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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11권
변차별품 ③
5.3. 대선지법(大善地法)
이와 같이 열 가지 대지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대선법(大善法)의 ‘지(地)’를 대선지(大善地)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제법 가운데 어떤 법이 만약 ‘대선지’에 소유되었다면 이를 대선지법이라고 이름하니, 말하자면 항상 온갖 선심에 존재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이란 바로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신(信)과, 그리고 불방일(不放逸)과
경안(輕安)ㆍ사(捨)ㆍ참(慚)ㆍ괴(愧)와
두 가지의 근(根)과, 그리고 불해(不害)와
근(勤)은 오로지 선심에만 두루 존재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마음의 혼탁함[心濁]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서, 전도됨이 없는 인과는 각기 개별적으로 상속(相屬)한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인가 허락[忍許, 즉 확신]하여 욕(欲)의 소의가 되고 능히 승해의 자량이 되는 것을 일컬어 ‘신(信)’이라고 한다.23)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서 몸과 말과 마음을 방호(防護)하는 것으로서, 방일에 반대되는 것을 ‘불방일(不放逸)’이라고 이름한다.24)
올바른 작의(作意)에서 일어나 심신을 가뿐하고 예리[輕利]하게 하며 편안하고 적당[安適]하게 하는 근거로서, 마음의 감임성[心堪任性]을 ‘경안(輕安)’이라고 이름한다.25)
마음의 평등성을 설하여 ‘사(捨)’라고 한다. 즉 도거(掉擧, 대번뇌지법의 하나)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참다운 진리[如理]에 의해 낳아져 마음으로 하여금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의 뜻이다.26)
참다운 진리로 나아감으로써 자신과 법 두 종류의 뛰어난 힘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애(愛)의 등류(等流)와 서로 반대되는 마음의 자재성(自在性)을 일컬어 ‘참(慚)’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먼저 공덕을 애락(愛樂)하여 수습하는 것으로서, 치(癡)의 등류를 떠나 저열한 법을 혐오하는 것을 일컬어 ‘괴(愧)’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악취의 벌을 받거나 자타의 비방을 두려워하는 것을 일컬어 ‘괴’라 한다”고 설하기도 하였다.27)
‘두 가지의 근’이란 무탐(無貪)과 무진(無瞋)을 말하는데, 이미 획득하였거나 아직 획득하지 않은 경계대상에 대한 탐착 희구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마음에 애염이 없는 성질[無愛染性]을 일컬어 무탐이라고 한다. 그리고 유정이나 유정 아닌 것에 대해 미워하거나 해코지하려는 마음[恚害意]이 없는 애민(哀愍)의 종자를 일컬어 무진이라고 한다.28)
유정을 손상시키고 괴롭히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마음의 어질고 착한 성질[賢善性]을 일컬어 불해(不害)라고 한다.29)
이미 생겨난 온갖 공덕과 과실에 대해서는 수호하고 내버리며, 아직 생겨나지 않은 온갖 공덕과 과실에 대해서는 생겨나게 하고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으로서, 마음의 타락됨이 없는 성질[無墮性]을 일컬어 ‘근(勤)’이라고 한다. 즉 이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마음은 참다운 이치에 의해 지어지는 사업으로 견고히 나아가 멈추지 않는 것이다.30)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여기서는, 신(身)경안에 대해서도 이미 설하였기 때문에 오로지 심소만을 설하여 경안이라 이름한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31) 그러나 이 말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그럴 경우] 수(受) 등도 역시 마땅히 이와 동일하게 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5식 상응의 온갖 수를 설하여 신수(身受)라고 이름하는 것일 뿐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설혹 경안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 본질은 심소가 아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심소법이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서는 안 된다. 즉 “그것(신경안)은 능히 각지(覺支) 자체에 수순(隨順)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각지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니, 이를테면 신경안으로써 능히 [무루의] 각지인 심경안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역시 또한 다른 곳에서도 진(瞋)과 진의 원인을 진에개(瞋恚蓋)라 이름한다고 하였으며, 견(見)ㆍ사유(思惟)ㆍ근(勤)을 일컬어 혜온(慧蘊)이라 한다고 하였다. 즉 그러한 진의 원인이나 사유와 근은 ‘진’이 아니고 ‘혜’가 아니지만, 그것에 수순하기 때문에 역시 그 같은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니, 이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라고.32)
‘사(捨)’에 대해서는 뒤에서 응당 분별하게 될 것이다.
[본송에서] 두 번에 걸쳐 ‘그리고’라는 말을 설한 것은 흔(欣)과 염(厭)도 아울러 포섭하기 위해서였다.33) 여기서 ‘염’이란 이를테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과환(過患)의 법을 살피고 관찰하는 성질의 선심을 말한다. 즉 이러한 증상력에 의해 일어난 무탐(無貪)에 수순하는 마음은 바로 [그 같은 과환의 법을] 싫어하고 배반하려는 성질[厭背性]로서, 이와 상응하는 법을 염작의(厭作意)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리고 ‘흔’이란 이를테면 그 같은 과환의 출리(出離)와 대치(對治)를 희구하는 선심을 말한다. 즉 이러한 증상력에 의해 일어난 증득과 수습[證修]에 수순하는 마음은 [그 같은 출리와 대치를] 기쁘게 숭상하는 성질[欣尙性]로서, 이와 상응하는 법을 흔작의(欣作意)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흔’은 희수(喜受)를 떠난 경지(즉 제3정려)나 미지(未至) 등의 경지에서도 역시 현행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희수가 아니니, 여러 계경 중에서도 “흔으로부터 희가 낳아진다”고 하여 ‘희’와 ‘흔’의 차별을 설하고 있다.
이렇듯 ‘흔’과 ‘염’의 두 행상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한 찰나의 마음 중에서 함께 일어난다고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본송)서는 바로 드러내어 설하지 않은 것이니, 대선지법의 존재로는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희근과 염(厭)의 행(行)은 함께 일어나는 일이 있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흔’과 ‘염’의 행이 함께 일어나는 일은 결코 없다. 즉 이 두 가지는 결정코 구행(俱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하여 두 번에 걸쳐 ‘그리고’라고 하는 말을 설하게 된 것이니, 그 작용이 서로 모순 되기 때문이다.
5.4.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
이와 같이 대선지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나아가 대번뇌법(大煩惱法)의 ‘지’를 대번뇌지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제법 가운데 어떤 법이 만약 ‘대번뇌지’에 소유되었으면 이것을 대번뇌지법이라고 이름하니, 말하자면 항상 염오심에 존재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이란 바로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치(癡)ㆍ일(逸)ㆍ태(怠)ㆍ불신(不信)과
혼(惛)ㆍ도(掉)는 항상 오로지 염오심에 [존재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 여섯 종류를 대번뇌지법이라고 한 것인가?
오로지 항상 온갖 염오한 마음과 함께 하기 때문으로, 본송에서 ‘염오한 것’이란 바로 염오한 마음이란 뜻이다. 또한 방일 등과 무명은 그 순서대로 앞서 논설한 불방일ㆍ근(勤)ㆍ신(信)ㆍ경안ㆍ사(捨) 등에 의해 대치(對治)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34)
여기(본송)서 치(癡)란 우치(愚癡)를 말하는 것으로, 알려질 대상에 대한 참다운 이해를 장애하여 분별 인식[辯了]이 없는 것을 일컬어 우치라고 한다. 즉 이는 바로 무명(無明)이고, 무지(無智)이며, 무현(無顯)인 것이다.35)
일(逸)이란 방일(放逸)을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이익에 전념하기를 포기하여 뜻[情]을 놓아버리는 것을 일컬어 방일이라고 한다.36)
태(怠)란 해태(懈怠)를 말하는 것으로, 선한 일에 대해서는 뛰어난 능력을 없애거나 감소시키지만 악한 일에 대해서는 날쌔고 재빠르게 성취하는 무명의 등류를 일컬어 해태라고 한다. 이에 따라 이것을 비천하고 저열하게 노력하는 것[鄙劣勤性]이라고 하니, 노력하고 익히는 것이 비천하고 더럽기 때문에 해태라고 이름한 것이다.37)
불신(不信)이란 이를테면 마음이 청정[澄淨]하지 않은 것으로, 사견(邪見)의 등류이다. 즉 온갖 진리[諦]와 실유의 법[實]과 정려와 등지에 대해 현전(現前)에서 경솔하게 비방하고, 보시 등의 원인에 대해서나 그 과보에 대해 마음으로 즉각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불신이라고 한다.
