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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22일 아산UBF 주일메세지
아기께 경배하고
말씀 / 마태복음 2 : 1~12
요절 / 마태복음 2 :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인간은 경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올바른 경배, 바람직한 경배 대상을 찾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2019년 성탄을 통하여 우리가 올바른 경배를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1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떤 시대에 오셨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은 에돔 사람입니다. 그는 로마 황제의 힘을 빌어 유대 분봉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인도 죽였고, 그에게서 태어난 아들 두 명도 죽였습니다. 30년 후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성전 보시라고 하는 화려한 성전을 지었는데 사실은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정치 수단이었습니다. 헤롯은 거둔 세금으로 로마 황제의 비위를 맞추고 백성들의 환심을 얻기 위한 건축 토목 공사를 벌였습니다. 유대 사업가들은 헤롯과 연줄을 가지면 좋은 사업특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헤롯이 불러들인 수많은 석공들과 기술자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제사장들도 자기들의 세계, 자기들의 권력을 구축하였습니다. 제사장들도 로마와 결탁하여 유대교를 인정받고 유대교 교권을 보장받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로마와 밀착하여 교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 비둘기, 염소를 살 수 있는 장터를 만들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제사 드리러 온 백성이 밖에서 사온 제물은 흠이 있다고 트집 잡았습니다. 성전 안의 제사장과 결탁한 상인에게 제물을 사오면 받아주었습니다. 제사장에게 장터에 자리도 얻고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헤롯을 욕하면서도 헤롯과 연줄을 찾았습니다. 백성들은 제사장들에게 불만 가지면서도 제사장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습니다. ‘헤롯왕 때에’ 헤롯 왕 때는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400년간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그 시대는 땅 위의 것을 소망하고 사랑하는 시대였습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세상은 캄캄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것을 하찮게 여기는 우리 시대를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신앙중심을 잃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청년들이 비전이 없는 것입니다. 비전과 소망을 가지고 도전하여야 할 청년들이 오직 ‘직업안정성’을 찾아 안정성 투어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여상 출신이 하던 여자순경을 이화여대 나온 사람들이 합니다. 대학 교직원을 신이 숨겨놓은 직장이라고 합니다. 연고대 출신들이 들어옵니다. 고졸 출신이 하던 9급 공무원에 SKY출신이 수두룩 합니다. 청년들이 안정적인 것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택한 직업안정성은 10년 이내에 사라집니다. 전에는 정리해고를 하지 않았는데, 10년 지나면 정리해고가 실행됩니다(전기통신공사). 전에 굳건했던 직장이 갑자기 합병 됩니다(주택공사 + 토지공사). 거대한 조직이 분사되어 나갑니다(한국전력/남부발전).
“헤롯 왕 때에” 하늘 영광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데 세상은 캄캄한 어둠이었습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님께서 오시는데 오늘도 세상은 캄캄합니다. 청년들의 마음이 어둡고 청년들의 미래가 어둡습니다.
이때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으로 찾아 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의 이란에서 온 사제들입니다. 박사들을 영어성경에는 Magi로 기록하고 있는데, Magi의 기원은 기원전 800~600년 경 메디아 왕국 사제들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이후 여러 지역에 흩어진 유대인들에 의하여 구원자 메시야가 오신다는 메시야 사상이 전해져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영적인 어둠에 깊이 빠져 있었지만, 이 사람들은 메시야를 찾아 깨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절 후반절과 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페르시아로부터 예루살렘까지는 1600킬로 됩니다. 이란 서부의 높은 고원지대를 지나야 하고 이라크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야 합니다. 시리아와 요르단의 사막과 거친 광야를 지나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 먼 여행을 위하여 많은 비용을 지출하였습니다. 16절 말씀을 참고해보면 여행에 소모된 시간도 2년이나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까지의 멀고 긴 여행을 한 이유를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동방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께 경배하고자 하였습니다. 경배란 ‘그 대상이 주되심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경배 받으시는 그분만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로써 홀로 영광 받으실 분이심을 고백하고 찬양하는 행위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을 경배하였고, 야곱이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영원한 것을 사모하고 인류의 구원을 소망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잠자고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까지 깊은 영적인 잠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찾아 경배하고자 하였습니다.
