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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 아승지 겁 전의 과거를 생각해 보니 연등 부처님 뵙기 전에도 팔만 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어 헛되이 지냄이 없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 억분과 내지 어떤 산술적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금강경과 마음공부 p316)
어∼부처님께서 과거 무량 아승지 겁, 아주 엄청난 그 길이에 오랜 과거 전, 뭐 이런 식의 뭐 무량 아승지 겁 뭐, 이것은 셀 수 없다, 라는 표현이거든요. 셀 수 없이 오랜 세월, 이런 것을 얘기하는데,
이것을 가지고 이제 사람들의 분별로 생각하면 1년은 어느 정도 거리고 10년은 어느 정도 거리니까, 무량 지 겁은 도대체 몇, 몇 백, 몇 천, 몇 조, 세월이 될까. 이런 식으로 이제 헤아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이런 식의 용어가 나오는 것은 곧 시간이 없다는 소리예요. 억겁이 지금 이 순간에 다 놓여 있거든요.
그런데 생각을 움직이면 억겁이 펼쳐지는데 그것은 실제 억겁이 아니라,
생각이 만들어 낸 하나의 생각이지요, 생각.
망상으로써의 억겁이지요.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거자체가 완전한 허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간을 경험하지를 못합니다.
매순간 지금만 살기 때문에.
그 뭐 하다못해 무량 아승지 겁을 생각할 것도 없이 어제도 없잖아요.
어제는 생각할 수 있을 뿐. 어제를 지금 살 수는 없거든요.
단 한 번도 어제를 살아본 적은 없습니다. 어제는 항상 생각만 할 수 있어요. 과거는 오로지 생각의 대상일 뿐이지, 과거를 살 수는 없습니다. 미래도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마찬가지로 이 무량 아승지 겁을 떠벌린다면 그것은 생각의 대상일 뿐이지. 이런 어마어마한 세월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그래서 뭐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 한 생각이 지금 이 순간이, 곧장 무량한 세월과 다르지 않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것은 하나의 방편이지요. 이렇게 무량 아승지 겁 전의 과거를 생각해보니까, 연등부처님을 뵙고 연등부처님께만 받들어 섬기고 공양 올리는 것이 아니라 팔만 사천만억 나유타,
팔만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 한두 부처님 정도가 아니라, 무량 무수의 무수한 부처님을 만나서,
이런 표현을 쓰는 것도 야, 부처님이 저렇게 많나.
지장보살,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행보살 그 이름이 다 있나. 그래서 이제 삼천불 명호 경이라는 것까지 생겼어요. 뭐, 뭐 만 불 명호 책자도 있을 정도로 이제 그런 거 따질 필요가 없다, 라는 것이지요.
컵 뚜껑 부처님, 물 한 방울 부처님, 뭐 티끌 부처님, 허공부처님, 뭐 내 머리카락 부처님, 뭐 모든 것이 다 부처님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팔만사천만억 나유타, 이 말은 ‘그냥 많다’ 이 소리입니다.
팔만 몇 억 여기 뭐 의미가 있나, 이게 아니라 그냥 많다. 만억 나유타 그냥 많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지요. 무수한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어 헛되이 지냄이 없었다.
그 무수한 세월동안 무수한 오랜 억겁의 세월동안 무수한 부처님을 만나서 그분들을 다 공양올리고 했다.
우리는 원광사에 계시는 한 부처님께만 와서 법회참여하고 여기서 공양을 올리고 뭐 과일도 올리고 쌀도 올리고 뭐 팥도 올리고 하면서, 이렇게 공양을 하면서도 정성스런 마음으로 야, 이 공덕이 있겠구나. 이런 마음을 낼 텐데. 이 부처님은 과거 이렇게 무량한 세월동안 무량한 아승지 겁의 무한한 세월동안 무수한 부처님께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겨서 헛되이 지냄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까 우리가 말했던 그 어마어마한 공덕에,
그거는 마, 백분의 일밖에 안됩니다. 그리고 천만억분 내지 어떤 산술적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 참 경전의 상상력이 이제 무한한데 그 만큼 부처님이 과거 생에 무한한 부처님을 만나서 받들어 섬기고 공양했던 그 어마어마한 공덕이 있을 텐데. 그 공덕보다 지금 여러분이 이렇게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어렵게, 어렵게 시간을 내서 매주 금요일 날 와서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하고 믿어 지니고 받들어 모시고 공부하면서 이 금강경에 인연을 맺는다, 라는 이거 하나가 이거 하나가 아까 말했던 그 부처님이 수억 겁 동안 무수한 무량의 부처님에게 공양한 공덕보다,
여러분이 지금 이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이 수천만 억분의,
이 거기가 일이고 우리가 수천 만큼입니다. 네 그 정도로 이 공덕이 훨씬 뛰어나다. 그런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부처님이 수억 겁 동안 무량한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렸다.
