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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동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이복재
강호(江湖)애 병이 깁퍼 듁님(竹林)의 누엇더니 ( 자연을 사랑하는 깊은 병이 들어 은서지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 관동 팔백리(八百里)에 방면(方面)을 맛디시니 ( (임금이) 800리나 되는 강원도 지방의 관찰사의 소임을 맡겨 주시니 ) 어와 셩은(聖恩)이야 가디록 망극(罔極)하다. ( 아, 임금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그지 없구나. ) 연츄문(延秋門) 드리다라 경회남문 바라보며 ( 경북궁의 서쪽 문으로 달려 들어가 경회루 남문을 바라보며 ) 하직(下直)고 믈너나니 옥절(玉節)이 알픠 셧다. ( (임금께) 하직하고 물러나니, 임금이 내리신 관찰사의 신표가 행차의 앞에 섰다. ) 평구역 말을 가라 흑슈로 도라드니, ( 평구역(양주)에서 말을 갈아 타고, 흑수(여주)로 돌아드니 ) 셤강(蟾江)은 어듸메오, 티악(雉岳)이 여긔로다. ( 섬강(원주)은 어디인가, 치악산(원주)이 여기로다. ) |
위 관동별곡 중 원주까지의 관찰사 부임길을 다시 정리해 보자.
경복궁에가 임금께 하직(아뢰)하고, 임금이 내린 관찰사신표를 행차 앞에 세우고는 부임길에 오른다. 경복궁을 나선 행차는 흥인지문(동대문)을 나와 중량포(中梁浦,동대문구 휘경동과 상봉동사이의 중량천사이)를 거쳐 망우리현(망우리고개)을 넘고 왕산탄(王山灘,왕숙천)을 지나 평구역(平邱驛,지금의 남양주시 삼패동 평구마을)에 도착한다. 여기서 쉬었다가(말을 갈아타고) 봉안역(奉安驛,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봉안마을)을 지나 용진(龍津,북한강,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와 양평군 양서면 골용진 사이의 나루)에서 배로 북한강을 건너 월계(月溪,양평군 양서면 월계마을) 덕곡(德谷,양평읍 오빈리 덕구실마을로 오빈역(娛賓驛)이 있었던 마을)에 다다른다.
양근(楊根,양평읍 양근리)을 지나 백현(柏峴,양평읍 대흥1리 대곡마을(황곡)에서 용문면 삼성2리로 넘어가는 고개)을 넘어 흑천점(黑川店,흑천에 있던 주막촌, 흑수,양평군 용문면 삼성3리 마을 앞을 흐르는 내)을 건너 지평(砥平,양평군 지평면 지평리,지평리와 접해있는 송현1리 송곡마을에 전곡역(田谷驛)이 있었다)에 다다른다. 전양현(前楊峴,양평군 지평면 무왕2리) 구둔치(九屯峙,양평군 지평면 일신리와 양동면 매월리를 넘는 고개) 대·소송치(大·小松峙,양평군 양동면 삼산2리 솔치마을과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를 넘는 고개)를 넘어 안창역(安昌驛,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역말마을)의 나루에서 섬강을 건너 문막을 지나 강원감영이 있는 원주에 도착한다.
위의 관동별곡 자료는 ‘다음카페,송강정철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에서 인용했는데 ‘평구역 말을 가라 흑슈로 도라드니’ 중 ‘흑슈(黑水)’를 ‘흑수(여주)’로 해석하고 있고, 다른 책에서도 흑수를 지금의 여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장중의 흑수(지금의 흑천)는 여주가 아닌 지금의 양평군 용문면이다. 앞에서 강원관찰사부임경로를 살펴보았듯이 서울에서 원주까지 가는 길에 일부러 여주를 지나 먼 길을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기록된 조선시대의 주요 교통로는 서울에서 전국으로 연결되는 10개의 간선도로였다. 동서남북으로 만들어졌는데 동해안 쪽의 도로는 동남지평해삼대로(東南至平海三大路)였다.경도(서울,숭인지문(동대문))~평구역~양근~지평~원주~강릉~삼척~울진~평해로 연결되었고, 이 노선 중 평구역에서 춘천을 거쳐 양구로가는 길,지평에서 홍천.인제를 거쳐 간성과 양양으로가는 길,원주에서 정선.영월.평창으로 가는 길 등의 분기로가 있었던 이 길의 다른 이름은 관동대로(關東大路)이며 평해로(平海路)라고도 불렀다.
