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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주관주의로의 침몰(요약문)
지금의 ‘나르시시즘의 문화’라고 지칭되는 현대 문화가 어느 부분에서는 자기 중심적인 생활 양태를 그 자체로 허용하지 않는 윤리적인 노력, 즉 자기 진실성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는 것이 내 논증의 핵심이다.
이런 나의 관점은 현대 문화를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일반적인 방식과 대조를 이룬다. 일반적인 견해는 현대문화를 (a)자기 실현의 이상에 의해 추진되는 것으로 보지만, 이것은 거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실천행위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중심적일 수밖에 없거나, (b)단지 자기 방종과 이기주의의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혀 이상에 의해 작동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견해, 즉 (a)와 (b)의 견해는, 그 자체로 나르시시즘의 문화와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문화도,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요, 그 이상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사람들이 현대문화에서 통용되는 많은 관행들에 도전할 것임을 명료하게 제시하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나르시시즘의 문화는 그 체제가 갖고 있는 문제 때문에 이상에 훨씬 못 미치고 있지만, 현대문화속에는 나름대로의 이상에 따라 살아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강의도 못들어 가면서 이런 우매함까지 보여 죄송합니다. ㅜㅜ)
나의 주장과 판단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나르시시즘의 문화는 왜 자기 이상에 훨씬 못 미치고 있는 것인가? 무엇이 자기 진실성의 윤리를 이토록 왜곡시켰으며, 또한 천박한 윤리로 만들어 버렸는가?
자기 중심적 생활양태는 두가지 면에서 빗나간 것이다. 우선, 실현의 목표를 개인적 차원으로 한정시키며, 또한 인간 관계를 순전히 수단적인 것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사회적 원자주의를 향해 달려나가는 것이다. 그들은 실현을 오직 자아의 것으로만 보고, 그들 자신의 욕구나 열망 너머에 있는 것- 역사, 전통, 사회, 자연, 혹은 하느님 등-에서 오는 요구들을 소홀히 대하거나 혹은 부당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생활양태는 극단적인 인간 독존주의를 조장하는 것이다.
그 밖에도 우리의 기술주의적․관료주의적 사회는 도구적 이성에 점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런 사회는 원자주의를 더욱 더 강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또한 우리의 삶과 그 주변, 즉 과거, 자연 및 우리들의 사회적인 조치들과 같은 모든면들에 대하여 도구적인 태도를 취하게 함으로써 인간독존주의적인 사고를 증폭시켜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틀만으로는 이런 현상을 다 해명할 수 없다. 또한 자기진실성의 이상 안에 이런 왜곡된 경향을 쉽게 만들어주는 근거들이 분명히 있다.
첫째는,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 속에서 자아 실현의 이상이 자기 중심적인 모습으로 타락해 간다는 것이다. 둘째는, “고급”문화가 모든 의미의 지평을 부정하는 일종의 허무주의를 지향해 간다는 점이다. (니체, “저주받은 시인”의 이미지와 보들레르 등) 이런 허무주의의 관점들은 모더니즘의 여러 흐름속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 포스트모던으로 언급되며 나타나고 있다.(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등)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모든 것도 역시 자기 진실성의 이상과 동일한 근원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여기서 이런 연결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들은 현대 개인주의의 표현주의적인 면모들을 좀 더 살펴보아야만 한다.
새로운 것은 표현을 통하여 드러난다는 생각은 내가 현대적 개인주의 개념의 “표현주의”를 언급하면서 포착하려고 했던 개념이다.
이것은 자기발견과 예술적 창조 사이의 유사성, 그리고 연관성 까지도 가리키고 있다. 예술적 창조는 사람들이 자기 정의에 도달할 수 있는 모범적인 양태가 되는 것이다.
예술은 더 이상 실재하는 것에 대한 모방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맥락에서 좀더 많이 이해되었다. 상상력을 바로 창조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창조, 즉 본원적․독창적이고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자기발견은 포이에시스, 즉 작업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자기진실성의 이상이 계속 발전시켜 온 그런 방향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예술과 자기정의, 이 두가지는 창조적인 작업을 내용으로 삼고 있는 것뿐만은 아니다. 자기정의는 일찍이 도덕과 대비되어 고찰되어 왔다.(루소등의 경우처럼) 그러나 오직 자기자신에게 진실하라는 요구와 사람들 사이의 공통적인 객관적 정의에 주목하라는 요구 사이에 최소한 관념적인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런 차이는 자기진실성의 요구는 미적인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통찰은 샤프트 베리의 주장을 따른 허치슨을 거쳐, 18세기 말에 이르러 임마누엘 칸트의 정식화를 통해 유명해지고, 경전과 같은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샤프트 베리에 이어서 칸트에게도 미는 일종의 만족감이다. 이러한 미적인 만족감은 미 자체 때문에 저절로 느껴지는 그런 만족감이다. 그것의 목표는 자기안에 내재적인 것이다.
자기 진실성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그 자체가 목표로서 파악되는 것이다.
자기의 삶은 그 자체 때문에 값어치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전부로서의 자기와 미적인 것은 서로 합쳐도 상관없는 두 요소이기에 쉴러는 그의 <인간의 미적 교육론>에서 이들의 통합을 표현하였다. 쉴러에 의하면 미의 기쁨은 우리 마음속에서 도덕과 인욕의 싸움에 의하여 생겨난 분열들을 극복하게 하는 통일성과 전체성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대립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미적인 전체성은 자기 나름의 목표, 즉 자기대로의 선과 만족의 형식이 있는 독립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 진실성은 여러 분파들로 발전할 수 있었다.
1. 마리네티와 미래파 예술가들, 2. 앙토넨 아르토와 그의 잔혹극, 3. 조르주 바타이유 등이다. 폭력예찬은 또한 파시즘의 뿌리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태는 모두 똑같이 합당한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치란 선험적․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에게 자기 창조의 자유와 힘(권력)의 느낌을 준다. 20세기의 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은 일종의 힘(권력)에 대한 추파라고 볼수 있다. 이것은 자기결정의 자유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이들의 관계는, 공통점과 논쟁점 양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잡하다.
공통점은 자명하다. 자기 진실성은 그 자체로 자유의 개념이다. 하지만, 이런식의 자유개념은 가장극단적인 형식의 인간 독존주의로 쉽게 전학할 수 있다. 이런 자유 개념은 개인을 확실하게 사회와 결협시키고 있다. 그런 사회체지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규정되고, 마르크스와 레닌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사회의 양상들은 무신론이나 생태 파괴적 공격성을 통하여 인간 독존주의를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점을 능가하는 새로운 정점까지 밀고 나갔다. (??? 이해도, 동의도 잘 되지 않습니다. ㅜㅜ)
궁극적으로 자기진실성은 자기 결정의 자유와 언제나 함께 갈 수도 없고 가서도 안된다. 함께 간다면 자기 진실성은 자기 기반을 버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 진실성이라는 현대문화 안에 있는 긴장된 안간힘들이며, 동시에 약점들이다. 그리고 점점더 원자화되어가는 사회의 압력과 함께 자기진실성 문화의 하강을 촉진시키고 있다.
첫댓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이해는 커녕 알아듣기도 쉽지 않은데, 강의까지 빠지게 되니 ㅜㅜ 큰일이란 생각만 듭니다.
여행지에서 7장을 읽을 생각을 하니 더욱 마음이 무겁습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