메시야를 찾아 경배하고자 하는 그들의 방문에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헤롯 왕과 온 예수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헤롯은 ‘왕’이라는 단어에 정신이 나갔습니다. 소동한 것은 헤롯만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헤롯에게 이권을 얻었는데, 정권이 무너질까 걱정되었습니다. 영적인 것을 사모 하지 않고 땅위에 소망 두고 살 때, 바람만 불어도 뭐가 안 될 것 같고 하늘이 흐려도 뭐가 잘못 될 것 같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셨음이니이다” 미가서5장 말씀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셔서 백성들에게 무엇을 해주시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주권을 가지고 국토와 백성들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인생을 내가 주관하는 줄 압니다. 사실은 죄가 나를 이끌고 다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선한 방향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죄가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의사와 달리 죄를 짓고 거짓으로 가득한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아무리 삶의 의미를 아름답게 하고 삶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여도 죽음이 모든 가치와 의미를 다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진리와 은혜로 다스리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거하게 하셔서 영생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에게 있던 무의미, 허무는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왕이신 예수님께서 양을 돌보는 목자와 같이 우리를 돌보시는 나라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예수님을 자기의 경쟁자로 여기는 오류에 빠집니다. 권력에 집착하여 이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큰 문제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입니다. 성경을 풀며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이 예수님께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구약 성경을 통하여 알았음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이들이 사실은 돈을 섬기고 사람들에게서 자기영광을 위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말은 아주 그럴듯하게 합니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악한 세상은 합리적인 말을 합니다. 마음의 중심이 타락한 사람이 말은 그럴듯하게 잘합니다. 이 세상은 말이 아니라 열매로 판단하여야 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별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간절히 찾는 사람, 순수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예수께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별을 간절하고 열심히 찾아 다녔던 동방박사와 같이 우리도 성경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동방박사들은 메시야의 별의 인도함을 받아 아기 예수님 누우신 곳을 알고 아주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이 기쁨은 메시야를 찾은 기쁨,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진리에 이른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향해 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기쁨을 주십니다.
11절을 다함께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아기 예수님 계신 곳에 이른 동방박사들은 아기 앞에 경배하였습니다. 경배할 때, 빈손으로 나오지 않고 예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아기께 경배하고 예물 드리고 자기들의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아기께 경배한 동방박사는 오늘 2019년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줍니까?
첫째, 우리에게 기쁨이 있는가? 천안에 맛있는 음식점이 많이 생겼습니다. 온양에도 유명한 맛집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한 끼를 먹어도 맛있는 곳에서 식사하고자 유명한 맛집을 찾아다닙니다. 먹는 즐거움, 기쁨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지역의 신세계 백화점과 갤러리아 백화점은 손님들이 많습니다. 배방의 어떤 아주머니는 동네 제과점에서 아르바이트 하던데 백화점 중 고급인 갤러리아 백화점에 쇼핑하러 다닙니다. 아웃렛에서나 옷 사 입는 저는 그것이 눈을 기쁘게 하고 마음을 만족하게 하기 위한 것인 줄 최근에 알았습니다. 사람은 기쁨을 얻기를 갈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곳에 참된 기쁨은 없습니다. 제가 살면서 단 번에 합격한 것이 몇 개 안 되는데, 운전면허와 박사자격 영어시험입니다. 합격했을 때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곁에 불합격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기쁨은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모두 다 기뻐할 수 있는 기쁨, 언제나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메시야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주는 큰 기쁨입니다. 성탄은 기쁨입니다. Joy to the world! 성탄에 우리는 기뻐하여야 합니다. 참된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구원자의 탄생을 우리는 크게 기뻐하여야 합니다. 이 기쁨을 성탄 때만이 아니라 1년 내내 가져야 합니다.