혼(惛)이란 혼침(昏沈)을 말한다. 즉 몽롱하거나 즐겁지 않은 일 따위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서, 마음의 무거운 성질[重性]을 일컬어 혼침이라고 한다. 이것에 의해 은폐됨으로써 마음은 바로 혼미해져 [능히 선법을] 감당할 수 없게 되니, 이는 바로 어둡고 답답한 성질[瞢憒性]이기 때문으로, 이에 따라 이것을 경안에 의해 대치되는 것이라고 설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마음은 능히 대종을 낳는 원인[能生因]이 되기 때문에, 이에 따라 우선 몸의 무거운 성질을 일으키는 것도 일시 혼침이라고 가설하였지만, 실제로는 혼침이 아니니, 그것은 바로 신식(身識)의 소연이 되는 경계대상이기 때문이다.38)
그런데 이러한 혼침은 무명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본론(本論)에서는 대번뇌지법으로 설하지 않았다.39)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 논에서는 오로지 혼침에 근거하여 무명이라는 말을 설하였던 것이니, 두 가지의 상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며, 무명의 존재는 바로 대변행(大遍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침이 비록 이러한 대번뇌지법으로 설해지지 않았을지라도 성취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 말은 두 가지 뜻 모두에 근거한 것이다”고 하였다.
도(掉)란 도거(掉擧, 들뜸)를 말한다. 이는 친한 이를 생각하는 것[親里尋] 등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서, 마음으로 하여금 고요히 안정되지 않게 하는 것을 설하여 도거라고 하였다. 즉 마음은 이것과 화합함으로써 길을 벗어나[越路] 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비리작의(非理作意)ㆍ실념(失念)ㆍ심란(心亂)ㆍ부정지(不正知)ㆍ사승해(邪勝解)는 앞의 대지법 중에서 이미 논설하였다.40) 그래서 이러한 대번뇌지법 중에 비록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설하지 않은 것이니, 마치 대선지법에서 무치(無癡)의 선근을 설하지 않은 것과 같다.41)
즉 오로지 온갖 염오한 마음만이 항상 이러한 여섯 가지 심소법을 갖는 것이다.
5.5.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
이와 같이 대번뇌지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나아가 대불선법(大不善法)의 ‘지(地)’를 대불선지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제법 가운데 어떤 법이 만약 대불선지에 소유되었으면 이것을 대불선지법이라고 이름하니, 말하자면 항상 불선심에 존재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이란 바로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오로지 불선심에 편재하는 법은
무참(無慚)과 무괴(無愧)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오로지 두 가지의 심소만이 일체의 불선심과 함께 할 뿐이니, 무참(無慚)과 무괴(無愧)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두 가지 종류만을 이러한 대불선지법이라고 일컬은 것이다.42) 이러한 두 가지 법의 상(相)은 뒤의 본송 중에서 응당 나타내어 분별하는 바와 같다.43) 그래서 여기서는 설하지 않을 것이다.
5.6.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
이와 같이 대불선지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나아가 소번뇌법(小煩惱法)의 ‘지’를 소번뇌지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제법 가운데 어떤 법이 만약 소번뇌지에 소유되었으면 이것을 소번뇌지법이라고 이름하니, 말하자면 일부의 염오심과 함께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이란 바로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분(忿)ㆍ부(覆)ㆍ간(慳)ㆍ질(嫉)ㆍ뇌(惱)
해(害)ㆍ한(恨)ㆍ첨(諂)ㆍ광(誑)ㆍ교(憍)
이와 같은 유형의 법을 일컬어
소번뇌지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이와 같은] 유형[類]’이라고 말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고[不忍], 즐길만한 것이 아니며[不樂], 번민하여 일어난다[憤發]는 등의 뜻을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소(小)’란 바로 적다[少]는 뜻으로, 일체의 염오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니, 오로지 일부의 염오심과 함께 할 뿐만 아니라 각기 개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상응의 뜻도 갖지 않는다. 오로지 수소단(修所斷)으로서 의식과 함께 일어나며, 무명과 상응할 뿐이다.44)
이러한 제법의 상에 대해서는 마땅히 수번뇌(隨煩惱)를 논설하면서 널리 분별하게 될 것이다.45)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일체의 심소는 그 자체 모두 실유(實有)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나의 품류가 소연의 대상 중에서 여러 가지의 행상(行相)으로 동시에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니, 소연의 대상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법체가 각기 차별되는 행상을 동시에 갖는 것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46) 그렇지만 또 다른 법에 의해 제복(制伏)되기 때문에, 그 상속이 변이하면서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지금 바로 보건대, 깨끗한 기름과 이물질의 티끌[垢]과 물과 바람 등의 세력이 등불을 제복하며 유지[制持]시키니, 등불의 상속 가운데 바로 밝음과 어두움과 소리와 움직임 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47)
이와 같이 대지법 등의 품류로서 결정된 심소의 차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다시 이 밖에도 [그 품류가 결정되지 않은] 부정(不定)의 심소로서 악작(惡作)ㆍ수면(睡眠)ㆍ심(尋)ㆍ사(伺) 등의 종류가 존재하는데, 이를 모두 부정지법(不定地法)이라고 이름한다.48)
5.7. 심소법의 구생(俱生)관계
1) 욕계 제 심소의 구생관계
여기서 마땅히 일체의 심소가 온갖 마음의 품류 중에서 함께 생기하는 수량에 대해 결택하여 판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마음의 품류 중에 몇 가지의 심소가 존재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는 유심유사(有尋有伺)이기 때문에
선한 마음의 품류 중에 있어서는
스물두 가지의 심소가 존재하며
어떤 때에는 악작(惡作)을 더하기도 한다.
欲有尋伺故 於善心品中
二十二心所 有時增惡作
불선으로서 불공(不共)이거나
견(見)과 함께 하는 경우는 오로지 스무 가지가
네 가지 번뇌나 분(忿) 등이나
악작과 함께 하는 경우라면 스물한 가지가 존재한다.
於不善不共 見俱唯二十
四煩惱忿等 惡作二十一
유부무기(有覆無記)의 마음에는 열여덟 가지가 존재하고
무부무기의 마음에는 열두 가지가 존재한다고 인정하며
수면(睡眠)은 두루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모두에 하나씩을 더하게 된다.49)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욕계에서의 마음의 품류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선에는 오로지 한 가지가 있고, 불선에는 불공무명(不共無明)과 구생하는 것과 그 밖의 다른 번뇌 등과 구생하는 것 두 가지가 있으며, 무기에도 유부무기와 무부무기의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욕계에서의 일체 마음의 품류는 결정코 항상 심(尋)ㆍ사(伺)와 상응하기 때문에, 선한 마음의 품류는 스물두 가지의 심소와 함께 생겨나니, 이를테면 열 가지 대지법과 열 가지 대선지법과 그리고 부정지법의 두 가지 심소 즉 심(尋)과 사(伺)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이 중에서 근(勤)과 사(捨)는 마땅히 함께 생겨나지 않아야 할 것이니, 행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으로, 마치 나아가는 것[進]과 멈추는 것[止]과 같다. 즉 짓고 닦는다는 것[造修, 즉 勤을 말함]과 버린다는 것[委棄, 즉 捨를 말함]은 이치상 동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계경에서도 역시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생겨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으니, 두 가지 법을 닦는다고 하는 것은 닦아야 하는 때와 닦지 않아야 하는 때를 동시에 설하는 것이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마음이 만약 혼침의 상태라면 이 때는 마땅히 택법(즉 혜)과 근(勤)과 희(喜)를 닦아야 하지 경안이나 정(定)ㆍ사(捨)를 닦아야 하는 때가 아니다. 그러나 만약 마음이 도거의 상태라면 이 때는 마땅히 경안과 ‘정’과 ‘사’를 닦아야 하지 택법이나 ‘근’ㆍ‘희’를 닦아야 하는 때가 아니다.”50)
함께 생겨난다[俱生]고 하여도 여기에는 아무런 과실이 없으니, 두 가지는 서로 모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올바른 이치[正理]에 머무는 자가 참다운 행[如理行]을 일으켜 멈추지 않는 것을 근(勤)이라 이름하며, 그 때 비리의 행[非理行]을 버리고 평등하게 되는 것을 사(捨)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는 참다운 행과 비리의 행에 있어 ‘사’는 지칭(持稱)이나 진지(進止)가 평등한 것이기 때문에 ‘사’와 ‘근’은 서로가 서로에 수순(隨順)하여 선을 일으키고 악을 멈추게 하니, 그 행상이 서로 모순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동일한 소연에 대해 하나(즉 ‘근’)는 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즉 ‘사’)는 버리는 것이라고 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위배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같은 과실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이를테면 경각성과 무경각성의 작의와 ‘사’는 마땅히 서로 모순 된다고 한 경주(經主)의 힐난을 유추하여 해석하더라도 이와 마찬가지로 잘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51)
이같이 선한 마음의 품류에는 스물두 가지의 심소가 존재하여 함께 생겨난다. 그런데 부정지법의 나머지 두 종류인 악작(惡作)과 수면(睡眠)은 3계나 6식신의 유루ㆍ무루 모두에 통하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불염오도 아니고, 또한 역시 오로지 염오한 것만도 아니다. 따라서 선한 마음의 품류에는 언제나 모두 악작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인정된다.52) 그럴 때 [욕계 선한 마음에서의 심소의] 수는 증가하여 스물세 가지에 이른다.
