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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文明의 어머니 江
黃河流域 사람, 사람들!
黃河(Huanghe 황허)를 거슬러 오르면서 ② 허난(河南), 산시(山西)
厚堂 고 광 창
2. 허난(河南 Henan 하남)
黃河를 중심으로 북쪽은 허베이(河北), 남쪽은 허난(河南)이라 부른다. 이곳은 서아시아에서 이주해온 민족들이 기원전 1700~1100년 경 상(商)왕조를 세워 중국 문명을 처음 시작한 곳으로 중국 고대 5,000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이곳은 黃河의 중류지역으로 홍수로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비옥한 평야덕택에 역대 왕조들이 이곳을 떠날 줄 몰라 이곳을 중국 정치의 중심지라는 뜻으로 ‘華中’ 또는 ‘中原’이라 불렀으며 언제나 많은 인구로 넘쳐났다. 중국 사람들은 중원에 사는 자기들은 ‘天子’라 하고 중원을 제외한 지역을 모두 ‘오랑케’라 칭했다. 동쪽 오랑케는 東夷(동이 -만주, 한반도), 서쪽 오랑케는 西戎(서융-위구르), 남쪽 오랑케는 南蠻(남만 -베트남, 라오스), 북쪽 오랑케는 北狄(북적 - 몽골)
① 깎아지른 절벽, 협곡, 폭포 등으로 유명한 윈타이(雲臺 운대)山
② 황하 때문에 번성했으나 황하 때문에 매몰된 도시 카이펑(開封 개봉)
③ 河南성의 성도이고 茶集散地인 정저우(鄭州 정주)
④ 중국 고대 문명의 어머니 황허(黃河)
⑤ 중국 5岳중 中岳에 해당하는 쑹산(嵩山)과 ‘사오린쓰(小林寺‘ 소림사)
⑥ 여러 왕조의 수도였던 뤄양(洛陽 낙양)
⑦ 세계문화유산 룽먼스쿠(龍門石窟 용문석굴)
(1) 윈타이산(雲帶山 운대산 1,308m)
쟈오주오(焦作)에서 택시로 1시간 30분 만에 윈타이(雲帶)山에 도착했다. 雲帶山은 14억 년 전 바다가 융기와 침강을 반복하면서 지층 변화가 생겨 36개의 험난한 奇峰과 20개의 천연 동굴을 만들었다고 한다. 국가 森林공원이고 2004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중국 국가 4A급 풍경구다. 雲帶山은 ‘산봉우리 사이에 항상 구름이 걸려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인데 ‘구름도 쉬어가는 곳’이란다. 雲帶山은 폭포, 암석, 호수가 어울려진 綜合 名所다. 세 걸음마다 샘, 다섯 걸음마다 폭포, 열 걸음마다 못(潭)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雲帶山에는 수유봉(1,308m)과 협곡. 호수 등이 많은데 3대 관광 명소는 紅石峽(홍석협), 泉瀑峽(천폭협), 潭瀑峽(담폭협)이다.
紅石峽은 글자 그대로 붉은 돌로 이루어진 중국에서 가장 깊은 협곡이다. 협곡의 깊이는 68m, 길이가 200m 정도 되는 웅장하고 장엄한 협곡이다. 자연이 빚어낸 걸작품이다. 관광을 위해 절벽 중간에 좁은 길을 만들어 놓았고 협곡아래 물이 흐르는 물가에도 길을 만들어 놓았다. 붉은 돌이 水磨가 잘 되어 반질반질하다.
泉瀑峽은 바위에서 물(泉)이 솟아올라 맑은 물이 흘러내리면서 폭포(瀑)를 이룬다고 하여 泉瀑峽이라 했다 한다. 길이가 3,000m나 되는 협곡을 흘러내리면서 계속 폭포를 이루는데 가장 큰 폭포는 낙폭이 314m나 된다고 한다. 골짜기가 너무 길어 다 돌아 볼 수는 없었지만 관광객을 위해 절벽에 계단식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위험하게 보였다.
潭瀑峽은 골짜기의 호수(潭)물이 넘쳐서 내려갈 때는 폭포(瀑)처럼 내려가고 또 호수에 고였다가 폭포처럼 내려가고를 끝없이 반복하면서 협곡을 1,200m를 내려간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 潭(호수)瀑(폭포)峽이다. 물소리를 들으며 협곡을 걸어보니 무척 상쾌하였다. 협곡 옆 절벽에도 물이 흘러내리고 있고 절벽에 파란 이끼가 끼어 있어서 한결 더 아름답게 보였다.
