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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숙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문호), "아,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 여자란 참 이상해요. 남자에 의해서 잘잘못이 가려져요…"(경아)
1952년 6월28일 서울에서 태어난 안인숙은 63년 최훈 감독의 `부부조약'에서 아역으로 데뷔했다. 60년대 멜로물과 청춘물 등에서 해맑은 얼굴과 깜찍한 연기력을 과시하던 그는 중앙대 연극영화과로 진학하면서 성인 연기자로 변신했다.
그를 70년대 `만인의 연인'으로 만든 영화는 `별들의 고향'(74년). 신예 이장호 감독이 최인호의 원작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이 영화는 74년 4월부터 서울 국도극장에서 105일간 상영되면서 46만4천여 명이란 최고의 관객동원 기록을 세웠다.
당대 최고의 스타인 신성일, 그리고 윤일봉과 백일섭 등 베테랑 배우들과 연기를 펼친 안인숙은 70년대 멜로영화의 전형적인 여인상으로 자리잡았고 이후 이른바 호스티스 영화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만인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그는 이듬해 재벌가(대농그룹)의 며느리가 되면서 은막에서 물러나 아쉬움을 남겼다. 은퇴 후에도 공개적인 장소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삼가왔으며 지금은 신앙생활에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광고모델이 75년 송재호와 출연한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의 염복순(?) 락희화학(럭키)에 의해 66년 시판된 하이크림 비누. (오른쪽 사진) 당시 최초 개발된 가루형 합성세제 '하이타이'는 주부들의 생활 혁명을 가져왔다.
영화배우 염복순
염복순
1952년 서울 출생.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졸업. 고등학교 3학년 때인 70년 MBC 탤런트 3기로 선발되어 드라마 <물레방아>에서 처음 연기활동을 시작했다. <수선화> <강남가족> <새엄마> <손님>(MBC) 등의 드라마에서 조연급 연기를 하다가 74년 정소영 감독의 <성숙>에 출연하면서 영화에 데뷔한다.
<첫손님>(74, 이신명) <동거인>(75, 이정태) 등에서 여전히 조역으로 출연하던 그녀는 75년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주연으로 발탁되면서 신데렐라 같이 하루아침에 화제를 한 몸에 받는 행운의 스타가 되었다. “백치에 가까운 저능아적 체취에 강점이 있다.
특별한 연기력이 없이도 영자 역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체취, 저돌적인 연기태도에서 비롯된다”는 평이 있다. 하지만 <영자의 전성시대> 이후에는 이렇다 할 작품에 출연하지 못하고 <창수의 전성시대>(75, 김호선) <미스 염의 순정시절>(76, 김선경)같은
아류작을 전전하다가 TV로 되돌아갔지만 TV에서의 활동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기러기> <아빠의 자장가> <내 마음 별과 같이>(KBS), <아빠> <결혼행진곡> <재혼>(TBC) 등의 드라마에 출연했으며 뮤지컬 <땅콩껍질 속의 연가>에 출연하기도 했다. (안재석) 출연 -74 성숙, 첫손님. -75 동거인, 약속, 영자의 전성시대, 창수의 전성시대, 흑야. - 76 과거는 왜 물어, 미스 염의 순정시절. -77 별명붙은 운전사. -78 흙. -79 사랑의 조건.
어머님 울지마세요(72년 1월 29일 개봉)
이영우 감독. 출연 남진, 황정순, 한은진, 김희라, 최무룡, 윤정희 사진을 좋아하는 '일'(남진)은 어머니 한씨(황정순)와 장남인 '식'(최무룡)의 집에서 살지만 사이가 좋지 못하고, 장차 트렘펫 연주자가 꿈인 '구'(김희라)는 청소부로 일하는 어머니 황씨(한은진)와 술집에 나가는 누나 '희'(윤정희)와 함께 가난하지만 오손도손 살아간다.
그러다 '구'는 나이트클럽의 트렘펫 주자로 일하기 위해 황씨가 어렵게 모은 돈 10만원을 훔쳐가지만 사기를 당하고 어머니 황씨는 '구'를 쫓아가다가 다리를 다친다. '일'은 황씨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형수(임지성)의 다이아반지를 훔친다. 황씨가 퇴원하자 '일'과 '구'는 새로운 생활을 위해 군에 입대한다. 한씨와 황씨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들을 자랑스럽게 바라본다.
