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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문화 스크랩 간재 이덕홍선생
혜명 추천 0 조회 59 11.06.01 00: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간재의 가계

간재의 본관은 永川으로, 시조는 고려초 平章事를 지낸 高鬱君 文漢이고, 중시조(1세)는 克仁의 후손 영양군 대영이다. 그의 5대손 군기시 소윤 헌이 고려말에 벼슬을 버리고 영천에서 예안현 汾川(부내)으로 이거하면서부터 그의 자손이 안동 예안 지방을 중심으로 세거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안동(예안)입향조인 셈이다. 다시 5세를 내려와 훈련원 습독을 지낸 현우가 분천의 상류 川沙(내살미)에 卜居하였는데, 이 분이 곧 농암 현보선생의 동생으로 간재의 조부이다. 결국 간재는 농암 선생의 종손이 된다. 습독공이 살았던 내살미는 바로 퇴계 선생이 살았던 토계촌과는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그의 아들인 영해 교수를 지낸 충량(간재 선생의 부친)이 다시 천사에서 오천(옛 녹전 외내)으로 이거하였다(아래에 간략한 세계도 참조).


예안 부내 및 외내에 정착한 이래 영천 이씨는 농암 및 간재를 전후하여 안동지방의 有數한 世家로 정착하게 되었고, 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특히 농암과 퇴계는 다같이 안동부 예안현의 사족으로, 그들의 조상은 고려말 영천, 진보로부터 각각 이주해 와서 관의 비호, 묵인 아래 토지를 개척하고 노비를 늘려서 가세를 이루어
1), 선점한 토성인 광산 김씨, 봉화 금씨와 더불어 이른바 禮安 鄕內의 四大家門을 형성시켰다.
『도산급문제현록』에 등재된 인물들을 성씨별로 정리하면, 특히 퇴계의 자질이 많이 포함된 진성 이씨를 제외하고는 영천 이씨가 15명으로 가장 많다. 이는 물론 지역적으로 매우 가까운 탓도 있겠지만 퇴계와 농암, 나아가 진성 이씨와 영천 이씨 간의 누대에 걸친 세의에 힘입은 바 또한 크다고 본다. 따라서 간재는 지역적으로도 퇴계와 아주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유수한 가문과 중첩적인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던 당시의 사정을 고려해 볼 때 퇴계를 만나 학문의 길로 나아가기에 다른 여느 사람보다 비교적 우월한 위치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겠다.

2. 간재의 생애

간재의 생애는 대체로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生長期로, 출생하여 퇴계에게 급문하기 전까지의 약 18년간이다. 간재는 중종 36년(1541)에 榮川(영주) 外宅에서 출생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뜻을 가다듬어 글읽기에 열중하였고, 18세 때에 琴蘭秀로부터 『古文』을 배웠다.
둘째는 퇴계에로의 급문 수업기로, 퇴계에게 급문한 때로부터 퇴계가 하세하기까지의 약 12년간이다. 간재는 19세(명종 14년, 1559)에 퇴계 선생께 급문하여 30세 때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12년간을 질병이나 사고가 없는 날에는 언제나 시측하여 수업을 하면서
2) 학문뿐만 아니라 스승의 말씀과 행동까지도 독실히 배웠다.

셋째는 스승 추모와 동료간의 학문 교류기로, 퇴계의 사후부터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기 전까지의 약 7년간이다. 간재는 퇴계 선생이 서거하신 후 3년 동안은 「輓章」, 「墓誌敍」, 「墓誌銘」, 『溪山記善錄』, 「祭文」 등을 짓고 다른 제자들과 의논하여 尙德祠를 건립하는 등 주로 선생을 추모하는 사업에 전력하였다. 그 후 33세에서 38세까지의 약 5년 동안은 동료학자들과 서신을 통한 학문적 교류와 토론을 활발히 전개하고 저술도 하였다.
마지막은 사환기로, 천거로 관직에 나간 뒤로부터 하세할 때까지의 약 18년간이다. 간재는 38세 때 천거로 집경전 참봉에 제수된 뒤부터 56세로 1596년 모부인 박씨의 廬所에서 서거할 때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관직생활로 보내면서 적극적으로 직무를 수행하면서 틈틈이 저술 활동을 하였고, 임진왜란 중에는 왕세자와 선조 임금께 왜적을 격퇴하기 위한 자세한 전술을 건의하는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사후인 광해군 을묘(1615)년에 衛聖一等功臣으로 錄勳되어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1665(현종6)년 10월에 榮川(현 영주) 사림에서 위판을 오계정사에 봉안하고 묘호(廟號)를 ‘道存祠’라 하였다. 1691(숙종 17)년에 오계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711(숙종 37)에는 서원을 옛터에서 서쪽인 釜谷
3) 午向으로 이건하였다.
4)
우암 송시열과 갈암 이현일이 行狀을 짓고, 대사간 이당규가 墓碣銘을 지었다.
배(配)는 정부인 영양남씨(1545~1631)로 진사 應乾의 장녀이다.

