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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3권 합본 1938]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 제3권. 중세와 르네상스(Moyen Age et Renaissance), 463-702
제1장 중세의 발단들 Les debuts du Moyen âge. 465-487
1절 일반적 고찰들 Considérations générales 465
5세기경, 지중해 문명의 통일성은 깨어짐과 동시에 정치적 통일성도 깨졌다. 서방 전체에서 야만족들의 침입으로 도시들의 파괴와 더불어 문화의 전통적 중심들은 사라졌다. 도시문명의 붕괴와 더불어, 고대의 마지막 시기에 통일성을 부여했던 소피스트의 교육도 무너졌다. (465)
카로빙 왕조(718-987) 시대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연구들이 어떻게 그런 불쾌한 조건들에서 계속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로마시대 말기에 일반적 특성을 상기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지적 문화보다 정신적 삶의 발전을 탐구했다. 소피스트의 교육 방식들 또는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에서 과학적 지위들 보다는, 차차 철학적 학파들이 되어가는 정신적 비밀집회들이 보편적 필요에 상응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들이 이미 필론(전20경–후45)에게서와 마레오티스 호수의 임상치료자들에게서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방종교에서도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퓌타고라스 공동체, 헤르메스주의 공동체, 플라톤주의 공동체들도 있었다. 덧붙여 말해야 한다: 만일 플로티노스의 터전과 같은 어떤 터전에서 정신적 삶이 아직 지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면, 또 만일 합리적 조직화의 필요가 지배 했다면, 다른 터전에서 정신적 삶은, 자기 방식으로 제례들도, 제의들도, 예식들도 갖춘, 불가사의한 순수 종교로 변형되는 경향이 있었다. (465)
따라서 이것은 격렬한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적인 삶에서 남아있었던 모든 것이 크리스트교 공동체들 속으로 도피했던, 특히 수도원들 속에 은신했던 자연적 경사에 따라갔다. 모든 서방이 크리스트교화 되었기 때문이다. (465)
이리하여 거의 볼 수 없을 정도의 경이로운 변화가 완수되었다: 지적인 삶은 종교적 삶에 완전히 종속되었고, 철학적 문제들은 크리스트교를 숙명이라고 생각한 대로 인간의 숙명에 관련하여 제기되었다. 이 체제가 지속하는 시기는 지적인 중세의 한계들을, 자연적으로 약간 불확정적인 한계들을, 표시할 것이다. 근대 시기는 지성이 자기 방법들과 자기 문제들을 주장하는 찰나에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근대에 매우 깊은 혁명으로부터 오늘날 가까스로 모든 귀결들을 본다. (466) (56RMB)
2절. 정통정교와 이단교도들, 4-5세기에 Orthodoxie et hérésies aux IVe et Ve siècle, 46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찰에서 조심스럽게 서방과 동방을 구별해야만 한다. 동방에서는 고대의 말기를 표시했던 커다란 종교적 논란거리들 속에서, 사람들은 같은 시대의 신플라톤주의에서 느낀 것과 같은, 동일한 형이상학적 고민을 또 사물들의 가지적 구조를 규정하는 동일한 걱정거리를, 느낀다. 이 모든 논쟁들은 한편으로 삼신성의 문제로, 그리고 위격들 사이의 연관의 문제로 귀착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신적인 위격으로서 말씀과 인간으로서 예수-크리스트 사이의 연관으로 귀착될 수 있다. 종교 권세와 성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신학자들 사이의 다양한 분화들은 철학적 질서가 있었던 것과 닮았다. (466)
한편으로 [동방에서] 이단교도들이 있다. 사벨리우스(215활동)와 양상론자들은 말씀으로 신의 아들을 만들면서, 다신론에 빠질 것을 두려워했다. 아리우스/아레이오스(250-336)는 똑같은 정신에서 그러나 반대방향에서, 신으로부터 신의 피조물을 만든다는 조건에서, 인격으로서 신의 아들을 인정했다. 그 피조물은 모든 피조물들 중에 첫째이며,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 비추어서 영원도 공동영원도 아니다. 왜냐하면 신은 자기 원리이기 때문이다.” 안티오크의 신학파는 예수-크리스트 속에서 인간과 다른 것을 보기를 거부했다. 그 인간은 신성의 은총들로 가득 차 있으며, 신-인간의 형이상학적 조합들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생각은 네스토리오스(381-451) 이후에 크리스트교리에 퍼졌는데, 극동에까지 나갔다. 이러한 모든 견해를 통해서, 한편 사람들은 합리주의적 영감의 표시를 본다. 이런 합리주의적 경향은 분류하고자하고 혼동들을 피하고자하면서 구별하고자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견해들에 마주하여 정통교리의 독단이 구성된다. 그 독단은 신중심주의에 일치시키고자 애쓴다. 신중심주의는, 크리스트교의 현존 자체에 필수불가결한 구별들과 더불어, 신적인 통일성 속에 모든 차이를 감춘다. 아레이오스에 반대되는 아타나시오스(296-373)의 정식과 니케아 공의회(325)가 있다. 그 정식은 다양한 위격들을 갖는 신 속에 실체의 통합이다. 이런 정식들을 가지고, 퀴릴로스(375-444.)와 에페소스 공의회(433)는 네스토리오스파를 단죄하였다. 크리스트 안에,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라는, 자연들의 이원성은 마리아가 성모, 즉 신의 어머니라는 것을 막지 않았다. (467)
서방에서 이런 충돌들은 동방과 동일한 시대에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충돌들은 다른 질서의 것이었다. 이것들은 모든 사람들을, 즉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교회 제도의 필연성과 교회 위계의 필연성을 겨냥했다. 그러한 것으로 도나티슴이 있고, 이것은 아프리카 작은 마을에서 생겨났는데, 한 세기를 지나서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지도하던 411년에 논쟁이 일어났다. 그러한 것으로 펠라기아니슴도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생애 내내 펠레기우스파와 싸웠다. 교회는, 신적인 은총들의 내림에 필수적인 제도인 한에서, 이 이단교리들과는 서로서로 양립할 수 없었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이 주장하기를, 교회제의의 가치조건은, 그 가치를 부여하는 신부의 도덕적 가치이라 했다. 그것은 실천적이고 엄격하며 개관적인 규칙들에 근거한 공동체로서, 교회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교회를 모든 사람들에게, 신부들의 도덕성의 주관적 평가 작용의 운수들을 전하는 것이었다. 교회제의들 부여하는 자는 그의 심장에서 성인이 아니며, 게다가 권리라고 말하는 로마의 정의는 정의가 아니어야 한다. 이런 형식주의가 안정성의 조건이었다. (467)