종로2가 국일관 순생맥주홀 '팔도강산' 최희준, 문주란, 김상범 현인, 하춘하, 박근, 송춘희, 김정구, 비둘기시스터즈, 하니비시스터즈, 리리시스터즈 외 다수 출연 사회: 송해, 박시명, 배삼룡, 이순주, 넘버원, 쓰리보이, 이기동, 백금녀, 이대성
서울 중구 세운상가 나동 4층 '맥주홀 아마죤' 김상국, 백설희, 신카나리아, 바니걸스, 송대관, 선우성(아래사진) 등 출연
1959년 4월 남대문로
1959.4.4 거리에서 파는 냉차 행상. 한 어린이가 시원한 음료수 한병으로 목을 축이는 중학생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1959년 1월16일 을지로2가에서 차량이 충돌해 길가 한가운데 나뒹굴고 있다.
1959년 1월6일 새해를 맞아 첫 출근하기 위해 열차편으로 상경한 근로자들이 서울역사를 나서고 있다.
1959년 3.1절을 맞아 공무원과 시민 학생들이 탑골 공원에 모여 기념식을 하고 있다.
1959년 3월1일 3.1절 기념식을 마치고 학생들이 종로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1959년 3월1일 3.1절을 맞아 기념식을 갖고 참가자들이 학생 밴드부를 선두로 종로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1959년 3월1일 서울역앞. 찬바람이 불고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자 행인들이 입을 막은채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너고 있다.
1959년 3월1일 여자어린이들이 덕수궁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다.
3.1운동 발상지. 서울 세브란스병원 부근. 남대문로 5가 15-75번지
1959년 3월1일 종로의 탑골공원과 낙원동 일대
1959년 3월 20일 명동성당이 보이는 명동 일대
1959년 3월 20일 명동성당이 보이는 명동일대 전경
1959년 4월8일 서울 종로2가 보신각
1959년 4월8일 서울 종로2가의 화신백화점 과 신신백화점 (왼쪽.지금의 제일은행 본점 건물자리)
1959년 4월8일 원구단 방향에서 바라본 조선호텔의 옛모습. 1970년에 헐리고 이 자리에 현대식 고층건물(롯데호텔)이 들어섰다.
1959년 4월8일 조선호텔과 원구단.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조선호텔의 옛모습과 팔각정 형태의 원구단
1959년 3월 1일 중학교에 입학한 신입생이 부모와 함께 교모와 교복 가방을 구입하고 있다.
1959년 3월1일 허니문 카를 본따서 만든 이동 어린이 놀이기구가 인기를 끌고 있다.
1959년 3월2일 50년대 말 명동거리의 패션. 양장차림의 서양여인과 한복차림에 쪽진 머리의 한국여성이 대조적이다.
1959년 3월3일 풍문여자중고등학교의 졸업식이 거행되고 있는 교문밖에는 꽃다발 행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59년 4월 4일 냉차, 아이스크림 등 거리의 노점상들이 어린이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군것질을 팔고있다.
1959년 4월 6일 유치원생들과 학부모
1959년 4월12일 창경원 벚꽃놀이
1959년 4월12일 창경원 벚꽃놀이를 즐기기 위해 입장을 기다리는 시민들
1959년 4월14일 비가 내리는 광화문의 한 가게 앞에 비닐우산을 늘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1959년 4월14일 우량아선발대회에서 한 심사위원이 참가한 어린이들의 앉은키와 몸무게 등을 재고 있다.
1959년 4월18일 덕수궁에 놀러나온 여자 어린이들
1959년 4월15일 급수 리어커가 오면 물동이로 길어나르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1959년 4월15일 수돗물 사정이 좋지않던 시절 급수 리어커가 오면 물동이로 길어나르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1959년 4월 남대문로
1959년 4월 소공동 환구단(원구단) 주변 모습. 환구단 뒤로 반도호텔이 보인다. 환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을 가리킨다.
1959년 4월의 돈암동. 낮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1959년 4월 을지로 입구. 도로에는 버스와 전차가 다니고 있다.
1908년 8월 일제가 설립한 경성동양척식주식회사. 위 사진 오른편에 이 건물 모습이 보인다.