(2) 카이펑(開封 개봉)
카이펑(開封)은 화려한 北宋의 수도로서 여진족에게 함락될 때 까지 160여 년 동안 번영을 누린 곳이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쳐 368번이나 대홍수를 겪은 뒤 이 도시는 지하 8~9m 깊이의 땅속에 묻혀서 화려했던 문명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카이펑은 황하 때문에 번성했으나 황하 때문에 몰락한 도시다. 이렇게 홍수에 시달리면서도 이곳을 떠나지 못한 이유는 그 만큼 이곳이 비옥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현재 카이펑에서는 높은 건물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높은 건물을 지으려면 땅속을 깊이 파야하는데 잘못하면 땅속에 있는 옛날 도시 건물을 파괴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란다. 카이펑은 城위에 城이 쌓여있는 형국이다.(城摞城) 카이펑은 송나라 때 이스람 교도들이 인도를 거쳐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와 중국에 처음 정착한 곳이다.
지금은 옛날 北宋 때 王宮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人工 공원이 있는데 꽤 넓었다. 커다란 호수 속에 ‘청명상하원’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이 포청천이 근무했던 ‘개봉부’라고 한다. 개봉부 앞에 죄인 사형집행기구인 ‘작두’를 3개 설치해 놓았다. 작두를 보니 섬뜻했다. 이 작두는 옛날에 포청천이 이곳 판관 시절에 고관대작을 가리지 않고 법을 공정하게 집행했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전시해 놓은 것이라 한다. 그동안 나는 포청천이 어느 나라 사람인줄도 모르고 두려운 존재라고 만 알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야 포청천이 송나라 사람인 줄 알았고 포청천을 중국에서는 ‘包公’이라 부르며 ‘공정과 청렴의 대명사’로 칭송한다는 걸 알았다.
이탈리아의 ‘폼페이’는 2,000년 전 ‘베수니오’ 화산 폭발로 도시 전체가 화산재에 묻혀버린 도시였는데 지금은 화산재를 다 털어내고 옛 모습(도로나 건물 뼈대)을 복원시켜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카이펑은 홍수로 수몰된 도시 위에 새 도시를 건설했기 때문에 옛 모습을 복원하려면 현재 있는 건물을 모두 헐어내야 하기 때문에 폼페이처럼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3) 허난(河南)의 성도 정저우(鄭州 정주)
허난(河南)성의 성도다. 옛 商왕조시대의 유적이 조금 남아있고 河南지방 名茶인 복전(茯塼)茶의 集散地로서 커다란 茶시장이 있다. 큰 茶가게에 들어갔더니 벽에 이런 문구가 씌여져 있다. ‘寧可三日無粮 不可一日無茶’ 漢字가 뜻글자인 관계로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겠으나 주인장에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더니 ‘3일 양식이 없는 것은 가능하나, 하루라도 차가 없으면 안 된다.’라는 것이다. 그 만큼 茶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중국은 지하수에 석회수가 섞여 있어 바로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지하수에 茶를 넣어 끓여 마신다. 그래서 茶文化가 발달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중국 사람들은 茶마시는 것이 곧 물을 마시는 것이다.
복전(茯塼)차는 황갈색인데 맛이 은은하고 뒷맛이 좋았다. 주인장이 복전차 일부를 쪼개어 속을 보여줄 때 그 안에 매주 곰팡이 같은 것이 보였는데 그것이 유익 곰팡이로 ‘金花’라고 한단다. 판매용으로 전시해 놓은 茶덩어리 한 개의 무게가 2kg쯤 된다고 하는데 리더 친구가 2개나 산다. 무거운 것을 들고 앞으로 여행을 어떻게 하려고 그럴까? 걱정이 앞선다. 그런데 또 거기에 몇 가지 茶를 더 산다. 여기가 중국에서 가장 큰 茶시장이고 다른 곳에서는 살 수 없는 茶라고 한다. 친구는 역시 茶狂이다.
(4) 황허(黃河)
黃河는 黃河의 문명을 낳은 ‘黃河문명의 어머니 강’이다. 黃河는 허난(河南)성의 省都인 정저우(鄭州)에서 북쪽으로 25㎞ 떨어진 곳에 있고 1938년 국민당 장제스(장개석)가 일본군의 진입을 막고자 강둑을 폭파시켰는데 이때 백만 명의 중국인이 익사하고 천만 명이 집을 잃거나 굶주려야 했다고 한다. 제방에 올라가 黃河를 보았다. 누런 굵은 물줄기가 조용하고 얌전하게 흘러가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얌전한 강도 홍수가 나면 난리가 나는 모양이다. 1947년 미국의 도움으로 강둑을 재건하였고 현재는 폭파되었던 지점에 관개수로가 뚫렸으며 마우쪄둥의 지시로 ‘黃河통제’라는 글씨가 제방에 새겨져 있다. 黃河는 홍수가 자주 범람하는 까닭에 ‘중국의 슬픔’이라고 알려져 왔다.
