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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등론석 제10권
17. 관업품(觀業品)
지금 이 품도 공(空)과 대치(對治)되는 것을 부정하여 업(業)과 결과[果]에 자체(自體)의 뜻이 없음을 이해시키려는 까닭으로 지은 것이다.
아비담(阿毘曇) 사람이 말하였다.
“그것은 앞의 품에서 모든 행(行)의 유전(流轉)과 중생과 사람 등이 모두 유전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그리하여 증험으로 주장을 세워 ‘모든 행(行)이 가령 상주(常住)하거나 무상(無常)하다면, 이는 단멸(斷滅)과 상주의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 그보다 앞서 이러한 말을 하여야 하므로 나는 여기서 ‘상주와 무상에는 이와 같은 오류가 없으므로 모든 행에 유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중생들에게 ‘제일의제 중에 이와 같은 여러 내입(內入)이 반드시 존재하고, 모든 행의생사와 업의 결과가 화합한다’고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만약 내입이 없다면 모든 행과 업의 결과가 화합하는 것을 볼 수 없다. 비유하면 석녀의 아이와 같다. 지금 모든 행과 업의 결과가 화합하기 때문에 생사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업의 결과를 이제 관찰하겠다. 이 뜻은 아비담 중에 자세히 설해지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아비담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스스로 몸과 말을 지키는 사(思)와
사로 다른 것을 섭수하는 것은
자비의 법을 종자로 삼아
현재와 미래의 결과를 얻을 수 있네.
[釋] 사(思)란 이른바 스스로 조복하여 비법(非法)을 멀리하고 이 마음과 상응하는 사(思)이므로 사라 이름한다. ‘다른 것을 섭수한다’는 말은 이른바 보시와 사랑스런 말로 두려워하는 자를 구호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로써 다른 사람을 섭수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섭수한다고 이름한다. 자(慈)란 이른바 마음이다. 마음은 곧 법을 말한다. 또한 이는 종자(種子)이다. 종자란 곧 원인을 말한다. 무엇의 원인이 되는가? 이른바 결과의 원인이다.
이는 무엇의 결과인가? 이른바 현재와 미래의 결과이다.
어떻게 마음을 이름하여 종자라고 하는가?
이른바 몸과 말의 업을 능히 일으키기 때문에 종자라고 한다.
무엇을 비법(非法)이라 이름하는가?
법과 상반되기 때문에 비법이라 이름한다. 비법이란 악(惡)과 불선(不善) 등을 말한다.
무엇을 무기(無記)라고 하는가?
이른바 법도, 비법도 아닌 것을 무기라 이름한다.
무기에는 네 종류의 업(業)이 있다.
첫째는 보생(報生)이고, 둘째는 위의(威儀)이며, 셋째는 공교(工巧)이고, 넷째는 변화(變化)이다.
또한 무기란 선과 불선이라 적을 수 없으므로 무기라 이름한다.
또한 무기란 선과 불선의 결과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또한 무기라고 한다.
이와 같은 차별이 있다. 『구사론(俱舍論)』 중에도 또한 두 종류가 있다. 그 뜻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대선(大仙)이 말한 업(業)은
사(思) 및 사에서 일어난 것이네
두 업에 대해
무량한 차별을 설하셨네.
[釋] 무엇을 대선(大仙)이라 하는가?
성문(聲聞)ㆍ벽지불(辟支佛)ㆍ여러 보살 등도 선(仙)이라 이름한다. 부처님께서는 그 가운데 가장 존귀한 분이기 때문에 대선이라 한다. 일체 모든 바라밀ㆍ공덕ㆍ선근(善根)의 피안에 도달하였으므로 이름하여 대선이라 한 것이다. 다시 앞의 게송에 열거한 명칭에 대하여 지금 별도로 해석하겠다. 그 뜻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思)는
오로지 의업(意業)만을 말할 뿐이며
사에서 일어나는 것은
몸과 입의 업(業)이네.
[釋] 어째서 사(思)만을 의업(意業)이라 하는가?
말하자면 사가 의(意)와 상응하는 것을 의업이라 이름한다. 의문(意門)에서 사는 궁극적으로 성립하기에 의업이라 하며, 몸과 말의 업은 아니라고 한다.
무엇이 사(思)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이른바 아는 것과 이미 안 것, 이미 작용한 것과 작용하는 것을 이름하여 ‘사에서 일어난 업’이라 한다. 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른바 몸과 말이다. 만약 신문(身門)에서 궁극적으로 성립하고, 구문(口門)에서 궁극적으로 성립한다면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라 이름한다. 두 업을 말하는 것을 마쳤다.
다시 무량한 종(種)의 차별을 설하겠다.
무엇을 무량한 종의 차별이라 하는가?
따라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신업과 구업
작용하는 색[作]과 작용하지 않는 색[無作]네 가지이네
어기(語起)와 원리(遠離) 등에
다 선(善)과 불선(不善)이 존재하네.
[釋] 어기란 이른바 문자, 또는 요별하여 말하는 것을 어기라고 한다.
무엇을 원리(遠離)라고 하는가?
이른바 몸과 손 등을 운동하는 것이다. 운동이란 생각을 일으켜 내가 이 선업(善業)을 지어야겠다고 하는 것이다. 처음 선업의 사(思)를 받는 순간부터 후에 선업의 사가 일어나는 순간까지 사람이 선업을 짓거나 업을 짓지 않는다면 원리무작(遠離無作)의 색체(色體)가 항상 발생한다. ‘멀리 여의지 않는 것[不遠離]’이란 또한 다음과 같이 ‘나는 이 불선업(不善業)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여 말하는 것이다. 가령 몸이나 말이나 생각에 불선업의 첫 찰나에서 생기한 사람이, 만약 불선(不善)의 원인에서 악업(惡業)을 짓거나 짓지 않아도 ‘불원리(不遠離)라는 무작(無作)의 색체(色體)’가 항시 발생한다.
무엇을 ‘작용하는 색[作色]’과 ‘작용하지 않는 색[無作色]’이라 하는가?
