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고향 “익산” 나들이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거실 벽에 걸어둔 옛 사진의 풍경속에서 꿈틀데고 타향살이 우리네들에겐 고향이라는 말 한마디에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성큼 다가선 유년시절의 추억,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 사이에 빚어졌던 갖가지 사연들이 고향의 봄․여름․가을․겨울의 정경들과 함께 가슴 가득 들어 찬다.
내고향 익산시, 어느날인가 서울 강남 고속터미날에서 이리가는 표를 사 두리번 두리번 이리라 쓰인 표지판을 찾아 헤메이는 노부부의 모습을 바라다가 이리가 익산으로 바뀌었다고 일러주며 버스에 동승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듯 익산시라하면 지금까지도 생소한 느낌을 받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익산시가 생소함은 옛날 갈대숲 속 마을이라는 뜻으로 속리, 솜리로 명명하고 이리라 불리운 이리시와 익산군이 1995년 통합하여 “익산시”라 했기 때문이다.
내고향 익산을 생각하면 철로길을 달리며 동네친구들과 지나가는 열차를 향해 손흔들던 기억이 난다. 만경강과 동진강유역에 펼쳐진 호남평야의 중심부로 전형적인 논농사지역이었던 익산은 일제시대에는 미곡의 집산지로 군산을 통해 미곡을 수탈해가기 위해 세워진 이리역이철로인 호남, 전라, 군산선이 교차하며 호남고속도로가 동부를 지나는 금마 진입로가 있고 10여개의 국도와 지방도를 이용해 전국각지로 연결되는 오통 팔달의 교통의 중심지이다. 조선시대에는 전주와 남원 등지에서 거두어 들인 조세를 집산하여 금강수운을 통해 경창으로 수송하던 주요한 교통지로 웅포면 곰개나루 와 같은 금강나루를 통해 충청도와 연결되었고,
익산은 또한 역사적으로 볼 때 마한․백제문화권의 중심지역으로 많은 유물과 유적들이 금마면을 중심으로 널리 분포한 훌룡한 역사문화의 “익산문화권”을 형성한 곳이다. 국보 제 11호인 미륵사지석탑으로 유명한 미륵사지와 모질메산성으로 불리우는 왕궁평성, 오금산성, 오금사지, 제석사지, 쌍릉등 궁성과 절터, 성터, 무덤등 헤아릴수 없는 유적들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미륵사지는 한국 최초의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과 아울러 삼원 병립식 의 가람배치를 가진 한국최대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백제의 무왕과 신라공주 선화의 사랑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백제의 무왕이 금마저의 마를 캐는 마동으로 신라의 선화 공주가 아름답다하여 결혼하기 위해 신라의 아이들에게 널리 유포하였다는 “서동요”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두고 서동 도련님을 밤마다 몰래 몰래 찾아간대요.》 백제의 석공이 신라의 경주에가 탑을 쌓는 아사달 아사녀의 눈물의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내고향 익산이다.
익산을 바라보면 여산면의 천호동굴과 망성면의 곰솔나무, 무왕과 선화공주의 쌍릉, 난초로 유명한 시조시인 이병기의 생가도 둘러 볼 일이다. 그리고 금마면의 기세배놀이, 삼기면 오룡리에 전해오는 민요 목발노래등도 알려진다.
내 고향 익산은 천예의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다..가뭄과 수해피해가 아주 극소하고 공기가 좋은 내고장은 그래서 인지 마한 백제 문화권의 수도인 것이다. 내고향 익산은 추억을 낚는 무료 낚시터다. 나는 오늘도 한가로이 앉아서 고향이라는 저수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오늘따라 조황이 좋은 편이다. 자리를 옮겨 앉아도 조황은 여전하다. 이래서 고향은 좋은 것인가 보다. 고향 땅을 밟지 않아도, 고향 바람을 쏘이지 않아도, 고향물을 마시지 않아도 나는 시방 고향에 있다. 고향은 마음 속에 산다. 고향은 상상할 때 더 아름답고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