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도 10대 영화 전성시대가 있었다. 70년대 후반 하이틴 장르는 요즘 조폭 영화 부럽지 않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 시절 최고의 스타는 교복 세대의 우상 '얄개' 이승현이었다. 그런데 1986년, 돌연 그가 종적을 감췄다. 여기저기서 소문만 무성했다. 그리고 18년 만에 <빅하우스닷컴>으로 그가 돌아왔다. 대관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의 우여곡절 인생 역정 스토리. 이제 이승현은 마흔세 살이다.<빅하우스닷컴>의 김홍백 프로듀서는 “이승현 선배가 남 앞에 흔쾌히 나서려 하질 않으셔서…”라며 뒷말을 흐렸다. 우리 눈앞에서 사라진 지난 18년간 이승현에게는 자기 말마따나 남 앞에 흔쾌히 나서려 하지 않은 기구한 곡절이 있었다. 하이틴 영화 최고의 스타였던 이승현은 80년대 중반 일언반구 없이 연예계를 떠났다. 흉흉하기 짝이 없는 사망설, 이민설, 누군가는 목사가 됐다고도 했지만 정작 본인은 꼭꼭 숨어서 더욱더 소문만 부풀렸다. 시간은 이승현을 기억에서 밀어냈고 그는 잊혀진 스타가 된 지 오래였다. 너무 많이 흐른 시간은 지금의 관객들에게 이승현이라는 배우의 존재 자체를 모르게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사라진 그가 다시 배우가 되어 영화를 찍는다. 만나자마자 이승현은 "영화가 아니었으면 기자님을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영화가 그를 다시 우리 앞에 불러 세운 것이다.
1986년 홀연히 한국을 떠나 캐나다, 필리핀, 영국 등을 전전하던 그는 1997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말 못할 사연을 가슴에 묻고 돌아온 이승현은 이제 사무치게 그리던 영화배우로 복귀했다. 이승현의 복귀작은 휴먼 코미디 <빅하우스닷컴>.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우회해 온 그에게 영화 복귀는 뇌 속에서 사라진 기억을 복원하는 것 만큼이나 수고스러운 일이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안녕하세요. 이승현입니다.” 이럴 수가. 목소리가 30년 전 전성기 시절 그대로다. 그런데 변하지 않은 건 그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장난기 가득한 특유의 웃음뿐이다. 밤톨 모양 까까머리, 널찍한 이마, 불룩한 짱구 머리, 얼굴 가득한 주근깨와 쌍커풀 없는 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얄망궂고 되바라진 행동거지로 당대의 청춘들을 홀렸던 고교 얄개는 어느새 초췌한 중년이 돼 있었다. 그 시절, 이승현은 전설의 '얄개 시리즈' 속 고교생 얄개 나두수가 되어 스크린을 휘어잡았다. 이승현 아닌 나두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정윤희를 담임 선생 하명중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진유영과 갖은 공작을 획책하는 말썽꾼이었고 꼬마 신랑 김정훈의 뿔테 안경에 빨간 매직을 칠하던 천하의 개구쟁이였다. 천방지축 말썽쟁이지만 마음 한구석에 따뜻한 정을 품고 있어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그런 놈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눈에 선한 그 비범했던 생기를 지금의 이승현에서 찾기는 힘들다. 혀 깨물고 죽어도 자기 주장은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짱구 머리는 부푼 살 속에 감춰졌고 세파에 찌든 얼굴에선 두려울 것 하나 없었던 소년의 패기가 보이지 않는다. 솜털 돋힌 흰 얼굴에는 거뭇거뭇 검버섯이 피었고 호리호리했던 몸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졌다. 지난 세월 동안 이 세기의 아이돌 스타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승현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올 초 한 공중파 방송국의 다큐멘터 리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부터다. ‘얄개는 울지 않는다’라는 제하의 이 휴먼 다큐멘터리는 배낭 하나 달랑 메고 하루 1만원 하는 허름한 서울역 여인숙과 친구의 전세방을 전전하며 동가식서가숙하는 이승현의 충격적인 모습을 담았다. 왕년의 무적 얄개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시골 마을 노래 자랑, 마늘 광고 전단 모델도 마다하지 않는 창백한 중년 사내로 변해 있었다. <고교얄개>를 기억하는 올드 팬들에게 그 모습은 경악이었다. 방송을 본 누군가는 화려했던 자신의 청춘 시절이 절단난 것마냥 서러워했다. 방송이 나간 후에는 팬 클럽이 생겼고 ‘얄개 이승현 살리기 운동본부'까지 만들어지는 등 얄개를 그리워하는 팬들의 성화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이승현은 되도록 얼굴을 바깥에 비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는 "뭔가 하나라도 이루고 떳떳하게 대중들 앞에 서고 싶어서”라고 은둔의 이유를 설명한다. “영화 한 편이라도 잘 되고 나서 그 다음에 토크 쇼를 나가든, 드라마에 나가든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시트콤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면 생활에 도움이 되지만 아직 시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살도 좀 빼고 마음가짐도 재정비를 한 다음에 떳떳하게 팬들 앞에 서야죠.” 