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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스페인에서 아랍인들: 아베로에스 Les Arabes en Espagne: Averroes 553
우리가 말할게 남아있는 철학자들은 12세기에 번창한 스페인에서 나타났다. 스페인 사라고사의 아벰파스(Avempace, Ibn Bajja 1089-1139)는 자신의 저술 고독자의 체제(Le Régime du solitaire (Tadbir al-mutawahhid)에서 다양한 정도차를 묘사고자 애썼다. 정도 차들에 의해 인간만이 사회적 영향 바깥에서 능동적 예지에 스스로 동일시하기에, 사람들이 정의도 의학도 알지 못하는 완전한 국가의 구성원이 되기에, 악들에 대해 투쟁해야 했던 불완전한 우리 국가들의 몫(할당)들이 되기에 이르렀다. 철학자들이 묘사했던 물질의 추상적 관념들 그 위에, 인간에게 가지적 형상들에 도달해야 만 한다. 이 형상들은 지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형상들 자체에 의해 물질로부터 분리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통일성에 환원되어야 한다. (553)
스페인 카디즈 출신인 아부바세(Abubacer, Ibn Tofaïl, 1105-1185)는 그의 철학적 소설 각성(불면)의 살아있는 아들(Le Vivant fils du vigilant)에서, 만일 그가 지구에서 거주할지 않는 섬에서 태어났다면, 아벰파스의 고독이 무엇일 수 있는지를 상상한다. 그러면 사람들을 그를 보았을 때, 감각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여 신체들의 추상적 형상들로 고양하고, 그러고 나서 신체들의 일반적 원인들로, 영원한 천채들과 그것들의 운동자들로, 결국에는 감관들과 완전히 분리되면서 신에까지 올라간다. (553)
코르도마 출신인 아베로에스(Averroes, Ibn Roschd, 1126-1198)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자들의 왜곡들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실한 의미를 규정할 임무를 스스로 맡고 있었다. 특히 두 가지가 밝혀져야만 했다. 실체적 형상들의 생산작업에 대한 그의 이론과 가능한 예지에 대한 그의 이론. 첫째 이론은 아비세나와 반대로 나갔다. 사람들은 자발적 일반화 속에서 실체적 형상들이, 마치 물질 속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절대적 새로움처럼, 자연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아비센에 따르면 모든 생성에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자연은 그 자체에 의해, 차거움과 더움, 건조함과 습함이라는 네 가지 초기의 또는 능동적 성질들의 상호 작용으로부터 오는, 조합작업들만을 생산한다. 실체적 형상은 이런 저런 존재로 만들어진 주어진 조합작업으로, 자연의 외부에 상위적인 지성처럼 생각된 “형상의 수여자(dator formarum)”로부터, 오게 될 것이다. 아베로에스는 아비센을 비난하는데, 이렇게 자연적 존재를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구별된 두 요인들에 의해 생산되어 접합된 두 존재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 상으로 실체적인 새로운 형상은, 이미 다른 질료 속에서 현존하는 다른 형상에 의해 질료에 도입된다는 것인데(이것은 일의적 생성작용이며, 즉 인간이 인간을 생성한다), 사람들은 물질에게 외적인 “형상의 수여자(dator formarum)”의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체적 형상을 소유하는 신체는, 질료가 형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있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우선 능동적 성질들에 의해 물질[질료]을 변형할 수 있으며, 그러고 나서 신체는 형상을 이렇게 변형된 질료로 생장하게 할 수 있다. 그의 예지 이론은 알렉산드르 아프로디지에우스의 해석에 반대로 나아갔다. 사람들은 작동중인 예지에서는 지성은, 그 지성이 사유하는 가지적인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가지적인 것은 영원하고, 따라서 지성은 그것처럼 영원하다. 그러나 만일 가지적인 것들을 사유하는 주체가 영원하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붕괴할 수 밖에 없는 우리가 그럼에도 그것들을 사유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알렉산드르는 물질적 예지를 만들었는데, 그 물질적 예지가 우리들 속에 자체적으로 있으면서 생겨나고 붕괴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따라서 어떻게 우리가 그것들을 생각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적 예지는, 그것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생장하지 않아야 하고 붕괴하지 않아야 하고 모든 인간들에게 동일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에 난점은 거꾸로이다. 즉 어떻게 우리에게 고유한 지적 활동성이, 시간의 어떤 찰나에 시작하는 지적 활동성이 설명되는가? 가능한 유일 해석은, 이런 지적 작동이 새로운 지적작업(intellection)이 아니라는 것을, 즉 우리를 이 찰나에 작동하는 예지에 통합하게 하는 작동(un acte)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로부터 오는 것,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나타나는 것, 이것은 수동적 예지라 불리는 단순한 조치(cette simple disposition)이며, 이 조치는 우리의 이미지 상태가 우리에게 능동적 예지의 영원한 유출을 받아들이게 허락하는 사실에 있다.
