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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빌립보서 4장 1-3절
주 안에 서라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빌립보서 3장의 내용을 살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을 삼갈 것에 대해 당부했는데, 왜냐하면 육체를 신뢰한다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로 여기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신자들의 의는 육체를 신뢰하는 것들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육체를 신뢰하는 것들을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 때문에 육체를 신뢰하는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라고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지금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으며,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있는 것, 즉 육체를 신뢰할만한 것들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릴 것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종말론적인 삶을 살라는 권면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이런 전체적인 내용을 정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1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우선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 대해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드러난 표현으로 하자면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사모했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바울만의 마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마음이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그러니까 예수님은 가장 큰 사랑을 자기 백성들 앞에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형제라 부르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모든 택하신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이미 그 죽음과 부활 안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야 한다는 삶의 방향이 그 의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삶의 방향이 그 의미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때문에 형제라는 말 안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의미와 더불어 어떤 의미까지 들어 있느냐 하면 맏아들이신 그리스도처럼 양자된 우리 역시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까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면 자녀다운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2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12:50)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 그가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인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라고 부를 때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이런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칭해지게 되었으며, 아들로 칭해졌기 때문에 아들답게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특히 말씀 사역자로서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거저 형식적으로만 말하는 게 아니라, 진실하게 그러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바울 자신이나 이 서신을 받아보는 모든 교회들이 같은 형상을 따라 같은 영에 의해서 새롭게 되었기 때문에 한 형제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한 형제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이 지금까지 권면했던 이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길 원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마음이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라는 말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바울은 이들에 대해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는 말까지 사용합니다(cf.살전2:19-20). 바울은 이미 빌립보서 1장 4절과 5절에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었습니다.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그러니까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바울의 기쁨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보서 2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그것이 곧 바울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나의 기쁨’이라고 말하는 것은 앞서 말한 이런 의미와 더불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기쁨이요, 또한 더욱 더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소망으로서 너희는 나의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이것 외에도 존재 자체, 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대상 자체가 기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를 낳았을 때 그들이 뭔가를 해 줘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쁨이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대상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쁨이 되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인해 바울의 수고가 결코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면류관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빌립보서 2장 16절에서 이미 이렇게 말한 바가 있었는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물론 이 때 자랑은 주 안에서의 자랑과 같습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일이지만, 그 은혜를 따라 수고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수고까지도 마치 우리의 수고처럼 여겨주시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나의 면류관이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사역자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수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고가 열매를 맺게 될 때 분명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긴 하지만, 그런 은혜 속에서 수고한 그 수고에 대해 하나님은 보상이라도 하듯 우리에게 면류관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럼 말씀 사역자들에게만 주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과 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로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십니다.
이런 저들에게 권면하는 것이 뭐냐? “이와 같이 주 안에서 서라”입니다. 주 안에서 서되, 어떻게 서는 것이 주 안에서 서는 것인가? ‘이와 같이’입니다. 서두에 빌립보서 3장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말씀을 드렸지만 ‘이와 같이’라는 말은 빌립보서 3장의 내용과 같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넓게는 빌립보서 1장에서부터 3장까지의 내용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살핀바 있지만 몇몇 부분만 다시 확인하면, 우선 빌립보서 1장으로 가시면 27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1:27-30)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 그것을 위해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 역으로 복음의 대적자들이 있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 주 안에 서라는 말씀의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와 같은 싸움을 싸워 나갈 것을 말하는 게 주 안에서 서라는 내용입니다.
빌립보서 2장 1절 이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1-4) 그러면서 어떤 말씀이 나오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주 안에서 서라는 말씀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겸손한 마음, 그래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만 아니라,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마음이 주 안에서 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도 보시면, 2절과 3절에 이렇게 말씀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그러면서 뭐라고 말하는가? 육체를 신뢰하는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자신이 발견되려고 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말했습니다(빌3:14). 주 안에 선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로도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빌립보서 바로 앞에 있는 에베소서 6장으로 가시면 “주 안에 서라”는 말씀을 이런 내용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0절부터 보시면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6:10-11) 주 안에 선다는 것은 여기서 표현하는 것처럼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는 것과 같습니다. 왜 우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야 하는가? 마귀의 간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말씀으로 하자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육체를 신뢰하게 만들고, 이 땅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주 안에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주 안에 서야 하는데, 특별히 에베소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사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느냐?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하지만 이것은 육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무엇으로 무장해야 하는가? 실제 갑옷, 실제 방패, 실제 창과 칼이 아니라 영적 싸움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13절부터 보시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3) 여기서도 전신 갑주를 취하라고 하면서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했을 때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말씀하는 게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4-17) 비유적인 것을 빼고 본다면 우리가 무장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진리입니다. 의입니다. 복음이요, 믿음 그리고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 안에 선다는 것은 바로 이것으로 우리를 무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18절 한절만 더 보시면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기도 역시 우리로 하여금 주 안에 서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것 외에도 더 많은 말씀으로서 살펴볼 수 있지만 “주 안에 서라”는 말씀의 의미는 한 마디로 더욱 견고해지길 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경우 견고한 부분이 분명 있지만 그러나 마귀의 간계가 지금도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유혹이 지금도 있기 때문에, 그리고 실제 우리 속에 연약함이 있기 때문에 더욱 말씀 가운데 견고해지길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 말씀과 관련해 이렇게 주석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동시에 그들은 그의 안에서 견고히 서야 하며 그리고 그와 동행함에 있어서 꾸준해야 하며 최후까지 변함이 없어야 한다.” 또한 이렇게도 주석합니다. “그의 강함과 그리고 그의 은혜 안에 견고히 서라는 말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며, 그리고 자신에 대한 어떤 자부심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 앞에 우리는 과연 신앙의 진보가 있는지, 더욱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을 싸우고 있는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자로 있는가? 세상을 살면서 많은 유혹들이 있지만 그런 유혹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싸워 이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세상의 탐심보다 하늘에 대한 소망으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모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인가? 하나님만이 최고 상급임을 인정하는 자로 사는가?