그는 한때 초절정 인기를 누리던 청춘의 우상이 아니던가. 육신은 망가졌어도 스타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우상의 눈물 이승현이 자취를 감춘 것은 1986년, 그의 나이 스물여섯 살 때였다. 이모 손에 이끌려 여섯 살 나이부터 충무로를 드나들면서 20년 동안 스타로만 살았던 이승현이었다. 대중들의 관심과 환대를 한 몸에 받았던 배우가 갑자기 영화를 떠난 이유는 뭘까? “한국 사회가 연예인에 대한 편견이 심하잖아요. 연기하는 내내 집안의 반대가 심했죠. 형제라도 있었으면 제 의지대로 살았을 텐데 외아들이다 보니 그러지도 못했어요.” 교장 선생님 아버지와 한의사 어머니는 이승현이 배우로 성공하는 것보다 외교관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잘 나가는 청춘 스타의 앞길을 막은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어처구니 없는 시대의 그늘이 있었다. 70년대 후반 ‘진짜진짜 시리즈’, ‘얄개 시리즈’를 위시한 하이틴 영화 신드롬은 단박에 얄개 이승현을 당대 최고의 우상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이 ‘우상’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국민들이 대중문화 스타들을 우상화하는 것에 민감한 반응(이승현은 당시 박정희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 에도 두 번이나 갔다고 했다)을 보였다. 당시 하이틴 장르의 치솟는 인기를 잠재우기 위해 나온 장르가 <영자의 전성시대>를 필두로 한 호스티스물이었다. “하이틴 영화 붐이 더 길게 갈 수 있었는데 우상화 혐의를 쓰고 많이 견제를 받았죠.”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어두운 시대는 우리의 우상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상화 견제 정책으로 주춤한 하이틴 영화 신드롬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10.26사태였다. 온 나라를 혼돈으로 몰아넣은 '궁정동의 총성'은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 전반에 된서리를 내렸다. “대통령이 총을 맞았는데 영화가 눈에 들어오겠어요. 신군부 들어서고 정권 바뀌면서 규율은 더 엄해졌어요. 환란이 닥치니까 사회 분위기가 완전히 다운돼서 하이틴 장르의 인기도 시들해졌죠.” 사회 변화와 맞물린 하이틴 장르의 쇠퇴는 곧 아이돌 스타 이승현 몰락의 서곡이었다. 얄개 이미지를 빌어 온 <대학얄개>, <신입사원 얄개> 등의 '성장 얄개 시리즈'(?)는 과거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아역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봐야죠. 한국에서 아역으로 주목받은 배우들은 20대만 넘어도 설 땅이 좁아져요. 한창 나이에 조로하는 거죠. 정훈이(얄개 시리즈에 함께 출연한 김정훈)나 저 같은 아역 출신 배우들은 꼬마 때부터 연기하다가 대학생 나이쯤부터 어정쩡해지는 거예요.” 대중들은 이승현이 항상 얄개로 남기를 원했지만 어느덧 그는 스무 살 청년이 돼 있었다. 한계에 부딪힌 이승현은 배우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부모님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부모님은 의기소침한 그에게 유학을 권했다. 연기 활동을 접은 지 1년째 되는 1986년 어느 날, 이승현은 고국을 등지고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캐나다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는다 20년 동안 보고 배운 것이라고는 연기 밖에 없었던 이승현이 연고 하나 없는 캐나다 이민 생활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말이 좋아 유학이지, 마음 편히 지낸 날은 하루도 없었어요.” 의지할 사람도 정 붙일 곳도 마땅찮은 캐나다에서 보낸 시간을 그는 ‘생지옥’이라고 회상한다. 한국을 떠날 당시에는 연기에서 손을 떼겠다는 마음을 굳혔지만 미련은 떨쳐지지 않았다. 어학 공부를 하던 와중에 그는 캐나다 영화학교에서 감독의 꿈을 키우며 향수를 달랬다. 하지만 변변한 성과도 없이 돈이 다 떨어지자 그때부터 생존을 위한 투쟁이 시작됐다. 햄버 거를 굽고 화장실 바닥을 닦고 손이 부르트도록 낚시용 지렁이를 잡으며 이승현은 오로지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내가 남의 나라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나 싶었어요. 후회도 참 많이 했습니다. 한국에 있었으면 어려움 없이 연기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듭디다.” ‘영화배우 이승현’ 만을 기억하는 교민들은 초라하게 변한 그에게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사람들의 냉대를 받으면서도 ‘배우의 자존심’ 때문에 이승현은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그 8년의 캐나다 생활 동안 이승현은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1993년, 이승현은 다시 생각해도 이가 갈리는 캐나다를 떠나 어머니가 선교사 활동을 하고 있는 필리핀으로 이주했다. 