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09 08:20 정운현
한편 예상 밖으로 책이 잘 안나가자 출판사측에선 일간지에 책 광고를 실었다. (* 동아일보 1966년 9월 10일자에 실은 5단 절반 크기의 광고는 확인됨) 당시에도 전집류나 대중소설 책 광고는 더러 있었지만 학술서 광고는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동아일보에 실은 광고를 보면, 상하단에는 ‘글은 남는다! 20년 만에 파헤쳐진 이 사실(事實)! 이것이 일제말기(日帝末期)의 전부(全部)다!!’, ‘ 등장인물 1천명, 문인 예술가 150명 그중 50명의 작품을 낱낱이 분석한 문제서(問題書)!’ 등 비교적 선정적인 문구를 실었다. 다시 한 가운데 대문짝만한 제목(‘親日文學論’)을 박고는 그 위로는 주요 목차, 작가 및 작품론(그 속에 대상자 명단 모두 수록함)을, 아래에는 동아․조선의 기사와 책에 실린 서문․발문의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했다.
<조선>은 ‘<친일문학론>은 지금까지 ‘감정적 반응의 대상’이나 ‘막연한 은폐의 대상’으로 보아지기 쉬었던 그 암흑기를 구체적인 자료에 의해 정리해가고 있다’고 했고, <동아>는 ‘전쟁준비에 광분하던 일제 말기는 한국문화의 암흑기-36․37년까지 계속하던 한국문학사는 곧장 해방 후를 뛴다. 그동안의 공백기인 친일문학 시대는 감춰진 채 20년 동안 미정리 상태였다’고 썼다. (* 확인 결과 광고에 실린 <동아> 기사는 1966년 8월 2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화제의 작품 화제의 작가’ 코너에 소개된 임종국 관련 기사의 리드 부분이었다. <조선> 건은 미처 확인은 안했지만 아마 비슷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 의외로 반응 냉담… 일간지에 광고도 실어
1966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친일문학론> 광고
8월 2일자 동아일보 ‘화제의 작품 화제의 작가’ 코너에는 종국을 비롯해, ‘13년 만에 컴백한 허윤석씨’, ‘<이성계>를 집필한 김성한씨’ 등 2명도 같이 소개됐다. <동아> 종국 관련 기사에서 “작년의 한일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시인 임종국씨가 연구 1년 만에 ‘민족주체성을 상실했던’ 친일문학을 종합, 비판한 <친일문학론>을 금주에 출간한다”고 알리고는 “‘친일작가’로 거론된 사람들의 상당수가 생존자지만 임씨는 ‘그들의 쓰라린 과거를 폭로한다기보다 취급되지 않았던 암흑문학을 문학사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작업’인 동시에 ‘그들도 자기 이름이 박힌 자기 작품에 책임질 양심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덧붙였다. 분량은 비록 원고지 4매 정도(세 사람 모두 같은 분량임)이나 비교적 성의 있게 작성된 기사라고 보여진다.
책 출간 후 종국 자신이 밝힌 심경을 한번 보자.
“이 일이 끝나면 다른 문화 분야 및 사회 ․ 경제 부분을 원고지 각 2천매씩 2권 정도로 계속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집필이 순조로왔던 반면에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문단의 반응은 냉담했고, 책이 우선 팔리지 않았다. 대학생들이 질문을 하되, ‘친일문학론이라니, 문학으로 한일 친선을 하자는 책이냐?’ 하는 판이었다. 그럴 수밖에, 당시의 대학생들은 해방 후 출생이라 친일파라는 단어조차 못 듣고 살았다. 초판 3천부를 파는데 10년이 걸리더니 75년부터 수요가 늘어서 지금 7판째가 찍혀 나갔다” (‘제2의 매국, 반민법 폐기’ 중에서)
(* 여기서 초판 발행부수에 대해 확인하고 넘어가자. 종국은 초판 ‘3천부’라고 했다. 반면 평화출판사 허창성 사장은 ‘초판 1천부를 찍으려다 500부를 더 얹어 1,500부를 찍기로 결정했다’고 지난 8월 나와의 두 번째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허 사장은 앞서 지난 1991년 1월 25일 인터뷰에서도 ‘1,500부’라고 밝힌 바 있다. 허 사장은 또 KBS의 <인물현대사-임종국 편>에 출연해서도 ‘1500부 찍은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초판 3천부’는 종국의 착오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막간에 여담 하나. 그 무렵 신문에서는 삼성재벌의 한국비료가 ‘사카린 밀수사건’(약칭 ‘한비사건’)을 한 것이 발각돼 연일 지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 사건이 세간에 화제가 된 것은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 의원이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 등 일부 각료들을 향해 국회에서 똥물을 투척(이른바 ‘김두한의원 오물투척사건’)해 더욱 그랬다. 사건 요지는 대충 이렇다.
