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엡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엡 5:12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엡 5: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성도의 신분을 과거와 현재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어두움과 빛으로 대조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과거에는 어두움의 자식이었고, 엡2:3,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지만, 현재는 빛의 자녀입니다. 이말의 의미는 우리가 전에는 단지 어둠 속에 거하던 자가 아니라 어둠 그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제 단지 빛속에 거하는 자가 아니라 빛 그 자체로 신분이 바뀐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8절,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어둠의 자식에서 빛의 자녀로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고 이제 이 신분 답게 행하며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성도의 신분을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관지어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즉 엡5:1의 ‘사랑을 입은 자녀’라는 신분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성에서 비롯된 것이요, 본문 8절의 ‘빛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에서 비롯된 신분이라고 볼 수있고. 나중에 엡6:10의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군사’는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비롯된 신분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 성도들은 성삼위 하나님의 듬뿍 사랑을 받아 옛 어두움의 자리에서 벗어나 놀라운 하나님의 자녀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본문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분은 ‘빛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로서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비추는 또는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빛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받은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묵상하면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1. 빛의 자녀는 열매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5장에서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행할 일을 부정적인 측면으로 지난주 설명했습니다. 5:3-4, 5-7절은 같은 내용의 반복이라고 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행하지 않아야 하는 일의 목록은 간단합니다. 즉 ‘음행, 온갖 더러운 것, 탐욕’입니다. 그리고 ‘음행하는 자, 더러운 자, 탐하는 자 즉 우상숭배자’입니다. 물론 모든 죄악은 하나님께 범하는 것입니다만, 구체적으로 죄를 범하는 방향성은 음행은 자신에게 범하는 죄악이요, 온갖 더러운 것은 타인에게 행하는 죄악입니다. 그리고 탐욕은 우상숭배라고 했으니, 하나님께 범하는 죄악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적극적인 측면으로 빛의 자녀로서 행할 일을 가르칩니다. 8-9절,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런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1)모든 착함의 열매 모든 착함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인간적으로나 성품적으로 또는 천성적으로 착한 것이 빛의 자녀로서의 맺을 열매는 물론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착함 또는 선함에 대하여 분명한 정의를 해야 합니다. 착함 즉 선함은 하나님 아버지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하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를 선한 목자라고 소개하신 예수께서도 마19:17,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처럼 되는 것이요, 하나님 아버지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할 때에 착하고 선한 일입니다. 빛의 자녀는 이러한 착함의 열매를 맺고자 애쓰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중심으로 생각하 좋은 예는 사도행전4:18-20에서 볼수 있습니다. 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다니자 이들을 잡아다가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도 말라고 협박합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것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 공의회 에서 말합니다. 이 공의회는 그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죽음을 결정했던 정치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의회입니다. 이들을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앞에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고백을 하며 외부의 상황이나 위협이나 강요올 인한 자신들의 불이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느것이 옳은일인가를 생각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의 삶이며 착한 열매입니다. 외부의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이익이나 불이익을 계산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하는 이 일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가 판단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며 착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2) 의로움을 열매 의로움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구약이나 신약이나 의롭다고 말할 때에는 ‘다른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나타내는 경우입니다. 윤리적으로나 도적적인 것에 대하여 의롭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경우입니다.
마태복음 1:18-19의 기록을 보면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무슨 일이 발생했습니까?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했습니다. 그당시 이스라엘의 법은 약혼했다는 것은 혼인과 거의 동일한 사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동거하지 않았는데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 한 것을 알 았습니다. 자신이 아기가 아닌 것이 틀림없습니다. 율법에서는 이런 음행을 저지른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믿었던 여인에 대한 배신감의 분노로 율법대로 행하여 돌로 쳐 죽여 보복 할수도 있었지만 그는 이 마리아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덮고 조용히 파혼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런 요셉을 성경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더 중요히 여겨 행한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윤리적이나 도덕적인 것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의로운 일입니다.
예수님 께서도 막 3:4-5에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안식일에 선한 행하는 것이나 생명을 살리는 일이 옳은 일 즉 의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생각하며 살았느냐 동시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을 건져내었느냐가 의로움의 관건입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하신 단12장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내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이방종교의 생각입니다. ))빛의 자녀는 생명을 건지고 생명을 살리는 의로운 열매를 맺고자 애쓰면서 살아야 합니다.
3) 진실함의 열매 진실함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설명이 필요 없는 줄 압니다. 진실함이란 무엇인가 이야기 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여 지켰느냐까지입니다. 믿음에나, 생활에나, 말에나, 생각에나, 여하튼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 내 자신이 진실한 여부는 자기 자신만이 압니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지, 어떤 의도로 말하는지에 대하여 가장 정확한 진실은 자신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향하여 맺는 열매는 언제나 진실이어야 합니다.
역시 빛의 열매도 세 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착함은 하나님을 향하여 맺을 열매입니다. 의로움은 다른 사람을 향하여 맺을 열매입니다. 그리고 진실함은 자신을 향하여 맺을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입는 자녀로서 행하면 안되는 앞 절의 경우와 연결해서 생각해 봅니다. 내 자신을 향하여서는 음행대신 진실함의 열매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온갖 더러운 것 대신 의로움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탐욕 즉 우상 숭배대신 모든 착함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빛의 자녀는 이런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는 모든 착함, 예수 그리스도 앞 그리고 타인을 향하여는 의로움, 성령 앞 그리고 자신을 향하여는 진실함의 열매를 맺어서 온전한 성도의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2. 빛의 자녀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10절,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시험하여 보라’는 말은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행하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스스로 증거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세 가지 면으로 생각해 봅니다.