(5) 쑹산(嵩山 숭산)과 사오린쓰(小林寺‘ 소림사)
쑹산(嵩山 1,442m)은 省都인 정저우(鄭州)에서 서쪽으로 80㎞ 떨어진 곳에 있는 道敎에서 말하는 5岳‘중 中岳’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 5가지 중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햇빛에 빛나는 ‘하얀 바위 보석’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는 산이다.
숭산은 바닷속 지형이 융기되어 생성된 산으로 특이한 산세를 자랑하는데 기암 절벽을 오르려면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산이 가파르기 때문에 등산객이 많지 않다고 한다.
‘사오린쓰(小林寺‘)는 쑹산(嵩山) 입구에 있는 불교사원인데 중국 최고의 무술인 쿵푸
로 유명하다. 사오린쓰를 지은 사람은 496년 북위 효문제가 발타선사를 위해 창건했다고 하는데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小林寺 입구에는 ‘天下第一名刹’이라 씌여 있다. 인도 승려인 달마대사가 520년 禪宗을 전하러 이 절에 도착하여 동굴(달마동)에서 9년 동안 壁面坐禪을 통해 道를 깨우치고 난 후 ‘사람의 마음은 본래 淸淨하다’는 이치를 깨달았다고 했다. 그래서 달마대사를 禪宗의 창시자라고 하고 이곳 소림사를 禪宗의 本山이라고 한다. 달마대사는 불법연구와 기도에만 열중하는 제자들의 건강을 위하여 새와 동물의 움직임을 모방한 운동을 만들어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수 세기에 걸쳐 육체적 정신적 技藝로 발전하여 오늘날 ‘쿵푸’가 되었다고 한다. 小林寺는 소림무술의 발상지다. 소림무술은 唐나라때 명성을 날렸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唐태종 이세민이 지방 割據 세력과 다툼이 있었을 때 무술을 연마한 소림사 승려의 도움으로 뤄양에 있는 할거 세력을 무찔렀다. 이에 태종이 감사한 마음으로 소림사 승려들에게 특혜를 베풀어 주고 특권을 부여하였다. 이 때가 소림 무술의 전성기였다. 현재 小林寺 武術은 중국 무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고 한때 武術映畵로도 유명했는데 武術館에서 관광객들에게 시범을 보여주었다. 小林寺 武術館에서도 무술교육을 시키고 있지만 소림사 입구 길목과 가까운 곳에 있는 덩펑(登封)시에는 小林寺 武術학교가 10여 개 생겨 외국인을 포함하여 1,000여명을 교육시키고 있다고 한다. 소림사 뜰에는 고승들 사리탑이 200여 개 있는데 이를 塔林이라 한다. 省都인 정저우(鄭州)는 몰라도 역사도시 뤄양(洛陽 낙양)은 몰라도 小林寺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곳이다.
(6) 뤄양(洛陽 낙양)
夏왕조 때 세워진 이 도시는 北宋이 수도를 카이펑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무려 13개 왕조의 수도였으나 여진족이 침공하고 약탈한 이후에는 복구하지 못했다. 시내에서 13㎞ 떨어진 곳에 있는 룽먼스쿠(龍門石窟 용문석굴)가 유명하다.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김 구 주석이 장제스 총통에게 우리나라 독립군 장교 양성을 부탁했을 때 이곳 뤄양 군관학교에 ‘韓靑班’을 두어 우리 독립군 장교 양성을 해 준 고마운 곳이다.
우리 여행의 리더인 친구 성씨가 ‘程’씨다. 친구 성을 알기 전까지 나는 ‘정’씨 하면 ‘鄭’씨나 ‘丁’씨를 생각했고 ‘程‘씨는 있는 줄도 몰랐다. 친구는 중국 ‘河南’이 자기 본관이라면서 이곳에 자기의 훌륭한 조상의 묘소가 있으니 한 번 들려보아야겠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性理學을 朱子學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친구의 말에 의하면 性理學을 완성시킨 사람이 宋나라 朱熹이기 때문에 朱子학이라 부르는데 ‘氣 理論’의 토대를 만든 사람은 程顥(정호)와 程頤(정이) 두 형제였는데 程頤(정이)가 죽은 10년 후 朱熹가 이를 체계화하여 내 놓은 학문이 ‘程朱學’이라는 것이다. 자기 성씨인 ‘朱’자 앞에 ‘程’자를 넣어 ‘程朱學’이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이 편의상 ‘朱子學’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朱熹는 다음에 聖人 대접을 받아 ‘朱子’라 일컬어졌다.
