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작용(Perception): 미학(감성론)에서(esthétique)
C. Segura, Les Notions philosophique, Dictionnaire, PUF, p. 1898(P.3299)
- 스귀라(Carole Segura, s.d.), 활동을 찾을 수 없음.
굳이 지각(le percept)과 지각작용(la perception)을 구별하는 이유는, 철학은 뒤늦게 자료들을 모두 총합하는 일들을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지각작용이 예술 작품의 창조와 형성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철학은 예술작품의 기호와 의미를 논하는 용어로서 지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들뢰즈가 지각(le percept), 감화(l’affect), 개념(le concept)을 다루면서, 지각작용보다 지각을 예술작업보다, 철학의 표현과정이나 소설의 서술과정에 적용하는 것 같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윤리학(한 권 안에)의 세 가지 책들에는 각각 기호들(les Signes) 즉 감화작동(affects), 용어들(les Notions) 즉 개념들(concepts), 본질들(les Essences) 즉 지각들(percepts)이 들어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지각의 의미는 윤리학의 내용 전체를 관통하는 직관의 인식과 같이 쓰고 있다. 또한 소설에 대해서 말하면서, 영미의 소설은 지각을 많이 다루고(조이스, 멜빌), 감화를 다루는 소설은 카프카를 예를 들었다. 나로서는 들뢰즈가 지각과 감각을 표현 양식으로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단지 감화의 방식은 시에서 지각의 방식은 소설 특히 단편소설에 더 잘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면 개념을 말하기 전에 관념을 말해야 할 것 같다. 벩송이나 들뢰즈는 플라톤주의의 관념은 상징(symbole)과 같아서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논의하는 데는 아무 쓸모가 없다. 어쩌면 벩송이 순수공간(유클리드 공간)은 추론의 극한으로 보면 착각과 같은 것인데, 메타포로서 (의미론적) 의미를 갖는다. 마치 천국, 하느님의 나라 등은 실재상으로 아무 쓸모없는 용어이지만 관념으로 아름답고 완전하고 신이 거주하는 어떤 공간으로 추론상 착각하고 있다. 좀 심하게 말하면 환상(fantasie)에 가까운 관념이라 철학적으로 다룰 필요가 없다. 벩송은 그런 메타포에 속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 개념은 구체적 층위와 시간적 과정의 단계들이 있는 사건들 또는 사실들이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다룬다. 먼지에서 각 무기물들의 단위들에거 바위들에까지 산꼭데기가 갈라지고 화산이 솟아오를 것까지 사실들을 시간과 공간을 토대로 한 과정에서 단면들이며, 단편들, 절편들로서 다룬다. 이렇게 다루려는 사건들이 너무나 많아서 분류하고 배치하는 것이 공부의 기본일 수 있다. 그럼에도 같은 사실이 배치에 따라 역할을 달리하기 때문에 순서와 층위와 좌우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요즘 제기되는 가까뉴스는 배열과 배치를 마음대로 바꾸는 데서 일어나는 것인데, 이는 관념을 다루던 버릇에서 나온 것으로 시대적으로는 데카르트의 정태역학의 사고 이전에 머물고 있고 또한 단위들을 앞뒤로 바꾸어 배치해도 된다는 데카르트의 분석학(인수분해) 정도로 생각하거나, 데카르트가 말하듯이 공식이 성립하면 시간을 줄일 수도 잇고 늘일 수도 있는 도깨비장난 같은 사고를 하는 것이다. 이 사고의 시대가 저물어가고(차이의 사고), 개념을 실증적이고 배치와 세분화에서 다루는 사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인데(차히의 사유), 아마도 코로나19가 그 역할을 한 것이다. 기계 공장의 제품은 안팔리면 창고에 보관하면 되지만, 생명을 다루는 것은 시간과 보관 장소가 종류별로 다르다. 벼가 빨리자라라고 매일 아침에 벼를 조금씩 들어올리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벩송의 말 설탕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법률구조로 선후, 좌우, 상하를 바꾸듯이 어제와 아제를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아제 인간들이 배우고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54NLC)
# 지각 작용(Perception) : 미학(감성론)에서
예술가의 지각작용은 예술작품을 정교하게 하는 예술가의 기술성(sa technicité)와 협력한다. 예술작품은 공중의 지각적인 지각작용을 목표로 삼고, 또한 지각할 수 있는 것을 지각된 것으로 만든다. 이리하여 지각의 여러 가능한 양태들[양식들]은 지각 가능한 현존이 규정하는 지각된 것을 표상에 일치한다. 또한 지각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번역작업들은 여러 질서(de différents ordres, [분류, 순서])들이, 즉 과학적 질서, 추론적 질서, 직관적 질서, 예술적 질서들이 될 수 있다.
지각 작용 자체에 타고난(inhérent, 내생적, 선험적) 판단이 있다. 벩송(Bergson, 1859-1941)에 의해 고발되었던 우리들의 감관들의 불충분함은 우리를 지각된 것 대신에 생각된 것을 대체하도록 추진한다.
우리의 직관적인 지각작용(Notre perception intuitive)은 은연중에 포함된 규범들에 응답하며, 이 규범들은 지각적 행태에 영향을 미친다.
추론된 지각작용은, 윤리 또는 종교-신화의 의미에서든지, 과학적 또는 기술적 의미에서든지 간에, 확립된 질서에 복종한다.