1966년 9월 15일 삼성 재벌의 (주)한국비료가 건설 자재를 가장해서 당시로선 귀했던 사카린을 밀수한 사실이 폭로되었다. 당초 5월에 발생한 이 사건은 6월 초에 벌과금 추징으로 일단락됐으나 언론보도로 인해 사태가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 동아 등 유력일간지들은 바로 전 해에 삼성그룹 이병철 사장이 중앙일보를 창간(1965. 9. 22)해 심기가 불편하던 차에 이 사건이 터지자 마침 잘 걸렸다 싶어 이를 연일 대서특필했다. (* 그런 신문 가운데 하나인 <동아일보>의 사주는 현재 삼성그룹 오너와 사돈간이다.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의 차남 김재열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2녀 이서현은 2000년 결혼식을 올렸다)
사태가 커지자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특별수사반을 조직해 수사를 벌인 끝에 10월 6일 수사를 종결짓고 그 결과를 발표했다. 골자는 (주)한국비료가 일본에서 도입되는 자재속에 사카린의 원료인 OTSA를 밀수하여 시중에 유포, 거액을 챙겼다는 것이었다.
대정부 질의를 하고 있는 김두한 의원 앞에 인분 상자가 보인다. (사진-kimdoohan.com)
한편 이 사건은 국회에서도 논란이 됐는데 9월 22일 속개된 본회의장에서 뜻밖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대정부 질문 도중 김두한 의원은 "밀수사건을 두둔하는 장관들은 나의 '피고들'"이라며 "사카린을 피고인들에게 선사한다"는 말과 함께 인분(똥)을 국무위원들을 향해 투척했다. 똥물 투척 후 김 의원은 “그 인분은 선열들의 얼이 깃든 파고다공원 공중변소에서 가져 온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국무위원석에 앉아 있던 정일권 총리, 장기영 부총리, 김정렴 재무장관 등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피할 사이도 없이 똥물을 옴팍 뒤집어쓰고 말았다.
졸지에 ‘똥물세례’를 받은 정 총리는 총리공관에서 긴급 간담회를 열고는 “이 사건은 행정부의 권위와 위신을 모욕한 처사로 더 이상 국정을 보좌할 수 없어 전국무위원이 총사직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국회는 국회대로 의장단과 여야 총무회담을 열어 김두한 의원을 제명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파문은 밀수사건의 장본인인 삼성재벌로도 튀었다.
이 사건의 파문이 정계로까지 확산되자 당일(9월 22일) 이병철 한국비료 사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함과 동시에 자기가 대표로 되어 있는 중앙매스콤(중앙일보․동양라디오방송․동양TV방송)과 학교법인은 물론 모든 사업경영에서 손을 떼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비 헌납을 공개 천명했던 이병철 사장이 도중에 각서 내용을 부인하는 한편 사카린밀수사건이나 헌납사건은 일부 과격한 언론이 만든 조작극이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듬해 10월 11일 삼성은 한비의 주식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이 사건으로 이 사장의 차남 창희가 밀수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한편 이번에 <친일문학론> 관련 일간지 광고를 확인하기 위해 동아일보 M/F을 검색하던 중 몇날 며칠에 걸쳐 사카린 밀수사건 관련 기사와 광고가 게재된 걸 우연히 봤다.