이게 다 생각이 만들어 낸 거지요.
그, 그 무수한 부처님이 만든 공덕, 그게 중요할까요.
지금 여기 선 내가 중요할까요.
지금 이 자리에 내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그 무수한 부처님과 내가 둘이 아닌 하나거든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전혀.
이것은 어~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비유로써 이렇게 얘기하는 것일 뿐이지.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바른 법을,
이 출세간법이 라는 바른 법을 공부하고
바른 법이 나오는 이 경전을 공부하는 공덕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설명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무수한 부처님에게 공양한 그 공덕보다도 월등히 뛰어나다, 라는 말을 함으로써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 금강경 공부가,
저도 사실은 아까도 잠시 이렇게∼ 한 번 더 이렇게 훑어보면서 참 한편으론 희유한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뭐가 희유하느냐면 여러분들이 이 금강경 텍스트자체가,
예를 들어 뭐 아함경이나 숫타니파타나 법구경이나 이런 거는 윤리도덕적인 얘기가 있기 때문에,
인생을 어떻게 살고, 남편하고는 어떻게 살고, 자식하고는 어떻게 살고, 돈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고, 인간관계는 어떻게 해결하고,
이런 재미난 얘기가 나와 있거든요. 그래서 공부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을 제가 이제 오늘 공부할 부분을 한번 훑어보면서 야 참,
참 이렇게 재미없는 얘기를 이게 이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출세간의 법에 대해서 관심 없는 분이라면,
이거는 하등의 재미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공부거든요, 금강경 공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다 법에 대한 얘기만 나와요. 진리에 대한 이야기만 나와요. 출세간에 대한 이야기만.
그런데 우리들은 사실은 이 세간에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이 세간에서 어떻게 하면 세간을 좀 더 행복하게 살까. 이런 거에 이제 주로 관심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이 많은 분들이 이 매주 두 시간씩이나 되는 힘든 시간을 버텨가면서 이∼걸 공부하러 오신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희유한 거예요. 어찌 이리 희유한 분들이 계실까.
이 재미없는 얘기를.
그 제가 이제 한편으로는 약간 뭐랄까 이렇게 좀.
야, 뭔가 이 분들이 좀 좋아하실만한 이야기들도 좀 해드리고 좀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드리고 이래야지 좀 될 텐데. 그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원래가 이렇게 좀 재미가 없는 스타일이라,
재미하고 거리가 멀곤 한데, 참 이렇게 이∼분들은 오로지 법,
법에 대해 관심 있어서 정말 오시지 않으면,
이렇게 계속해서 참여하실 수가 없겠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정말 아까 이 문구를 보면서도, 참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오신 분들이 정말 여기서 이렇게 이러한 비유를 들었던 거처럼,
정말 이 세상사람 붙잡아 놓고요, 심지어는 뭐 여러분들이 아닌 다른 불자들이나 심지어 수행자를 붙잡아 놓고도 야, 이 법에 대한 얘기 좀 들어 달라하고 통 사정을 해도 이 관심조차 없거든요. 하나도 관심이 없거든요. 아무리 막 왜 에너지를 쏟아도 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마음이 나지 않아요.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전, 제가 그런 일을 많이 안 해 봤겠습니까.
제, 제 동생도 그렇고 저희 누이도 그렇고 제 친한 뭐 분들에서부터 이렇게 이걸 좀 이렇게 설명해주기 위해서 얘기를 해도,
심지어 도반조차 관심이 없어요. 법에 대해서.