3. 『간재집』의 간행경위와 내용
『간재(본)집』은 1752년 처음 활자로 印行하였고(이 초간본은 傳存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임), 초간본의 미흡한 점을 보완하여 1766년 8권 4책으로 재편하고 목판으로 중간하였다. 그리고 後刷本에는 「묘갈명」과 「행장」이 추각되어 있다. 『간재속집』은 1829년 5권 3책으로 재편하여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1985년에는 기존의 목판본은 물론 필사본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간재의 저술 등을 영인하여 『간재집』 상·하 2권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이 지금까지 간행된 책 중에서 간재와 관련된 가장 많은 자료를 담고 있다.
『간재집』 상에는 유정기의 「간재집 해제」에 이어 목판본 본집·속집이, 하에는 이인영의 서문에 이어 필사본 8책·부록이 수록되어 있다. 본집은 모두 8권인데, 권8은 年譜 등 부록이므로 저자의 시문은 모두 7권으로 편차되어 있다. 속집은 모두 5권인데, 『사서질의』·『주역질의』·『심경질의』(이함형과 합록)·『고문질의』·『가례주해』이다. 필사본은 모두 8책인데, 『계산기선록』·『사서질의』·『주역질의』·『주서절요강록』·『주서절요기의』·『심경강록』·『심경표제』이다. 끝의 부록에는 기존의 문집에 빠져 있는 간재와 관련된 자료를 첨부하였다.
『간재집』을 당대의 주요 계문의 문집과 비교해 보면 그 특징이 확연히 드러난다. 『간재집』에는 성리학적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또 대부분 이황에 관한 문장이다.
5) 특히 주석서가 많은 양을 차지하여 『간재집』의 반이 넘는다. 물론 『간재집』에도 다른 문집과 마찬가지로 시나 부가 있지만 분량도 비교적 적은 편이고, 대부분 도학적인 내용들이다. 또 『간재집』에도 만사·제문·묘지서·묘지명이 있지만 오직 이황에게 한 것뿐이고, 서기(序記)·발·찬·상량문·묘갈명·애사·행장 등은 아예 없다. 조목의 『월천집』의 경우에도 전체적으로 분량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적 내용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6) 이에 비하여 김성일의 『학봉집』이나 유성룡의 『서애집』의 경우에는 그들의 방대한 저술량에 비하여 성리학에 관한 내용은 비교적 적은 편이고 대신에 문학이나 정사·외교·국방 등에 관한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김성일이나 유성룡이 비교적 일찍 벼슬길에 들어서 생애의 대부분을 관직생활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李樹健의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一湖閣, 1995, 165~168쪽 및 239~269쪽을 참조.

2.『간재집』 상, 33~34쪽, 「간재집서」(이광정 찬),

“自童? 至老先生易?之日 十二年之間 非有甚疾病大事故 未嘗不在老先生之側….”

3.

『간재집』 상, 33~34쪽, 「간재집서」(이광정 찬), “自童? 至老先生易?之日 十二年之間 非有甚疾病大事故 未嘗不在老先生之側….”

4.이덕홍에 관한 전반적인 소개로는 이가원교수가 지은 『退溪學及其系譜的硏究』(퇴계학연구원, 1989) 293~300쪽을, 오계서원 연혁 및 향사에 관련된 것으로는 졸고 「오계서원 향사」(경상북도예절교육연구회, 『禮節敎育』 제6집, 도서출판 한빛, 1998, 103~138쪽)를 참고.

5. 柳正基는 『간재집』의 「해제」(14쪽)에서 “本集의 내용은 일반적인 문집이라기보다는 學問的인 論集이라고 함이 可할 것이다”라 하였고, 李家源은 『퇴계학보』 제13집 所載 「退陶弟子列傳 11. 艮齋 李德弘」(102쪽)에서 “『간재문집』 원집 7권은 英祖 壬申(1752)에 初刊되었는데, 그 중에 陶山에 관한 文字가 十에 八을 점유하였음이 특색이다”라 하였다. 또 『강좌 한국철학』(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예문서원, 1999, 180~181쪽)에서는 “이황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 인물로 유성룡·김성일·이덕홍 등을 들 수 있으며…… 영남학파의 철학사상에서 뚜렷한 특징이라 할 ‘理’ 중심적인 경향은 우선 이황의 제자 가운데서 유성룡이나 김성일 등 실제 정치에 관심을 기울였던 인물보다는 이황의 학설에 충실하게 理氣論을 전개했던 이덕홍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올해는 퇴계 선생 탄신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경상북도와 안동시 주최로 10월 5일에서 31일까지 약 1달간 세계유교문화축제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사실 퇴계 이황(1501~1570)은 안동이 낳은 세계적인 위인임에 틀림없다. 그는 뛰어난 학자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많은 문인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그의 문인록이라 할 수 있는 『陶山及門諸賢錄』은 퇴계 문하에 출입하였던 16·7세기 유림집단의 구성과 그들의 생애에 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비록 단순한 통계일지 몰라도, 이 문인록에 등재된 인물은 모두 309명으로, 그 중에서 대제학을 지낸 사람이 10명, 相臣을 지낸 사람이 10명, 諡號를 받은 사람이 37명이나 된다. 그러나 여기에 수록되지 않았지만 書札에 의해 퇴계에게 수업을 받았거나 宗師한 사실이 드러난 사람이나 퇴계를 스승으로 모신 후대의 私塾學者들까지 고려한다면 앞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1) 제자의 수가 이렇게 많았으므로 그들과 스승과의 관계도 다양하였음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스승과 제자간의 친소의 차이에 따라 또는 제자들의 자질이나 학문적 취향,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퇴계에 관해서는 철학·문학·敎學·정치사상 등 다방면에 걸쳐서 폭넓은 연구가 진행되어 온 것은 사실이나
2),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던 그의 제자들에 관하여는 아직도 부분적인 접근을 보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퇴계의 문인 중에서 12년간에 걸쳐 그를 가까이 모신 고제인 艮齋 李德弘(1541~1596)에 대한 연구도 예외는 아니다.
간재 이덕홍은 훈구파와 사림파 두 세력 사이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던 시기에 태어나, 사림파 주도의 사림정치가 궤도에 올라 그 속도를 가해 가던 시기에 중·장년기를 보냈고, 그 세기가 바뀌기 직전에 죽은 영남사림파의 嶺南士林派 家門의 후예이다.
3) 그는 이황의 문인 중에서 비교적 긴 세월에 걸쳐 그를 가까이 모신 高弟 중의 한 사람이기에 스승에게서 전수한 학문적 성과도 매우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易學에 조예가 깊어 陰陽互根의 원리에 따라 剝復의 이치를 賦로 읊었으며, 曆法에도 뛰어나 스승 퇴계의 명으로 제작한 선기옥형이 지금도 도산서원에 전해져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에는 왕세자와 선조에게 疏를 올려 왜적을 방어하는 계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간재는 실로 월천 조목에게 못지 않을 만큼 퇴계께 親炙를 입은 心悅·誠服한 제자로 性理學에 있어서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병략·산학·역법에서도 정통하였다.
4) 그의 문집인 『간재선생문집』
5)에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퇴계의 지극한 훈도 아래 평생에 걸쳐 퇴계의 학문을 계승하고 연구하는 일에 남다른 정열과 노력을 보였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문의 다른 고제들 예를 들면, 학봉 김성일·서애 류성룡·한강 정구 등에 비하여 간재에 대한 연구는 그리 활발하지 못한 편이었다. 간재에 대한 현재까지 연구는 이제 겨우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비교적 전체적인 관점에서 폭넓게 艮齋 李德弘에 대한 접근을 통해, 즉 그의 생애와 사제 및 교우관계는 물론 학문과 사상, 그리고 퇴계 문하에서의 그의 위상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써 일반인들도 이제 그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1.權五鳳, 『李退溪家書の總合的硏究』, 일본동경 中文出版社, 1989, 903~906 및 911~913쪽에서는 家書에 의해 제자로 파악된 사람으로는 閔蓍元·宋遺慶·李全仁·李寂 등 25人을, 私塾諸子錄에서는 權斗經·李瀷·丁若鏞등 9人을 들고 있다.