경성동양척식 주식회사 지금은 외환은행 명동본점 건물이 들어서있다.
1959년 4월 종로거리
1959년 8월 미아리 동네 모습. 대체로 낮은 기와집들이 모여 있다.
1959년 광화문 사거리 주변 모습. 사진 왼쪽에는 서울 시민회관이 건축중이고, 뒤쪽 가운데에 중앙청(구 조선총독부)의 모습이 보인다.
1959년 남대문로 주변 모습. 서양식 건물들이 많이 보인다.
1959년 명동거리 모습. 명동거리는 50년대에도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1959년 서울 중심가 건물 앞에 주차된 다양한 모습의 차량들
1959년 기존의 목조건물을 헐고 준공되어지고 있는 창성동 별관 정부청사 신축지 현장
1959년 명동거리
1959년 서울 을지로 입구. 오른편 맨 윗쪽 끝 건물이 서울시청
1959년 종로 거리. 건물들 사이에 보신각이 보인다.
1959년 종로 거리. 오른편 건물이 화신백화점.
1959년 종로 대로변 모습. 전차가 지나고 있다.
1962년 10월 공사중인 김포국제공항. 1958년 1월 국제공항으로 지정되어 1959년 종합청사를 신축하고 그후 각종 시설의 확충과 기능을 확대하였다.
1962년 3월 서울 명동에 신축중인 유네스코회관 빌 딩
1962년 3월 서울 중구 명동에 유네스코회관 빌딩 건축공사가 한창이다. 유네스코회관은 1959년에 착공해 1967년, 8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1962년 우리나라 최초 여성 시나리오 작가, 두번째 영화감독 홍은원
홍은원(1922.9.24~1999.01.5)
예명 홍진아,홍설아 전남 순천 출생 경성 공립 경기고등여학교 졸업
홍은원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경기여고 시절부터였다. 당시 학생관람 금지규정을 어기면서까지 문예물, 멜로드라마, 서부극, 일본 무술영화 등을 섭렵하며 홍은원은 ‘영화는 배우가 아닌 감독의 예술’이라는 것을 터득했고 자신만의 영화관을 세워나갔다. 특히 프랑스의 시적 리얼리즘 영화가 영화예술에 대한 동경을 싹트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만주에 건너가 마루젱 서점에서 일하던 홍은원은 40년 초여름 만주의 신경에서 방송합창단원이 되었고 영화에 미쳤던 문학소녀에서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르는 카나리아로 변신한다. 신경음악단이 만주영화주식회사의 자매회사였던 관계로 영화사에 출입이 거듭되면서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다시 불타올랐고 마침내 여름 휴가로 서울에 왔을 때 당시 <태양의 아이들>(44, 최인규)을 준비하던 최인규 감독을 만났다. 이때 배우가 되라는 최인규 감독의 제의를 거절하면서 그는 미래를 기약하였다.
해방 후 돌아온 서울에서 그는 중앙방송국의 합창단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때 최인규 감독과 다시 만나 47년 <죄없는 죄인>(48, 최인규)의 스크립터로서 영화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결혼으로 잠시 영화계를 떠났었지만 조정호 감독의 30분짜리 다큐멘터리 <여군>으 조감독 겸 스크립터로 다시 합류하였고 이후 <유정무정>(59, 신셩균) <젊은 설계도>(60, 유두연) <황혼>(60, 박영환) <바위고개>(60, 조정호) 등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썼다.
이강천, 전창근, 유두연, 윤봉춘 등의 조감독을 거치면서 영화제작 과정과 당시 한국영화계 사정을 많이 배웠고 영화일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당시는 감독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도 그는 <여판사>(62)로 감독이 되기까지 장장 15년을 기다려야 했다.
대표작 62년 여판사, 64년 홀어머니, 66년 오해가 남긴 것
1959년 4월30일 봄바람을 즐기러 강변으로 외출 나온 주부들.
1959년 5월8일 부랑인 일가족이 종로거리에 누워 구걸을 하고 있다.
1959년 5월12일 제13회 어린이건강심사대회에서 입선한 우량아의 부모들이 시상식에 참석해 수상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1959년 5월23일 미스코리아와 미스해병 등으로 선발된 미녀들이 오픈카를 타고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1959년 5월28일 관광업계는 관광객유치를 위해 관광용 고급버스를 구입하고 관광버스 시운전 행사를 했다.