송강 정철은 관동대로를 따라 강원관찰사로 부임했던 것이고, 관동대로의 서울~원주 구간과 중앙선철도의 청량리~원주구간 경로가 같다.
단선(單線)이었던 중앙선이 1973년 전철화에 이어 1990년대부터 복선전철화(複線電鐵化)가 추진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와 수도권중앙선전철이 운행되는 등 경제발전과 함께 중앙선도 빠르게 변화되었다. 2005년 12월 16일에는 청량리~덕소간 복선전철개통과 함께 수도권전철이 운행되었다. 2007년 12월 27일에는 덕소역에서 팔당역까지, 2008년 12월 29일 팔당역에서 국수역까지가 추가로 개통됨으로서 양평은 비로서 수도권전철이 운행되는 지역에 포함되었다. 2009년 12월 23일에는 국수역부터 용문역까지의 구간이 완공되어 개통되는 동시에 2008년 12월 29일에는 문을 열지 않았던 신원역도 개통되었고, 2010년 12월 21일에는 오빈역도 개통되어 청량리~용문간의 복선전철과 수도권전철 중앙선이 개통되었다.
수도권전철중앙선은 당초 원주까지로 계획되었으나 경제성을 이유로 2002년 용문역까지만 운행하는 것으로 변경되어 그동안 당초 계획으로의 환원을 위해 양평군과 주민들이 궐기하고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건의했지만 아직까지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만 지평역과 양동역의 고상홈설치가 이루어진 상태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1998년부터 시작된 덕소~서원주를 잇는 복선전철공사가 총사업비 1조 300억 원을 들여 2012년 8월 16일 개통되고 2012년 9월 25일 공식개통 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청량리~원주 간 운행거리가 기존108㎞에서 97㎞로 11㎞줄어들게 됐다. 새마을호기준 운행시간도 기존95분에서 60분으로 35분 단축된다. 선로용량도 1일 136회로 85회나 늘어난다.
앞에서 설명한 관동대로의 양평군 구간은 양서면 양수리 용진에서부터 양동면 삼산리 대송치에 이른다. 양평군은 양근군과 지평현이 합하여 1908년 지금의 이름과 행정구역을 갖게 되었다. 이 구간에는 양평읍 오빈2리 역말마을에 오빈역이. 지평면 송현1리 송곡(역말)마을에 전곡역이 있었다.
중앙선 복선전철개통으로 양평군내의 역은 수도권 중앙선전철이 운행되는 양수 국수 아신 오빈 양평 원덕 용문 등 7개 역과 지평 석불 구둔 매곡 양동 판대 등 11개가 된다. 아쉽게도 지평역과 구둔역 사이의 석불역은 양평군과 주민들의 끈질긴 요구에고 불구하고 역명만 유지한 채 여객열차가 서지 않는 무정차역으로 확정되어 사실상 폐역되었다. 1일평균 이용객수를 6개월간 집계하여 6명이상이라야 정차역이 되는 기준에 미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936년 착공해 청량리~양평 간 52.5㎞가 1939년 4월에, 양평~원주 간 55.9㎞는 1940년 4월에 개통되어 청량리~원주 전구간 108.4㎞가 개통되었다. 그 후 1969년 9월부터 1973년 6월까지 청량리-제천 간 155.2㎞의 전철화공사를 실시하여 33년 만에 전철화 된데 이어, 72년 만에 직선화된 복선전철로 다시 태어나 역사를 새로 쓰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 원주까지는 걸어서 3일 정도는 걸렸을 것으로 보인다. 3일이 걸렸던 길을 단1시간 만에 갈수 있게 되었다.
다음 그림은 개통후의 덕소~원주간 노선도다.
중앙선 철도 덕소~원주간 노선도(자료;국토해양부)
관동대로의 옛 경로를 따라 철도가 놓이고 1940년 4월 청량리~원주 전구 간 108.4㎞가 개통되어 청량리-양수(옛 용진)-양평(옛 양근)-지평(옛 지평역)-원주로 직선화하더니 72년 만인 2012년 8월에 97㎞로 단축되어 복선전철로 더욱 직선화된 것이다.