악작이라고 말한 것은, 후회는 그릇되게 저질러진 일[惡作]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악작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무상정(無相定)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53) 또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무상정이나 신념주(身念住)는 처소가 있어 [무상과] 신(身)이라고 이름하였다”고도 하였다.5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그릇되게 저질러진 일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악작이라는 명칭을 설정하였다면], 아직 지어지지 않은 일을 소연으로 하여 마음이 후회를 낳았을 경우, 마땅히 악작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55)
그렇지 않으니, 아직 짓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역시 ‘지은 일[作]’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내가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을 짓지 않았던 것은 바로 나의 악작(즉 잘못된 일)이다’고 후회하여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러한 악작은 선ㆍ불선과 통하며, 무기와는 통하지 않으니, 우근(憂根, 근심)에 따라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며, 욕탐을 떠난 자는 성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무기법에는 이와 같은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기법에도] ‘나는 요즈음 어찌하여 소화시키지도 않고 먹기만 하는가?’ ‘나는 요즈음 어찌하여 이 벽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인가?’라고 추변(追變, 추억)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따위의 유형은 그의 마음이 아직 우근과 접촉하지 않은 것으로, 단지 이 같은 성찰만으로는 악작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그의 마음이 우근과 접촉하였다면 바로 악작을 일으킬 것이며, 그 때의 악작은 이치상 우근과 동일하다. 따라서 악작은 이와 같은 특성을 갖는 것이라고 설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마음으로 하여금 슬퍼하게 하는 것을 악작의 마음이라고 한다.’ 만약 우근을 배제한다면 무엇이 마음으로 하여금 슬퍼하게 할 것인가? 곧 악작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선과 불선의 악작이 각기 모두 두 가지 처소(짓고 짓지 않음)에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56)
만약 불선으로서 불공(不共)인 마음의 품류라면 여기에는 스무 가지 종류의 심소가 존재하여 함께 생겨나는 것이니, 이를테면 열 가지 대지법과 여섯 가지 대번뇌지법과 두 가지 대불선지법, 그리고 ‘심’과 ‘사’의 두 가지 부정지법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불공인 마음의 품류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이러한 마음의 품류에는 오로지 무명만이 존재할 뿐 어떠한 경우라도 그 밖의 탐수면 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57)
불공품(不共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견(邪見)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의 구생관계도 역시 그러한데, 대지법 중의 혜(慧)의 차별을 견(見)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그 수는 증가되지 않는 것이다.58)
그리고 본송에서 ‘오로지’라고 하는 말은 바로 간별(簡別, 변별)의 뜻으로, 오로지 ‘견’과 함께 하는 경우라면 결정코 스무 가지가 존재하지만, 불공품 중에는 악작 등이 있을 가능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만약 악작이 불선일 경우, 오로지 무명과 함께 할 뿐 다른 여타의 번뇌와는 함께 하지 않으니, 탐(貪)과 만(慢)의 두 종류는 기쁨에서 일어나는 것[欣行轉]이기 때문이며, 진(瞋)은 외면적[外門]으로 일어나 그 행상이 거칠기 때문에 악작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의(疑)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지만 악작은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함께 일어나지 않으며, 유신견(有身見) 등은 기쁨에서 일어나고, 지극히 맹리(猛利)하지만 악작을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악작은 선악의 행사처(行事處)에 의지하여 일어나지만 온갖 견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사견(邪見)의 일부는 비록 근심에서 일어나는 것[戚行轉]이라 할지라도 두 가지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악작과 함께 하지 않는다.59) 그렇기 때문에 악작이 바로 불선일 경우에는 오로지 무명과 함께 하며 불공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니, 분(忿) 등도 역시 그러하다.
탐(貪)ㆍ진(瞋)ㆍ만(慢)ㆍ의(疑)의 번뇌와 상응하는 네 가지 불선심의 품류에는 스물한 가지의 심소가 존재하여 함께 생겨나는데, 그 중의 스무 가지는 불공품에서 설한 바와 같고, 여기에 탐 등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설한 분(忿) 등의 수번뇌와 상응하는 마음의 품류에서도 역시 스물 한가지의 심소가 함께 생겨나는데, 스무 가지는 불공품에서 설한 바와 같고, 여기에 ‘분’ 등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선의 악작과 상응하는 마음의 품류에서도 역시 스물한 가지의 심소가 함께 생겨나니, 이를테면 바로 악작이 스물한 번째이며, [스무 가지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만약 무기로서 유부심(有覆心)의 품류라면 오로지 열여덟 가지의 심소만이 존재하여 함께 생겨나니, 이를테면 불공의 품류에서 함께 생겨나는 스무 가지 법 중 대불선지법의 두 종류를 제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60) 여기서 욕계의 무기의 유부심이란, 이를테면 살가야견(薩迦耶見, 유신견을 말함)이나 변집견과 상응하는 마음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견’이 증가하지 않은 것은 앞에서 해석한 바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61)
그 밖의 무기인 무부심(無覆心)의 품류에서는 오로지 열두 가지의 심소만이 함께 생겨난다고 인정[許]해야 할 것이니, 말하자면 열 가지 대지법과 아울러 부정지법인 ‘심’과 ‘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악작도 역시 무기(즉 무부무기)와 통한다. 즉 우근은 희근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유기(有記)만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과 상응하는 마음의 품류에서는 바로 열세 가지의 심소가 존재하여 함께 생겨나게 된다”고 하였다.62)
나아가 수면(睡眠)은 일체의 마음과 상위하지 않기 때문에 온갖 마음의 품류에 모두 현행할 수 있다. 따라서 선ㆍ불선ㆍ무기심의 품류 중의 어떤 한 품류에 이것이 존재한다면 이를 더하여 설해야 하니,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하나씩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63)
그런데 공교처(工巧處) 등의 온갖 무기심은 모질게 노력하는 것[勇悍, 즉 대선지법의 勤]과 유사하지만,64)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가행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라도 근(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염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태(懈怠)도 없다. 그리고 신(信)과 불신(不信)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2) 색ㆍ무색계 제 심소의 구생관계
욕계에서 심소가 함께 생기[俱生]할 때, 온갖 품류에서의 정해진 수량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상계(上界)에 대해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초정려에서는 불선과
그리고 악작과 수면(睡眠)을 제외하며
중간정려에서는 또한 심(尋)을 제외하며
그 이상에서는 아울러 사(伺) 등을 제외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초정려 중에서는 앞(욕계)에서 설한 온갖 심소법 중에서 오로지 불선과 악작(惡作)과 수면(睡眠)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이 모두 함께 존재한다. 여기서 ‘오로지 불선’이라고 함은 진(瞋)번뇌와 무참ㆍ무괴와, 첨(諂)ㆍ광(誑)ㆍ교(憍)를 제외한 그 밖의 분(忿) 등을 말하며, ‘그 밖의 것이 모두 존재한다’고 함은 욕계에서 설한 바와 같다.65)
중간정려에서는 앞에서 제외한 것을 제외하고, 여기에 다시 심(尋)을 제외한 그 밖의 것이 모두 함께 존재한다.66)
제2정려 이상에서부터 무색계 중에 있어서는 앞에서 제외한 것을 제외하고, 또한 사(伺) 등을 제외하는데, 여기서 ‘등’이라 함은 첨(諂)과 광(誑)도 제외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 밖의 심소는 모두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함께 존재한다. 즉 욕계에서부터 범천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왕과 신하와 중생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첨’과 ‘광’이 존재하지만, 그 이상의 단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67)
5.8. 서로 유사한 심소법의 분별
1) 무참(無慚)과 무괴(無愧)
이와 같이 3계(界)에 계속(繫屬)되는 온갖 심소법이 [마음과] 함께 생겨나는데 정해진 수량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런데 온갖 심소의 성상(性相)에는 매우 유사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차별을 알기가 어렵다. 이제 유부 종의(宗義)에 따라 그같이 알기 어려운 심소들의 개별적인 상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참(無慚)과 무괴(無愧), 애(愛)와 경(敬)의 개별적인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참과 무괴는 존중하지 않는 것이고
죄에 대해 두렵게 여기지 않는 것이며
‘애’와 ‘경’이란 말하자면 신(信)과 참(慚)으로서
오로지 욕계와 색계에만 존재할 뿐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무참과 무괴의 차별은 이러하다.
