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월 하순(10수)
하루시조172
06 21
경복 북성 외에
무명씨(無名氏)
경복(景福) 북성(北城) 외(外)에 사정(射亭)도 광활(廣闊)할사
지기(知己)를 상휴(相携)하여 사회(射會)를 다한 후(後)에
취(醉)하여 송하(松下)에 누웠으니 날 가는 줄 몰라라
경복(景福) - 경복궁
광활(廣闊) - 넓고 트임
상휴(相携)하여 - 서로 끌어
사회(射會) - 활쏘기 모임
국궁(國弓) 사정(射亭)이 지금도 사직단 뒤, 도성 가까이에 있습니다. 경희궁(慶熙宮) 경내의 정자를 옮겨 놓고 활터를 열었던 것입니다.
논어(論語)에도 나오는 활쏘기. 선비들의 건강 유지책으로 임금이 나서서 대사례(大射禮)를 행했고요, 표적에 맞추기 결과에 따라 벌주(罰酒)를 마셔야 했다는군요.
계절과는 무관하게 틈을 내서 벗과 함께 사회를 치루고, 예법에 맞게 취한 후의 솔그늘을 통해 올려다보이는 창공이 무척 시원스러울 것 같습니다.
국궁장은 전국에 여러 곳이 있습니다. 활터에서 심신을 수련하는 국궁인들이 다수이고요. 제가 아는 사람도 국궁을 통해 위암 수술 후 재활에 성공했다며 저를 상휴(相携)하려고 합니다. 시위를 당길 힘이 있을 때 나가봐야겠습니다만.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73
06 22
오늘이 오늘이소서
무명씨(無名氏) 지음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每日)에 오늘이소서
저물지도 새지도 말으시고
매양에 주야장상(晝夜長常)에 오늘이 오늘이소서
주야장상(晝夜長常) - 낮이고 밤이고 길게 항상. 주야장천(晝夜長川), 밤낮으로 쉬지 아니하고 연달아. 장천(長川).
여일(如一)함, 얼마나 오늘이 좋은 날이었길래 이런 노래가 나왔나, 궁금한 사람은 아직 나이가 젊은 사람입니다. 여일(餘日)이 짦은 사람이 되어보면 압니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음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를 말입니다.
작중 화자는 마치 기도하는 사람으로 시종 경어(敬語)릏 쓰고 있군요. 또한 ‘오늘이 오늘이소서’가 초장의 시작과, 종장의 끝맺음을 장식하고 있는데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74
06 23
옥에는 티나 있지
무명씨(無名氏) 지음
옥(玉)에는 티나 있지 말곳하면 다 님이신가
내 안 뒤혀 님 못 보고 천지간(天地間)에 이런 답답함이 또 있는가
왼 놈이 왼 말 하여도 님이 짐작(斟酌)하시소
님을 만나 직접 사정 이야기를 전할 수 없어 무척이나 답답하다는 하소연입니다. 종장에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저는 깨끗하오니 님께서 짐작하시라는 부탁입니다.
초장은 옥에는 티나 있지 말끔하기만 하다고 다 님이라는 말인가.
중장은 내 속을 뒤집어도 님을 못 보니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종장은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내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리 쉽게 풀는 것이 작품의 완성도에서는 거의 영점 수준이니, 진심을 담아내는 어떤 자연스러움은 작자 당신이 아니거든 누가 따라가겠습니까.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75
06 24
올까 올까 하여
무명씨(無名氏) 지음
올까 올까 하여 기다려도 아니 온다
닭이 울었거니 밤이 얼마 남았으리
마음아 놀리지 마라 님 둔 님이 오더냐
한자어 하나도 안 섞인 순 우리말 어휘로 지어진 작품입니다.
기다림, 아니 올 줄 번연히 알면서도 ‘속는 셈 치고’ 멍청한 짓으로서의 기다림, 연애(戀愛)란 아니 인생이란 이런 기다림의 연속이겠지요. 중장의 첫닭 울고 얼마 남지 않은 밤이라 했으니 그 님은 밤에만 오나 봅니다. 그런데 종장의 ‘님 둔 님’의 앞 ‘님’은 자신이 아닌 다른 상대로군요. 아무리 사랑은 쟁취(爭取)하는 것이라지만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경쟁인 듯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76
06 25
용산과 동작지간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용산(龍山)과 동작지간(銅雀之間)에 늙은 돌이 있다 하데
저 아희 헛말 마라 돌 늙는 데 어디 본다
예부터 이르기를 노돌이라 하더라
노돌이 노(老)-돌[石]인데, 동작과 (한강을 건너) 용산 사이에 있다고 하는군요.
요즘 중대 앞 길을 노늘길이라고. ‘노들’이라고 부르니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을는지요. 마침 흑석(黑石)동도 있으니 돌이 많은 지역이었을까 싶기도 하네요.
초장은 의문을 가진 아이의 질문이고, 중장은 ‘인석아 헛말 마라’ 어른의 핀잔 겸 대답인데, 종장에서 ‘노돌’을 디밀면서 반론 겸 재질문을 합니다. 구성이 깔끔합니다. 돌도 나이를 먹고 늙기는 할 터입니다. 다만 그 시간의 흐름이 매우 더디겠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77
06 26
우뢰 같이 소리 난 님을
무명씨(無名氏) 지음
우뢰 같이 소리 난 님을 번개 같이 번뜻 만나
비 같이 오락가락 구름 같이 헤어지니
흉중(胸中)에 바람 같은 한숨이 안개 피듯 하여라
우뢰 – 우레.