2.퇴계학은 70년대 이전에도 상당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퇴계 선생 사후 40주년이 되는 1970년부터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이후 100여권의 퇴계학 전문 연구서가 출판되었고, 석·박사 논문이 50여편, 개별적인 연구논문이 1천여편 이상 발표되었으며, 퇴계학 국제 학술대회에서 영어로 발표된 논문만도 200여 편에 이른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퇴계의 『聖學十圖』, 『四七論辨』이 번역 출간되었고, 중국에서는 『退溪全書今註今譯』(8冊)이 출판되기도 하였다(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퇴계학 연구논총』 1, 중문출판사, 1997, 「해제」에서 요약).

3.李秉烋, 「艮齋 李德弘의 時代와 生涯」, 『韓國의 哲學』 제25호,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1997, 1~2쪽의 요약.

4.李家源, 『退溪學及其系譜的硏究』(退溪學硏究叢書 弟一輯), 퇴계학연구원, 1989, 299쪽.

5.본고의 저본은 艮齋先生文集刊行委員會에서 간행한 「艮齋先生文集』(宣文出版社, 1985)으로 한다. 이 책은 상·하 2권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하에서는 『간재집』 상·하로 약칭한다.

 

 

1. 퇴계와의 사제관계
간재는 그의 나이 18세 되던 명종 13년(1558) 가을에 그의 학구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때 청량산에 머물면서 퇴계의 제자 琴蘭秀에게서 『고문』을 배웠고, 다음해 봄에 琴公이 惺惺齋에 머물러 있을 때 찾아가서 한 달 동안 있었는데, 琴公이 늘 탄식하여 말하기를, “人性은 처음에 선하지 않음이 없으나 私慾에 빠져 본체가 선한 줄 모르니 탄식하지 않으랴”하며 『소학』을 읽도록 권하였다.
1) 琴公으로 인하여 퇴계 문하에 들어가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가 그의 나이 19세로 명종 14년(1559)이었다.
간재가 처음으로 퇴계께 급문하였을 때 그 때까지 총각이었으므로 동문들이 그의 兒名을 부르자, 퇴계는 다른 제자들에게 그가 큰 인물이 될 것이므로 공경하라고 주의를 주기도 하였다. 이 때 퇴계는 그의 이름을 ‘德弘’으로 자를 ‘宏仲’으로 지어 주었으며, 또한 그의 이름 ‘德’자의 뜻을 풀이하여, ‘德’자는 ‘行’과 ‘直’과 ‘心’으로 이루어졌으니, ‘곧은 마음으로 행하라’는 뜻이라 설명하고 그 뜻을 체득하도록 타일렀다. 후에 퇴계는 그에게 『주역』 艮卦 彖辭에서 ‘그칠 때에 그치고 행할 때에 행함으로써 動靜에 때를 잃지 않는다’는 뜻인 ‘止’의 뜻을 취하여 ‘艮齋’라 호를 지어 주기도 하였다.
2) 물론 퇴계의 제자들 중에는, 간재 이외에도 李宗道의 아우의 처음 이름이 ‘遵道’였으나 퇴계가 이름을 바꾸라고 명하여 ‘善道’로 한 경우가 있고, 金生溟·琴應夾·琴應壎에게도 호를 지어 준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퇴계가 한 제자에게 이름·자·호의 셋 모두를 지어 준 경우는 많은 제자 중에서도 아마 간재가 유일한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퇴계가 간재에게 기울인 사랑과 기대가 남달랐던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군자정(영주 평은 소재)>

