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국사 수심결] ⑧
들을 줄 아는 성품에는 일체 소리가 없나니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은 많으나 그대에게 한 가지 문을 가리켜서 본원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대가 까마귀 울고 까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느냐? 예 듣습니다. 그럼 그대의 성품 가운데에도 많은 소리가 있음을 듣느냐. 이 속에 이르러서는 일체의 소리와 분별을 얻을 수 없습니다.
중생의 고통이 한량없어서 끝없이 생사에 유전하는 것은 소리로 인하여 마음에 덮임을 입어서 물들어 버린 때문이다. 세상은 온통 소리로 가득하고 허공에는 소리의 그물로 빈틈이 없다.
보통 범부들은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를 따라가서 분별을 하고 번뇌를 일으켜 고통을 당하지만 수행하는 사람은 일체의 소리를 들을 때 소리가 소리가 아니고 그 이름이 소리인 줄 알아서 소리의 성품이 본래 공함을 살펴서 소리를 따라가지 않고 듣는 성품을 곧바로 보게 된다.
들을 줄 아는 이 자리에는 일체의 소리와 분별이 끊어지고 마치 허공과 같아서 아무런 흔적이 없다.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현대인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실과의 부조화로 인하여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지금 이렇게 얽히고설킨 감정과 분노를 어떻게 조절하고 풀어가야 할지 도무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금 창밖엔 세찬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빗소리에 마음을 열어보자.
온통 빗소리와 하나가 되는 순간 한가로움을 느낄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뭐가 빗소리를 듣는지 돌이켜보자. 분명히 귀가 듣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뭐가 듣는 것일까? 들을 줄 아는 그 자리에는 소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 자리는 공하여 깨달은 부처라고 해서 더 하지도 않고 어리석은 범부라고 해서 덜하지도 않고 더럽거나 깨끗함도 없고 나거나 죽음도 없고 남녀노소도 없다.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 다섯 가지 쌓임을 밝게 비추어보고 공한 이 자리를 깨달아서 일체의 고통을 건너갔다고 설하고 있다.
낯설고 물설은 타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고향이 그립고 어머니가 더욱 보고 싶을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어머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부르듯이 어떤 고난과 역경에서도 좌절하지 말고 간절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곧 감응할 것이다.
여기에서 조금 여유가 생기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생각과 감각을 괴롭다고 하여 관세음보살하고 부르면서 눌러버리거나 끊어버리지 말고 바로 알아차리고 관세음보살하고 부르면 아는 놈이 현전하게 된다. 그러면 다시 ‘이 무엇인고’ 하고 의정을 일으켜본다. 그렇지만 아직은 공부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다시 망상에 사로잡혀 금방 놓쳐버린다. 그러면 다시 관세음보살하면 바로 나타나는 놈을 돌이켜서 ‘이뭐꼬’ 염불하는 놈이 누구냐고 의정을 자꾸 일으키다 보면 의단으로 뭉칠 것이다.
아직 공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오로지 간절함이 필요할 뿐이다. 불보살님의 명호는 마음의 다른 이름이므로 공부에 진전이 없다고 의심을 하거나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염불과 화두를 병행하여 공부를 지어가다 보면 힘을 얻을 것이다.
밤새워 내리던 장맛비가 그치고 나니 파도소리는 더욱 장엄하고 몽돌밭에서는 몽돌이 구르는 소리 저 소리를 따라 들어가면 그 속에는 일체의 소리와 분별이 다 끊어졌다. 이것이 관세음보살이 소리를 통해서 깨달음에 들어간 인연이다.
장마는 점점 깊어
육지 뱃길 끊겼는데
관음상 머리에는
파랑새 한 마리
거금선원장 일선 스님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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