오늘 본문 2절과 3절로 오시면 이런 말씀과 더불어 몇 가지 권면을 더하고 있는 걸 보게 됩니다. 먼저 2절 말씀을 보시면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일단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서에만 언급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주 안에서 같은 마음으로 품으라고 권하고 있기 때문에 두 여인 간에 있었던 어떤 분쟁을 진정시키기를 원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달리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 그런 분쟁이 있었다고 추측할만한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3절에 의하면 두 여인은 매우 뛰어난 여인이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3절을 보시면 바울이 그들에 대해 뭐라고 말하느냐?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여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물론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할 때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맨 마지막까지 가봐야 아는 것 아닌가?”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다는 걸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 우리가 어떤 성도들에 대해 “저 사람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고 함부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그런 확신을 주셨다면 그것은 단지 바울 개인의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바울의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증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유오디아와 순두게 이 두 여인은 바울과 함께 복음에 힘쓰던 여인이었고,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말할 정도로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인물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그들에 대해 어떤 분쟁이 있었을 것이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기 때문에 주님과 다른 마음을 품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게 칼빈의 해석입니다.
두 가지 해석에 대해 저 개인적으로는 칼빈의 해석을 따라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빌립보서 4장을 전체적으로 보면 책망에 의한 권면이 아니라, 칭찬과 관련된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런 면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2절을 책망에 의한 권면보다는 칭찬과 관련된 권면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2절은 어떤 분쟁보다는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여인들, 그리고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고 확신하는 여인들에 대해 좀 더 견고히 하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1절에서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는 말씀처럼 더욱 견고하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또한 그와 동행함에 있어 꾸준해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최후까지 변함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같은 마음을 품을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임에 유의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과 비교해 육체를 신뢰하는 그 일에 같은 마음을 품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cf.3). 세상 사람들의 신이 배라고 할 때 그 일에 같은 마음을 품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cf.19). 땅의 일을 생각하는 데 있어 같은 마음을 품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cf.19). 주 안에서라 함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데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3).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줄 알고 세상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는 데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7-8).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데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14).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우리를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데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20). 이미 그들 가운데 동일한 마음이 있지만 더욱 더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견고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습니까? 아니면 주님과 상관없는 마음을 품습니까? 아니 말씀은 주님 안에서 권하고 있는데, 우리의 삶은 주님 밖에 있는 것들만 품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주 안에 서셔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견고해지기를 기도하셔야 합니다. 주님 밖에 있는 것들은 아무리 좋다한들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를 발휘할 수 없다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인생의 모든 목적이 어디 있느냐? 돈에 있습니다. 물질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벌고, 물질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인기에 목말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가져갈만한 것인가?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부자가 죽어서 생을 마쳤을 때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는 결국 하나님과 영원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영원한 멸망 가운데 있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눅12:20-21). 때문에 바울이 말한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해가 되고, 배설물이 될 뿐입니다. 혹 주님 밖에서 하나가 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필경 불행하게 될 뿐이요, 다 깨어질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3절 말씀을 보시면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여기 보면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한다고 되어 있는데, “바울과 멍에를 같이 맨 자는 누구인가?”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빌립보서 2장에서 언급한 빌립보 교회의 사역자인 에바브로디도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디모데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바울의 아내가 아니겠느냐고도 생각하는데, 분명한 것은 바울의 아내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쓸 때 자기가 그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8절입니다.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이 부분과 관련해 칼빈은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 에베소에서 떠나기를 준비하면서 기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그는 예루살렘으로 갔고 그곳에서는 감옥에 있었으며 곧 로마로 보내졌다고 말합니다. 더군다나 바울은 그때에 옥에 갇히는 생활과 핍박을 견딜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행21:13). 그런 사람이 고린도전서를 쓰고 난 뒤 결혼을 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나와 멍에를 같이한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에게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 즉 앞서 언급한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도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글레멘드와 그 외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내용은 당시 상황 속에서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해 말하고 있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오늘날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기록된 말씀으로 주셨다면 우리 역시 복음에 힘쓰는 자들, 그리고 바울과 같이 말씀 사역으로 힘쓰는 자들을 도우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이런 말씀과 함께 생각할 내용이 있는데, 갈라디아서 6장 9절과 10절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느냐?