펠라기아니슴에 관한, 충돌의 출발점은 수도사인 펠라기우스(350경-420경)의 수도원 개혁의 시도였다. 그는, 살의 연약함에 관해 신적 법칙을 집행하지 말자고 자기 변명하는 크리스트교인들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위하여, 만일 인간적 자연[본성]의 힘들을 원하고서 제시하려 했다면, 인간은 선(善)을 행할 힘을 가지고 있다고 설교했다. 그리고 그는 원했다. “영혼이 할 수 있다고 믿기보다, 또한 영혼이 자기가 모른 것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보다, 영혼은 덕목에게 그렇게 많이 느슨하고 느리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고 한다. 이것은 스토아에서 덕목의 신뢰를 함께하는, 스토아학파의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전적 전달과 함께하는 원죄의 부정이다. 왜냐하면 신은 우리에게 타인의 죄를 전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크리스트의 작업을, 퀴니코스학파의 성자들의 방식에 따라 우리에게 모범으로 사용하는 스승이나 박사의 작업처럼 제시하는 것이지, 그것은 그의 장점들이 인간을 정당화해주었던, 그 희생자의 작업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가 신앙자들의 조치에 맞다는 것은, 은총이라는 수단에 즉 교회제의에 맞는 최후의 모든 중요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들에 대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개종의 개인적 경험을 대립시킴과 동시에 교회의 효과적 실재성을 대립시켰다. 만일 펠라기우스가 진실을 말했다면, 그 사람은 자기의 기도들에 의해 유혹을 벗어나기를 요구하지 않아야 하고, 게다가 그가 무너졌을 때 기도하지 않아야 한다. 펠라기우스파들은 우리들의 선을, 우리 속에서 신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것에서, 발견하고자 애쓴다. 만일 그들이 선한 의지가 신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현존과 동일한 자격에서이다. 그리고 그 때에 신은 이런 경우에 또한 나쁜 의지의 작자일 것이다. 또는 만일 사람들이 신은 의지만을 생산한다고 인정한다면, 만일 의지를 선하게 하는 것이 인간 그 자신이라면, 그 결과로서 우리에게 오는 것보다, 즉 선은 신으로부터 오는 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떤 엄격함으로 자기 태도의 귀결을 따랐는지를 안다. 모든 선은, 원죄에 의해 타락된 영혼에게 이를 수 있으려면, 특별한 은총으로부터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획득된 장점들에 의존하는 구원은 단지 신에 의해서 먼저 숙명적으로 모든 영원성에 약속되어 있는 자들에게만 속한다. 세례 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이들은 정당하게 단죄 받은 것이다. 크리스트의 은총에 접하지 못했던 이방인들은 그 덕목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 (468)
이런 이중 충돌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충돌에 제공한 해결책과 더불어, 서방 사상이 다음에 곧 전개되어 갈 [교회]터전을 이해하게 한다. 이제부터 교회는 인간을 위한 구원의 모든 수단을 보유하도록 보장 받는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540경-604, 재위 590-604)의 작품은 교회의 정신적 권력의 결정적인 강화가 될 것이다. (468)
이런 충돌들은 동방의 의미에서 독단에, 말하자면 신성의 형이상학적 구조에 접근하기보다, 오히려 성직자의 정치(용어의 가장 높은 의미에서)에 접근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인간 영혼의 종교적 삶이 중요할 때는 매우 견고하며, 그러한 것에서 소위 말하는 독단에 이르자마자 결단력이 없어진다. 이리하여 영혼의 기원에 관한 논쟁거리에서(그것의 해결은 그럼에도 은총의 이론 덕분에, 완전히 필수적인 형이상학을 형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결론을 내리지 않고서, 우리의 부모들의 영혼으로부터 우리 영혼을 파생시켰다고 하는 영혼유전설과 각각의 영혼을 가지고 허무로부터(ex nihilo) 피조물을 만들었다는 창조주의 사이에서 주저하였다. 그리고 그는,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성질들 또는 완전한 자연에 관해, 마치 자기 자신의 어느 것도 자기로부터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논의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에 반대하여 강하게 주장한다.(469)
덧붙이자.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 590-604)와 더불어, 교황들이 12세기까지 권력을 이의 제기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장악하고 있었던 순간 이래로, 교황들은 신학적 사색에 알맞는 어떠한 충격도 주지 않았다. 모든 정치적이고 법률적인 것에 앞서서 그들은 지석인 운동의 선두를 장악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영혼에 관하여 자신들의 정신적 힘을 끌어내기를 원하는 모든 권리들을 주장하고 보증하는데 전념했다. (469) (56RMB)
3절 5세기와 6세기: 보에티우스 Le Ve et VIe siècle: Boece 469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전통은 신앙의 진리들을 유용하게 지지할 수 있었다. 그러한 것이 마메르투스(Mamertus, 420-470경)의 확신이다. 지방의 수도사인 그는 468년경에 영혼의 지위(468)에 대해 썼는데, 그 책에서 그는 영혼의 정신성에 관한 모든 철학적 권위들을 재통합하였다. 그는 성 바울에 근거를 두면서, 경멸자들이 철학자들을 무지하다고 고발할 만큼이나 철학자들이 진리에 대해 무지하지 않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 동료들의 지적 나태함을 비난하였다. 그는 플라톤이 어디에서 어려운 처지에 빠졌는지, 오해에 대해 불평했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신이 인간들에게 진리를 아직도 계시하기 않았던 시기에, “성육신화가 일어나기 앞서 많은 세기들 동안에도, 신은 하나이며 신 속에 세 인격들 발견했다.” 마메르투스에 의해서 초기 중세는 영혼의 비물질성에 관하여 파이드로스, 티마이오스, 파이돈의 견해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시기에, 또한 이런 학설사들의 마지막 상속으로, 단절에서 잘못 접속되어 이루어진 슬픈 박식함의 표본을 발견했다. 그 학설사들은 이미 고대에 그 철학적 과거를 요약하기를 끝냈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이 학설사들에서, 그리스 철학자들(퓌타고라스학자들과 플라톤학자들) 이외에도, 로마 철학자들(섹스티우스와 바로), 게다가 바르바르 출신들(조로아스트르, 브라흐만들, 아나카르시스) 등을 볼 수 있으며, 게다가 영혼의 정신성의 보증자로서 아주 기묘하게 불렸던 스토아학자인 크뤼시포스(전281-205)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469)