1959년 5월29일 자전거 위에 올라가 제1회 국제마라톤 경기대회 골인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시민과 학생들의 모습.
1959년 5월6일 바느질과 다림질 등 재봉일을 하고있는 50년대 말의 주부들 방안에는 화로도 있다.
1959년 7월 27일 지방선거로 야당의원들이 데모. 서장과 맞붙잡은 김두한 의원
1959년 7월 27일 지방선거로 야당의원들이 데모.
1959년 8월4일 서울 미아리 일대의 50년대 말 모습.
1959년 8월 21일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국민학교 학생들
1959년 8월 21일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국민학교 학생들.
1959년 8월 26일 야외가설 무대에서 공연중인 시민위안의 밤 무대
1959년 8월 미아리 동네 모습. 대체로 낮은 기와집들이 모여 있다.
1959년 8월31일 비가 내려 진흙탕이 된 명륜동 주택가 상점 앞을 지나는 주민의 모습
1959년 8월31일 장마로 물이 불어난 청계천벽 천일극장 뒷편에 밀집한 판자촌의 모습.
1959년 8월4일 여성 피의자가 재판을 받기위해 포승줄에 묶인채 호송관에 끌려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1959년 9월16일 추석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 광장에서 줄을 이루고 있는 귀성객들.
1959년 9월16일 추석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는 서울역의 귀성객들이 광장에 줄을 이루고 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모델을 둘러싸고 촬영에 열중하고 있다. 1959년 9월1일 좋은 앵글의 작품사진을 만들기 위해
1959년 도로 공사 모습
정간 당했던 경향신문이 1959년 6월 26일 다시 속간케 되었음을 알리는 대자보가 경향신문 사옥 앞의 게시판에 나붙었다.
정간당했던 경향신문이 1959년 6월 27일 조간부터 속간케되었다. 직원들이 그동안 내려졌던 사기를 사옥 옥상에 다시 게양하고 있다.
1962년 1월 광화문 세종로 사거리
1962년 1월 시민들이 출근을 하기위해 줄을서서 전차를 기다리고 있다.
1962년 1월 광화문 아카데미극장 매표소 앞에 영화를 보기위해 나온 시민들의 줄이 이어져 있다.
1962년 1월 눈오는 세종로 거리에 펼쳐진 좌판에서 상인들은 물건을 팔고 있지만 시민들은 무관심한채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다.
1962년 창경원(현 창경궁) 수정궁 앞 연못이 얼어 시민들이 스케이트를 타며 겨울을 즐기고 있다.
1962년 기찻길 옆으로 판자집이 즐비한 가운데, 아이들이 철로에서 놀고 있다.
1962년 청계천 주변 판자촌
1962년 추운 겨울 세종로에 상주하는 한 노숙자가 근처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1962년 기찻길 옆으로 판자집이 즐비한 가운데, 아이들이 철로에서 놀고 있다.
1962년 서울 시내버스 여성 버스차장 모습. 대중 교통수단인 모든 버스에는 여성 버스차장이 근무해 운임 수납 업무와 손님의 승하차를 통제하는 등 안전운전을 위한 보조역을 했다.
1962년 서울 청계천 주변 길가에서 넝마를 줍고 있는 사람들
1968년 6월 도로확장 공사가 되기 전의 효자동
1968년 7월15일 중학입시 무시험 발표
1968년 10월12일 종로3가 창녀촌
1968년 10월1일 서울 모습
1968년 10월1일 서울시청 주변 모습.
1968년 10월5일 초만원을 이룬 추석 귀성열차
1968년 8월24일 악명높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행방불명)
1968년 10월 17일 정강자씨 등 젊은 미술가들이 한강변에서 전위예술을 공연하고 있다.
2003.8.26 한국 최초 행위예술가 정강자. 가수 남일해 누이동생이다.
1968년 11월 29일 운행 70년만에 폐차 처분되어 차고에 몰려있는 서울의 전차
1968년 11월 3일 새벽 3시30분 대구시 중구 대신동 서문시장 큰 불. 아래 왼쪽이 계성고등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