택시 회사에 가서 묘지 있는 곳 주소를 보여 주면서 왕복 걸리는 시간 요금 등을 물어보니 거리도 가깝지는 않지만 도로 사정이 안 좋아 왕복 1시간 반 정도는 걸린다고 한다. 친구가 가는 길을 내가 동행하기로 했다.
묘지에 가 보니까 동생인 程頤(정이)의 묘소인데 ‘河南省 보호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곳 관리인이 나와서 설명해 주는데 입구에 程頤(정이)씨의 공적비가 있고 그 옆에 비석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를 가리키면서 조선의 성리학(주자학)자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갔다는 것을 기록한 기념비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묘지를 방문하면 방명록에 몇 자 적어 놓기는 하지만 이렇게 기념비까지 세워 놓고 가다니 우리나라 성리학자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만큼 程頤(정이)씨의 공적이 훌륭하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
(7) 세계문화유산인 룽먼스쿠(龍門石窟 용문석굴)
494년 삼국시대 北魏(북위)가 수도를 다퉁(大同)에서 이곳 뤄양(洛陽)으로 옮기고 나서 룽먼스쿠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北魏부터 唐나라 때까지 400년 동안 불교미술 전성기였는데 뤄양시 서쪽 16㎞ 지점의 이허(伊河) 강둑 절벽에 부처와 그 제자들의 모습을 새겨 놓았는데 석굴수가 2,300여 개가 넘고 불상도 10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19~20세기에 외국인들이 조각상의 목을 일부 베어가 버렸다. 이때 없어진 조각상의 목들이 현재 유럽과 북미의 박물관에 우아하게 전시되어 있다단다. 지금도 많은 조각품이 남아 있지만 훼손된 조각품은 흉물스럽게 보였다. 남아있는 조각 중 ‘노사나불상’은 높이 17.4m로 석굴 벽화의 꽃이었는데 여황제 ‘측천무후’의 모습을 본떠 조각했다는 말이 있다. 룽먼스쿠(龍門石窟)는 중국 3대 석굴로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測天武后는 唐태종 후궁으로 들어와 太宗 사후 본부인 아들 고종과 혼인하여 황후가 되고 또 고종이 병약하여 정사를 돌보지 못하자 대리청정을 하다가 고종 사후에는 어린 왕의 수렴청정을 했으나 마음에 차지 않자 자기가 낳은 자식을 제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한 유일한 女帝다.
3. 산시(山西 Shanxi 산서)
산시(山西)는 ‘산의 서쪽’이라는 뜻인데 이 때 산은 허베이(河北), 허난(河南)성과 경계를 이루는 타이항산(太行山 태행산)을 의미한다. 타이항산(太行山)은 우리나라 조선의용군의 주둔지로서 꾸준히 抗日운동을 펼쳐온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은 山脈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지 타이항(太行山) 산이 허베이부터 허난까지 길게 뻗어있는데 山脈이라고 하지 않고 山이라고만 한다. 산시(山西)省은 동쪽에는 타이항산(太行山), 서쪽에는 黃河가 흐르는 중간에 끼여 있는 위아래가 길쭉한 모양의 작은 省이다. 산시(陜西)와 산시(山西)는 한자로는 다른데 발음이 똑 같아 헷갈린다. 黃河는 산시(陜西)와 산시(山西) 국경선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가 山西의 끝자락에서 갑자기 90도로 꺾이어 山東쪽으로 흘러간다.
산시(山西)는 중국 문명 발상지 중의 하나로 이곳에서 晉나라(AD 265~420)가 시작되었다. 이곳은 석탄매장량이 중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곳으로 산시성의 2/3가 석탄 밭이라고 하고 추정 매장량이 2,612억 톤이라고 한다.