보에티우스(Boèce, Boethius, 480-524)[마흔둘]는 “[서]로마인들 중의 최후 인물”로서, 480년에 태어나, 510년에 집정관(consul)이 되었으며, [로마의 왕] 테오도리쿠스(455-526)에게 불려가 고위 공직들을 지냈으며, 마술 때문에 고발 받고서 525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초기 중세는 고대 철학에 관하여 매우 제한된 용어들을 가졌으나, 보다 실체적이었다. 보에티우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과 이들의 주석서들의 여러 작품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거대한 작업을 시도했었다. 이 저술은 13세기 이전까지는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만일 이 저술이 성공했더라면 아마도 중세 철학의 운명들을 아주 달리 이루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작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적 저작들의 일부에까지 닿아있었다. 포르퓌리오스의 주석에 영감을 받은 주석과 더불어 범주론의 번역, 두 개의 주석이 딸린 해석론의 번역이 있고, 또 암모니오스(435-517)의 영감을 받은 주석들과 더불어 포르퓌리오스(232?-305)의 이사고게 번역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작품의 나머지에 대해, 어떠한 번역도 없지만, 범주적이고 가설적인 삼단논법들과 여러 변증론의 교본들이 있다. (470)
여기에 고대로부터 남은 거의 부정확한 용어들만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한 부분이지! 그러한 것은 대단한 결말이다. 포르퓌리오스를 따른 보에티우스가 지적한 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들, 실체, 질, 양 등등은 사물들 자체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문법적인 단순한 분류들도 아니다. 범주들은, 단어들이 사물들을 의미하는 한에서 단어들을 다루고, 사물들이 단어에 의해 의미되는 한에서 사물들을 다룬다. 그런데 그에게서는 언어는 인간적인 제도일 뿐만이 아니라 모든 명사는 개개의 물체적 사물을 지칭하기 위하여 우선 고유명사이다. 범주들은 그리고 범주들에 이어서 논리학 전체는 물체들로서 이루어진 물체적 사물들에 자연적으로 적응된다. (470)
이로부터 포르퓌리오스가 이사고게의 앞부분에 이런 항들로 제기했던 문제의 고민이 나온다. “(구체적 물체적인 사물들을 의미하지 않는 단어들에 의해 지칭되었던) 류들과 종들에 관한 한, 이것들은 현존이거나 또는 우리의 사유들 만에 있는가? 만일 그것[류와 종]들이 현존이라면, 그것들은 물체들 또는 비물체적 사물들인가? 만일 그것들이 비물체적 사물들이라면, 그것들은 분리되는가 또는 감각적 사물들 속에서만 현존하는가?” 포르퓌리오스는 단지 물음 제기하였다. 보에티우스는 이것들에 주석을 달면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이에 대해 발견했던 해결책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해결책은 명백하게 플라톤주의의 이데아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끌어냈다. 류는 여러 개체들로 동시에 현존한다. 따라서 류는 자체적으로 현존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자체적인 한 존재의 수적인 단위는 종들 속에 류의 흩어짐과 양립할 수 없거나 또는 개별자들 속에 종들의 흩어짐과 양립할 수 없다. (471)
보에티우스는 또한 신학적 글쓰기들을 작성했는데, 12세기까지 주석이 달리고 매우 잘 읽혔다. 글쓰기들은 변증법적 글쓰기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삼위일체에 대하여의 깊이를 이루는 것은, 예를 들어 이런 질문에 있다. 변증법의 규칙들이 신학자에 의해 진술된 명제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담론을 이루어지 못했었던 주제들에서 그 담론을 이용하기 위한 특별한 규칙들, 취해야할 주의해야할 사항들이 어떤 것일까? (471)
결국 보에티우스는 그의 유명한 철학의 위안에 의해 작업하게 된다. 그는 권력에서 추락 후에, 이 책을 감옥 안에서 썼다. 이 작품 속에 크리스트교에 대해 거의 어떠한 흔적도 없다. 이 작품은 운문과 산문이 혼합되어 있는 문학적 형식으로 써졌으며, 로마의 설교를 표본으로 하고, 그의 깊이에서 스토아학파와 플라톤주의 변신론의 모델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그가 희생자가 된 불의[부정의]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인간적 사정들의 경과가, 사람들이 이것을 자연의 완전한 질서와 비교할 때 매우 무질서하지만, 맹목적 운수에 맡겨지는가? 이것은 플라톤의 고르기아스편과 법률편의 옛 주제이며,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의 주제이기도 한다. 이러한 의심들과 이런 절망의 치유는 두 시기로 이루어진다. 우선 “보다 부드러운 치료제들”이 있다. 운수의 여신(la Fortune)은 텔레스(Τέλης, 전240년 활동)의 설교와 동일한 재능의 설교로서, 보에티우스에게 증명하기를, 운수에 대해 불평할 이유가 없다는 것, 그리고 진실한 지복은 모든 주사위운수를 달게 받아들인다는 것, 심지어 나쁜 운에도 이로울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보다 거친 치료제들”이 있다. 철학은 증명하기를, 독립적인 진실한 행복은 온선이면서 완전한 통일성인 신 속에만 있다는 것이다. 자연의 주제자인 신은 다른 존재자들에게 선을 향한 충동을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잘못은 그에 의해 생산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오직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나쁜 자들의 성공으로부터 갖는 경험과 더불어 온섭리의 주장에 일치시키는 것이다. 고르기아스편과 폴리테이아편과 더불어 철학이 대답하는 것은 겉보기 성공이다. 모든 나쁜 자들은 결과적으로는 불행하다. 각 존재의 운명은 실제로는 온섭리에 잘 의존한다. 온섭리는 자연적인 힘들에게 자신의 의지들의 세부적인 집행을 전한다. 이리하여 진실한 정의는, 겉보기 정의와 많이 다르기에, 결국 실현된다. 그리고 만일 사람들이, 숙명에 관한 관점이 - 사람들이 믿기에 신적인 예지와 화해할 수 없어서, - 자유의 부정을 가정한다면, 보에티우스는 우선 키케로와 더불어 대답할 것이다: 신적 예지는 사건들의 필연성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하고, 이어서 우리는 신의 예지를 우리 스스로 형상화하는 잘못을 범한다는 것이다. 신의 예지는 우리 추론들의 전형에 관해서 영원한 현재 속에서 살면서 안다. (472)
책의 부자연스런 특성에도 불구하고, 이 감동적인 저술은 오랫동안 도덕적 삶의 독특한 증거들 중의 하나로 남을 것이다. 도덕적 삶은 당시의 정신적 권력들 속에서와 다른 곳에서 삶의 영감을 길어 올린다. 우리가 말하지만 독특한 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초기 중세에서는 루카누스(39-65), 베르길리우스(전70-전19), 키케로(전106-전43)도 또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472)
