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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백제 성왕은 일본 왕을 겸임했다” | ||||||||||||||||||||||
외국어대 홍윤기 교수 논문서 주장 | ||||||||||||||||||||||
백제 성왕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역사 교과서를 부분 개정해야 할까? 6세기 무렵 백제를 삼국 최고의 문명국으로 중흥시키고 일본에 불교문화를 전파한 성왕(523~ 554 재위). 그동안 역사학계는 <일본서기> 중 흠명천황 15년조 내용과 <삼국유사> 중 성왕 32년조에 기록된 ‘성왕은 죄지촌(지금의 충남 옥천 또는 보은)에서 신라의 복병에게 죽임을 당했다’라는 내용을 정설로 여겨왔다.
연구논문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양학부 일본문화담당 홍윤기 교수가 발표해 학계 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들이 발표한 연구논문 등이다. 귀족들이 즐겨 부르던 일본 정형시가 ‘와카’ 모음집으로 일본 시가 연구의 중요한 고전으로 평가되는 자료다. 조부야 말로 히라노신(백제 성왕)의 증손자이노라’라는 대목이 홍 교수가 주장하는 ‘백제 성왕이 일본 왕을 겸했다’는 주장과 일치되는 부분이다.
일본 법륭사에 대한 모든 정보와 비사를 기록하고 있는 <성예초, 1394~1427>의
내용도 홍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고증자료로 신빙성을 더 하고 있다.
이 문서는 ‘백제 성왕의 전신은 지금의 성덕태자이시다. 따라서 이 구세관음상은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또 나라대학 나카가와 토모요시(中川友義) 교수의 논문 <일본에 도래한 신들> 에서는 ‘제1신전은 성왕, 제2신전은 구도왕(온조), 제3신전은 고개신(비류왕과 근초
고왕)이 모셔져 있는 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밖에도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가 1991년 저술한 <두 개의 얼굴의 대왕>에서 ‘백제 성왕은 일본에 건너와 흠명천왕이 되었다’라고 기술
하고 있고, 교토산업대 역사학과 이노우에 미쯔오(井上滿郞) 교수의 논문 <헤이안
의 풍경, 1994>에서 ‘히라노신사에 모셔진 제신은 백제에서 건너 온 금래신(今來神)
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교토에 소재한 히라노신사(平野神社)는 서기 794년 칸무천왕이 수도를 교토로
천도한 기념으로 세운 사당이며 금래신 또는 흠명천왕, 히라노신이란 명칭은 이미
일본사학자들에 의해 백제 성왕으로 판명된 부분이다.
이에 대해 일본 교토대 사학과 우에다마 사아끼(上田正昭) 명예교수는 “‘백제 성왕 은 일본 왕을 겸했다’라는 내용이 담긴 홍 교수의 연구논문은 일본 고문서와 논문을
바탕으로 고증한 신빙성 있는 자료로 평가되며 이 대목에 있어서는 일본사학자들도
상당부분 인정하고 있다”며 “이 부분의 진위여부는 양국의 역사 교과서를 수정할
정도로 중요한 대목인 만큼 한ㆍ일 불교사학자들의 충분한 연구와 검증이 이루어져
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홍 교수는 200년 전 에도막부 말기에 쓰여진 고문서<일본시사>를 바탕으로 ‘일본 정형시조인 와카의 창시자 또한 왕인 박사였다’는 내용의 연구결과를 1970년
대에 발표한 바 있다. 왕인 박사는 4세기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 집권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 한자 보급은 물론 백제의 우수한 문화와 기술을 전수한 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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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철 기자 |sasiman@buddhapi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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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聖王, ?~554]
백제의 제26대 왕(재위 523∼554). 웅진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였다. 지방통치조직
및 정치체제를 개편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양나라 및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서기≫에는 성명왕(聖明王)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휘(諱)는 명농(明襛)이며 무령왕(武寧王)의 아들
이다. 무령왕과 함께 백제의 영주(英主)라 일컬어진다. 523년 패수(浿水)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知忠)
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양(梁)나라 고조(高祖)와 국교를 강화하여 고조로부터 '지절도독
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529년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후 고구려에 대해서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대처하였으며,
532년 금관가야(金官伽倻)가 신라에 항복하자 왕은 잔존 가야제국(伽倻諸國)을 회유하여 표면상으로는 신라
에 대하여 적대(敵對)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적으로는 가야의 분할을 획책하였다.