그러니까 그 옛날에도 그런 일이 있거든요. 그 스님들, 뭐 조조 스님도 이 고향에 돌아 가가지고 고향사람들, 옛날 친했던 이런 친척, 친지, 동네 사람들에게 법을 펴려고 고향을 한번 갔다가 다들 이제 콧방귀 끼면서 야~ 저 동네 저 누구 집 아들 저놈이 무슨 큰 스님이라 그래가지고, 난 엄청난 사람이 온 줄 알았더니 야, 고작 저 놈이 왔다는 거야.
이러면서 이 아무리 얘기를 해도, 이걸 마음을 열고 듣지 않는 거지요.
그래서 많은 스님들이 사실은 법회 할 때,
법회 할 때 법을 듣고자 마음을 내서 찾아오는 이러한 희유한 인연이 있는 분들에게 법을 설하지,
일상생활 속에서 맨 날 법을 얘기하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일상 속에선 그냥 일상에 대한 이야기만 하지요. 뭐 저도 도반들을 만나고 뭐 이러더라도 늘 그냥 뭐 사는 이야기나 하지 이런 법에 대한 이야기를,
이 딱 법의 자리에서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참 이 공부에 마음을 내고 이렇게 오시는 분들 자체가,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희유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바로 이 경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한 거지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이 수지독송 하겠다고 마음을 내는 그러한 공덕이 그야말로 아까 앞에서 말한 그 부처님이, 수많은 부처님께 수억 겁을 어~ 모시고 공양하는 공덕에는 백분의 일에도 어떤 산술적 비유에도 능히 미칠 수 없을 만큼 희유하고 위대한 공덕이다.
왜 그러느냐면 이 수없이 많은 부처님의 공덕은,
그거는 그냥 생각이고 그건 그분의 얘기고 지금,
지금 내가 중요한 거거든요.
지금 내가 깨달을 것이냐 못 깨달을 것이냐.
지금 내가 이렇게 고통에 얽매인 삶을 살 것이냐.
이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방향으로 마음을 내고 살 것이냐.
내가 A라는 곳으로 가려고 마음을 먹고 조금 조금씩 마음을 내면 어떻게든 가게 되거든요. 이렇게 점점 다가가게 가까이 다가가게 되거든요.
그런데 방향이 이쪽을 향하고 있으면,
마음을 이쪽을 향하고 있으면 어떻게든 이쪽을 향해서 가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이쪽을 향해서 갔어요. 세간을 향해서.
세간의 돈과 명예와 권력과 나를,
아상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지금까지 이렇게 가고 있는데,
이 마음공부를 한다, 라는 것은 발심을 한다, 라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가는 방향을 회심한다. 이러잖아요.
틀어서 아, 이것이 진정한 공부의 길이 아니구나.
나를 진정하게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길이 아니구나, 라는 자각을 가지고 마음을 돌이키는 거거든요. 마음을 돌이키면 이제 발심을 하면,
이제는 저 목적지를 향해서 저 파라미타(Paramita: 완전한 상태, 최고의 상태)라고 하는 그 길을 향해서 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조금 조금씩이든, 늦든 빠르든 계속해서 갈 수 밖에 없게 되고 이제는,
여기에서는 열심히 가고 늦게 가고 이런 게 필요가 없이,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간절한가.
간절한가, 이것이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사실은요, 어~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이렇게 법문을 듣는 이 순간도 중요하지만, 어~ TV나 유튜브나 컴퓨터 틀어놓고 스님 법문 딱 틀어놓고 이렇게 공부하는 것도 이제 물론 차선책으로써 아주 좋은 공부인데,
그거보다 직접 찾아와서 법문을 듣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이유가 뭐냐 하면 이 공부는 마음공부거든요.
마음공부라는 게 뭐냐 하면 몸을 아무리 뭐 열심히 갈고 닦는다고 되는 공부가 아니라,
마음이 간절한가, 간절하지 않은가.
이것이 끝내는, 중요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귀한 시간을, 이 두 시간이지만 오늘 오전 오후 어찌 보면 오늘 하루를 다 버려야지 되는 거고, 아침부터 새벽부터 일어나서 밥해서 아이들 먹이고, 그리고 여러분들 이게 뭐 바를 거 찍어 바르고(웃음) 뭐 쓰고 준비하고 이렇게 이 오랜 걸음을 오셔야 되고,
아까도보니까 여기 앞에 막, 이 막 그냥 차량이 많아가지고 막 좀 줄을 서 계시데요. 그런 힘든 상황을 뚫고 이 자리까지 오시려면 얼마나 많은 정성입니까, 이게.
