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역사,
63년 전 배고픔 달래던 식량서 세계인의 한끼로…날개 단 K-라면
국내 소비 40억6천만개 세계 9위
13억760만 달러 수출… 27.2%↑
매운맛·제품 다양화로 세계 공략
1963년 9월 15일 국내 최초로 출시된 라면이 당시에는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한 간편식이었다면, 63년이 지난 오늘날은 K-푸드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사진=ChatGPT
1963년 9월 15일 국내 최초로 출시된 라면이 당시에는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한 간편식이었다면, 63년이 지난 오늘날은 K-푸드의 대표 주자로 세계 시장에 우뚝 섰다.
배고픔을 달래던 식량에서 출발한 한국 라면은 특유의 매운맛과 다양한 제품을 앞세워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글로벌 식품으로 위상을 넓혀가고 있다.
14일 세계라면협회(WINA)에 따르면 2025년 기준 한국인 1인당 연평균 79개의 인스턴트 라면을 소비한 것으로 추산, 베트남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1년이 약 52주인 점을 감안해 단순 환산하면, 한국인 1명당 4~5일에 한 번꼴로 라면을 먹은 셈이다.
같은 기간 한국의 인스턴트 라면 소비량은 40억6천100만 개(회분·servings)로 세계 9위로 집계됐다. 최근 5년간 추이를 보면 2021년 37억9천만 개에서 2022년 39억5천만 개, 2023년 40억4천만 개, 2024년 40억9천800만 개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라면이 처음 등장한 것은 삼양공업(현 삼양식품)이 인스턴트 라면 '삼양라면'을 출시하면서다. 당시 닭고기 스프와 주황색 표지로 출시된 제품은 중량 100g에 10원의 가격으로 공개됐다.
1961년 삼양공업을 설립한 창업주 고(故) 전중윤 명예회장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심화된 한국의 식량난 타개를 목적으로 주식인 쌀을 대체해 쉽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을 공급하려는 취지로, 일본에서 기계와 기술을 들여와 3년간 개발 끝에 만든 것이 시작이다.
초기엔 라면 자체가 매우 생소해 소비자들에게 음식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정부가 쌀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쌀에 보리 등 잡곡을 섞어 먹는 혼식과 밀가루 음식을 먹는 분식을 권장했던 '혼분식 장려 운동'이 맞물리면서 소비가 빠르게 확산했다.
이처럼 서민들의 허기를 달래던 간편식으로 시작한 라면은 60여 년의 세월을 거쳐 이제 국내를 넘어 세계인이 찾는 K-푸드의 대표 상품으로 성장했다. 과거 봉지라면이 단순히 한 끼를 해결하는 식품이었다면, 최근에는 볶음면과 용기면을 비롯해 다양한 토핑을 더하는 '모디슈머' 조리법까지 등장하는 등 소비 방식도 한층 다양해졌다.
지영준 라면평론가는 "1958년 일본에서 처음 개발된 인스턴트 라면은 기름에 튀긴 면 특유의 느끼함이 있었지만, 한국 라면은 여기에 매운맛을 더해 쉽게 물리지 않는 차별성을 만들어냈다"며 "특히 신라면과 불닭볶음면을 필두로 K-라면이 세계 시장에서 성공하면서 이제 해외 업체들은 한국 라면을 후발주자가 아닌 '배워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올해 농수산식품 수출은 지난해보다 19일 빠른 253일 만에 100억 달러를 넘어섰고, 이 가운데 K-라면이 전년 대비 27.2% 증가한 13억760만 달러를 기록했다.
삼양식품 전중윤 창업자, 배고픈 시대에 국민 라면을 만들다
남대문시장 ‘꿀꿀이죽’ 행렬에서 시작된 식량보국의 꿈
1963년 한국 최초 삼양라면 출시
10원짜리 한 끼가 국민 식탁을 바꾸다
전중윤의 라면은 상품이 아니라 시대를 위로한 음식이었다
삼양식품 창업자 고 전중윤 명예회장은 한국 라면의 출발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새로운 식품을 만든 기업인이 아니었다.