양평군 관내의 이설역은 석불 구둔 매곡 판대역으로 군의 동부에 편중되어있다. 철도와는 다르게 도로는 국도 6호선인 경강국도가 청량리에서 용문까지만 관동대로를 따라오다가 홍천을 거쳐 백두대간을 넘어야 관동지방으로 갈 수 있다.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인해 도로가 홍천을 경유하게 되었고 관동대로를 따라 건설된 철도도 구불구불하게 날 수밖엔 없었던 것이다.
공식개통일은 2012년 9월25일 인데 지난 8월 16일부터 새 노선으로 운행이 개시되어 구 역사와 선로는 사용을 하지 않는 폐역 폐선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복선전철개통으로 새 역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였다. 지난 72년간 수많은 이용객과 고락을 함께하다가 옛 추억만을 고이 간직한 채 새로 생기는 역에 임무를 넘겨주고 쓸쓸히 사라지거나 물러앉는 석불 구둔 매곡 판대 간현역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마음깊이 고이 간직하고자 한다.
중앙선 석불역(石佛驛)
석불역(石佛驛)은 양평군 지평면 지평의병로 434-25 (망미2리 산75-1)가 소재지였다. 농촌인구가 절정에 이르렀던 1967년 9월 19일 이곳 망미산 기슭 끝으머리에 역사를 신축하여 그해 11월 15일부터 보통역으로 문을 열었다. 철도와 논사이의 좁은 공간에 지은 역사는 독특하다. 역 입구 길을 따라 들어가면 곧바로 역 구내로 들어갈 수 있으며, 역사의 정문으로는 나가기가 곤란하다. 역사의 정문앞이 바로 논둑이어서 계단을 만들어 놓긴 했지만 급직하하기 때문이다. 345호지방도에서 역으로 연결되는 길도 농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좁은 시멘트포장길이다. 소형차만이 진출이 가능한 아주 작은 간이역으로 망미1리나 2리 마을과도 꽤나 떨어진 외딴곳에 자리 잡고있다. 당시에는 지평면 망미리주민들이 주로 이용하고 무왕리와 대평리 주민일부도 이용하였다. 청량리 기점 66.1 km 에 위치하였으며 지평역에서 4.0 km,구둔역에서 4.3 km의 거리이다.
2001년 9월 8일 신호장(간이역)으로 격하되고 2005년 4월 1일 역무원이 철수하고 무인신호장(간이역)이 되어 하루 4회(상행2회, 하행2회)의 무궁화호 열차가 정차하던 역이었으나, 2011년 10월 5일부로 여객 취급이 중지 되어 사실상 문을 닫았다. 주변 가까운 곳에 정경자미술관이 있다.
역을 되살리기 위해 망미리 주민들이 석불역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극렬한 활동을 하고는 있고 양평군도 힘을 합해 노력하고 있지만 당국의 원칙고수로 아직까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석불(石佛)이라는 역 이름과 관련해서는 아래 조선일보 기사(2012.02.22자)를 참고하면 이해가 빠를 것 같아 옮겨놓기로 한다.
양평 중앙선 '석불역(石佛驛)' 이름 풀려 -인근에서 돌부처 발견돼
양평군 지평면 망미리에는 중앙선 '석불역(石佛驛)'이 있다. 간이역으로 1960년대 말에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년 10월 이후로는 하루 4번씩 정차하던 여객열차도 서지 않는다. 9월로 예정된 용문~원주 복선전철 개통에 맞춰 인근에 새 역사가 들어섰다. 그런데 '돌부처'를 뜻하는 명칭이 어떻게 붙었는지 의문이 많았다. 주변에 석불이라는 지명이나 유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석불역 이름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역사에서 직선거리로 약 1.3㎞ 떨어진 곳에서 돌부처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석불은 망미산 줄기의 능선에 있는 높이 3m 정도 크기의 바위에 숨어 있었다. 한쪽에는 양각(陽刻)으로 약 90㎝ 크기, 다른쪽에는 음각(陰刻)으로 30㎝ 정도로 새겼다. 미륵불로 추정되며, 아래쪽의 마을인 망미리와 월산리도 내려다보인다.
양평군 이강웅 박물관팀장은 "오랫동안 발길이 닿지 않아 이끼가 끼었지만 석불 앞에는 치성을 드린 것으로 보이는 제단도 남아있었다"고 전했다. 특히 두 돌부처는 소박하고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데다 오랜 세월에 풍화돼 더욱 정감을 주고 있다. 주민들도 잊혀졌던 보물을 발견한 듯 석불을 반기고 있다.