이 시간에 뭐 다른 거를 하면 더 좋은 일들도 할 게 많을 텐데.
사실은 옛날에 이제 스승을 찾아가는 길 자체가
구도의 길이라는 표현을 쓰듯이
구도의 길 자체가 찾아가는 그 과정자체가 공부거든요.
찾아가는 그 과정이 왜 공부냐 하면 어~ 저 또한,
그∼ 이게 제가 이제 이런 어떤 군승으로써 소임을 하고 있지만
어, 어제 우리 총 원장스님께서 이 자리에서 이제 어제 저녁때
여기서 법문을 하시는데 저희 이제 우리 군종, 우리 군승 법사스님들은
장병들에게 포교를 하는 게 목적이잖아요. 그런데 이 총 원장스님께서 그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총 원장스님께서.
그 포교를 열심히 하라, 이런 얘기는 당연한 거 아니냐. 그러면 뭐 그런 얘기 안 해도 다 하실 거 아니야.
그러니까 여기 계시는 스님들은 포교는 당연한 그냥 당연한 것이고. 그거보다 더 중요한 걸해야 된다. 포교보다 더 중요한 걸해야 된다.
뭘 할 것이냐!
자기 마음을 깨달을, 자기 마음을 깨닫는 게 가장 중요하다.
언뜻, 일반 사회적으로 느끼는 일반 군인들이나 뭐
일반 사회적으로 듣기는, 아니 저 그래도 저 포교를 열심히 하라고 해야지. 그런데 자기 공부해서 깨달으라는 얘기를 저렇게 하시지, 싶겠지만.
그게 정말 진실이거든요.
내가 내 공부를 해서 깨닫는 게 그게,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둘이 아닌 것이거든요.
언제나 내가 내 공부를 해서 이 마음을 깨닫는 것,
이, 이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이고 그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니라 마음만 있으면 된다.
열심히 막 갈고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만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면 저절로 찾아가게 되는 거예요.
법이 있는 곳을,
내가 시간 내서 힘들여서 찾아가게 된다는 것이지요.
찾아가는 그것이 공부입니다.
저 또한 이렇게 군에 있지만 항상,
항상 마음이 이 법에 있다 보니까, 늘 내가 선지식이라고
제가 선지식이라고 느끼는 분들을 늘 하여간
휴가를 내든 쉬는 날이 됐든,
월요일 하루 잠깐 쉬는데 막 몇 시간을 걸쳐서 가서 잠깐,
한 오 분, 십분 만나려고 오는 경우도 있고
그러더라도 하여간 그 가고 오는 길 자체가 그게 이제 공부더라고요.
나중에 봤더니.
인도에서도 그랬고 중국에서도 그랬고,
선사스님을 찾아가고 또 부처님을 찾아가는 많은 제자들이,
그때는 걸어서 인도에 40도 50도 웃도는 더위 속에서 음식도 지금처럼 이렇게 돈만 있으면 가서 식당에서 밥 사먹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닌데, 그 먹을 걸 바리바리 싸들고 심지어 냄비에 뭐 쌀 같은 것도 싸들고 갔을지도 모르겠지요. 그 먼 길을 맨발로 걸어가면서 부처님을 찾아뵈려고 하는 그 길.
그 구도의 길 자체가 구도입니다.
구도의 길을 힘들게, 힘들게 가서 그곳에서 구도를 찾는 것이 아니고
구도의 길을 찾아가는 그자체가, 그자체가 이미,
이미 구도인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건 마음으로,
얼마나 간절하면 그 먼 길을,
이 귀한 시간을 내서 찾아가려고 애쓰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그 마음을 낸 것이 공부거든요.
이 마음공부에서는 그 마음을 내는 게 공부입니다.
그래서 선지식이 분명히 있다, 라고 여기면 아침새벽 6시에 출발해서 5시간을 가가지고 저 전라남도 어디 해남까지라도 5시간 6시간 차타고 가가지고 한 시간 법문 듣고 또 5시간 6시간 와야 된다. 이게,
이게 허망한 일이 아니에요.