538년 협소한 웅진(熊津:충남 공주)으로부터 광활한 사비성(泗沘城:충남 부여)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
(南扶餘)로 고쳤으며, 중앙의 22부(部), 지방의 5부(部)·5방(方)제도를 이때 실시한 것으로 추측된다. 541년
양(梁)나라로부터 모시박사(毛詩博士)·공장(工匠)·화사(畵師) 등을 초빙하고 《열반경(涅槃經)》 등을 들여와
문화중흥을 이루고자 하였다.
550년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쳐서 빼앗고, 그 이듬해에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漢江) 유역을 공격하여 76년간이나 고구려에 빼앗겼던 군(郡)을 되찾았다.
552년 일본에 노리사치계를 보내 일본에 금동석가상 1구, 미륵석불, 불경을 전했다. 이 밖에 오경박사, 역박사,
의박사 등을 일본으로 보내 학술과 전문지식을 전수하였다.
553년 백제가 병합하려는 한강 유역을 신라가 차지하자 신라에 보복하기 위해 이듬해 일본에 구원병을 청하는
한편, 왕자 여창(餘昌:27대 위덕왕)과 함께 친히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신라의 군주
(軍主) 무력(武力)에게 대패하고 관산성(管山城)에서 신라의 복병(伏兵)에 의하여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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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예봉(銳峯)을 꺾고 승리를 쟁취한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공동의 강적을
막기 위하여 연합전선을 펼쳤지만 두 나라의 속셈은 애초부터 감추어진 채 이루
어진 오월동주(吳越同舟)였고 동상이몽(同床異夢)으로서 위태로운 밀월(蜜月)
이었다.
밀월이 끝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인 성왕 31년(553)이었다.
신라가 돌연 감추어진 야욕을 들어내어 백제가 회복한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주위의
6군을 재빨리 탈취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그 일대를 신주(新州)라 일컬었다.
이로써 백제의 비유왕(毗有王)과 신라의 눌지왕(訥祗王)이 서기433에 와옹성
(瓦瓮城: 계족산)에 회맹단(會盟壇)을 쌓고 피를 마셔 동맹을 맺은 이래 각기의
국력과 정세에 따라 다소의 기복은 있었지만 그래도 면면히 이어 오던 동맹관계가
이제는 완전히 끝나고 삼국은 각각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때가 바로 신라의 진흥왕 때로서 신라는 이를 계기로 하여 중흥의 길을 걸었고,
고구려는 쇠잔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기 시작 했으며, 당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백제였다. 70여 년을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되 찾은 땅이요, 총력을
기우려 백제중흥의 기틀을 기필코 마련코자 했던 성왕의 좌절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거대한 고구려를 꺾기에 온 힘을 다 쏟은 백제로서는 신라를
바로 보복할 만한 힘이 남아 있지 못했다. 그래서 성급한 보복보다는 시간을
벌어서 재기의 꿈을 키워야겠다고 판단한 성왕은 배신 당한 분노와 뼈 아픈 굴욕을
무릅쓰고 그 해 11월에 자기 딸을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에게 시집 보내어 소비
(少妃)로 삼게 하였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1년간 묵묵히 전비(戰備)를 가다듬은 성왕은 다음해 (554) 7월
에 진군하여 12월에는 신라의 접경 요새인 관산성(管山城: 옥천)을 함락하고 계속
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깊숙이 들어간 것이었을까?