만일 사람들이 이 작품에 니코마코스 게라세노스(60-120)를 모방한 그의 산술학 교육론에 그리고 그의 음악 교육론을 보탠다면, 사람들은 서양 중세의 헬레니즘 문화의 전승에서 보에티우스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보에티우스가 독창적인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는 적어도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루고 또한 기원에까지 가는 장점들 가지고 있었다. 보에티우스 이후에는 사람들은, 성직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옛 서적들의 발췌본들과 요약본들 만드는데 주의를 기우렸던 천박한 표절자들만을 보게 될 것이다. 이들의 표본들 중의 하나는 아프리카인인 마르티아누스 카펠라(360경–428경)이다. 그는 5세기 초에 문헌학과 전달학의 결합[아홉권]이라는 제목으로 교본을 썼는데, 그 책의 각권은 3세기에서 9세기까지 일곱 기초학문의 하나에 할당되었다. 이 저자 자신은 바로(전116-전27)의 전과목을 베끼는 표절자이다. 제4권 변증론은 라틴계 유명한 학자의 찬사에 의해 시작하는데, 중세에서 “동사의 다섯 태들”, 류, 종, 차이, 고유함, 우발, 10범주들, 대립들, 명제들, 삼단논법들을 알게 해준다. 제6권은 특히 플리니우스(23-79)에게 빌려온 지구에 대한, 그리고 유클리드 기하학원론에서 나온 빈약한 세부사항에 대한 긴 서술을 포함하고 있다. 제7권은 실증적인 몇몇 정리를 가지고 환상적인 상징적 수리론과 이웃하게 놓았다. (472)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 477-575)는 보에티우스의 친구이며, 자기 생애의 긴 부분을 비바리움 수도원에서 지냈다. 특히 그는 사라진 학문을 재통합하고 전달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그는 신학적 백과전서인 신적인 교육제도들, 그리고 자유 인문학들을 가르치는 낭독용 세속교육들을 썼다. 그러나 이런 저술들의 첫 저술에서 자유 인문학들의 인식은 그 기원이 성서 경전에 있다고, 그리고 그 경전을 진리의 봉사에 써야 한다고 그는 선언했다. 그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것으로써, 도나투스(Donatus, 315-380)의 문법학을, 마리우스 빅토리누스(Marius Victorinus, 290-364)에 의해 주석달린 키케로의 수사학과 킨틸리아누스(Quintilianus, 35-96)의 수사학을, 마르티아누스 카펠라(Martianus Capella, 360경–428경)보다 더 멀리 전개하지 않은 변증법을, 보에티우스의 산술학의 요약본과 유클리드 기하학의 요약본을 제공해 준다. (473)
카시오도루스의 영혼론(De Anima, 538)은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와 마메르투스(420-470경)로부터 온 것이다. 작가는 영혼의 자연에 관하여 철학과 종교가 대립하는 영감주의 이중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세속적 학문들의 스승들”은 영혼을 “단순한 실체, 신체의 물질과 다른 자연적 형상, 기관들의 용도와 삶의 덕목을 소유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진정한 박사들의 권위”에 따르면, 영혼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정신적이고 소위 말해서 실체이며, 신체를 위한 삶의 원인이며, 추론할 줄 알고 불멸성이고, 그리고 스스로를 선과 악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는 세속적 문인들에 따른 불멸성의 증거들을 구별할 수 알고(그것은 본질적으로 파이돈편의 증거들이다), 보다 더 쉽게 “진정한 권위들”에 의해 증거를 구별할 줄 안다(영혼은 신의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인간에 있어서 잘못의 인식에 관하여, “창조자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인간적 오류를 따르는” 철학자들을 언급해야 한다. (56RME)
4절. 이법과 신앙 La raison et la foi ,
그러한 조건들에서 이법과 신앙 사이에서 연관들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는 방식으로 제기되었다. 교회와 같은 제도는 일체의 사색적 진리들이 아니다. 사색적 진리들에 근거한 신앙 또는 이법은 일치 또는 충돌이 있을 수 있다. 교회 제도는 정치 체제 또는 법률적 규약들과 동일한 자격으로 인정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주의가 단호하게 정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적 나라이다. 이 나라는 두 가지 인식들을 포함하고 있다. 순수하게 세속적 인식과 신적인 사물들의 과학이다. 세속적 인식은 이런 예비 교육 또는 자유학문의 일체를 형성하는데, 이런 교육에는 어떤 필론과 어떤 세네카와 같은 것이 철학의 초보에 자리한다. 문법학, 수사학, 변증론이라는 3학(le trivium)는 말씨와 담론의 모든 기술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4과(le quadrivium)은 플라톤이 철학의 출발점에서 행한 네 가지 학문들을 혼성하고 있는데, 산술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다. 어떤 필론에게서도 어떤 세네카에서도 그렇지 않듯이, 네 학문들도 그 자체로서 그것들의 목적을 갖지 않는다. 학문들은 이것들을 다른 성직자들에게 가르치는 성직자를 위해서만 정당화되고, 그 만큼이나 이 학문들은 신적인 사물들에 학문에 봉사할 수 있다. 그런데 3학은 온성문(쓴글)과 온아버지들에 대한 강독과 설명을 위하여, 그리고 독단의 교육을 위하여, 학과의 필연성 속에서 학과의 정당성을 발견한다. 4과는 교회 의례와 교회의 성축일에 필수적이다. 또한 제한된 사용 때문에 사람들은 획득된 인식을 증가하게 할 필요를 체득하지도 못하고, 과학들을 그 자체로서 촉진할 필요도 느끼지도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소 넓은 백과사전들에서 과거의 유산 목록을 작성하는데 만족한다. 이리하여, 순수하게 추리하는 질서로 된 이런 인식들은 어떠한 자치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거기서 단지 획득된 것만을, 그리고 이런 인식들이 교회에 봉사하는 정도에서만 유지하고 있다. (474)
여기서 백과전서들이 나온다. 이 백과전서들은 샤를마뉴(747-814)시대에 앞서서 유럽의 작은 도시들에서 쓰여 졌다. 소도시에서 즉 스페인과 아일랜드에서 어떤 지적인 삶이 유지되었다. 세빌리아의 주교인 이지도루스(Isidorus, 560-636)는 어원 연구를 썼으며, 그 책은 “옛 책의 추억에 따라서 어떤 사물들의 기원에 대해” 다룬다. 3학과 4과에 관한 세 권의 책들, 그 중에서 변증법에 관한 장들은 아쀨레이우스(125-170)와 마르티아누스 카펠라(360경–428경)에서 온 것인데, 논리학의 몇 가지 요소들 이외에도 철학의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 달력을 재료로 하여 성직자들에게 흥미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에 관한 열일곱 권의 책들은 역사, 자연사, 지리학을 포함하고 있다. 베다 베네라빌리스(Beda Venerabilis, 672-735)는 영국 중부의 도시 재로우 수도원에서 같은 품격의 사물의 자연에 관하여를 썼는데, 여기서 한편 그는 이지도루스를 복사하고, 다른 한편 대(大)플리니우스를 이용하였다. (474)
신적 사물의 학문에 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한편 이 학문도 종교 권한에 근거하고 있다. 그 권한은 단순한 어떤 것이 아니다. 이교도들도 또한 권한에 근거하고자 원하고, 아리우스파들도 자기들에 맞게 성문경전을 인용한다. 이로부터 어려움들이 나온다. 이 어려움이 빈센티우스(Vincentius, ?-450경)의 요약집(434)의 고유한 목적을 이룬다. 이 저술은 434년경에 쓰여졌으며, 진실로 중세 사유를 열면서, 신앙을 재료로 하여 진실한 전통을 분간해내는 숙명적인 규칙들을 정식화하고 있다. 다수의 견해를 선호하여 따르는 것, 사적인 견해를 경계하는 것, 그럼에도 이교가 펼쳐질 위험이 있을 경우에 고대의 견해와 결합하는 것, 사람들이 이러한 견해들에 오류들이 발견한다면 전교회의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는 것, 또는 만일 공의회에도 없다면 정통파 스승들에게 질문하고 비교하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하는 견해를 찾는 것이다. 전통 속에 성장발전이 많이 있으나, 그 보태기 또는 혁신에 의해 진행하는 유기적 성장발전이 아니다. 따라서 중세의 초기부터 고정된 규칙들이 있는데, 이 규칙들은 어떠한 철학적 사유의 개입 없이, 정신적 통일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이 틀림없다. (475)