온갖 공덕과 공덕 있는 자에 대해 공경[敬]하는 일이 없고, 존중[崇]하는 일이 없으며, 어렵게 여겨 꺼리는 일[忌難]도 없을 뿐더러 따라 속하는 일[隨屬, 즉 제자가 되어 예의를 갖추는 일]도 없는 것을 일컬어 ‘무참’이라고 한다. 여기서 온갖 공덕이란 시라(尸羅, śila 곧 계율) 등을 말하며,68) 공덕 있는 자란 친교사(親敎師, 곧 스승) 등을 말한다. 곧 이러한 두 대상에 대해 공경하는 일도 없고, 존중하는 일도 없는 것이 바로 무참의 특성이니, 이는 바로 공경하고 존중하는 것을 능히 장애하는 법인 것이다.
혹은 ‘공경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온갖 공덕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고, ‘존중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공덕 있는 자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며, ‘어렵게 여기는 일도 없을 뿐더러 따라 속하는 일이 없다’는 것은 앞의 두 가지(공덕과 공덕 있는 자)를 모두 나타낸 것이거나 혹은 그 순서에 따른 것이다.69)
지은 죄에 대해 두렵게 여기지 않는 것을 일컬어 ‘무괴’라고 한다. 즉 모든 관행자(觀行者)가 꾸짖고 싫어하는 법을 설하여 죄(罪)라고 말한 것인데, [관행자가] 꾸짖고 싫어하는 온갖 죄업은 능히 이 세계나 저 세계가 나무라고 헐뜯을만한, 비난하고 벌할만한, 애호할 수 없고 참기 어려운 이숙과를 초래한다는 등의 사실에 대해 어떠한 두려움도 나타내 보이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무괴의 특성이다. 이는 바로 죄업의 과보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꺼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두렵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은 어떠한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인가? 그것(죄업의 과보)을 두려움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인가, 보고도 두렵지 않다는 것인가? 전자의 경우라면 마땅히 무명을 나타내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마땅히 사견을 나타내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70)
[‘두렵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는] 이 말은, ‘보는 것[見, 즉 보고도 두렵지 않다는 사견]’이나 ‘보지 않는 것[不見, 즉 두려움으로 보지 않는다는 무명]’이 무괴의 본질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다만 어떤 수번뇌의 법으로서 능히 현행의 무지(無智, 무명)와 사지(邪智, 사견)의 직접적인 원인[近隣因]이 되는 것을 일컬어 무괴라고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한 말일 뿐이다.
이상의 뜻을 요약한다면, 이를테면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공덕과 공덕 있는 자에 대해 존중하고 공경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을 일컬어 ‘무참’이라 하고, 죄가 현행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꺼려하는 일이 없는 것을 일컬어 ‘무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온갖 번뇌에 대해 능히 싫어하거나 허물려고 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무참’라 하고, 온갖 악행 대해 능히 싫어하거나 허물려고 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무괴’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어떤 이는 설하기를 “홀로 있으면서 죄를 짓고 부끄러워함이 없는 것을 ‘무참’이라 하고,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죄를 짓고 부끄러워함이 없는 것을 설하여 ‘무괴’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불선심을 바로 일으킬 때 이숙인에 대해 살펴보는 일이 없는 것을 일컬어 ‘무참’이라 하고, 이숙과에 대해 살펴보는 일이 없는 것을 ‘무괴’라 한다”고 하였다. 즉 온갖 불선의 마음이 현재전하는 상태에서 그 원인과 과보에 대해 모두 살펴보는 바가 없기 때문에 한 찰나의 마음 중에 두 가지의 법이 함께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이 반대로 해석한 것이 참(慚)과 괴(愧)의 다른 점이다. 즉 청정한 의요(意樂, 뜻)로서 착한 이가 애락(愛樂)하는 뛰어난 업[勝業]을 익히려고 하는 이를 유참자(有慚者)라고 이름하며, 착한 이가 애락하는 뛰어난 과보[勝果]를 획득하려고 하는 이를 유괴자(有愧者)라고 이름하니, 온갖 유정으로서 뛰어난 업과 뛰어난 과보를 애락하는 이는 반드시 나쁜 원인[惡因]과 괴로운 과보[苦果]에 대해서도 역시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체의 선한 마음이 현재전하는 상태에서는 그 원인과 과보 모두에 대해 결정코 어떠한 미혹도 없으니, 이에 따라 ‘참’과 ‘괴’는 한 찰나의 마음에 함께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여사는 이와 같은 뜻으로써 심수(心首)를 나타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지은 죄에 대해 그 자체를 관찰하여 부끄러워함이 없는 것을 일컬어 ‘무참’이라 하고, 다른 것을 관찰하여 부끄러워함이 없는 것을 일컬어 ‘무괴’라고 한다”고. 말하자면 이숙인은 때가 되면 응당 현기하기 때문에 ‘그 자체’라고 하였고, 그것의 이숙과는 후시(後時)에 비로소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라고 하였다. 즉 그가 말하고자 한 뜻은, ‘온갖 죄를 짓는 자는 의요가 부정(不淨)하여 현행의 죄업과 당래의 괴로운 과보에 대해 모두 살펴보는 일이 없다’는 것이니, 이러한 사실에 따라 [무참과 무괴에 대해] 이미 해석하였다.
그럼에도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그의 정의(情意)를 그릇되게 취하여 한쪽으로만 치우쳐 허물을 지적하였다. 즉 그는 힐난하여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이 두 가지(그 자체와 다른 것)는 관찰되는 바가 동일하지 않은데, 어떻게 구기(俱起)할 수 있는 것인가?”라고 하였던 것이다.71)
2) 애(愛)와 경(敬)
무참과 무괴의 차별상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애(愛)와 경(敬)의 차별은 이러하다.
‘애’란 애락(愛樂)을 말하는 것으로, 그 본질[體]은 바로 신(信)이다.72) 그런데 ‘애’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염오함이 있는 것이고, 둘째는 염오함이 없는 것이다. 염오함이 있는 ‘애’란 탐(貪)을 말하며, 염오함이 없는 ‘애’란 신(信)을 말한다.73)
‘신’에도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인가하는 것[忍許相]이고, 둘째가 즐거움을 원하는 것[願樂相]이다. 만약 이러한 이(즉 공덕이 있는 자)를 소연으로 삼아 지금 바로 인가하면 혹 거기서도 역시 원하는 즐거움을 낳게 된다. 따라서 여기서의 ‘애(염오함이 없는 애)’는 바로 두 번째 ‘신’을 말하는 것이다. 혹은 원인에 대해서도 역시 결과의 명칭을 설정할 수 있으니, 앞의 ‘신’은 바로 ‘애’의 직접적인 원인[隣近因]이 되기 때문에 ‘애’라고 일컬어도 과실이 없는 것이다.
‘경’이란 경중(敬重)을 말하는 것으로, 그 본질은 바로 참(慚)이다. 이를테면 앞서 대선지법을 해석하는 중에서 말한 것처럼 마음의 자재성을 설하여 ‘참’이라고 함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경’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존중[崇重]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경’이라고 일컬은 것으로, 이것이 선행함에 따라 비로소 ‘참’의 부끄러워함[慚恥]이 생겨나기 때문에 ‘경’은 ‘참’이 아니다”고 하였다. 그럴 경우 그 논사는 마땅히 ‘참’의 부끄러워함이 없는 자도 능히 공경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니, 먼저 공경을 일으켰을 때에는 아직 ‘참’의 부끄러워함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경우 마땅히 ‘참’의 부끄러워함이 없는 자일지라도 능히 공경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공경할 때 이미 ‘참’의 부끄러워함이 존재하였다고 한다면, 마땅히 “공경이 선행함에 따라 비로소 ‘참’의 부끄러워함을 낳게 되었다”고 설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만약 “공경할 때 ‘참’의 부끄러워함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경’이 바로 ‘참’은 아니다”고 한다면,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경은 참이 아니다’는 말에는 어떠한 논거[證因]도 없기 때문이다.