더구나 이게 지금 우리는 한국에 사니까 그게 어유 그걸 어떻게 하나 싶겠지만, 뭐 미국이나 중국이나 뭐 인도나 이런데 같으면 뭐 부산에서 여기까지 오는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닌 거지요. 부산에서 여기까지 오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미국 같은 데는 뭐 동네,
제가 그때 그 말씀 드렸던 거 같은데, 그 워싱턴 인근 어딘가에서 한 2,3 시간 가는 거리쯤 된 거 같은데 길을 잃어가지고 예나 모르겠다, 아무 절이나 전화해서 “스님 저 한국에서 온 학생인데 독실한 불자입니다.”(웃음) “제가 지금 길을 잃었는데 저를 좀, 제가 지금 춥고 배고프고 지금 어떻게 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랬더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그래서 잠깐만 기다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한 2,3 시간 있다가 스님이 오셨어요. 그러니까 이 미국에서는 2,3시간 오는 것도 잠깐 인거지요.
가만∼ 지금 생각해보니까 꽤 멀리 갔던 거 같아요. 뭐 한 대전에서 서울쯤 됐던 거리였을 수도 있지 않겠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그 한 2,3시간에 걸쳐서 부랴부랴 오시고서는 되게 당연하게 생각하시더라고요.
예, 이정도 걸리는 게 그냥 그렇게 뭐, 막 그래 먼 길이라 생각 안하더라고요.
이게 마음에서 마음만 바꾸어 먹으면 사실은,
이 공부를 하는 그 길이 꼭 그렇게 먼 길도 아닌 것인데.
사실은 이 과정자체가 바로 공부다.
그래서 이거자체가 바로 수지독송하는 것이고
이 법에 대한 어떤 간절한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이렇게 공부하는 이 공덕이 어~ 참 정말 그냥 이, 이 비유가 허황되게 들리겠지만 이렇게 허황되게 얘기할 수밖에 없을 만큼에 진실 된 공덕이라는 사실을 어~ 알아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이것을 상을 내서 내가 야, 나는 불교공부 하는 대단한 사람이야, 라는 그런 상을 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귀한 일을 하고 있다, 라는 것이지요. 세간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뭐 세간적인 성취를 하더라도 억겁까지,
죽음이후까지 가져갈 수 있는 공부.
이 가져갈 수 있는 이 귀한 공부는 평생토록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를 했겠습니까. 이것은 정말 어~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놀라운 어떤, 어찌 보면 투자를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공부를 하는 여러분들이 참 제가 생각해도 참 그렇게 희유하다 싶을 정도의 그런 생각이 드는데,
이 경전의 비유도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고 계신거지요.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여 얻는 공덕을 내가 다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가히 헤아릴 수 없다.”(금강경과 마음공부 p317)
선남자 선여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가 지금이잖아요. 앞에 우리가 공부했던 거처럼, 지금이 이제 말세입니다.
지금에 이 시기에 이 경을 수지독송해서 얻는 공덕을 내가 다 말로 한다면 그걸 믿을 사람도 없을 거다. 말이 몹시 혼란해질 거다. 의심해서 믿지 않을 거다. 좀 전에 이런 비유를 얘기 들으니까. 야, 부처님도 참 참 뻥이 심하시구나.(웃음) 이렇게 어 느낄 수 있을법한 비유잖아요. 저 정도까지를 얘기할 필요가 굳이 있을까, 이렇게 싶잖아요. 이렇게까지 얘기해봐야 이러한 공덕보다 더 뛰어나다, 라는 사실을 이제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일반인들은 이거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고 믿지 않는다, 라는 것이지요. 야, 불법을 뭐 대단하다는 건 좋은데 뭐 저렇게까지 얘기할 필요가 있나, 이렇게 느끼기 쉽겠지요. 그런데 마땅히 알아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고 과보도 또한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왜 그러냐면 요. 과보를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이거는 이 공부는 헤아리는 공부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과보를 무한한 과보를 헤아릴 수 있다면 그건 끝이 있는 거잖아요. 양이 있는 거잖아요. 이 공부는 그 모든 양을 초월하는 것이거든요. 양을 세는 거는 다 현세에서 하는 거잖아요.