필리핀에서 의료 봉사를 하며 선교 사역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그에게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라고 하셨다. 필리핀에서 3년간 선교사 훈련을 받으며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도 했다. 하지만 대의명분만으로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기는 쉽지 않았다. "필리핀에서의 선교 사역은 목숨 걸고 하는 일이나 마찬가지거든요. 뜻이야 좋지만 체질상 신학이 안 맞았어요. 어머니가 강제로 시키시니까 할 수 없이 끌려가긴 했는데….” 20년을 남들의 주목만 받았던 이승현은 오지에서의 고행을 견디지 못했다. 박약한 의지를 탓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米? 한 채 그는 1997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손창호의 묘를 찾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독실한 크리스천 아내와의 갈등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직장인 영어 학원, 집, 교회를 세상의 전부로 아는 아내는 이승현이 배우였다는 사실도 몰랐다. 귀국 후 처가가 있는 대전에 정착한 이승현은 조그만 분식집을 하나 차렸다. 남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이름도 ‘얄개 만두’라고 지었다. 하지만 부인과 단 둘이 운영한 분식집으로는 생활이 여의치 않았다. 생활고에 시달릴 때마다 마음속에서는 못다 핀 배우로서의 꿈이 이승현을 충동질했다. 그의 경험과 재능을 아끼던 주변 사람들 역시 컴백을 권했다. “배우는 그 미련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캐나다에서 밑바닥 생활을 할 때도, 필리핀에서 선교사 공부를 하면서도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연기하겠다는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갖고 있었죠.” 부인과의 잔 다툼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아이까지 생기자 아내는 이승현이 옛날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영화 생각뿐인데 집사람은 전혀 깜깜이니까 대화가 될 리 있습니까. 이 바닥을 워낙 싫어하고 편견이 심해요. 배우 하면 외박, 술, 스캔들 그런 것만 생각하니까요.” 불화의 씨앗은 별거로까지 이어졌다. 어른거리는 스크린에의 꿈을 떨치지 못한 이승현은 가족을 놔두고 혼자 서울로 향했다. 그후 1년 동안 이승현은 가족과의 연락도 끊었다.
컴백을 위해 한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2000년에는 <아티스트> 라는 영화에 함께 출연한 배우 성인성과 영화 제작사를 만들어 본격적인 재기를 모색했다. 이참에 이승현은 직접 메가폰까지 잡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영화는 사기를 당해 엎어졌고 그에게 돌아온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뿐이었다. “영화가 엎어지고는 오갈 데가 없어서 차에서 숙식을 해결했어요.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죠.” 이승현은 진짜 한강에 몸을 던질 생각까지 했다. 그 순간 생각난 사람이 손창호였다. 얄개 시절 이승현과 단짝을 이뤘던 손창호는 성인이 돼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가 크게 실패를 맛본다. 그후 손창호는 행려병자가 돼 병원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이승현은 손창호가 묻혀 있 는 벽제를 찾았다. “창호 형의 납골당에 가보니까 꽃도 한 송이 없어요. 창호 형이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요. 그 형도 영화 좋아해서 그렇게 간 거예요. 처음 영화 만든다고 할 때는 강남에 큰 사무실까지 얻고 잘 나갔는데… 참, 영화가 뭔지.” 썰렁한 납골당에 꽃 한 송이를 꽂으며 이승현은 손창호의 모진 운명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슬픔도 힘이 된다 절망을 짓씹으며 정처 없이 서울역 여인숙을 전전하던 이승현을 도운 것은 아역 출신 영화감독 박재호였다. 박재호는 더이상 배우의 향기라곤 남아있지 않은 이승현이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그를 돌봤다. 박재호의 소개로 만난 것이 <남자 태어나다>의 권투 심판 역이다.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카메오였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극과 극이 통하기 때문인지 이승현은 그 극단의 절망 속에서 다시 몸을 추스렸다. "더 올라갈 곳도 없는 천당과 더 떨어질 곳도 없는 지옥을 오간 셈이죠. 편하게만 살았으면 밑바닥 생활의 고통을 알겠어요. 그때부터 마음을 비우고 편한 마음으로 살기로 했어요.”이제 더 추락할 곳도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사는 게 홀가분해졌다. "누가 돈다발 싸 들고 와서 사업을 하라고 해도 나는 못해. 천성이 그래요. 라면을 먹더라도 연기자로 살아야지.” 패배감에 젖은 이승현에게 이제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이다.