한강유역의 신주(新州)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 군대가 남하하여 공격해 옴으로서 앞
뒤에서의 협공을 받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진퇴양난에 빠진 백제군은 여기에서 대패하여 성왕은 三年山郡(報恩)에서 포로가
되고 경주로 잡혀 가서 목이 잘린 채 몸만 백제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 후 백제는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며 100여 년을 버티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하여 패망(660)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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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성왕의 사망년도는 554년이다.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신라와
전쟁을 벌이다 전사한 것은 현존하는 기록들 모두가 증언하고 있지만,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기록이 모두 다른 의견을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권26 백제본기4에 "32년(554년)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
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步騎]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伏兵)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亂兵)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고 하고,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5년(551년)조 기사에 "백제왕 명농이 가량
(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군주(軍主)였던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이 주병(主兵)을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우도도(高于都刀)가 백제왕을 급히 쳐서 죽였다.
[百濟王明襛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 急擊殺百濟王]."고 하여 성왕이 밤에
몰래 신라를 기습하려다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성왕이 데리고 갔던 군사가 불과 50명에 불과했다는 기록을 볼 때 내용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태자 여창이 직접 참여한 관산성 전투는 오히려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으며, 성왕은
전후 수습을 위해 측근들을 데리고 관산성으로 가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니혼쇼키》에 보면 음력 12월 아들인 여창이 신라로 쳐들어가 구타모라(久陀
牟羅)에 요새를 쌓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전장에서 침식도 잊고 지내던 아들을
안쓰럽게 여긴 성왕은 이를 위로하러 관산성으로 향했다.
한편 성왕이 온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신라군은 주요 도로를 차단하고 성왕에
대한 기습을 감행했고, 불과 50명밖에 데리고 있지 않았던 성왕은 신라의 고도
(古都)가 이끄는 군사에 사로잡혔다.
고도는 성왕에게 "왕의 목을 베게 해주시오."라고 요청하고, 성왕은 "왕의 목을 천한 종의 손에 넘길수 없다"며 거절했으나 고도는 "우리 국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긴 자는
왕이라 해도 종의 손에 죽소."라며 잘라 말해버렸다.
이에 성왕은 "과인은 지금껏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안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때 성왕의 목은 신라 왕궁 북청(北廳)의 계단
밑에 묻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히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고, 나머지 몸은 백제로
반환되었다.
관산성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에 있었으며, 지금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9-3번지
부근은 성왕사절지(聖王死節地), 즉 성왕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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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 [威德王, ?~598]
백제 제27대 왕(재위 554∼598). 웅천성을 침공한 고구려군을 격퇴하였고 신라와 자주 싸웠으며 중국의 진(陳)
·북제(北齊) 등과 친선을 유지했다. 일본 쇼토쿠태자의 스승 아좌태자는 그의 아들이다.
휘(諱) 창(昌). 성왕의 맏아들. 554년 즉위하자 웅천성(熊川城: 公州)을 침공한 고구려군을 격퇴하였다.
561년부터 부왕의 패사(敗死)를 분풀이하기 위하여 신라와 자주 싸웠다. 중국의 진(陳) ·북제(北齊) ·수(隋)와
외교관계를 수립, 친선을 유지했다.
595년 10월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陵山里)에서 부여 능산리 창왕십삼년명사리감(昌王十三年銘舍利龕)의 발견
으로 새롭게 각광을 받았다. 그는 한국 역사서에보다 일본의 역사서에 더 자세히 알려진 인물로, 부왕(父王)인
성왕(聖王)을 위해 출가하려 하였으며, 일본의 쇼토쿠태자의 스승 아좌태자(阿佐太子)는 그의 아들로 597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
▲ 부여에서 출토된 청동 사리함 동체부에 백제 위덕왕이 새겨진 명문 기록 .
석함 뚜껑 개봉 직후의 사리함 모습 - "百濟王 昌"이란 이름이 뚜렷히 새겨져 있다.