몸과 입의 색으로써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는 것을 ‘작용하는 색’이라 이름한다. 몸과 말의 색으로써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지 못하는 것을 ‘작용하지 않는 색’이라 한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수용자체(受用自體)의 복(福)과
죄(罪)가 발생하는 것도 이와 같네.
또한 사(思)를 일곱 업(業)으로 삼아
능히 모든 업의 상(相)을 요별하네.
[釋] 무엇이 수용 자체인가?
이른바 보시행(布施行)을 하는 사람[檀越]이 희사한 집ㆍ숲ㆍ의복ㆍ음식ㆍ침구ㆍ탕약ㆍ장신구 등이다.
무엇을 복(福)이라 하는가?
이른바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뜻을 말한다. 모든 중생이 번뇌의 강에 빠진 것을 보고 대비(大悲)의 마음을 일으켜 중생을 건져내 열반의 언덕에 안치 시키므로 복이라 한다. ‘복이 아닌 것’은 여러 가지 불선(不善)의 일을 지어 중생들에게 모든 악도(惡道)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무엇이 또한 수용 자체인가?
이른바 복과 위배되기 때문에 ‘복이 아닌 것’이라 이름한다. 복과 ‘복이 아닌 것’을 이미 해설하였다. 다시 사(思)의 뜻을 해설하겠다.
무슨 법 때문에 사라 이름하는가?
공덕(功德)과 과악(過惡), 공덕 아닌 것과 과오(過誤)에 심소(心所)의 작용을 일으키는 업을 사라 한다. 저 논에서는 이와 같이 일곱 가지 업을 설하여 업상(業相)으로 삼는다. 내지 좌선, 경을 독송하는 것, 청문(聽問)하는 것, 기념(記念)하는 것 등도 업이며, 모두 일곱 가지 업 중에 속한다. 그래서 달리 말하지 않겠다. 이러한 업이 있기 때문에 업과 결과가 화합함을 본다. ‘결과와 화합한다’란 오취(五趣) 중에 오음(五陰)이 있어 상(相)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품의 첫머리에 업의 결과와 화합한다고 이유를 든 것은 제일의제 중에 생사가 존재한다는 뜻을 성립시킨다. 계박이 존재하고 해탈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사의 실체가 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제 이러한 업(業)은 일단 생기하고 결과를 이미 받고 난 후에 항상 머무는 것인가? 한 찰나 생기하고 나서 곧 사멸하는 것인가? 이 모두 옳지 못하다. 그 오류에 대하여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머물러 결과를 받은데 도달하면
이 업은 곧 상주(常住)가 되네.
업이 만약 소멸하여 없어진다면
이미 사멸하였는데 무엇이 결과를 발생시키겠는가.
[釋] 만약 업의 자체가 생기하여 간단없이 괴멸하지 않다가나중에 바야흐로 괴멸한다면 옳지 않다. 상주(常住)의 오류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비담 사람이 말하였다.
“마치 파초와 대나무와 갈대 등처럼 나중에 결과와 함께 곧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이 까닭으로 오류가 없다.”
청변논사가 말하였다.
“대나무와 갈대 등은 매 찰나마다 허물어지고 머무는 것이 없고, 나중에 서로 비슷하게 상속(相續)하여 단멸(斷滅)한다면 세제 중에 허물어진다고 말할 뿐이다. 만약 제일의제 중에 ‘업(業)이 마치 대나무와 갈대 따위처럼 상속하여 결과를 받는데 도달한다’고 말하면 옳지 않다. 만약 ‘업법(業法)의 자체가 있어 선ㆍ후ㆍ동시에 허물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면 사람들에게 그대가 오류가 없음을 이해시키기는 어렵다.”
아비담 사람이 말하였다.
“처음에 아직 ‘괴멸의 원인[壞因]’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허물어지지 않다가 나중에 괴멸의 원인이 생겨 곧 괴멸한다면 무슨 오류가 있는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그대가 ‘괴멸의 원인’을 세울 경우, 그러면 그 사물은 괴멸의 원인이 아니다. 이 사물과 다르기 때문이며, 원인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그 밖의 사물과 같다. 마치 『아함경(阿含經)』중에 ‘몸 및 여러 근(根) 등이 한 찰나에 이미 일어나서 머물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대의 주장은 경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이 오류를 피하려고 이미 일어나 사이 없이 곧 괴멸을 받는다고 말하면 이 또한 오류이다. 업이 만약 소멸한다면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대의 의도가 없이 바로 소멸하는 순간 결과와 함께 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소멸하는 순간 반만 소멸하고 반이 아직 소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와 함께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앞에서 대답한 오류와 같다. 만약 그대가 소멸하여 이미 결과와 함께 있는 경우와 소멸하지 않고, 결과와 함께 있는 경우를 말할 수 없다고 하면, 이를 불가설업(不可說業)이라 한다. 만약 불가설업이 제일의제 중에 결과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옳지 못하다. 말 할 수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욕계에 태어나는 순간과 같다. 그대가 보는 것은 견고하지 못하다. 제시한 이유가 성립하지 않고 또한 그대의 주장과도 위배된다.”
아비담 사람이 말하였다.
“상속(相續)이 있기 때문에 나의 주장은 위배되지 않는다. 어떻게 아는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마치 싹 따위의 상속처럼
종자에서 발생하네
이로 인하여 결과가 발생하며
종자를 떠나 상속은 없네.
[釋] 여기에서는 이른바 싹에서 줄기가 발생하고, 가지ㆍ잎사귀ㆍ꽃ㆍ열매 등까지의 그 모습이 있다. 종자가 비록 소멸해도 상속을 일으켜 전전하여 결과에 도달한다. 만약 종자를 여읜다면 싹 등의 상속에는 유전(流轉)이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 뜻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종자에 상속이 있고
상속하여 결과가 있네.
먼저 종자가 있고 나중에 결과가 있으니
단절도 없고 또한 상주도 없네.