간재가 일찍이 재질이 노둔함을 근심하니, 퇴계는 “공자의 문하에서 도를 전한 사람은 바로 자질이 노둔한 曾氏(증자)이다. 노둔함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다만 노둔하고 독실하지 못하면, 이것이 바로 걱정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敎學詩 一絶을 지어 주었고, 주자가 여릉에 사는 제자와 친구에게 보냈언 편지를 손수 베껴서 간재에게 보내 면학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어느날 간재가 월천 조목과 함께 퇴계 선생을 모시고 앉아 있으니, 퇴계는 “자네들이 『주역』의 효상(爻象)의 뜻을 정미하게 살펴서 자못 소장의 이치를 깨달았으니 여러 벗들에게 구해 보아도 (자네들 만한 사람을) 쉽게 얻지는 못하였네. 부지런히 힘써서 나의 여망에 부응해 주게.”
3) 라고 말하면서, 가장 아끼던 두 高弟에게 은밀히 당부하고 격려하기도 하였다. 또 일찍이 스승의 명으로 천체운동을 측정하는 기구인 선기옥형(현재 도산서원 옥진각에 소장되어 있음)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 30세 때에 오천의 태조봉 남쪽 기슭에 오계정사를 창건하여 생도를 가르쳤는데, 그 堂名과 齋號는 모두 퇴계께 품정한 것이다. 간재는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2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측근에서 늘 스승을 모시고 독실히 학업에 정진하면서, 의문이 나면 질의하고 얻은 것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겼다. 현재 『간재집』에 이와 관련된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간재가 퇴계께 비교적 많이 질의했던 책은 『사서』·『주역』·『가례』·『심경』·『주자서절요』 등이다. 이러한 학문적인 질의 문답을 통하여 간재와 퇴계 사이는 점점 더 깊은 사제관계가 맺어졌다. 퇴계가 임종시 간재에게 서적을 관리하라는 유명을 남긴 것을
4) 보아도 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
간재는 장례 때에 매우 슬퍼서

伊洛心傳海外身 두 정자의 心法을 전수하신 동방 출신으로
丘林獨樂太平春 숲 속의 언덕에서 홀로 태평한 봄 즐기셨네.
躬行敬義光前哲 몸소 敬과 義를 실천하시어 전대의 선인들처럼 빛나셨고
頭揭明誠啓後人 남보다 먼저 明과 誠을 밝히시어 후인들을 깨우쳐 주셨네.
時雨化中群物茁 때맞추어 내린 비 씨앗을 싹틔워 많은 것을 자라게 하듯
仁風及處萬生新 어지신 풍화가 미치는 곳엔 만 가지 생명이 새로워졌는데,
那知一夕山齋冷 산재가 하룻밤 새 썰렁해 질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執?今朝漏滿巾 상여줄 잡은 이 아침에 눈물이 손수건에 가득합니다.
5)

라는 만장을 지어, 스승인 퇴계를 추모하였다.
그는 스승의 사후에 ‘心喪三年’의 예를 지켰고, 「묘지서」·「묘지명」·『계산기선록』 등을 지었으며, 다른 제자들과 의논하여 상덕사를 건립하는 등 추모사업에도 전력하였다. 이러한 퇴계와 간재의 돈독한 사제관계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적지 않다.
2. 동문과의 교우관계
『간재집』에 나오는 56인과 타인의 문집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인물 22인을 합하면 문헌상으로 간재가 접촉한 인물은 아래의 78인 정도이다.

金富弼·金富儀·金誠一·金明一·白見龍·朴允誠·李安道·金士元·具贊祿·金富倫·朴?·南致利·金隆(道盛)·權好 文·權宇(伊溪)·李교·金希仲·尹興宗(採蓮)·柳淇·柳成龍·李國弼·姜浩源(松巖)·任屹·李希淸(?)·金圻·許?·趙穆·裵三益·盧守愼·孫興禮(君立)·李叔樑·琴蘭秀·鄭士誠·柳雲龍·柳景文(仲淹)·柳應霖(?)·金仁甫(?)·權景龍(施伯)·琴應壎·李咸亨·李寂·琴輔·張謹·李潑(景涵)·金垓·金蓋國·張汝山直(?)·金?·禹性傳·鄭士信·李詠道·金就礪·禹世臣·李三熹(?)·申之悌·閔應祺·趙振·李文樑·吳守盈·琴應夾·權春蘭·宋言愼·金澤龍·裵應?·文緯世·朴愼·李宗仁(改諱 華春)·鄭琢·琴悌筍·洪?·李純仁·李浩·洪可信·兪大脩·金瞻·許?·朴宜·權應時

위의 인물들 중에서 姜浩源(松巖)·任屹 등 22인은 퇴계 문인이 아니나, 나머지 56인은 모두 『도산급문제현록』에서 그 이름이 찾아지는 동문들이란 점에 큰 특징이 있다. 또 동문 56인 중에서 대부분은 지역적으로 예안·안동 및 그 인근에 거주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볼 때 간재는 퇴계의 주요문인들과는 폭넓은 교류를 하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
간재는 퇴계의 사후 동문들과 함께 퇴계집의 교정이나 상덕사의 창건 등 스승추모에 힘을 쏟았다. 아울러 그의 나이 30대 무렵부터 주로 동문들과 강학 내지 왕복토론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퇴계의 손자 안도와는 죽마고우로서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아주 긴밀한 사이였고, 나아가 유운룡과 『역학계몽』을 강론하였고, 조목과 ‘未發已發’의 문제를 변론하였으며, 또한 권우와도 활발하게 서신을 통하여 학문적으로 왕복 토론한 것이 많다. 뿐만 아니라 금란수·남치리·정사성·김해·유성룡 등과 함께 강학하거나 서신을 주고받았다.
동학 趙振이 서울에서 내려와 함께 공부하다 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었을 때 부지런히 치료하여 병을 낳게 하기도 하였다. 간재가 종묘직장으로 재직시, 종 伊山이 종묘의 金銀寶器를 훔쳐내고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종묘에 불을 놓은 사건으로 평은역에 유배되자 유성룡·김성일·우성전 등의 많은 동문들이 그를 위로하고 도와준 것
6)을 보아도 그가 동료간에 매우 신망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또 무엇보다도 동문간에 그의 학문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갈암 이현이이 찬한 「간재행장」에서