명문은 사리함 동체부에 5자6행의 음각체로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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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흥사지서 전성기 백제 금은동 사리기 등 발견 | ||
백제 창왕대 조성기 밝혀주는 명문확인 등 백제금동대향로 이래 최대 발굴 | ||
한상현 기자, dream21yw@naver.com | ||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가 올 해 실시한 부여 왕흥사지 제8차 발굴조사 결과 전성기 백제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금ㆍ은ㆍ동 사리기 발견 및 백제 창왕대(577년) 조성기를 밝혀주는 명문을 확인하는 등 백제 금동대향로 이래 최대의 발굴성과를 거두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4일, 왕흥사지에 대한 발굴조사 자문위원회 및 현장학습의 날 행사에서 밝힌 이번 조사의 중요한 성과로는 ▲최초로 백제시대 목탑지에서 사리기가 봉안된 사리장엄구 확인 ▲사리함에서 왕흥사 창건(577년)과 관련된 명문기록 확인 ▲사리기의 봉안수법과 목탑 심초부 조성에 대한 새로운 기법 확인 ▲사리구를 포함 백제시대 귀금속 및 장신구 등 다량의 진단구 출토 등 당시 공예기술의 우수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사리함(높이10.3㎝)은 장방형 심초석(100×110㎝) 남쪽 끝단에 16×12×16㎝의 크기로 마련된 사리공 내부에 단면 사다리꼴의 화강암 뚜껑에 덮여 봉안 되어 있었다. 사리함 재질은 청동으로 원통형 동체에 보주형 손잡이가 부착된 볼록한 뚜껑을 덮었으며, 함 내부에는 다시 은제사리병(외병)을 봉안하였고 이 은제 사리병 안에는 다시 금제사리병(내병)이 봉안돼 있었는데. 실제 사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 ||
명문은 사리함 동체부에 5자6행의 음각체로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라고 적혀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의 기록에 600년(법왕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35년)에 낙성되었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연대가 577년(위덕왕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위덕왕44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태자 이외에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 확인되었다. 명문 및 사리구의 구성내용을 통해서 절의 축조가 같은 위덕왕 대에 만들어진 능산리사지(567년) 보다 10년 뒤에 조성되었다는 절대연대가 밝혀짐으로써 백제사 편년과 동시기 고고학적 자료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백제 위덕왕대의 정치ㆍ사회ㆍ문화적 흐름을 연구하기 위한 새로운 단서를 확보하게 됐다. | ||
진단구는 심초석 남쪽변을 중심으로 다량 출토되었는데 목걸이 및 팔찌, 비녀, 금제귀고리 등 장신구로 사용했던 구슬류와 옥류, 금제품, 금동제품, 은제품, 관모장식 등을 비롯 철도자, 운모로 만든 연꽃,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550~577년)에서 사용되었던 상평오수전 등 다량의 유물이 확인되어 백제시대 장신구연구 및 귀금속 제작, 대외관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백제는 성왕대부터 중국에서 사리신앙의 영향을 받아 위덕왕대에는 일본에 사리와 함께 승려와 장인(匠人)을 파견하는 등 불교문화의 일본전파에 주된 역할을 하였는데, 이번 사리구와 진단구는 이러한 백제불교문화의 우수성과 국제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 ||
사리함이 봉안되었던 목탑지는 중층기단을 하고 있으며 하층기단을 기준으로 남북ㆍ동서길이 14m의 정방형 규모로 중심부에 장방형 심초석(100×110㎝)이 안치되어 있는데, 심초석을 안치하기 전에 기단토를 먼저 조성한 후 되파기를 하여 그 중앙에 심초석을 안치하였고 심초석을 안치 한 후 다시 심주를 얹기 위한 80×80㎝의 황색 점토 및 사질토로 판축된 토심적심으로 보이는 정방형시설을 마련하였는데 유실로 인하여 그 상부에 심주를 위한 별도의 초석을 사용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목탑지와 관련해서 기단 특히 심초부의 조성수법은 그 동안 알려졌던 심초에 심주를 바로 올리는 수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백제시대 목탑 축조방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