① 명나라 때 漢族의 도시 핑야오((平遙 평요)
② 중국 최초 조각상 석굴 윈강쓰쿠(云崗石窟 운강석굴)
③ 삼교전(三敎殿)으로 유명한 쉬안쿵쓰(懸空寺 현공사)
④ 중국 5岳 중 北岳인 헝산(恒山 항산), 중국 불교 4대 명산인 우타이산(五臺山)
(1) 핑야오(平遙 평오)
중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명•청시대 고대 도시로 성벽(6㎞)에 둘러싸여 있는 이 고성은 중국에서 가장 잘 보전되어 있는 漢族의 도시다. 베이징과 시안을 연결하는 오래된 길에 있는 핑야오는 명•청 시대에 상업 중심지로 중국에서는 맨 처음 은행이 설치될 정도로 번성했으나 지금은 도시를 현대화 할 경제적 능력이 없어 변하지 않고 남아있게 되었다고 한다. 1997년 핑야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받았다. 핑야오는 거리를 걸으면서 전통적인 가옥, 사원, 박물관 등을 보는 재미를 느껴야 고성에 온 진짜 맛을 느낄 수 있다. 시장구경 나갔다가 노점상이 파는 송이버섯을 조금 사서 신문지에 싸서 방에 넣어두고 거리구경을 하고 돌아와서 문을 여니 방안이 송이버섯 향으로 가득했다. 진짜로 좋은 송이버섯이라는 느낌이 들어 저녁 식사할 때 그걸 식당에 가져가서 조리해서 먹으니 맛 또한 일품이었다.
핑야오 남서쪽 7㎞ 떨어진 것에 쌍린쓰(双林寺)라는 사찰에는 宋, 元, 明, 淸代로부터 내려오는 형형색색의 진흙상들과 동상 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조각들은 宋, 元시대 것들로 2,000여 점이나 전시되어 있는데 볼만 했다.
※ 타이위안(太原) - 산시(山西)성의 省都이지만 뚜렷한 구경거리가 없어 기록 생략.
(2) 윈강스쿠(云崗石窟 운강석굴)
다퉁(大同 대동)에서 서쪽으로 16㎞ 떨어진 곳에 동서로 약 1㎞ 길이에 걸쳐있는 이 석굴 안에는 무려 50,000개가 넘는 佛像들이 있다. 이 석굴의 대부분은 460년에서 494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한다. 조각상은 모두 돌로 만들어 졌는데 중국 최초 석조 조각상인 셈이다. 云崗은 우저우(武周)산의 가장 높은 위치인데 위나라 황제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석굴은 동서로 3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있는데 1~4번 석굴은 동쪽 끝에 따로 떨어져 있고 정사각형 바닥이 특징이다. 5번과 6번 석굴이 이 석굴의 白眉인데 5번 석굴에는 17m높이의 거대한 좌불상이 있고 6번 석굴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탑이 있는데 정문에는 사납게 생긴 수호신이 서 있다. 8번 석굴의 한쪽에는 팔 여덟 개, 머리 세 개를 가진 시바신인 황소를 타고 있다.
(3) 쉬안쿵쓰(懸空寺 현공사)
다퉁에서 남쪽으로 65㎞ 떨어진 곳에 있는 1,400여 년 전에 지어진 사찰인 진륭사(金龍寺)는 하늘에 매달린 듯 金龍峽 절벽위에 위태롭게 세워져 있다. 대웅전과 정자는 가파른 절벽을 등지고 깊은 골짜기에 절벽을 따라 세워져 있는데 흡사 제비집 같다. 각 건물들은 철기, 석조 불상들을 모시고 있는데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한 지붕 아래 儒•佛•仙(공자상, 불상, 노자상)을 함께 모셔 놓아 이를 삼교전(三敎殿)이라고 한단다. 내가 알기로는 도교는 불교와 유교의 사상을 받아들여 실생활에 맞게 고쳐 놓은 것, 중국식 불교가 도교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불교와 도교의 구별이 없다. 말레이시아 페낭에 갔을 때 사찰이라고 해서 들어가 보니 부처상과 노자 상을 나란히 모셔 놓았다. 삼교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아찔했다. 사찰이 위태롭게 절벽위에 세워져 있는데다가 한 지붕에 세 분 성인을 모신 참 특이한 사찰이다. 호기심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4) 헝산(恒山 항산), 우타이산(五臺山 오대산)
헝산(恒山 2017m)은 중국 5岳 중 北岳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5가지 요소 중 ‘나무’를 상징한다고 한다. 道敎의 聖地로 유명하다.
‘우타이산(五臺山 3,058m)’은 5개의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는 중국 불교 4대 명산 중 하나이며 국가지질공원이고 중국 10대 명산에 들어간다. 이 산 속에 사찰이 50여개 있는데 그 중 38개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받았다고 한다.