다른 한편 신적 사물들에 관한 중세의 사유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신플라톤주의의 전통을 받아들인다. 신은 탁월한 의미에서 지성이며, 가지적인 것의 근원이다. 신의 인식 또는 통찰은 지적인 전체 인식보다 상위의 한계와 같다. 플로티노스처럼 성 아우구스티노스는 생각한다. “영혼이 곧 스스로 집중될 것이고 배열될 것이며 조화롭고 아름답게 될 때, 그러면 영혼은 신을, 모든 진리가 흘러나오는 근원 자체를, 모든 진의 아버지자체를, 감히 곧 보게 될 것이다.” 이런 통찰 그 아래에 작은 수에 보류되어서, “가지적인 것에 자연적으로 통합된 지성적 영혼은, 영혼자체와 동일한 자연[본성]의 비형체적인 어떤 빛 속에서 진리들을 깨닫는다.” (475)
이 두 주제 사이에 전혀 근친관계가 없다. 한편으로 정식들의 일체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자유로운 정신성이 있다. 정식들은 공의회와 교구회의에 의해 논의 되었는데, 이는 마치 사람들이 법률적인 정시들을 토론하는 것과 같다. 정신성에서 인식은 신앙에 의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신의 충만한 인식을 향하여 방향을 잡는 것이다. 중세의 이 중대한 파라독사는 이 둘 사이의 연대성을 정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신에 근거한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신앙(la foi)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이법[추리]은, 빛이 비쳐지는 지성의 의미에서, 신앙을 소비해야만 한다. (475)
시대의 정신은 교직자들을 교육시키는 방식에서 특별나게 작품들로 표출된다. 822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부근 작은 도시 풀다의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도원장으로 선출된 라바누스 마우루스(Rabanus Maurus, 776-856)의 종교직위의 교육론도 그러한 작품들에 속한다. 이 저술의 제3권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크리스트교 학설의 마지막 세 권의 편집이다. 이 저술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모든 과학을 종교의 진리들의 인식으로 이끌고, 경전문장들의 과학 속에 가두어 놓았다. 라바누스 마우루스가 쓰기를 “지혜의 토대와 완전함은, 성스런 문장들의 과학이다”라고 한다(3권 2장). 그 시대의 문학적 생산물은 무엇보다 먼저 옛 경전에 근거한(특히 「창세기」 6일간의 작품), 그리고 복음들과 사도들의 서간들에 근거한 수많은 주석들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이 주석들은 앞선 세기들의 위대한 박사들의 주석들을, 성 힐라리우스(Hilarius, 315-367)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석들을, 반복하고 확대하였다. (476)
이 주석의 규칙들은 그리스와 라틴 교부들을 매개로 해서, 필론의 알레고리적 주석에 연결되어있다. 말하자면 주석은 과학적 또는 철학적인 질서로 된 어떠한 인식이 아니며, 주석은 그 질서를 사용할 수 없었다. 라바누스 마우루스는 교직자들에게 이야기의 순수진리(pura veritas historiarum)의 인식과 우화적 주제양식(modi tropicarum locutionum)의 인식을, 말하자면 경전의 이야기가 문자 그대로 취해야 하는 경우들과 이야기가 알레고리로 해석되어야만 하는 경우들 사이의 구별을 요구했다. 그 자신은 경전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들에 대한 모든 알레고리의 해석들의 긴 사전을, 이렇게 주석들을 위한 재료들을 통합하면서, 제공하였다. (476)
그러나 그러한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모든 학문들이 이런 목적에 사용되어야만 하고, 심지어는 “자유 인문학”과 철학을 포함하는 이교도 학설들을 이용해야만 한다. 보에티우스(480-524)로부터 마우루스(776-856)에게 까지, 사람들은 저 학설들 속에 전적으로 크리스트교와 교회와는 낯선 지적 전통이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옛 백과전서들에서 보존된 이런 문화의 모든 찌꺼기를 나열하기보다, 이런 인식들의 덩어리에 마주한 크리스트교인의 태도를 잘 고려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들의 덩어리는 진실로 인식들에 침투할 수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열쇠 없이, 말하자면 그 방법 덕분에 인식들이 발명되었는데도 지적 방법들 없이 크리스트교도들에게 전달되었다. (476)
그런데 이런 태도는 애매함이 없지 않다. 한편으로 이교도인들의 학설들 모두를 진리의 동일한 근원로 끌고 가는 경향성이 있으며(확실히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유래된 것인데), 거기에서부터 크리스트교의 계시가 흘러나온다. “사람들이 세기의 과학자들의 책들 속에서 발견하는 진리들은 온진리와 온지혜에 속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진리들은 사람들이 그 진리들을 읽은 책들 속에서 학자들에 의해 당장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존재로부터 퍼져 나오면서 진리들은, 온진리와 온지혜가 그들에게 영원한 존재를 발견하게 허락했던 정도에서 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리하여 모든 것은 하나의 유일한 항으로 이끌려져야만 한다. 성문[쓰여진 글]들 속에 구원하는 것이 있다는 만큼이나 또한 사람들은 타방인들의 책들 속에서 유용한 것을 발견한다.”(2장) (477)
과학의 방법은 주석의 철학적 방법과 다른 자연이 아니다. 마치 주석가가 책 속에서 제도로 만들었던 것을 발견하듯이, 신이 자연 속에서 제도로 만들었던 것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로부터 나쁜 과학들과 좋은 과학들 사이에 출발점이 나온다. 전자는 “인간의 제도들에 따른 것들”(16장)이며, 말하자면 우상의 재단들과 마술의 기예들이고, 후자는 그 자체들에서 둘로 분화된다. 첫째로 물체적 의미에 연관들이 있는 과학들이며, 우리에게 과거를 인식하게 하는 역사, 감관들에 의한 현재의 인식, 미래를 향한 추측들로서 천문학자의 지식들과 같은 것들이며, 이런 지식들은 경험(experimentum)에 근거한다. 둘째로, 자유 기예의 일곱 학문들이 있다. (477)
[다른 한편] 통일하거나 혼합하는 경향성이 있는 진리의 유일 근원에 대한 이런 용어 이외에, 아주 다른 원리가 작용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경전성문(Ecriture)의 주석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세속 과학들의 총목록들은 그 자체들이, 성문의 정신적 의미의 지성을 위하여 재료들을 제공할 뿐임에 틀림없다. 목록들에는, 예를 들어 라바누스 마우루스의 눈에는 한 부분으로, 시의 편집에 지성에 필수불가결한 운율학(la métrique)을 포함하는 문법학이 있다. 진리들의 연결들의 규칙들을 가르치는 변증론이 있는데, 그 규칙들은 무엇이 성문의 의해 가르쳐진 진리들을 적확하게 연역될 수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수의 인식 덕분에 산술학이 있는데, 산술학은 무지자들에게 닫혀있는 채로 있는 경전성문의 감춰진 의미를 우리에게 발견하게 해줄 것이다. 기하학이 있는데, 이 학문의 비례들은 감실과 신전의 구축에서 관찰되며, 우리에게 정신적 의미를 관통하는데 도움을 준다. 마지막으로 천문학인데 시간의 계산에서 필수 불가결하다. (477) [일곱 중에서 여섯 가지만 설명했는데, 나머지 하나는 음악일 것이다.]