배우 복귀를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도 많다. 무뎌진 감각을 회복하고 변화한 충무로 환경에도 적응해야 한다. 얄개 시절을 기억하는 팬들에게 망가진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이승현은 한때 85kg까지 불었던 체중을 80kg까지 줄였다. 180도 변한 영화 현장에서는 잊혀진 스타를 우대해주지도 않는다. “일단 사람들을 모르니까 혼자 어색한 거죠. 20년 공백이 오죽하겠어요.” 분위기 적응은 어려워도 카메라 앞에 서면 이승현은 베테랑이다. 하긴 장장 400편의 영화를 섭렵한 가락이 어디 가겠는가. “분장하고 의상 입은 상태에서 주연 배우하고 딱 붙어도 밀리거나 기죽지는 않아요. 그게 두려우면 진작에 배우를 관둬야죠.” 이 대목에서 이승현의 목소리에 유난히 힘이 들어간다. 캐나다에 있을 때 그는 교민 연극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연극 한 편을 무대에 올린 적이 있다. 물론 주인공은 한국에서 배우로 날렸던 이승현이었다. 하지만 공연을 앞두고 이승현은 급성 맹장으로 수술을 받았다. “수술 부위를 꿰매지도 않은 상태에서 배를 움켜쥐고 공연을 했죠, 뭐. 배는 찢어져라 아픈데 기분은 좋더라고. 연기를 하니까….”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도 연기를 하면서 세상을 얻었다고 느끼는 사람, 그런 종자가 배우가 아니든가.
내 탤런트는 연기뿐 <빅하우스 닷컴>에서 이승현이 맡은 역할은 강력계 반장으로, 전과자들이 차린 닷컴 회사 ‘빅하우스닷컴’에 투입된 형사 주진모의 상관 역이다. 강력계 반장이라고는 하지만 사건 해결에 능숙하고 반듯한 형사가 아니라 사사건건 실수에 어설픈 언행으로 서장에게 구박받기 일쑤인 코믹한 캐릭터다. "저도 이제 변신을 좀 해야죠. 만년 얄개로 살 수도 없고, 나이 사십인데… 말 장난하고 넘어져야만 코미디가 아니거든요. 정극도 코미디가 될 수 있어요. 나이 사십에 얄개 마냥 촐랑대고 까불면 되겠어요. 코미디를 해도 참신한 아이디어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요즘 이승현은 <빅하우스닷컴>의 캐릭터 연구와 몸 만들기로 하루를 보낸다. 연기를 향해 일로매진하는 남편을 보며 아내의 마음도 서서히 돌아섰다. 서울과 대전으로 사는 곳이 달라 1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주말 부부 신세지만 형편이 나 아지면 별거 생활을 정리하고 합치기로 했다. “대한민국 배우로 받을 수 있는 상은 안 타본 게 없습니다. 아역상, 백상예술대상, 대종상까지. 제대로 된 배역 하나 맡아서 다시 한 번 시상식 무대에 올라가고 싶은 게 바람입니다.” 예전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연이 무리라는 것은 이승현 자신도 안다. 반듯한 외모가 아니라 남다른 개성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그 옛날 얄개처럼 뇌리에 각인되는 개성이 넘치는 조연이면 만족이다. 이제 이승현은 연기가 자신이 가진 탤런트의 전부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이승현이 품고 있는 또 하나의 꿈은 감독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는 일이다. 배우로서의 재기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이기도 하다. 감독으로서 이승현이 만들고 싶은 영화는 그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하이틴 영화다. “청소년 시기는 인생의 황금기 아닙니까. 요즘 한국영화에 조폭 이야기는 많아도 청소년들이 볼 만한 영화는 없잖아요. 얄개 시절과 비교하면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친구들 사이의 우정, 순수한 열정은 시대를 초월하는 감성이죠.” 20여 년 전 발산할 곳 없는 젊음의 열정과 에너지로 심금을 울린 얄개 시 리즈는 억압적인 입시 교육에 찌든 청소년들에게 해방의 카타르시스를 줬다. 그 시절, 얄개는 위선적인 어른들의 세계를 조소하면서 우리에게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 앞뒤 가리지 않는 패기로 뭉친 청년 정신의 소중함을 일러줬다. 한때 그 무구한 시절의 활기를 모두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던 '중년 얄개' 이승현은 지금 그 화려한 시절로 다시 회귀하기 위해 배우 인생 2라운드를 시작하려 한다.
첫댓글 지금 같이 힘든시기에 힘이되는 글을 올려주신 님께 감사드립니다.
참좋았던 시절 이었는데....이젠 추억으로 남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