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가음歌吟 이백 가음론歌吟論 - 노래가 된 시 38. 초서가행草書歌行 초서의 노래
소년상인호회소少年上人號懷素1) 회소懷素라 불리는 젊은 스님은 초서천하칭독보草書天下稱獨步 초서로 천하제일 이름이 났네. 묵지비출북명어墨池飛出北溟魚2) 묵지墨池에서 북녘 바다 곤이 날아 나오고 필봉살진중산토筆鋒殺盡中山兎3) 붓 끝에서 중산中山의 토끼 다 죽어나네. 팔월구월천기량八月九月天氣涼 팔월 구월에 날씨도 서늘한데 주도사객만고당酒徒詞客滿高堂 술친구와 시인들이 고대광실에 한 가득. 전마소견배삭상牋麻素絹排數箱4) 갈포 종이 흰 명주가 상자마다 쌓였고 선주석연묵색광宣州石硯墨色光 선주宣州의 돌벼루에 먹빛이 빛나네. 오사취후의승상吾師醉後倚繩牀5) 나의 스승은 취한 후에 매듭 침상에 기대어 수유소진수천장須臾掃盡數千張 잠깐 사이 수천 장을 남김없이 써대니 표풍취우경삽삽飄風驟雨驚颯颯 돌개바람 폭풍우가 불현듯 몰아치고 낙화비설하망망落花飛雪何茫茫 눈꽃처럼 날리는 낙화, 어이 그리 아득한가. 기래향벽부정수起來向壁不停手 일어나 벽을 향해 손을 멈추지 않으니 일행삭자대여두一行數字大如斗 한 줄에 몇 글자, 크기가 한 말이라. 數 황황여문신귀경怳怳如聞神鬼驚 귀신 소리 들은 듯 놀라 멍해지기도 하고 시시지견룡사주時時只見龍蛇走 때때로 용과 뱀이 내닫는 모습만 보이누나. 좌반우축여경전左盤右蹙如驚電 왼편으로 휘돌고 오른편으로 꺾임이 번갯불 같으니 상동초한상공전狀同楚漢相攻戰 그 모습 마치 초楚와 한漢이 맞붙어 싸우는 듯. 호남칠군범기가湖南七郡凡幾家6) 호남湖南 일곱 고을 숱한 집 가가병장서제편家家屛障書題徧 가가호호 그 병풍 글씨 많기도 하다. 왕일소王逸少7) 왕일소王逸少니 장백영張伯英8) 장백영張伯英이니 고래기허낭득명古來幾許浪得名 예로부터 거품 명성 얻은 이, 그 얼마이던가. 장전노사부족수張顚老死不足數9) 장전 이마는 늙어 죽는대도 쳐주기 어려우니 아사차의불사고我師此義不師古10) 나는 씨알을 섬길 뿐, 옛 것이라 섬기진 않노라. 고래만사귀천생古來萬事貴天生 예로부터 모든 일엔 타고난 재주가 귀한 법 하필요공손대랑혼탈무何必要公孫大娘渾脫舞11) 공손대랑公孫大娘 혼탈무渾脫舞가 어이 꼭 필요하단 말가.
해설 운韻을 자주 바꾸어가면서 변화무쌍한 회소의 붓글씨를 예찬한 노래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 위작僞作 논란이 복잡하다. 가짜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문언영화文言英華》에 실린 〈회소상인초서가懷素上人草書歌〉 8수에 이 작품은 없으며, 주석가인 소사윤蕭士贇과 호진형胡震亨도 진위를 의심한 바 있다.
〈2〉젊었을 때 장안 부근 죽계竹溪에서 음중팔선飮中八仙으로 함께 노닐던 벗, 장욱의 글씨를 폄하한 것은 분별없는 처사이다.
〈3〉나이도 어린 일개 소년을 선생님이라고 호칭하며, 왕우군王右軍이나 장전보다 높게 추어올린 것은 온당한 평가가 아니다.
〈4〉소식蘇軾도 이 작품 중의 "갈포 종이 흰 비단이 상자마다 쌓였네.[전마소견배수상箋麻素絹排數箱]"의 구절은 '촌티'가 줄줄 흐른다면서, 이백의 작품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5〉근인近人 첨영詹鍈은 칠군七郡이라는 명칭이 광덕廣德 2년(764)에 설치된 것이기 때문에, 이백(701~762)의 작품이 아니라고 보았다.
반면에 근인近人 곽말약郭沫若은 《李白與杜甫》에서 위작설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1〉호응린胡應麟이 이 작품을 위작으로 본 근거는, 회소懷素의 자서自敍에 전기錢起, 노륜盧綸 등은 기록하였으나, 이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회소가 거론한 사람은 겨우 아홉 사람인데다가, 거론되지 못한 인물로는 이백 외에도 소환蘇渙, 임화任華, 마운기馬雲奇 등이 있다. 게다가 이 자서自敍는 대력大曆 12년(777) 회소가 53세 때 장안에 있으면서 매일 왕공대인王公大人의 거처에 출입하던 시기에 지어진 것이므로, 벼슬을 얻기에 용이한 당대의 유명인사들만 거론하고, 징계 받은 일이 있는 이백 등은 의도적으로 제외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2〉이백이 이 작품을 쓸 건원建元 2년(759) 당시, 장욱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기에 그를 비판할 수도 있다. 두보杜甫도 이와 비슷하게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서 장전을 치켜 올렸다가, 〈이조팔분소전가李潮八分小篆歌〉에서는 "오군吳郡의 장전張顚은 초서를 뽐내는데, 예스럽지 못하고 공연히 웅장하기만 하다."고 비판하였다. 또 후학 회소懷素를 격려하기 위해 다소 과한 찬사를 쓸 수도 있다.