[釋] 어째서 단절이 아닌가? 이른바 종자에 상속이 있어 머물기 때문이다. 어째서 상주(常住)가 아닌가? 이른바 싹이 생기면 이미 종자가 괴멸하기 때문이다. 내법(內法)도 또한 그러하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이와 같이 처음의 마음[初心]에서
심법(心法)이 상속하여 일어나네
이로부터 결과가 일어나니
마음을 떠나 상속은 없네.
[釋] 여기에서는 자애로운 마음과 자애롭지 못한 마음을 이름하여 업(業)이라 함을 말한다. 그러한 마음은 비록 소멸해도 상속이 일어난다. 이렇게 상속하여 결과가 일어나는 것은 애(愛)와 비애(悲愛)를 말한다. 수(受)와 상(想)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을 떠난다면 결과는 곧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상속법(相續法)을 말하겠다. 그 뜻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마음에서 상속이 있고
상속하여 결과가 있네.
그러므로 업은 결과보다 먼저 있어
단멸도 없고 또한 상주도 없네.
[釋] 어째서 단멸하지 않는가? 이른바 상속하여 결과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째서 상주하지 않는가? 두 번째 찰나에 도달할 때까지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이와 같이 업과(業果)가 있어 중생, 명자(名字), 모든 행(行)과 화합한다. 모든 존재의 수승한 과보[果]를 얻도록 여래께서는 중생에게 과보를 얻는 방편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여래께서는 ‘좋은 과보[樂果]’를 얻을 수 있는 방편을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장식과 같다. 지금 방편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 뜻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법을 구하는 방편은
이른바 십백업도(十白業道)이네
수승한 욕락(欲樂) 다섯 가지를
현재와 미래세(未來世)에서 얻네.
[釋] 법이란 과보의 법이다. 방편이란 과보의 법을 얻는 원인이다. 원인이란 이른바 백업(白業)이다. 과보란 현재와 미래에 다섯 욕락(欲樂)을 얻는 것이다. 어떤 과보를 얻는가? 말하자면 보과(報果)와 의과(依果)를 얻는다. 백(白)이란 아주 깨끗한 것이다. 복덕을 성취할 수 있는 인연(因緣)은 십백업도(十白業道)에서 발생한다.
그 열 가지는 이른바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이간질을 시키지 말라, 욕을 하지 말라, 무익한 말을 하지 말라, 질투하지 말라, 성내지 말라, 삿된 견해를 내지 말라 등을 말한다. 십백업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십선업도(十善業道)라고 하기도 하는데 모두 몸ㆍ말ㆍ생각의 삼업(三業)에서 발생한다.
무엇이 수승한 과보인가?
이른바 인천(人天)의 취(趣)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천이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사람이 마음을 잘 낮추어[降伏]
중생에게 이익되게 하면
이를 이름하여 자선(慈善)이라 하니
이세(二世)의 과보를 얻네.
[釋] 이러한 까닭으로 부처님께서는 이 과(果)를 얻을 수 있는 방편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말한 대로 그 뜻이 성립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업과(業果)에 상속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경우, 종자를 비유로 드는 것은 큰 오류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이러한 분별을 짓는 자는
크게 또는 많은 오류를 얻네.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은 것은
주장에 있어서는 옳지 않네.
[釋] 어째서 옳지 않은가? 여기에서는 이른바 그대가 오로지 분별하는 것처럼 ‘종자에 상속한 상사(相似)하는 법이 실체로서 있다’고 한다면 옳지 않다. 왜냐하면 종자에는 형태가 있고 색깔이 있으며 상대[對]가 있기 때문이다. 볼 수 있는 것에는 상속(相續)이 존재한다. 지금 사유해 보면 도리어 이 사실을 얻을 수 없다. 어찌 하물며 마음과 업이 형태도 없고 색깔도 없고 상대도 없으며 볼 수 없고 찰나찰나 생멸하여 머물지 않는 것이랴. 증험을 한다 해도 이 증험은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종자에서 싹이 된다면 이미 소멸하고 상속하여 싹이 되는가? 소멸하지 않고 상속하여 싹이 되는가? 가령 소멸하여 싹이 된다면 싹은 곧 무인(無因)이다. 만약 소멸하지 않고 싹이 된다면 첫 종자에서 항상 싹이 발생해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한 종자 속에 일체 무리의 싹이 발생해야 한다. 이 사실은 옳지 않다. 큰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정량부(正量部) 사람이 아비담 사람에게 말하였다.
“마치 그대가 말한 것처럼 ‘사람의 상속에 능히 천(天) 등의 상속을 일으키는 업(業)이 있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종성(種性)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임바(荏婆)의 종자에서 암라(菴羅)의 열매 등이 발생하지 않는 것과 같다. 가령 착한 마음에서 차례로 능히 선과 불선의 마음이 일어나고, 불선의 마음에서 차례로 능히 무기의 마음이 일어난다고 기록하면 그 주장 모두 옳지 않다. 더 나아가 욕계(欲界)의 계박된 마음에서 차례로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계박된 마음이 일어나고 또한 무루(無漏)의 마음이 일어나고, 무루의 마음에서 다시 전전하여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계박된 마음이 일어난다면 또한 위의 싹이 생기(生起)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 다 옳지 않다.
앞에서 세운 증험 중에 이미 총괄적으로 다 논파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선을 짓는 자’가 있다는 것도 옳지 않다. 이제 업과 과보에 따라 바른 분별의 뜻을 장차 말하겠다. 이는 무엇을 분별하는가? 마치 앞에서 분별한 대로 ‘종자에서 상속하여 상사(相似)하다’는 말은 내가 말한 대로 그 오류가 없기 때문에 오류의 때에 물들 수 없다. 무엇을 말하는가? 이른바 바른 분별의 뜻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누가 말하는 것인가? 『아함경』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 연각
성문 등의 말씀으로써
일체 모든 성중(聖衆)이
함께 분별한 것이네.