곧 먼저 공경하고 나서 비로소 ‘참’의 부끄러워함을 낳게 되는 것이 아니니, 그럴 경우 ‘참’을 갖지 않은 자는 능히 공경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며, 또한 공경함이 있는 자로서 ‘참’의 부끄러워함을 갖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시 ‘경’의 본질은 ‘참’이 아니라고 확고히 주장한다면, 그것은 다만 허언(虛言)일 뿐 아무런 실제적인 의미도 없다. 따라서 마땅히 ‘경’ 자체는 바로 ‘참’의 차별로서, ‘참’을 갖은 자를 일컬어 존중함이 있는 자라고 해야 하며, 이러한 ‘참’의 차별을 일컬어 ‘경’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즉 보특가라(補特伽羅, pudgala, 인간을 말함)를 경계로 삼기 때문에 ‘참’을 차별하여 ‘존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대저 ‘존중한다’고 함은 바로 마음의 자재로서, 앞서 마음의 자재성을 ‘참’이라 한다고 이미 논설하였다. 즉 마음 중에 자재력이 있어 능히 스스로 제복(制伏)하여 존중하게 되니, 그래서 ‘경’의 본질은 바로 ‘참’의 차별이라고 설하게 된 것이다. 존중받아야 할 모든 이에 대해 숭상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경’이라고 말한 것이니, 이는 바로 경계로서의 제칠(第七, 즉 處格)의 용법이거나 혹은 근거[因]로서의 제칠의 용법이다. 즉 존중받아야 할 분에게 소속되고자 하는 뜻을 낳음에 따라 이를 일컬어 ‘참’이라 한 것이니, 이러한 ‘참’은 바로 존중되어야 할 분에 대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의 본질이 바로 ‘참’의 차별이라는 뜻은 잘 성취되었다. 곧 이러한 논증에 따라 보특가라를 경계대상으로 하는 신(信)과 참(慚)을 설하여 애(愛)와 경(敬)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법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는 경우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애’와 ‘경’이 비록 대선지법에 포섭되는 것일지라도 무색계 중에 존재하는 것으로는 설정되지 않는다.74)
그런데 유여사는 말하기를, “믿고 따르며[信順] 친밀할지라도 탐염(耽染)이 없는 상태를 ‘애’라 하고, 존중할 분을 우러러 숭상 존중하며, 따라 속하는 것을 ‘경’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다른 유여사는 설하기를, “선사(善士)와 친근하게 하는 근거를 일컬어 ‘애’라 하고, 그의 말씀을 어기지 않게 하는 근거를 ‘경’이라 한다”고 하였다. 다시 어떤 이는 설하기를, “화합중(和合衆,즉 승가)에 대해서는 보는 관점[見] 등이 모두 동일하기 때문에 ‘애’라고 말하고, 존중해야 할 분에 대해서는 깊은 마음으로 공경하여 받들기 때문에 ‘경’이라 말한다”고 하였다. 곧 이 같은 [보특가라를 대상으로 하는] ‘애’와 ‘경’은 욕계와 색계에만 존재할 뿐 무색계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그것의 소의처가 없기 때문이다.
3) 심(尋)과 사(伺)
이와 같이 ‘애’와 ‘경’의 차별상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심(尋)과 사(伺), 만(慢)과 교(憍)의 차별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尋)과 사(伺)는 마음의 거칠고 세밀함이며
만(慢)은 타인에 대한 마음의 오만함[擧]이며
교(憍)는 자신의 법에 염착(染著)함으로써
마음이 고양되어 돌아봄이 없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심(尋)과 사(伺)의 차별은 이를테면 마음의 거칠고 세밀함이다. 즉 마음의 거친 성질[麤性]을 설하여 ‘심’이라 말한 것이며, 마음의 세밀한 성질[細性]을 설하여 ‘사’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심’과 ‘사’ 자체는 마음과 다르지 않으니, 경에서도 바로 마음에 대해 두 가지 성질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경에서 말하고 있는 취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경에서 마음의 거칠고 세밀한 성질을 일컬어 ‘심’과 ‘사’라고 말한 것은, 이 법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거칠게 일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법을 ‘심’이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며, 이 법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세밀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법을 ‘사’이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 혹은 “그래서 [‘심’과 ‘사’] 자체는 마음과 다른 것이다”고 달리 해석해야 할 것으로, 이를테면 우리는 마음이 지닌 거친 성질[心之麤性]을 마음의 거친 성질[心麤性]이라 이름하고, 마음이 지닌 세밀한 성질[心之細性]을 마음의 세밀한 성질[心細性]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가? 마음에 근거하는 거친 성질을 마음의 거친 성질[心麤性]이라 이름하고, 마음에 근거하는 세밀한 성질을 마음의 세밀한 성질[心細性]이라 이름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거친 성질과 미세한 성질은 서로 모순 되기 때문에 마땅히 ‘심’과 ‘사’는 일 찰나의 마음에 함께 생겨나서는 안 될 것이다.75)
비록 일 찰나의 마음 중에 두 가지의 법체가 획득될 수 있을지라도 작용이 증강(增强)되는 때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모순 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물과 초(酢)를 같은 분량으로 화합하면 그 자체는 비록 평등할지라도 작용에 증강이 있는 것과 같다. 곧 거친 마음의 품류 중에서는 ‘심’의 작용이 증강하였기 때문에 ‘사’의 작용은 감손되어 존재하더라도 지각하기 어렵다. 또한 세밀한 마음의 품류 중에서는 ‘사’의 작용이 증강하였기 때문에 ‘심’의 작용은 감손되어 존재하더라도 지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만약 “초의 작용은 언제나 증강한 것이기 때문에 비유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러한 말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나는 결정코 초를 ‘심’에 비유하고, 물을 ‘사’에 비유한다고는 설하지 않았으며, 다만 작용에 증강이 있는 것이 바로 초의 경우와 같다고 설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의 품류 중에서라면, ‘심’과 ‘사’의 두 법 가운데 작용이 강성한 것은 초와 같다고 설하였고, 미약한 것은 물에 비유한 것이다. 이에 따라 ‘심’과 ‘사’는 비록 일 찰나의 마음 중에 그 법체가 함께 획득될 수 있을지라도 작용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일 찰나의 마음이 바로 거칠고, 또한 바로 미세한 경우는 없는 것이다. 예컨대 비록 탐(貪)과 치(癡)의 성질이 비록 함께 현행할지라도 그 때의 마음을 유탐(有貪)의 행(行)이라고 설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어떠한 마음에도 작용이 강성한 법이 존재하니, 바로 이러한 법을 문(門)으로 삼아 마음의 품류를 전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현견(現見)하건대 개별적인 법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그러한 개별적인 법이 상속 변이하게 하기 때문이니, 마음 자체의 상속에도 거칠고 세밀함이 있기 때문에 별도의 심ㆍ사에 의해 유지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다른 어떤 이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ㆍ사를 설정하게 된 것은 정장(定障, 선정의 장애)이 되기 때문이니, 그래서 심ㆍ사를 설하여 마음의 거칠고 세밀한 성질이라고 한 것이다.”
어떻게 그러함을 알게 된 것인가?
모든 성교(聖敎)의 곳곳에서 정(定)을 ‘마음’이라는 말로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 중에서 4정려를 설하여 정근(定根)이라 하고 나서 다시 4정려를 설하여 증상심학(增上心學)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계경에서 “청정한 계(戒)에 의지하고 안주하여 두 가지 법을 수습하니, 지(止)와 관(觀)이 바로 그것이다”고 설하고 나서, 다시 설하기를 “지자(智者)는 청정한 계에 의지하고 안주하여 심혜(心慧)를 수습한다”고 하였다. 또한 계경에서 말하기를 “탐욕을 떠났기 때문에 마음의 해탈을 획득하는 것이며, 무명을 떠났기 때문에 혜의 해탈을 획득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지(止)와 관(觀)이 바로 그것의 직접적인 대치였다. 따라서 정(定)에 대해 ‘마음’이라는 말을 설정하였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즉 대선존(大仙尊)께서는, 어떤 관행자(觀行者)가 바야흐로 중간정려에 들어가고자 하였을 때 장애가 되는 어떤 법이 존재함을 관찰하고서 이러한 장애를 추구(推求)하여 그것이 바로 심(尋)을 본질로 하는 것임을 알았으며, 나아가 다시 어떤 관행자가 바야흐로 제2정려에 들어가고자 하였을 때 장애가 되는 어떤 법이 존재함을 관찰하고서 이러한 장애를 추구하여 그것이 바로 사(伺)를 본질로 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곧 그것들은 이미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별도로 존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번뇌가 정장(定障)이 되기에 충분한데 어찌 심ㆍ사의 장애를 별도로 설정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말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번뇌는 오로지 염오법을 떠나게 하는 것을 장애할 뿐이기 때문에 정장은 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그러함을 알게 된 것인가?