다퉁(大同)에서 기차로 베이징으로 향했다. 가면서 보니까 석탄을 실은 하물열차 50여 개를 기관차가 끌고 간다. 기관차가 앞에도 있고 뒤에도 있는 걸 보면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것 같다. 이렇게 긴 하물열차를 처음 보았다. 산시(山西)가 석탄 산지이기 때문에 석탄을 싣고 베이징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많은 석탄을 모두 베이징에서 소모할 것임을 생각하면 베이징 하늘의 색깔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黃沙에 煤煙 까지 겹쳤으니 이래서 베이징을 煤都라고 혹평하는 것 같다.
4. 베이징(北京 Beijing 북경)
현재 인구가 1,380만 명인 중국의 수도로서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지다. 옛날 요(遙)왕조 시대에는 엔징(燕京 연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그 후는 베이핑(北平)으로 불리다가 수도가 난징(南京)에서 옮겨오면서 북쪽의 수도라는 뜻으로 베이징(北京)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① 500년 넘게 중국 권력의 중심이었던 즈진청(紫禁城 자금성)
② 중국공산당 정부 설립의 역사적인 장소 텐안먼(天安門)과 텐안먼광창(天安門廣場)
③ 明대 건축물로 베이징의 상징인 텐탄(天壇 천단)공원
④ 베이징의 옛날 거리 후통(胡同 -좁은 골목)
⑤ 중국 황제의 정원 이허위안(頤和園 이화원)
⑥ 중국 대 役事의 상징 창청(長城 만리장성)
(1) 쯔진청(紫禁城 자금성)
쯔진청(紫禁城)은 明•靑시대에 황제들이 중국을 지배하며 살았던 궁궐인데 紫색은 귀한 색이고 황제들의 집을 나타낸 색이므로 紫색이 아닌 것은 禁한다는 것 즉 일반인의 출입은 금한다는 뜻으로 건물 이름을 쯔진청(紫禁城)이라 지은 것 같다. 중국에서 가장 크고 잘 보존된 고대 건축물이다. 이 궁궐에는 보물이 많이 있었는데 화재로 불타 없어지기도 했지만 그 후 또 두 번이나 약탈을 당했다. 첫 번째는 일본군이 쳐들어와 약탈해 갔고 두 번째는 국민당 정부가 많은 보물을 대만으로 가져갔는데 이 유물들이 지금은 타이베이 국립고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 텐안먼(天安門) 및 텐안먼 광창(天安門 廣場)
‘天安’은 ‘천황이 편안하게 즐기는’이란 뜻이다. 天安門은 廣場에서 쯔진청(紫禁城 자금성)을 들어가는 門으로 廣場에서 쯔진청(紫禁城 자금성)들어 갈 때는 입장료가 없는데 天安門 위에 올라 갈 때는 입장료도 받고 검문검색을 철저히 한다. 天安門은 2층으로 된 구조물인데 2층은 廣場에서 행사를 할 때 지휘관이나 통제관이 있는 자리다. 텐안먼은 중국 공산당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을 선포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텐안먼 광창(天安門 廣場)은 글자 그대로 텐안먼(天安門)앞에 있는 廣場이다. 廣場의 크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마오쪄둥 장례식 때 백만 명이 모였다고 하니 크기가 어느 정도 인지 짐작이 간다. 이 廣場은 중국 공산당 창당 기념일 등 국가단위 대규모 행사를 할 때만 사용되며 또 매일 국기 게양식과 국기 강하식을 거행한다. 廣場 주변에는 천안문, 중국혁명역사박물관, 인민대회당, 毛主席기념당, 인민영웅기념비 등이 있고 천안문 벽에는 마오쪄둥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데 초상화 왼쪽에는 ‘중화인민공화국만세’ 오른쪽에는 ‘세계인민대단결만세’라는 글자가 씌여 있다.
(3) 텐탄(天壇 천단)공원
明代 건축물의 가장 완벽한 예로서 베이징의 상징이다. 원래는 천자가 수행하는 엄숙한 의식의 장소였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2층의 대리석 테라스가 쌓아올린 장엄한 기년전이다. 천정을 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은 못이나 석회 같은 것을 쓰지 않았다. 높이 38m에 직경이 30m인 건물로는 대단한 성취라고 한다.
(4) 후통(胡同 호동, 좁은 골목)
후통은 징기스칸이 베이징을 완전히 폐허로 만든 뒤 元代에 새로 도시를 만들면서 형성된 좁은 길로, 베이징은 후통과 함께 재설계되었다고 말한다. 淸代에 이르러 2,000개가 넘는 후통이 생겨 베이징시의 동서를 가로 지르며 거대하고 아름다운 거미줄을 만들었고 지금은 역사적인 후통들은 베이징 문화유산 보호 협회의 보호를 받고 있다. 현재도 후통(胡同)은 후통(胡同)들 끼리 끼리 잘 협조하며 살아가고 있다. 중국에서는 흔히 하는 말로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遠親不如近隣)고 한다.