무엇을 분별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불실법(不失法)은 어음증서와 같고
업은 빚과 같으니,
그러므로 무기성(無記性)이며
계(界)에 의거해 보면 네 가지 종류이네.
[釋] 여기에서는 불실법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채권자에게 어음증서가 있으면 돈을 꾸어주고 (어음증서를) 잃어버리지만 않으면 나중에 자식이 본래대로 다 돈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업도 이와 같아 후에 과보를 얻을 수 있다. 없이 비록 허물어지더라도 불실법이 있음으로 인해 능히 행인(行人)에게 뛰어난 과보를 얻게 할 수 있다. 또한 채권자가 이미 재물을 받았으면 채무자가 이전의 어음증서를 없애는 것과 같다. 이와 같고 이와 같아서 불실법은 능히 업을 조성하는 자에게 결과를 주고 그 실체는 허물어진다.
불실법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계(界)에 의거해 볼 경우 네 가지가 있다. 어떻게 네 가지가 되는가? 이른바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와 무루계(無漏界)이다. 불실법은 무슨 성(性)인가? 이는 무루무기성(無漏無記性)이다. 무루는 또한 불은몰(不隱沒)이라 이름한다. 무기(無記)에 대해 여기에서는 선과 불선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무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불실법은 무슨 도(道)가 끊어진 것인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견도(見道)에서 끊기는 것이 아니라
수도(修道)에서 끊기는 것이네
이 불실법(不失法)으로써
모든 업에 과보(果報)가 있네.
[釋] 이는 견도(見道)에서는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끊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어느 시기에 끊기는가? 이른바 수도(修道)의 과위(果位)에 들어간 순간에 끊어진다. 다시 고(苦)를 보면 불선업(不善業)이 비록 끊기나 이러한 불실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를 볼 때 끊기지 않는 것이 곧 불실법이다. 능히 결과를 주기 때문에 마치 외도가 목건련(目犍連)을 욕보이고, 이바다(離波多)비구가 범마달(梵摩達)왕에게 12년 감옥살이를 한 것처럼, 목건련 등이 비록 성과(聖果)를 수호하나 불실법이 존재하는 까닭에 숙성한 불선업(不善業)의 과보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견도(見道)에서 끊기는 것이
저 업(業)도 마찬가지라면
곧 없이 허물어지는 등의
이와 같은 오류를 얻네.
[釋] 이 불실법이 만약 견도에서 끊기거나 혹은 공통된 업이 모두 후세에 도달한다면 이는 곧 오류이다. 무슨 오류인가? 만약 불실법이 똑같이 견도에서 끊기고 수면번뇌법(隨眠煩惱法)도 다 끊긴다면, 곧 업의 결과는 허물어진다. 무슨 결과가 허물어지는가? 견도에서 끊어지는 불선업의 결과가 허물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수도(修道)에서 만약 끊긴다면, 성인도 범부의 업을 마땅히 구족해야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업(業)이 견도에서 끊기는 것처럼, 불실법은 수도(修道)에 들어가 나중 과위(果位)로 향하는 순간 끊긴다’고 말한다. 저 불실법이 욕계를 건너 색계로 향하는 순간 색계를 건너고, 무색계로 향하는 순간 끊기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일체 모든 행의 업이
서로 비슷하든, 비슷하지 않든
현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순간
한 업에서 한 법이 생기하네.
[釋] ‘서로 비슷하다’는 말은 동류(同類)의 업을 말한다. 현재의 생명이 끊길 때까지는 하나의 불실법만이 생기하지만 총괄적으로 모든 업을 지닌다. ‘서로 비슷하지 않다’란 업의 다양한 차별을 말한다. 마치 욕계업(欲界業)과 색계업(色界業)과 무색계업(無色界業)과 같이 무량의 종(種)이 있다. 다시 어떤 종류의 업이 있어 불실법을 지니게 되는가? 따라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이와 같이 두 업은
현재의 과보를 받네.
또한 과보를 이미 받고도
그 업이 오히려 본래대로 존재한다고 말하네.
[釋] ‘두 업’이란 사(思)와 사로부터 발생한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업이 과보를 받고도 없이 오히려 존재하는 것을 생각생각마다 소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앞에서 무량한 종류의 차별을 말하는 것을 또한 낱낱의 업마다 한 불실법이 있어 생기를 지니기 때문이다. 어째서 불실법은 결과를 주고도 오히려 존재하면서, 다시 번번이 결과를 주지 않는가? 말하자면 이미 결과를 주었기 때문이다. 마치 이미 지불한 어음증서는 이미 재물의 지급을 마쳐 어음증서가 있어도 다시 재물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불실법 또한 이와 같다. 이미 결과를 주었기 때문에 다시 거듭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이 불실법은 어느 시기에 소멸하는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과(果)를 건너 생명이 끝나는
이러한 시기에 이르러야 소멸하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등의
차별을 마땅히 알아야 하네.
[釋] 이른바 수도(修道)의 시기에 끊기는 것은 전생의 생명이 끊기는 시기와 같음을 말한다. 서로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않은 업 모두 한 불실법(不失法)만을 지닌다. 마치 수다원(須陀洹) 등은 과(果)를 건너 이미 소멸하였고, 아라한(阿羅漢) 및 범부인(凡夫人)은 죽어서 이미 소멸한 것과 같다. 이 불실법에도 또한 차별이 있다. 무슨 차별인가? 유루업(有漏業)과 무루업(無漏業)의 차별에 의하기 때문에불실법에도 또한 유루와 무루가 있다. 그것은 이와 같아서 불실법도 또한 여러 업에서 일어나 중생에게 방토(方土), 취(趣)ㆍ색(色)ㆍ형(形)ㆍ신(信)ㆍ계(戒) 등을 받도록 차별의 과(果)에 결과를 주고 난 후에 소멸한다. 이러한 까닭이니 그 뜻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공(空)하여 단멸(斷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존재[有]하여 상주하지도 않네
모든 업(業)의 불실법(不失法)
이 법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네.
[釋] 공이란 무엇이 공한 것인가?