이번 조사에서는 또 목탑지를 관통하는 절의 중심축선 상에 동서석축에 잇대어 남북방향으로 돌을 쌓아 축조한 왕의 행차와 관련된 어도(御道)로 추정되는 시설이 확인되었는데, 금강 쪽으로 연결되며 현재 확인된 규모는 남북길이 62m, 동서너비 13m로서 동서석축과 잇대어진 부분부터 남쪽으로 20m가량은 경사지게 내려가고 그 남편부터는 거의 평탄하게 조성되어 있어 어도(御道)로써 사찰로의 진입을 편리하게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또한 이 시설과 연결되는 동서석축의 약12m 구간에는 석축이 축조되지 않았는데 이는 이 공간에 접안시설에서 경내로 들어가기 위한 문지나 계단지 등을 시설하여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의 조사에서 석축은 경사구간에서 최대 10단(남북석축의 동측 부분)까지 확인되고 있으며 평탄한 구간에서는 4단 정도까지 확인되었다. 한편, 동서석축은 총 95m내외의 길이로 높이 380㎝ 16단정도 남아있으며 계곡부에 사찰을 축성하는 것과 관련하여 대지조성을 위한 축대로서의 기능과 강물유입을 막기 위한 제방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단구 이외의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동서석축 전면부의 회색사질점토층과 황적갈색사질점토층에서 수습되었는데, 와전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와전류는 백제시대 평기와가 대부분이나 통일신라시대 평기와 및 고려시대 평기와도 출토되고 있으며, 특히 고려시대 기와는 목탑지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또한 연화문수막새, 연목와 등이 다수 확인되고 있고, 특히 석축 전면부에서는 소조 광배로 보이는 토제품 2점이 출토됐다. | ||
(인터넷신문의 선두주자 뉴스타운 Newstown / 메디팜뉴스 Medipharm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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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
554년에 성왕이 전사하자 30살의 나이로 국정을 이어받았다. 그는 태자 시절부터 성왕을 도와 국정에 같이
참여하였고, 신라가 동맹을 어기고 한강 유역을 장악했을 때는, 신라 정벌론을 펼쳤다. 그의 강경론에 따라
성왕이 신라 공격을 결심하자, 554년에 자신이 선봉을 서서 관산성(管山城) 공략에 나섰다.
이 일은 많은 신하가 반대하였으나, 창은 주장을 굽히지 않고 기어코 관산성을 공격했다. 성왕은 관산성을
공격하고 있던 태자 창을 위로하기 위해 밤길을 달려가다 신라군에게 급습을 당해 죽임을 당하였는데,
창은 그 죄책감에 시달리며 출가하여 승려가 되려고 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이 강력하게 만류하자, 창은 뜻을
굽히고 왕위를 승계했다.
그는 성왕의 삼년상을 치르고 557년 정식으로 왕위를 승계했는데, 이는 자기 탓으로 부왕이 죽은 것에 대한
참회의 의미로 보인다.
성왕이 전사하여 나라가 불안한 가운데 태자로서 왕의 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국정을 맡자마자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야 했다. 고구려는 554년 음력 10월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이는 성왕이 죽은 지 불과
3개월 만이었다. 고구려는 신라가 길을 열어주자, 단숨에 웅진성(熊津城)까지 달려와 백제를 위협하였다.
백제의 옛 도읍이자 군사적 요충지인 웅진성은 사비성에서 불과 한나절 거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말하자면 백제의 폐와 같은 곳인데, 고구려가 한걸음에 달려왔으니, 백제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덕왕은 총력전을 펼쳐 가까스로 고구려군을 패퇴시켰지만, 고구려의 재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고구려의 침략은 신라가 길을 터준 결과였으므로,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하여 공격해올 수도 있었다.