하지(下地)의 번뇌가 이미 끊어졌을지라도 상지(上地)의 선정이 현전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며,76) 비록 [하지의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상지의 변정(邊定, 즉 邊際定, 제4정려) 역시 현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로지 번뇌를 정장이라고 한다면 오로지 아직 끊어지지 않은 번뇌만이 능히 상지로 들어가는 데 장애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심ㆍ사 등도 요컨대 그것이 현전하는 경우 바야흐로 상지로 들어가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정려 중에서는 심ㆍ사를 고요히 하여 희(喜)를 떠나고 락(樂)을 끊었다고 말한다”고 하였다. 이는 곧 이미 탐욕을 떠난 자가 온갖 선정을 닦을 때 비로소 심 등이 고요하며 [희락을] 떠나고 끊었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다. 따라서 번뇌 밖에 ‘심’ 등의 장애가 별도로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염오심과 선심에 대해 장애가 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마땅히 “번뇌가 바로 정장(定障)인데, 어찌 심ㆍ사의 장애를 별도로 설정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라고 힐책하여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한 “심ㆍ사를 설정하게 된 것은 정장(定障)이 되기 때문이니, 그래서 심ㆍ사를 설하여 마음의 거칠고 세밀한 성질이라고 하였다”고 한 말은 그 이치가 잘 성립하는 것이다. 곧 선정의 거친 장애[麤障]를 일컬어 ‘심’이라 하였으며, 선정의 미세한 장애[細障]를 일컬어 ‘사’라고 한 것이니,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마음의 거친 성질을 일컬어 ‘심’이라 하고, 마음의 미세한 성질을 일컬어 ‘사’라고 하더라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지의 선정의 과환(過患) 중에는 이와 같은 거칠고 미세하다는 말[名想]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지의 선정은 ‘일미(一味)’라고 말할 수 있다.77)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거기(제2정려 이상의 상지)에는 중간정려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초정려처럼 상지가 아닌 경우에는 동일한 경지 중에서도 점진적으로 장애를 제거하고 점진적으로 뛰어난 선정을 획득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중간정려를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까닭에서 수(受) 등의 각기 개별적인 상(相)을 설하는 것처럼 심ㆍ사의 자상도 그렇게 설하지 않은 것인가?78)
제법의 상을 분별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즉 성교(聖敎) 중에서는 자성(自性)에 근거하여 제법을 분별하는 경우도 있으며, 혹은 상응(相應)ㆍ결과ㆍ원인ㆍ공용(功用, 작용), 그리고 소연에 근거하여 분별하는 경우도 있다. 바야흐로 다음에서 설한 바와 같다.
“무엇이 지계(地界)인가?”
“말하자면 견고성이다.”
“무엇이 불선(不善)인가?”
“말하자면 무참ㆍ무괴와 상응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 삼마지인가?”
“말하자면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무엇이 촉(觸)인가?”
“말하자면 세 가지(근ㆍ경ㆍ식)의 화합이다.”
“무엇이 안근인가?”
“말하자면 안식의 소의가 되는 것이다.”
“무엇이 법지(法智)인가?”
“말하자면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제행(諸行)에 대한, 혹은 그러한 제행의 원인에 대한, 혹은 그러한 제행의 소멸에 대한, 혹은 그러한 제행을 끊는 도(道)에 대한 온갖 무루지이다.”79)
이와 같은 따위의 방식으로 제법의 상을 분별하더라도 그 모두는 정리(正理)에 어긋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수’ 등의 경우처럼 분별해야 한다고 힐책해서는 안 될 것이니, 제법의 성상(性相)은 지극히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이상의 심ㆍ사에 대해서는] 정려를 분별하는 중에 응당 다시 분별하게 될 것이다.80)
4) 만(慢)과 교(憍)
이와 같이 ‘심’과 ‘사’의 차별상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만(慢)과 교(憍)의 차별은 이러하다.
‘만’이란 이를테면 타인에 대해 마음이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성질[自擧性]을 말하니, 자신과 다른 이의 덕(德)의 뛰어남과 저열함, 혹은 진실됨과 거짓됨을 재고 헤아려 마음이 스스로를 믿고 꺼들먹거리며[擧恃] 다른 이를 능멸하기 때문에 ‘만’이라고 일컬은 것이다.81)
‘교’란 이를테면 먼저 자신의 법에 대해 염착(染著)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오만 방일[傲逸]하게 하여 되돌아보는 일이 없는 성질[無所顧性]을 말한다. 즉 자신의 용감함이나 건강, 재산, 지위, 도덕규범[戒], 지혜, 친족 등의 존재에 대해 먼저 염착을 일으켜 마음에 오만 방일함이 생겨남으로써 온갖 선본(善本)을 되돌아보는 일이 없기 때문에 ‘교’라고 일컬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온갖 선본에 대해 되돌아보는 일이 없다’고 함은, 마음이 오만해짐에 따라 온갖 선업을 즐거이 수습(修習)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만’과 ‘교’의 차별의 상이다.
5.9. 심ㆍ심소법의 이명(異名)과 오의평등(五義平等)
이와 같이 온갖 심ㆍ심소의 품류의 동일하지 않음과 동시생기[俱生]의 관계와 결정적인 차별상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런데 심과 심소에 대해 계경 중에서는 그 뜻에 따라 여러 가지의 명칭과 개념[名想]을 설정하고 있다. 이제 여기서 마땅히 이러한 명칭의 차별되는 뜻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心)과 의(意)와 식(識)은 그 본질이 동일하며
심과 심소는 유소의(有所依)로도
유소연(有所緣)으로도, 유행상(有行相)으로도
상응(相應)으로도 일컬어지니, 다섯 가지 뜻을 갖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심(心)과 의(意)와 식(識) 세 가지의 본질은 비록 동일하지만, 그러한 말 등이 사용되어진 의미에는 차이가 있다. 즉 집기(集起)하기 때문에 ‘심’이라 이름한 것이고, 사량(思量)하기 때문에 ‘의’라고 이름한 것이며, 요별(了別)하기 때문에 ‘식’이라고 이름한 것이다.82) 혹은 여러 가지[種種]라는 뜻이기 때문에 ‘심’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며,83) 이러한 ‘심’은 다른 것의 소의지(所依止)가 되기 때문에 ‘의’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며, 능의지(能依止)가 되기 때문에 ‘식’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84) 혹은 계(界)ㆍ처(處)ㆍ온(蘊)을 시설(施設)하기 위한 차별이며,85) 혹은 또한 증장(增長)과 상속(相續)과 업생(業生)의 종자로서 차별되어 [시설되기도 한다].86) 이와 같이 [그 말이 사용되어진] 의미상으로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심ㆍ의ㆍ식의 세 가지는, 명칭에 의해 드러나는 뜻은 다르지만 그 본질은 동일하다고 말한 것이다.
심ㆍ의ㆍ식의 세 가지가 명칭에 의해 드러나는 뜻은 다를지라도 본질은 동일하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온갖 심과 심소를 유소의(有所依)ㆍ유소연(有所緣)ㆍ유행상(有行相)ㆍ상응(相應)이라 이름하는 것 또한 역시 그러하여 비록 말의 뜻은 다를지라도 그 본질은 동일하다. 즉 심ㆍ심소는 다같이 6내처(內處)를 소의로 삼기 때문에 ‘유소의(sāśraya)’라고 이름한 것이며, 색 등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유소연(sālambana)’이라 이름한 것이며, 바로 소연이 되는 경계의 상을 능히 취하기 때문에 ‘유행상(sākāla)’이라고 이름한 것이며,87) 평등하게 동시에 다른 [심ㆍ심소]법과 화합하기 때문에 ‘상응(samprayukta)’이라고 이름한 것이다.88)
무엇을 일컬어 ‘평등하다’고 한 것인가?
다섯 가지 의미에서 평등하기 때문이다. 즉 심과 심소는 다섯 가지의 의미에서 평등[五義平等]하기 때문에 ‘상응’이라고 설한 것으로, 소의ㆍ소연ㆍ행상ㆍ시(時)ㆍ사(事)가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평등이란, 하나의 상응 중에 마음의 체(體)가 하나이듯이 온갖 심소법도 각기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89)
(1) 비유자의 심소 무별체설(無別體說) 비판
그런데 어떤 비유자(譬喩者)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오로지 마음[心]만이 존재할 뿐 별도의 심소는 존재하지 않으니, 마음과 상(想)이 동시에 생겨날 때 그 행상의 차별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의 행상이 오로지 ‘상’에만 존재하고 식(識) 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깊이 추구하여 보건대 오로지 이 두 가지(心과 想)는 말의 차별로서 들려진 것일 뿐 법 자체의 뜻으로 차별되어 알려진 일은 일찍이 없었다.
또한 교증(敎證)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심소는 존재하지 않으니, 세존께서 아난타(阿難陀)에게 “만약 식(識)이 모태에 들어가는 일이 없다면--(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라고 말한 바와 같다.90) 또한 “혹은 심(心)이, 혹은 의(意)가, 혹은 식(識)이 오랫동안 유전하여 지옥에 태어나기도 하고, 나아가 하늘에 태어나기도 한다”고 설하기도 하였다. 또한 “사부(士夫, puruṣa, 곧 인간을 말함)는 바로 6계(界)이니, 말하자면 지계(地界) 내지 식계(識界)가 바로 그것이다”고도 설하였고, 또한 “나는 바야흐로 어떠한 법도 마음처럼 빠르게 회전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도 설하였으며, 또한 “나는 바야흐로 마음처럼 수습(修習)되지 않으면 조절되지도 않고 유연하지도 않아 아무 것도 감당하지 못하는 어떠한 법도 보지 못하였다”고 설하기도 하였다. 또한 계경의 가타(伽他) 중에서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마음은 멀리 가고 홀로 가며
몸이 없으면 굴에서 잠자니
조복하기 어려운 이것을 능히 조복하면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고 말하리라.