또다른 문제도 풀렸다. 근처의 마을 이름인 '안섬부리', '바깥섬부리'도 '석불리'가 변한 것으로 추정됐다. 덩달아 과거에 발굴된 다른 불교 유물도 주목받고 있다. 석불역 건너편 월산리에서는 1960년대 후반 청동으로 된 북, 종, 가위, 그릇 등이 나왔으며 고려시대에 '취암사'라는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
대합실안의 열차시간표
석불역 구내 지평역 방향으로 곡선이 아름다운 선로
2011년 10월 5일 역으로서의 임무를 마친지 10여 개월 만인 2012년 8월 17일 역에 들러보았다. 선로가 끊겨 고요속에 쌓인 아주 좁은 대합실엔 벽에 결려있던 열차시간표와 여객운임표가 창문을 따라 놓은 긴 나무의자위에서 벽에 기댄 체 곤한 낮잠에 빠져있는 듯 했다.
한편 옛 석불역에서 지평역과 월산저수지 방향으로 1㎞가 채 못된 곳에 세우려하는 새 석불역에는 상하행선 저상홈을 가운데 두고 철길을 두 갈래로 갈아 놓은 채 역사나 프랫홈비가림시설 조차설치 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역사부지 철길위로 안동네와 연결하는 고가가 설치되어있고 도로변에는 석불역설치를 촉구하는 주민들의 강경한 문구가 적힌 죽장기 수십개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중앙선 구둔역(九屯驛)
구둔역(九屯驛)은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구둔역길 8 (일신리 1336-2)에 있는 1940년 4월 1일 중앙선 양평-원주구간이 개통되면서 생긴 역이다. 구둔마을의 중심에 있는데, 구둔(九屯)이란 지명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이 지역 높은 산에 아홉 개의 진지를 구축하였던 것에서 유래한다. 몇 년 전 영화마을로 지정되어 영화와 관련된 테마로 마을을 발전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자동차를 이용한 육로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에는 양평군 지평면 일신리와 무왕리 주민들은 물론 철도가 없는 여주군주민들까지 이용하여 여주-구둔 간 버스가 용문-구둔 간 버스와 더불어 오래전부터 운행되고 있다.
청량리 기점 70.4 km에 위치하며 이웃역은 청량리 방향으로 석불(4.3 km)이고 원주방향으로 매곡(4.3 km)이다. 승객감소로 1996년 1월 1일 승차권 차내 취급역으로 전환되어 역무원이 배치되어 있지만 승차권을 발매하지 않아 차내에서 구입해야 했다. 하루에 상하행 각4회에 걸쳐 무궁화호가 정차하여 오가는 손님을 맞았던 간이역이었다.
1940년 중앙선 양평-원주구간 개통에 맞춰 지어져 오늘에 이르는 구둔역사(驛舍)는 2006년 12월 4일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296호로 지정되었다. 대합실 출입구에 박공지붕을 구성하여 정면성을 강조하였으며, 철로 쪽 대합실출입구에 차양을 덧달아 본채지붕과 차이를 두어 입체감과 함께 그늘을 제공하는 등 기능적 역할을 하고 있다. 역사에서 기차를 타기위해 승강장쪽으로 나가거나 열차에서 내린 손님이 역사로 진입할 때 지나치게 되는 곳에 향나무가 한그루 서있다. 이 향나무는 역이 생긴 1940년에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나무 앞에는 ‘소원나무(Wish Tree)’라는 작은 표지판이 세워져있다. 소원을 적어 나무에 달아놓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의 안내문과 함께...의외로 키높이 정도에는 적어 매단 소원지들이 많이 달려있다. 나무옆에는 돌맹이로 쌓은 2~3m높이의 돌탑도 하나 서있어서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역사가 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역 구내에 한국철도공사 1000호대 전동차 1065호와 1165호가 현재 유치되어 전시되고 있다.