흉중(胸中) - 가슴 속. 마음. 생각.
이 작품을 대하고 보니 요즘 우리네 일상에서 SNS를 이용한 벼락 같은 만남을 이르는 ‘번개’가 들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남녀가, 연인이 만나서 헤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자연물을 동원해 직유(直喩)로 풀어냈습니다. 우레, 번개, 비, 구름, 바람, 안개. 종장의 ‘한숨’으로 집중되는 사유의 흐름이 부드럽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78
06 27
우리 둘이 후생 하여
무명씨(無名氏) 지음
우리 둘이 후생(後生) 하여 네 나 되고 나 너 되어
내 너 그려 긏던 애를 너도 날 그려 긏어 보렴
평생(平生)에 내 설워하던 줄을 돌려 볼까 하노라
후생(後生) - 삼생(三生)의 하나. 죽은 뒤의 생애를 이른다. 내생.
긏다 – 긋다. 성냥이나 끝이 뾰족한 물건을 평면에 댄 채로 어느 방향으로 약간 힘을 주어 움직이다. 할퀴다.
돌려 – 되돌려.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 바꿔 생각해 보기. 짝사랑을 왜 상사병(相思病)이라고 했을까 궁금해 한 적이 있습니다. 상사(相思)란 문자 그대로는 ‘서로 생각하다’인데 말입니다. 전생 차생 내생으로 산다고 할 때 차생의 상사병을 내생에 가서 뒤바꾸어 되돌려 주련다는 하소연이 내용인데, 읽기에 따라서는 하나의 저주(咀呪)처럼 느껴집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79
06 28
은정이 끊어지면
무명씨(無名氏) 지음
은정(恩情)이 끊어지면 시름겨워 어이 하리
월로(月老)의 붉은 실을 한 바람만 얻어내어
만일에 인연이 생기거던 검쳐 맬까 하노라
은정(恩情) - 은혜로 사랑하는 마음. 또는 인정 어린 마음.
월로(月老) - 부부의 인연을 맺어 준다는 전설상의 늙은이. 중국 당나라의 위고(韋固)가 달밤에 어떤 노인을 만나 장래의 아내에 대한 예언을 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월하노인(月下老人).
바람 - 길이의 단위. 한 바람은 실이나 새끼 따위 한 발 정도의 길이이다.
생기거던 – 생기거든.
검치다 - 두 물체를 맞대고 걸쳐서 붙이다.
인연(因緣) 연분(緣分)을 관장한다는 월하노인의 힘을 빌어다가 행여 은정이 끊어질 때를 대비하고, 또한 떨어지지 않게 검칠 것임을 노래하였습니다. 은정, 시름겹다, 월로, 바람, 걸쳐 매다 등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어휘들을 만날 때마다 고시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80
06 29
이러니 저러니 말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이러니 저러니 말고 술만 먹고 노새 그려
먹다가 취(醉)하거든 먹은 채 잠을 들어
취(醉)하여 잠든 덧이나 시름 잊자 하노라
노새 – 노세. 놉시다.
덧 - 얼마 안 되는 퍽 짧은 시간.
‘어느 사이인지도 모르는 동안에’를 뜻하는 ‘어느덧’이란 부사어의 ‘덧’ 역시 시간의 한 단위인 덧을 가져다 만든 어휘입니다. 의식이 있고 수족(手足)을 움직이는 시간 가득 시름이 많은 게 인생사일진대, 술에 취해 잠에 든 짧은 시간이나마 잊자는 내용입니다. ‘이러니저러니’ ‘이러쿵저러쿵’은 붙여 써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처럼 띄어 써도 이렇다 저렇다 시시비비(是是非非) 왈가왈부(曰可曰否)의 의미가 살아나는군요.
술에 취한 채로 까무룩 잠이 들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웬 술을 원수 대하듯 이기려 들었을까나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181
06 30
이러하나 저러하나
무명씨(無名氏) 지음
이러하나 저러하나 이 초옥(草屋) 편(便)ㅎ고 좋다
청풍(淸風)은 오락가락 명월(明月)은 들락날락
이 중에 병(病) 없는 이 몸이 자락깨락 하리라
와가(瓦家)보다 초옥이 좋다고 합니다. 그리 생각하기까지 이러하다 저러하다 설왕설래(說往說來) 걱정과 미련이 밀고 당기는 과정이 있었나 봅니다.
왜 초가(草家)가 좋은가. 청풍과 명월과 병 없는 몸이 줄을 이어 그 이유를 말하고 있군요. 네 글자 의성어 의태어가 적절하게 어울리고 있고요. 우리말 어휘의 맛깔스러움이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청풍은 맑은 바람이니 얽매이지 않고 오락가락하고요, 명월은 밝은 달빛이니 내 방을 들락날락거리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기울어져 갑니다. 초가에 누운 이 몸은 병이 없으니 청풍과 명월을 즐기느라 자락깨락하는군요. 누구였을까요 정말로 편하고 좋은 세월이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역사에 남은 유명 문신들의 문집에 실린 연시조류의 작품 또한 시조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폭넓은 창작을 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