이와 같은 여러 경에서는 모두 심소를 부정[遮]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심소에 대한 많은 쟁론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니, 따라서 마음을 떠나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심소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이러한 심소에 대해 다수의 쟁론을 일으켰으니, 혹 어떤 이는 ‘오로지 세 가지 대지법만이 존재한다’고 설하였으며, 혹 어떤 이는 ‘네 가지가 존재한다’고 설하기도 하였고, 혹 어떤 이는 ‘열 가지가 존재한다’고 설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열네 가지가 존재한다’고 설하기도 하였던 것이다.91) 그러므로 오로지 식(識)만이 존재할 뿐으로, 그것이 [작용하는] 상태[位]에 따라 유전하는 것을 ‘여러 종류의 심ㆍ심소의 차별이 존재한다’고 설한 것이니, 마치 사탕수수 즙과도 같고, 노래 부르는 기녀[倡伎人]와도 같다.92) 따라서 수(受) 등은 개별적인 실체로서 획득될 수 없는 것이다.”(이상 비유자의 심소 무별체설)
심과 심소는 다같이 동일한 대상에 일어나며, 생성 지속 소멸 등의 상태[分位]가 동일하며, 선ㆍ불선 등에도 어떠한 차이가 없어 그 체상(體相)의 차별을 알기는 실로 어려우니,93) 온갖 저열한 지혜로는 능히 이에 대한 승해(勝解)를 낳을 수 없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말하기를 “심ㆍ심소법은 전전(展轉)하며 상응하는 것으로, 혹은 수(受), 혹은 상(想), 혹은 사(思), 혹은 식(識) 등 이와 같은 법들은 서로 뒤섞이어[和雜] 분리되지 않아 그것들의 차별의 상을 시설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마땅히 이에 대해 올바른 노력으로 추구하여 승해를 낳아 그 차별의 상을 알아야 할 것이니, 여러 계경 곳곳에서 ‘수ㆍ상ㆍ사 등이 존재한다’거나 ‘식과 함께 생겨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한 존재[類]의 개별적 특성[相]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여 일체 성교(聖敎)의 참된 이치를 모두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그대가 이러한 식(識)과 상(想)의 차별에 대해 알든 알지 못하든 그 같은 ‘상’의 특성은 식 자체를 떠나 결정코 별도로 존재한다. 나는 이 두 가지의 차별상을 분명하게 증득하였다. 이를테면 그러한 온갖 경계대상에 대해 그 자체를 전체적으로 요별하는 것을 일컬어 ‘식’이라 하고, 언어적 개념[名想]을 개별적으로 취하는 것을 시설하여 ‘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법이 구기(俱起)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다시 말해 두 가지가 구기한다고 함은] 경계대상을 전체적으로 요별하는 식이 무간에 멸하고 나서 언어적 개념을 개별적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므로 ‘식’이 생겨나는 것을 시설하여 바로 ‘상’이라고 이름해야 하는 것이다.
『아급마(阿笈摩)』와 정리(正理)에 따랐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급마』에 따랐다고 함은 계경 중에서 먼저 식을 설하고 나서 그 후 구생(俱生)하는 수ㆍ상ㆍ사를 설하였기 때문이다.94) 정리에 따랐다고 함은, 이를테면 안식이 요별한 색에 대해 그 상(相)을 취하는 것을 ‘상(想)’이라 이름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만약 [식이 일어난] 후에 비로소 ‘상’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전 찰나의 색은 이미 멸하였는데, 어떻게 지금 그 상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변본사품(辯本事品)」에서 이미 ‘안식은 과거의 경계대상을 소연으로 삼는다’는 주장에 대해 비판하였었다.95) 그러나 만약 의식이 능히 그러한 상(相)을 취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는 역시 그렇지 않으니, 경에서 ‘안촉에 의해 생겨난 상(想)’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이는 의근행(意近行)에서 설한 바와 같다고 한다면,96)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의식은 촉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으로, 마치 안식이 그러한 것과 같다. 모든 식은 세 가지(근ㆍ경ㆍ식)의 화합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닌데, 어떻게 식이 촉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가 다시 “의식으로부터 그 후에 생겨난 의지(意地)가 능히 상(相)을 취하는 상(想)이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안식에 의해 무간에 낳아진 것이 아닐뿐더러 앞서 언급한 의근행의 경우와 같다고 한 말에도 어긋나게 될 것이다. 또한 신촉(身觸)으로부터 생겨난 신수(身受)가 만약 그러한 상(想)과 마찬가지로 신근에 의해 취해진 경계대상을 바로 영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현전에서 고(苦) 등에 수순하는 촉을 분명하게 따라 영납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과거(전 찰나)에 접촉한 경계대상을 영납한 것이라고 인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생상(生相)이 분명하기 때문이며, 또한 생겨나는 순서도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경에서 설한 안촉에 의해 생겨난 수ㆍ상ㆍ사의 세 가지 심소법 가운데 안식과 무간에 무엇이 결정코 먼저 생겨난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그(비유사)는, 이러한 세 가지 법을 식(識)의 차별로 인정하기 때문에 식은 다수의 법체와 구생할 수 없으며 결정코 순서대로 생겨나야 하지만, 그것을 입증할 만한 근거[因證]가 없기 때문에 세 가지 법 중 어느 것이 가장 먼저 일어나는지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비록 지교(至敎)를 인용하여 오로지 마음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할지라도 그러한 뜻(심소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에 대해서는 논증의 공력(功力)이 없으니, 식은 모든 곳에서 뛰어난 공능을 갖지만 온갖 심소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경에서는] 한쪽(즉 식)으로 치우쳐 설하게 된 것이다. 또한 온갖 심소로서 마음에 근거하지 않은 것은 없으니, 다만 소의만 설하면 능의(즉 심소)는 이미 나타낸 것이 된다. 또한 심ㆍ심소법은 처소에 따라, 시간에 따라 작용에 강성하고 미약함[增微]이 있다. 여기서 강성한 것에 대해 설해 보면, 혹 어떤 마음의 품류는 식의 작용이 강성하며, 혹은 ‘수’, 혹은 ‘상’, 혹은 ‘사’ 등의 작용이 강성한데, 각각의 법의 작용이 강성한 상태에 따라 이를 문(門)으로 삼아 전체적으로 마음의 품류를 나타내었다.97) 따라서 오로지 식(識)만을 설하여도 그 밖의 다른 법(심소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저촉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인용한 가타에서] ‘마음은 홀로 간다[獨行]’고 말한 것은 [다수의] 마음이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지 심소를 부정한 것이 아니니, ‘사람이 홀로 간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인용한 경은 [심소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증의 공용(功用)이 없는 것이다.
또한 “심소에 대한 다수의 쟁론이 있기 때문에 [심소는] 마음을 떠나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였지만,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그들은 모두 [심소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이다. 즉 여러 위대한 논사들은 모두 이증과 교증에 근거하여 마음을 떠나 별도의 심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었던 것이다. 다만 경에서는 결정적인 수량에 대해 설한 일이 없기 때문에 다소간의 수량의 증감에 대해 쟁론을 일으켰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수(受) 등은 바로 마음의 차별일 뿐이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마음이 바로 심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떠한 결정적인 이치에 근거하여 식(識)을 설하여 마음이라 하였으며,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마음이] 바로 심소라고 말하는 것인가?98)
만약 ‘온갖 식의 본질[體]은 바로 마음이며, 수(受) 등의 제법은 바로 이러한 마음 자체의 종류로서, 마음의 상속 중에 이러한 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심소라고 이름한다’고 말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온갖 소조색(所造色)은 바로 대종(大種) 자체의 차별로서, 지(地) 등의 상속 중에 이러한 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소조색이라 이름한다’고는 말하지 않는 것인가?99) 이것이 이미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째서 그러한가? 대종을 떠나서도 그 밖의 별도의 소조색이 존재하니, 「변본사품」 중에서 이미 널리 성립시켰다.100)
만약 ‘심소법은 마음을 떠나 개별적인 실체로서 결정코 존재한다는 사실을 도대체 어떠한 근거에서 알게 된 것인가?’라고 힐책한다면, 『아급마』와 정리(正理)에 따랐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급마』라고 함은, 이를테면 계경 중에서 “안(眼)과 색을 연(緣)으로 하여 안식이 생겨나고, 세 가지의 화합인 촉(觸)은 수ㆍ상ㆍ사와 함께 생겨나니, 이와 같은 제법은 바로 마음의 종류이며, 마음에 의지하며, 마음에 계속(繫屬)된다. 그래서 심소라고 이름하는 것이다”라고 설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함께 생겨난다’고 하는 말은 무간(無間, 즉 간단없는 계시상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심소가 동시에 생겨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일 뿐으로, 이에 대해서는 구유인(俱有因)에 대해 설하는 중에 응당 다시 성립시키게 될 것이다.101) 또한 마음 자체가 구생하는 것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앞의 경설은] 다만 심소의 구기를 설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앞서 인용한 경에서 설하기를 ‘심ㆍ심소법은 전전(展轉)하며 상응하는 것으로, 혹은 수(受), 혹은 상(想), 혹은 사(思), 혹은 식(識) 등 이와 같은 법들은 서로 뒤섞이어[和雜] 분리되지 않아 그것들의 차별의 상을 시설할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경의 뜻은 바로 심소와 심은 그 자체 어떠한 차별도 없음을 나타낸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그럴 경우 목숨[壽]ㆍ의식[識]ㆍ체온[煖]의 세 가지 역시 이 같은 설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지만,102) 의식과 체온이 그 자체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103) 또한 ‘서로 뒤섞였다[和雜]’는 말은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니,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서로 뒤섞였다’고 설할 수도 없는 것이다.