우주에 대한 인식도 자유 인문학들의 인식과 동일한 용도를 갖는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거기서 일체의 이미지를 찾는다. 베다(Beda Venerabilis, 672-735)의 사물의 자연에 관하여는 요소들의 질서에 따라서 세계를 묘사한다. 하늘은 행성들과 별들을 가지고 있고, 공기는 기상들, 유성들, 바람, 천둥, 번개, 무지개를 가지고 있으며, 물, 즉 대양은 조수들과 홍해, 나일강의 범람을 가지고 있고, 땅은 자기 내부에 화산들을 가지고 있다. 시간의 추정(725)에서는 여섯 시대들로 된 역사의 완전한 목록이 있다. 그 시대들의 마지막 시대는 로마제국의 초기부터 시작해서 아직도 지속하고 있다. 광범위한 목록들 일체 중의 어느 특성도, 거의 예외 없이,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나오지 않았고, 거의 모든 것은 전통으로부터(특히 대(大)플리니우스로부터) 온 것이다. 이 목록들 용도는 라바누스 마우루스(776-856)의 우주의 작업의 종류에 대해 백과전서들로 제시한다. 마우루스의 과학은 이지도루스(560-636)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이런 편집의 통일성을 이루는 것, 편집이 백과전서의 하나이라는 정도에서, 그것은 우주 전체의 알레고리적인 넓은 해석이다. 그 해석에서 세계의 모든 세부사항들은 정신적 의미를 갖는다. 성스런 책의 사유는 거기서도 영속적으로 현재해 있다. (478)
따라서 사람들은 크리스트교가 헬레니즘 문화로부터 무엇을 흡수하는지를 안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에 대해 위대한 종교적 작품을 위한 재료들로부터, 인간을 활성화하는 정신으로부터, 사람들은 가장 가벼운 의심도 갖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그 작품들을 내부로부터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보다도 그 작품을 목록으로 만들고 또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교육받은 모임들 속에서, 사람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이후로 철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마우루스가 말하기를, “만일 사람들이 철학자들이라고 부르는 자들 자체가, 특히 플라톤주의자들이, 자유 기예들에 대해 말한 이후에, 그들의 진술과 저술들에서 우리의 신앙과 일치하는 진실한 사물들을 말했다고 하게 되면, 사물들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물들을 우리의 용도에 맞게 취급해야 한다. 이는 마치 불의의 소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위 책, 24장) (478)
만일 사람들이 8세기의 인간이 철학적 과거를 재현하기 위해 가졌던 수단들을 재현하기를 시도했다면, 이들이 발견하는 것이 있다: 한편으로 진지한 작품들의 계열인데, 저 저급한 시대에서부터 분리되면서 연결성이 없었다. 그리고 이 작품들 계열은 모두가 신플라톤주의의 정신성에 매여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칼키디우스(Chalcidius, 4세기경)의 ‘티마이오스’편 주석과 마크로비우스(Macrobius, 370경-430경)가 키케로의 동일한 대화편의 첫 부분 번역한 ‘스키피온의 몽상’의 주석을 – 이 후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플로티노스와 포르퓌리오스를 통과했던 것을 - 말하고자 한다. 다른 한편으로 둘째의 출처로는 아주 수많은 학설사론들이 있다. 이것들은 많은 양의 역사적 세부사항들을 제공했는데, 게다가 사라진 학파들에 관하여 점점 더 왜곡되고 부정확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학설사들에 대해 라바누스 마우루스는 우리에게 하나의 예를 제공한다. 학설사들은 교부들로부터 나왔으며, 교부들에게서 학설사들은 이교도 철학적 분파들과 크리스트교 이단들 사이에 동일성을 증명하려는 서문에 해당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왔던, 보에티우스의 논리적이고 기술적인 논문들이 나온다. (479)
매우 불완전하고 매우 왜곡되어 있는 철학적인 과거의 목록들은 라바누스 마우루스의 신뢰와 불신을 설명하고 있다. 논리적 도구로서 필수불가결한 철학은, 그리고 또한 플라톤에게서 진리의 빛들로부터 완전히 비추어진 철학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철학은 우리에게 이단의 경사로 기울게 하기 때문이다. (479)
알쿠이누스(Alcuinus, 735-804)의 저술이 지배했던 것은 교육적인 관점인데, 샤를마뉴가 그를 영국으로부터 781년에 불렀고, 그의 이름은 프랑크 왕이 원했던 지적인 르네상스의 거의 상징이었다. 그는 전대미문의 지적 쇠퇴의 정도로 떨어졌던 프랑크 제국의 종교직을 개혁했다. 그는 비종교인인 평민들을 교육했다. 이들을 위해서 궁중에 소속된 학교를 세웠다. 그의 교육 교본들, 문법학, 수사학, 변증론, 철자 학습법 등은 앞선 시대의 편집에 보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의 편지가 지적하듯이, 알쿠이누스는 이 시대의 거대한 권한을 누렸다. 그리고 그는 신학을 위하여 세속교육의 유용성을 주장했다. 마치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듯이, 성스런 개별자인 삼신성의 신앙에 대하여라는 그의 저술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지지하며, 다음을 주장한다. “변증법적 모든 규칙들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성-삼신성에 관한 가장 깊은 질문들은 범주들의 미묘한 덕분에만 밝혀질 수 있을 뿐이다.” (479) (56RMH)
5절.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Jean Scot Erigène 479-485
그러나 요하네스 스코투스(Iohannes Scottus, 800경-877)의 작품은 그 당시 신학자들을 활성화시키는 철학적 고민들의 최상의 증거이다. 요하네스는 아일랜드교회 출신이며 그는 여러 번 로마의 견해에 대해 자기 독립성을 표출했다. 영국 수도사였던 베다(Beda, 672-735)는 자신의 영국 인민의 교회 역사(731)에서 편지를 인용했으며, 그 편지에서 교황 요한이 그에게 비난했는데, 생활규범에 균열들을 냈을 뿐만 아니라 학설에도 균열들을 냈다고 했다. 학설은 펠라기우스파의 이단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거기서 고전적 시인들의 시를 읽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서 또한 그리스인들을 알았다. 요하네스는 9세기 초경에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며, 대륙으로 학문을 배우러 가는 스코투스 족의 한 일원이었다. 840년경에 프랑스 왕 샤를 2세(823-877)(대머리왕)의 궁정에 받아들여, 그는 위(僞)디오뉘시오스(5세기-6세기)의 작품들과 위디오뉘소스의 주석가인 고백자 막심(Maxime, 580-662)의 작품들을 라틴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이 작품들은 이탈리아 왕인 뻬빵(777-810)의 시대에 교황에 의해 이미 프랑스로 보내졌고, 카롤링 제국의 관료인 힐두앵(Hilduin, 775경-855경)에 의해 번역되어있었다. 이 작품들은 동방 황제 미셸 2세(Michel, 770-829, 재위 820 à 829)의 사신들에 의해 827년에 서방 황제 루이 1세(Louis Ier, 778-840, 재위 814-840)에게 새로이 이전되었다. 요하네스 스코투스의 판본은, 중세의 거의 모든 번역들처럼, 난처한 신앙심으로 글자 대 글자로 한자-한자 번역되어 남아있다. 이런 난처한 신앙심은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자가 자신의 베낀 원전의 절반을 이해했다고 믿게 할 수 있다. 곧 바로 혐의가 드러난, 위디오뉘시오스는 12세기말 이전까지는 더 이상 새롭게 번역하지 못했다. (480)
