두 다 괴롭다.
위의 두 가지 세계 중에는 비록 머트러운 고통[麤苦]은 없으나 역시 세밀한 고통은 있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4선 중에도 네 가지 위의가 있다고 말하였는지라 위의가 있다면 다 고통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형상 세계에도 눈과 귀와 몸과 식이 있다면 이 식안의 느낌을 괴로움과 즐거움이라 하며 한 가지 위의로부터 다시 한 가지 위의를 구하는지라 그러므로 괴로움이 있는 줄 알 것이다.
또 경전 중에서 물었다.
“물질에는 어떤 맛이 있는가?
이른바 물질로 인하여 즐거움을 내고 기쁨을 낸다.
물질 중에는 어떤 허물이 있는가?
모든 물질은 무상하고 괴롭고 무너지는 모양이다”라고 하였다.
형상 세계에도 물질이 있기 때문에 맛의 마음이 있고 허물되는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괴롭고 즐거움이 있다.
또 수행하는 이는 모든 선정에서 탐내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반드시 즐거운 느낌의 인연 때문에 탐내고 괴로운 느낌의 인연 때문에 버린다.
그러므로 알아라. 괴롭고 즐거움이 있다.
또 부처님은 말씀하기를
“소리 등은 초선의 가시[刺]요,
머트러운 생각과 세밀한 생각[覺ㆍ觀]은 2선의 가시오,
내지 생각도 생각아님도 아닌 곳에서는 생각 있는 느낌이 가시가 된다”고 하셨다.
가시는 괴롭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라. 모든 곳에는 괴로움이 있다.
또 온갖 다섯 가지 쌓임을 다 고통이라 말한다.
바로 괴롭히고 해치기 때문에 괴롭다 하는 것이니, 마치 욕심세계에서 느끼는 괴로움과 같기 때문에 괴롭다.
위의 두 가지 세계의 느낌에서 역시 괴로움과 박해가 있다면 어찌하여 괴롭지 않겠는가?
마치 욕심 세계에서 병(病) 등의 여덟 가지 괴로움[八行]을 말함과 같이,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에서도 똑같이 여덟 가지 괴로움을 말하거늘 어찌하여 고통이 없겠는가?
또 형상 세계에서는 광명의 훌륭하고 모자람[優劣]을 말한다. 그러므로 형상 세계의 업도 역시 차별이 있음을 알 것이다. 업의 차별 때문에 반드시 괴로운 과보를 얻는 업도 있어야 한다.
또 경전에서 말씀하였다.
“이 곳에도 시새움 등의 번뇌가 있다.
어떤 범천(梵天)이 여러 범중(梵衆)들에게 말하기를
‘이곳은 영원하다. 그대들은 구담사문(瞿曇沙門)에게 나아가지 말라’고 하자,
어떤 범천이 와서 부처님께 질문하였다” 함과 같다.
또 경전 중에 말씀하기를
“제4선에 들면 착하지 않은 법을 끊는다”고 하였고
또 경전 중에서
“이 가운데도 삿된 소견의 번뇌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들의 번뇌가 착하지 못한 것이라면 응당 괴로운 과보를 받아야 되거늘 어찌하여 고통이 없겠는가?
또 논사는 말하기를 “온갖 번뇌는 다 착하지 못하다”고 하였으니 그 가운데서 어떻게 괴로운 느낌이 없겠는가?
또 경전 중에서 말씀하시되
“모든 하늘과 사람은 물질을 사랑하고 물질을 즐겨하고 물질을 탐내고 물질에 집착한다”고 하셨다.
이 모든 하늘과 사람은 물질을 좋아하고 탐착하기 때문에 그 물질이 결단나거나 부셔지면 근심과 괴로움을 내며 내지 식도 역시 그와 같다.
그러므로 알아라, 온갖 욕심을 여의치 못한 사람은 다 근심과 기쁨이 있다.
또 사랑의 반연은 기쁨을 내는지라 그 사랑의 반연을 여의게 되면 반드시 근심과 슬픔을 내며 앎이 없는 범부로서야 무슨 능력으로 사랑하는 반연을 얻으면서 기뻐하지 않겠고 잃으면서 근심을 내지 않겠는가?