전쟁의 상처와 가난이 아직 짙게 남아 있던 시대, 국민에게 싸고 따뜻한 한 끼를 제공하겠다는 문제의식으로 라면 사업에 뛰어든 창업자였다.
그가 라면 사업을 결심한 계기는 남대문시장에서 본 ‘꿀꿀이죽’ 행렬이었다.
당시 꿀꿀이죽은 미군 부대 잔반을 끓여 만든 저급한 음식이었지만, 배고픈 사람들은 그것을 먹기 위해 줄을 섰다.
전중윤 창업자는 이 장면을 보고 “값싸고 배부를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보험업을 떠나 식품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결심은 훗날 한국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으로 이어졌다.
삼양식품은 1963년 9월 15일 국내 최초 라면인 삼양라면을 출시했다.
당시 가격은 10원이었다. 직원들이 적자를 우려했지만, 전 창업자는 서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제품이 비싸서는 안 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보험회사 사장에서 식품 창업자로
전중윤 창업자의 이력은 독특하다.
그는 원래 보험업계에서 성공한 경영인이었다.
삼성생명의 전신인 동방생명 부사장을 지냈고, 이후 제일생명 사장을 맡았다.
안정적인 금융회사 경영자의 길을 걷고 있던 인물이 돌연 식품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당시 한국 사회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미래의 위험을 대비하는 보험보다,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한 끼라는 판단이었다.
전 창업자는 남대문시장에서 꿀꿀이죽을 먹기 위해 줄 선 사람들을 보고, 국민의 허기를 해결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할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이 대목은 전중윤 창업자의 기업가 정신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시장의 빈틈을 본 것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보았다.
단순히 돈이 될 사업을 찾은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필요한 음식을 만들겠다는 사회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일본에서 배운 라면, 한국인의 음식으로 바꾸다
전중윤 창업자는 일본 출장 중 라면을 접한 경험을 떠올렸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는 라면 제조 설비와 기술이 부족했다.
그는 일본에서 기계와 기술을 들여와야 한다고 판단했고, 외화 확보와 기술 도입이라는 어려운 과정을 거쳤다.
전 창업자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설득해 외화 5만 달러를 확보했고, 일본 묘조식품을 찾아가 라면 제조 기술을 배웠다.
그는 2만7000달러로 기계 2대를 구입하고 남은 2만3000달러는 정부에 반납했다는 일화도 남겼다.
이 과정은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배운 라면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 아니라, 한국의 현실과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식품으로 바꾸는 과정이었다.
당시 한국인은 라면이라는 음식 자체가 낯설었다.
밀가루 면, 분말스프, 유탕면이라는 조합은 한국 식탁에 없던 새로운 형태였다.
전 창업자는 이 낯선 음식을 국민의 일상식으로 만들었다.
라면은 처음에는 생소했지만, 곧 싸고 간편하며 배부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학생, 노동자, 군인, 자취생, 도시 서민에게 라면은 빠르게 생활 속 음식이 됐다.
10원짜리 라면, 국민 식탁을 바꾸다
삼양라면의 출시 가격 10원은 상징적이다.
당시 꿀꿀이죽이 5원, 짜장면이 40~50원 수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삼양라면은 매우 저렴한 한 끼 대안이었다.
전중윤 창업자가 가격을 낮게 책정한 이유는 분명했다.
라면은 부유층을 위한 별미가 아니라, 배고픈 국민을 위한 음식이어야 했다.
그래서 삼양라면은 단순한 인스턴트 식품이 아니라 ‘국민 식품’이 됐다.
라면은 한국인의 식생활을 바꿨다.
밥과 국 중심의 식탁에 빠르고 간편한 면 식사가 들어왔다.
집에서는 간단한 끼니가 됐고, 학교와 군대, 공장과 야근 현장에서는 배고픔을 달래는 음식이 됐다.
라면은 가난한 시대의 음식이었지만, 동시에 산업화 시대의 속도와 맞아떨어진 음식이기도 했다.