賁趾 先生 南致利義仲이 일찍이 공과 더불어 『역』 復卦를 논하다가 마침내 말하기를 “오늘 그대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라 하였고, 松巢 權宇와 謙巖 柳雲龍公 또한 ‘그대에게 질의하여 의혹을 떨쳤다’는 말이 있다. 그가 선배
7)들에게 推重된 바가 이와 같았다.
8)

라고 한 것으로 보아 동료들간에 그가 학문적으로 推重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간재와 학문적으로 많이 교유한 사람은 조목과 권우인데, 그의 문집에는 이들 동문과 주고받은 자료들이 실려 있다. 간재가 죽자, 월천 조목은

常恨東西遠 동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항상 한스러웠는데
那知隔九泉 어찌 九泉과 격할 줄을 알았으리요
斯文今已矣 斯文(儒學)은 이제 끝났도다
回首涕漣漣 머리를 돌려보니 눈물만 흐르네
9)

라는 만사를 지어, 동학인 간재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였다.

 

 

간재는 퇴계의 성리학을 그대로 전수하였으면서도 나아가 심성론에 대해 음양의 역학적 논리를 관통시키는 독자적 면모를 구축하였다. 간재는 33세 때 조목과 未發已發의 문제를 변론하였고, 權宇와의 토론에서 性과 道의 체용관계를 분석하면서 性體道用說을 전제하고, 이를 솔개에 비유하여 해명하였다. 간재는 36세 때 조목을 중심으로 여강서원에서 명 진청란의 『학부통변』의 강론에 참여하였다가, 이 책에 수록된 心圖를 분석하여 비판한 「陳淸瀾學?通辨心圖說辨」을 지었다. 그 일부를 보자.

청란은 인용한 朱子의 4개조의 理에 있어서 모두 道心을 이미 발한 상태에 대해서만 말하였고 性과 관련되어 있는 점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고 청란은 억지도 道心을 性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청란이 性일 已發로 보고 惻隱·羞惡를 性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일까? 아니면 性·情, 體·用과 未發·已發의 구분을 알지 못하고 道心을 未發로 알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性을 已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니 그 폐단이 결국 釋氏의 心을 性으로 보는 병폐에 떨어지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청란은 우서(虞書)의 本意를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자의 4개조의 뜻도 알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청란은 비록 힘써 주자를 높였으면서도 실제로는 그 마음에 다소 불만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니 그 잘못이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1)

그는 변해의 마무리에서 진청란은 性情·體用, 未發·已發이라는 성리학에서의 기본구조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혹평하였다. 즉 진청란은 性을 道心으로서 이해하고 未發의 性을 已發로 오해하고 道心인 惻隱·羞惡를 性으로 착각하는 터무니없는 과오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그리하여 陳淸瀾은 결과적으로 朱子를 찬양한다는 것이 도리어 朱子에 누를 끼치고 있다고 하였다.
2) 간재가 성리학의 근본문제에 있어 진청란의 오류를 명쾌하게 辨破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한 마디로 간재의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얼마나 깊었나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간재는 퇴계의 학문적 핵심문제였던 修養論의 문제를 계승하여 광범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敬, 涵養, 整齊嚴肅은 모두 주자에게서 퇴계를 거쳐 그가 계승하였던 居敬 수양론의 핵심개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知·行의 개념을 知의 內·外, 淺·深과 行의 動·精, 先·後로 분석함으로써 수양론의 정신적 구조를 해명하고 있다.
간재가 『소학』에서 학문적 계기를 발견하였고, 『대학』에서 학문의 체계와 방향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의 시에서 엿볼 수 있고, 『대학』에 대표적 쟁점으로서 ‘八條目’과 ‘?矩’의 개념문제를 찾아볼 수 있다. 간재는 퇴계문하에서 강의를 들었던 『주역』과 『역하계몽』에 대해 정밀하게 질의하여 『주역질의』를 이루면서 역학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켰다. 간재는 河圖의 틀에 의거하여 「부부유별도」를 창안하기도 했거니와 賦나 詩를 통해 易理를 吟詠하였으나, 書나 辨·說·圖 등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 학문세계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특히 「陳淸瀾學?通辨心圖辨」이란 한 편의 글은 간재의 성리학적 조예를 雄辯하는 것이지마는 나아가 당시 우리나라의 성리학적 학문 수준이 중국을 능가하는 높은 수준의 것이었음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與趙月川士敬辨未發已發」은 다 같은 퇴계 문하의 동문간에 있었던 학문적 교류이다. 조월천은 퇴계 문하의 고제이며 간재보다는 17년 연상의 선배이다. 그러한 월천이 간재에게 性理에 대한 문의를 했다는 것은 당시 동문간에 있어서도 이미 간재의 성리학적 조예가 널리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李堂揆가 찬한 간재의 「묘갈명」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南賁趾가 公과 역의 復卦에 관하여 논하다가 ‘내 무릎을 꿇고 또 무릎을 꿇는다’는 구절이 있다.”
3)고 하였다. 南賁趾는 퇴계 문하에서 易에 밝기로 이름난 사람이다. 그 南賁趾가 무릎을 거듭 꿇는다고 하였으니 간재의 역에 대한 조예를 가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역시 「묘갈명」에서 “權松巢는 편지에서 ‘의리에 밝지 못한 곳이 있어 月川에게 질의하여 보았는데 그 가르침이 분명하지 못하여 그대에게 가르침을 바랍니다.’고 했고, 柳謙菴은 ‘스승을 잃은 후 비록 의문이 나고 알지 못하는 바가 있어도 문의하여 바로잡을 곳이 없으니, 청하건대 『계몽』에 관하여 물어 보고자 합니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당시 同僚諸友 사이에서 얼마나 받들렸던가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4) 권송소는 간재보다 11년이나 年下인 후배이나 유겸암은 2년 年上의 선배이다. 이들이 모두 학문상 의문이 있을 때 간재에게 질의해 왔던 것이니 이당규의 표현대로 당시 同僚諸友들 사이에 있어서 간재의 성리학적 조예가 널리 인정되고 높이 평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학문내용이 거의 성리학에 관한 것이었으니, 여기서 간재의 성리학 세계가 얼마나 깊고 넓었던가를 알 수 있다.