역사이전안내문
대합실 내부(1)
대합실 내부(2)
대합실 내부(3)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둔역사
역 구내에 전시 중인 전동차
역 안내표지판
구둔역 구내의 선로
향나무(소원나무)
집표함
역으로서의 역할을 마친지 채 이틀이 못된 2012년 8월 17일 아침나절 구둔역사를 찾았다. 여주군 북내면과 양평군 지평면을 잇는 345번 지방도를 달리다 보면 중간 쯤에 구둔역으로 들어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는 일신2리 구둔마을입구임을 알리는 돌표지판을 비롯해 생태건강마을. 구둔영화체험마을 및 마을안내도 등 표지판이 무리지어 서있다. 이곳에서 구둔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작은 다리를 건너게 되고 이 길을 따라 500m 쯤 직진하면 막다른 곳에 작은 광장이 나타나면서 이내 구둔역이라는 간판이 달린 역사가 들어찬 나무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잘 가꾼 공원속의 중심처럼 역사가 수즙게 고개를 내민다. 여러 그루의 향나무가 지붕아래를 가렸지만 출입문만큼은 환히 보인다. 역사이전안내가 붙은 출입문을 열고 들어간 대합실안은 아직도 깨끗이 정돈되어있다. 무료한 기다림을 책을 읽으며 달래라는 뜻인가? 비치되어있는 책장안에는 책 몇 권이 놓여있고, 열차시간표 며 여객운임표 위 높은곳에 달려있는 시계도 현재시간을 정확히 표시하며 작동하고있었다. 깨끗한 테이블보와 유리가 덮힌 둥근 탁자가 놓여있는 모습이 어느 댁 거실처럼 정겹고 한편으론 이채롭다. 여러 가지 포스터와 안내판이 아직도 정결히 대합실의 벽면 등을 장식하고 있었다. 개찰구를 나가 승강장과 주변을 돌아보았다. 앞에서 소개한 향나무를 비롯해 은행나무 등 이 빈 공간없이 주위를 감싸고 상하행선 프랫홈을 지나 평행선을 긋고 길게 늘어선 레일이 까마득히 그 끝을 좁혀가고 있었다. 열차에서 홀로 내린 외로운 승객처럼 다시 역사안으로 들어섰다. ‘근대문화유산 296호로지정된 구둔역에 오신 고객님을 환영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는 집표함엔 한없는 그리움을 달래려 이 역에서 내렸을 어느 방랑자가 넣은 승차권 몇 장이 아직까지도 주인의 체온을 간직한 채 고이 담겨져 있었다.
역이 이사한 어제 이후로는 다시 안 올 열차와 손님.
어느 누가 이 쓸쓸한 간이역을 다시 찾아올 것인가?
향수를 견디다 못해 찾아들 고향사람들. 일상에 찌든 심신을 달래기 위해 언젠가 내렸던 기억을 되살려 찾아 올 사람들...왜 올 사람이야 없겠냐마는 기적 소리 내며 오가는 기차가 없는 구둔역은 더욱 쓸쓸하고 적막해 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동안 이 역을 거쳐 간 수많은 역무원들의 손때가 묻은 집기들을 정리해 실어 나르는 차량 한 대가 정적을 깨며 엔진음을 내고 서 있었다.
이 마을이름인 구둔으로 인하여 관동대로 구둔과 다음에 소개할 매곡역사이를 넘는 고개 이름이 구둔치(九屯峙)이다. 앞서 소개한 석불역과 구둔역 사이의 관동대로 고개이름이 전양현(前楊峴)으로 현(峴)자가 아니라 치(峙)자를 쓴 것으로 보아 험준한 고개임을 나타낸다. 이 역이 있는 구둔마을을 지나면 구둔치고개로 접어들게 된다. 이 마을 한가운데 위엄있게 우뚝 서있는 오래된 느티나무아래 주막집에서 구둔치를 넘으려는 손님과 넘어온 손님들이 어울려 막걸리사발을 기울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중앙선 매곡역(梅谷驛)
매곡역(梅谷驛)의 소재지는 양평군 양동면 매월길 257 (매월리 566-3)이다. 청량리 기점 74.7 km에 위치하며, 이웃역은 청량리 바향으로는 구둔역(4.3 km)이, 원주방향으로는 양동역(4.2 km)이 있다. 1968년 9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2001년 신호장(간이역)으로 격하되었으며, 2008년 무배치간이역(역무원이 없는 간이역)으로 변경되었다. 하루에 상행5회 하행 4회 무궁화호가 운행되며 여객 업무를 담당해 왔다.