1)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먼저 성도는 예배하는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신앙의 근본적인 일입니다. 예배할 때마다 구약의 제사드릴 때처럼, 준비성, 정결함 그리고 경건함 나아가서 기쁨이 있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몸이 거룩한 산 제사가 되도록 애쓰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구약의 예배는 죽은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돌아가셔서 영원한 제물이 되셨기에 이제 우리는 죽은 제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제물인 우리의 삶전체를 드리는것이다. 우리의 생활을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이것이 산제물로 살아있는 제물입니다. 주일 예배는 일주일의 예배의 시작입니다. 공동체가 모여 주님께 예배드리는 시간 매우 귀하고 중요한 예배합니다. 이 공동체의 예배가 마치고 교회당 밖을 나가는 순간 예배가 끝났다고 생각을 많이 하는데 예배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개인의 삶속에서 자신을 산제물로 드리는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공동 에서 흩어진 때 삶으로의 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말씀 안에서 자신을 쳐복종 시키려 순종하는 삶을, 말씀을 따라서 사랑을 행하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등 자신을 매일의 삶가운데 산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2)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살전2: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이제 하나님의 아들 딸은 우리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하기 위하여 천사를 보낼 수도 없고, 예수께서 다시 오실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마다 하나님은 몹시 기뻐하십니다.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계속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직접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또한 빌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열심히 돕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복음 전함의 간접 사역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구제헌금과 선교헌금을 힘껏 보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협력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과 같은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직접 복음을 전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자를 간접적으로 돕는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주님의 마지막 명령, 바로 " 사도행전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일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3) 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히11:5-6,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었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더라 저가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 에녹은 동행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늘 깨닫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드렸기에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당신의 뜻을 알아차리고 행하는 에녹을 보옵실 때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까? 힘들거나 어려울 때나, 기쁘거나 감사할 때나, 슬프거나 괴로울 때, 평안하고 평탄한 길을 걸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께 계심을 믿을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에게 상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요, 오히려 나를 붙들고 계신 그 손을 하나님께서 결코 놓치 않으신다는 확신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때에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십니다. 또한 히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아름다운 삶이요, 구제하는 삶이 아닙니까? 구제는 남는 것을 가지고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는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삶입니다. 더불어 살고자 함이 구제입니다. 나의 남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살을 찢으시고, 당신의 피를 흘리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당신의 생명을 나누신 것입니다. 우리의 살림을 나누고, 우리도 지금 필요한 것을 찢는 아픔으로 돕고자 할 때 진정한 구제가 이루어집니다.
빛의 자녀들은 예배로써나, 복음으로써나 그리고 생활로써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를 과연 시험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3. 빛의 자녀는 잠자는 데서 깨어 일어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빛을 ‘심판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13절,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책망을 받는 모든 일들이 ‘심판’으로 말미암아 다 드러날 것이요, 빛으로 나타나는 것마다 온전한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11-12절,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고 빛의 자녀들에게 경고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눅8: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눅12: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판 날 또는 주님이 빛을 비추실 때에는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1절에서 열매 없는 어두운 일에 참여 해왔던 믿는 자들은 이제 깨어나 그가 행악자들에 일에 참여해 왔기 때문에 그 죽은자 들 가운데서 일어나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안에서 행해야하고 열매없는 다른일을 하는 믿는 자들을 드러내어 그들도 빛안에서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해야한다. 바울은 잠자는 자는 곧 죽은 자라고 했습니다. 14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잠자는 자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말미암아 깨어서 일어나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잠자는자 죽은 자는 아무것도 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온 땅에 빛을 비추실 때가 되면, 세상 끝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그리스도께서 자녀들에게 빛을 비추실 때에 잠자는 자리에서 깨어 일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빛의 자녀가 빛되신 주님의 빛을 깨닫지 못하고 자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빛 되신 주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실 그 때가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잠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빛의 자녀로서 깨어 책망할 것 책망하고, 빛을 비출 것 비추는 삶을 살아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롬13:11-12,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권면합니다. 빛의 갑옷입니다. 갑옷을 언제 입습니까? 전쟁할 때 입니다. 우리가 어두움에 속해 있다가 빛의 자녀가 되는 순간 어둠과의 전쟁은 시작된 것입니다, 전쟁은 내가 하지않겠다고 중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치 않아도 상대가 쳐들어오면 치워야 하는 것이 전쟁입니다. 만약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갑옷을 입지않고 자고있으면 매일의 영적인 전쟁에 져 어두움에 속한일을 하며 살수 밖에 없습니다. 빛의 자녀 다운 삶을 살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께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잠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빛의 갑옷을 입고 전쟁할 준비를 하고 어둠의 일들과 싸워 이겨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쟁중임을 기억하셔야합니다. 사단이 던지는 교만의 창이 유혹의 화살, 의심의 총알, 미움의 칼날들이 우리를 향해 이미 던졌음을 기억하고 이것을 막아내기 위해 깨어 빛의 갑옷을 입어야합니다. 벡투더 바이블 선교단체에서 하는 세미나에 간적이 있는데 그들의 통계에 의하면 일주일에 네번이상 경건시간을 갖지 못하면 크리스찬다운 삶을 살수 없다고 합니다. 전쟁에 쓰러져 어두움의 일을행하며 산다는것입입니다. 잠자고 있으면 죽으자와 동일한 것입니다. 깨어 일어나 말씀을 통한 빛의 자녀로서의 빛의 갑옷을 입고 전쟁터로 나아가기위해 바랍니다. 이런 삶 속에 승리하여 빛의 자녀다은 삶을 살아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빛의 자녀는 열매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빛의 자녀는 시험하는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빛의 자녀는 깨어 일어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받는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 빛의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충성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빛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