아레오파지트 총서는 우리가 요하네스 스코투스에게서 발견하는 사물들에 대해 신플라톤주의의 개념작업의 중요한 출전들의 하나이다. 그런데 그것이 유일한 개념작업은 아니었다. 개념작업을 하기에 충분한 것, 그것은 851년에 쓴 숙명에 관하여(851)의 논저 속에서, - 이 작품 속에서는 위디오뉘소스의 작품들을 인용하지 않고 있는데, - 그의 신플라톤주의가 깔끔하게 나타난다. 요하네스는 충분히 완전하게 자신의 권한을 지적했기에, 사람들은 이 출전들을 규정할 수 있다. 자연의 분할에 대하여(864-866)에서는 위(僞)디오뉘시오스(5세기-6세기)와 고백자 막심(580-662) 이외에도, 무엇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있고, 그리고 그레고리오스 뉘세스(335-395), 보다 드물게 바실(329-379)와 그레고리오스 나지안제노스(329-390)와 에피파니우스(315-403), 아주 드물게는 성 암브로시우스(340-397), 오리게네스(185경-253경), 성 제롬(히에로니무스, 347-420)도 있다. 교부들 이외에도 근 자주 철학자들 또는 세계의 현자들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즉 보에티우스의 논리학적 논저들, – 이 논저들을 통해서 그는 키케로와 아리스토텔레스를 알았다 -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가끔은 퓌타고라스, 보다 자주 노(老) 플리니우스, 그리고 또한 시인들로서 오비디우스(전43-후18)와 베르길리우스(전70-전19)를 참조했다. (480)
요하네스는 선배들처럼 단순한 편집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들에게 예속됨이 없이 자기의 출전들을 이용하여 아주 확고하고 독립적인 사유를 지녔다. 그의 체계는 다른 성분들을 섞어 놓은, 위(僞)디오뉘시오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혼합물이 전혀 아니다. 중세의 사유전체를 곧 지배하게 할 것으로서, 의심스런 질문들에 반성한 응답이었다. 우주에 대한 크리스트교의 이미지와 신플라톤주의의 이미지에는 공통적으로 일종의 리듬이 있다. 전자와 후자 둘 다 신중심주의 이미지들이다. 신중심주의는 우리에게 사물들의 이중 운동을 묘사한다. 하나는 사물들이 자신들의 최초의 원리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물질의 운동,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원리에로 사물들의 회귀운동이다. 단지 크리스트교 이미지에서, 찰나들의 연속은 사건들의 계열이다. 사건들의 각각은 자유로운 주도권으로부터 출발한다: 창조와 타락. 그런데 지복 속에는 속죄와 미래 삶이 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서 사람들은 자연적이고 영원한 필연성으로부터 파생하는 계속적인 찰나들을 본다. 제1원리에 마주하여 틈이 생기는 것은 동일한 실재성이 존재의 하부 수준들에서도 있다는 점에서이다. 여기서 동일한 실재성은 제1원리 속에서 절대적 통일성의 상태에 있었으며, 그리고 존재의 하부 수준들은 원리로부터 흘러나오고, 이 하부 수준들은 서로서로 필연성을 가지고서 점점 더 큰 분할의 상태 속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이 회귀는 이런 분할이 통일성에게 자리를 내준다는 점에서 인데, 그것도 반대 방향의 운동에 의해서이다. (481)
그러나 우주에 대한 두 이미지들 사이에 대립은 우리가 여기서 대립을 소개하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것보다 훨씬 멀리 있다. 그리스적 크리스트교는 신플라톤주의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최면에 걸려있다. 그 크리스트교는 크리스트교의 신화에 의해 이야기되었던 사건들의 계속을, 마치 사물들의 자연에 의해 필연이 된 찰나들의 계속처럼, 해석하려는(결코 완전하게 이르지 못하지만) 경향성이다. 스토아학자들 이래로, 그리스 정신은 신으로부터 나옴과 신 속으로 흡수 사이에서 교대적인 우주에 대한 생명의 이미지에 의해 지배되었다. 즉 도식이 있는데, 그 창조의 이미지, 타락의 이미지, 속죄의 이미지 안에는 필연적으로 훨씬 많은 도식이 남아있다. (481)
그런데 요하네스 스코투스가 발견한 것은 정확하게 이 도식이다. 자연의 분할에 대하여(864-866)는 플라톤주의 신중심주의에 의한 크리스트교의 신중심주의에 대하여 일체의 해석이다. (481)
이미 그의 작품인 숙명에 관하여(851)에서 그의 신플라톤주의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수도사인 고데스칼쿠스(Godescalcus, 806-869)는, 선택 받은 운명과 버려진 운명의 이중 운명의 현존을 지지했다. 마찬가지로 신적 운명은 선택받은 자들을 정당화에 그리고 영원한 삶에 이르게 했으며, 다른 운명은 배척당한 자들을 불경건 속에 그리고 영원한 체벌들 속에 빠지도록 강제했다. 사람들은 이로부터 연역하게 되면, 정통교와 선한 작품들은 무용하다 것이고 그리고 신은 몇 사람들에게 죄에 빠지게 강요한다는 것이다. 라바누스 마우루스(776-856), 그러고 나서 렝스의 주교인 힌크마루스(Hincmarus, 806-882)는 위험을 교회로 돌렸다. 힌크마루스는 849년에 쉬에르제 종교회의에 의해 고데스칼쿠스를 단죄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요하네스 스코투스를 그에 대해 반대하는 글을 쓰도록 초대했다. (481)
요하네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진실한 철학은 진실한 종교이라고 제시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사실상 그가 고데스칼쿠스를 반박하는 것은 신적 본질에 관한 사색들에 의해서이다. 이중 운명은 무엇보다도 신적 본질의 통일성에 반대된다. 유일하고 동일한 원인이 두 가지 반대되는 것을 생산할 수 없다. 그리고 고대스칼쿠스에 따르면, 만일 신이 인간 속에서 정당화를 생산한다면, 신은 인간 속에서 죄를 생산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신은 최고의 본질이기 때문에, 실재성이라는 선의 오직 원인이다. 그리고 신은 단순한 무(le néant)이라는 죄의 원인일 수 없다. 사람들은 신을 본다, 즉 요하네스 스코투스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신플라톤주의의 본질적 두 원리를 재발견한다: 신은 온선에 동일하며, 잘못은 긍정적 실재성이 아니다. (482)
자연의 분할에 대하여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리듬을 따른다. 신으로부터 피조물의 과정, 그리고 피조물의 신으로 회귀. 원리인 신으로부터 목적인 신으로 자연에 의해 이행한다. 그는 이런 리듬의 생각을 암시했던 자가 특히 고백자 막심이라고 명시적으로 표현했다. 죄 다음에 인간의 상태에서 제1원리로부터 분할의 극단적 한계와 사물들의 틈의 극단적 한계를 지시하기 위하여 그가 인용한 것은 해석자 위(僞)디오뉘시오스이다. 반면에 속죄가 신과 서로서로 함께하는 존재들의 최종 통합으로 뒤따르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런 물질은 속죄를 이해하는 이런 방식이, 마치 신 안에서 전체적 재흡수의 시작처럼, “매우 적게 다루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흩어져 있는 증거들이 교부들에게서만 있었다는 것을, 그가 명시적으로 주목하지 않는가? (482)
그 리듬은 모든 논리적 차이들에 따라서, 마치 실재성의 발전이 하나의 류가 그의 종들로 나누어지는 논리적 분할과 다른 것이 아닌 것처럼, 자연의 분할을 표시하게 할 뿐이다. 우선 창조하고 있는 자연이 있고, 창조되지 않는 자연이 있다. 그것은 마치 사물들의 원리로서 신이다. 둘째로 창조되었고 창조하는 자연이 있다. 그것은 원리로부터 나온 온말씀이고, 감각적 세계를 생산한다. 셋째로 창조되었고 창조하지 않는 자연이 온다. 그것은 감각적 세계이다. 넷째로 창조되지도 창조하지도 않는 자연이 있다. 그것은 최고 목적으로서 신이며, 그 속에서 완전을 추구하는 사물들의 운동을 자신의 항으로 갖는다. 그러나 이런 차이들 아래서 사람들은 동일한 자연의 통일성을 인정한다. 요하네스 가 기원을 알지 못하고 인용한 옛 오르페우스 정식에 따르면(1권 11장), 신은 원리며 동시에 중간이고 목적이다. 첫째 분할, 즉 원리인 신은 넷째인 목적 신과 동일하다. 둘째인 창조하는 말씀은 셋째인 창조된 신과 동일하다. 결국 둘째와 셋째는 피조물 일체를 형성하고, 속죄 속에서 넷째에 동일하다고 스스로 보여준다. (483)