 

영조 19년(1743) 이광정이 쓴 서문에는 “간재 선생은 어릴 때부터 老先生(이황)이 서거하실 때까지 12년간을 질병이나 사고가 없는 날에는 언제나 侍側하였다. 노선생이 이름을 지어 주시고 큰 기대를 하셨고, 선기옥형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서적의 관리도 맡기셨다. 선생의 학문은 性情과 理數에 대해서 모두 정밀하게 사색하여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질문하고 질문해서 이해하면 반드시 기록하셨다.”하였고, 순조 29년(1829)에 유심춘이 쓴 발문에도 “간재 이선생은 퇴도 노선생의 문하에서 조석으로 책을 가지고 질의하기에 종시(終始)를 한결 같이 하시었다. … 그 질의하고 주해한 여러 편은 사우간에서 강론한 것들을 수정해서 만들었는데 의심이 있으면 반드시 질의하고 얻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기록하였으니 精粗와 本末이 구비해서 빠뜨림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급문하여 이황의 역책할 때까지 12년간을 질병이나 사고가 없는 날에는 책을 가지고 항상 시측하여 꾸준히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질의하고 질의해서 얻은 것은 반드시 기록하였으므로 많은 주석서를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 『간재집』에는 상당한 분량의 주석서들이 실려 있다. 즉 『간재집』 상에는 목판본인 『사서질의』, 『주역질의』, 『심경질의』(이함형과의 합록), 『고문질의』, 『가례주해』가 실려 있고, 『간재집』 하에는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인 『사서질의』, 『주역질의』,『주서절요강록』, 『주서절요기의』, 『심경강록』, 『심경표제』가 실려 있다. 필사본들은 독립적인 저작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목판본보다는 분량도 많고, 요약되어 있지 않으며, 주가 더욱 상세하고, 간혹 토와 한글 번역들이 있어서 고어연구에 도움이 된다. 간재의 『사서질의』는 스승에게서 질의하여 교시받은 내용을 노트한 것으로, 이황의 『四書釋義』 手藁本이 임란의 병화로 소실되자 그것을 간행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었고, 『주역질의』는 간재의 역학에 대한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독창적인 내용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고문질의』는 당시의 『고문진보』 주석 상황을 파악하는데 유용한 자료이고, 『가례주해』는 퇴계학파에서 처음으로 저술된 가례주석서로서, 이어서 등장하는 가례주석서의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주서절요』에 관련된 주석서로는 『주서절요강록』과 『주서절요기의』가 있다. 특히 전자는 주자 서찰 이해의 필수참고서로서, 주자학을 공부하던 당시의 학자들이 다투어 필사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친 책이다. 『심경』과 관련된 주석서로는 『심경질의』, 『심경강록』, 『심경표제』의 3종이 있다. 특히 『심경질의』는 그의 주석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의 하나로서, 조선 후기 유학사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心經質疑』는 『심경』에 관해 이황이 강의한 것
1)을 『심경부주』의 편차에 맞추어 정리한 것으로, 『간재속집』에 수록되어 있다. 간재와 천산재 이함형공의 합록으로 스승 퇴계의 교정을 거친 것이라 한다. 그 내용은 주로 『心經』의 要句와 人名을 해설한 것으로, 李咸亨이 이덕홍의 기록을 함께 참고하여 정리한 『心經講錄』과 대부분 일치한다. 책머리에 序·贊·心學圖 등이 있고, 제1편에는 人心道心章 등 13장, 제2편에는 誠意章 등 8장, 제3편에는 牛山之木章 등 7장, 제4편에는 鷄鳴而起章 등 9장 및 後論說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心經質疑』는 간재의 주석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의 하나로서, 그 뛰어난 해설과 정연한 논지로 후인들이 다투어 필사하기도 하였다. 그 자체만으로 권3 전체를 내용과 분량에서 다른 질의서를 압도하고 있으며, 孝宗 년간에 조정의 경연에서 이 책을 참고 교재로 활용하였고, 다시 숙종 연간에 국왕의 명으로 송시열 등이 보완하여 『心經附註釋疑』로 간행하는 등, 조선후기 유학사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내용은 『心經附註』에 나오는 인물들과 일부 용어들에 대한 설명이 주가 되고 있으며, 군데군데 이황 자신의 성리학에 대한 견해가 첨가되어 있다. 그 후에도 이 책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 정정 내지 보완하여 저술된 책도 있다. 예를 들면 이 책의 145곳의 오류
2)를 바로 잡은 曺好益의 『心經質疑考誤』, 이 책에서 누락된 부분과 해석하기 어려운 자구를 뽑아 주석을 붙인 李象靖의 『心經講錄刊補』 등이 대표적이다. 『심경질의』를 비롯한 간재유고의 편찬·정리에 특히 힘쓴 이는 간재의 외증손인 金萬烋였다.