경전 중에서
“오직 도를 얻은 사람만이 죽으려 할 때에 근심하거나 기뻐하는 빛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알아라. 온갖 범부에게는 근심과 기쁨이 언제나 따른다.
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근심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고 한 마음으로 평등을 행하면 그것이 아라한의 공덕이니라”고 하셨다.
또 여섯 가지 평등한 행[捨行]은 오직 성인만의 행할 바요 범부로서는 하지 못한다.
범부가 때로는 평등을 행하기는 하나 모두가 아직은 다 반연을 알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전 중의 말씀에서
“범부의 물질에 대한 소유욕(所有欲)이 평등한 것은 다 물질에 의지하고 물질을 탐내는 마음을 여의지 못한 것이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알아라, 범부는 평등한 마음이 없다.
또 경전 중에 즐거운 느낌 안의 탐욕의 번뇌를 말하면서
“만일 그가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무엇을 탐내며 부리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대는 혹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안에서 탐욕의 번뇌에 부림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경전에는 그러한 말씀이 없다.
또 위의 세계에서는 더욱더 고요히 사라짐[寂滅]의 즐거움이 커서 몸과 마음을 이롭게 함은
마치 “이 하늘이 한번 앉으면 천 겁 동안을 지내는 것과 같다”고 함과 같다.
만일 고행(苦行)하는 이라면 모든 위의에서 오랫동안 머무를 수 없음은
마치 경전 안에서 “7일 동안만 편안히 앉으면 해탈의 쾌락을 느낀다”고 말함과 같다.
또 이 가운데서는 편안한 즐거움이 으뜸이다.
경전 중에서
“편안한 사람은 즐거움을 느낀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알아라, 온갖 세계 중에는 다 즐거움이 있다.
그대는 혹시 “편안한 느낌은 즐거움과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일은 옳지 못하다.
모든 이익되는 일이 와서 몸에 있게 되면 바로 즐겁다고 한다.
그러므로 편안함과 즐거움은 느끼는 즐거움에 다르지 아니하다.
[문] 만일 위의 세계에 결정코 괴로움과 즐거움과 근심과 기쁨이 있다면 어떻게 선경(禪經)과 서로 순응하게 되는가?
[답] 이 경이 법 모양에 위반 된다면 설사 버린다 한들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또 이 가운데의 즐거움은 고요히 사라짐을 행한지라 착하지 못한 일은 거친 탐욕과 거친 진심을 일으킬 수 없다.
그러므로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다고 말한다.
또 이 안의 괴롭고 즐거움은 세밀하여 분명하지 않으며 칼이나 몽둥이들의 고통과 어버이를 잃는 등의 근심이 없다면 이 때문에 없다고 함은 마치 형상 세계에는 추위거나 더위가 없다고 말함과 같다.
이 안에도 또한 네 가지 요소가 있거니, 어떻게 추위도 없고 더위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3선(禪)의 중생은 하나의 몸에 하나의 생각뿐이지만 그 중에도 또한 광명의 차별이 있다고 말함과 같고,
만일 선정을 닦는 이로서 능히 조름과 장난을 잘 제거하지 못하면 광명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말함과 같다.
또 지혜가 적은 사람을 지혜가 없다고 하며, 또 세속 사람은 음식 중에 짠 맛이 적으면 짠 맛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와 같아서 그 중에서 근심과 기쁨을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없다고 할 뿐이다.
또 그대들은 “그 가운데는 머트러운 생각[覺]이 없다”고 하나
부처님의 경전 중에는
“생각[想]의 인(因)은 머트러운 생각을 반연한다”고 생각이 없겠는가?
그러므로 알아라. 머트러운 생각의 뻐은 유정천까지도 있으며 다만 머트러운 생각[麤覺]이기 때문에 2선천서에서 없어진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위의 두 가지 세계에도 역시 괴롭고 즐거운 것들이 있다.
≺수음(受陰)을 끝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