이른바 모든 행(行)이 공하다는 것이다. 마치 외도가 분별한 것처럼 자성(自性)이 있는 법은 없다. 그리고 업에 단멸이 없는 것은 불실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존재라 하는가?
존재[有]란 생사를 말한다. 생사란 이른바 모든 행(行)이 갖가지 취(趣)에서 유전하기 때문에 생사라 이름한다.
어째서 상주(常住)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업에 허물어짐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불실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부처님께서 여러 경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분별하는 것도 마땅히 그런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마치 내가 앞에서 ‘업의 결과와 화합한다’고 이유를 든 것과 같은 것은 뜻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말한 것은 모두 옳지 않다. 지금 그대를 위하여 바른 업의 인연을 말하겠다. 그 뜻은 무엇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업은 본래 발생하지 않으니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이네
업은 본래 소멸하지 않으니
그것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네.
[釋] 나의 주장 명제[宗]중에서 업의 발생은 없다. 이와 같이 종자의 상속은 제일의제 중에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대가 세운 비유는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비유가 빠진 오류가 있다. 모든 업은 어째서 발생하지 않는가?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
지금 또한 정량부(正量部) 사람이 “종자에 상속이 있다면 오류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대답하겠다. 그대가 “업의 결과와 화합하여 단멸과 상주의 오류가 없다”고 말한다면, 어째서 오류가 없다는 것인가? 이른바 불실법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궁극적으로 없다는 것을 추구하므로 위 게송의 ‘업은 본래 발생하지 않으니’란 말처럼, 이 불실법은 제일의제에서도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가령 업에 발생이 있다면 업 때문에 불실법이 존재할 것이나 업에 이미 실체가 없으므로 불실법도 또한 실체가 없다. 이유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의 뜻은 주장 명제와 위배된다.
무엇이 위배된단 말인가?
이른바 업이 결과와 화합한다는 말은 뒤집어 보면 세제(世諦)를 성립시키고 중생들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앞에서 “아비담 사람은 종자상속(種子相續)의 오류가 있다”고 말했듯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저 아비담 사람이 앞서 ‘종자상속의 비유’를 든 것은 무슨 의도인가? 이제 그대를 위하여 말하겠다. 아비담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이른바 종자에서 상속하고 전전하여 인과에 따라 일어나고 허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자에서 상속하여 ‘단멸하지 않고 상주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써 비유를 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대가 앞에서 ‘종성(種性)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라고 든 이유로서는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심(心)과 심수법(心數法)의 상속이 존재하여 생기(生起)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대가 제시한 이유는 부정인[非一向]이어서 다른 오류가 있다. 어째서 부정인인가? 지금 다른 상속이 존재하여 능히 다른 결과를 일으킴을 현견(現見) 할 수 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마치 소털에서 왕골이 발생하고 뿔에서 설라(設蘿)가 발생하는 것과 같다.
정량부(正量部) 사람이 말하였다.
“『아함경』 중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불실법이 존재한다’라고 하셨다. 이 법 때문에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는 모든 실체[體]가 성립할 수 있다. 저 ‘업은 생기하지 않고 불실법도 역시 생기하지 않는다’라고 이유를 들면서 ‘나의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이 말은 옳지 않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만약 생기가 없다면 불실법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 뜻을 그대가 수용한다면 내가 하려는 주장을 성립시킨다. 그러나 그대의 주장 중에 이 법을 용인하지 않기 때문에 설령 그대가 자신의 주장을 ‘생기도 없고 괴멸도 없다’고 말해도 그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시 그대가 모든 법에는 자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해도 반드시 업에는 자체가 없음을 용인해야 한다. 만약 모든 법에 자체가 있다고 말하면 곧 오류이다. 그 오류는 무엇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업에 만약 자체(自體)가 있다면
이는 곧 상주(常住)라 이름하네
그러므로 업에는 작용이 없으니
상주의 법에는 작용이 없기 때문이네.
[釋] 여기에서 이른바 자체가 있다면 상주임을 말한다. 만약 상주라면 업을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상주법은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고, 또한 변괴(變壞)의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만약 업에 곧 작용이 없다면 무슨 오류가 있는가? 그 오류에 대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업에 작용이 없다면
작용이 없으므로 스스로 생겨야 하네.
범행(梵行)이 아닌 죄에 머물러도
지금 열반을 얻어야 하네.
[釋] 범(梵)이란 열반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열반의 행을 행하면 범행(梵行)이라 이름한다. 이 행에 머무는 것을 ‘범행에 머문다’고 말한다. 이와 상반되는 것을 ‘범행에 머물지 않다’고 이름한다.
무엇을 범행에 머문다고 말하는가?
이른바 선업(善業)을 지어 열반을 얻는 것을 범행에 머문다고 이름한다.
무엇을 ‘범행이 아닌 것에 머문다’고 하는가?
말하자면 선업(善業)을 짓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범행이 아닌 것에 머문다고 한다. 만약 이 업을 짓지 않고 스스로 열반을 얻는다면 일체 범행이 아닌 것을 행하는 사람도 다 마땅히 열반을 얻어야 한다. 유독 범행을 행하는 자만이 열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허물이 있다. 그러나 세제(世諦)에서 병을 만들고명주 등을 만드는 것도 이러한 오류가 있다. 그 오류에 대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일체 세속에 있는
언어법(言語法)을 타파하네
선을 짓는 것과 악을 짓는 것에도
또한 차별이 있지 않네.
[釋] 이는 이른바 세간에서 ‘저 사람은 죄를 짓는 중생, 이 사람은 복을 짓는 중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대가 ‘죄와 복을 짓지 않아도 자연히 얻어진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오류는 무엇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업에 머무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불실(不失)이라고 말한다면
결과를 주고도
지금 다시 결과를 주어야 하네.
[釋] ‘머문다’란 무엇인가?
이른바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결과를 준다’란 업에 머무는 것이 있음으로 인해 ‘업을 짓는 자’에게 결과를 주어도 어음증서가 있으면 빚을 갚았어도 다시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과 같이, 업도 이와 같이 실체가 존재하여 다시 결과를 줄 수 있다.