 

간재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兵略·算學·曆法에도 정통하였다. 역법에 있어서는 선기옥형의 제조도 있었거니와 「육십갑자음양변」·「연월일시운세설」 등이 있고, 산학에는 「산법도」가 있으며, 병략에는 「상왕세자서」와 「상행재소」에서 왜적을 방어하는 계책을 진술한 것이 있다. 이는 모두 간재가 학문적 성과를 현실에 적용시키는데 중점을 둔 예로서 그가 얼마나 실용성을 중시하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간재가 스승의 명으로 만든 선기옥형
1)은 지금 도산서원 유물전시관인 옥진각에 보관되어 잇는데, 이는 현재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을 보인다. 간재가 약관의 나이에 이와 같은 과학기구를 제작하였다는 것은 자연과학 분야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간재는 「산법도」를 작성하기도 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언제 작성하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영춘현감에 부임한 계사년(1593) 4월 이후로 추정된다. 이 「산법도」는 간재의 산학에 대한 깊이를 알 수 있는 글로, 그가 목민관으로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였음을 방증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또한 간재는 상소문에서 지상전을 위해서 왜군의 전술과 병기의 장단점을 정확히 분석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 새로운 陣法을 고안하고 「陣械圖」를 작성하였으며, 이 진법에 따라 오늘날의 전차에 해당하는 龜甲車를 맨 앞에 세우게 하고, 적의 조총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활은 물론 鐵打와 稜杖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도록 건의하였고, 또 해상전을 위해서는 龜甲船을 제작하고 왜선의 정박을 막기 위해 沈水眞木箭을 설치하도록 제안하였다. 그 중에서 귀갑선에 관한 부분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龜甲船(거북선)의 체제는 등에는 창과 칼 같은 것을 붙이고, 뱃머리에는 쇠뇌(弩)를 매복시키고
2), 허리에는 작은 板屋
3)을 지어 射手를 그 속에 두고, 옆으로는 射穴(사혈)
4)을 내고 아래로는 배의 내부로 통하게 합니다. 중간에는 銃筒
5)과 큰 도끼를 싣고서 더러는 타파하고 더러는 탄환을 쏘고 더러는 활을 쏘고 더러는 친다면 적의 옴이 비록 많더라도 반드시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살(箭, 목책)과 이 배(船, 龜甲船)를 마련하는 데 그 공력은 매우 적으나 그 효과는 매우 크므로 아마 각 관원으로 하여금 한 달의 功力만 들이면 세상에 없는 효과를 거둘 것입니다. 엎드려 원컨대 전하(聖明)께서는 오늘날 전에 없던 욕을 당하신 것을 경계하시어 미천한 사람의 하찮은 말이나마 잊지 마시고 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바로잡은 뒤에 특히 首末(수미)을 아는 자에게 명하시어 그것(귀갑선)을 선교하고 檢督하여 뒷날의 근심을 막으십시오.
그런데, 간재의 귀갑선 관련기록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李家源은 이미 태종 때에 이미 있었던 귀갑선을 간재가 임란을 당하여 사용할 것을 진언한 것으로 보아, 마치 태종 때에 있었던 龜船과 간재가 창안한 龜甲船을 거의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며, 권오봉 역시 간재가 임란을 당하여 옛날에 존재했던 귀선을 복원한 것으로 보고 있다. ‘복원’은 옛날에 존재하던 물건을 원래대로 만든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그런데, 간재는 종래의 거북 모양의 배라는 의미인 ‘龜船’과는 다른 의미를 함축한 ‘龜甲船’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는 점, 굳이 이해를 돕기 위해 상소문의 말미에 비록 간략하지만 거북선 그림으로는 최초인 「龜甲船圖」를 첨부하였다는 점, 나아가 무엇보다도 간재 자신이 분명히 ‘앞의 것을 이어받은 바도 없고, 뒤에 시험한 바도 없습니다(前無所承 後無所試).’라 하여 직접 창안하였음을 밝힌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위의 두 설은 다소 수긍하기 어렵다. 朴惠一은 간재의 귀갑선이 이순신의 창제귀선과는 구조상 판이하게 다른 것 같다고 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이순신의 창제귀선에 관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두 거북선을 대비해 볼 수 없는 실정이라 쉽게 단언할 수는 없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대동소이하다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특히 간재가 임진왜란을 만나 거북선의 원형설계도로 추측되고 있는 「龜甲船圖」를 제작한 것은 놀랄 만한 사실이다. 이덕홍이 설계한 귀갑선도가 거북선의 원형여부는 학계의 인정을 못 받고 있지만 안동유림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거의 확실하다는 것이다. 유림사회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덕홍이 제작한 거북선의 설계도는 柳成龍에게 넘어가 이순신에게 보내졌다는 설과 이황의 문인이며 이순신의 형인 李堯臣을 통해 이순신에게 전해졌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덕홍의 귀갑선도와 이순신의 거북선의 상관관계를 확증할 수 있는 사료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6)