※ < 먹거리 >
①‘카오야(烤鴨)는 베이징에서 가장 유명한 오리구이 요리다. 전문점이 몇 군데 있는데 ‘취안쥐더’(全聚德) 烤鴨店을 많이 찾는다. 가격은 108~168元 정도다.
② 만토우(饅頭 만두) - 황허지방에서는 밀 생산물이 많으므로 군만두, 찐만두, 만두국 등 밀가루 음식이 많다.
※ < 쇼핑 >
① 왕푸징(王府井) - 옛날 왕족(王府)들이 먹던 샘(井)이 있던 곳인데 오늘날은 명망있는 쇼핑의 거리다. 서울 명동, 광주 충장로와 같은 곳이다. 거대한 고급 쇼핑몰이 꽉 들어차 있다.
② 유리창(琉璃場) -후통에 자리잡은 골통품 가게 거리다. 오래된 고물 등이 많고 요즘은 전자제품 거리로 탈바꿈하고 있다. ‘서우두’(首都) 공항에서 이곳으로 오는 공항버스가 있다.
※ < 교통 >
① 공항 - 베이징 중심에서 북동쪽으로 28㎞떨어져 서우두(首都)공항이 있다.
② 지하철 - 순환선과 동서선 두 노선이 있다. 거리에 관계없이 순환선은 2元이고
동서선은 3元인데 시속 70㎞로 가격도 저렴하고 무척 빨라서 많이 이용했었다.
(5) 이허위안(頤和園 이화원)
베이징에서 가장 멋진 곳 중의 하나인 이허위안은 자금성에서 생활하던 왕족들의 정원이고, 놀이터고, 여름철 피서지였다. 호수는 쿤밍후(昆明湖)라 하고 호수 팔 때 나온 흙을 쌓아둔 산을 萬壽山이라한다. 처음에는 조그만 호수였는데 18세기에 건륭제가 크게 확장하고 예쁘게 장식했는데 그 후 잠시 버려졌던 곳을 19세기에 서테후가 재건해서 되살아났다. 공원의 3/4은 쿤밍후(昆明湖)가 차지하고 대부분의 건축물은 동문쪽이나 萬壽山 위에 있다. 황제가 집무를 처리하고 외국 사절을 받던 仁壽殿도 있고 호수 북쪽의 긴 복도 창랑(長廊)은 700m가 넘는 곳을 온통 신비스런 장면으로 장식해 놓았다. 南湖島를 잇는 150m다리에는 17개의 아치가 있고 다리 옆에는 아름다운 청동 황소가 새겨져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고 중국 5A급 관광구다.
서태후는 청나라 말기 함풍황제의 후궁으로 들어와 함풍황제의 사후 동치제가 어린나이에 등극하자 수렴청정을 시작하여 황후가 된 후까지 50여 년간 중국 정치를 도맡은 女傑이다.
(6) 창청(長城 만리장성)
萬里長城(1리는 500m)은 동부 河北省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 甘肅성 고비사막의 자위관(架峪關)까지 6,300㎞에 뻗쳐있는 성벽이다. 약탈을 일삼는 유목민족들을 막기 위해서 진시황제 때 축조를 시작했는데 정치범들을 주로 동원해서 10여 년에 걸쳐 골격을 쌓았다고 한다. 그 후 방치되어 훼손이 많이 되었는데 명나라 때 보수를 시작하여 100여 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베이징 북서쪽 70㎞, 해발 1,000m의 바다링(八達嶺)에서 관람하기가 용이한데 베이징 천안문 광장 등 몇 군데서 관광버스가 출발하고 시간은 왕복 9시간 정도 걸린다. ‘四通八達’이란 이리저리 사방으로 通한다는 뜻이다. 이곳 地名이 八達領인 걸 보면 이곳에서 여러 곳으로 통하는 모양이다. 창청은 북쪽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했는데 그 후 창청(長城)이 산속의 고속도로(?)같은 역할을 한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나온다. 바다링(八達嶺)에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걷기 힘든 사람도 창청의 어느 정도까지는 올라갈 수 있었다. 걸어서 올라가보니 창청(長城)의 노폭은 5~6m 정도이고 바닥은 계단식인데 벽돌과 돌판으로 견고하게 되어 있고 입구 쪽은 관광객으로 무척 붐볐다. 이 창청(長城)은 중국 역사상 제일 큰 공사고 공사기간도 가장 길었다고 한다. 지구촌 시설물 중 인공위성 사진에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는 곳 이라고도 한다.