기사는 그렇다고 쳐도 <동아일보> 하나만 놓고 봐도 9월 17일 2면에 5단 절반크기(‘사카린원료 밀수 운운에 대한 성명서’-한국비료주식회사 명의), 김두한 의원의 오물투척사건 하루 전날인 21일에는 역시 같은 5단 절반크기(‘사과의 말씀’-이병철 명의), 오물투척사건 당일인 22일에는 1면 하단 5단통 크기의 광고(‘저는 한국비료를 국가에 바치는 동시에 모든 사업 활동에서 손을 떼겠습니다’-이병철 명의) 등이 실렸다. 비단 동아일보에만 실렸겠는가. 기사는 기사대로 두드려 맞고 그 밑에 광고는 광고대로 실어야 했으니 그 당시 삼성의 처지가 상상이 갔다. 그러나 어쩌랴, 자업자득인 것을.
- ‘한비사건’과 동생 종철의 비판 칼럼
그런데 이 무렵 종국의 동생 종철은 서울대 상대 교수(전임강사)로 있으면서 <현대경제일보> 비상임 논설위원(1965~1968)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종철은 이에 앞서 <일요신문> 논설위원(1962. 10~1963. 8)도 지낸 바 있다. 당시 종철은 과외로 신문사 비상임위원을 하면서 잡비를 벌어 가계에 보태기도 했다. 그 무렵에 ‘한비사건’이 터진 것이다. 경제학자이자 언론인인 종철로서야 당연히 이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또 더러 이를 비판하는 칼럼을 신문에 싣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조지훈은 종국을 진실로 아끼고, 또 물심양면으로 지원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조지훈이 종국이 <친일문학론>을 내겠다고 했을 때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말렸을까, 아니면 격려했을까. 이와 관련한 종국 자신의 메모가 남아 있다. 책을 내기로 마음먹고 종국은 어느 날 은사 조지훈을 찾아가 ‘친일문학론을 써야겠습니다’ 했다. 그랬더니 조지훈은 쓰다 달다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런 책을 쓰면 문단에서 처세하기가 불리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제자를 아끼는 마음에서는 말려야겠고, 그런데 민족정기를 생각하면 또 말릴 일도 아니고. 이를 두고 종국은 “아마 스승의 마음이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적었다. 얼마 후 책이 나오자 종국은 제일 먼저 책을 갖고 다시 조지훈을 찾아갔다. 책을 받아든 조지훈은 그를 보면서 대견하다는 듯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술과 바꾼 법률책’에서 재구성)
앞에서 책 출간 후의 반응에 대해 잠시 언급한 바 있는데 좀더 보충할 필요를 느낀다. 몇몇 사람들의 증언과 당시의 잡지 글을 하나 살펴보자. 책에 ‘발문’을 쓴 박희진과 평화출판사 허창성 사장의 증언을 차례로 들어보자.
“책이 나온 뒤 전연 반응이 없었다. 아주 차가웠다. 서점에 그 책이 꽂히고 더러 눈에도 띄었지만 문단에서조차 화제가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거의 묵살에 가까웠다. 생각해보면 책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는 당시 문단의 비중있는 인사들이 망라돼 있었다. 그 가운데는 그간 친일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도 포함돼 있었다. 조용만이 그런 인물인데, 그는 당시 고대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신문에 5단 광고를 실어도 반응이 없었다. 협박, 항의 같은 것도 없었다. 역사에 남을 책을 냈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냉랭한 눈으로 날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그 당시 사회가 이런 문제에 대해 전혀 인식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비공식적인 반응은 더러 있었다. 친구 배종호(시사영어사 창립자)가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와서는 ‘대단한 책을 냈다’며 격려해줬고, 또 당시 동아일보 이상로 문화부장이 책 출간을 축하하는 격문투의 글을 써서 보내왔다. 또 하나 기억나는 이헌구(당시 이대 문리대 학장)가 찾아와서 책에 실린 자기 명의의 글 가운데 하나는 동명이인인 다른 이헌구(휘문고 교장)의 글이니 재판 찍을 때 빼달라고 해서 나중에 재판 발행 때 빼줬다” (허창성 사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