여하튼 당시 학자들이 대부분 성리학에만 전념하고 과학이나 기타 이용 후생을 위한 기술적 지식을 추구하는 데에는 비교적 무관심했던 것에 비한다면 위의 간재의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종전에는 퇴계의 주요 제자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간재를 크게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마 간재의 경우 나름대로의 학맥을 이어가지 못해 정치적으로 크게 성공한 인물이 아닌데다가 퇴계 문인들에 대한 연구도 미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월천 조목과 간재 이덕홍 두 사람은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스승을 가까이서 모시고 독실하게 스승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면서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스승의 사후에는 心喪三年의 예를 다하였고, 나아가 문집의 교정이나 스승의 언행기록을 비롯한 추모사업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이들의 일생에 있어서 스승 퇴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어느 제자들보다 컸던 관계로 이들의 저술에는 스승 퇴계와 관련된 부분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마땅한 일인지도 모른다. 월천과 간재는 퇴계께 親炙를 입고 心悅·誠服한 제자로 학풍과 삶의 자취상 스승에게 가장 근접했으므로, 마치 孔門의 顔子(月川)나 曾子(艮齋)와 같은 위치로 비유된다. 삶의 자취상 스승에게 가장 근접한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퇴계의 제자를 논하는 것은 後響에 치우친 견해로서 합당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근자에는 간재의 학문적 업적을 인정하여 퇴계 문하에서 상당히 비중있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금장태는 『退溪學派의 思想』Ⅰ(집문당, 1996)에서 퇴계학파의 비중 높은 인물로, 퇴계로부터 직접 훈도를 받은 제자들 가운데 趙穆·金誠一·李德弘·柳成龍·鄭逑·曺好益의 6명을 골라 다루었다. 이 책에서는 관련인물의 철학사상을 중심으로 검토하여 이미 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에서는 『退溪門下 6哲의 삶과 사상』(예문서원, 1999)이라는 책을 간행하였다. 이 책에 나오는 6명은 우연히도 금장태의 『退溪學派의 思想』Ⅰ에 나오는 퇴계제자와 일치하지만, 철학·문학·교육·예론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분석 검토한 내용을 실은 것이 특징이다.
퇴계문하에서 간재의 위상은 퇴계가 보낸 편지의 수, 『퇴계집』 편찬시 관여도, 『퇴계언행록』에 실린 기록 건수, 퇴계와 관련된 추모 기록, 사승 관계기록(끝의 표참조) 등 여러 가지 기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살피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앞에서 간재는 퇴계집에 관여하였음은 물론 퇴계 사후 많은 추모기록을 남겼으며 문인들 중에서도 많은 주석서를 남겼다는 것은 언급하였으므로 이하에서는 퇴계가 보낸 편지의 수, 『퇴계언행록』에 실린 기록 건수, 사승 관계 기록을 통해 퇴계문하에서 간재의 위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이황이 제자에게 보낸 편지 수(共覽 포함)
1)를 보면, 100통 이상은 이정·조목·정유일·이준·이안도의 5명이고, 51~99통은 기대승·황준량·김부륜·구봉령·김취려·금란수·이덕홍·이완의 8명이다. 이 중에서 이황의 장자인 이준, 장손인 이안도 및 조카인 이완의 3명은 모두 지극히 가까운 혈족으로 학문적 논의가 아니더라도 안부편지나 일처리를 위한 편지를 자주 할 수밖에 없는 경우이므로 논의에서 제외하면, 이황으로부터 51통 이상을 받은 제자는 모두 10명이다. 또 권오봉은 학술상 중요한 주제를 논하였거나 問目과 書簡의 편수가 많은 10인으로 이문량·기대승·황준량·이정·조목·김취려·우성전·구봉령·이덕홍·금란수를 들었는데
2), 이 중에서 이문량은 친구이므로 제외하면 제자는 모두 9명이다.
다음에는 『퇴계언행록』에 과연 어느 정도의 기록을 남겼느냐를 알아보자. 퇴계언행록에는 『퇴계어록』(임영 찬)·『퇴계선생언행총록』(권두경 찬)·『퇴계선생언행록』(이수연 찬)·『이자수어』(이익 찬)의 4종이 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퇴계선생언행총록』
3)과 『퇴계선생언행록』
4)에 나타난 문인별 기록을 상위 10인까지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위의 문인별 기록 통계에서 보면, 다른 제자들보다 김성일과 이덕홍이 압도적으로 많다. 가장 건수가 많은 것이 김성일이고, 다음으로는 이덕홍이다. 이 두 사람의 기록건수를 합하면 310건과 259건으로 거의 전 기록(663건과 556건)의 반수를 차지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퇴계문인록이나 개인문집에서 이황과의 사승관계를 살펴보자. 이는 물론 사승관계가 긴밀할수록 퇴계문인록이나 개인문집에서 이황과의 사승관계를 나타내는 글이 많이 실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주요 문인 6명에 한해, 1854년에 도산서원에서 간행된 갑인본 『도산급문제현록』(계명대 한문학연구회 간행)을 기초로 문인록에 기초되어 있는 사승관계 자료와 각 개인의 문집에 기술되어 있는 이황과의 사승관계 자료를 간략히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위의 표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조목이나 이덕홍의 경우는 『도산급문제현록』이나 개인의 문집에서 이황과의 사승관계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겼고, 김성일과 유성룡은 그 다음으로 많으며, 정구와 조호익은 매우 적은 편이다.
위의 몇 가지 예에서 살펴보더라도 간재는 퇴계문인들 중에서 상당한 비중을 지닌 인물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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