〈3〉칠군七郡이라고 지적한 지역이 정확하지 않은 것은, 개괄이나 과장이 빈번한 시詩의 속성이므로, 위작의 근거가 되기 어렵다.
근인 안기安旗도 이와 같은 곽씨의 견해에 일리가 있다며, 이 작품이 위작일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음중팔선飮中八仙에 장욱이 포함되었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으며, 악부 〈맹호행猛虎行〉의 해설에서와 같이 장욱의 사망연도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어, 곽씨의 주장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덧붙인다면, 가음 〈오운구가(수은명좌견증오운구가酬殷明佐見贈五雲裘歌)〉 등에 나타난 이백의 호사취미好事趣味를 보면, 귀한 물건을 보고 흥분하는 촌스러움도 그의 꾸밈없는 한 면모라고 생각된다.
각주 1 상인上人 스님의 존칭. * 회소懷素 당대唐代의 승려 출신의 서예가. 《국사보國史補》에 따르면, 장사長沙의 승僧 회소懷素는 자가 장진藏眞이며, 속세의 성은 전錢씨였다. 경조京兆(長安)로 집을 옮겨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獎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처음에는 율법律法에 열심이더니, 만년에는 서예에 힘을 기울여 열심히 글쓰기를 멈추지 않아, 몽당붓이 집채같이 쌓이니 산 아래에 묻고 이름을 '붓 무덤[筆塚]'이라 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여름 구름이 바람 따라 가는 것을 보고 붓놀림의 방법을 터득하여, 스스로 초서삼매草書三昧를 터득하였다고 말하였다. 당대의 명사였던 이백李白, 대숙륜戴叔倫, 두기竇臮, 전기錢起 등이 모두 시詩로써 칭송하였는데, 그의 필세는 놀란 뱀이나 달리는 살무사와 같고, 급작스런 호우에 미친바람 같아서, '미치광이'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평소에 술을 마시고 흥이 일어서 글씨를 쓰면 글자마다 살아 생동하며, 꺾어 돌려쓰는 재주가 신의 경지에 달하였다고 한다. 만년에 더욱 정진하여 후한後漢의 명필 '장지張芝와 사슴을 좇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받았다. 2 묵지墨池 후한後漢 때 홍농弘農의 장지張芝가 초서를 잘 썼는데, 연못가에서 서법을 익히는 바람에 연못물이 다 먹물이 되었다고 한다. 본래 묵지墨池는 왕희지王羲之가 벼루를 씻던 연못의 이름이기도 하다. 3 중산토中山兎 중산中山은 선주宣州(지금의 安徽省 宣城) 율수현溧水縣 동남쪽 15리에 있는 산인데, 이곳에서 나는 토끼털로 만든 붓이 품질을 놓은 것으로 유명하였다. 4 전마소견箋麻素絹 전마箋麻는 모두 종이로서, 오색으로 물을 들여서 윤나는 돌 빛도 있고, 금박 은박으로 꽃문양을 넣은 것도 있다. 삼으로 만든 것을 마지麻紙라고 하였는데, 당대唐代 조서詔書에 쓴 황마黃麻, 백마白麻 등이 그것이다. 견絹이나 소素는 모두 명주[증繒]의 종류로, 명주 중에 맨 아래 치를 생명주[견絹]라고 하며, 그 중에 아주 흰 것을 소素라고 한다. 5 승상繩牀 매듭을 엮어 판으로 만들어 앉을 수 있으며, 등받이와 손걸이도 있다.
6 칠군七郡 동정호의 남쪽에 있는 일곱 개의 군郡, 호남湖南이라고도 불렀다. 7 왕일소王逸少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321~379). 일소逸少는 그의 자字이다.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났다. 8 장백영張伯英 후한後漢의 장지張芝. 伯英은 그의 자字이다. 초서를 잘 썼다. 위항衛恒(?~291)의 《사체서세四體書勢》에 따르면, 한漢나라 때 초서가 나왔으나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고, 장제章帝(76~88) 때 제齊지방의 두도杜度가 글씨로 이름이 났고, 뒤에 최완崔琬, 최식崔寔등도 잘 썼다고 한다. 두씨는 글자의 짜임새가 매우 편안하나 서체는 조금 마른 듯하며, 최씨는 필세가 좋지만, 글자체의 짜임이 조금 성글었는데, 장백영은 이 두 서체의 장점을 살렸다고 한다. 그는 집안의 모든 옷에다 글씨를 쓴 후에 빨았고, 연못가에서 글씨를 배워 연못물이 다 검게 되었다고 한다. 9 장전張顚 장 이마. 당대唐代 서예가였던 장욱張旭(711 전후 재세)의 별명이다. 《국사보》에 따르면 그는 공손씨公孫氏가 추는 혼탈무渾脫舞에서 영감을 받아 초서 필법을 터득하였고, 이는 최막崔邈, 안진경顔眞卿에게 전해졌다. 그는 취하면 초서를 썼는데, 붓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외치면서 머리로 먹물을 찍어 글씨를 써서, 사람들이 그를 '장이마[張顚]'라 불렀다고 한다. 시에도 능하여 하지장賀知章, 장약허張若虛, 포융包融과 함께 오중사사吳中四士로 불렸다. 10 불사고不師古 유명하다 해서 무턱대고 옛 것을 추앙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11 혼탈무渾脫舞 혼탈이란 통째로 벗긴 양가죽이라는 뜻으로서, 이것으로 만들어 쓰고 추던 당대唐代 서역西域의 칼춤(劍舞)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혼탈무에서 초서 필법의 영감을 얻었다는 장욱張旭의 허장성세를 비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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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nirvana 원문보기 글쓴이: 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