요하네스 스코투스의 작업을 통하여 다루는 것은 이런 차이들과 이런 동일성의 동시적 사유이다. 이런 사유는 부분들 속에서 전체를 그리고 전체 속에서 부분들을 재발견하는 것을 항상 두려워하면서, 사람들이 동일한 종족의 모든 사상가들에게서 – 플로티노스에서 헤겔(1770-1831)과 브래들리(1846-1924)에까지 - 발견하는 일종의 긴장을 그 사유의 스타일 자체에 부여한다. 이런 이유로 그가 묘사한 것은 플로티노스의 신이다. 이 신은 겉보기에는 존재들의 모든 순환의 길을 가치면서 원리로부터 목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신에게서는 운동과 불변성 사이에 대립이 실제로는 없다. 신은 정지에 도달하기 때문에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신이 스스로 움직인다고 말한다면, 신이 피조물들의 원리이기 때문이다(1권). 그가 삼신성에서 재발견한 것은 바로 위격들에 대한 플로티노스의 삼원소이다. 삼신성에서 성부는 어떠한 긍정적 규정작용을 갖지 않는다. 반면에 성자는 원인들의 단순성과 원인들의 통일성 전체 속에 원초적 원인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성령은 이것들을 류들로 또 종들로 분배한다. 그리고 그가 존재들 속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위(僞) 디오뉘시오스의 도움을 받으면서, 발견하는 삼신성의 이미지들은 본질-덕목-실행(essentia-virtus-operatio)의 삼원소, 즉 지성-이치-내부감각(intellectus-ratio-sensu interior) 삼원소 인데, 이 이미지들은 그 만큼이나 과정 또는 진화의 운동을, - 단순한 것에서 다수인 것으로, 한편으로 감춰진 본질로부터 본질의 표출작용들로, 다른 한편 이데아로부터 이데아의 표현으로, 다수인 것과 단순한 것의 근본적인 동일성을 암시하면서 - 상징화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원초적인 원인들 사이에는, 플로티노스가 자신의 인식 가능한 것에 대해 그렇게 말한 것처럼, 어떠한 비균등성도, 어떠한 진실한 다양성도 없다. 이 원인들을 따로 떼어내고 고립화하는 것은 지성이다. 이 때문에 시간 속에서 창조되고 전개된 감각적 세계는 자기 원인을 둘 다 포함하는 성자로부터도 성령으로부터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다. 게다가 그 세계는 단지 분할 속에서 한 단계만을 지적할 뿐이다. 영원 속에서 동시적으로 있었던 것, 그것은 스스로 계속되고 스스로 전개된다. 마치 모든 수들이 모든 수들의 성질들과 영원히 함께 있는 통일성으로부터 조금씩 산술학이 전개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산술학은 점진적으로 이 수들을 발견하였다. (483)
이런 극단적 분할 이후에, 사물들의 신으로 회귀가 시작한다(4권). 여기서 그리고 단지 여기서 만이 인간이 개입한다. 인간의 창조는 이 회귀의 시작을 표시한다. 인간의 수수께끼, 그것은 인간이 이중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자신의 감관들을, 정념들을, 영양섭취의 삶을 함께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추론[이성]과 예지의 덕분에 동물보다 그 위에 있다. 필론의 창세기의 옛 해석에 따르면, 땅으로부터 가공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신의 이미지에 따라 창조된 존재이다. 이런 수수께끼의 해결은 신이 소우주를 창조하기를 원했던 것이고, 소우주 속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새로이 결합되었다. 피조물들의 전체는 소우주 속에 있으며, 적어도 관념 속에 자신들의 용어들에 의해 있다. 죄 짓기에 앞서 원초적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창조에 대한, 천사들과 그의 하부에 사물들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갖는다. 따라서 그 인간은 신으로 향한 모든 사물들의 회귀의 기관이다. 왜냐하면 이 회귀는 그에 의해서 일어나고, 모든 피조물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떨어지고, 그 타락의 귀결은 그를 낙원으로부터 나오게 하는 것이며, 말하자면 그를 자신 속에 있는 동물성에 메이게 하는 것이고, 인간을 동물성에 의존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본질의 총체성을 조금도 잃지 않는다. 이로부터 대속(rédemption)의 필연성이 나온다. 그 대속의 필연성은 인간을 자기의 원초적 상태로 [미래에도] 재확립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은 물질적 세계의 무화되지 않고, 그리고 모든 사물의 정신화에 의해 표시될 것이다. (484)
이런 진술은 충분히 많은 제한사항들을 표시하며, 이런 제한사항들을 요하네스 스코투스의 체계를 신플라톤주의에 동화하게 만드는데 알맞다는 것이다. 우선 이런 학설의, 즉 인간의 자연과 신에로 회귀에 관한 학설의 둘째 부분에서, 사람들은 어떤 조심스런 충실성을 가지고 그가 교부들을 따랐는지를 안다: 인간의 이중자연[이중성], 죄 이전에 그리고 이다음에 그의 상태, 소우주의 인간, 천국의 해석, 이 모든 것은 암브로시우스(340-397)의 에덴동산에 대해으로부터 나오고, 암브로시우스는 필론(전20-후45)의 세계의 제작에 대하여에서, 그레고리오스 나지안제노스(329-390)의 「이미지에 대하여」에서, 그리고 여러 저술들에서 많이 빌려온 것이다. 그리고 다른 저자들에 의해 그는 신과 사물들의 매개자로서 인간의 옛 신화의 전승을 수집했다. 그 신화란 필론에게서는 매우 잘 전개되었던 신화인데, 플로티노스의 영감에는 완전히 없는 신화이다. 이들에 의해서 그는 또한 플로티노스의 영원한 질서의 지위에서 세계의 목적에 대해 반(反)헬레니즘의 관념을 받아들였다(그리고 그는 그러한 것을 알고 있다). 인간에 의한 자연으로부터 신에로 구원 또는 회귀에서 플로티노스의 이런 전향을 상기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의 전향에서 유출된 존재는, 그 원리의 향기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리고 존재인 한에서 이처럼 스스로 구성하기 위하여, 자기의 원리를 향하여 영원히 되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485)
만일 우리가 이제 저술의 첫 부분으로 되돌아온다면, 우리는 이 부분이 엄격히 말하자면 유출의 진실한 체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유출의 체계에서 원리는 자연의 필연성에 의해 자기의 영향력들을 비춘다. 의심할 바 없이 신 속에서, 있다와 원하다, 즉 자연과 의지는 동일한 항목들이다. 생산은 무엇보다 신출현이라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이다. 볼 수 없고 알려지지 않은 성부는 신적이 말씀에 의해 표출된다. 그 신적 말씀은, 우리 속에서 처음에는 볼 수 없고 알려지지 않는 지성이 감각적 사물들과 접촉에서 표출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다른 사물들의 창조는 말씀에서는 스스로 표출되는 기회 또는 수단일 뿐이다. 제1원리 속에서 이런 신출현과 이런 흡수는 플로티노스의 과정과 전향과 다르다. 즉 전자들은 실재성이 역사를 지니고 주도권들을 허용하는데, 반면에 후자들은 영원하고 움직일 수 없는 질서를 지칭한다. (485) (19:25, 56RMI)
(15:26, 58L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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