구둔역에서는 짧고 긴 3개의 터널을 지나 10리쯤 되는 철길을 10분도 채 안 걸려 달려왔던 역이지만 기차길이 뚫리기 전에는 험준한 구둔치를 넘어야 도달하던 곳이다. 아마도 3시간은 족히 걸렸을 고개다. 고개를 내려와 제법 넓은 벌판이 시작되는 달옹개(月隱,월은)마을에도 주막집이 있었다. 이 주막집자리에서 3,400여 m되는 거리에 있던 매곡역이 이번에 1㎞가 채 안 되는 새 매곡역으로 이사를 갔다.
대합실 내부
매곡역 구내의 매곡터널방향 선로
매곡역 구내의 안내표지판
역 바로 앞에 마을회관을 비롯한 집이 몇 채있어 석불역 등 다른 간이역과는 다르게 매곡역은 그나마 덜 적막했다. 붉은 벽돌을 쌓아 지은 매곡역은 아담했다. 출입문에는 구둔역과 마찬가지로 역사이전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대합실에는 여느 간이역과 마찬가지로 열차시간표 및 여객운임표가 벽에 걸려있었고, 그 옆에 다른 역에는 없는 일반현황. 연혁. 역세권을설명하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1972년 8월 28일신축한 역사라고하니 지은 지 40년 만에 퇴역하는 셈이다. 구둔역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니 보존될 것이지만 석불을 비롯한 매곡.판대역사는 철거될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대합실을 거쳐 구내에 나가니 그동안 전동차에 전력을 공급하던 전선을 걷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빠르기도 해라. 엊그제 저녁까지도 사용하던 것을 벌써 철거하고 있으니 속전속결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때가 잔뜩 낀 이정표와 길게 평행선을 그으며 두 줄로 깔려있는 철로, 그 윤기 나던 레일위엔 기차가 지나 간지 이틀이 안 되어 벌써 녹빛이 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2009년 6월 5일 이곳 매곡역에서는 많은 철도관계 인사와 명예역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명에역장임명식과 홍보대사 위촉식이 있었다. 이날 임명된 명예역장은 전국 31개 간이역을 대상으로 공모를 통해 접수된 161명의 지원자 가운데 선정된 36명으로 대다수가 철도애호가와 전직 철도직원들로 이날 임명장 수령과 제복과 신분증 등을 받고 공식적인 명예역장 업무를 시작했던 것. 매곡역의 명예역장은 이역에 근무하던 역무원출신으로 이 마을에 정착해 이장까지 역임한 진귀연씨다. 보수도 없고 알아주는 이도 없는 명예역장은 역구내 청소와 환경정리 등 묵묵히 궂은일을 도맡아 해온 숨은 일꾼들이다.
판대역(判垈驛)은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에 있는 역이다. 역명으로 쓰고 있는 판대(判垈)는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판대리의 것을 쓰고 있지만 실제소재지는 옛 판대역이나 새 판대역 모두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이다.
판대라는 역명을 쓰기까지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역이 소재한 마을이름을 따서 역명을 쓰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이웃 마을의 이름을 빌려다 쓰게 된 것이다. 행정구역명칭인 삼산(三山)으로 쓰려고 했으나 2006년에 문을 닫은 옛 장항선에 한자까지 같은 역이 있어서 불발, 다음 대안으로 이 마을 이름인 이천(梨川,배내)이라는 이름을 쓰려했지만 경기도 이천(利川)으로 오해할 소지가 많다고 하여 결국 판대라는 역명을 쓰게 된 것이다. 복선전철개통으로 역명을 바꾸자는 움직임이 지역주민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데 귀추가 주목된다.
역에서 가까운 곳에 해발541m인 당산과 520m 인 웅덕산이 있고, 등산로에 접근하기 쉽도록 도로가 확포장되어 있고 주차장 등 시설과 당산을 거쳐 웅덕산까지 연결하는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있다. 두 산의 사이에 있는 곰지기계곡은 나무터널을 이루고 깨끗한 실개천이 흐르고 있어 찾는 이들의 심신의 피로를 풀어준다. 등산로가 험하지 않고 2~5시간까지 적당한 산행을 즐길 수 있어 가족과 친목단체단위 등산객들의 발길이 연중 끊이지 않는다.