세간 속에서 하는 거잖아요. 많으냐 적으냐 하는 건.
세간의 분별이잖아요.
이 공부는 그 분별을 넘어서는 공부이기 때문에
아무리 산술적인 비유로 많은 비유를 수백 수천 골백번을 갖다 하더라도 그거는 전부다 꿈속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꿈속에서.
무한한 복을 아무리 많이 지어도,
그 꿈속에서 복을 아무리 지은들 꿈 깨는 공덕만 하겠습니까.
꿈속에선, 그건 꿈속에서 이루어진 공덕이니까. 그러니까 무지몽매한 것이고 그거 꿈 깨고 나면 허망한 것인 거지요. 그러니까 꿈속에서 이루어지는 그 많은 공덕을 아무리 많이 헤아릴 수 없이 짓는다 할지라도
꿈 깨는 공덕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고 왜 뜻을 가히 헤아릴 수 없습니까?
부처님 가르침, 이 경전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이 경전은 뜻을 헤아리면 어긋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경전을 뜻으로 헤아려서 이해하려고 하면 그것은 경전의 참뜻과 어긋납니다.
왜냐하면 이 경전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말은 뜻을 넘어서는 거기 때문에 분별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낙처는 분별에서 오는 세계가 아니라
분별을 넘어서는 세계로 이끌고자 하는 게 낙처인데,
그것을 머리로 헤아려서 거기 도착하겠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뜻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다른 공부하듯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열심히 막 공부해서 받아 적고 막 더 열심히 하고 이럴 필요가 굳이 없다는 것이지요. 간절하게 마음에 받아 적으면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 간절함이 너무 사무치니까, 그 간절함을 사무치는 방법으로 열심히 읽고, 읽고 또 읽고 막 받아 적고 그런다면 그것은, 그 간절함 자체가 공부를 시켜주는 게 아니라 그만큼 한, 마음이 공부를 시켜주는 거지요.
아까 찾아가는 그길 자체가 공부라고 했듯이
저한테 이 책을 공부했다고 하면서 그 찾아와서 얘기했던 분들이,
꽤 많은 분들이 계시는데 어~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이제 오셨어요. 어떤 거사님은 한 근80이 다 되는 거사님이신데 당신 책을 한 열 몇 권이 있데요. 그중에 한 권만 가지고 오셨어요. 이 책을 처음 첫 장부터 끝장까지 하나하나 다~ 사경하듯이 다 적은 거를 몇 권 째 적고 있다고 얘기를 하시면서 그 연세에,
제가 그때 고성에 있을 땐데 그 고성까지 버스를 타고 찾아 오셔가지고 정말 이 공부를 정말 내가 하고 죽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런 마음을 내시고 여기 원광사에 있을 때도 어떤 거사님, 보살님들도 이걸 그렇게 막 그냥 간절하게 그 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셔서 막 그렇게 받아 적고 사경을 하신 분들도 계시다고 하는데, 사경도 마찬가지거든요. 사경했다는 자체가 공덕이 되는 게 아니라 그만큼 얼마나 간절하면 저렇게까지 하셨을까.
그 마음자체가 벌써
공부의 길에 딱 들어섰구나, 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 과보도 또한 헤아릴 수 없다. 헤아릴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과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17분 구경무아분입니다.
(제 16분 능정업장분, 업장을 깨끗이 맑힘)
25분 47초까지 녹취
첫댓글 25분까지인데 글로 읽으니 꽤 기네요.. 타자로 쓰시고 멈추고 하시느라 고생 정말 많으셨겠습니다. 외국이라 스님법문을 듣지 못해 아쉬운데 이렇게 글로 읽으니 너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_()_
정말 감사합니다.
또 소문 좀 내야겠어요...
어제는 생각할 수 있을 뿐. 어제를 지금 살 수는 없거든요.
단 한 번도 어제를 살아본 적은 없습니다. 어제는 항상 생각만 할 수 있어요. 과거는 오로지 생각의 대상일 뿐이지, 과거를 살 수는 없습니다. 미래도 마찬가지지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가 내 공부를 해서 이 마음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이다...
모든 분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