사람들은 라틴계들에서 아베로에스주의의 발전을 곧 볼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처럼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베로에스에 따르면, 종교와 철학은 서로 서로 대립시키는 것이라기보다 사유의 두 단계를 대표한다. 그런데 종교는 너울[장막] 아래 감추어져 있는데, 그 철학자가 발견한 진리들을 세속인에게 접근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진리들에 대한 인식은 철학자가 신에게 숭배하는 것과 동일한 숭배이다. (555)
8절. 12세기까지 유대 철학 La philosophie juive jusqu’au XIIe siècle 555
동일한 세기에 해브라이 철학이 발전되었던 것은 아랍 세계에서 이다. 카발라는 특별한 학설이라기보다 신플라톤주의 신비학의 유대계 형식이다. 율법의 법률적이고 문학적인 주석인 탈무드의 맞은편에, 카발라가 있으며, 카발라는 우리가 보았듯이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전20경–후45)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정신 상태와 비슷한 정신의 상태를 대변한다. 기호들인 철자들과 숫자들에 대한 신비적 의미가 있다. 기호들에 의해서 지혜는 인간에게, 세계의 혼성[조성]작업들과 이 철자들의 불가사의한 상응관계, 일 년의 분할 방식들, 인간의 입체적 배치 등을 이해되도록 해준다. 알레고리적 방법의 사용은 율법의 단어 각각 속에 고차적 의미, 궁극적 불가사의, 권능들과 천사들의 신화학, 신과 피조물들 사이에 매개들을 다수로 만드는 신화학 등을 알게 해 준다. 이러한 모든 것의 어느 것도 매우 새로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 (555)
이사악 이스라엘리(Isaac Israeli, 845-940)는 특히 갈망하는 신플라톤주의로 사유했다. 그는 형이상학 또는 인식 이론에 대해 위계질서를 재발견했다고 말했다. 그 위계질서에서, 하부적인 것이 상부적인 것으로부터 진행하고, 하부적인 것은 상부적인 것의 그림자와 같다고 한다. 지성, 추론할(raisonnable) 수 있는 영혼 동물 영혼, 식물 영혼 등이 있다. 지성 안에는 작동하는 지성, 잠세적인 지성, 상상작용, 감관 등이 있으며, 거기에는 우리가 인식하는 분류하는 방식들이 있다. 그의 편집 작업들은 유용하고, 그래도 역사적으로 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13세기의 라틴계 학자들은 그의 작품 정의들을 다룬 책(Livre des Définitions)에서 진리의 유명한 정의를, 사물과 예지의 합치(adaequatio rei et intellectus)를 발견한다. (555)
사디아(Saadia ben Joseph Gaon, 882-942)는 또 다른 이집트 유대인인데 바빌론에 살았다. 그는 그의 신앙과 지식의 책(Livres de la Foi et du Savoir, 932)속에서 율법 속에서 이법의 몫과 계시의 몫을 규정하려고 시도했다. [이법에 대해] 신에 봉사하는 질서[명령]와 신을 경멸하기를 금지하는 것과 같은 계율들, 잘못 행하는 것에 대한 금지, 이러한 것들은 서로 서로 추리적(rationnels)이다. [신앙에 대해] 그것은 이것들과 다른 것들인데, 이 다른 것이라는 대상은 자체적으로 무차별적이고, 신의 의지에 의해 율법이 되고, 이 다른 것은 계시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둘째 계율들은 첫째 계율들의 집행을 위해서 필수불가경하다. 첫째 계율들은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그것들의 적용의 환경들을 규정할 수 없다. 만일 사람들이 소유를 정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도둑을 방어하는가? (556)
스페인에서 그리고 마로크에서도 유대 철학이 발전되었다. 스페인 남부 말라가 출신인 아비스브롱(Avicebron, Salomon ben Gebirol, 1021경-1058경)은 생명의 샘(Fons Vitae: Livre de la Source de vie)를 썼다. 이 책의 역사적 중요성은 크다. 이 책은 13세기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신플라톤주의의 중요한 근원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실재성들의 위계적인 분류작업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모든 것 위에 고양된 신이 있다. 그리고 의지가, 그 다음으로 형상이 있는데 형상을 규정하는 물질[질료]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형상이 있다. 생명의 샘의 고유한 목적은 형상과 질료에 대한 연구이다. 이 연구의 일반적 생각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유출하는 모든 사물들은, 그 사물들이 기원의 가까이 있을 때는 모여져 있고, 그것들이 기원으로부터 멀리 있을 때는 흩어져 있다.” 