판대역 앞을 흘러 간현유원지에 이르는 삼산천은 즐기기에 적당한 수량과 아름다운 계곡과 산하가 한데 어울려 만들어 내는 비경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등 깨끗한 자연환경을 간직하고 있다. 백아곡(지금의 양동면 쌍학리 안골마을)에 터잡은 우리나라 한문사대가이며 여한구대가이기도 한 택당 이식선생은 이 개울가에 있는 아름다운 여덟 곳을 골라 동계팔경(東溪八景)이라 이름붙여 병풍까지 만들어 택풍당에 걸어놓고 즐겼다는데, 그중 제6경인 보봉석벽, 제7경인 승담과 제8경인 구암이 판대역과 섬강사이 삼산천에 있다.
도보로 10분 이내 인근에는 오크벨리 스키장. 골프장. 콘도 등 대규모 관광휴양시설이 소재하고 있다.
1965년 12월 7일 보통역으로 문을 열었지만 2001년 9월 8일 신호장(간이역)으로 격하되고, 2005년 3월 30일 무인역으로 지정되었다. 2008년 4월 1일 무배치간이역으로 역종이 변경되었다가 2011년 12월 21일 양동역과 동화역의 신설 구간으로 열차가 운행되면서 새 역사로 이설되었다.
이웃역은 청량리방향 양동역과 원주방향으로는 간현역(艮峴驛)이었다. 이름이 역사속으로 사라진 간현역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에 위치한 역이었는데 2011년 12월 21일에 폐역되었다. 2011년 10월 5일부로 중단된 동화역의 여객취급을 재개하고 남쪽으로 1.5km 가량 떨어진 위치에 서원주역이 신설되면 기존 간현역은 간현관광지 종합개발계획 프로젝트에 따라 보존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름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해도 역사만은 보존될 예정이라니 다행스럽다.
1940년 4월1일 양평역~원주역 간 구간이 완공되면서 문을 연 간현역은 6·25전쟁 때 폭격으로 역사건물이 전소됐지만 1958년에 신축되기도 했다. 간현역은 일제 말기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 현대사와 희노애락을 함께 한 살아 있는 역사였다.
조선시대, 관동대로를 따라 일제에 의해 개통된 중앙선의 청량리-원주 간 철도.
송강 정철이전부터 이후까지 거슬러 긴 수백 수천의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숱한 애환을 남긴 길, 관동대로의 서울-원주 구간에 1940년 철도가 놓여 칙칙폭폭 증기기관차가 다니다가 어느 순간 디젤기관차에 바톤을 넘기고, 다시 33년이 지난 1973년 전기의 힘으로 다니는 전기기관차가 다닐 수 있도록 전철화되더니 그로부터 다시 39년이 지난 2012년 8월 16일 구부러진 곳을 펴고 복선화한 복선전철로 발전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이 철길을 통하여 서울에서 평창까지를 1시간대에 주파하는 ITX나 KTX 같은 고속열차가 달릴 것이다.
920리(370여㎞) 관동대로의 전 구간을 실제로 걷고 책까지 낸 우리 땅 걷기 대표 신정일이라는 분이 있다. 그는 저서 ‘관동대로-서울에서 평해까지 옛길을 걷다’에서 관동대로의 시점인 홍인지문에서 원주까지 3일이 걸렸다고 하고, 평해까지는 13일이 걸렸다고 밝혔다. 3일이 걸렸던 서울-원주를 열차가 1시간 만에 주파한다니 경이로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신정일씨는 저서에서 조선시대에 아홉 개 주요간선도로가운데 원형이 제일 잘 보존되었다고도 했다. 지금 서울에서 평해를 가는 길을 검색해 보니 경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를 경유하여 풍기-영주-백암온천-평해에 이르는 길로 관동대로 옛 경로와는 전혀 달랐다. 자동차기준으로 총 327.1㎞의 거리에 5시간18분이 소요되는 것으로 나왔다. 관동대로는 서울을 벗어나 양평군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주로 험준한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경로이기 때문에 개발에 걸림돌이 되어 보존 되어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72년 전에 개통한 중앙선철도 청량리-원주 구간이 아니었으면 양평군의 동부지역 즉 옛 지평현 구역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남들이 다 받는 문명의 혜택을 조금밖에 못 받고 살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이르니 이 고장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2012년 8월 16일 청량리-원주 간 복선전철개통이 지극히도 고마울 뿐이다.
중앙선철도 청량리-원주 구간은 물론 중앙선이 통과하는 양평군을 비롯한 다른 시군의 역사도 고쳐 써야 하겠다.
새 양동역사 조감도
2012년9월 중 목표로 신축 중인 양동역사
새 구둔역사
새 매곡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