또한 만약 오로지 식만이 존재할 뿐으로, 전 찰나의 식이 멸하고 나서 후 찰나의 식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따위의 법들이 서로 뒤섞이어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이러한 수ㆍ상ㆍ사와 식은 무간(無間)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서로 뒤섞였다’고 말한 것이라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그 이치가 확정적이지 않기[不成] 때문이며, 그 밖의 다른 계경에서 ‘함께 생겨난다[俱生]’는 말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 식과 무간에 이러한 법들이 생겨나는 일이 있다면 ‘서로 뒤섞였다’고 설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에 따르면] 식과 무간에 수 등의 세 법이 동시에 존재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수ㆍ상ㆍ사 등과 식이 서로 뒤섞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그의 주장은 이치와 성교에 어긋나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말하기를 “관행(觀行)을 닦는 자는 타심지(他心智)를 획득하여 능히 다른 이의 심과 심소법을 알아 ‘너의 마음[意]은 이와 같고, 너의 마음은 저와 같으며, 너는 이러한 심(尋)을 가졌으며, 너는 이러한 사(伺)를 가졌다’고 기별하여 말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다. 따라서 마땅히 마음이 바로 심소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
바로 이러한 따위의 온갖 『아급마』에 따라 마음을 떠나 심소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정리(正理)에 따랐다고 함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즉 [앞에서] “이를테면 안식이 요별한 색에 대해 그 상(相)을 취하는 것을 ‘상(想)’이라 한다. 그러나 만약 [식이 일어난] 후에 비로소 ‘상’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전 찰나의 색은 이미 멸하였는데, 어떻게 지금 그 상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논설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컨대 계경에서는 이 같이 설하고 있다.
명(名, nāma)은 일체를 반영하니
명을 초월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에 따라 [그것을] 일법(一法)이라 이름하니
그 모두는 자재(自在)에 따라 작용한다네.
여기서 ‘말’이란 바로 수ㆍ상ㆍ행ㆍ식으로, 이미 일법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오로지 마음만이 존재할 뿐 별도의 심소는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명(名)은 색(色)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실체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법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명과 색이 바로 그것이다”고 말한 바와 같다. 즉 대종 등 차별상으로서의 법은 일법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니,104) 이것(名)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다시 말하기를 “만약 심ㆍ심소의 각각의 본질[體]이 다르다고 한다면, 하나의 마음의 품류 중에 다수의 능히 깨달아 아는[覺了] 작용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심소법은 마땅히 마음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능히 깨달아 아는 작용 자체는 오직 한 가지뿐이기 때문이다. 즉 ‘깨달아 아는 것’은 바로 혜(慧)로서, 심ㆍ심소가 모두 혜를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깨달아 아는 것’이 아닌 그 밖의 법이 ‘깨달아 아는 것’의 본질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그러한 허물은 없는 것이다.
어떤 이는 다시 말하기를 “우리는, 오로지 하나의 식만이 존재하며, 그것이 점차로 전변하는 것이라고 바로 관찰하기 때문에 마음을 떠나 별도의 심소가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수’ 등은 마음과 마찬가지로 그 체상(體相)이 분명하여 지금 바로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심ㆍ심소는 비록 그 자체 구생(俱生)하는 것일지라도 그 공용(功用)에 선후가 없는 것은 아니니, 공용이 증강된 상태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 존재를 알 수 있다. 온갖 대종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105)
그렇다면 어떤 결정적 근거가 있어 오로지 심ㆍ심소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만 ‘상응’이라 이름하고, 온갖 대종 혹은 소조색의 경우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인가?
대종 등의 존재[體]는 증가하거나 증가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106)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심소의 존재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니, 하나의 자상 자체가 증가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107)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견(見)을 근본으로 삼으면 신(信)과 증지(證智)는 상응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온갖 대종 혹은 소조색에는 상응의 뜻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만약 “그렇지 않으니, 그 밖의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08) 즉 그 경 중에서는, 모든 색법에는 상응의 뜻이 없다고 설하지 않았으며, 또한 색의 경우도 역시 상응한다고 설한 일이 있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쟁처(諍處)에서 두 가지(대종과 소조색)가 상응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고 말한다면,109) 이는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크나큰 과실이 있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불타께서 일부에 대해 색이라고 설한 것에 근거로 하여 ‘일체법은 모두 색을 본질로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약 “세존께서는 오로지 대종과 소조(所造)만을 색이라고 설하였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그 밖의 법은 [색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변괴(變壞)하기 때문에 색이라 이름한다’고 하였으니,110) 이때 색이라는 말에서 이미 그 밖의 법은 [색이 아니라고] 부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오로지 변괴의 뜻만으로 결정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111)
만약 “경에서는 손 등에 의해 접촉[觸對]되기 때문에 변괴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오로지 변애(變礙)의 뜻이 바로 색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고 한다면,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결정적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 경에서는 오로지 변괴의 뜻이 색이라고 하였을 뿐,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다고는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 밖의 다른 경 중에서도 역시 무색법도 변애하는 경우가 있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의(意)는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는 법에 의해 변화하고 장애[變礙]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색이 변애의 뜻이라면] 무색법도 역시 마땅히 색이 되어야 할 것이며, 나아가 이와 같은 경에서는 “경계대상을 요별하기 때문에 식(識)이라 이름한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마땅히 모든 색법 역시 식을 본질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니, 일찍이 색은 식을 본질로 한다고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고 말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들에 의하면] 수ㆍ상 등도 마땅히 식을 성취하기 때문이며, 또한 [경에서도 식을 본질로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112)
또한 만약 “어떻게 소연을 갖지 않은 법이면서 경계대상을 요별하는 식이 된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한다면,113)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그대들의 주장대로라면 식은] 스스로 계탁(計度)하기 때문으로, 어떤 경에서 ‘소연을 갖지 않은 법은 능히 경계대상을 요별할 수 없다’고 말하였던 것인가? 또한 어떤 곳에서 ‘색은 소연을 갖지 않는다’고 설하였던 것인가?114)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심과 심소법에만 상응의 뜻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니, 소의(所依)와 소연(所緣)과 행상(行相)과 시(時)와 사(事) 등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모든 계경 중에서 심과 심소가 이와 같은 뜻을 갖는다는 사실은 바로 찾아볼 수 있지만, 대종 등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즉 대종 등은 위치하는 처소나 세력 작용에 각기 차별이 있어 비록 잠시 화합하여 서로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일시 상응하는 것이라고 가설할 수 있을지라도 필경 상응의 뜻을 갖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심과 심소법만이 필경 상응하기 때문에 상응이라고 하는 말은 그 뜻이 잘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하나의 그릇에 물을 끓일 때면 솟구치고 부글부글 끓고 익거나 타고 요동치는 네 가지 작용의 차별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실체로서 서로 뒤섞여[和雜] 있는 4대종이 실유임을 아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다수의 심ㆍ심소법은 전전(展轉)하며 서로를 돕는 것으로, 비록 시(時)ㆍ소의ㆍ소연ㆍ행상ㆍ사(事)가 동일하여 서로 유사할지라도 그 세력 작용에 각기 차별이 있어 결코 잡란(雜亂)되는 일은 없기 때문에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함을 아는 것이다.”115)
이와 같은 논지는 여러 부파의 상식적인 사실[極成]로서, 그들은 모두 다같이 오로지 마음만이 존재한다는 논의를 비판하였다. 그러므로 심과 심소가 각기 별도로 존재한다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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