아비담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이와 같이 모든 업이 존재한다. 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니, 이러한 업이 없다면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비유하면 거북이 털로 만든 옷과 같다. 지금 업의 원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번뇌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대가 말한 이유대로 제일의제 중에 반드시 업이 존재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말은 옳지 못하다. 마치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번뇌가 만약 업의 성(性)이 된다면
그것은 곧 무자체(無自體)이네
만약 번뇌가 실체가 아니면
어떻게 업이 곧 실체일 수 있는가?
[釋] 성(性)은 원인을 말한다. 이는 번뇌가 업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비유하면 진흙이 병의 실체가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번뇌는 업의 실체[原因]가 되는데 어째서 실체가 아닌가? 말하자면 번뇌에 자체(自體)가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자체가 없는가? 이른바 앞에서 관찰한 대로 이미 생기의 법을 부정하고, 또한 모든 실체에 자체가 있음을 부정한다. 이는 이른바 번뇌가 업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유가 성립하고, 또한 그대의 주장과도 위배된다.
무엇이 위배되는가?
이른바 세제 중에 번뇌를 업의 원인으로 삼아도 제일의제에서는 아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위배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앞에서 번뇌품(煩惱品)에 관해 게송으로 ‘전도가 생기하는 것의 연(緣)이 되네. 그것에는 이미 자체가 없으므로 번뇌는 실체가 아니네’라고 말한 것처럼, 앞에서 이미 자세히 부정했기 때문이다.
아비담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이와 같이 번뇌가 있다. 결과가 있기 때문에 번뇌가 있으니 번뇌가 없다면 결과를 받지 못한다. 비유하면 귀머거리의 이근(耳根)의 결과와 이식(耳識)과 같이, 지금 이 번뇌의 결과가 있다.
무엇을 결과라 하는가?
결과란 이른바 업이다. 이와 같이 제일의제 중에 번뇌가 있기 때문에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또한 주장과도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내가 하려는 주장과 같은 것이라면 성립될 수 있다. 다시 업(業)이 있다. 결과가 있으므로 없는 것이 아니다. 마치허공의 꽃과 같다. 업의 결과인 몸이 있기 때문이니, 업 없이 결과가 있지 않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장차 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 주장은 잘못이다. 그대는 바르게 사유한 것이 아니며, 삿된 견해로 혼돈한 것이며, 허망한 분별로서 그 말을 했을 뿐이다. 그 오류에 대하여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업 및 번뇌가
모든 몸의 원인이 된다고 하네
업과 번뇌가 스스로 공한데
몸이 어디에 있겠는가.
[釋] 어느 입장에서 말하는가? 이른바 여러 논에서 모든 현성(賢聖)들은 세제(世諦)에 의거해 말하였다. 제일의제에서 관찰한다면 이 모두 옳지 않다. 나의 주장처럼 이미 방편을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법의 상ㆍ중ㆍ하와 귀한 것, 천한 것과 잘생긴 것, 못생긴 것 등의 여러 과보(果報)에는 자체가 있지 않음을 말한다. 마치 업과 번뇌에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몸 또한 자체가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번뇌는 업의 원인이며 업은 몸의 원인이다’고 말하면 이 모두 옳지 않다. 말한 바의 오류가 지금 그대에게 다시 있어 세운 비유가 모조리 성립하지 못한다.
다시 아비담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에 이와 같이 업이 존재하는 것은 ‘과보를 받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그 받는 자는 없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장식과 같다. 지금 업이 있기 때문에 과보를 받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하면 그 뜻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무명(無明)으로 인해 덮이고
애결(愛結) 때문에 계박되어도
본래 작용하는 자에게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네.
[釋] 명(明)과 대치되는 것을 무명이라 이름한다. ‘덮이고[覆]’란 이른바 지혜의 눈을 덮어 장애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이름하여 중생이라 하는가?
무엇 때문에 중생이라 하는가 하면 유정(有情)은 자주 태어나기 때문이다.
무엇을 애(愛)라고 하는가?
애란 이른바 탐착(貪著)을 말한다. 탐착[著]이란 곧 계박하는 것이다.
무엇을 계박하는가?
이른바 중생을 계박하는 것이다.
무엇을 계박이라 하는가?
이른바 욕심 등과 상응(相應)하기 때문이다.
마치 『무시경(無始經)』에서 ‘중생은 무명(無明)으로 인해 덮이고, 애결(愛結) 때문에 계박되어 시작도 없는 생사(生死) 중에 왕래하여 여러 고락(苦樂)을 받는다. 이와 같이 모든 중생들은 스스로 악(惡)과 불선업(不善業)을 만들고 다시 불선(不善)의 과보를 스스로 받는다’고 말한 것처럼, 이렇게 ‘업과(業果)를 받는 자’는 곧 내가(주장)하는 ‘작업을 짓는 자[作者]’를 얻지만 ‘작업을 짓는 자’와 같다거나 다르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일의제에 ‘결과를 받는 자’가 있고 저 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말한 주장은 다 옳지 않다. 이 논의 처음부터 모든 법을 다 이미 관찰하였는데, 연(緣)에서 발생하는 결과는 없고 또한 연에서 일어나지 않는 결과도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 뜻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업은 연에서 발생하지 않고
연이 아닌 것[非緣]으로부터도 발생하지 않네
업에는 자체가 없기 때문에
또한 업을 발생시키는 것도 없네.
[釋] 여기에서는 이른바 업 등이 생기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업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업이고, 둘째는 과보이며, 셋째는 과보를 받는 것이다.
지금 추구해 보면, 업에서 생기(牲器)가 없으므로 ‘작업을 짓는 자[作者]’에도 또한 생기가 없다. 작업 및 ‘작업을 짓는 자’는 앞에서 이미 부정한 것처럼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말한 대로 업이 없고 또한 ‘작업을 짓는 자’도 없다는 것은 방편으로서 그 뜻이 무엇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업도 없고 작업을 짓는 자[作者]도 없다면
어떻게 업에서 결과가 발생하겠는가?
