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문학 제23호 (수필)

소사벌 산책자 최와온       문을 열고 나와 보니 소사벌이 나의 정원 나의 밭이다. 삼남길이라는 작은 이정표를 따라 단풍이 가득한 길을 걷기란 모처럼만에 갖는 부유이다. 나는 한가한 산책자는 아니다. 생활의 고단함과 병에 짓눌린 전선에서 떨어져 나와 숨쉬기를 선택한 나만의 특별한 시간이다. 생활력을 앞세운 돈 냄새보다 늦가을 나뭇잎 냄새가 나를 끄는 것은 무엇일까. 움직임 없는 생각은 질려 넘어지고 걷기와 시간의 풍경보기를 언제부터 즐기게 되었다.    소사벌로 들어가는 작은 오솔길 옆으로는 추수를 끝낸 밭들이 어수선하고 야트막한 야산도 옛날 그대로다. 단칸방에 신혼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 곳도 이 마을이다. 그 후로 스무번의 가을이 지났고 몇 번의 이사를 하였지만 흰모래벌 주위를 이렇게 오고가며 맴돌뿐이다. 대동법 시행 기념비의 돌틈에 이끼는 여전히 푸르르고 늦게 막 피어오른 주홍빛 백일홍이 소사천까지 뻗어있다. 물고기가 노니는 소사천은 드넓게 펼쳐진 논에 봄부터 물을 대어주다가 지금은 휴식처럼 조금씩 흐르고 있다.    붉음과 갈빛이 뿜는 가로수 사이를 걷고 걷는다. 한 벗나무는 빠르게 잎을 모두 내려놓았고 한 플라타너스나무는 바람속에서도 잎을 잡아 안타까이 데리고 있다. 내년 봄을 기다리는 해당화 한 그루, 가지에 매달린 채 서리를 맞을 방울토마토 몇 알과 고추열매가 보인다. 작은 배추밭에는 줄지어 심긴 배추들이 속이 꽉 차서 중심을 잡을 준비를 마치고 있는 듯하다. 새로이 생긴 마을문고 ‘소새꿈터’ 둘레에는 연보라 들국화가 무더기로 피어있다.    지금 걷는 동안에도 휴대폰 편지함으로 부고가 날아든다.    ‘모친상, 발인 11월 4일, 장소 중앙장례식장,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고와 낙엽은 한 소식통으로 바람에 흩날리는구나. 아픈 사람들, 다 늙어버려 쇠잔한 사람들. 그 바스락거림이 생명의 불씨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의 자양분으로 입고 덮으며 말없는 말로 전하는 우리들의 나무아래서 나는 자유와 접촉한다. 봄부터 햇빛과 비를 명랑하게 따라가다 침묵으로 뿌리로 돌아가는 것들에 머리 숙여 인사를 한다. 가을 끄트머리에 매달린 자줏빛 대추 몇 알을 뇌 속에 집어넣고 읊조린다. 나무야 들꽃들아! 나도 너의 길을 따라 기탄없이 걸을 것이다.    어느 시인은 산책자를 ‘모퉁이를 돌기 위해 짐을 꾸리거나 / 주변을 무겁게 하지 않는 것 / 주소를 버리고 눈을 감는 것’ 라고 표현하였다.    지금은 나와 자연과 주소 없이 하나가 되어 가벼워지는 시간이다!     =====충남 부여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유아교육과 졸업, 문예사조 신인상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