때문에 위덕왕은 오랜 동맹국인 가야 쪽에 밀사를 파견하여 신라에 빼앗긴 가야 땅을 되찾아 가야를 재건할
방법을 모색하였고, 그것은 562년 음력 7월에 신라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다. 백제가 신라를 공략하는 사이,
가야는 내부를 수습하고 신라의 뒤를 후리는 양동작전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군은 신라의 반격에 밀려 1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함으로써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백제군
을 물리친 신라는 그 여세를 몰아 가야를 공격했다. 가야를 집어삼킬 기회를 엿보며, 침공의 명분을 찾고 있던
신라로서는 이 이상 좋은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사부가 이끈 신라군은 장군 사다함을 앞세워 순식간에 가야 전역을 휩쓸어버렸고, 그것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가야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전쟁 위협이 사라지자, 위덕왕은 외교 경로를 통해 고구려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몰락시킬 당시, 수나라의 전함 한 대가 탐라에 표류해왔는데, 위덕왕은 그들의 배를 수리해
주고, 선물까지 가득 함께 돌려보냈다. 양견은 이 일로 백제를 매우 신임하고, 굳이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유도한다
는 계획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다.
정황을 살피며 수나라에 그런 의지를 의지를 전달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위덕왕은 596년에 수나라와 고구려가
요동을 놓고 전쟁을 벌이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는 예의가 없고 오만한 나라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만약
수나라가 다시 고구려를 친다면 백제가 도와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러나 양견은 아직 고구려를 재침할 여력
이 없다고 판단하고, 위덕왕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백제가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도록 충동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고구려는 즉시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 국경을 노략질하며 보복을 감행하고 돌아갔다.
위덕왕은 그런 상황에서 74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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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武寧王, 462~523]
백제의 제25대 왕(재위 501∼523). 웅진으로 천도 후 혼란한 백제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름은 사마(斯摩)·융(隆), 시호는 무령(武寧)이다. 무령왕의 계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개로왕
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받고 있다. 501년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 의해 동성왕이 죽자 뒤를 이어 40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502년(무령왕 2) 가림성(加林城)에서
백가가 반란을 일으키자 정벌하였다.
전(前) 왕인 동성왕은 신진세력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다 비대해진 신진세력에 의해 시해되었다.
그래서 무령왕은 구귀족세력을 등용하여 신구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화시켜 나갔다.
또, 22담로에 왕족들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한강유역을 잃고 웅진으로 천도한 상태에서, 금강유역과 호남평야를 개발하기 위해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유민들을 귀농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유민을 정착시키고 농업 노동력을 확보하여 조세 기반을 마련하였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고구려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다. 즉위하던 해인 501년에 달솔 우영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고, 이듬해에도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했다.
507년에는 말갈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령성(長嶺城)을 쌓았다. 512년 중국 양(梁)나라에 조공(朝貢)하였으며, 같은 해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가불(加弗)·원산(圓山)의 두 성을 빼앗겼다. 521년 양나라의 무제(武帝)는
무령왕을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에 책봉하였다. 523년 인우
(因友)·사오(沙烏) 등에게 명하여 한북주(漢北州)의 장정을 동원시켜 쌍현성(雙峴城)을 쌓았다. 1971년 무령왕
과 왕비가 합장된 능(陵)이 충남 공주(公州)에서 발굴되었다.
[사진] 무령왕의 평상복과 무령왕릉의 내부
무령왕릉 [武寧王陵]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錦城洞)에 있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
1971년 7월 7일부터 동년 10월 28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됨으로써 그 전모가 드러났다. 송산리(宋山里)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封土)를 접하고 있다. 분구(墳丘)는 지름 약 20m의 원형(圓形) 플랜을 가지며 널방
[墓室]의 바닥면에서 분정(墳頂)까지 7.7m이다. 널방은 연화문전(蓮華文塼)·문자전(文字塼) 등으로 쌓여진
단실묘(單室墓)로 평면 4.2m×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軸線)을 둔다.
천장은 아치를 성하고 바닥면으로부터의 최고값은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小龕)
과 그 아래에 연자창(連子窓) 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
(燈盞)이 들어간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화려하다.