이미 결과가 없다면
어떻게 결과를 받는 것이 있는가?
[釋] 이러한 까닭으로 그대가 ‘제일의제 중에 업이 있고 과보를 받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하면 그 주장은 성립하지 않고 또한 그대의 주장과도 위배된다. 어째서 위배되는가? 이른바 뒤집어 보면 세제(世諦)에서는 중생을 이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비담 사람이 말하였다.
“업도 없고 결과도 없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이는 사견의 오류로서 능히 지혜의 눈을 장애한다. 그것을 ‘『중론』은 진실한 견해’라고 말하면 옳지 않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은 잘못이다. 그 뜻은 무엇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마치 부처님께서 신통력(神通力)으로써
화불(化佛)의 몸을 현작(現作)하고
순식간에
화신(化身)을 다시 변화시키는 것처럼
첫 화신불(化身佛)을
작업을 짓는 자[作者]라 하고
화신불이 만드는 것을
곧 업이라 하네.
[釋] 여기에서는 ‘작업을 짓는 자’는 화신(化身)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한다. 전전하여 연(緣)에서 일어나니, 아체(我體)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만들어진 업은 또한 허깨비와 같이 자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화불(化佛)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몸과 입의 업 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비록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아도눈으로 볼 수 있다.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번뇌란 이름하여 삼독(三毒)ㆍ구결(九結)ㆍ십전(十纏)ㆍ구십팔사(九十八使) 등이며, 능히 몸과 입과 생각의 업을 일으킨다. 지금의 세상과 다음 세상의 선(善)과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인 고보(苦報)와 낙보(樂報)와 불고불락보(不苦不樂報)를 각각 분별하고, 또한 현보(現報)와 생보(生報)와 후보(後報) 등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모든 업은 낱낱이 다 공하다. 설사 만들어지는 것이 있다 해도 또한 자체가 없다. 그 뜻은 무엇인가? 마치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업과 번뇌도 그러하니
작업을 짓는 자와 과보는
마치 건달바성(乾闥婆城)과 같고
환(幻)과 같고 또한 불꽃과 같네.
[釋] 여기에서는 업 등은 인연에서 화합(和合)하여 발생하는 것을 말하는데, 마치 환화(幻化)와 같이 실체가 없어 단지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세제(世諦) 중에 있어도 제일의제 중에는 없다. 다시 선취(善趣) 및 ‘열반을 얻으려 하는 자’는 또한 세제에서 말해지는 것이다. 마치 그대가 ‘내가 업의 과보를 부정한다면 사견(邪見)의 오류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오류도 실체가 없다.
아비담 사람이 말하였다.
“비록 세제 중에 일체법(一切法)이 있다고 해도 제일의제에는 비방하여 일체법이 없다고 한다면 거듭 오류를 면할 수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경의 게송에서 ‘실체가 이미 성립하지 못했다면 비존재도 또한 성립하지 않네’라고 말하고, 또 게송에서 ‘존재한다면 이는 상견(常見)이며, 비존재이면 단견(斷見)이네. 이 까닭으로 존재와 비존재에 지혜 있는 사람은 의지해서는 안 되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대가 업에 결과가 없다고 부정해도 우리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대가 앞에서 ‘내가 오류를 면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나 나에게는 오류가 없다.
다시 그대가 ‘제일의제 중에 모든 실체에서 자체(自體)가 없고, 업과 결과, 업과(業果)의 화합, 업을 짓는 자와 업을 받는 자는 다 공하여 실체[體]가 없다’는 것을 듣고서‘허망되게 범행(梵行)에 머무나 공하여 얻은 것이 없다’고 말하면 이는 우둔하고 어리석은 마음이다. 우치(愚痴)의 장애를 개발하기 위하여 업 등의 존재로써 중생들을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무엇을 이해시키는 것인가? 이른바 ‘마치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써 화불(化佛)의 몸 등을 현작(現作)하는 것처럼’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 품의 첫머리에서 외도가 말한 오류를 지적하고, 업의 결과에는 자체가 없음을 중생에게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이것이 품의 뜻이다.”
그러므로 마치 『범천왕소문경(梵天王所問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범왕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업이 없어 결과도 없다면 이는 곧 보리(菩提)이다.’ 이와 같이 보리에는 업이 없고 결과도 없다. 보리를 얻는 사람에게도 업이 없어 결과가 없다. 수기(授記)를 받고, 성종성(聖種性)을 얻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만약 업이 없어 업보(業報)가 없다면 성종성도 몸과 말 등의 업을 일으킬 수 없다.”
또한 「관연품(觀緣品)」 중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실체는 다 무자성이다. 눈 등은 다른 처(處)에 자재(自在)하게 존재하지 않음을 이미 부정하였다. 왜냐하면 눈 등은 붉은 색과 백색 등의 뭇 연[衆緣]또한 눈[眼入]등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관본제품(觀本際品)」에서 “이미 생사에는 본래 자체가 없다고 부정했기 때문이다. 마치 두 번째의 머리 없이, 두 번째 머리의 눈에 병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과 같다.
「관행품(觀行品)」의 게송에서 “대성(大聖)께서 공의(空儀)를 말씀하신 것은 모든 견해를 떠나게 하기 위함이네. 만약 다시 공이 존재한다고 집착한다면 부처님들께서 교화하신 바가 아니네”라고 말한 것과 같이 , 여기에서는 모든 견해 및 무명(無明) 등의 번뇌를 이미 부정하였으므로 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다시 공에 집착한다면 어떻게 교화하겠는가? 또한 마치 물에서 불을 찾는 것과 같고, 마치 물속에서 불의 생기를 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마치 「관고품(觀苦品)」에서 고(苦)의 네 가지 뜻이 성립할 수 없음을 부정한 것과 같다. “고는 스스로 법을 만든다거나, 스스로 법을 만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으니, 자체(自體)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있어 고를 만들겠는가?”라고 말하거나 혹은 “아법(我法)에 각각 이상(異相)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법미(法味)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모든 법에는 선(善)과 불선(不善)과 무기(無記), 유루(有漏)과 무루(無漏),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따위의 다른 차별상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아주 깊은 적멸법(寂滅法)에 대하여 의리(義利)가 없게 된다. 마치 본주(本住)에서 이미 부정한 것처럼, 본주가 성립할 수 없음을 부정했기 때문이고, 또한 삼세(三世)를 부정하여 희론분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법은 공하다.