가장 높은 수준에서 보편적 형상은 그 자체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서 모든 형상들을 포함한다. 가장 낮은 정도의 수준에서 감각적 사물들은 또한 모든 형상들을 포함하지만 형상들 서로서로 떨어져 있고 흩어져 있다. 이 둘 사이에 실재성들이 있는데, 지성은 이처럼 모든 사물들을 포함하는데 통일하지만 그럼에도 구별되어 있다. 아비스브롱의 둘째 원리는 물질[질료]없는 형상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성의 각 수준에는 물질[질료]이 상응한는데, 그 물질은 수준이 보다 높으면 높을수록 그만큼 더 완전한 물질이다. 왜냐하면 물질ㄹ의 완전성은 가능한 한 가장 큰 통일성의 상태로 형상을 받아들이는데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생명의 샘의 질서가 나온다. 그 책은 가장 낮은 수준에서, 즉 물체[형체]적 실체들의 수준에서 시작한다. 그 책은 계속해서 감각적 성질을 지탱하는 형체적 물질[질료]을, 그리고 물체의 실체적인 형상을 지탱하는 정신적 물질[질료]을, 나아가 매개적인 정신적 실체들(영혼들)의 물질[질료]을, 단순한 실체들(지성들)의 질료를, 결국에는 보편적 형상을 지탱하는 보편적 질료를 연구한다. (556)
사람들은 본다. 이런 위계질서에서 지적 인식이 유지하는 자리[위치]를 본다. 형상들은 지성 속에서 이 모두들이 일체이며,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통합의 지성에 통일되어 있으며, 형상들을 물체에 결합시키는 우발적 통합은 아니다. 신플라톤주의의 본질적 특징은 인식에 실재성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은 그 자체가 마치 일자와 다자 사이에 층계로 되어있는 실재성의 수준들 중의 하나처럼 간주한다. (556)
11세기에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 신비적 경건 운동이 자리를 차지한다. 그 신비 운동은 이븐 파쿠다(Bahya Ibn Paquda, 1050-1120)의 저술 심성들의 의무들에 대한 입문(Introduction aux devoirs des cœurs)이 최근에 번역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556)
모이즈 마이모니드(Moïse Maimonide, 1135-1204)는 1135년에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1204년에 카이로에서 세상을 떴다. 그는 Guide des égarés: Moré Névoukhim 1190라는 저술 속에서 무엇보다 한 랍비이다. 랍비는 율법을 설명하고, 단지 경전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만 철학적 주제들에, 즉 분리된 지성들의 문제들, 천구의 운동들, 형상과 질료의 운동에 접근한다. 그의 철학적 사색은 자치적이다(그를 성 토마스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색은 경전의 진리들을 확정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마이모니드의 사유에 어떤 애매성을 부여하는데, 또는 적어도 서로 잘 못 화해 조정되는 다양한 측면들을 제공한다. 예들 들어 신의 통일성의 현존을 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중요한가(II권)? 마이모니드는 소요학파학자들에게서 우주의 영원성에 근거한, 또한 그들에게서만 인정된, 증명작업을 빌려온다. 왜냐하면, 신이라는 무한한 운동자를 참조하기에 이르는 것은 천체의 구들의 시작도 끝도 없는 운동의 고찰에 의해서 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증명작업이 가능하기 위하여 가설적 자격으로가 아니라면 세계의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계에 대한 그의 체계는 총체적인데, 그것은 마치 아랍의 모든 철학자들의 체계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온 동심원적 구들의 체계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이런 표상작용의 정확성에 관하여 매우 회의적인 것이 남아있는데, 그는 그 정확성을 증명된 것으로 허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557)
마이모니드의 고민들의 중심은 아마도 예언자[랍비]의 지적이고 사회적인 역할이었다. “예언는 신의 유출이며, 신의 유출은 능동적 예지를 매개로 해서 우선 추리적 능력(la faculté) 위에 그리고 상상적 능력 위에 스스로 펼친다. 추론적 능력 위에서만 펼쳐진, 신의 유출은 인간들을 완전한 사회에 재통하기 위하여, 인간적인 개별자들의 행동들을 규칙화하기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소위 말하는 예언자들을 만든다. 행동들의 다양성과 이어지는 그것들의 가능한 충돌들은 사람들이 다른 종에서 보는 모든 것을 넘어선다.” (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