둘째, 아기 예수께 경배하였습니다.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와서 아기 예수님을 보고 한 일은 경배 드린 것입니다. 갓난아기로 누우신 예수님께 그들이 얻을 것도 없었습니다. 아기로 누워 계시므로 무슨 바람을 이야기한다 해도 들을 수 없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을 보았습니다. 아기 예수님으로 나타난 성육신의 은혜와 하나님의 원대한 인류구원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구원과 하나님의 약속을 구약성경을 통하여 연구하고 배웠기에 아기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 드렸습니다. 예수님께 경배 드린 그들의 세계는 빛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본 그들의 눈과 마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에 눈 떴습니다. 예수님을 찾고 경배한 그들은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과 구원의 경륜을 알았고 장차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께 경배하지 않을 때, 죄가 우리를 지배 합니다. 내면을 차지한 어두움은 나 혼자만의 어두움으로 끝나지 않고 나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나 하나 어두운 인생을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죄의 열매는 나의 자녀들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깊은 상처와 어두움을 드리우게 합니다.
비트코인에 투자하고 비트코인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가상화폐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트롬이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베이직토큰이 올라간다더라. 그의 인식은 모두 가상화폐에 대한 지식과 정보로 가득해 집니다. 인간적인 사랑에 마음이 빼앗겨 그에 경배하는 사람에게는 만난 지 100일, 만난 지 300일, 그리고 ‘생일’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경배하느냐에 따라 그의 세계가 결정됩니다. 인생 열매도 결정됩니다. 평안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께 경배 드리고 있는지 점검하여야 합니다. 마음에 시기심이 일어납니까? 내가 예수님만 경배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곁에 있는 형제가 밉고 지난날이 후회됩니까? 내가 주 하나님 한 분만 경배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경배는 단순히 절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경배는 마음과 의지와 실천하는 행동으로 드려야 합니다. 경배는 한 3년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온 마음으로 일생을 통하여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1년에 한 번 성탄절에만 경배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 주 예수님께 경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 예수님께 경배드릴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물이 가득합니다.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맛봅니다.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상급이 주어집니다. 세상에 대한 지혜로운 관점이 생깁니다. 인간에 대한 통찰력 깊은 이해가 생기고 성경의 세계, 예수님의 세계에 대한 신령한 체험과 믿음으로 가득해 집니다.
셋째, 동방박사들은 예물을 드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왕께 경배하러 나올 때 빈손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물을 준비하여 나왔습니다. 황금은 변함없는 그의 통치, 유향은 대제사장의 기도, 몰약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향한 예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몸을 주신 것에 미칠 수는 없으나, 왕이신 예수님 앞에 미리 준비한 예물을 기꺼이 드렸습니다. 나를 위하여 생명을 바쳐 사랑하시는 주께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다면 빈손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사랑하는데 줄 것이 없다면 사랑하는 마음은 무겁고 초라하기만 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빈손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전혀 믿어지지 않는다면 빈손은 문제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예물보다 더 많은 비용을 이미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2년이 넘는 긴 여행은 큰 비용을 필요로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런 수고와 헌신에 그치지 않고 정성껏 준비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예물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왕이신지 드러내고 예수님을 높였습니다. 예물을 드려 주 예수님을 높인 동방박사들을 하나님께서도 복을 주셔서 그 내면에 가장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들의 방문과 경배와 드린 예물을 성경에 기록하여 세상 끝날 까지 온 세상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경배 드리고 예물 드리고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 시대의 기준으로 볼 때, 동방박사들은 수익이 전혀 나지 않는 곳에 과도한 투자 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동방박사들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첫 성탄에 동방박사들이 가진 가장 큰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2019년 성탄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 경배드려야 겠습니다. 예수님께 아낌없는 예물을 드려야겠습니다. 최고의 기쁨, 넘치는 기쁨이 가득한 성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