‘식량보국’의 기업가 정신
전중윤 창업자의 라면 사업은 흔히 ‘식량보국’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나라가 가난하고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곧 국가에 기여하는 일이었다.
그는 라면을 통해 서민의 허기를 해결하고, 한국 식품산업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 점에서 전 창업자는 단순한 식품회사 창업자가 아니라, 한국 산업화 초기의 사회문제를 사업으로 풀어낸 기업가였다.
그가 본 것은 굶주림이었고, 만든 것은 라면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한국인의 식탁과 식품산업의 구조를 바꿨다.
삼양라면은 이후 수많은 경쟁 브랜드가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라면 시장이 커지면서 농심, 오뚜기, 팔도 등 다양한 기업이 성장했고, 한국 라면은 세계적인 식품산업으로 발전했다.
그 출발점에 전중윤 창업자와 삼양라면이 있었다.
실패와 시련까지 품은 한국 라면의 원조
전중윤 창업자의 길이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삼양식품은 1989년 우지파동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지만, 기업 이미지와 시장 지위는 오랫동안 상처를 입었다.
1995년 서울고법은 삼양식품 법인과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1997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그러나 이 시련까지도 삼양식품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삼양은 한국 라면의 탄생을 만든 회사였고, 동시에 식품기업이 신뢰를 잃었을 때 얼마나 큰 고통을 겪는지를 보여준 회사였다.
그럼에도 삼양식품은 라면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고, 훗날 불닭볶음면을 통해 세계 시장에서 다시 부활했다.
이 점에서 전중윤 창업자의 정신은 지금의 삼양식품에도 이어져 있다.
처음에는 국민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라면을 만들었고, 오늘날에는 한국 라면을 세계인의 음식으로 확장하고 있다.
삼양식품의 글로벌 성공은 단순한 마케팅 성과가 아니라, 한국 최초 라면에서 시작된 긴 서사의 연장선이다.
전중윤 창업자가 남긴 진짜 유산
전중윤 창업자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삼양라면이라는 제품만이 아니다.
그의 진짜 유산은 기업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는 배고픈 사람들의 줄을 보고 사업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이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국민이 싸게 먹을 수 있는 식품, 가난한 시대를 견디게 하는 음식, 한국인의 일상에 들어갈 수 있는 한 끼를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이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삼양라면은 오래 살아남았다.
소비자에게 라면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추억이고 위로이며 시대의 음식이었다. 어린 시절 냄비 하나로 끓여 먹던 라면, 가족이 나눠 먹던 라면, 밤늦게 허기를 달래던 라면의 기억 속에는 전중윤 창업자가 만든 첫 라면의 흔적이 있다.
결론: 전중윤의 라면은 배고픈 시대의 위로였다
전중윤 창업자는 한국 최초 라면을 만든 사람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왜 라면을 만들었느냐다.
그는 남대문시장의 꿀꿀이죽 행렬에서 국민의 배고픔을 보았고, 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안정된 금융회사 경영자의 길을 내려놓았다.
그 결과 1963년 삼양라면이 세상에 나왔다.
10원짜리 라면 한 봉지는 가난한 시대의 서민에게 따뜻한 한 끼가 됐다.
그것은 상품이었지만 동시에 위로였고, 음식이었지만 동시에 시대의 해답이었다.
오늘날 한국 라면은 세계인이 즐기는 K푸드가 됐다.
불닭볶음면은 글로벌 시장을 흔들고, 한국 라면은 수많은 나라의 마트와 식탁에 올라간다.
그러나 그 시작은 배고픈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던 한 창업자의 마음이었다.
전중윤 창업자가 만든 삼양라면은 한국 라면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는 분명한 신념이 있었다.
국민이 배고프지 않아야 한다.
싸고 맛있고 따뜻한 한 끼가 있어야 한다.
기업은 시대의 아픔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전중윤 창업자는 단순한 식품기업인이 아니라, 배고픈 시대에 국민 라면을 만든 한국 식품산업의 개척자로 기억될 만하다.
[출처] 삼양식품 전중윤 창업자, 배고픈 시대에 국민 삼양라면을 만들다|작성자 경제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