과학적 지각작용이 앞선 용어들을 먼저 가정하듯이, 예술적 지각작용은, 니체(Nietzsche, 1844-1900)에 의해 제안된 비극적 지각작용처럼, 형이상학적 가치를 갖는 미학적[감성적] 기준들에 귀착한다.
초기 철학적 개념작용들은 지각작용에 매우 가까이 다가 있으며, 이 개념작용들은 노동에 의한 감각적 요소의 변형에 의해 무매개적 감각작용을 채워준다. 그 노동은 예술가의 노동이며, 예술가에게 지각 작용은 이미 창조작업이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자기 예술에 가치들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칸트(Kant, 1724-1804)에게서 반성적 판단에 의존하는, 미학적(감성적) 지각작용은 상상체(l’imaginaire)의 행동에 종속되어 있다. 적어도 상상작용(l’imagination)이 가장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예술 속에서 이다. (C. Segura)
(54NLB)
**인명 ***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일(프러시아) 철학자.
1884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독일의 문헌학자, 철학자.
1859 벩송(Heri Bergson, 1859-1941) 프랑스 철학자. 사유와 운동자(1932)
?-? 스귀라(Carole Segura, s.d.) fr.en,deu.Wiki에 없음, 구글에도 못 찾겠네.
(2:33, 54NLC)
*참조 1: AI에 지각이 있을까?
AI는 추론의 개념작업이다. AI의 추론에는 들뢰즈가 말한 총체를 관통하며 단위들을 상호침투하는 지각은 없다. 즉 미소 부분들을 아무리 모아도 하나의 생명 단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을 논의하는 데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개념, 감화, 지각이다. 개념과 감화가 신체(또는 물체)의 것으로 미분화할 수 있다고 하나, 아직은 감화는 이루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지각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AI의 원초적 단위가 가분 단위이기 때문이다. 감화는 음악에서 있을 수 있다. 이번에 AI관상이라는 것을 보면서 한마디 적는다.
- [AI의 체제가 명령어 체제이란 증명이다. “왕이 될 상인가”에서, 전 검찰총장도 윤석열도 98% 다수를 살인한 살인범도 이춘재도 98% 나왔다. 그것은 추론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것은 성급한 추론의 오류 인데, 입력 내용을 결론으로 만든 오류이며, 이런 추론은 시간을 미리 앞당겨서 사고하는 절대공간화 사고이다. 이 사고가 과학을 동원하였지만 마지막에는 결론을 미세하다고 하지만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제논의 역설이 논리적으로 비판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미세한 무한 소를 무한히 분할가능하다면 아킬레스가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과학은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 보면 실증적으로 과정의 노력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의 과정에서 귀결은 미래의 일이라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할 때, 철학과 과학은 상호보조적이다. 철학은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달리하면서 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를 다른 과정에서 해소하는데 있다. 달리 말하기 달리 사유하기는 문제거리를 만드는 자들에게 문제 아닌 것을 문제로 삼지 말라는 것이기도 하고, 성급한 결론을 내는 인간의 오만과 속좁은 이성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벩송은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보다 해소하는 것이다. 다른 문제제기는 시간이 가면서 달리 사는 방식 또는 달리 보는 방식에서 오만과 편견 또는 착각과 환상에서 벗어나는 노력이다. 이 노력의 과정이 길다여기지만 생명역사에서 보면 얼마나 짧은 것인지를 깨닫는 것도 인간의 직관이며 창조이며 혁명이다. (54NLB)]
*참조2
앞의 머릿글에 넣으려 했는데, 게으르고 둔해서, 잘 안되었다. 플라톤은 인성(인격, personnalite)의 3중성에 대해 동양의 태극 그리고 음과 양의 삼원성보다 깊이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편에서 영혼이 욕구(에피튀미아)와 심장(튀모스)의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여긴다(마부와 두 마리 말도 여기에 나오던가?). 그러나 그 설명에 부족한 부분을 느꼈으리라. 그래서 티마이오스편에서, 에피투미아가 두 종류라고 한다. 음양이 사상으로 가지를 치면 음에서 태음과 소음이 나온다고 하지만, 플라톤에서는 생리학적으로 문제를 보았던 것 같다. 잘난 영혼이 몸과 같은 비천한 것에 들어가니 도덕적 오류가 생긴다. 몸이 혼의 말을 안들으니 번민(아그노이아)이 생긴다. 그 생각이 미치지 않는 신체가 무지해서 오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질병에서 오는 것이 노소스이고 광기(모리아)를 발생하게 한다고 한다. 이것은 신체가 아니라 영혼이 잘 못 길을 들었거나 다른 짓을 한 것이다. 이런 경우가 파라노이아 같다. 순수 영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때의 환상과 망상과 같은 광기이리라. 그렇다면 스키조는 어디서 등장할까? 순수영혼이 자기 방식을 신체에게 여러 방식으로 활용하는 가운데 그나마도 신체가 들어주는 쪽을 선택하는데, 경우에 따라서, 시간에 따라서(자람에 따라서), 인간들 관계(가정, 학교, 사회)들에 따라서 선택의 방식을 달리할 수 밖에 없을 때, 즉 배치와 배열이 다를 때 생기는 신체적 변형(?). 즉 손을 많이 사용하는 경우, 발을 많이 사용하는 경우 등등의 경우가 다를 때 생기는 것이 스키조의 징후들일 것이다. 징후는 질명의 증상이 아니다. 징후는 방법과 배치, 순서와 활동범위에 따라 문제거리가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소도기 때문이다. (54NL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