널길[羨道]에서 발견된 한 개의 뿔을 가진 철제(鐵製) 석수(石獸), 청자육이호(靑瓷六耳壺) 동제(銅製)의 발
(鉢)·시(匙)·오주전(五銖錢)과 함께 이 분묘의 피장자(被葬者)가 무령왕 부부임을 밝히는 각자석판(刻字石板)
2장이 나왔다.
널방[玄室]에는 청자사이병(靑瓷四耳甁)·청동용기류(靑銅容器類)·철모(鐵鉾)·현금(玄琴) 등의껴묻거리[副葬
品]와 금·은의 식금구(飾金具)가 달린 흑칠(黑漆)이 칠해진 목관(木棺)이, 왕의 것은 동쪽에, 왕비의 것은 서쪽
에 매치(埋置)되어 있었다.
붕괴된 관 안에는 목침·족좌(足座)·동경(銅鏡)·단룡환두(單龍環頭)의 칼, 울두(熨斗)와 동제(銅製)의 용기류
화염형관식(火焰形冠飾)·수식(首飾)·이식(耳飾)·과대(銙帶)·식리(飾履)·팔찌[釧] 등의 꾸미개[裝身具]가 들어
있었다. 또한 왕비의 제3대구치(第三大臼齒)가 출토되었다.
무령왕릉 왕비금관식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관꾸미개. 국보 155호.
금귀걸이 금제뒤꽂이
무령왕릉
무령왕릉(복원 전시물)
발굴 당시의 모습의 재현하여 전시하고 있다.
무령왕릉 입구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인 무령왕릉의 복원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제수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제수저의 복원도.
동탁은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제은잔의 복원도
오수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오수전의 복원도. 오수전은 중국 한나라 때의 동전이다.
무령왕릉 왕비의 관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비의 관을 복원한 복원도. 발견당시 왕비의 관은 나무가 부식되어 무너져 내려
있었다.
무령왕의 관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무령왕의 관을 복원한 복원도.
지석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의 복원도. 지석에는 무령왕(사마왕)이 사망하여 묘에 안장하고 매지문서를
작성한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무령왕릉 매지권 [武寧王陵買地券]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왕비의 묘지 매매계약서.
연도부 중앙에 있는 진묘수(鎭墓獸) 앞에서 왕·왕비의 것이 함께 발견되었다. 왕의 것은 겉면에 왕호와 향년,
사망과 장례에 관한 일자 등 52자의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졌으며, 뒷면에는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의
글자가 음각되어 일종의 방위도 겸 능역도(陵域圖)라고 생각된다.
왕비의 것은 겉에 41자의 왕비 묘지 명문이 음각되었으며, 뒷면은 매지권 본문으로서 돈 1만 문(文)을 가지고
토왕(土王)·토백(土伯)·토부모(土父母), 여러 관리 등 지신(地神)으로부터 묘지를 사들인 매매계약서이다.
이 유물의 성격을 둘러싸고 발견 당초부터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다. 앞면의 내용에 생시의 행적이 기록되지
않고 일반적인 묘지의 체제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지석(誌石)이라기보다는 신에게 묘의 안호(安護)를 기원
하고 묘지 소유권을 확인하는 매매계약문서인 매지권이라고 보는 견해와, 묘지로서는 매우 소략하지만 표면에
왕호·사망일자 등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졌기 때문에 지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제작 경위를 보면 왕의 것의 앞뒷면과 왕비 것의 뒷면은 왕을 안장할 때인 523년에 작성하여 널방 ·널길 중간에
놓아두었다가, 왕비가 죽은 뒤인 526년에 왕비를 합장하면서 왕비 것의 겉면에 왕비에 관한 기사를 추각한 것
으로 보인다.
진묘수
무령왕릉의 연도부에서 발견된 진묘수의 복원도. 진묘수는 무덤입구에서 무덤의 침입자를 막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발견 당시 오른쪽 뒷다리가 부러져있었다.
청자 육이호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청자 육이호의 복원도. 청자 육이호는 중국식 도자기로 무령왕릉에서 총 9점의 중국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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