마치 작업과 ‘작업을 짓는 자’에 대하여 “반드시 ‘작업을 짓는 자’가 있다 해도 ‘결정된 업’을 만들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결정된 업’에는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업에 작용이 없다면 마치 칼로 자신을 해칠 수 없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느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결정된 작업을 짓는 자’에는 작업이 없다. ‘작업을 짓는 자’에도 또한 업이 없다. 이와 같이 선(先)ㆍ후(後)ㆍ동시[俱]등으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만약 작용 따위의 법이 없다면 죄복(罪福)이 없다. 죄와 복이 없기 때문에, 죄와 복의 과보 역시 없다. 만약 죄복의 과보가 없다면 또한 열반도 없다. 이 뜻으로 인하여 세제 중에 모든 업은 있다 해도 제일의제에서는 아니다. 마치 꿈 중에 본 대상에 대해 망령되이 근심과 기쁨을 일으켜서는 안 되는 것과 같으니, 환술사가 만든 물건처럼 실체가 없다. 마치 건달바의 성이 해 뜰 때 나타나지만 사람 눈을 속인 것이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마치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에게 “생사에는 끝[際]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모든 범부인(凡夫人)들이 정법(正法)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생사는 끝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생사를 없애려는 사람은 행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무상의경(無上依經)』에서 “부처님께서 ‘세간(世間)의 어지러운 지혜ㆍ무인(無因)ㆍ악인(惡因)의 쟁론에 머무는 자를 연민(憐愍)하여세제 중에 모든 법ㆍ아(我)ㆍ사람ㆍ중생ㆍ생명이 있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다시 부처님께서는 저 중생들이 생사를 상속하여 아직 대치(對治)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생사는 끝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하신 것인가? 생사의 한계를 다 없애고 중생을 건립하여 꾸준히 정진토록 한 것이다. 잘 관찰해 본다면 저 생사와 열반은 조금의 차별도 성립할 수 없음이 요별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생사는 있지 않고 열반 또한 없다. 그리고 마치 「관연품(觀緣品)」중에 “작은 연(緣) 중에도 없고 ‘연이 아닌 것’에도 없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여기서는 작업을 부정하는데,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연과 화합하지 않고 작용이 있다고 말하면 옳지 않다.
「관삼상품(觀三相品)」에서 이미 발생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만약 발생 등이 성립하지 않으면 저 유위는 없다. 유위법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무위(無爲)가 있을 수 있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또한 ‘가는 작용[去]’과 ‘가는 자[去者]’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만약 ‘가는 것[去法]’이 곧 ‘가는 자’가 다르다면 ‘가는 자’를 떠나 곧 ‘가는 법’이 있는 것이다. 또한 ‘가는 법’을 떠나 ‘가는 자’가 있다면 두 가지 모두 오류이다.
「관성제품(觀聖諦品)」에서도 “제일의제에서 공하여 실체가 없다”는 뜻을 말한 것과 같다. 마치 「관성제품」의 게송에서 “부처님들께서 이런 까닭으로 마음을 돌이켜 법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네. 부처님께서 이해하신 깊은 법에 중생은 들어갈 수 없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제일의제 중에 공집(空執)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공하다고 말하면 이는 상(相)에 집착한 것이다.
견해를 부정한 곳에서 생사의 끝 등의 네 가지 견해를 이미 부정한 것처럼, 만약 생사에 끝이 있다고 말한다면 내세(來世)는 없다. 끝이 없다고 말해도 내세는 있지 않다. 왜냐하면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은 공하기 때문이니, 마치 게송에서 “어디서, 어떤 인연으로, 어떤 사람이 견해들을 일으키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만약 ‘견해를 일으키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옳지 못하다. 화합을 부정하여 말한 것과 같은 것은 “사물의 결과는 연(緣)에서 화합하거나 화합하지 않는다고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가 없기 때문에 화합의 법도 없다”라고 마한 것과 같다.
마치 「성괴품(成壞品)」에서 “존재[有體]에서 실체가 발생하지 않고, 또한 무체(無體)에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비존재[無體]에서 실체는 발생하지 않고 또한 무체도 발생하지 않는다”라고 부정한 것과 같다. 또한 삼시(三時)에 상속(相續)이 존재하지 않음을 논파한다. 이 뜻들로 알아야 한다. 마치 박해(縛解)를 부정했듯이, 박해에 자체가 있지 않다. 중생의 오음ㆍ십팔계ㆍ십이입에 왕래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오종(五種)으로 추구해도 ‘왕래하는 자’는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제일의제 중에 생사를 떠나 따로 열반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보승경(寶勝經)』의 게송에서 “열반은 생사이며, 생사는 곧 열반이다. 실상(實相)의 뜻은 이와 같다. 무엇을 분별하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유무(有無)를 부정한 품에서, 이미 모든 법이 존재일 경우와 비존재일 경우에 대해 부정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존재를 보거나, 비존재를 보거나, 자타(自他)의 성(性)을 본다고 말하면 이것은 곧 진실한 도리를 보는 것이 아니다.
마치 『금광명녀경(金光明女經)』에서 “무명(無明)의 체상(體相)은 본디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망상인연(妄想因緣)의 와합에서 발생한다. 선녀(善女)여, 모든 법을 관하면 이와 같으니라”고 말한 것과 같다. 어느 곳에 사람 및 중생이 존재하겠는가? 본성(本性)이 공적하여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관업품」의 해석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