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도와주며, 구제를 행하며, 그들에게 아량을 베푸는 것 등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구제를 한다고 할 때 구제할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나, 또 구제해도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사람인지라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선행은 때가 되면 거두는 성격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덧붙이는 게 있는데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원리적으로 볼 때 성도는 모든 이들에게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해야 하는 게 우선적인 원리로 주셨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로 가시면 더불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교회의 좋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교회 안에는 직분이 있습니다. 특히 장로라는 직분이 있는데, 이 직분에는 다스리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로 구분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잘 다스리는 장로들에 대해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말씀합니다. 즉 자신들의 직분을 신실하고 근면하게 수행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존경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갈라디아서 그리고 디모데전서를 종합적으로 보자면 선을 행할 때, 오늘 빌립보서 본문에 나오는 것으로 하자면 돕는다고 할 때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돕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선순위에 있어 믿지 않는 자들보다는 믿음의 가정들에 선을 행해야 하고, 믿음의 가정들 가운데서도 장로들, 장로들 가운데서도 다스리는 장로보다는 가르치는 장로들에게 선을 행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거저 목사한테 잘하라는 것으로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원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유오디아, 순두게가 비록 말씀을 전하는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더불어 복음을 위한 일에 힘쓰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자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가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 하나님 말씀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 바로 그들을 최우선적으로 돌아봐야 하고, 도와야 합니다. 특히 돕는다고 할 때 세상적인 관점에서 돕는 그런 도움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디모데전서 5장 18절에 보면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하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삯을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것이면 족한 줄 알지만, 도우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단지 물질로서만 도우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 2절에 나온 것처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하는 말씀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JS). 즉 복음을 위하는 자, 하나님 말씀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들과 같은 마음을 품을 때 그것이 복음을 위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들을 진정으로 돕는 길인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그 이름이 거론된 자들, 그리고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바울의 동역자들에 대해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함부로 “저 사람은 구원 받았어!”, “저 사람은 구원 받지 못했어!” 이렇게 판단하도록 되어 있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계시로서 알려주심으로 드러내셨기 때문에 이 부분만큼은 분명한 사실로 있다는 걸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단 생명책이란 말은 쉽게 생명으로 예정된 자들을 기록해 놓은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69편 28절을 보면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라고 말씀하시는데, 악인이 기록될 수 없는 책, 오직 의인만이 기록될 수 있는 책이 생명책입니다. 물론 우리는 전 성경을 따라 누구 의인인가? 인간 스스로 의로워서 의인이라고 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자가 의인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자가 기록된 책이 생명책입니다. 그럼 어떤 자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가?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자, 그들에게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생명으로 예정된 자들을 기록해 놓은 책이 생명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런 표현도 쓰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6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6-20) 그러니까 누가 택자인지, 누가 유기자인지 우리는 분명 알 수 없습니다. 양과 염소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어느 정도 열매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지 알리고 계시기도 하십니다. 그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의 열매와 상관없이 사는가? 따라서 택함을 받은 자라는 표식을 찾아볼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서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해야 합니다.
때문에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는 말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바울이 언급한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복음을 위하여 힘쓰며 애쓰는 자,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데 있어 같은 마음을 품는 자, 심지어 주 안에서 서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모든 자들에게 돌려질 수 있는 표현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부끄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주 안에 있는 자로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열매로 그들을 알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주 안에서 더욱 견고함을 갖춰야 합니다. 오늘 바울이 “주 안에 서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흔들리지 않도록 영적인 무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하고, 또한 같은 마음이기에 복음을 위한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삶이 우리 삶 속에 구체적으로 실행되게 되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싸움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위한다고 할 때 육체를 신뢰할만한 것들은 다 버려야 할 것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삶을 내려놓아야 되고, 땅의 일만을 생각하는 모든 것을 던져 버려야 합니다. 아니 땅의 일을 생각할 때조차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생명책에 기록된 그것만 하더라도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부유함을 다 가졌다는 걸 우리가 잊지 마셔야 됩니다.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부자보다 우리가 나은 자인 것입니다. 이것을 아셔서 부디 이 땅의 것에 전전긍긍하지 마시고, 오히려 주 안에서만 굳게 서는, 특별히 주의 군사로서 영적으로 무장하여 악한 마귀와 피 흘리기까지 싸울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