해가지고 땅거미가 집을 찾아들 즈음 베이징시에 도착했는데 날이 어두운데다가 지리 파악이 잘 안되어 있어서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 택시회사에 들어가서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지도를 가리켜 주면서 베이자오(北郊)長途汽車站 이라고 한다. 우리 숙소가 復興門 外大역 부근이라고 하니 어떤 젊은 기사가 자기차를 타라고 해서 탔다. 미터기를 사용해 주라고 하니 기사가 ‘예’하고 대답하고 나서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는데 미터기를 보니 미터기가 무척 빨리 올라간다. 深夜運行 버튼을 누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미터기를 가리키면서 210元을 달라고 한다. 시계를 보니 7시 20분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은 深夜가 아니다.(現在不是深夜), 경찰에 신고하겠다(向警察署告發你的不法行爲)하고 말하고 택시에서 내려 좌우를 살피면서 꿍안! 꿍안! 하고 큰 소리를 지르고 우리 리더가 나와서 택시 차량번호를 사진 찍고 하니까 기사가 놀래가지고 우리 일행 모두를 어서 내리라고 하고는 기본료도 받지 않고 도망쳐 버렸다. 기사가 잘 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면 50~70元은 주려고 했는데 --
오늘 창청(長城)을 잘 구경하고 기분 좋은 날인데 마지막이 안 좋게 끝나버렸다.
잠시 후 생각하니 우리들의 생각이 깊지 못했음을 뒤늦게 알았다. 地理 파악이 안 되면 무조건 지하철을 타고 復興門 外大驛에서 내리면 되는 건데, 괜히 택시기사만 혼쭐을 내주었으니 --
행동하기 전 반드시 2~3번 생각해애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었다.
이튿날 기차로 네이멍구(內蒙古)의 省都 후허하오터(呼和浩特)로 향했다. 이 기차는 네이멍구 -닝샤 - 간쑤 -신장 우루무치까지 간다는데 승객이 매우 많았다. 미리 예약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좌석에 앉기는 했지만 통로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 분들에게 미안했다. 우리가 외국인임을 알아차린 한 젊은이가 말을 걸어온다. 영어는 잘 모른다면서 중국어로 물어오는데 중국어에 능숙하지 못한 내가 답변을 해야 해서 난처했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 무슨 일로 왔느냐, 어느 곳을 보았느냐, 보고난 느낌은 어떻냐 등 계속 물어 온다. 자기는 신장 ‘투르판‘까지 가는데만 5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고속열차가 있는데 값이 너무 비싸서 이 차를 탔다고 한다. 통로에 종이를 깔고 앉아 있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했더니 그 사람들은 立席票를 산 사람들이라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漢族‘이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신장은 ’위구르‘족이 많이 사는 곳 아니냐고 물으니 역시 그렇단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곳에 살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자기 할아버지 때부터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잠시 후 우리에게 빵을 건네준다. 선반 위 짐을 가리키면서 5일 동안 먹 거리를 사 가지고 간다고 한다. 짐 보따리가 모두 집에 가져갈 선물인 줄 알았는데 대부분 5일 동안 차속 먹 거리였던 것이다. 집에 한 번 다녀오는데 10일 정도 걸리니 중국 명절 때 휴가를 15일 정도 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가 빵을 안 먹으니까 이번에는 먹거리 보따리에서 맥주와 생수를 내 놓고 골라서 마시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맥주와 생수 값이 같단다. 우리는 곧 내린다고 하면서 사양했다. 외국인에게 말을 걸면서 음식물을 주려고 한 것을 보니 참 심성이 고운 청년 같았다. 베이징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니 선풍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부모님은 투르판에서 포도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우리는 이곳에 여행 왔는데 좋은 것 많이 보고 좋은 음식 많이 먹고 간다. 중국 참 좋은 나라라고 칭찬해 주니 고맙다고 한다.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서 헤어질 때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까지 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중국의 실정을 조금 더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다.
다음 ③ : 네이멍구(內蒙古), 닝샤(寧夏), 칭하이(靑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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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후당 기행문 참으로 훌륭하고 흥미 진진하네.
외교문서 , 정부 문서를 통해서 알려고 애섰던
중국 현지정보 중 모자란 부분를 제대로 보충해
주었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네. 파이팅이네.
^^ ~~
仁松 仁兄!
바쁘신 중에도 틈을 내시어 졸고를 읽고 격려의
말씀까지 해주시니 정말 고맙네! 더욱 건강하시길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